광기와 우연의 역사
슈테판 츠바이크 지음, 안인희 옮김 / 휴머니스트 / 202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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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테판 츠바이크의 명성 중 가장 유명한 것은 아마도 타고난 이야기꾼이라는 것.

이 책에서도 그 재능은 여지없이 당당하게 거칠것 없이 드러난다.

서예로 비유하자면 일필휘지라고 할까?

뭐 정신을 차릴 틈도 없이 뭔가가 한바탕 확 휩쓸고 지나간 분위기다.

책을 읽으면서 뭘 곱씹거나 되새기거나 그런거? 할 시간이 없다.

숨이 목끝까지 탁탁 막히며 헉헉거리며 읽어야 한다.

 

심지어 '빙의'까지 해야 한다.

마치 내가 메흐메트인듯, 헨델인듯, 톨스토이인듯 그렇게....

좋게 이야기하면 역사이야기에 확 빠져들어가고,

다르게 본다면 역사를 냉정하게 성찰하지 못하고 작가의 의도와 생각대로 휘말려버린다고도 하겠다.

 

예를 든다면 츠바이크는 이 책에서 나폴레옹이 워털루 전투에서 패하고 마지막 몰락을 하게 된데에는 그루시라고 하는 그의 부관이 너무도 평범하여 제대로 된 판단을 하지 못했던데 큰 원인이 있다고 얘기한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보자.

그것이 당시의 나폴레옹의 한계였다.

스스로 판단을 내리고 나폴레옹의 의중을 알아채는 뛰어난 부관이 있을 수 없는 상황, 평범하게 성실할 뿐인 자에게 대담한 영감을 요구하는 직위를 맡길 수 밖에 없었던 그것이 몰락 앞의 나폴레옹의 처지였던 것이다.

그러고 나면 나폴레옹의 실패는 너무도 당연히 나폴레옹의 책임이어야 하는데.....

불쌍한 그루시가 도대체 뭘 잘못했느냐 말이다.

애초부터 능력에 맞지 않는 임무를 맡긴 상관이데 말이다.

그런데 츠바이크의 글을 읽다보면 그게 또 그럴싸해 보인다.

이게 이런 역사책들의 가장 큰 장점이자 치명적인 단점이라 할 수 있다.

역사에 흥미를 가지게 해준다는 장점이 있지만, 과도한 동일시로 역사를 작가의 뜻대로 단면만으로 보게 만든다는 단점이 그것이다.

그럴듯해 보이는 것이 다는 아니다.

 

츠바이크는 선택한 역사적 장면은 모두 12개이다.

이것이 어떤 기준인지는 사실 명확하지 않다.

내 생각엔 그저 작가 개인적인 관심사 또는 작가가 가장 잘 쓸 수 있었던 장면 정도가 아니였을까싶다.

딱히 기준이랄게 보이지 않는다.

어쨌든 모든 장면이 흥미로운 것은 맞다.

하지만 해당 사건에 대해 사전 지식이 좀 있는 경우는 몰입감이 떨어진다.

왜냐하면 츠바이크에게 휘말려 가면서도 내가 원래 알고 있는 지식과 생각을 계속 떠올리면서 어 이거 맞아 진짜 뭐 이런 브레이크를 걸어주게 되더라.

결국 작가인 츠바이크가 의도한 독서를 하지 못하는 것이다.

 

 

다만 내가 사전 지식이 하나도 없는 경우의 몰입감은 상당하다.

내게는

대양을 건넌 최초의 말 ―1858년 7월 28일, 대서양 해저 케이블 설치가 그러했다.

역사적 사실로 해저 케이블이 설치되고 전신이 연결되고, 곧 대양간에 전화가 가설되고.....

이론으로야 그 역사적 발전과정을 알고 있었지만 문과 감성 충만한 나는 그것의 기술적 설치과정에 대해서는 생각해본적이 없다.

그런데 정말 한 번 상상해보자. 대서양의 그 해저에 케이블을 늘어뜨려서 전신을 연결한다?

