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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결과적으로 두 학교의 경쟁은 피할 수 없었을 것이다. 크세노크라테스는 25년 동안 아카데미아의 수장으로서 플라톤 철학의 기본 방향을 거스르지 않으며 충직한 유산 관리인 노릇을 했다.
하지만 이는 곧 비판 정신이 생명인 철학적 창조력의 고갈을 뜻했다. 반면에, 아리스토텔레스는 뤼케이온에서 철학 연구의 새로운길을 열었다. 그의 관심은 이성의 눈으로 파악하는 수학 법칙의 세계가 아니라 감각을 통해 확인하는 운동과 변화의 세계였다.
. - P185

사람은 ‘필요와 상관없이 그 자체로 삶을 얻는 데서 즐거움을 느낀다. 인간의 본성이 그렇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연구한 이론학은 이런 인간 본성의 표현이다. 특히 그의 이론학에서는 자연physis 에 대한연구가 압도적인 비중을 차지한다. 그는 자연 세계 전체 · 생명 · 인간을 연구 대상으로 삼았고, 천문학 · 기상학 · 물리학 ·화학·생물학· 심리학 등을 학문으로 정립했으며, 이 모든 학문을 위한 수단으로서 논리학의 기초를 놓았다. 그의 연구에서 진지한 고려 대상이 되지 않은 것은 아카데미아에서 중시한 기하학이나 수학뿐이다. 그에게 자연에 대한 얇은 어떤 목적을 위한 것이 아니라 진리 인식 자체를 목적으로 하는 순수한 학문이었다.
- P191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술 중에도 인간의 문제를 다루는 것이 많다. 특히 윤리학 · 가정학 · 정치학 분야 저술이 그런데, 그는 이를 한데 묶어 "인간적인 것에 대한 철학"(니코마코스 윤리학』 X 9)이라고 불렀다. 이 철학의 질문은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인간이란 무엇인가? 인간에게 ‘잘 산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인간을 잘 살게 하는 정치는 어떤 것인가? 아리스토텔레스에게는 이런 실천철학의 근본 문제를 다루는 것이 동물을 관찰하고 연구하는 것보다 훨씬 더 심각한과제였다.
- P224

인간은 지성의 능력 덕분에 자연의 사다리 꼭대기에 올라섰지만, 바로 그 능력 때문에 추락의 위험성을 항상 안고 산다는 말이다. 그렇게 보면 정치와 윤리는 인간의 삶에서 있으면 좋고 없어도 크게아쉬울 것 없는 사치품이 아니다. 그것은 인간이 최악의 상태로 추락하지 않고 지성적 존재로서 잘 사는 데 꼭 필요한 조건이기 때문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윤리학과 정치학은 인간의 본성에 대한 이런 생각에서 출발해 각각 개인과 국가 공동체의 수준에서 어떻게인간이 잘 살 수 있는지를 연구한다.
- P235

가치의 기준에 대한 진지한 성찰 없이 주관적 즐거움을 행복의수단으로 내세우는 행복론은 사회적 불행을 방치하고 조장하는 위험한 이론이 될 수 있다.
- P238

이 즐거움은 자기기만이나 자기 파괴에서 오는 즐거움이 아니라 인간의 실천 능력을 올바르게 실현하는 데서 오는 자기실현의 즐거움이다. 결국 습성의 탁월성이란 우리가 ‘인간으로서 타고난 능력을잘 실현해서 잘 살게 하는 내면의 에토스고, 이 에토스는 주어진 상황에서 가장 적절한 행동을 반복함으로써 얻어진 행동의 습관적 성향이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찾은 것은 욕망이 내 주인이 되는 것이아니라 내가 욕망의 주인이 되는 길이다.
- P248

나는 돌산을 지나면서 ‘레스보스의 납 자‘가 공정함의 은유일 뿐만 아니라 아리스토텔레스의 실천철학과 실천적 지혜의 모든 것을담은 상징이라고 생각했다. 실천적 지혜는 레스보스의 납 자처럼유연하다. 그것은 탁월성이 지향하는 보편적 가치를 개별적 상황에서 적용하는 지혜다. 곧은 잣대를 놓지 않으면서 울퉁불퉁한 현실을 살아가는 것, 이것이 ‘실천적 지혜가 있는 자‘의 삶이다.
- P252

