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벼운 점심
장은진 지음 / 한겨레출판 / 202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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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좀 이상한 소설이다.

소설에서 익히 본 문장으로 시작된다.


아버지가 돌아왔다.


9p)


소설에서 누가, 특히 아버지가 돌아온 이야기는 물릴만치 많다.

새로울 게 없다. 더 읽고 싶다는 감흥이 일어나지 않아도 무리가 아닐 것이다.

아버지가 떠난 이유와 돌아온 이유를 따져 묻기에 

이미 지난 숱한 소설들이 진력나게 말해 주었다.


더 떠날 아버지가 있고, 더 돌아올 아버지가 있을까 싶을만치.


아버지는 어머니 앞으로 장문의 편지를 남겨 놓고 떠났다.

(중략)


"더러운 인간! 포기하겠다는 거야, 전부 다."


9p)

이 또한 새로울 게 없어서 별로 궁금하지가...


아버지는 십 년 전에 다 놓고 갔고, 오죽하면 조부가 물려준 오래된 만년필도 챙겨가지 않았단다. 그리고 그 조부가 죽어 장례를 치르러 미국에서 귀국했다. 조부는 아버지가 존경하던 사람이었다. 


아버지는 사흘 간 대신 울어달라며 고용된 사람처럼 보였다. 

열심히 울어서인지 아버지는 장례식이 끝날 때까지 철저하게 혼자였다.


11p)


솔직히, '있어 보이는' 문장은 이게 고작이다. 


소설을 읽다 보면, 겉이 번지르르한 문장들이 있다.

소설을 읽다 보면 하나 번지르르할 것 없는데 번쩍이는 문장들이 있다.


이 소설은 둘 다 아니다. 

그냥 번지르르할 것 없는...문장들이다.

소설이 끝나지 않은 아직까지는.


어지간히도 비유를 쓰지 않는다. 

요즘 소설에서 판 치는 '~처럼'조차 거의 없다. 

그냥 할 말을 담백하게 한다. 비유 같은 것에 의탁하지 않고.


그래서 '울어달라며 고용된 사람처럼'처럼 신중하게 쓴 비유가 좀 귀하게 느껴진다.

다른 소설에 썼다면 흔하거나 낯익을 수도 있는데.


요즘 소설답지 않게 이 소설의 '아버지'는 '교수 씩이나' 된다.

대개, 무직에 무능해서 집을 나간 소설 속 흔한 아버지들과 다르다. 

그 점이 계속 읽게 만들었다. 

현실에서도, 소설에서도 이렇게 '있어 보이는' 아버지들은 집을 잘 나가지 않으니까.


'나(아들)'는 아버지를 공항으로 배웅하면서 '가벼운 점심'을 함께한다. 

벚꽃이 핀 봄날이다.


'갸벼운 점심'은 가벼운 점심답게 패스트푸드점에서 이루어진다. 

뉴요커가 다 된 아버지는 뉴요커답게 햄버거를 주문한다. 

'무거운 점심'을 대접하고 싶었던 '나'는 못내 아쉬워하지만.


나와 아버지 사이에 두 장의 사진이 오간다.

나는 아버지에게 연인의 뱃속에 자리한 아기 초음파 사진을 보여준다.

아버지는 사진 속 아기가 자신을 닮지 않길 바란다.

아버지는 나에게 연인의 사진을 보여준다.

금발의 파란 눈을 한.


나는 대번에 아버지에게 그 사람이 아버지의 진짜 사랑임을 알아챈다.

그래서 아버지는 행복해 보인다.


아버지는 나를 낳고 어머니를 사랑하지 않는 걸 알게 되었다고 고백한다. 


부자 간의 '가벼운 점심'은 

결코 가벼울 수 없는 이야기를 가볍게 주고받기에 더없이 적절한 매개가 되어 준다. 


결코 가벼울 수 없는 이야기.

아버지의 연인 또한 아버지와 사랑을 하면서 일도 가족도 잃었다는 식의.


학자였던 아버지는 뉴욕에서 연인과 세탁 일을 한다.


학자였을 때 아버지의 손은 말랑했지만 왠지 삭막하고 창백하고 무뎠던 걸로 기억한다. 시든 손. 그러나 세탁을 한다는 현재 아버지의 손은 거칠지만 부정하기 힘들 만큼의 생기가 감돌았다.

활짝 핀 손이었다.


35p)


이런 식이다. 

