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에 관하여 수전 손택 더 텍스트
수전 손택 지음, 김하현 옮김 / 윌북 / 202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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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전 손택의 글은 항상 생각을 많이 하게 한다. 그가 글에서 든 사례들은 오늘날에는 더 이상 적합하지 않은 것들이 많지만 그럼에도 그의 글이 낡았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 것은 그의 글들이 포착하고 있는 세계의 본질이 변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고전적인 의미의 식민지는 사라졌지만 예전 식민지의 피억압 민중이 차지하던 자리는 더 넓고 더 세밀하게 확대되었다.  피억압자로서의 여성의 많은 문제가 해결되어가고 있지만 그 자리에는 더 교묘하고 새로운 억압들이 들어섰다. 늘 존재했으나 자연적이고 정의롭다고 은폐 되고 무시 당해서 보이지 않던 수많은 억압들이 이제 표면에 모습을 드러냈다.


 세계는 본질적으로 변하지 않았다

 그래서 수전 손택의 글을 읽는다는 것은 무엇이 변하고 무엇이 변하지 않았는지를 확인하는 데서 그치지 않아야 한다. 변하지 않은 본질이 무엇인지 그 중심을 찾아야 한다. 그래서 수전 손택의 글을 읽는 것은 너무도 불편하고 어려운 일이다.


  인간의 노화는 그야말로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그러나 모두에게 공평한 이 노화에 대해서 조차 남녀가 이중적 잣대를 적용받아왔다는 것은 우리 모두가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다. 그러나 오늘 날에 와서는 이 문제는 좀 더 복잡해졌다. 현대 사회에서 노화는 자기관리 못한 추함으로 규정지어지고, 이것은 남녀 모두에게 마찬가지로 적용되는듯하다. 굳이 정도를 따진다면 여성에게 좀 더 가혹한 건 사실이지만 아마 앞으로 남녀간의 차이는 줄어들고 젊은 육체와 늙은 육체에 대한 차별은 더 커질 것이다. 이런 나이의 차별이 오직 육체에 대해서만 적용된다는 것은 사실 참 웃긴 일이다. 나는 사실 나이 들어가는 내가 좋다.

 육체는 비루해지지만 세상을 좀 더 넓게 명확하고 관대하게 볼수 있어졌고, 나쁜 놈은 더 미워하지만 사소한 일들에 대해 일희일비하지 않을 수 있어진 나의 나이가 맘에 든다. 세상을 살아가는 태도 중에서는 나이 들지 않으면 알 수 없는 것도 분명 있다. 하지만 누구도 그런 것에 관심가지지 않는다. 오로지 주름의 갯수를 줄이고 몸무게를 줄이고 근육의 양을 늘리는 것에만 매진할 뿐이다. 물론 건강을 지키는 것은 무엇보다 중요하지만 지금의 외모 편향이 오로지 건강 때문이라고 말할 수는 없지 않나?


수전 손택의 시대에 여성에게만 가혹했던 늙음에 대한 처우는 오늘 날에 있어서는 남녀 인간 모두에 대한 폭력으로 전화했고 앞으로는 더 그럴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수전 손택의 의견은 역사 속으로 폐기되어야 하는 것인가?


  수전 손택은 말한다. 

  성에 대한 금기는 인종적 금기와 유사한 역할을 한다고. 지금은? 나이 듦에 대한 금기와 차별은 홀로 존재하지 않는다. 70년대에도 그것은 인종과 계급 차별과 함께 작동했고 지금 역시 마찬가지다. 남녀 모두가 젊은 몸을 가지기 위해 자기 몸을 학대하고 과시하는 것은 결코 여성에 대한 성적 억압이 사라졌다는 것이 아니다. 그것이 표현되는 방식이 훨씬 계급적이 되었다라고 얘기하는 것이다. 가장 나쁜 몸의 맨 밑바닥에 가난한 늙은 여성, 그 위에 가난한 늙은 남성이 있다. 억압이 사라진 것이 아니다.


  식민지와 제국주의 본국의 해방은 같은 것인가? 누구도 그렇지 않다고 대답할 것이다. 당연히 피억압자인 식민지의 해방이 우선이다. 제국주의 본국의 인권문제나 정치개혁이 식민지에서의 억압과 등치되지 않는다. 이 둘은 전혀 다른 차원의 문제이다. 그런데 왜 여성의 해방은 남성의 해방과 같다고 말해지는가? 그것은 피억압자로서의 여성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수전 손택은 여성을 식민지로서의 제3세계로 비유하는 것이다. 어떤 문제든 해결하고자 한다면 문제 자체를 정확하게 인지하는 것에서 시작한다. 피억압자로서의 여성의 지위를 인정하지 않고 여성 해방과 평등을 얘기하는 것은 누군가가 뜬금없이 우리는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라고 외칠 때처럼 공허하고도 공허하다.


  또한 수전 손택은 여성 해방을 위한 모든 진지한 계획은 해방아 그저 평등의 문제가 아니라는 전제하에서 시작해야만 한다. 해방은 권략의 문제다(63쪽)라고 선언한다. 권력은 양보받아 오는 것이 아니다. 역사상 누구도 순순히 자신의 권력을 내놓았던 적이 없다. 일상 가정에서 가사 일의 분담을 이야기할 때 많은 남자들이 자신은 가사 일을 많이 돕는다고 페미니스트라고 자랑했다. 그러나 돕는다는 표현에는 이미 가사 일이 자신의 일이 아니라는 전제가 포함되어 있다. 생각을 바꾸려면 식사를 준비하고 청소, 빨래를 하는 것이 모든 가족 구성원 자신의 일이라는 것을 주지해야 한다. 그리고 어머니 또는 아내로서의 여성이 식사를 챙겨주지 못한 것에 대한 죄책감을 떨쳐야 한다. 적어도 어린이를 벗어난 가족에 대해서는 자기 밥은 자기가 챙기고 자기 빨래, 청소는 자기가 하는 것이 기본이 되어야 한다. 이것을 누군가 도와준다면 그건 고마운 것이지 당연한 것이 아니다. 이것을 위해 여성은 자기 자신과도 싸워야 하고 가족들, 어떤 경우에는 부모 세대와도 싸워야 한다. 가정이 남성이 권력을 가지고 남성의 자애로운 보살핌에 의존하는 한 가족 내에서 조차도 평등은 쉽지 않다.


  심지어 식민지에서 함께 민족해방운동에 투신한 여성에게도 해방이라는 목표가 달성되었을 때 이제 가정으로 돌아가기를 강요한다. 제국주의 국가에서 계급 투쟁의 성과가 여성의 해방으로 이어지지 않았던 것은 역사가 증명하고 있다. 그러므로 연대와 여성의 해방은 구분되어야 한다. 그럴 때만이 대등한 연대조차 가능하다. 대의라는 명분 하에 행해지는 모든 은폐나 뭉뜽거림은 결국 폭력의 또 다른 얼굴일 뿐이다.