그 시절에 누가 들어도 미친 소리였지 않을까?

유럽에서 아메리카까지 대서양에 깔 끊어지지 않은 케이블을 준비하고, 그 케이블을 실어나를 배를 마련하고, 그 케이블을 바다에 빠뜨리면서 서서히 항해를 하고....

그냥 미친짓이었을 것 같은데 그 미친 짓을 거듭되는 실패에도 불구하고 결국은 해내고 만 필드라는 인물을 읽으면서는 정말 이 인물에 폭 빠져 츠바이크가 원하는 바로 그 감성으로 책을 읽었다.

 

그래서 결론은?

이 책을 읽을 때는 조심하시라.

츠바이크가 살짝 파놓은 뻥의 세계에 빠져버릴 수 도 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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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회한다고 잃어버린 순간이 되돌아오지는 않는다. 그것은역사에서나 한 인간의 삶에서나 마찬가지의 진리다. 소홀히 했던단 한 시간은 1,000년을 주어도 되살 수 없는 것이다.
- P48

에스파냐 정복자들의 성격과 행동 방식에는 설명하기 힘든 이중성이 존재한다. 어떤 기독교도보다도 경건하고 신심이 깊어 영혼으로부터 하나님을 부르는 그들이었지만, 하나님의 이름으로역사상 가장 잔혹하고 비인간적인 만행을 저지른 것 또한 그들이었다. 가장 위대하고 영웅적인 용기와 희생의 위업을 달성할 능력을 가지고서 고통을 참아낼 수 있으면서도 그들은 가장 뻔뻔스러운 방식으로 서로를 속이고 기만했다. 그런가 하면 경멸할 만한행동 한가운데서 다시 탁월한 명예의 감정을 보여주었으며, 자기과업의 역사적 위대성에 대해서는 경탄할 만한 놀라운 감각을 보여주었다.- P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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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 투 더 1919 - 신문기자, 100년 전으로 가다
오승훈 외 지음 / 철수와영희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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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3.1운동에 대해 얼마나 알까요?

예전에 삼일절을 삼점일절이라고 읽는 아이들 때문에 온 나라가 한번 떠들석한적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 위대하고도 가슴아픈 역사적 사건에 대해서 우리가 명칭말고 아는 것을 얘기해보자면 3분정도를 채우기도 쉽지는 않을듯 보입니다.

 

여기 책 한 권이 있습니다.

삼일운동의 준비과정에서부터 실제 계획과 진행과정, 결과, 이후 역사적 의미까지를 씨줄로 하고,

1919년의 한국 민중의 삶의 형태와 다른 나라들의 상황까지를 날줄로 엮어 3.1운동이라는 거대한 판을 짜보았습니다.

우리가 3.1운동에 알아야할 거의 모든 것들이 담겨있네요.

 

1919년은 조선이 식민지가 된지 10년째에 들어서던 해입니다.

이 해의 시작은 심상치 않았습니다.

그 전해에 끝난 제1차 세계대전의 종전처리과정에서 미국 대통령이었던 윌슨이 민족자결주의를 주장하였지요.

물론 이건 패전국인 독일, 오스트리아, 오스만 제국을 분해하기 위한 정책이었지만, 일제의 식민지배에 고통받던 우리 민족에게는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이었을겁니다.

오죽하면 3.1운동 와중에는 미국의 윌슨 대통령이 직접 우리를 도와주기 위해 비행기를 타고 오고 있다는 유언비어까지 나돌았을까요.

 

흔히 3.1운동이라는 명칭 때문에 사람들은 이 거대한 운동이 3월 1일 하루 또는 3월 초 며칠간에 걸친 만세운동이었다고 오해들을 합니다.

하지만 실제로는 1919년 1월 부터 국내, 중국 상해, 만주, 연해주, 일본, 미국 등 우리 민족이 있는 곳이면 모든 곳에서 독립의사를 표현하기 위한 준비를 시작했고, 민족운동가들은 긴박하게 모이고 계획하고 연대했습니다.

