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문학 세계문학 단편선 12
플래너리 오코너 편을 완독했다.
스스로 칭찬해~~~.
31편의 단편 중 국내에서 오코너의 명작으로 가장 잘 알려진 작 품은 두 개.
좋은 사람은 찾기 힘들다.
절름발이가 먼저 올 것이다.
No wonder.
과연 그랬다.
명성에 걸맞았다.
그래서, 그 아우라 때문에 칭송하면서 읽게 된 것도 없지 않아 있을 것 같다.
반대로, 명작이라 소문 났으니 딴죽마인드가 발동해 어떻게든 흠을 잡아보려 기 쓰며 읽었든지.
과연 흠 따윈 느껴지지 않았고,
명작에서 그런 걸 느낄 깜냥도 안 되고. ^^
31편 모두 좋았다고는 할 수 없다.
대체 무슨 말을 하는지, 왜 이런 이야기를 썼는지,
분량 채우려고 한 것인지...등등 읽으며 뿔따구가 조금은 솟았던 작품도
없지는 않았다.
아주 조금.
그 반대로, 위에 언급한 두 편에 전혀 뒤지지 않는다고 보이는,
어쩌면 더 좋을 수도 있다고 생각되는 작품이 바로 <오르는 것은 모두 한데 모인다>였다.
우선, 선명하게 잡히는 키워드가 좋았다.
키워드가 선명하면 그걸 중심으로 순회하는 인물과 대사, 사건, 설정이
자석처럼 끌려들어와 읽기도 편하고 그만큼 흡수도 편하다는 장점이 있다.
마치 내가 소설을 마구 타이핑 하며 쓰는 듯한,
혹은 내가 소설 속으로 들어간 듯한 느낌도 들면서.
그만큼 소설과 동화된다는 뜻이다.
제일 먼저 눈에 띄는 단어는 뜬금없이 '감량수업'이다.
의사는 줄리언의 어머니에게 혈압이 높으니 체중을 10킬로그램 정도 빼야 한다고 말했고, 그 결과 줄리언은 수요일 밤마다 버스를 타고 시내 YMCA의 감량 수업에 어머니를 모시고 갔다.
(543)
소설의 제목이 일단 '오르는 것은 모두 한데 모인다'이다.
오르는 것(rise)을 다루고 있다.
'오르다'는 누가 봐도, '상승'의 심상이다.
안 그런가?
상승은 확장이다. 더하기다.
그런데 소설은 '감량'으로 시작한다.
이건, 더하기의 반대, 빼기다.
다시 말해, 소설가가 '대조'를 활용해 '오르다'란 중심 이미지를 빌드업해가겠다는 뜻이다.
어머니는 감량 수업이 자신의 몇 안 되는 즐거움 가운데 하나고
(중략)
어머니를 즐겁게 하는 것은 모두 사소한 것들이고 그를 우울하게 만들었다.
단순한 진술에서 작가는 인물의 갈등을 시음케 한다.
어머니는 사소한 것을 즐기며 아들 줄리언은 사소한 것을 즐기는 것이 못마땅한 지식인.
부인은 YMCA의 감량 수업 수강생 가운데 드물게 모자와 장갑을 착용하고 왔고,
또 아들을 대학에 보냈다.
어머니는 아들에 대해 자부심을 갖고
아들은 어머니에 대해 부끄러움을 갖는다.
어머니의 속물성에 대해.
줄리언은 어머니가 이기적인 사람이었으면, 술을 마시고 자신에게 소리를 지르는 할망구였다면, 자신이 스스로의 운명을 더 잘 견딜 수 있을 것 같았다.
그 모자를 쓰면 길에서 똑같은 모자와 마주치는 없을 거예요, 했지.
(중략)
"세상이 이렇게 엉망인데 우리가 무언가에 기뻐할 수 있다는 게 기적이야.
바닥이 꼭대기에 갔다니까."
(중략)
"물론, 자기 위치를 아는 사람은 어딜 가든 상관없지만."
어머니가 말했다. 어머니는 이 말을 감량 수업에 갈 때마다 했다.
경이로워서 소름 돋는 대목이다.
작가는 결국 하고 싶은 말을 드러낸다.
위치. 그리고 그 위치를 어떤 기준에 따라 편집하는 배치-.
"네 증조할아버지는 이 주의 주지사셨어. 할아버지는 부유한 지주셨고.