결국 아리스토텔레스에게서 정치학과 윤리학은 하나의 연장선위에 있다. 윤리학이 개인적 수준의 행복을 다룬다면, 정치학은 국가 수준에서 행복의 조건을 찾는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어떤 사람도 국가라는 정치 공동체를 떠나서 존재할 수 없는 한 개인의 행목은 이 공동체를 띠나시 실현될 수 없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치학은 이런 근본 전세히에 국기의 기원이니 구조, 다양한 정체와 동치술, 시민 교육 같은 문제를 다룬다. 물론 그 가운데 핵심은 정체에 관한 논의다. 국가를 구성하는 다양한 요소가 국가의 질료 라면,
그것들을 결합시켜 통일체를 만드는 정체는 국가의 ‘형상‘이기 때문이다. 건축자재들이 일정한 형상에 따라 조직되어 집이 만들어지듯, 국가를 구성하는 다양한 요소도 정체에 따라 국가를 이룬다. 그럼 행복한 국가를 만들어 내는 정체는 어떤 것일까?
- P259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체론에도 플라톤의 영향이 드러난다. 하지만 그의 정치학 연구는 과거에 존재했고 당대에 존재하는 수많은정체에 대한 경험적 연구를 출발점으로 삼았다는 점에서 스승의 연구 방법과 근본적으로 다르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철학의 논리가아니라 경험적 관찰과 이에 바탕을 둔 이론이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치학 연구는 그가 생명체를 연구할 때와 똑같은 태도와 방법을 취한다. 그는 생물학에서 개별 종을 관찰해서 그것들의 신체적,
기능적 특징을 분석하고 이를 토대로 동물을 다양한 단위로 분류하는 것과 똑같은 방식으로 개별 정체를 관찰하고 그것의 특징을 분석했으며 유형을 분류했다. 플라톤이 처음 착안한 여섯 가지 정체분류는 이렇게 해서 더 확고한 기반을 얻는다.
- P260

목표를 올바로 세우라! 하지만 현실적 조건을 무시하지 말고 그 안에서 목표를 실현하는 최선의 방법에 대해 숙고하고 이를 실천하라! 동물이 아닌 인간에게는숙고와 선택을 통해 주어진 현실을 넘어설 수 있는 능력이 있다. 나는 이것이 도시국가의 황혼기를 산 아리스토텔레스가 『정치학에담아낸 미네르바의 지혜고, "인간적인 것에 관한 철학"의 핵심이며,
그로부터 2400년 뒤 세상을 사는 우리에게도 여전히 유효한 사람다운 삶의 길이라고 생각한다.
- P277

아리스토텔레스를 읽는다는 것은 세상을 향해 눈을 연다는뜻이고, 나를 둘러싼 모든 것을 내 눈으로 직접 배운다는 의미다. 수많은 이론들에 현혹되는 우리에게 그는 이렇게 말하는 것 같다. ‘관찰하고 또 관찰하라!‘
- P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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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뜻에서 아리스토텔레스 학문 전체는 존재하는 모든 것에 대한 현상학‘이라고 불러도 좋을 것이다. "인간적인 것에 관한 철학", 즉 인간의 의식활동에 대한 기술, 습성과 행동의 상관관계에 대한 분석, 수많은 정치체제에 대한 기록은 그 가운데 가장 빛나는 부분이다. 그의 현상학적 논의는 우리에게 전혀 낯설지 않다. 우리는 그의 안내를 따라우리 안에서 또는 밖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실험이나 측정 기구 없이도 관찰할 수 있다. 나는 이것이 아리스토텔레스 읽기의 가장 큰매력이라고 생각한다.
- P17