  그러니 남성이 권력을 틀어 쥐고 내놓지 않는 국가나 사회에서 여성이 자기 몫의 정당한 권력을 갖겠다고 할 때의 과정이 얼마나 지난 할지는 예상되는 바이다. 뿐만 아니라 여성의 지위와 권리가 향상되어 오는 과정은 새로운 저항과 억압이 맞닿는 과정이기도 하다. 최근의 우리 사회에서 여성 혐오가 증가하는 것은 더 이상 남성 권력이 유지될 수 없는 추세에 대한 극단적인 저항이기도 하다. 내걸(남성의 배타적 권력) 왜 너네들이 가져가느냐라는 단말마적인 비명인 것이다. 심지어는 남성이 오히려 역차별이라는 말까지 나온다. 남녀가 평등해야 하는 것이 왜 역차별인지에 대해서는 사실상 인정해주고 싶은 언사가 없는 것도 안타깝다. 결국 권력은 쉽게 쟁취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남성이 내주는 것도 아니다. 언어와 일상, 관습 모든 면에서 싸우고 여성 자신이 먼저 변해야만 한다는 수전 손택의 말은 그래서 오늘 날에도 유효하다.


  책의 83쪽에서 수전 손택은 의식은 오로지 대립을 통해서만, 회유 불가능한 상황에서만 변화한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여성은 전투적으로 의식적으로 그 회유 불가능한 상황을 만들어내야 한다고 주장한다. 예를 들어 전원이 여성으로 이루어진 단체를 만들거나 가라테 수업을 듣고, 화장 중단을 돕는 센터를 세우고, 여성을 모욕하는 옥외광고를 훼손하고 등등등...... 여성이 우아하고 기품있게 싸워야 한다는 허위 의식을 박살내고 의도적으로 논쟁을 불러일으켜야 생각은 변하고 세상도 변한다고 주장한다. 그가 말하는 모든 방법이 오늘날에 유효한 것은 아니지만 중요한 것은 결국 원칙이다. 대립하지 않으면, 회유 불가능한 상황을 만들지 않으면 어떤 경우에도 세상은 변하지 않는다는 그의 주장은 여전히 유효한 것이다. 



오늘날 리펜슈탈을 탈나치화하며 그가 굳건히 아름다움을 추구해온 사제라고 하는 것은 우리가 우리 안의 파시즘적 갈망을 제대로 감지하지 못한다는 징조다  - 154쪽



 리펜슈탈의 다큐 <의지의 승리>나 <올림피아>를 볼 때 가장 많이 느끼는 감정은 전율이다. 이는 두 가지 점에서 그러한데 첫번째는 리펜슈탈이 만들어내는 모든 장면의 완벽한 아름다움이다. 다큐에서 찍힌 장면, 음악, 대사 모든 것이 극도로 통제되고 정형화된 미를 드러낸다. 특히 많은 장면의 스틸컷들은 아무 설명 없이 내놓는다면 멋지다라는 탄성 외에 할 수 있는 말이 없을 정도다. 두 번째의 전율은 다큐의 모든 장면들이 정확한 목표하에 얼마나 완벽하게 조직되었나가 너무 분명하게 보여지는데서 느끼는 두려움에 의한 전율이다. 리펜슈탈의 <의지의 승리>에 의해서 히틀러와  나치당의 뉘른베르크 집회는 독일 정신이자 독일의 구원자가 될수 있었다. <올림피아>에 의해서 독일인들은 나치에 복무하는 자신들이 게르만족의 오래된 고귀한 야만을 회복했음을 천명하고 유대인들의 지성에 반박하고 그들을 추방할 수 있는 정신적 정당성을 얻을 수 있었다. 겨우 영화 2편이 그런 엄청난 일을 해낼 수 있냐고 묻는다면, 나치의 모든 선전 선동의 정점에 위치한 것이 이 두 작품이었기에 가능했다고 답하겠다.


  그런데 레니 리펜슈탈이 전후 전범 재판에서 무죄 판결을 받은 것은 정말 이상한 일이다. 하지만 또 한편으로 생각하면 오늘 날 우리가 생각하는 독일의 나치에 대한 자세는 68혁명 이후의 일임을 생각하면 그럴 수도 있겠구나 싶다. 우리나라에서 해방 후 친일파의 단죄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했던 것처럼 독일 역시 마찬가지였으니 말이다.(물론 옆 나라인 프랑스와 영국의 눈치를 봐야했으니 그래도 한국보다 낫긴 했다)


  어쨌든 전후 레니 리펜슈탈이 전범 책임에서 자유로워지면서 아프리카 누바족을 대상으로 한 사진집까지 낼 수 있었다는 것은 굉장히 위험한 일이다. 인터넷 검색을 통해 본 그의 사진들은 피사체가 독일인에서 누바족 남성으로 옮겨갔을 뿐 그의 근본적인 미학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준다. 통제된 낭만적 이상과 그 이상을 향한 인간들의 일치된 갈망과 전진, 결국 나치 시대의 미학관에서 한 걸음도 벗어나지 않은 그녀의 세계가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리펜슈탈이 보여주는 스틸컷에 감탄하기 전에 우리 안의 파시즘적 갈망을 감지해야 한다는 수전 손택의 경고는 여전히 유효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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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슬비 2025-08-16 22:3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수전 손택에 대해 많이 들었는데, 정작 읽은책이 없어서 이번에 이 책을 구입했어요. 아직 읽지 않았는데, 바람돌이님의 글을 읽으니 읽어보고 싶네요.

바람돌이 2025-08-16 22:39   좋아요 0 | URL
저도 타인의 고통과 희곡 앨리스, 깨어나지 않는 영혼 2권만 읽었고 이번 책이 3번째입니다
다 분량이 많지 않아요. 하지만 타인의 고통이 워낙 강렬해서 늘 읽고싶은 작가였네요. 다행히 앞으로 이 출판사에서 수전 손택의 책을 계속 출판할 예정인듯 합니다. 나올 때마다 하나씩 읽어나간다면 그리 어렵지 않을듯해요.

페넬로페 2025-08-17 01:1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아직 수전 손택의 책을 한 권도 읽지 않았어요. 기회되면 읽어 보려고 해요.
세상이 많이 변한 것 같지만 꼭 그렇지만은 아닌 것 같아요.
이런 책 읽어도 가족 내에서 제 역할은 그대로일 것 같아 조금 씁쓸하기도 해요^^

바람돌이 2025-08-17 16:31   좋아요 0 | URL
제 생각에 이 책이 수전 손택을 시작하기에 괜찮은거 같아요. 우리가 잘 아는 소재를 통해 수전 손택의 날카로움을 좀 편하게 접근할 수 있어서요. 이런 책 읽어도 가족 내에서의 역할이 바뀌지 않는건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다만 제 마음이 바뀌는거 같아요. 바쁘거나 귀찮으면 남편이든 아이 밥이든 다르게 해결하거나 안 챙겨주거나 할 수 있잖아요. 그런데 예전에는 제가 그런 행위에 대해서 미안함과 죄책감을 느꼈다면 이제는 전혀 느끼지 않는다는거 밥 챙겨주는건 니들이 고마워 할일이고 안 챙겨주면 알아서 먹는건 당연한거고요. ㅎㅎ

잉크냄새 2025-08-17 10:3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수전 손택의 책은 <타인의 고통>만 읽었어요. 근데 요즘 오프라인에도 알고리즘이 작동했는지 황석영의 <수인>속에서 미국 팬클럽 회장으로 그의 사면을 줄기차게 주도한 장면, 김경만의 사진 유튜브에서 소개된 <사진에 관하여>를 보고 느낀 ‘아니 이 분의 분야는 어디까지? ‘ 라는 존경심, 그리고 오늘 이 리뷰까지 쭉 이어지네요. 다시 읽어보라는 계시인 듯 합니다.

