옴짝달싹 못할 땐 위치를 바꾸면 벗어날 수 있다. - 영화 '겟 썸' 중 

영화 '겟 썸'은 격투기를 소재로 한 성장영화다. 아버지의 음주운전사고를 방치했다는 자책감에 사로잡힌 주인공이 격투기를 배우면서 가족과 화해하고, 사랑을 이해하며 성숙해 간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주인공이 격투기를 배우는 과정에서 성장할 수 있었던 계기가 된 것은 바로 위기탈출법에 있었다. 마운트와 같은 상황에서 옴짝달싹 못할 때 스승은 위치를 바꾸어야지만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말한다. 누워서 제압당하던 몸을 180도 뒤집어 올라서야만 한다는 것이다. 물론 그렇게 하기 위해선 누운 상태에서 팔을 밖으로 빼내고 발을 상대방에게 걸어둘 수 있는 기술이 필요하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겪게 되는 수많은 좌절의 상황에서도 이같은 기술이 필요하다. 위치를 바꾸는 기술은 우리의 사고에서도 똑같이 적용할 수 있다. 역지사지와 비슷하다고나 할까. 언제나 나만 이런 일을 당해야 하냐는 피해의식에서 벗어나는 것도, 더이상 희망이 없다는 좌절에서 탈출하는 것도 물리적 외부환경 보다는 정신적 위치의 자리바꿈에서 더욱 가능한 일일지도 모른다. 영화 속 주인공이 어머니와 화해하고 여친과 사랑을 되찾을 수 있었듯이. 탈출구는 버스 속 유리를 깨는 망치를 통해 유리창을 깨뜨리기 보다는 반대편 창문을 살펴보는 것만으로도 우리 앞에 나타날 수 있지 않을까. 때론 영화처럼 그런 일이 가능할 수 있기를 소망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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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BS스페셜 <옥수수의 습격>두번째 방송은 다소 아쉬운 부분이 많다. 특히 환원주의의 위험성을 다분히 내포하고 있어 염려스럽다. 

풀을 먹고 자란 고기나 달걀, 치즈, 우유 속에서는 오메가3와 오메가6의 비율이 이상적이라는 것, 그리고 이런 음식을 먹은 사람들은 고지혈증, 고혈압과 같은 성인병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다는 것이 1부의 요점이었다. 현실은 옥수수로 이루어진 사료를 먹은 고기로 인해 오메가6가 너무 많은 육류로 건강을 해치고 있다는 것이다.  

2부는 우리가 지금과 같은 양의 육류를 소비한다는 전제하에 제작이 이루어진 듯하다. 일단 잃어버린 풀을 찾아야 하는게 최선이겠지만, 그것이 불가능한 현실에선 즉 풀을 먹고 가축을 기를 수 없다는 전제하에서 들깨나 아마와 같은 오메가3가 풍부한 씨앗들을 옥수수 사료에 함께 쓰면 고기의 오메가3와 오메가6의 비율이 이상화에 가까워진다는 것이다. 그리고 실제 오메가3를 첨가한 사료를 먹인 고기를 먹은 사람들의 콜레스테롤 수치 등이 낮아지는 것을 확인한다.  

그런데 정말 오메가3와 오메가6의 비율의 문제가 가장 큰 것이라면 왜 이런 수고를 해야만 할까. 지금처럼 고기를 먹고 오메가3를 섭취하면 그만인 것 아닌가. 궂이 고기에다 그 비싼 들깨와 같은 사료를 먹여 고깃값을 올릴 필요는 없지 않겠는가. 육류의 섭취가 가져온 문제를 고기의 성분 분석을 통해 들여다보는 환원주의가 가져다 준 오류일 가능성이 높은 이유이다.  

옥수수 사료를 먹은 고기가 문제인 것은(특히 소에게 있어서) 원래 씨앗이 아닌 풀을 먹는 가축의 위와 장이 이 씨앗을 제대로 소화시킬 수 있는 능력이 부재한다는 점이다. 이로 인해 발생하는 문제 중의 하나는 O157 과 같은 병원성 대장균이다. 가축을 도살하기 전 한달 전부터 풀만 먹이더라도 O157은 사라지지만 현재는 방사선 조사를 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쪽 분야의 전문가가 아니기 때문에 더 많은 부작용을 이야기 할 수 없지만, 원래의 식성을 무시한 사료가 건강한 가축을 키워낼 수 없다는 것은 자명한 일이다. 