‘관찰자‘와 ‘국외자‘를 가리키는 그리스어는 ‘테오로스theros‘ 다.
객관적으로 관찰하려면 국외자의 시선이 필요하고, 국외자가 할수 있는 일이 관찰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운명적으로 ‘테오로스‘
의 삶을 살았다. 이런 점에서 그는 아테네에서 태어나 그곳 사람들의 운명을 걱정하며 철학을 한 소크라테스나 플라톤과 다를 수밖에 없었다. - P22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들과 달리 현실에 참여하지 않았으며참여할 수도 없었지만, 바로 이런 이유로 인간의 현실과 그를 둘러싼 자연의 현실을 더욱더 세심하게 관찰할 수 있었다. 그래서 그의생애는 그리스어와 라틴어로 각각 비오스 테오레티코 스 bios thedretrikos그리고 비타 콘템플라티바vita contemplativa, 즉 ‘관찰자 삶의 전형을보여준다.
- P23

다채로운 자연이나 사포의 애절한 서정시 말고도 레스보스섬을기억해야 할 이유가 있다. 레스보스는 서양 생물학의 탄생지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이 섬에 머물면서 물고기와 철새 들을 연구한 것이서양 생물학 연구의 시작이기 때문이다. 레스보스는 식물학과 광물학의 고향이기도 하다. 레스보스에 함께 머문 것을 시작으로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 탐구에 동행한 테오프라스토스가 식물과 광물을 연구했다. 아리스토텔레스 연구자들은 레스보스의 에레소스가 고향인 그가 아리스토텔레스에게 레스보스섬 체류를 권했을 것이라고 추측한다. 에레소스의 해변에 사포를 기리는 조형물과 함께테오프라스토스의 두상이 있는 것은 이 때문이다.
- P94

아테네의 아카데미아를 떠난 아리스토텔레스에게 레스보스는 새로운 아카데미, 노천 아카데미아였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철학적변증술이 아니라 자연에 대한 관찰과 기록이었다.  - P117

카페에서 한 시간 넘게 나눈 대화는 난민 문제로까지 이어졌다.
내가 난민 때문에 고민이 있지는 않은지 조심스럽게 묻자 그가 간단히 대답했다. "우리도 난민이었다." 여행 전 본 기사에서 시리아난민 아기에게 우유를 먹이던 할머니가 했다는 말과 똑같았다. 기사에 따르면 어머니가 "1922년 그리스-터키 전쟁을 피해 레스보스섬에 온 난민" 이었다는 할머니는 "난민 자녀로서 그들을 친절하게대하는 것은 도덕적 의무"라고 말했다.
- P131

윤리적으로승인된 행동은 반복을 통해 내면의 습성으로 굳어진다. "우리는 정의로운 일을 함으로써 정의로운 사람이 되고, 절제 있는 일을 함으로써 절제 있는 사람이 되며, 용감한 일을 함으로써 용감한 사람이된다." (「니코마코스 윤리학 II 1) 이것이 에토스다. 에토스는 흡혈박쥐의 나눔처럼 고정된 본성이 아니라 사회적으로 획득된 행동 성향이다. 공동체는 에토스를 공유하며 윤리를 형성한다. "난민 자녀로서그들을 친절하게 대하는 것은 도덕적 의무"라는 레스보스섬 할머니의 말은 이런 에토스가 없었다면 가능하지 않았을 것이다.
- P133

아리스토텔레스는 아테네 사람도, 마케도니아 사람도 아니었다.
그는 아테네에서 시민권이 없는 거류민이었다. 이런 조건이 정치에대한 거리두기를 내면식 성형으로 굳히지 않았을까 추측해본다. 강력한 정치적 발언은 대중의 마음과 권력을 얻으려는 의지가 있을때 강해진다. 이소크라테스나 데모스테네스는 그런 권력의지를 가진 사람들이었다. 반면에, 아리스토텔레스는 그런 의지를 품을 처지가 아니었다. 그에게서 앞을 향한 의지는 권력을 향한 의지를 대신했고, 그는 이 의지를 최대한 발휘할 조건을 찾았다. - P1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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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즈를 만드는 과정은 이탈리아가 영광스러운 자신의 과거와어떻게 조우하고 있는지를 잘 보여준다. 그들은 소상이 남긴 유산을있는 그대로 내놓지 않는다. 자신의 조상이 남겨준 유산의 정수를예리하게 잡아내 이를 절차탁마해서 새롭게 만들었다. - P143