바람돌이 2025-08-17 16:38   좋아요 0 | URL
온라인도 아닌 오프라인에서도 알고리즘이라니 너무 강력한데요
ㅎㅎ 저도 타인의 고통만 읽었는데 내용이 너무 강력해서 깜짝 놀랐어요. 고통 포르노라는 말을 절실하게 느끼게 되어 제 시야를 넓혀준 책이었거든요
이 책은 70년대 글이라 좀 올드하긴 하지만 손택의 날카로움은 그 때도 마찬가지였음을 보여주네요
잉크냄새님의 리뷰를 기다리겠습니다

망고 2025-08-17 15:0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주 오래전 <타인의 고통> 읽을때 번역 때문에 힘들게 읽었던 기억이 있어요 이 책은 괜찮겠지요? 바람돌이님의 강렬한 리뷰를 읽고나니 이 책 읽고싶어 집니다😄

바람돌이 2025-08-17 16:39   좋아요 1 | URL
타인의 고통 저도 참 힘들게 읽었던 기억이 나네요
번역도 좀 힘들었는지 매끄럽게 읽히지 않았고요. 이 책은 읽기가 그렇게 어렵지는 않았어요. 그래서 더 마음에 와닿는게 많았던거 같네요

희선 2025-08-17 18:0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수전 손택 이름만 알고 읽은 책은 없는 듯합니다 여러 사람을 말한 데서 본 건 있군요 그건 수전 손택 글이 아니고 다른 사람이 말한 수전 손택이네요 집안 일을 돕는 페미니스트다 하는 건 맞는 게 아니군요 정말 집안 일을 자기 일이 아니다 생각하는 사람 많겠지요 혼자 산다면 그러지 않겠지만... 집안에서도 자기 일은 자신이 하기를...


희선

바람돌이 2025-08-17 18:23   좋아요 1 | URL
수전 손택은 워낙 유명하다보니 여기저기서 인용이 많이 되는듯요. 그래서 안 읽어도 읽은듯한 느낌? 저는 그런 작가 엄청 많아요. ㅎㅎ

페크pek0501 2025-08-18 13: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수전 손택의 책을 두 권 가지고 있는데 중요한 부분은 제가 다 읽은 것 같아요.
이 책이 요즘 인기인 것 같은데 이 책은 읽지 못했어요. 깨어 있는 작가라고 생각합니다.

바람돌이 2025-08-18 21:06   좋아요 0 | URL
역시 페크님. 저는 수전 손택의 가장 뛰어난 점은 뻔뻔서러울 정도의 과감함이라는 생각을 해요. 타인의 고통에서는 자선적인 자세나 다른 사람의 고통을 전시하는 것을 인류애라고 믿는 것에 대해 요즘 말로 팩폭을 날리잖아요
그런 과감함이 이 책에서도 보여 좋았습니다.
 
청킹맨션의 보스는 알고 있다 - 기존의 호혜, 증여, 분배 이론을 뒤흔드는 불확실성의 인류학
오가와 사야카 지음, 지비원 옮김 / 갈라파고스 / 202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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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 전 20대때는 주로 대중교통을 이용해서 여행을 다녔다. 외진곳에 있던 지역 답사를 다니다보니 항상 교통편이 문제였고, 버스를 2시간 기다려야 되는데 뭐 5km야? 그럼 걷지 뭐, 걷다가 힘들면 지나가는 차 세우면 태워줄거야 이러고 많이 걸었다. 거의 대부분 그렇게 걷고 있으면 지나가던 자동차가 어디까지 가냐고 물어보고 태워줄 때가 많았고, 가끔은 트럭 짐칸이나 경운기도 탔더랬다. 그래도 대가를 바라지 읺는 친절은 이후 내가 자동차를 가지게 되었을 때 시골길에서 걸어가는 사람이 보이면 일단 세워서 어디까지 가세요라고 물어보는 친절로 되갚아졌다. 젊은이들도ㅜ있었고 읍내 나가는 할머니들도 있었고 등등....

몇년 전에 유튜브에 서울 만남의 광장에서 히치하이크를 하려던 유럽인이 몇 시간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히치하이크에 실패하자 한국에서 백인에 대한 인종차별을 당했다고 올린 짤이 화제가 됐었다. 이건 대중교통 인프라가 잘 갖춰진 한국 사회에서 히치하이크 문화가 거의 없는 한국 문화에 대한 몰이해로 인한 해프닝으로 나는 해석했다. 하지만 오늘 <청킹 맨션의 보스는 알고있다>란 책을 읽으면서 다른 각도로 이 문제를 볼 수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해본다. 물론 히치하이킹에 실패한 백인들의 주장대로 인종차별은 아니다. 한국인이 그렇게 팻말들고 서 있었어도 실패했을 테니까말이다. 그러니까 어디서나 걸어가는 사람을 보면 차를 세우던 시절의 우리의 심성과 자본주의적 감성 충만한 지금의 우리의 심성의 차이가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 말이다.

홍콩의 청킹맨션에는 자칭 타칭 보스인 카라마가 있다. 보스라는 말과 오래된 헝콩 아파트는 예전 느와르 영화를 떠올리게 하면서 뭔가 법죄집단의 느낌이 풍기지만 전혀 아니다. 이곳은 중국과 홍콩의 중고물품들을 수입하거나 탄자니아의 원석을 판매하려는 장사꾼들의 집결지이다. 이들 탄자니아 장사꾼들 사이에 형성돤 문화를 작가가 추적하는 것이 책의 내용이다.

청킹맨션을 중심으로 형성된 탄자니아인들의 공동체에 거쳐사는 인물들의 정체성의 규정부터 우리의 예상과 다르다. 정주자와 일시적 여행자를 구분하는 일반적인 국가의 구성원들과 다르게 이들의 대부분은 흘러가는 사람들이다. 어쩌다보니 20년째 헝콩에 거주하는 카라마같은 이도 있지만 대부분은 이곳을 거쳐 고향이든 어디든 거쳐가는 사람들이다. 카라마 역시 언제든지 고향으로 돌아간다는 생각을 가지고 산다. 다만 언제든지 갈 수 있으니까 때가 되면 가겠다는 것일 뿐이다. 이처럼 흘러오고 흘러가는 사람들이니 한 번 보고 말 사람들도 많고 사기꾼도 많고 그래서 망하는 사람도 많다. 그러면 이 공동체가 공동체라는 말이 성립할 수 있을까? 그런데 그럼에도 공동체가 성립된다는 것에 작가가 발견한 놀라움이 있다.

이들은 아무도 신용하지 않는것을 규칙으로 삼는 세계에서 누구에게나 열린 호수성(호혜성, 상호성이라는 의미에 당한만큼 갚아준다는 의미도 포함하는 개념으로 저자주에서 설명)을 기반으로 한 사업모델과 생활보장 구조를 동시에 구축하고 있다. -31쪽

이런 그들의 공동체의 특징을 잘 보여주는 것이 객지에서 죽은 탄자니아인들이 있을 때 이들의 대응이다. 탄자니아 사람들은 세계 어디에서 죽든 고향에 가서 묻혀야 한다는 풍습을 가지고 있단다. 하지만 시신을 머나먼 탄자니아까지 옮긴다니 어마어마한 일이다. 대부분의 탄자니아 가족들은 그 돈을 감당할 능력이 안된다. 그러면 카라마를 비롯한 탄자니아인드이 움직인다. 그들은 조합을 통해 기금을 모금한다. 회원들에게 의무적으로 부과하기도 하고 관련있는 모든 이들과 채널을 동원해 시신을 운반하고 고향에서의 장례식까지 치르는 것이다. 감동스럽기까지 한 이런 장면은 인류애의 한 장면으로 보이지만 정작 이를 행하는 탄자니아인들은 대단한 인류애를 말하지 않는다. 할수 있으면 하는거고 내가 하는 일에 방해가 되지 않는 선에서 겸사겸사 하는 것이다.