할머니는 가다이가 출신이야." 어머니가 말했다.
"이제 노예는 없어." 그가 짜증스럽게 대꾸했다.
"그 사람들은 노예일 때가 나았어."
547)
실로, 놀라운 일이다.
어떻게 인간의 역사는 이다지도 되풀이되는가.
오코너 시절의 '검둥이' 담론의 역사는 지금도 숱한 상이하면서 동일한 개념들로
반복되고 있다. 작가는 일상 속에서 어쩌면 앞으로 두고두고 되풀이될 조각들을,
그래서 더는 조각이 아니라 멀지 않은 미래에 거대한 담론이 될 무언가를
눈치채는 사람이 아닐까 싶은 정도다.
외모, 직급, 계급, 재력, 배경 등이란 이름으로.
"그 사람들 처우를 개선해 줘야 하는 건 맞지만,
그렇다고 울타리를 넘어오면 안 돼."
줄리언은 지금 어머니가 사는 곳을 보라고 하지만,
어머니는 그럴 생각이 조금도 없다.
어머니는 여전히 '금수저'였던 시간 속에 살고 있다.
거기서 나오려 하지 않는다. 어머니는 점점 내려갈 뿐이다.
바닥으로, 바닥으로.
줄리언은 어머니와 버스에 올라탔다.
흑인 여자가 어린 사내애를 데리고 탔다.
줄리언은 머릿속으로 재빨리 '배치'를 실행한다.
아이가 자기 옆에 앉고, 아이의 엄마가 어머니 옆에 앉기를.
어머니가 같은 곳에 위치하기 가장 꺼리는 검둥이.
그건, 줄리안이 도모하는 최상의 배치-.
드디어 사건이 터진다.
깜둥이 꼬마가 어머니의 모자를 뺏어간 것이다.
아이의 어머니는 아이를 나무라며 똑바로 앉혔는데 아이는 요란하게 키득거리며
어머니 옆자리로 돌아간다.
"내가 좋은가 봐요." 줄리언의 어머니가 말하고 여자에게 미소를 보냈다.
그것은 어머니가 열등한 자에게 특별히 친절을 베풀 때의 미소였다. 줄리언은 모든 게 어그러졌다는 걸 알았다.
어머니의 일그러진 자부심은 석고처럼 굳은 채 변화의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줄리언은 좌절한다.
급기야 어머니는 함께 내린 검둥이 아이에게 '적선'하듯, 1센트 새 동전을 내민다.
아이의 엄마는 기겁하며 적선을 거절하고 아이를 들쳐 없고 갈 길을 간다.
어머니는 YMCA로 가지 않고 집으로 가자고 한다.
그러고는 계속 걸어간다. 줄리언은 달려가 어머니를 잡아 세운다.
그리고 어머니의 얼굴을 보았다가 깜짝 놀랐다.
생전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할아버지를 불러. 여기 와서 나를 데려가시라고 해." 어머니가 말했다.
그 순간, 오코너의 한결같은 집요함이 여지없이 발휘된다.
몰락의 절정에서 도래하는 은총-.
오코너의 '오르기(상승;rise)'는 '더하기'가 아니라, 빼기였다. 몰락이었다.
바닥이 하늘을 치는 게 아니라 하늘이 바닥을 때릴 때야 비로소 내려오는 은총-.
인간은 각자의 위치와 계급, 배경과 집착 속에서 흩어져 살아가지만,
은총의 순간에는 아이러니하게도
모두가 동일한 자리, 동일한 운명, 동일한 종말의
한가운데로 불려 모인다(converge)
어머니가 쓰러지며 드러낸 낯선 얼굴은,
우리가 피하려 해도 끝내 모일 수밖에 없는 인간 조건의 집합소,
바로, 은총과 몰락이 겹쳐지는 자리였다.
위아래의 서열도, 과거의 영광도 소용없는 자리-.
오직 은총 앞에 한데 모인 인간의 얼굴만이 남는 곳-.
그곳이 바로 우리가 이룰 수 있는 '최상의 배치',
우리의 '위치'여야 한다고 작가는 말한다.
더 높은 자리를 지키려던 줄리언의 어머니는
결국 가장 낮은 자리에 쓰러짐으로써,
역설적으로 들어 올려져 '오르는 것'이 되어
검둥이들과 모든 이들과 한데 모였다.
바닥에서.
바닥에서 오르는 자가 되기.
그래서 한데 모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