볼로냐에는 권력자의 시선에서 가장 골치 아픈 존재인 커피와 대학이모두 있었다. 책을 읽는 사람은 누구나 비판적이 된다. 그런데 커피를마시면서 책을 읽는 사람들이 한자리에 모인다면 어떻게 될까?
그래서 볼로냐는 로마나 나폴리, 교황령의 지배 아래에서 만족하며지내왔던 옆 동네 로마냐와 달리 생태적으로 기존의 질서에반대하는 반골의 기질을 가졌는지도 모르겠다. 라틴어로 자유를뜻하는 ‘리베르다 Alibertas‘를 부르짖어온 것이 볼로냐의 역사였다.
가까운 로마냐에서 세계 최초의 파시즘 국가를 선보인 독재자베니토 무솔리니 Benita Mussolini, 1493~1945가 나온 것과는 매우대조적이다.
- P214

또 볼로냐의 회랑은 볼로냐를 풍성하게 만들었다. 볼로냐대학이 시의 승인을 얻고 강의실과 교수에게 급여를 제공받기시작한 것은 13세기 이후의 일이었다. 그전까지 볼로냐 대학은별도의 건물이 없었기 때문에 회랑이 강의실 역할을 했다. 이외에도회랑에는 카페와 음식점의 야외 테이블이 놓여서, 사람들이모여앉아 볼로냐의 맛있는 음식과 자유로운 공기를 즐겼을 것이다.
아이들도 이 회랑에서 뛰어놀았다. ‘볼로냐에서는 아이를잃어버리지 않는다" 라는 속담이 있는 까닭이다. 볼로냐의 회랑은최고 학부의 강의실이었으며, 볼로냐 아이들의 놀이터이자 상인들의터전이었다.
- P248

"성을 쌓는 자는 망하고 길을 내는 자는 흥한다"라는 말이있다. 역사나 신화에서 이기심으로 인해 스스로 문을 걸어 잠근 성이야기는 참 많다. 그러나 결국 그런 성은 신의 노여움을 사거나자신보다 탐욕스러운 이웃에 의해 처참하게 무너졌다. 볼로냐는이방인을 위해 성문을 열고 길과 회랑을 만들어 도시를 연결하고, 그회랑을 높은 산으로 이어갔다. 그리고 그 길의 끝에 빛의 교회를세웠다.
- P253

법학 외에도 볼로냐 대학을 ‘모든 대학의 모교‘로 만든 학문은의학이었다. 볼로냐에 오면 꼭 봐야 하는 기념비적인 건물이 있다.
볼로냐 시립 도서관 아르키진나시오 Archiginnasio 이다.  - P276

이렇듯 볼로냐를 뒷받침해준 것은 휴머니즘(인문주의)였다.
그리스에서 만들어 로마로 이어져 내려온 인간 중심의 사고는서로마 제국이 멸망하면서 유럽에서 사라졌다. 이것이 다시 시작된곳은 볼로냐있다. 기기다 볼로냐의 인문주의는 새롭기까지 했다.
고대 그리스와 고대 로마에는 없었던 여성 존중과 노예 해방을추구했기 때문이었다. 볼로냐는 여성에게 인간이 가진 권리를인정해주었을 뿐 아니라 1257년 세계 최초로 노예 해방 법안을만들어 이를 실현한 곳이기도 하다. 어성과 흑인에 대한 사회적인정은 신앙의 자유를 찾아 목숨을 걸고 신대륙으로 건너간미국인들도 20세기가 되어서야 본격적으로 고민하기 시작했던문제였다. 그런데 볼로냐는 이를 13세기에 이미 시작했던 것이다.
- P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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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로냐가 미식의 수도라는 칭호를 얻은 것은,
그저 맛있는 음식을 만들어 먹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특이하게도볼로냐는 음식과 관련해서는 처음부터 끝을 생각했던 것 같다.
프로슈토도, 치즈도, 파스타도 그렇다. 서양 요리와 음식 문화의정점인 와인에 있어서도 그렇다. 볼로냐는 언제나 이탈리아 음식의시작과 끝에 서 있으려 한다. 그래서 볼로나는 ‘뚱보의 도시‘라는별명과 ‘현자의 도시‘라는 별명을 동시에 자지했나 보다.
- P61