그리고 그날 3월 1일

서울 탑골공원에서 시작된 만세의 함성은 민족운동가들이 전국으로 비밀리에 나른 독립선언문과 서울 학교의 휴교령으로 귀향하던 학생들을 따라 지방으로 번져나갔습니다.

실제로 3.1운동은 3월과 4월 2개월에 걸친 거대한 독립만세운동이었던 것입니다.

 

군중 가운데 일부는 "독립이 되었다 믿고 만세를 부른다"고 하였고, 또 일부는 "군중이 독립만세를 부르고 있는 것이니 독립이 될 것으로 생각한다"고 하였다.(279쪽)

 

전북 이리 지역의 교사였던 문용기 선생은 만세를 부르다가 일본의 칼에 양팔이 잘리면서도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다 그 자리에서 순국하십니다.

무엇이 그들을 그리 절박하게 한 것일까요?

또 무엇이 그들을 그리 용감하게 만든 것일까요?

식민지에서 산다는 것은 그저 나라의 주인이 바뀐다는 형식이 아닐 것입니다.

1920년대 동아일보에 보면 우리 나라 곡창지대인 전북지역에서 추수 직후에 농민들이 하루에 1끼도 제대로 못먹어 굶어죽는 이가 속출한다는 기사가 있습니다.

이 책에서도 일본의 쌀 수탈, 태형제, 임금차별 등등 민중들의 생활 곳곳의 변화가 나오네요.

식민지 인으로 산다는 것은 바로 생존의 문제였던 것일겁니다.

나와 나의 가족의 생존이 언제 어디서나 위협받을 수 있다는 것, 그것이 가능성으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 구현된다는 것에서 절망이 기본 바탕에 깔렸을 것이고, 그 절망을 이길 수 있는 희망이 드디어 보이기 시작했다는데 아마도 3.1운동의 거대함이 비롯된 것이 아닐까요?

 

우리는 흔히 3.1운동에서 민족대표 33인을 이야기하고 유관순열사와 같은 학생들을 얘기합니다.

하지만 실제 3.1운동에서 일제에 체포된 사람의 반 이상이 농민이었습니다.

그리고 노동자들, 도시빈민들이 있었습니다.

3.1운동은 정말 특이한 운동입니다.

초기에 지식인들과 사회지도층 인사들이 계획을 했지만, 그들 민족대표들이 태화관에서 독립선언식을 하고 일본 경찰에 스스로 전화해 체포되어버린 이후 이 운동에는 지도 조직도 지도 세력도 없습니다.

만세운동의 전국화에 큰 공헌을 한 학생들도 어떤 특별한 조직을 중심으로 움직인 것이 아닙니다.

조직도 없고, 지도세력도 없는 운동이 2달간을 격렬하게 저항했습니다.

세계의 어떤 운동도 이렇게 진행된 것은 없습니다.

그 속에서 식민지 한국인들의 절망이 얼마나 컸는지를 감히 짐작해봅니다.

이 책의 뒷부분에는 민족대표 33인이 아니라 민중대표 48인이 소개됩니다.

소중한 자료이고, 감사한 기획입니다.

그분들의 얼굴 하나하나를 보며 그 때 그분들의 마음을 가늠해보았습니다.

 

3.1운동 이후 우리의 독립운동에 드디어 대중이 주인이라는 의식이 생깁니다.

이전의 독립운동이 명망가 중심을 벗어나지 못했던데 대해 처절한 반성이 생길 수 밖에요.

역사의 주인으로서의 민중, 독립운동의 중심으로서의 민중이 전면에 나서게 되는거지요.

또한 3.1운동은 그 자체로 수많은 독립운동가를 만들어냅니다.