그 흔한 비유가 고집스럽게 없다.

세상 말로 '흔한' 작가라면 "~처럼' 말랑거리고 '~처럼' 거칠다고 했을 것이다.

그렇게 독자를 편하지만 게으르게 만들었을 것이다.


'활짝 핀'이 고작이다.


이상한 소설이다.


그런가 보다, 하고 지나치려다 문득 서게 된다.


손이 피다니. 손이 활짝 피다니.

아, 봄 꽃? 봄 꽃처럼 활짝 핀 다섯 손가락이 떠오른다.

그러니까 작가는 독자더러 하라는 것 같다.

비유는 직접 알아서 생각하라는 것 같다.


"봄이 왔는데도 행복하지 않다면 그 사람은 진짜 불행한 사람인 거야."

아버지의 주름진 얼굴이 분홍 빛으로 물들었다. 즐겁게 나이를 먹어서 생긴 주름이었다.


"열 번의 봄은 열 번 환생한 느낌이었어."


41p)


자식이고 아내고 다 버리고 외국으로 떠나서 연인과 저 하고 싶은 대로 살며

분홍빛 주름을 달고 봄마다 환생한 느낌으로 사는 아버지.


있어 보이는 아버지는 다 그런 건가.


도대체 이 아들은 어째서 이런 아버지와 '가벼운 점심'을 나누며

가벼운 이야기 꽃을 피우고 있는 것인가.

이 아들은 어째서 다 버리고 집 나간 아버지에 이다지도 호의적인가.


이제 소설의 결말에 이르렀다. 

도대체 독자로 내가 얻어가야 하는 건 뭔가 밑진 느낌이 들 참이다.


반전을 도모하기엔 너무 늦어 버렸다.

이제 겨우 한 장 남았으니.

앞의, 새로울 것 없는 그 모든 걸 뒤집거나 흔들기에 한 장은 역부족이다. 


그런데 참, 이상한 소설이다.


한 장으로 그걸 해 내고야 만다.


턱을 괴고 소설을 읽다가 결말을 다 읽고 턱에서 손을 뗐다.

그리고 맨 앞으로 돌아가 양손에 책을 쥐고 다시 읽었다.

전에 읽었던 거의 모든 단어가 새롭게 읽혔다.


특히, 여기.


"더러운 인간! 포기하겠다는 거야, 전부 다."


집 나간 아버지들에게 던지는 어머니들의 흔한 개탄사.

그런데 결말까지 읽고 돌아오면 이 문장의 진의를 알게 된다.


'더러운'의 서브텍스트를 알게 된다.

'포기한 것'의 대상을 알게 된다.

'전부 다'의 스펙트럼을 알게 된다, 이 말이다.


이 소설에서는 비유가 필요 없었는지 모른다.

혹시 작가는 비유를 썼다가 다 지웠는지도 모른다.

비유가 해 낼 일이 없다는 것을 깨닫고.


단어가 지닌 본연의 의미만으로도 얼마든지 서브텍스트가 품어질 수 있다는 걸 

이 소설은 보여준다.


봄, 봄 꽃, 아버지, 어머니, 연인, 손, 주름, 행복, 사랑 같은 단어가 

이다지도 품이 넓었던가.


내가 단어들마다 얼마나 졸렬한 고정관념으로 대했던지를 절감하게 해 주었다.


참, 이상한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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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 국내 출간 30주년 기념 특별판
밀란 쿤데라 지음, 이재룡 옮김 / 민음사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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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인생이라는 밑그림은 완성작 없는 초안, 무용한 밑그림이다.

(17p)

아는 분이 아이를 대학에 보내보니 이제 어지간히 알겠더라고 했다. 

아이를 명문대 보내는 걸 실패해 보니 명문대 보내는 비결을 이제 알겠더라고.

성공이 아니라 실패해 보니 더 잘 알겠더라고.

그런데 문제는, 대학 보낼 아이가 더는 없다는 사실.


그리 말하며 그분은 씁쓸하게 웃었다.


밀란 쿤데라의 문장이나 그분의 웃음이나 하는 말은 같다. 

우리 인생은 완성작 없는 초안, 무용한 밑그림.


이젠 공부를 잘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그만 너무 늙어 버렸다.

이젠 결혼을 잘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앞에서 남편(혹은 아내)가 밥 먹고 있다.

이젠 사랑을 잘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다 떠나고 없다.

이젠, 이젠, 이젠...