볼로냐의 독특한 살루미는 그런 열망을 잘 반영한 음식이었다.
이 음식은 단순히 생존을 위해 섭취하는 칼로리만이 아니었고, 한단계 격이 높아진 시민의 취향을 드러내기에 충분했다. 적당히고귀하고 적당히 서민적이고 적당히 현학적인 볼로냐식 음식이탄생한 것이다. 그들은 돼지를 방목해서 도토리를 먹여서 키우고,
치즈를 1년 이상 숙성시키는 노력이 맛을 위해서 뿐만 아니라 시민의지위에 걸맞은 과정이라고 생각했다.  - P97

더욱 대단한 건 볼로냐의 자부심이 실체 없는 구호로 끝나지않는다는 점이다. 전통을 고집하는 원리주의자들은 대체로 시대에뒤떨어지는 경우가 많은데 볼로냐는 그 반대다. 아마 도시가 생긴이래로 교회와 황제에 계속 맞서오면서 공허한 구호로는 그들의단단한 갑옷을 뚫지 못한다는 것을 깨달은 것 같다. 토마토에서도이런 열정적인 볼로냐 스타일을 확인할 수 있다.
- P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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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모퉁이 오래된 집 - 근대건축에 깃든 우리 이야기
최예선 지음 / 샘터사 / 2021년 2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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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몸이 짐이라 뛰지는 못하지만 걷는걸 좋아한다.

오래된 집이든, 종교 공간이든, 현대의 멋진 건물이든 모든 아름다운 건축물을 좋아한다.

건축물을 보며 걷는걸 가장 좋아한다.

다만 전문적인 건축용어들은 너무 어려워서 패스

건물들에 담겨있는 사람들의 삶과, 그곳에 배어 있을 삶의 흔적들을 찾아 읽고, 보고, 느끼는 것을 좋아한다.

 

가령 이런 사진- 15쪽 최순우 옛집

 

 

이 단정한 방에서 어쩌면 최순우 선생은 <무량수전 배흘림 기둥에 서서>에 나오는 글들을 간간히 썼을지도 모르겠다.

코로나가 좀 잦아들면 서울 나들이를 해야겠다.

저기 최순우 옛집에 가서 선생이 생전에 어루만졌을 책상을 보고, 그가 거닐었을 뜰을 거닐면서 우리 미술에 대한 최순우 선생님의 그 마음을 잠시라도 느껴보고 싶다.

 

최순우 옛집이 좋은 건 사람 사는 집다운 온기가 있기 때문이다. 사람이 떠나고 문화재가 된 집들은 삶의 온기가 주는 애틋함을 잃어버리고 만다. 이곳은 내셔널트러스트 사무국과 회원, 그리고 자원봉사자들이 많은 정성과 노력으로 살뜰하게 매만지며 정성을 기울인다. 그리하여 가을에는 빨갛게 익어가는홍시를 볼 수 있고 사철 따뜻한 감잎차를 마실 수 있다.
아이를 키우기 위해서 마을 전체가 필요하다는 말이 있는데, 품격 있는 집 한 채를 지키기 위해서도 마찬가지다. 아름다움은 그토록 애써서 지켜야 하는 일이다.- P21

 

어쩌면 이 책의 저자도 나의 마음과 같은 마음이 아니었을까?

이 책에 나오는 오래된 집들을 같이 따라 여행하다 보면 그런 저자의 마음이 한껏 느껴진다.

 

때로 집은 주인이 바뀌면서 완전히 다른 삶과 마음들을 품기도 한다.