 

"이 땅의 모든 청년들과 마찬가지로 내 정치경력은 3·1운동으로 시작되었다. 대중운동의 힘이 내 존재를 뿌리부터 뒤흔들어 놓았다." 미국인 기자 님 웨일스를 통해 세상에 털어놓은 회고담 <아리랑>에서 혁명가 김산은 밝혔다. 정확히 오늘로부터 100년 전 조선에서 벌어진 기미년 3월 1일의 싸움이 당대 청년들에게 어떤 의미였는지 집약적으로 드러내어 주는 말이다.
- P351

 

이전에 김학철 선생님의 자서전 <최후의 분대장>속 이야기가 생각났습니다.

3.1운동 때 선생은 겨우 10대의 중학생이었는데 그 길로 어머님이 숨겨두었던 비상금을 훔쳐서 상해로 떠납니다.

그것이 독립운동 투신의 길이었고, 그 분이 고향을 다시 밟는데는 해방이 되고도 40년이 더 흘러야 했지요.

 

3.1운동을 직접적으로 겪었던 간접적으로 들었던 이후 우리 독립운동가들에게 3.1운동은 그 자체로 정신적 지주였고, 고난을 이겨내는 근원이었다는 생각을 합니다.

때로 독립운동가들의 삶을 보면서 무엇이 그들을 그렇게 끝까지 싸우게 했을까 궁금해질 때가 있습니다.

존경스럽지만 나라면 그 고통의 세월을 이겨낼 자신이 없기 때문에 생기는 궁금증입니다.

다는 아니겠지만 3.1운동의 기억이 그분들이 그 세월을 이겨내는 큰 힘 중의 하나임은 분명하였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책은 정말 많은 인물들을 얘기하고 있습니다.

3월 1일의 거사를 위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사방에서 노력하는지를 보면 그것만으로도 가슴이 벅차기도 합니다.

또한 역사적 인물들의 여러 면면을 보는 즐거움이 있습니다.

 

중국 상해에서 독립운동을 하던 여운형 선생은 30대 초반이었던 그 때에서 참 스마트하다는 생각을 합니다.

인력거군의 호객행위에 짜증을 내는 조선인을 향해 말끔한 모습으로 "상해에서 모든 조선인은 자신이 외교관이라고 생각하고 행동해야 한다"라고 일갈하는 그분의 모습은 사진에서 보이는 스마트한 모습 그대로입니다.

 

3.1운동의 준비부분에서 의외였던 인물이 있습니다.

민족대표 33인 중의 한명인 최린이죠. 나혜석과의 연애로 더 유명한 것 같기도 하지만...

실제로 3.1운동을 준비하면서 최린이 보여주는 협상과 기획 능력이 참 대단하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국내에서 3.1운동이 일어날 수 있는 준비의 반 이상이 최린의 노력과 능력에서 이루어지지 않았나 싶을 정도로요.

어쩌면 그의 탁월한 현실감각이 이후 친일파로 변절하게 되는 이유가 되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안타까운 변절입니다.

그나마 해방이후 반민특위 재판에서 최린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민족 대표에 한사람으로 잠시 민족 독립에 몸담았던 내가 이곳에 와서 반민족 행위를 재판을 받는 그 자체가 부끄러운 일이다. 광화문 네거리에 사지를 소에 묶고 형을 집행해 달라. 그래서 민족에 본보기로 보여야 한다.

 

반민특위에 회부된 친일파 중에서 유일하게 반성한 사람이 최린입니다.

 

3.1운동은 여성의 역할이 정말 컸던 운동이기도 합니다.

그 중 어떤 사람보다도 3.1운동 그자체라고 할만한 분이 있으니 김마리아선생입니다.

 

국외에서 3·1운동을 촉발시키고, 운동이 벌어지자 국내에들어와 이를 추동하고, 운동이 지나간 뒤에는 그 가치를 이어 독립운동을 지속했다는 점에서 김마리아는 남녀를 넘어 3·1운동의 정신에가장 부합한 인물이라고 할 만하다. - P354

 

아 그리고 이승만을 빼놓을 수 없네요.