이 겸사겸사의 행위들이 이들에게는 중요한데 남을 위해서 발벗고 나서지는 않는다 나는 홍콩에 돈을 벌러왔고 그게 가장 중여하기 깨문에 그걸 침해하는 선의는 베풀지 않는다. 하지만 지금 일이 없어서 시간이 남는다. 그럼 너 나좀 도와줄래? 그러지 뭐. 너 방에 침대 하나 남지? 이 사람이 지금 한 푼도 없어서 잘곳이 없는데 재워줄래? 그러지 뭐. 너 이번 수입물건 가져가는 컨테이너에 비는 자리 있지? 내 고향에 보낼 물건 틈틈이 좀 쑤셔넣어줄래? 그러지 뭐. 하여튼 이런 일들의 연속이다. 이런 일의 대부분은 대가를 바라지 않고 딱히 줄 생각도 없다. 내가 선의를 베푼 사람이 내게 선의의 대가를 지불하기를 기대하지 않고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지독히 느슨한 선의의 순환이랄까? 그 순환이 홍콩에서 살아가는 탄자니아인들이 죽지 않고 쓰러지지 않고 유지되는 비결이다. 오늘날에는 발달된 인터넷 통신망덕분에 이런 연결은 더 쉬워지기도 한다.

저자는 세련된 자본주의 국가 출신답게 이들의 이런 문화와 결합한 인터넷 연결망을 정비한다면 더 사업이 잘되지 않을까라는 제안을 하기도 한다. 아마존이나 우리나라 쿠팡같은 시스템 말이다
그들의 연결망은 어수선하고 구매자와 판매자가 연결되기 위해서는 너무 많은 절차를 거쳐야 하니 단순하고 깔끔하게 아마존식으로 그러니까 좋아요 시스템으로 무장한다면 신용을 확보하기도 더 낫지 않겠냐는 것이다. 그러나 카라마는 부정적이다. 그는 자신이 주도하는 자유로운 사업가가 되고싶은거지 누군가의 노동자가 되거나 종속된 피고용자가 되고싶은게 아니기 때문이다. 홍콩에 온 대부분의 탄자니아인들이 마찬가지다.

결국 일본인인 저자와 탄자니아인인 카라마 사이에는 같은 자본주의 사회를 살아가면서도 삶의 원리와 중요도의 차이가 존재하는 것이다. 이 신기한 공동체에 대해 작가는 어쩌면 무한 경쟁의 자본주의에 대한 대안경제의 모습을 찾고 싶은 것인지도 모르겠다. 공유경제의 원리와의 접목이라든지 말이다. 물론 쉽지 않은 일이고 실패할 가능성이 더 많을테다. 하지만 자본주의가 진리로 만들어놓은 우리의 감성 - 내가 너에게 이만큼의 선의를 베풀면 너는 나에게 그만큼을 돌려줘야 해라는 - 에 대해 돌아보는 시간이 되늨것만큼은 분명하다.

어디서나 히치하이크가 가능하던 2, 30년전의 대한민국과 대부분의 곳에서 모르는 사람의 히치하이크를 꿈도 꾸지 않는 대한민국의 간극이 이토록 커진 것은 결국 근원을 따지자면 자본주의가 있을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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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마요정 2025-08-04 23:1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 책 저도 읽는 중이에요. ㅎㅎㅎ 소설인지 비소설인지 경계가 모호한 느낌입니다. 근데 홍콩이란 곳은 진짜 묘한 매력이 있어요. 다시 가 보고 싶습니다. ㅎㅎㅎㅎ

바람돌이 2025-08-04 23:18   좋아요 1 | URL
사회학보고서가 이렇게 재밌는거 반칙 아닐까요? 정말 재밌게 잘 읽었어요. 꼬마요정님 리뷰도 기대합니다.

새파랑 2025-08-05 11:0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히치하이크 요샌 좀 힘들죠..흉흉해서 낯선사람은 조심할 수 밖에 없더라구요 ㅜㅜ 선의의 순환이 그립습니다~!!

바람돌이 2025-08-05 11:06   좋아요 1 | URL
그렇죠. 범죄도 무섭지만 혹시 또 이상한 시비에 휘말리는것도 무섭고.... 딱 집어 이거 하나가 문제라고 할 수 없는 많은 것들이 얽힌 결과인거 같습니다

독서괭 2025-08-05 17:4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잉? 굉장히 신기한 책이네요. 제목만 보면 스릴러 느낌이 ㅎㅎ 홍콩에 그런 곳이 있다니, 그들의 공동체가 돌아가는 모습도 참 신기하네요. 히치하이킹은 무서워서 하지도 해주지도 못할 것 같은데 그렇게 된 게 참 안타깝네요 ㅠㅠ

바람돌이 2025-08-05 17:45   좋아요 1 | URL
이 책 굉장히 재밌어요. 우리와 다른 세계에서 다르게 돌아가는 세상원리를 카라마라는 인물을 중심으로 아주 독특하게 서술하고 있거든요.

희선 2025-08-07 04: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금은 사람이 무섭기도 하겠습니다 예전에는 사람을 믿기도 했을 듯한데... 자신이 준 사람한테 받기보다 그저 누군가한테 도움을 줄 수 있다면 주는 게 좋겠습니다 누군가한테 받으면 다른 사람한테 주기도 하겠지요 그런 게 더 좋은 게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희선
 

시어머니가 며느리로 맞은 이주여성에 대해 불만을 표현하기도 한다. 그런데 불만의 내용이 주로 며느리가 ‘불평없이 부지런히 일하고 아껴 쓰며 남편과 자녀를 돌봐야 하는‘ 기대에 미치지 못한다는 것이다." 며느리의 미덕이란 순종, 공경, 알뜰함,
부지런함이라고 여기는 관점에서 질타와 훈계가 시작된다. 애써 벗어나기 위해 노력해온 유교 가부장제의 질서를, 이제 ‘한국의 예절‘이란 이름으로 이주여성을 통해 재생산하려는 것처럼보인다. - P38

오히려 ‘며느리가 남자라니‘라는 구호는 이 사회가 평등을 추구한다면 맞서고 해체해야 했을 가족질서가 뿌리 깊게 남아 있음을 간접적으로 일깨운다. 이 구호를 들으며 성소수자에 대해불편한 마음이 생긴다면, 먼저 며느리는 여자, 사위는 남자여야한다는 관념을 의심하고 질문해보면 좋겠다. 며느리의 역할을남자가 하면 왜 안 되며, 사위가 여자이면 무엇이 문제인가? 며느리와 사위에게 어떤 역할을 기대하기 때문인가? 원치 않는 며느리나 사위를 반대할 권력은 어디에서 오는가? 우리가 알고 있는 가족은 지키고 보존해야 할 불변의 가치인가? - P40

 지금도 사람들은 누군가결혼을 하면 당연히 아이를 가질 것이라고 기대하며 "아이는 언제 낳을 거야?"라고 질문한다. 아이를 낳지 않는 부부에겐 "그럴거면 왜 결혼했냐?"고 반문한다. 그러니 동성커플 사이의 결혼은 어불성설처럼 들린다. 출산을 할 수 없는 동성끼리의 결혼이라니, 그럼 결혼이 더이상 결혼이 아닌 거다. 결혼은 출산의 기반이라는 이상을 지키려면, 동성결혼을 인정할 수가 없게 된다. - P46