친일파의 집이었다가 민족주의자의 집으로, 남편을 잃고 홀로 60여년을 지킨 아내로 주인이 바뀐 백인제가옥은 얼마나 많은 눈물과 의지와 희망을 품고 있을까?

친일파 한상룡의 그 허영에 찬 과시욕이 남아있을 테고, 그곳을 용도 변경하여 흥사단원들이 모임을 가졌던 흔적도 집은 가지고 있으리라... 무엇보다도 납북된 남편 백인제씨를 기다리며 60년간 그 집을 지켰을 아내의 한 평생이 녹아 있을 것이다. 

그 모든 삶의 흔적이 어딘가 남아있을지도 모른다.

 

집은 알게 모르게 주인을 닮아간다.(126쪽 장욱진 가옥)

 

 

저 집의 풍경에 매달린 물고기 한마리에서 장욱진 화백의 그림 냄새가 물씬 풍긴다.

막 그린 듯 천진한, 그러면서도 애잔한 그의 그림과 이 풍경은 이토록이나 어울린다.

슬핏 스쳐지나가면 그냥 집일 뿐이지만 기둥 하나 서까래 하나 문짝 하나 자세히 들여다 보면 그 집에 살았던 사람의 마음이 보인다.

옛적 전라도 장성의 필암서원을 갔다가 기겁했었다.

학생들이 공부하는 강당이 대문쪽 정자를 보고 있는 것이 아니라 사당을 보고 있는 것이다.

그 속깊은 뜻이야 모르겠지만 그 건물배치가 보여주는 갑갑함이라니...

"학생 너희들은 자나 깨나 오로지 선현을 공경하고 배우고 익히거라.

헛된 풍경이니 풍류니 하는 삿된 것에는 눈도 돌리지 말거라"라고 건물이 엄숙하게 훈계하는 느낌이었달까?

이처럼 건물에 스며있을 사람들의 마음을 상상하면 오래된 집들을 산책하는 즐거움은 더욱 커진다.

장욱진 화가의 집에서는 구불구불한 기둥들이 그의 그림과 꼭 닮아서, 사랑스럽다.

 

집만 사랑스러운 것이 아니다.(162쪽 영천 임고초등학교)

 

오랜 역사를 가진 시골의 초등학교는 숲을 품고 있다.

건물은 오래되어 낡고 불편해서 리모델링을 들어갈 수 밖에 없겠지만 이 숲을 저 아름드리 나무를 가진 것 만으로도 이 학교는 보존되어야 한다.

저 나무들 아래 얼마나 많은 아이들이 유년을 추억을 쌓았을까?

내 기억 속 학교 하나는 목련나무 하나로 남아있다.

봄이 되면 아름드리 크게 훌쩍 솟은 나무에서 목련꽃이 피었는데 나는 아직도 그 나무만큼 아름답게 목련꽃을 피우는 나무를 본적이 없다.

매일 등하교길에 한참을 꽃을 바라보던 순간은 또한 내 삶이 그래도 아름다웠을 것이다.

 

이 책속에 아름다운 공간만 있는 것은 아니다.

쓸쓸히 쇠락해가는 소록도의 공간에서는 한센병 환자들의 아픔이 만져지고, 그들을 위해 봉사했던 오스트리아인 간호사 2분의 희생과 봉사가 같이 잊혀지는 안타까움도 전해진다.

식민지 시절 노동자들을 수용하기 위해 최소한으로 지어졌던 영단주택지역의 흔적, 김구선생의 최후를 간직하고 있는 경교장, 피난민들의 고달픔을 품고 있는 부산 아미동, 감천동지역들......

 

적산 가옥인 부산의 정란각의 구조를 보면서는 예전에 다녀왔던 군산의 적산가옥을 떠올린다.

군산 지역 최대 지주로 군림했던 일본인의 집을 보면서 성채를 떠올렸었다.

이들은 돌아갈 생각이 없었구나, 영원히 이 땅에서 조선의 농민들을 부리며 살 수 있겠다고 생각했겠구나라는게 건물 전체에서 풍겨나왔었다.

