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조그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269
솔 벨로 지음, 김진준 옮김 / 문학동네 / 202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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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을 잡아라>를 읽었다면 솔 벨로에 매료되지 않고 배길 수 있을까. 하나의 이미지로 만든 창끝으로 장편소설의 긴 서사를 뚫는 소설가. 그렇게 통과한 창끝에 단 1밀리의 상흔도 남기지 않는 소설가. 오죽하면 책 뒤 껍질을 매만져 봤을까. 거짓말 아니고 난 실제로 그랬더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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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25-09-19 11:0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 이책 오늘 신간으로 나왔던데 기대평인가요? 기대를 진짜 하게 되는데요. ^^

젤소민아 2025-09-23 02:20   좋아요 0 | URL
바람돌이님, 저랑 같이 읽으실래요~~~ㅎㅎ 솔 벨로 진짜 훌륭한 작가!!
 
노인과 바다 (먼슬리 클래식) 먼슬리 클래식 9
어니스트 헤밍웨이 지음, 이인규 옮김 / 문학동네 / 202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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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인은 마침내, 그리고 도저히 어찌해볼 도리 없이 기운이 빠졌다고 직감했다.
고물로 돌아가 보니 부러져 들쭉날쭉해진 키 손잡이가 방향타의 갸름한 구멍에
그런대로 맞아 배를 몰아갈 정도는 되었다. 
노인은 어깨에 부대를 두르고 배의 진로를 잡았다.

이제 배는 가볍게 나아갔고 노인은 아무 생각도, 느낌도 없었다.

이제 보이는 모든 걸 지나치며 노인은 집이 있는 항구를 향해 
가급적 요령 있게, 기민하게 배를 몰고 갔다.
밤이 되자, 사람이 식탁에 흘린 빵 부스러기를 줍듯, 
상어 떼가 물고기 잔해에 덤벼들었다. 
그러나 노인은 상어 때에 눈길도 주지 않았고 배를 몰아가는 일 외에는 
다른 어떤 것에도 관심을 두지 않았다. 
배 옆구리에 붙어 있던 무거운 물고기가 없어졌으니 
배가 아주 가볍게 잘 달린다는 느낌만 있었다. 

배에는 아무 문제가 없구나. 

노인은 생각했다. 
배는 온전해. 
부러진 키 손잡이 말고는 상한 데가 없어. 
그거야 바꿔 달면 그만이지.



 <노인과 바다>를 드디어 리뷰한다.
이제 읽어서가 아니다. 사실은 오래 전에 읽었다. 초등학교 때.
청소년 버전으로. 정본은 고등학교 때 읽었지 싶다.
그리고 어른이 되어 다시 읽었고, 어른이 된 지 한참 지나 또다시 읽었다.

그러고 바로 리뷰하지 못했다.
(전에 리뷰한 적 있을 수는 있다. 그런데 또 읽었다. 또 읽으면 또 새롭다. 
명작이라 그런 지도.)

퓰리처상과  노벨문학상을 거의 동시에 움켜쥔 명작이라 기가 죽어서만은 아니다.
이제껏 이 소설의 주제를 '한 노인의 불굴의 투지'로만 알고 있던 데서
벗어나는데 시간이 좀 걸렸다.

노인만큼 나이가 들려면 한참 멀었으나
어느 정도 나이 든 지금 와서 보니, 이 소설에서 '투지'보다 더 도드라지게 만져지는
단어가 있다. 소설 속에 나올 수도 안 나올 수도 있는 단어.

귀환.

지금의 내 나이로,
이 소설에서 가장 오래 붙잡힌 장면은, 

84일이나 고기 한 마리 못 잡던 노인, 산티아고가 드디어 거대한 고기를 낚아올린 순간이 아니다.


오히려 이 장면이다.


마침내 원했던 대형 물고기를 잡지만, 돌아오는 길에 상어 떼에게 거의 다 뜯기고 마는.

그 통통하니 살 많던 고기가 참혹하니 뼈만 남는.


이 장면은 소설에서 대단히 의미있는 ‘전환점’이다.

이 소설의 주제를 '불굴의 투지'로만 읽는다면 상어를 잡는 것으로 끝나도 된다.


이 소설이 피어나는 지점은 바로, 물고기가 뼈만 남는 자리, 그곳이다.


왜냐하면, 노인의 (불굴의) 투지가 승리처럼 보이던 순간이 패배로 바뀌기 때문이다.