한 번뿐인 것은 전혀 없었던 것과 같다. 한 번만 산다는 것은

전혀 살지 않는다는 것과 마찬가지다.

(18p)


그렇다. 우린 살아봐야만 알게 된다. 알고 나서 사는 게 아니니까.


이 명작소설에 나오는 인물은 모두 그런 가정, 혹은 진리에서 탄생한 존재들이다.


토마시, 테레자, 사비나, 프란츠


미리 살아보지 않았기에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모르면서

나름대로 살아가는 방법을 터득했다고 믿는 자들이다.


네 명 중 두 명은 '무거움'을

다른 두 명은 '가벼움'을 그 방도로 믿고 산다.


그리고 소설이 진행될수록 무거움을 택한 이들은 가벼움을 취하고,

가벼움을 택한 이들은 무거움을 취해간다.

무거움과 가벼움으로 맺어진 관계는 서로에게 무게를 더하고 덜어내고자 

고군분투한다. 


혹은, 자신에게서 무게를 더하고 덜어내고자 각성한다. 


그녀가 자기 아파트에서 잠을 잔다는 것이 

다른 사람들에게 알려지는 것 역시 원치 않았다. 

동반 수면은 사랑의 명백한 범죄다.

(26p)


그가 잠에서 깨어났을 떄 테레자가 그의 손을 꼭 잡고 있는 것을 보고 그토록 기겁을 한 것도 바로 그런 이유 때문이었다! (중략) 지난 밤을 돌이켜 생각해 보았더니 자신이 알지 못했던 행복의 향기를 들이마셨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날 이후 두 사람 모두 잠까지 함께 잘 수 있다는 것에 미리 즐거워했다. (27p)


토마시는 생각했다. 한 여자와 정사를 나누는 것과 함께 잔다는 것은 서로 다를 뿐 아니라 거의 상충되는 두 가지 열정이라고. 사랑은 정사를 나누고 싶다는 욕망이 아니라 동반 수면의 욕망으로 발현되는 것이다.

(29p)


여자와 함께 나란히 잠 자는 것이 불안한 남자.

그런 남자의 손을 꼭 잡고 잠드는 여자.


우린 이 두 부류 중에서 어느 한 쪽에는 들 것이다. 

그래서 가볍거나 무거울 것이다. 


쿤데라는 묻는다. 당신은 어느 쪽이냐고.

어느 쪽이라고 답하는 순간, 열패감에 젖을 필요는 없다.

쿤데라는 어느 쪽이 우월하다고 추어 올리지는 않는다. 


그는 우리에게 질문을 던지고 우리로 하여금 답할 방도를 궁리하게 만들면서

작가의 소임을 다하려 한다. 


소설을 읽는 내내 궁금하긴 했다. 작가가 무거움과 가벼움, 어느 쪽 손을 들어줄 것인지.

제목이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고 보면 '가벼움'을 힐난하는 것 같은데 읽어보면 막상 그런 것만도 아닌 것 같아서.


그녀는 스스로에게 만족하고 자신이 강하다고 느낄 수 있는 상황이 있다는 것을 발견했고 이와 유사한 상황을 다시 찾겠다는 희망에 부풀어 외국으로 떠나고 싶은 것이었다.

(49p)


모빌리티. 

문학에서 구현되는 모빌리티(이동성)의 지류다.


우리가 '이동성'을 발휘하려는 시기는 '만족감'과 '자신감'을 느낄 상황을 만들기 위해서.

쿤데라는 그리 말한다.

지금 있는 그 자리에서는 그게 만져지지 않아서. 그럴 때 우리는 이동한다.


외국에 사는 사람은 구명줄 없이 허공을 걷는 사람이다. 

그에게는 가족과 직장 동료와 친구, 어릴 적부터 알아서 어렵지 않게 자신을 표현할 수 있는 언어를 지닌 나라, 

조국이 모든 인간에게 제공하는 구명줄이 없다.

(131p)


이 정도면 노골적인 모순이다.


"스스로에게 만족하고 

자신이 강하다고 느낄 수 있는 상황"을 찾아 외국으로 이동한다면서?


외국에 없는 단 한 가지를 들라면 바로 조국이 제공하는 구명줄, 모국어가 아닌가 말이다.

모국어란 절대적 혜택을 누릴 수 없는 장소에서 도대체 어떻게 "스스로에게 만족하고 자신이 강하다고 느낄 수 있는 상황"을 취할 수 있다는 말인가?