부모가 결혼을 안 했는데도 그 자식을 다른 이들과 똑같이 대우한다면, 그래도 사람들이 지금처럼 결혼을 하고 자녀를 낳는 질서를 지킬까? 안타까워도 혼외출생자에게 불이익이 있어야 결혼이란 제도가 특별한 의미를 가질 테고, 그러니 어쩔 수 없이 차별이 필요하다는 결론에 이른다. 그런데 의문이 들지 않는가. 이질서는 무엇을 위한 것인가? - P55

그러니 의문이 든다. 지금 우리 사회는 무엇을 위해 결혼제도를 수호하는가? 결혼 밖에서 사람이 태어나면 정말 안 되는 걸까? 출산이 결혼의 테두리 안에 있어야 정상이라는 관념은, 의도했든 하지 않았든 사람을 적법과 불법으로 구분하며 생애의 시작부터 불평등을 만들었다. 이런 불평등을 사회가 모르는 게 아니라 부당하다고 생각지 않았던 것 같다. ‘결혼은 출산의 기반‘
이라는 이념이 무너지면 사회의 근간이 붕괴될 것만 같은 불안감에 차별을 정당화해왔다.  - P60

가족질서를 지키기 위해 (안타깝더라도 계속하여 정상과 비정상을 구분하고 ‘일탈자‘를 탓할 것인가 아니면 이런 구분을 거부하며 평등을 위해 가족제도의 변화를 요구할 것인가? 다음 장으로 이어지는 이 질문은, 사회가 사람의 탄생을 수단으로 여기는지, 아니면 그 자체로 소중한 동료시민의 등장으로 여기는지의 관점과 연결된다. - P67

이상하게 가족제도는 예외였다. 가족에 관해서만큼은 평등보다는 전통을 수호해야 한다는 주장이 지배적이었다. 민주주의이념이나 헌법 자체가 서구에서 기원한 것인데, 유독 가족에 대해서만은 한민족의 ‘미풍양속‘을 지켜야 한다는 주장이 우세했다. 양현아의 분석에 따르면, "가족법 (은) 서구법이 아닌 그 민족 고유의 ‘관습‘을 따라야 한다는 원칙 자체가 일제의 식민정책에 의해 수립된 것" 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그리하여 평등은전통적 가족질서를 해치지 않는 범위 내에서 허용된다는 생각은, 지금까지도 가족제도를 동결시키는 "절대적인 원리"가 되었다.  - P79

때때로 가장 강력한 차별은 온정적인 얼굴을 하고 다가온다.
태어날 아이의 불행을 예고하는 염려가 자기실현적 예언이 되는것이다. 사람들은 출산을 생각하는 사람에게 온정적인 염려와경고를 보냄으로써, 세상의 차별이 앞으로도 변함없이 계속될 - P90

것임을 기정사실화한다. 그리하여 실제로 닥치는 불행은 오롯이출산을 ‘선택‘한 개인의 책임으로 돌린다. 결국 그렇게 차별을 보존하고 전승하며 어떤 집단의 미래를 영구적으로 불행하게 만드는 행위에 (의도치 않게) ‘가담한다. 그런데 이런 식으로 어떤사람들을 이 땅에 오지 못하게 막는 행위는 얼마나 폭력적인가?
뒤집어 생각하면, 아동의 인생을 생각해 부모가 출산을 포기해야 한다는 말은, 사회가 변화를 도모하지는 않겠다는 변명일수 있다. 반대로, 부모가 출산에 대한 결정을 자유롭게 내릴 수있는 사회는 이미 아동에게도 좋은 사회일 것이다.  - P91

재생산 권리를 보장한다는 건 임신·출산에 관한 개인의 결정을 존중하는 일이기도 하지만, 그렇게 하여 출생하는 사람을 존엄하고 평등하게 대우하겠다는 약속이기도 하다. 차별을 용인하고 묵인할 때에는 누군가의 출산을 막는 일이 아동의 권리를 옹호하는 일처럼 보였겠지만, 차별과 맞서기로 결정한다면 양육자의 권리가 곧 아동의 권리이고 그 가족의 권리를 옹호하는 일이모든 사람의 차별받지 않을 권리를 옹호하는 일이 된다. - P94

학교는 평등한 교육을 한다고 믿으면서 오랫동안 성별분업을 염두에 두고 교육을 실시했다. 그런데 사회가 이렇게 성별분업 이념을 유지하면서 고용상의 불평등만 해결하려 하면곤란한 상황이 벌어진다. 여성에게 가사 책임을 맡기면서 동시에 임금노동을 기대하는 분위기가 이중의 부담을 초래하는 것이다. 이런 이중의 부담을 감당할 수 없을 때 여성들은 어떤 선택을할까? - P117

성차를 자연적이고 고정불변이라고 여기는 성별본질주의gender essentialism 의 관점이 교육의 이름으로 지속된다. 우리는 모두가 지구상에 평등하게 태어난 사람들이라고 말하면서도, "화성에서 온 남자 금성에서 온 여자"1" 라고 여길 만큼 성별에 따라 다른 운명을 타고 태어났다는 모순된 메시지에 길들여진다. 성별본질주의 관점에서 세상을 보면, 지금 보이는 성차가 형성된 사회적·역사적 맥락이 지워진다. 대신 가부장제를 위해 설계된 성역할을 ‘원래 그런 것‘ 혹은 ‘그래야 하는 것‘이라고 받아들이게된다. 왜 성별을 이유로 역할이 배정되어야 하는지 질문하기를잊게 된다. - P132

단순히 여성의 교육과 고용의 증진으로 가부장제가 간단히 사라질 것이라 생각하면 서툰 기대가 아닐까. 가부장제는 가족이 가족에게 행하는 성적인 통제와 잔인한 폭력을 통해서도 연명하고있다. - P140

현대사회의 계급 재생산은 외형적으로는 합법적이고 공정하다. 엘리트 계층이끼리끼리 만나 중산층을 형성하고, 축적된 부와 네트워크를 통해 고소득으로 진입하는 교육 기회를 독점하며, 이로써 자녀에게 계층을 세습한다. 여기서 중요한 건, 이 모든 과정이 가족의이름으로 이루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 P159

역사적으로 가족은 상이한 생활조건 속에서 다양한 형태로구성되어왔다." 한국에서도 가족이 변해왔고 지금도 변하고 있다. 가령 지금의 한국은 과거보다 결혼을 적게 하고 이혼을 많이 한다. 이 사실을 두고 가족의 ‘위기‘나 ‘해체‘라고 묘사하는것과, 가족의 ‘변화‘나 ‘다양성‘의 증가라고 표현하는 것은 다르다. 전자의 ‘위기‘와 ‘해체‘ 담론은 특정 가족 형태를 ‘옳다‘고 전제한 진단이다. 이에 대해 윤홍식은 이렇게 비판한다. "가족의특정 형태의 변화를 가족의 해체로 이해하는 것은 가족이 지역과 시대에 따라 다양한 형태로 존재했고 변화했다는 다양성과역동성을 부정하는 것이다." - P188

 동성애, 그리고 동성결혼을 반대한다는 것은,
곧 사람이라면 모름지기 이성과 결혼하고 자녀를 출산해야 한다는 메시지이고, 여성과 남성에게는 서로 다른 역할이 있음을 상기시키는 일이었다. 말하자면 성소수자 반대운동은 가족각본을절대적인 도덕률로 신앙화하는 작업이자, 가족각본에서 벗어난삶의 형태를 부정하고 가부장적 질서를 유지시키는 핵심 담론이었다. - P1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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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 읽으면서 흥미로운 대목이 있어서 메모

1890년대 같은 시기에 똑같이 여성교육이 필요함을 주장하면서도 남녀의 생각이 이렇게 다를 수 있다니....