패배를 대하는 노인의 태도는 자못 다르다.

소설 속 인물의 '자못 다름'은 열이면 아홉, 아니, 열이면 열, 주제와 닿아 있다.


그는 상어들을 원망하지 않는다.
상어에 감정의 초점을 맞추지 않는다.


상어 떼가 출현한 건 우연이 아니었다-.


상어들도 저 깊은 바다 아래서 피 냄새를 맡고 따라붙었을 뿐이다.

노인이 그러했듯, 생존의 본능에 충실했을 뿐이다.


물론, 상어에게 뜯겨나간 저 아름다운 물고기는 아깝기 그지 없다.

노인도 뜯겨나간 살점을 놓고 돈으로 환산하며 아까워한다.


그러나 곧, 노인은 '자못 다르게' 생각하고 행동한다.

이제 노인 산티아고에겐 뼈만 남은 물고기가 무거운 '짐'이 되었다.


전환의 연속이다.

전환의 유지다.


헤밍웨이가 말하고 싶어 점화한 불꽃이 바로 이 전환점에서 발화되지 않았을까 싶다.


한때 노인 생의 목표요, 희망이었던 물고기는 살점 하나 없는 짐이 되었다.

보통 사람에게는 이런 '전환'이 대단히 힘들다.

놓친 것, 실패한 것, 아까운 것을 우리는 잘 놓지 못한다.

그래서 끈덕지게 거기 들러붙어 같이 살아가려 한다.

두고두고 후회하며, 두고두고 곱씹으며, 두고두고 자책하며, 두고두고 남탓하며...

혹자는 평생토록.


그런데 바다에서 생의 본질과 자연의 이치와 인간의 투지를 익힌 노인은 

이런 '전환'에 긴 시간과 큰 노력을 요하지 않는다.


노인은 ‘집착의 대상’을 자기 삶의 서사에서 지운다.

꽤 빨리, 쉽사리, 고통 없이.


그 대신 노인은 '자못 남다른' 생각과 행동을 한다.

바로, 자기 배를 살피는 일이다.
배가 무사한지 확인하는 일이다.


물고기 살을 다 파먹은 상어보다

그래서 뼈만 남은 물고기보다

지금 노인에게 더 중요한 것은 

배의 무사함이기 때문이다.


곧 ‘귀환의 가능성’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의 시선은 철저히 현재와 귀환에 초점을 맞춘다.


많은 소설에서 우리는 인물이 잃은 것에 매달리는 장면을 장황하게 읽게 된다.

앞으로 나아가기 보다는 과거에 휘말려 어쩔 줄 몰라하는 인물의 고군분투를

내 일처럼 공감하며 읽게 된다.


헤밍웨이는 <노인과 바다>란 불후의 명작에서

‘상실’이 일어남과 거의 동시에 ‘귀환’을 교차한다.


이를 우리 삶에 넣어본다.


우리의 지난, 그 화려했던 청춘에 두었던 미련이나 놓친 기회, 끝난 관계는 

이미 ‘뜯긴 고기’와 같은 것인지도 모른다.


어쩌면 그건 우리에게 단지 무거운 짐에 지나지 않을지 모른다.
우린 빨리 그 짐을 벗고, 현재 우리가 타고 있는 '배'의 상태에 집중해야 하는지 모른다.


그래서 우리가 돌아가야 할 자리로 뱃머리를 돌려야 하는지 모른다.


소설 속 이 장면이 소설의 서사 방향을 바꾸는 긍정의 기술로 작용했듯,

우리 삶의 방향을 바꾸는 긍정의 힘이 될 지도 모른다.


우리 삶에 상어 떼는 늘 존재한다.
우리 삶에 상실은 예고 없이 찾아온다.
이때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상어와 싸우면서 모든 힘을 소진하는 것이 아닐 지도 모른다.
노인이 그랬듯, 상실을 무사히 통과해 귀환을 준비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거기서부터 우리의 삶은 다시 걸어갈 방향을 얻을 테니까.


내게 <노인과 바다>에서 명장면을 꼽으라면 단연 이 전환점이다.


노인이 아바나의 불빛을 따라 

방향키는 그래도 남은 뱃머리를 돌리는 장면.


어쩌면 우리 인생의 긍정은 획득이 아니라, 상실 이후의 시선 이동에 있는 지도 모르겠다.