이 시기에조차 이승만은 기회주의적입니다. 대학동문인 미국 대통령 윌슨이 민족자결주의를 얘기하자 오로지 거기에만 매달려서(실제로는 만남조차 거부당합니다.), 조선이 독립할 길은 미국의 지원을 받는 것 뿐이라고 헛소리를 합니다. 나아가서는 국제연맹(실제로는 미국이죠)이 일본 대신 조선을 통치해달라는 위임통치를 건의하기까지 합니다.

단재 신채호 선생은 이승만을 가리켜 "이승만은 위임통치를 제창하던 자이므로 국무총리로 신임키 불능하다"며 "이승만은 이완용보다 더 큰 역적이다. 이완용은 있는 나라를 팔아먹었지만, 이승만은 아직 나라를 찾기도 전에 팔아먹은 놈"이라고 일갈합니다.

이승만은 한번도 제대로 된 독립운동가였던 적도 없고, 해방 이후에도 무능하고 잔인한 야심가였을 뿐입니다.

그 무능한 야심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학살했는지를 생각하면 치가 떨릴 뿐입니다.

그런 이승만을 국부라고 떠드는 이들이, 이번 광복절에 친일파 처단을 얘기하니 국론분열이라고 떠드는 이들과 같은 이들입니다.

 

아직도 3.1운동을 기억하고 독립운동을 되새기며, 친일파의 역사적 처단을 되새기고 되새겨야 하는 이유가 바로 우리 앞에 지금도 살아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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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모마일 2020-08-20 11: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3,1운동은 헌법 전문에 나오고 기념일을 만들어 기릴 만큼 거국적인 독립운동이었지만, 반면에 너무 유명해서 저처럼 단편적인 지식만 알고 있으면서 제대로 알고 있다고 착각하는 분도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저나 저같은 독자분들께 필요한 책이네요..

바람돌이 2020-08-20 12:00   좋아요 0 | URL
기자들이 당대에 기사로 쓰듯이 써서인지 현장감있게 읽혔어요. 좋은책인데 많은 분들이 읽었으면 좋겠어요. ^^

감은빛 2020-08-21 20: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언제 결제할 지 모르겠지만, 일단 장바구니에 담았습니다.
삼일운동은 전세계적으로도 유례가 없는 대단한 저항운동이죠.

저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윌슨의 민족자결주의에 과도한 의미를 부여한 것은 세계에서 거의 유일하게 우리나라 밖에 없었다죠?

삼일운동 이후에 본격적으로 항일독립투쟁에 합류하는 대다수는 사회주의 계열이었죠. 우리 정부와 사회가 의도적으로 왜곡하고 절대 진실을 알려주지 않으려고 애쓰는 내용이죠.

가끔 그런 상상을 해요. 만약 해방 후 친일부역자들이 다시 권력을 잡지 않았다면 지금쯤 우리 사회는 그래도 괜찮은 사회가 되었을까? 바람돌이님은 어떻게 생각하세요? ㅎㅎ

바람돌이 2020-08-21 20:47   좋아요 0 | URL
독립운동사 특히 무장독립운동사에서 사회주의자들의 역할이 가장 크죠. 하지만 삼일운동 이후 본격적으로 항일독립투쟁에 합류하는 대다수라고 하기에는 좀 무리가 있어요. 삼일운동 직후에는 민족주의 진영도 무시하기 힘든 숫자이고, 그리고 무엇보다 이 시기의 사회주의라는 세력들의 이념이란게 이념으로서의 사회주의를 표방한다고 보기도 좀 어려운 부분이 많고요. 실제로 이 시기 사회주의는 세계혁명으로서의 사회주의를 이야기하며 민족주의에 대립하게 되는데 우리나라의 독립운동가들은 민족주의를 버릴바에야 사회주의를 갖다 팽개칠 사람들이 대부분이었어요. ^^

그리고 요즘 학교 교과서에는 사회주의자들의 독립운동도 같이 실린답니다. 물론 중도 좌파까지지만요. 사회주의라는 명칭도 정확하게 나오고 김원봉, 여운형, 조선의용대정도까지는 가르쳐요. 극좌쪽의 박헌영, 이관술, 그리고 해외에서는 동북항일연군은 빼먹지만요.