독립신문의 남성이 쓴 것이 분명한 사설은 여성교육은 자식 교육을 잘하기 위해서 필요하다고 주장한다면

여성이 쓴 <여권통문>에서는 독립된 인격으로서의 여성교육의 위치를 명시하고 있다.

100여년이 훌쩍 넘는 시기동안도 사실상 남녀의 생각의 간극은 딱히 좁혀지지 않았다는 느낌이다.


사나이 아이들은 자라면 관인과 학사와 상고와 농민이 될터이요. 계집 아이는 자라면 이 사람들의 아내가 돌 터이니, 그 아내가 남편만큼 학문이 있고 지식이 있으면 집안 일이 잘 될 터이요, 또 그 부인네들이 자식을 낳으면 그 자식 기르는 법과 가르치는 방책을 알 터이니 그 자식들이 충실할 터이요(...) 그런즉 여인네 직무가 사나이 직무보다 소중하기가 덜하지 아니하고 나라 후생을 배양하는 권이 모두 여인네에게 있은 즉 어찌 그 여인네들을 사나이보다 천대하며 교육하는 데도 등분이 있게 하리오.  -110쪽, 1896년 5월 12일 <독립신문> 사설



어찌하여 신체 수족 이목이 남자와 다름없는 한가지 사람으로 심규에 처하여 다만 밥과 술이나 지으리오. (....) 우리도 혁구종신(옛것을 버리고 새것을 따름)하여 타국과 같이 여학교를 설시하고 각각 여아들을 보내어 갖가지 재주와 규칙과 행세하는 도리를 배워 향후에 남녀가 일반 사람이 되게 하려고 곧 여학교를 설시하오니....  - 114쪽, 1898년 9월 1일 이소사, 김소사(소사란 기혼여성을 부르는 명칭)의 <여권통문>



또 하나 흥미로운 인물 발견


125쪽에 등장하는 최활란이라는 여성

김활란이 아니고 최활란? 활란이란 이름이 흔한 이름인것도 아닌거 같은데 뭐지?하고 찾아봤더니 잘 알려진 김활란과 동명이인이다.

그런데 진짜 웃기는게 이 여성의 본명이 심지어 김활란이다.

최씨 성을 가진 남성과 결혼하면서 서양식으로 최활란으로 바꾼 것.

그리고 인천 출신, 이화학당 출신, 개신교 감리회 신자, 여성운동,친일행적 등에서 김활란과 거의 활동이 겹친다.

웃기는 우연은 이화학당 제2대 메이퀸이었단다. 

우리가 익히 잘 아는 김활란은 제3대 메이퀸이고.....

이 책에 나오는 그녀의 어록은 다음과 같다.


학교에서는 성교육을 시켜 [여학생에게] 자기네의 정조가 생명[처럼] 중대함을 가르쳐서 (...) 스스로가 공포심이 일게 되어 여자로서의 중대한 정조를 지키도록 하여야 하겠습니다..  - 125쪽


2명의 김활란을 굳이 구별하지 않아도 될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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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마요정 2023-09-08 17:3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2명의 김활란을 굳이 구별하지 않아도 될 듯하다 ㅋㅋㅋㅋ
이름도 같고 생각도 비슷하고 소름입니다. 어후

자식 교육을 위해 여자가 교육을 받아야 한다는 건, 마치 이 자리는 미래의 어머니가 앉을 자리입니다. 뭐 이런 거랑 느낌이 같네요. 어쩜 변하지를 않을까요...

바람돌이 2023-09-10 22:01   좋아요 1 | URL
처음에는 최활란이라는 이름이 신기해서 찾아봤는데 찾으면서 둘이 너무 비슷해서 진짜 깜짝 놀랐네요. ㅎㅎ
저 변하지 않는 가족주의와 자식을 위한 어머니상을 강요하는 이유가 이 책에서 적나라하게 펼쳐집니다. <가족각본> 강추합니다. ^^

잠자냥 2023-09-09 09:2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ㅋㅋㅋㅋㅋ 마지막 줄 너무 웃겨요 ㅋㅋㅋㅋㅋㅋ 저런 거 보면 사람 인생이 진짜 이름 따라가나 싶기도 하고 ㅋㅋㅋㅋ

바람돌이 2023-09-10 22:02   좋아요 1 | URL
최활란 뭐하는 사람인지 찾아보다가 허탈해진 제 마음입니다. ㅎㅎ

책읽는나무 2023-09-09 11:5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활란스럽군요.ㅋㅋㅋ

바람돌이 2023-09-10 22:02   좋아요 1 | URL
오 나무님!! 역시 100자평의 귀재는 딱 한줄로 정리해주시는군요. 감격했습니다. ^^

독서괭 2023-09-09 12:0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 신기하네요!!
여성교육 주장한다고 하면 마치 페미니스트 같지만 들여다보면 완전 반대인.. 그러면서도 스스로는 페미니스트라고 생각할지도??

독서괭 2023-09-09 12:03   좋아요 2 | URL
찾아보니 김활란은 본명이 김기득이고 7세에 세례명 Helen의 한자표기인 활란으로 바꾼 거라 하네요~ 최활란은 본명이 활란이고 ㅎㅎ

잠자냥 2023-09-10 22:05   좋아요 2 | URL
김활란 태어날 때부터 기득권 ㅋㅋㅋㅋㅋㅋㅋ

바람돌이 2023-09-10 22:05   좋아요 1 | URL
저 때 두 활란 모두 자신이 여성계의 선구자라고 생각했을거예요.gg
아 전 김활란의 본명이 김기득인건 처음 알았네요. 그러고 보니 활란이란 이름이 그리 흔한 이름이 아닌데 저렇게 동시대에 같이 있을수 있었을까 궁금했는데 세례명 Helen을 생각하니 알겠네요. 아마 둘다 세례명에서 유래하지 않았을까 싶네요.

바람돌이 2023-09-10 22:07   좋아요 1 | URL
잠자냥님 그러게 말예요. 둘다 태어날 때부터 기득권...... ㅎㅎ

책식동물 2023-09-12 17:1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두 명의 김활란을 굳이 구분 안 해도 된다. 정말 와닿네요......

바람돌이 2023-09-13 21:19   좋아요 0 | URL
이름이 같다고 사는 방법도 같아지는게 아닐텐데 말이죠. ^^ 신기하긴 하네요. ㅎㅎ
 



이 책의 핵심은 마녀사냥을 자본주의의 본원적 축적과정에서의 필수적인 과정으로 연결짓는 것이다.

맑스주의에서 말하는 본원적 축적이란 토지와 같은 생산수단의 사유화와 노동계급의 형성과정을 핵심으로 한다.(이 책에서 그토록 강조되어 말해지는 인클로저 운동과 이를 통해 토지에서 쫒겨나는 농민들이 바로 그 과정이다.)

이 두 과정 모두에서 기존의 공동체를 해체하는 것은 필수적이다. 