큰 고기를 잡는 것(우리가 인생의 목표/희망/꿈이라 여겼던)보다 더 중요한 것은 

'돌아갈 배를 지키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우린 지금, 어디를 바라보고 있나.


혹시, 잃어버린 무언가에 전전긍긍하느라 어디로 가야 하는지 방향을 감지하지 못하는 건 아닌지.

우리의 배는 멀쩡하다. 잃어버린 것은 이미 떠내려 가 버렸다.

노인은 말한다.


무거운 물고기가 치워지니 배가 가볍게 잘 나가는군.


우리의 배도 가벼워질 수 있다.

아쉽지만 지난 것은, 

아깝지만 잃은 것을 '자못 다르게' 떠내려 보낸다면.


괜찮다.

배는 멀쩡하지 않은가.

부러진 데는 고치면 그만.

방향 키는 멀쩡하지 않은가.


키를 잡자.


이제, 집으로 돌아갈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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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25-09-18 20: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고등학교 때 읽고 그 이후로 안 읽어서 노인의 허무함만 기억속에 남았네요. 집착의 대상을 자기 삶의 서사에서 지운다는 표현 너무 멋지네요. 뭔가 명언으로 기억해야 할 거같은 느낌이에요. 우리가 나이들어서 다시 읽으면 볼 수 있는 장면이라고 생각하면서, 또 이런 장면을 포착해내는걸 아무나 하지 못한다는데서 이 글에 좋아요 한 백개쯤 보내고 싶습니다.

젤소민아 2025-09-19 08:15   좋아요 1 | URL
아욧, 바람돌이님 칭찬에 어깨춤이 절로 나네요~들러주시고, 이렇게 격려 댓글 주셔서 정말 감사드려요. 얼굴도 모르는 분이지만, 참 따스해집니다. 관계의 따뜻함은 물리적인 거리에 있지 않다는 걸 다시 한번 더 느껴요. ‘노인과 바다‘가 그 단순할 수 있는 문장과 구조에도 왜 불후의 명작인지는, 읽을 때마다 실감하게 돼요. 이 소설을 쓸 때 헤밍웨이도 몸이 그렇게 아팠다지요. 40가지 정도의 질환을 품고 있었다고요...그런 가운데서도 이렇게 슬픈듯하면서도 희망찬 노년을 표현할 수 있다는 게 정말 추앙하고 싶습니다. 꼭 다시 읽어보세요~~바람돌이님!
 

 현대문학 세계문학 단편선 12

 플래너리 오코너 편을 완독했다.


 스스로 칭찬해~~~.


 31편의 단편 중 국내에서 오코너의 명작으로 가장 잘 알려진 작 품은 두 개.


 좋은 사람은 찾기 힘들다.

 절름발이가 먼저 올 것이다. 



No wonder.

과연 그랬다.


명성에 걸맞았다.

그래서, 그 아우라 때문에 칭송하면서 읽게 된 것도 없지 않아 있을 것 같다.

반대로, 명작이라 소문 났으니 딴죽마인드가 발동해 어떻게든 흠을 잡아보려 기 쓰며 읽었든지.


과연 흠 따윈 느껴지지 않았고,

명작에서 그런 걸 느낄 깜냥도 안 되고. ^^


31편 모두 좋았다고는 할 수 없다.


대체 무슨 말을 하는지, 왜 이런 이야기를 썼는지, 

분량 채우려고 한 것인지...등등 읽으며 뿔따구가 조금은 솟았던 작품도 

없지는 않았다.


아주 조금.


그 반대로, 위에 언급한 두 편에 전혀 뒤지지 않는다고 보이는,

어쩌면 더 좋을 수도 있다고 생각되는 작품이 바로 <오르는 것은 모두 한데 모인다>였다.


우선, 선명하게 잡히는 키워드가 좋았다.

키워드가 선명하면 그걸 중심으로 순회하는 인물과 대사, 사건, 설정이

자석처럼 끌려들어와 읽기도 편하고 그만큼 흡수도 편하다는 장점이 있다.


마치 내가 소설을 마구 타이핑 하며 쓰는 듯한,

혹은 내가 소설 속으로 들어간 듯한 느낌도 들면서.


그만큼 소설과 동화된다는 뜻이다.


제일 먼저 눈에 띄는 단어는 뜬금없이 '감량수업'이다.