아마도 대부분의 적산가옥들이 그렇지 않았을까?

 

구룡포의 일본인 거리를 보는 마음은 작가도 씁쓸해하듯이 나 역시 마찬가지다.

자고로 집이든 거리든 이야기를 품고 있어야 한다.

관광지화 되어버린 그곳에 그 시대를 살았던 어민들의 삶이 없음으로 해서 생명없는 복원이 되어버렸고,

이대로라면 아마도 얼마 안가 찾는 이 없는 쓸쓸하게 퇴락한 관광지가 되지 않을까?

부산의 용호동 일대는 옛적에 백합조개 산지로 유명했었다.

그곳의 어민들은 그 조개를 캐는 것으로 그럭저럭 살만했다고 한다.

그런데 일본이 들어오고 어업령이 내려지면서 백합조개를 캐기 위해서는 허가를 받아야 하게됐다.

졸지에 조선인 어민들은 조개를 캘 수 없게 되어버렸고, 일본인 업자 밑에서 임금노동자로 일해야 하는 처지로 전락하였다.

지금 용호동에는 그 때의 흔적이 남아있지 않다.

그래서 그 삶의 거리를 복원하지 못한다면 구룡포 지역은 반대로 삶의 자취들은 남아있으나, 그곳을 살았던 사람들의 이야기가 빠짐으로 해서 죽어가는 거리가 되어가는 것이겠지.

 

많은 건물들을 소개하면서 각자의 이야기들이 너무 짧다는 것이 이 책의 유일한 단점이다.

깊은 울림을 느끼기에는 짧은 분량들이 방해한다.

더 많은 이야기들이 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을 감출 수 없다.

그러나 건물을 보는 작가의 시선은 제목처럼 따뜻하다.

어딘가 거닐고 싶은 봄이다.

이 책 한권을 끼고 작가가 느꼈던 그곳을 확인하고, 작가가 보지 못한 곳을 찾는 기쁨도 누려보고 싶은

그런 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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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ita 2021-04-05 09:07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저런 멋진 풍경의 시골 초등학교를 다니지는 않았으나 서울에서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여고에 다니는 동안 숲에 둘러싸여 초록빛 동산에서 시간을 보낸 것이 그때는 의식하지 못했는데 많이 스며들었던 거 같아요. 어떻게 살고싶다 어떻게 살아야겠다 그런 꿈을 품은 데 영향도 있었구요. 가슴 아픈 공간도 부러 찾아다니고 싶네요, 봄 기운 맞아서. 부산도 가고 싶어요!!

바람돌이 2021-04-05 10:12   좋아요 1 | URL
저는 섬마을 초등학교를 다녀서 저것과는 또 다른 풍경의 기억을 갖고 있어요. 점심시간에 바닷가 내려가서 굴따고 파래 뜯고..... ㅎㅎ 방학이면 아침에 바다 들어가서 밥먹을 때만 들어오는 생활요. 진짜 어디든 가고 싶은 봄입니다. 마음만 설레발... 수연님 부산 오시면 제가 찐하게 밥살게요. ^^

Vita 2021-04-05 10:26   좋아요 1 | URL
저는 밥보다 술과 함께 하는 안주를 사랑합니다 바람돌이님. 말씀만으로도 감사해요. 아 진짜 바람돌이님 만나러 부산 휙 다녀올까요 언제 ^^

바람돌이 2021-04-05 10:28   좋아요 1 | URL
아니 밥 다음에 술은 당연한거 아닌가요? 제가 좋아하는 술집들도 쫘악 ~~ ㅎㅎ

Vita 2021-04-05 10:39   좋아요 2 | URL
ㅋㅋㅋㅋ 자꾸 그러시면 저 날 잡아서 진짜 가요!!! 🤔

붕붕툐툐 2021-04-06 00:59   좋아요 0 | URL
그 날에 전 무족권 낍니다!ㅋㅋ

바람돌이 2021-04-06 11:21   좋아요 0 | URL
수연님도 툐툐님도 무조건 okok ^^

scott 2021-04-05 09:18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숲을 품고 있는 학교, 나무그늘에서 맘껏 뛰어노는 아이들,,,,
자연과 함께 숨쉬며 살아가야하는 아이들인데
급격한 산업화 도시화로
나무는 커녕 뛰어놀 공간 시간도 없고
더더욱 코로나 떄문에 원격 강의를 들어야 하는,,,,
바람돌이님에 리뷰 속 사진들 보며
지난날의 그곳 그나무 떠올려봅니다.