해방 후 친일파들이 다시 권력을 잡지 않았다면은 이승만이 권력을 잡지 않은거겠죠? 그렇다면 그렇게 많은 아까운 사람들이 죽지 않아도 되었겠죠. 이승만이 정말 많이 죽이거든요. 특히 6.25전쟁 중 국민보도연맹을 통해 뭔가 비판적인 생각을 말하고 표현할 수 있는 사람은 다 죽이죠. 그 피해의식이 저는 정말 우리 역사에 끼친 악영향이 크다고 생각해요. 독립운동을 하고도 죽임과 배척을 당하는 국가, 친일 행위 이후에도 여전히 잘먹고 잘 살 수 있는 나라 - 이건 아마 집단 트라우마로 남은 것 같아요. 전쟁이 끝난지가 언제고, 남북의 경제적인 차이가 얼마인데 아직도 대북 공포 선동이 먹히는 나라인건 이 트라우마가 여전히 영향을 끼치는 거라고도 생각이 들고요. 역사에 만약이 없으니 장담할 수 없지만 그래도 우리 사회가 그토록 오랫동안 입이 막힌 사회가 되지는 않았지 않을까 생각해요. 생각도 행동도 좀 더 자유로울 수 있지 않았을까? 근데 실제 어땠을까를 추측하기에는 변수가 너무 많아요. ^^
 

 우리는 여기서
‘인류 평등‘이라는 단어에 주목하고자 한다. 세계를 문명국과 야만국으로 나누고 강대국이 약소국을 침략 정복하는 것이 문명의 시혜라고 받아들여지던 시대에 인류가 평등하다는 엄연한 사실을 선언문맨 앞에 내세웠다. 지금도 세계를 지배하고 있는 약육강식 적자생존의 사회진화론‘을 피억압 민족의 이름으로 거부하고 평화와 평등의시대로 나아가자고 말한 것이다.
- P249

"서울의 거리는 열광적인 독립만세를 연달아 부르는 군중들로 가득 찼다. 어느 틈에 만들었는지 종이로 만든 태극기의 물결, 대열 앞에는 학생들이 선두에 섰으며, 서울 시민들과 지방에서 올라온 시골사람들이 이에 호응하였다. 시위 군중들의 맹렬한 기세에 일본 관헌들도 멍청하게 수수방관하고 있었다. 지금의 광화문 세종로 거리인육조 거리가 콩나물시루같이 인파로 빽빽하였다. 그 속을 인력거를타고 지나던 일본인 경기도 지사에게 모자를 벗어들고 만세를 부르라고 호통을 치니까 혼비백산한 이자는 시키는 대로 고분고분 만세를 불렀다. 해가 저물어도 만세 소리는 여기저기서 산발적으로 들려왔다. "(이희승, ‘내가 겪은 3·1운동‘)- P252

무엇을 향해 ‘만세‘를 부르는 것인가. 군중 가운데 일부는 "독립이되었다 믿고 만세를 부른다"고 하였고, 또 일부는 "군중이 독립만세를 부르고 있는 것이니 독립이 될 것으로 생각한다"고 하였다. 시위대 중 한 명으로 원산 구세병원 간호사인 탁마리아(탁명숙·25) 씨의 기대는 솔직하다. "조선인이 독립의 희망을 가지고 있는 것을 이같이떠들면 일본 정부나 세계 각국도 알게 될 것이다. 그리고 세계 각국에서도 조선을 독립시켜 준다고 하는 여론이 일어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일본 정부도 조선을 독립시켜 줄 것이다.
- P279

