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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미카엘 ㅣ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5
아모스 오즈 지음, 최창모 옮김 / 민음사 / 1998년 9월
평점 :
나는 죽고 싶지 않다.
(7p)
여자(한나)는 글을 쓴다.
자신이 글을 쓴다는 사실부터 짚고 넘어간다.
죽고 싶지 않아서 글을 쓴다고.
사랑하는 힘이 죽어가고 있기 때문이라고.
여자는 겨우 서른 살이다.
결혼했고 아들도 있다.
여자는 십년 전, 남편과 처음 만났던 시간으로 돌아간다.
어느 겨울날 아침 아홉시에 나는 계단을 내려오다가 미끄러졌다.
한 낯선 청년이 내 팔꿈치를 잡아주었다.
(7p)
어제 내가 일하는 도서관 동료들과 저녁을 함께 했다.
미국은 술자리를 갖는 게 일상적이지 않아서 콜라와 사이다가 든 컵으로
건배했다. 페파로니 핏자를 앞에 놓고.
6명의 동료 중 한 명만 빼고 결혼했거나 사귀는 사람이 있다.
나만 빼고 모두, '온라인'에서 만났단다.
그들은 젊은 축이니까.
그 중 나이 많은 축인 누가 그랬다.
이제 더는 버스 안에서 실수로 여자가 남자 무릎 위에 앉게 되면서 벌어지는
로맨틱한 사건(romantic accident)은 없다고.
한나와 미카엘은 '로맨틱한 사건'의 주인공들이다.
미끄러지는 여자를 잘 생긴 청년이 잡아주면서 이 소설은 시작된다.
남자에게는 어지간하면 빙판길에도 미끄러지지 않는 자제력이 있다.
자제력 있는 남자는 여자에게 다쳤냐고 묻고, 자제력 없어 보이는 여자는
발목을 삔 것 같다고 대답한다.
그러자 남자가 말한다.
나는 늘 '발목'이란 말이 좋아요.
이 남자, 발목 좋아하는 남자다.
그리고 이 남자는 거뭇한 수염을 가졌다.
여자는 (돌아가신) 아버지를 세상 어느 남자보다도 사랑했기에 그 수염이 만져보고 싶다.
남자의 이름은 미카엘 고넨. 지질학과 3학년생.
-댁의 예루살렘은 춥군요.
(9p)
댁의 예루살렘?
남자는 여자가 예루살렘 출신임을 대번에 알아본다.
남자는 아까 그 계단을 다시 올라가게 되자 아예 여자의 옷 소매를 붙잡아준다.
-오늘 아침에는 안개가 끼어 있었고 바람도 세게 불더군요.
-나의 예루살렘에서 겨울은 겨울이거든요
(10p)
한나의 입에서 처음으로 '나의'라는 단어가 나온다.
미카엘의 입을 빌어 한나는 '예루살렘'이란 단어에 '나의'를 붙일 수 있게 되었다.
한나의 언어가 빚어지는 순간이다.
그 언어를 준 사람은 남자, 미카엘이다.
이 소설은 이 '나의'를 천착한다. 집요하게 파고든다. 악착같이 놓지 않는다.
나의 미카엘.
도무지 '나의' 것이 되어주지 않는 남자를 향해 여자는 끊임없는 구애를 펼친다.
남자는 첫만남의 순간에 손을 내밀어 주었을 뿐, 소설이 끝날 때까지 예루살렘의 겨울처럼, 차갑다.
이게 이 소설의 미학이다.
독자에게 남자는 일상적인 인물이다. 딱히 차갑지도, 딱히 따스하지도, 딱히 비뚤어지지도, 딱히 군자같지도 않은.
다만, 여자에게 그렇다.
소설은 '개인과 개인의 서사'다. 우리는 소설을 읽으며 '나 같으면'이란 생각을 자주 하게 되지만 그럴 필요없다. '나의 렌즈'를 눈에 장착하고 소설을 읽지만 그럴 필요 없다. 그런 작업은 자연스레 따르게 되지만, 소설 독서는 그러지 않는 게 좋다.
이왕이면 소설은 그 인물이 되어 보는 게 좋다.
처음부터 끝까지 도무지 여자를 이해할 수 없다면 '독자 렌즈'의 배율이 너무 큰 것이다.
도무지 화자나 인물의 마음이나 입장을 이해할 수 없다면, 그 소설의 진가를 누릴 수 없다.
인물의 편에 서야 한다는 말은 아니다.
소설 속 인물이 늘 옳기만 한 건 아니니까.
소설 속 인물은 다만 옳을 수 있는, 옳고자 하는 가능성을 품고 있을 뿐이다.
내가 처음부터 독자 렌즈를 내려놓을 수 있었던 이유는 이 '나의'란 단어 덕분이었다.
<나의 미카엘>은 순전히 한나(여자)에게 미카엘이란 남자를 세운 이야기다.
그 누구의 미카엘도 아닌 '한나의 미카엘'.
이 소설에서 사람과 사람이 일대일로 서서 마주본다는 의미가 무엇인지,
그 마주봄에 따라 두 사람의 주변이, 학교가, 가정이, 사회가, 세상이 어떻게 바뀌는지 감지할 수 있었다.
그냥 <미카엘>이 아닌 것이다.
<나의> 미카엘,인 것이다.
어쩌면 두 사람의 '마주보기'보다 더 작아진, 한나의 '바라봄'인 것이다.