의사는 줄리언의 어머니에게 혈압이 높으니 체중을 10킬로그램 정도 빼야 한다고 말했고, 그 결과 줄리언은 수요일 밤마다 버스를 타고 시내 YMCA의 감량 수업에 어머니를 모시고 갔다.

(543)


소설의 제목이 일단 '오르는 것은 모두 한데 모인다'이다.

오르는 것(rise)을 다루고 있다.


'오르다'는 누가 봐도, '상승'의 심상이다. 


안 그런가?

상승은 확장이다. 더하기다. 

그런데 소설은 '감량'으로 시작한다.


이건, 더하기의 반대, 빼기다.


다시 말해, 소설가가 '대조'를 활용해 '오르다'란 중심 이미지를 빌드업해가겠다는 뜻이다.


어머니는 감량 수업이 자신의 몇 안 되는 즐거움 가운데 하나고

(중략)

어머니를 즐겁게 하는 것은 모두 사소한 것들이고 그를 우울하게 만들었다.


단순한 진술에서 작가는 인물의 갈등을 시음케 한다.


어머니는 사소한 것을 즐기며 아들 줄리언은 사소한 것을 즐기는 것이 못마땅한 지식인.


부인은 YMCA의 감량 수업 수강생 가운데 드물게 모자와 장갑을 착용하고 왔고,

또 아들을 대학에 보냈다. 


어머니는 아들에 대해 자부심을 갖고

아들은 어머니에 대해 부끄러움을 갖는다.

어머니의 속물성에 대해.


줄리언은 어머니가 이기적인 사람이었으면, 술을 마시고 자신에게 소리를 지르는 할망구였다면, 자신이 스스로의 운명을 더 잘 견딜 수 있을 것 같았다.


그 모자를 쓰면 길에서 똑같은 모자와 마주치는 없을 거예요, 했지.

(중략)


"세상이 이렇게 엉망인데 우리가 무언가에 기뻐할 수 있다는 게 기적이야.

바닥이 꼭대기에 갔다니까."


(중략)


"물론, 자기 위치를 아는 사람은 어딜 가든 상관없지만."

어머니가 말했다. 어머니는 이 말을 감량 수업에 갈 때마다 했다.


경이로워서 소름 돋는 대목이다.


작가는 결국 하고 싶은 말을 드러낸다.

위치. 그리고 그 위치를 어떤 기준에 따라 편집하는 배치-.


"네 증조할아버지는 이 주의 주지사셨어. 할아버지는 부유한 지주셨고.

할머니는 가다이가 출신이야." 어머니가 말했다.


"이제 노예는 없어." 그가 짜증스럽게 대꾸했다.

"그 사람들은 노예일 때가 나았어."


547)


실로, 놀라운 일이다.

어떻게 인간의 역사는 이다지도 되풀이되는가.

오코너 시절의 '검둥이' 담론의 역사는 지금도 숱한 상이하면서 동일한 개념들로

반복되고 있다. 작가는 일상 속에서 어쩌면 앞으로 두고두고 되풀이될 조각들을,

그래서 더는 조각이 아니라 멀지 않은 미래에 거대한 담론이 될 무언가를 

눈치채는 사람이 아닐까 싶은 정도다.  


외모, 직급, 계급, 재력, 배경 등이란 이름으로.


"그 사람들 처우를 개선해 줘야 하는 건 맞지만, 

그렇다고 울타리를 넘어오면 안 돼."


줄리언은 지금 어머니가 사는 곳을 보라고 하지만,

어머니는 그럴 생각이 조금도 없다.

어머니는 여전히 '금수저'였던 시간 속에 살고 있다.

거기서 나오려 하지 않는다. 어머니는 점점 내려갈 뿐이다.

바닥으로, 바닥으로.


줄리언은 어머니와 버스에 올라탔다.

흑인 여자가 어린 사내애를 데리고 탔다. 


줄리언은 머릿속으로 재빨리 '배치'를 실행한다.

아이가 자기 옆에 앉고, 아이의 엄마가 어머니 옆에 앉기를.

어머니가 같은 곳에 위치하기 가장 꺼리는 검둥이.


그건, 줄리안이 도모하는 최상의 배치-.


드디어 사건이 터진다.

깜둥이 꼬마가 어머니의 모자를 뺏어간 것이다.

아이의 어머니는 아이를 나무라며 똑바로 앉혔는데 아이는 요란하게 키득거리며

어머니 옆자리로 돌아간다.