바람돌이 2021-04-05 10:15   좋아요 3 | URL
요즘 아이들의 안타까움이죠. 에휴... 볼 때마다 안쓰러워요.
우리집 애들 어릴 때 보니까 장난감이고 뭐고 다 필요없더라구요. 그냥 아무데나 풀어놓으면 알아서 너무 잘 놀던데..... 요즘 애들은 마스크와 원격수업의 추억을 너무 강렬하게 가질 것 같아 안타까워요.

syo 2021-04-05 11:0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누가 사진에 붕어빵 올려놨어.....

바람돌이 2021-04-05 11:50   좋아요 2 | URL
지금 배고프시죠? 그래서 포악해지신듯.... 역시 사람은 먹어야죠. 빨리 三씨랑 밥 드세요. ^^

붕붕툐툐 2021-04-06 01:00   좋아요 0 | URL
아~ 놔~붕어빵ㅋㅋㅋㅋㅋㅋㅋㅋ

mini74 2021-04-05 19:5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백석의 무우징게국 끓이는 냄새 난다던 여우난골족 그 집이 생각나네요. 집이란 생활일땐 몰랐는데 떠나오면 참 그리운 곳이 되는 거 같아요.

바람돌이 2021-04-05 21:23   좋아요 2 | URL
전 도대체 그 무우징게국이 뭘까가 궁금해요. 어릴 때 살던 집 놀던 곳 왠지 꼭 한번은 가보게 되더라구요. 뭔가 그립고 애틋해요. 그쵸?

붕붕툐툐 2021-04-06 01:03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전 남의 집 구경이 그렇게 좋더라구요! 집엔 그 사람이 고스라니 담겨 있는거 같아요~ 그러니 주인이 바뀌면 집도 변하는거 같아요!
숲이 있는 초등학교 너무 좋아요~😍

바람돌이 2021-04-07 14:00   좋아요 0 | URL
다들 좋아할 거 같아요. 집이란게 참 거기 사는 사람들의 삶이나 마음 같은게 느껴지잖아요. 그래서 저는 예전에는 별 생각없었는데 요즘은 내집을 보여주는건 부담스럽더라구요. ^^

희선 2021-04-07 03:0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품격 있는 집 한 채를 지키려면 많은 사람이 있어야 할 듯합니다 오래됐다고 안 좋게 여기는 사람도 있잖아요 숲이 있는 학교라니 좋을 듯하네요 아직 남아서 여러 이야기를 알 수 있는 곳도 있지만, 이제는 사라진 곳도 있어서 아쉽겠습니다


희선

바람돌이 2021-04-07 14:03   좋아요 0 | URL
사람들마다 생각이나 판단의 기준은 정말 다양해서 한 번씩 깜짝 깜짝 놀라게 되어요. 오늘도 아 이렇게 생각이 다르구나 하는 거 또 실감한 사건도 있네요. 어쨌든 학교는 나무가 있고 운동장이 넓고 좀 그래야 할 거 같아요. 그래서 저 시골학교가 오래 오래 남았으면 좋겠습니다.

초딩 2021-05-08 18:3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우앙 바람돌이님 이달의 당선작 진심 축하드립니다!
넘넘 멋져요 ^^

바람돌이 2021-05-08 22:57   좋아요 1 | URL
감사합니다. 초딩님이 더 멋지다고 생각합니다. 데미안으로 쓰신 글 같은걸 저는 못 쓰는 글이라 굉장히 멋지다소 생각하면서 읽었었거든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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