한나는 미카엘을 '나의 예루살렘'이 되어주길 원했다.
미카엘은 그저 겨울엔 추운 예루살렘일 뿐이었다.
한나는 '예루살렘'을 '나의 예루살렘'으로 인식하기까지,
그래서 '나의 미카엘'을 열망하는 여정을 이 소설에서 글로 펼친다.
아모스 오즈가 쓰는 게 아니라 한나가 쓰는 것이다.
한나, 정말 글 잘 쓴다.
밑줄 긋다가 포기했다.
문장도 좋지만, 이 소설을 자기가 쓰는 일기인 양 마음 놓고 쓴다.
오죽하면 아모스 오즈(이 소설의 저자)가 '40년 뒤 쓴 서문'에서 이렇게 말할까.
나는 그냥 한나가 내게 불러주는 대로 썼다고 말했다.
그러나 정확한 말은 아니다. 사실은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추측을 다해 그녀와 싸웠다고 하는 편이 맞다. 한 번 이상, 두 번 이상까지도 나는 스스로 그녀의 말을 들으려 했다. "그것은 적절치 않아. 그것은 너의 본성이 아냐. 난 그렇게 쓰려는 것이 아냐." 그러면 그녀는 나를 꾸짖었다. "내 본성이 무엇인지 또는 무엇이 아닌지 내게 말하지마. 입 다물고 쓰기나 해." 나는 고집을 부렸다. "나는 널 위해 쓰려는 게 아냐. 미안하지만, 다른 곳으로 가. 여자에게로 가 줘. 난 더 이상 못 쓰겠어. 난 여자가 아니란 말야. 난 여성 작가가 아니란 말이지." 그녀는 더없이 완강하게 굴었다. "내가 말하는 걸 쓰란 말야. 참견하지 말고." "그런데 난 네 비서가 아니잖아. 넌 단지 내 책의 인물일 뿐이야. 마주나기가 아니란 거지."
우리는, 그녀와 나는 밤새도록 싸웠다. 종종 나는 그녀가 가고 싶은 대로 가게 놔줬고, 종종 나는 절대 그러지 못하게 했다. 내가 한나에게 했던 것보다 좀 더 혹은 좀 덜 그랬다 해도 이 책이 더 나았을지 혹은 더 나빴을지는 지금도 알지 못한다.
-작가의 서문 중에서
한나의 문장들은 얼핏, 대수롭지 않게 넘어가다가도 이내 진동을 느끼게 한다.
그래서 자꾸 되돌아가게 된다.
예를 들면, 이런 문장.
나는 그의 미소와 손가락이 좋았다. 그의 손가락은 각각이 개별적인 생명을 갖고 있다는 듯이 찻숟가락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그리고 찻숟가락은 그 손가락에 쥐여 있는 것을 좋아했다.
(9p)
한나는 문장을 책임질 줄 안다.
전에 쓴 문장의 여지를 나중에 받아서 자신의 글을 읽는 내 손에 꼭 쥐여준다.
푸른색 울 옷감을 통해서 나는 그의 다섯 손가락을 전부 느낄 수 있었다.
(10p)
손가락의 여지. 찻숟가락은 경험했던 그 여지.
나중엔 여자도 마침내 경험하는 그 여지.
문장의 여지는 소설의 가능성을 만들고,
독자에게는 그게 소설을 종내는 다 읽어낼 이유가 된다.
놀라운 문장, 놀라운 인물, 놀라운 관계, 놀라운 시각, 놀라운 사랑,
놀라운 <나의 미카엘>이어라.
아버지는 조용한 사람이었다. 사람들을 달래서 자기가 받을 자격이 없는 동정심을 얻어내야 한다는 듯이 말을 하는 분이었다. - P14
아직까지도 나는 세계적으로 유명해질 운명의 젊은 학자하고 결혼해야겠다고 생각할 때가 있답니다. - P19
어떻게 하면 미카엘을 조금 더 붙잡아둘 것인가. - P20
한번은 그가 손가락 하나를 뻗어서 내 턱 끝에 맺힌 물방울을 닦아내었다. - P22
"오늘 당신 정말 이상하군요." 내가 웃으며 말했다. 마치 다른 날에도 그를 알고 있었다는 듯이. - P26
그러나 (꿈에서) 깨어나서도 나는 그 나무가 어떤 역할을 한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있다. 그러니 완전히 빈손으로 돌아오는 것은 아니다. - P28
대답할 수 없을 때마다 그는 어른들이 우스꽝스러운 짓을 하는 것을 알아차린 어린애처럼 미소 짓는다-당혹해하면서 남도 당혹스럽게 하는 미소를. - P31
미카엘이 말했다. "우리가 어릴 때 만났더라면 당신은 나를 완전히 때려뉘였을 거예요. 저학년 때에는 나보다 힘센 여자애들한테 늘 얻어맞곤 했거든요." - P33
"당신이 결혼할 사람은 아주 강한 사람이어야겠군요." - P35
어째서 내가 결혼할 사람이 아주 강해야 한다는 걸까? - P36
내가 실체가 없는 자기 생각의 한 부분일 뿐이라는 듯 멀리 떨어져 자기 안에 몰두해 있는 그림자. 나는 실재예요, 미카엘. 춥다구요. - P39
말을 하자마자 그는 다시 커다란 자기 외투 안으로 사라져 버렸다. - P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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