미주 방면 조선인 망명객 중 대표적 인사인 이승만 (44) 박사가 3일미국 윌슨 대통령에게 우리 조선을 위임통치 하여 달라는 청원서를제출한 것으로 확인되었다.......
"저희들은 자유를 사랑하는 1500만 한국인의 이름으로 각하께서여기에 동봉한 청원서를 평화회의에 제출하여 주시옵고, 또 이 회의에 모인 연합국 열강이 장래에 조선의 완전한 독립을 보장한다는 조건하에 현재와 같은 일본의 통치로부터 조선을 해방시켜 국제연맹의 위임통치 아래에 두는 조치를 취할 수 있도록 하는 저희들의 자유염원을 평화회의 석상에서 지지하여 주시기를 간절히 청하는 바입니다. 이것이 이루어질 수 있다면 한반도는 모든 나라에 이익을 제공할중립적 통상지역으로 변할 것입니다.
- P280

 이때 무장독립운동을 벌여온 이회영, 신재호 (39), 박용만 (38)등의 인사들이 반대 의사를 피력하고 나섰다. 특히 독립운동단체인동제사‘ 출신의 신채호 씨가 "이승만은 위임통치를 제창하던 자이므로 국무총리로 신임키 불능하다"며 "이승만은 이완용보다 더 큰 역적이다. 이완용은 있는 나라를 팔아먹었지만, 이승만은 아직 나라를 찾기도 전에 팔아먹은 놈"이라고 강하게 비난하였다. - P317

지난 4일, 전북 이리 장터에서 만세시위가 벌어졌다. 지역 만세운동을 주도한 문용기 (41) 선생과 기독교인 등 300여 명의 군중이 조선독립 만세‘를 외치며 시가행진에 나섰다. 금세 1000여 명으로 불어난 시위대에 놀란 일본 헌병대는 총검을 이용해 무자별 진문용기압을 강행하였다. 선두에 있던 문선생이 오른손에 태극기를 들고 군중의 앞으로 나아갔다. 일본 헌병은 문 선생의 오른팔을 칼로 내리쳤다. 잘린 오른팔이 태극기와함께 땅에 떨어졌고 문 선생은 피를 흘리며 왼손으로 다시 태극기를 든 채 만세를 외치며 전진하였다. 극악무도한 헌병은 이번엔 문선생의 왼팔을 칼로 내리쳤다. 그는 두 팔을 잃은 몸으로 뛰어가며계속 "조선독립 만세"를 불렀다. 양팔에서 피가 뿜어져 나왔다. 격분한 헌병이 그를 따라가 사정없이 난자하여 결국 순국하였다.- P334

존형, 두 달 새 줄잡아 1000번의 만세시위가 조선 땅 방방곡곡에서 일어났습니다. 그사이 헤아릴 수 없는 이들이 피체되고 두들며 맞고 학살당하였습니다. 살아남은 저 같은 이는 그저 그들 죽음에 빚진죄인일 것이옵니다. - P338

"이 땅의 모든 청년들과 마찬가지로 내 정치경력은 3·1운동으로 시작되었다. 대중운동의 힘이 내 존재를 뿌리부터 뒤흔들어 놓았다."
미국인 기자 님 웨일스를 통해 세상에 털어놓은 회고담 <아리랑>에서 혁명가 김산은 밝혔다. 정확히 오늘로부터 100년 전 조선에서 벌어진 기미년 3월 1일의 싸움이 당대 청년들에게 어떤 의미였는지 집약적으로 드러내어 주는 말이다.
- P351

국외에서 3·1운동을 촉발시키고, 운동이 벌어지자 국내에들어와 이를 추동하고, 운동이 지나간 뒤에는 그 가치를 이어 독립운동을 지속했다는 점에서 김마리아는 남녀를 넘어 3·1운동의 정신에가장 부합한 인물이라고 할 만하다.
- P3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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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해에서 조선 사람은 항상 외교관의 마음가짐으로 주의해야 합니다." 몸을 돌려 이 소요에 느닷없이 끼어든 조선 사람의 얼굴을 확인했다. 말쑥한 프록코트 차림에 잘 다듬은 카이저수염의 신사. 상해의 교민들에게 "인력거꾼과 품삯을 다투지 말고, 노상에서 취한 모습을 보이지 말라"며 "국가와 민족을 대표하는 대사 혹은 공사"와 같은 처신을 당부했다던 청년 독립운동가 여운형 (32) 씨였다.- P28