외국에 사는 사람으로서 나는 다음의 문장을 가슴으로 읽었다.

카레닌, 날 원망하지 마. 다시 한 번 이사를 가야겠다.

(132p)


외국에 사는 모든 이가 나 같지는 않겠지만, 

조국이 제공한 구명줄을 스스로 놓음으로써

나는 오늘도 곡예하듯 하루를 지나간다.

절반만 이해하는 단어들을 붙잡고 절반만 채워진 것 같은 생을 살아낸다. 

그래서 오늘도 다시 한 번 이사가는 꿈을 꾼다. 

그래도 체코슬로바키아에서 태어나 프랑스에 정착한 밀란 쿤데라의 가슴과 닿았다는 것에 조각같은 만족감을 느낀다.


그는 다시 기분이 좋아졌다. 그가 평생 동안 권태의 도시라고 

저주했던 제네바가 이제는 아름답고 모험에 가득 찬 곳처럼 보였다.


147p)


20여년 간 내가 사는 이곳 이국을 권태와 기만의 도시라고 저주했다.

나 역시 이제는 아름답기까지는 안 해도 사람 사는 곳은 맞다고 생각하게 도었다.

20여년 간 해왔던 질문 하나는 접게 된 셈이다.

권태와 기만의 도시라면서 나는 왜 떠나지 않았는가?

왜 조국으로 돌아가지 않았는가?

그 질문을 더는 하지 않게 된 것만도 살 만해졌다.


이 작품을 소설로 읽기에는 벅차다.

이 소설은 사건과 사건 간의 인과관계보다는

문장과 문장 간의 인과관계가 중해 보인다.


줄거리가 없다고 불평할 수 있다.

줄거리는 작가의 사유를 펼치는 도구로 쓰일 뿐이다.

많은 작가들이 안 그런 척 할 뿐이지만 쿤데라는 과감하게 그걸 드러내놓고 쓴다.


그래서 소설 속으로 저벅저벅 걸어들어갔고 소설 속에서 우리를 내다본다. 

소설 속에 존재하지 않은 인물이면서 동시에 소설 속 인물을 응시하는 인물로 선다.


이제까지 이런 화자가 있었던가, 소설에.

과감한 용기, 부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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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락
필립 로스 지음, 박범수 옮김 / 문학동네 / 201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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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마력을 잃고 말았다. 욕구가 소진된 것이다. (9p)

전락,이 온 것이다.

육십 대 노장 연극 배우, 사이먼 액슬러에게 전락이 찾아왔다.


도저히 연기를 할 수 없고 무대에 오르는 것 자체가 고통스러졌다.


전락의 이유는 나오지 않는다.

하긴, 전락이 찾아올 때 그 이유를 알 수 있는 이는 아무도 없다.


그러나 사실, 그걸 궁금해할 필욘 없다.

첫문장에서 작가가 밝혀 두었기 때문이다.


욕구가 소진되었다고.


그럼 또 우린 그 밑을 따지고 묻는다.

왜 욕구가 소진되었는지.


하나의 이유일 수는 없을 것이다.

나이탓만 할 수도 없을 것이다.

떠난 아내와 아들 탓만 할 수도 없을 것이다.

소설에서 표면적으로 언급되지 않은 또 다른 무수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소설의 텍스트 안에서만 갇히지 않은, 소설 속 인물의 또다른 비밀한 삶이 있을 터이기 때문이다.


첫 문장에서 열 줄 정도 내려가면 또 다른 문장이 나온다.


재능이 죽어버린 것이다. 


어떤 것이 먼저인지 알 수는 없다.

욕구가 소진된 것이 먼저인지, 재능이 죽어버린 게 먼저인지.


욕구와 재능은 불가분적 관계로 짜인 단어다.

따로 존재하긴 힘들다. 


재능이 있는 곳에 욕구는 대동한다.

재능을 쓰고 펼치기 위해서다.

욕구가 있는 곳에 재능은 반드시 대동하지 않는다.

그러나 적지 않은 경우, 욕구가 있으면 없던 재능도 올라온다.

정말 그런 경우가 왕왕 있다.

그렇게 보면 액슬러는 욕구가 떨어진 게 먼저가 아닐런지.


욕구든 재능이든,

연기하는 데 반드시 필요하다고 의지했던 무언가가 소거되었다.

그게 이 소설 '전락'의 시작이다. 