토지는 공동체의 소유에서 해체되어야 하며, 개인 노동자들 역시 봉건적 신분적 구속과 토지에의 구속에서 벗어나야 하는 것이다. 

여기서 저자인 실비아 페데리치는 이 중세적 공동체를 유지하는 핵심이 바로 여성들의 공동체였다고 주장하는 듯하다.

따라서 여성과 그들의 공동체, 그리고 그들이 공유하고 있던 전통적 가치와 관계들이 핵심 공격대상이 될 수 밖에 없었고, 마녀사냥은 이를 위한 가장 효과적인 공격 수단이었다는 것, 그리고 마녀사냥과정에서의 여성들을 죽이는 방법이 그토록 잔인했던 것은 자본의 공격에 대해 함부로 저항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한 공포분위기의 조성 수단이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어서 저자는 오늘 날 특히 아프리카 지역에서 이런 자본의 본원적 축적이 일어나고 있고, 이 지역들에서 과거와 같은 마녀사냥이 다시 일어나고 있음을 얘기한다.

오늘날 아프리카나 다른 제3세계 지역의 자본주의화는 당연히 제1세계의 자본투자에 의한 것일 수 밖에 없고, 따라서 제3세계 지역들에서의 마녀사냥의 재현이 바로 UN을 비롯한 제1세계에 직접적인 책임이 있음을 지적한다. 

유럽과 미국의 페미니스트들조차도 아프리카, 아랍, 라틴 아메리카에서 일어나는 여성에 대한 마녀사냥의 재현에 대해서 입을 다물고 행동하지 않는 것에 대해서 비판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저자의 견해에 대해서는 몇 가지 의문점이 든다.


1. 근세에 들어 마녀사냥이 본격화하기 이전 중세 공동체 사회의 가치를 유지하고 공동체의 경제를 담보하는 것이 정말 여성이었나? 저자의 견해를 받아들이면 중세가 자본주의보다는 여성에 대한 억압이 덜했다 내지는 중세에는 여성들의 파워가 더 컸다는 견해로도 소급될 수 있을 것 같다. 저자가 물론 대놓고 이렇게 말하지는 않지만 충분히 그런 혐의는 보인다. 문제는 이런 식으로 문제제기를 하면 결론이 여성의 전통적인 공동체를 회복하자 뭐 이런 식으로 갈 수 있다는거다. 중세적 공동체문화의 회복이 정답인가? 아니라는 것 다 알지 않나? 왜냐하면 중세라고 딱히 여성에게 다르지 않지 않은가말이다.


2. 마녀사냥을 자본의 본원적 축적과 연결지어서 설명한 것은 굉장히 독특하고 새로운 해석이다. 또한 자본주의가 농촌의 토지를 사유화하는 과정에서 공동체의 가치를 지키고자 했던 여성들을 제거하는 수단으로 마녀사냥을 활용했다는 것도 수긍할 수 있다. 자본주의는 정말 괴물처럼 모든 것을 먹어치웠고, 자본주의가 나아가는 길에 방해가 되는것에 공포를 활용하는 것 역시 오래 된 수법이다. 그런데 그것을 마녀사냥의 본질적 원인으로 보는건 좀 생각해봐야 할거 같다. 

실제로 마녀사냥과정에서 돈많은 과부나 결혼하지 않은 상속녀들이 마녀로 몰린 경우가 많았다. 그 배후에는 당연히 그들의 재산을 빼앗고자하는 친척 남자들과 재산몰수에서 이익을 얻을 교회나 재판관들이 있었던 것은 당연하고. 또 마녀사냥은 종교가 최고의 권위를 과시하던 중세가 아니라 중세의 해체기- 종교적으로는 종교개혁으로 인해 카톨릭이 위기에 처했던 시기에 가장 끔찍하게 일어났다. 여기서 보다 주도적이었던 것은 기독교 내의 구교와 신교사이의 주도권 다툼이 희생양을 찾았다는 견해도 가능하다. 사실상 마녀사냥처럼 커다란 역사적 사건을 단 하나의 주된 원인으로 환원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 그러면 저자는 왜 무리하게 이런 해석을 시도하는 걸까?


3. 내 생각에 마녀사냥에 대한 이런 해석은 오늘날 아프리카와 인도, 라틴아메리카 일부 지역에서 재생되고 있는 마녀사냥에 대한 근원적인 책임을 묻는 것과 관련이 있다고 생각된다. 저자는 지금의 마녀사냥 역시 자본주의의 확산과정과 필연적인 관계가 있다고 주장하며 그 책임을 자본에 돌린다. 인도의 지참금 살인, 아프리카의 채굴경제를 위한 다국적기업의 토지강탈은 당연히 돈의 문제다. 그러나 그것만인가? 이 지역들에서의 여성에 대한 억압과 살인이 자본이 철수하면 해결될 수 있는 문제인가? 이 지역들 내의 빌어먹을 역사적 전통들은 여성억압과 살해와 관련이 없는가? 아니면 적어도 부차적인 문제라고 치부할 수는 있는가? 문제는 저자의 해석을 따르면 오늘날 아프리카, 아시아등의 지역에서의 여성살해의 원인을 너무 좁게 잡음으로써 그 해결책 역시 편협해지지 않는가 하는 점이다.


저자의 해석은 신선했고, 마녀사냥에 대해 새로운 관점과 원인을 파악할 수 있는 힘을 줬지만 그 해석이 지나치게 과장되어 현실을 이론에 맞추고 있지 않나 하는 의심이 든다. 이 책이 팜플렛의 성격이 강하다는걸 감안하면 나의 기우일 수도 있겠지만 고민을 좀 더 해봐야 할 거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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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넬로페 2023-08-16 01:2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바람돌이님, 넘 똑똑하세요.
이렇게 조목조목 설명하고 비판하고 해석해 주시다뇨👍👍
마녀사냥을 자본주의와 연결시킨 저자의 생각도 신선해 보이고 납득이 가는데요.
자본주의가 뭔들 못하겠냐고요.

바람돌이 2023-08-16 11:14   좋아요 2 | URL
헉 똑똑이라니... 갑자기 막 으쓱하다가 그래도 내가 딱히 똑똑하지는 않지 이러면서 막 왔다 갔다리.... ㅎㅎ
그저 책을 읽다가 의문점을 나열한거고, 또 그 의문들이 실천의 방향을 잘 못 설정할 수도 있겠다라는 생각이 좀 많이 들었어요. 제가 이 저자를 좀 더 이해하려면 다른 책을 더 읽어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자본주의의 무소불위야 말해 뭣하겠어요. 무서워요. ㅠ.ㅠ

독서괭 2023-08-16 01:3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바람돌이님의 의문 제기, 공감 갑니다! 한번도 생각 못 해봤던 관점이라 신선하고 놀라웠는데, 뒷받침할 논거들에 대해서는 <캘리번과 마녀>를 읽어봐야 할 것 같아요. 저는 11월에 읽을 책으로 찜해두었습니다 ㅎㅎ

바람돌이 2023-08-16 11:15   좋아요 2 | URL
아 이렇게 읽어야 할 책이 늘어나는건 한편으로 기쁘면서도 제가 읽고 싶어서 줄세워놓은 책들을 보면 또 눈물이....ㅠ.ㅠ 이 작가의 생각을 좀 더 제대로 봐야겠다는 생각은 들었습니다. <캘리번과 마녀>요. 에휴~~~

페크pek0501 2023-08-16 13:0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의문점 제기, 잘 읽었습니다. 독서를 할 때의 ‘바람직한 자세‘인 것 같습니다.
무엇이든 관점에 따라 달리 해석할 여지가 충분하지요.
이런 페이퍼, 환영합니다!!!