국내와 북미, 간도와 연해주의 독립운동가들을 연결하는 중계지점인 이곳에는 미주의 독립운동가들이 발행하는 <신한민보>를 비롯해전 세계 한인의 ‘불온 인쇄물들이 배달되어 온다. 국제 정세에 민감한 젊은 운동가들이 모여드는 이유다. 경술년(1910)부터 올해까지 상해로 이주해온 독립운동가는 박은식 (59) 씨 정도를 빼면 열에 아홉이20~30대의 청년층이다. 새로운 세대가 상해에서의 독립운동에 새바람을 불어넣고 있달까.
- P29

기독교청년회(YMCA) 총무 윤치호(54) 씨는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수천 명의 조문객들이 깊은 슬픔에 잠겨 몸을가누지 못하고 엎드린 채 통곡하는 놀라운 모습을 목격하고 있다"고전했다. 윤 씨는 "광무황제의 통치가 어리석음과 실수로 점철된 오랜통치였다는 사실을 몰라서가 아니라, 광무황제의 승하가 조선의 자결권이 끝내 소멸되었음을 나타내는 상징적인 사건이기 때문에 이토록 울분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보았다. - P115

일본 유학생들이 8일 동경에서 발표한 독립선언서는 우리 민족이국권을 빼앗긴 이후 최초로 발표된 독립선언이라는 차원에서 ‘2·8독립선언‘이라 부를 만하다. 일본 제국주의의 심장부인 동경에서 대낮에 공개적으로 거사가 이뤄졌다는 것으로도 통쾌한 일이었다. 선언서에서는 요구사항이 받아들여지지 않을 시 일제와 ‘영원한 혈전‘을벌인다고 다짐하는 등 청년들의 결연한 투쟁 의지를 확인할 수 있는데 식민통치에 신음하던 민중에게 여간 반가운 소식이 아닐 수 없었다. 또한 독립될 새로운 국가는 민주주의를 지향할 것이라고 밝혀 왕정복고에 분명히 선을 그은 점에서 과거와 결별하고 미래로 나아가는 청년들의 정신을 대변한다.
- P146

민중의 고통을 자기 일로 여기며 대의를 위해 헌신하는 학생들도있지만, 여전히 공무원이나 교사·변호사 같은 안정적 직업을 선호하는 경우가 대부분인 듯하다. 어찌 보면 ‘충성스러운 신민‘ 말고는다른 길이 허용되지 않았던 식민지 조선에서 당연한 귀결인지도 모른다.
- P194

기독교 측에서는 독립선언보다 좀 더 온건한 독립청원 방식의 운동을 전개하자고 맞섰다. 이에 최린은 "독립운동이 민족자결주의라는 외부적 정세의 영향하에서 제기된 것인 만큼 민족자결의 의사를명확히 표시해야 한다"며 "일본 정부에 청원하는 것은 단지 당사자에대해 의견을 진술하는 것이니 민족자결의 의사를 충분히 표시할 수없다"고 설득하였다....
연대의 물꼬는 예상치 못한 곳에서 터져 나왔다. 이승훈이 이날 기독교 민족대표들이 체포될 경우를 대비해 가족 생계자금으로 5000원(현재 가치 약 4억원)을 요구했는데 최린의 보고를 받은 손병희가 곧바로 자금을 제공했다.- P202

그는 보성사 사장 이종일 (61)의 지시로 선언서 2000부를 배부받아 전주로 향하는길이다. 자신이 붙잡히면 만사가 허사가 될지도 모를 일이다. 열차를기다리며 인종익은 떨리는 마음을 진정시키려 자꾸만 스스로에게 되뇌었다. "이번에 좌절하면 또 이 뒤를 이어 (다른 인물이) 나올 것이고,
100인을 죽이면 100인이 나올 것이다. 인심은 물이다. 한강이다. 아무리 막더라도 물은 물로서 새어 나와 흐를 것이다."
- P2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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