꼭대기에 올라가 있던 액슬러는 곤두박질친다(전락).

바닥으로 내려온 것이다.


이 소설의 원제는 'The Humbling'이다.

굉장히 뜬금없어 보인다. 그런데 한국 제목, 잘 지었다.

'humble'의 어원은 'ground'이다. 'low'이다. 


*출처: google.co.kr


'바닥으로 낮게 떨어지는' 것이 'The Humbling'의 지반이고 보면 '전락'은 멋진 제목이다.


그에게 연기는 뭔가를 모면하기 위해 밤마다 애써 하는 숙제 같은 것이 되어 버렸다. (12p)


이 소설에서 개인적으로, 가장 인상적이었던 문장.


뭔가를 모면하기 위해 밤마다 애써 하는 숙제 같은 것들의 목록을 적어 보았다.


나같은 평범하기 그지없는 삶에도 꽤 많았다. 

아니, 평범하기 그지없는 삶이라 많은 지도 모른다.


목록을 채운 글자들을 가만히 바라보게 되었다.

모면해야 할 무언가가 없다면...

그게 '자유'라는 걸 테다. 

모면해야 할 무언가를 가진 사람은 그 무언가를 두려워할 수밖에 없다.

두려움이 있는 삶에 '자유'란 성배일 뿐이다. 

존재하기만 할 뿐, 결코 손에 잡히지 않는.


무엇을 모면하려 하는가.


작가는 원래 답을 주는, 친절한 사람이 아니다.

작가는 원래 질문을 던지고 사라지는 황당한 존재이다. 


후다닥 달려가 그 팔을 잡고 뒤돌려

이런 질문을 던지고 그냥 가면 어떡해요.

모르고 살 때가 낫지, 이제부터 이 생각만 들 거 같아요.

내 이전 생으로 돌려줘요. 이 질문 가져가요.


그럴 때 작가는, 슬며시 잡혔던 팔을 빼며 이렇게 말할 사람이다.


이젠 내게서 떠났어요. 당신 것이에요.

(누가 내 소설, 읽으랬나)


나는 내게서 팔을 빼고 떠난(실제로 그는 2018년 작고했다) 필립 로스의 등을

바라보며 이제는 내 것이 된 그의 질문을 쳐다본다.


무엇을 모면하려 하는가.


큰 수확이었다. 

입때껏 손에 넣으려 했고 얻으려 했던 내 모든 행위들이

무언가를 모면하기 위한 나름의 방책이었음을 깨닫지 못했다.

나는 조금, 혹은 아주 높이 있는 것을 내가 찾으려는 줄만 알았다.


나는 사실, 두려움으로 가득 차 있었던 셈이다.

두려운 걸 모면하기 위해.


칼 융의 '그림자'가 차지하는 면적이 아주 컸던 셈이다. 

'전락'을 읽으며 내내 칼 융의 '자아(Self)'가 떠올랐다. 

무의식과 의식을 통합해 '에고'에 머무르지 않고 '셀프'를 이룩할 수 있다고 한.


'자아'는 코어가 아니라 전체다.

'에고'도 기꺼이 떠안는 게 '자아'이다.


내가 모면하고자 애썼던 것은 '에고'에 갇혀 있었을 것이다. 


내가 모면하고자 애쓸 정도로 두려워하는 것은 무엇인가.


이제 우리의 잔치는 다 끝났다. 말한 대로 이 배우들은 모두 정령이었다 이제 다 흔적도 없이, 완전히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렸다. 그는 혼란스럽게 되풀이 되는 '흔적도 없이'라는 두 마디를 머릿속에서 도통 몰아내지 못한 채 아침 내내 침대에 무력하게 누워 있었고 그 두 마디는 점점 의미를 잃어가면서도 뭔가 모호한 비난의 분위기를 띠었다. 그의 복잡한 전인격이 '흔적도 없이'라는 말에 완전히 휘둘렸다.

(16p)


(여기서 '전인격'이 바로 '전체'를 칭하는 칼 융의 '자아' 아닐까 말이다.)


흔적도 없이.


액슬러가 두려워한 것은 이 단어다.

그는 자신이 곧 흔적도 없이 사라질 것이라 두려워하는 것이다.


급기야 그는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존재가 되지 않기 위해 

예순의 나이에 아이를 갖고 싶어한다.

친구의 딸인 페긴에게서 그걸 이루고자 한다. 