"내가 좋은가 봐요." 줄리언의 어머니가 말하고 여자에게 미소를 보냈다.

그것은 어머니가 열등한 자에게 특별히 친절을 베풀 때의 미소였다. 줄리언은 모든 게 어그러졌다는 걸 알았다.


어머니의 일그러진 자부심은 석고처럼 굳은 채 변화의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줄리언은 좌절한다. 

급기야 어머니는 함께 내린 검둥이 아이에게 '적선'하듯, 1센트 새 동전을 내민다.

아이의 엄마는 기겁하며 적선을 거절하고 아이를 들쳐 없고 갈 길을 간다.


어머니는 YMCA로 가지 않고 집으로 가자고 한다.

그러고는 계속 걸어간다. 줄리언은 달려가 어머니를 잡아 세운다.


그리고 어머니의 얼굴을 보았다가 깜짝 놀랐다.

생전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할아버지를 불러. 여기 와서 나를 데려가시라고 해." 어머니가 말했다.


그 순간, 오코너의 한결같은 집요함이 여지없이 발휘된다.

몰락의 절정에서 도래하는 은총-.


오코너의 '오르기(상승;rise)'는 '더하기'가 아니라, 빼기였다. 몰락이었다.

바닥이 하늘을 치는 게 아니라 하늘이 바닥을 때릴 때야 비로소 내려오는 은총-. 


인간은 각자의 위치와 계급, 배경과 집착 속에서 흩어져 살아가지만, 

은총의 순간에는 아이러니하게도 

모두가 동일한 자리, 동일한 운명, 동일한 종말의 

한가운데로 불려 모인다(converge)


어머니가 쓰러지며 드러낸 낯선 얼굴은,

우리가 피하려 해도 끝내 모일 수밖에 없는 인간 조건의 집합소,

바로, 은총과 몰락이 겹쳐지는 자리였다.


위아래의 서열도, 과거의 영광도 소용없는 자리-.

오직 은총 앞에 한데 모인 인간의 얼굴만이 남는 곳-.


그곳이 바로 우리가 이룰 수 있는 '최상의 배치',

우리의 '위치'여야 한다고 작가는 말한다. 


더 높은 자리를 지키려던 줄리언의 어머니는

결국 가장 낮은 자리에 쓰러짐으로써,

역설적으로 들어 올려져 '오르는 것'이 되어 

검둥이들과 모든 이들과 한데 모였다.


바닥에서.


바닥에서 오르는 자가 되기.

그래서 한데 모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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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25-09-08 11: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완독 축하드려요. 이 책 제법 두껍던데 매일 한편씩 꾸준히 읽는게 쉽지 않던데 훌륭하셔요. 소개해주신 작품이 인상적이어서 저도 읽어보고싶네요

젤소민아 2025-09-14 01:43   좋아요 1 | URL
꼭꼭 읽으셔요 바람돌이님~~후회 안하실 소설이여요~~딱 두 편 정도만 갸우뚱~~물론, 제 내공 탓이겠지만요~

페크pek0501 2025-09-24 12: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벽돌책 완독을 축하합니다. 저는 윌리엄 트레버, 를 사 놓고 몇 편만 읽었죠. 두고두고 어쩌다 한 편씩만 기분전환용으로 읽어야지, 생각하고 있어요.^^
 
이렇게 해야 바로 쓴다 - 증보판
한효석 지음 / 한겨레출판 / 202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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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상태가 아쉬워서 그렇지, 내용은 진짜 알차다. 한글로 글 쓰는 사람이라면 꼭 봐야 하는 책. 이 책에 수록된 연습 문제를 꼼꼼히 풀어서 자기 것으로 만들면 글 쓰기 강사도 가능하다. 글 써서 밥 벌어 먹고 사는 나도 숱하게 틀렸다. 부끄러운 만큼 글 솜씨가 늘었다. 덕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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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 구두
헤닝 만켈 지음, 전은경 옮김 / 뮤진트리 / 201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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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기 전에 세 가지를 만족시켜서 구매. 1) 제목. 이탈리아 구두. 소설 제목으로 백점 아닌가. 이탈리아 구두가 대체 뭘까. 2) 번역이 아니라면 읽을 수 없는 언어. 내가 모를 세계. 3) ‘냉기‘로 시작되는 첫문장. 소설은 추워야 제맛. 따뜻하고 편안한 사람이야기를 뭣하러 소설까지 읽어가며 읽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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