더군다나 옥수수로 인한 문제는 단순히 음식을 통한 건강 문제만은 아니다. 옥수수 단일 재배로 인한 토양의 오염과 잔류 농약, 그로 인한 지하수와 하천의 오염, 다국적 곡물 기업의 횡포, 제3세계 빈곤의 문제와도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는 것이다. 

오메가3와 오메가6로 접근한 옥수수의 습격은 옥수수 사료가 가져다 준 문제점을 아주 쉽게 파악할 수 있게 도와준 반면 모든 문제점이 오메가 지방산이었다는 환원주의의 오류에 빠져있다는 아쉬움을 남겼다. 만약 제작진의 말대로라면 우리는 오메가6가 많이 함유된 맛좋은(?) 지방을 실컷 먹은 후 오메가3 캡슐만 보충해줘도 될 것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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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0일 SBS 스페셜 <옥수수의 습격>은 다소 충격적인 내용을 전했다. 고혈압과 당뇨병 등 성인병의 원인으로 취급받던 고기와 유제품이 오히려 건강을 되찾는데 도움을 준다는 것이다. 버터를 매 끼니마다 한움큼씩 먹었더니 다이어트에 성공하고, 고혈압이 나았다는 말을 누가 섣불리 믿겠는가. 그래도 실제 그런 사람들을 목격했으니 찬찬히 그 이유를 따져보아야 하지 않을까. 

스페셜에서 다룬 사람들이 먹은 고기들은 우리가 쉽게 접하는 고기와 같은 걸까. 전혀 그렇지 않다. 그들이 먹는 고기, 버터, 계란 등은 방목을 통해 자란 소와 돼지, 닭에게서 얻은 것들이다. 방목이란 바로 풀을 먹고 자랐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이게 무슨 소리인가. 소. 돼지, 닭이 풀을 먹지 무얼 먹는단 말인가. 현실을 들여다보면 절대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게된다. 광우병을 야기했던 고기의 찌꺼기들이 사료로 쓰이는 것을 금지하는 경우는 많아졌다. (물론 소 고기의 잔재를 닭과 돼지에게 준다. 그리고 다시 닭과 돼지 고기의 찌꺼기는 소의 사료로 쓰이는 경우는 여전하다.) 하지만 사료는 풀대신 곡물이 들어가 있다. 그 중에서도 옥수수가 가장 많다. (수확의 효율성을 따졌을 때 우수한 작물이기 때문이다)  

풀을 먹은 대신 옥수수를 먹는 고기는 무엇이 다를까. 왜 풀을 먹은 고기를 먹은 사람들은 건강해지는 반면 옥수수를 먹는 고기를 먹은 사람들은 성인병에 시달리는 걸까. 스페셜은 그 차이를 지방성분으로 분석한다. 오메가 3와 오메가 6의 비율에서 차이가 난다는 것이다. 1 대 1에서 1대 4 정도의 비율이 건강에 좋은데 옥수수를 먹고 자란 고기나 달걀은 60대 1을 넘어 200대 1에 육박하기도 한다. 오메가 6는 오메가 3와 함께 세포벽을 구성하는 요소인데 활동성이 떨어져 영양분의 전달을 더디게 하고, 또한 지방 세포의 크기를 키우는 악영향을 미친다.  

이런 내용들은 뉴욕 타임스 매거진의 칼럼니스트인 마이클 폴란이 쓴 <잡식동물의 딜레마>란 책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아마 스페셜은 이 책을 토대로 만들어진 것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이 책에선 아무리 유기농이라 하더라고 소는 곡물을 먹는 동물이 아니기 때문에 결코 건강에 도움을 줄 수 없음을 보여준다. 또한 많은 유기농 작물들이 말만 유기물일 뿐임을 보여주기도 한다. 