그녀의 내면에 고갈되지 않은 소망 같은 게 아직도 존재하다니. 

그게 아니었다면, 그녀에게 약간의 운이 따른다면 그들 사이에 불이 붙어

그녀가 마음속에 품고 있던 일을 해낼 수 있을 거라는 희망에서

그와 같이 있고 싶어했던 것이리라. (28p)


페긴의 입장에서 진술되는 이 문장은 사실, 액슬러의 것이기도 하다.

소설의 인물은 각자 소설에 기여할 몫을 서로 공유하고 있으니까. 


우리 안에는 고갈되지 않는 소망이 늘 존재한다.

그리고 우리는 그 소망에 약간의 운을 기대한다.

우리는 고갈되지 않는 희미한 소망에 약간의 운을 점화해

불 붙일 수 있길 원한다.


무언가를 모면할 힘을 얻기 위해.


그리고 정말 약간의 운이 따른다면, 성공하기도 한다.


그래서 전락의 위기에서 벗어나기도 한다.

페긴처럼.


안타깝게도 액슬러에게는 약간의 운이 따르지 않았다.


필립 로스가 70대 중반에 쓴 소설이다. 

그의 마음과 처지가 많이 담겼을 것이다.


그는 무엇을 모면하고자 했을까.


그가 섰을 자리가 느껴지는 소설이었다. 

그가 소설을 통해 내세운 인물(액슬러)이 선 자리는 바닥으로 내려섰고 

그(액슬러)는 다시 올라오지 못하는 길을 선택했다.


그(필립 로스)가 내게 던지고 간 또 다른 질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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젤소민아 2024-07-06 00:2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앗, 이달의 당선작!! 자축합니다! ㅎㅎ 알라딘, 서재벗님들, 감사합니다~~

꼬마요정 2024-07-06 01: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달의 당선작 축하드려요!!!
젤소민아 님 리뷰 읽으니 이 책 읽어보고 싶습니다^^

젤소민아 2024-07-06 03:20   좋아요 1 | URL
꼬마요정님, 감사합니다~야합니다~~~ㅎㅎ 각오하시고 읽으셔요~~뭐, 소설에 꼭 필요하다고 주장해 볼랍니다~

필립 로스의
울분/전락/에브리맨~인생 3부작같은 소설들을 읽어보시길 추천드려요~


페넬로페 2024-07-06 23: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달의 당선작 축하해요, 젤소민아님!
젤소민아님의 닉네임을 보고 혹시 내가 아는 그 ‘젤소미나‘?를 생각했는데 역시나 연결되는군요.
서재 소개 멋져요.
저는 필립 로스의 소설을 아직 읽어보지 않았어요. 매번 읽는다. 읽는다. 하면서도 다른 책에 밀려요. 울분, 전락, 에브리맨~~. 꼭 읽어 봐야겠어요.

젤소민아 2024-07-06 22:57   좋아요 1 | URL
네, 그 젤소미나, 맞아요~~˝나를 좋아하지요?˝ 젤소미나가 잠파노에게 물었던 질문이 늘 제 뇌리를 맴돕니다. 한줄의 공감, 한줄의 진심...그거 주기가 뭐 그리 어렵다고..ㅠㅠ

필립 로스는 ‘에브리맨‘으로 시작해 보세요. 전 그게 제일 좋았어요~.
축하 감사합니다, 페넬로페님~

그레이스 2024-07-06 08: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젤소미나님 축하드려요~~~

젤소민아 2024-07-06 22:57   좋아요 0 | URL
그레이스님 감사합니다~서재에 자주 놀러갈게요~

모나리자 2024-07-06 22: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달의 당선작 축하드립니다~~젤소민아님.^^
7월에도 좋은 글 쓰시길 응원합니다.^^

젤소민아 2024-07-26 05:40   좋아요 0 | URL
모나리자의 미소만큼 따스한 축하댓글 감사드려요~

2024-07-24 16:2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4-07-26 05:39   URL
비밀 댓글입니다.
 
쿠조
루이스 티그 감독, 크리스토퍼 스톤 외 출연 / 야누스필름 / 201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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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는 동생만 겨냥했다. 

동생보다 서너 배는 몸집이 큰 도사견은 입에 거품을 뿜고 있었다.

눈에는 핏발이 섰으나 몽롱했다.

자신이 하려는 짓을 모르고 있는 것 같았다.


일곱 살 내 동생은 목숨 걸고 뛰었다.