바람돌이 2023-08-16 14:29   좋아요 1 | URL
아마 제가 공부가 부족해서 제대로 읽지 못한 면도 있으리라 생각됩니다. 앞으로 공부를 좀 더 제대로 해야 한다는 생각만 자꾸 드네요. 다른 분들은 어떻게 읽으셨는지도 궁금하고요.

건수하 2023-08-16 14:2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바람돌이님 이런 문제제기 넘 멋집니다 ^^ 2년 전에 읽었지만 기억과 발췌했던 것을 더듬어 댓글을 달아봅니다.

1번은 저도 <캘리번과 마녀> 읽으면서 좀 김이 빠지는 느낌이었는데.. 중세가 지금보다 나았다니 말이죠. 말씀하신대로 중세에 지금보다 생활 수준이 높았던 것은 아니고 여성의 자립도가 높았다는 것입니다. <캘리번과 마녀>에서도 공유지, 공동체를 강조하고, 페데리치가 실제로 이탈리아에서 공동체 운동에 참여했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2번은 <캘리번과 마녀>에서도 아주 구체적인 근거가 제시되지는 않고 (당시의 사료들이 별로 남아있지 않다고 하네요) 자본주의가 태동하는 시기와 마녀사냥이 많이 일어났던 시기가 같다, 그리고 그 시기 이전 아메리카 대륙에서의 식민지배와 노예화 과정에서 아이디어를 얻었다- 라고 나옵니다. 그리고 가톨릭과 청교도 국가가 종교적으로는 대립했지만 마녀를 박해함에 있어서는 뜻을 같이 했다 라는 말도 있었어요.

3번의 날카로운 지적은... 아프가니스탄을 생각하면 꼭 자본주의와 연결하여 생각할 수는 없을 것도 같습니다. 그래서인지 이 책에 이슬람 이야기는 나오지 않아서 좀 아쉬웠습니다. 물론 아프가니스탄의 탈레반도 결국 돈은 자본주의로부터 가져오겠지만요... 전에 <이슬람 전사의 탄생>을 읽었는데 이 지역 역시 경제와 정치가 매우 밀접하게 연관이 되어있더군요.


그래서 결론은... 바람돌이님이 <캘리번과 마녀>도 읽으시고 날카롭게 지적해주시면 좋겠습니다. ^^

바람돌이 2023-08-16 15:24   좋아요 2 | URL
와우 2년전에 읽을걸 기억하시다니요. 역시 공부하는 수하님 너무 멋져요.

1번에서 중세에 여성의 자립도가 높은 것도 노동의 남녀분업이 확고하게 분리되는게 자본주의에 와서부터이잖아요. 그래서 중세의 농업노동사회에서는 사실상 남녀 모두 더 열악한 처지였던 걸 또 어떻게 생각해야 하나 싶더라구요. 공동체의 복원에 대해서는 우리나라에서도 마을공동체 하는 식으로 많이 이야기되고 추진되어지는데, 그 의도에 대해서는 저도 충분히 공감하시만 그것의 효과에 대해서는 아직 잘 모르겠어요.

2번과 3번 모두 사실상 자본주의의 발흥과 확대만으로 설명할 수 없을거 같아요. 이렇게 설명해버릴 때 세계의 너무 많은 여성살해, 심지어 우리나라에서도 여성협오살해가 점점 늘어나고 있잖아요. 이런 것들에 대해서 오히려 제대로 원인을 파악하기 힘들어질 수도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자꾸 드네요.

<캘리번과 마녀>는 올해가 가기전에 읽는걸로요. 노력해보겟습니다. ^^ 그리고 다시 한번 저의 글을 진지하게 읽어주시고 이렇게 의견 주셔서 너무 감사해요. ^^

건수하 2023-08-16 16:39   좋아요 2 | URL
확실히 뭔가 적어둔 걸 보니 기억이 잘 나더군요 ^^ 그땐 아직 서재 안 쓸 때인데 나중에 서재에도 옮겨뒀습니다. 요즘 쓰는 것도 나중에 찾아볼 일이 있겠지요. 읽으면 몇 줄이라도 꼭 남겨둬야겠습니다 :)

희선 2023-08-17 00:5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마녀사냥, 그런 게 일어나지 않으면 좋을 텐데... 지금은 그런 일을 당하는 게 여성이 아닐 때도 있군요 하지만 다른 나라에서는 여성한테 더 많이 일어나기도 하겠습니다 여성이든 남성이든 같은 사람으로 여기면 좋을 텐데...


희선

바람돌이 2023-08-17 08:57   좋아요 2 | URL
저는 지금 일어나는 여성 혐오살인도 결국 마녀사냥의 일종이라고 생각해요. 우리나라도 외국도 왜 이렇게 더 나빠지는지 안타깝네요

꼬마요정 2023-08-18 01:1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자본이든 종교든 늘 약자를 귀신같이 알아보는 것 같아요... 여자는 타자이면서 소유물이라는 관념이 무의식까지 있나봐요. 그러니 경제권이 없으면 없는대로 희생되고, 있으면 있다고 희생되고, 이건 보다 더 근원적인 문제가 있는 듯 하네요. 마녀 사냥도 사실 처음엔 남녀 구분 없이 정적 제거나 재산 탈취용으로 자행되다가 점점 여자들 위주로 행해졌잖아요. ‘마녀‘란 단어가 여자에게 부정적이라 ‘마인‘이란 단어를 쓰자는 말도 있었는데 어쨌든 여자들이 아주 많이 희생된 건 사실이라 참 그렇습니다. 마법사는 괜찮은데 마녀는 부정적인 거 좀 슬픕니다ㅠㅠ 마녀 좋은데... 능력자잖아요.

사회에 부정적 이슈가 많아지거나, 경제가 어려워지거나 하면 꼭 희생양을 찾는단 말이죠. 치사하게. 그러면서 우월감을 느끼고 싶은가봐요. 무리에 속했다는 느낌도 가지고 싶고... 다음 타겟이 자신이 될 수도 있는데 말이죠... 그냥 다 초크로 목을 졸라버리고 싶어요 쳇 (아, 폭력은 안 돼!!!ㅠㅠ)

바람돌이 2023-08-18 08:53   좋아요 1 | URL
약자를 찾아내는건 본능일까요? 심지어 애들도 귀신같이 알아내거든요. 누가 약자인지...... 그걸 이성으로 눌러주는게 교육인거 같기도 하고...약자에 대한 폭력이 없었던 시절이 없었잖아요. 사실 여성만 그런것도 아니구요. 독일의 유대인 학살도 그렇고 각 지역의 소수민족 학살도 그렇고.... 폭력은 안되지만 요정님의 초크로 목을 졸라버리고 싶은 심정은 똑같이 공감합니다. 하지만 초크로는 좀 힘들지 않을까싶기도..... ㅎㅎ

꼬마요정 2023-08-18 16:13   좋아요 1 | URL
맞아요. 유대인도 집시도 이방인도 다 뭔가 약해 보이면 먹잇감이 되는 것 같아요. 무서운 일이죠ㅠㅠ 초크로 목 조를려고 열심히 전완근, 이두근, 삼두근 열심히 근육 키우고 있습니다. ㅎㅎㅎ 요즘 턱걸이 5개 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