나도 그 옆에서 뛰었다.

내가 차마 먹지 못한 마음은, 그 개가 나를 겨냥했으면 하는 것이었다. 

아니, 그런 마음을 먹기는 했다.

개가 동생 외 다른 이에겐 일말의 관심도 없음을 간파하고서.

그 마음이 쓸쓸해서였을까.

나는 달리면서 울었다.

동생은 울지도 못했다.

울 여력에 달려야 했으니까.


동생의 보드라운 허벅지에 개의 이빨이 가 박혔다.

동생은 무력하게 넘어지며 비명을 올렸다.

그건 '엄마'여야 했다.


반드시 엄마,여야 했다.


그런데 아니었다.

누나, 였다.


동생은 나를 향해 흰 팔을 뻗었다.

나는 개와 눈이 정면에서 마주쳤다.

동생의 허벅지에서 배어나온 피냄새에 희열을 느낀 개는

급기야 눈빛에 초점이 모아졌다.


그 초점이 내게 와 박혔다.


도망쳐라

내게서 도망쳐라


나는 홀린 듯 뒷걸음질 치다 다시 전력질주했다.

집 문을 부술 듯 박차고 들어가 단말마의 비명을 쏟아내고 쓰러졌다.


"아부지, 대성이 죽는다아!! 개새끼한테 물려 죽는다아!!"


나는 그 길로 까무러쳤고 정신이 들어보니 집에는 아무도 없었다.

나는 중죄를 지은 범죄자 심정으로 내 무릎을 세워 거기 얼굴을 처박고 하염없이 울었다.


동생은 밤이 되어서야 돌아왔다.

한달동안 물린 다리를 펴지 못했다.

뼈가 드러났다는 허벅지에는 두툼한 붕대가 매어져 있었다.

나는 자다말고 일어나 자는 동생 옆에 무릎을 꿇고 울었다.

그제야 드는 마음에 가슴을 치면서.


내가 물렸다면 좋았을 걸.


스티븐 킹의 '쿠조'에는 미친개가 나온다.

미친개가 제대로 사람을 물고 다닌다.

스티븐 킹의 디테일이 유감없이 발휘된다.


(책으로 번역된 건 없어서 DVD를 가져왔다)


하지만 스티븐 킹도, 감독도 채 담지 못했다.


미친개의 눈빛은 저렇지 못하거든.

미친개의 눈을 명치 언저리쯤에 박고 사는 사람만이 알아보는 게 있거든.


저건 멀쩡한 개가 그런 척하는 미친개거든.


소설 쓰는 내가 소설에 담아야겠다.

이 죄책감의 한 가닥 가지 끝이라도 자르려면

나는 그 눈빛과 정면으로 마주해야 할 것이다.


그래, 내 다음 소설은 '(미친) 개'다.


제대로 마주하자, 미친개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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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랜뉴 샌드위치
시바타쇼텐 엮음, 조수연 옮김 / 시그마북스 / 202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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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터에 도시락을 싸 갖고 다닌다.

액젓과 마늘이 많이 들어가는 한국음식은 냄새 때문에 노노.

그렇다면, 단연 샌드위치다.


빵만 있으면 된다.

식빵?


보드라운 한국 식빵.

미국에서는 사치다.


미국식빵은 퍽퍽하다. 보드라움은 일도 없다.

(보드라움을 억지로 입힌 브리오슈 같은 건 물론 있다)


미국식빵엔 어떤 내용물을 넣어도 맛이 없다.

한국에서 먹던 그맛이 안난다.


한국식빵을 파는 한국 베이커리가 있다.

멀다.

잘 못간다.


퍽퍽한 미국 식빵에 이런 멋진 샌드위치 레시피북은 가당치도 않다.


그래도 샌드위치 레시피북은 꼭 산다. 

그대로 해먹지는 않는다. 


나의 샌드위치는 언제나 BLT. 

혹은 냉장고에 굴러다니는데 빵에 끼울 수 있는 거 아무거나. 

그런데도 이런 책은 산다. 

언젠가는 이렇게 해 먹지 않을까, 하는 희망? 기대? 

부질없단 걸 알면서도. 내게는 참 부질없는 꿈 같은, 샌드위치.


결혼기념일 아침인데...


샌드위치가 먹고 싶은 건 뭐지.

아하, 남편도 만들 수 있으니까!


또또 이런다...


부질없는 희망, 기대.

샌드위치는 이렇다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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