TV로 보여진 내용들은 옥수수의 습격이 우리의 건강을 위협하는 부분에만 초점을 맞추고 있지만, 실상 옥수수의 습격은 보다 큰 문제를 일으킨다. 단일 작물 재배로 인한 병충해 피해, 따라서 GMO나 농약, 제초제, 화학비료의 과다 사용을 불러오고, 흙이 죽고 가뭄을 일으키는 원인이 되기도 한다. 게다가 제3세계 국가의 자급자족적 농경지나 숲을 파괴하고 들어가, 환경문제를 일으키고, 빈부 격차를 심화시키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옥수수 사료가 넘쳐나는 이유는 다국적 종자 회사들과 미국 정치권, 농촌 경제와의 얽히고 설킨 이익 때문이다.  

아무튼 <옥수수의 습격>은 현재 지구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가 잃어버린 것이 바로 <풀>이라는 것을 명백히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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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전도사 최윤희씨가 스스로 생을 마감했다. 아무리 힘들고 어려운 일이 있더라도 행복한 마음가짐으로 살아가자던 사람이었다. 그런데 자신의 말과 완전히 상반된 자살을 선택했으니 그야말로 충격적인 사건이다. 이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입장 또한 천차만별일 것이다. 나에게는 가장 먼저 안락사가 떠올랐다. 

1. 존엄사와 안락사

2004년 스페인 영화 <씨 인사이드>(알레한드로 아메나바르 감독)는 안락사를 다루고 있다. 26년 전 바다에서 다이빙을 하다 전신마비가 된 라몬 삼페드로가 죽을 수 있는 권리를 찾아가는 과정을 그린 영화다. 안락사를 인정하지 않는 스페인에서 실제로 벌어진 일을 그리고 있다. 그는 입으로 펜을 잡고 글을 쓰면서 유명세를 타고, 그를 동정하는 두 여자와 사랑.우정의 관계를 맺는다. 하지만 가족들의 헌신도 새로 찾은 사랑도 그의 죽음에의 동경을 꺾진 못한다. 스스로 택한 죽음이란 절대 악이 아니라 누군가에게는 아름다운 선택일 수 있음을 보여준다. 절대 죽어서는 안된다고 생각했던 나에게 안락사에 대한 생각을 바꿔준 영화였다. 

최윤희씨가 자살했다는 소식을 접했을 때 맨처음 든 생각은 왜였다. 그 왜에 대한 답은 그녀의 유언으로 어느 정도 밝혀졌다. '죽고싶을 정도로 고통스러운'이라는 단어로는 절대 그 고통을 설명할 수 없다. 정말 끔찍할 정도의 고통을 몸으로 느껴본 사람만이 감히 죽음과도 맞바꿀 수 있는 것이 존재한다는 것을 실감한다. 그 고통을 피할 수만 있다면 죽음도 기꺼이 감수할 수 있는 정신상태를 이해한다는 것은 쉽지 않지만 가슴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 고통을 치료할 수 없고 그 끝을 가늠할 수 없다면 더더욱 그렇다.  

누군가는 그 육체적 고통으로 인한 정신적 고갈을 털어놓을 수 있는 상대만 있었더라도 자살은 택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한다. 행복을 말하던 사람이 불행한 자신의 처지를 털어놓을 수 없을 정도로 각박한 사회현실을 탓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물론 정신적 고충을 털어놓고 치유할 수 있는 사회적 시스템을 갖추는 것도 중요하다. 하지만 끔찍한 육체적 고통을 근본적으로 치유할 수 없을 때, 끊임없는 병원신세로 망가져 가는 모습이 예측될때, 행복한 기억을 가지고 이성적인 모습으로 자신의 삶을 스스로 마감할 수 있는 안락사를 인정할 수 있는 것인가에 대한 사회적 고민도 있어야 한다. 점차 존엄사를 인정해가고 있는 현실에서 이젠 안락사에 대한 사회적 논의도 필요한 시점이지 않을까. 행복전도사는 그렇게 마지막 인사를 나눈 것은 아닐까. 

존엄사와 안락사 - 두산백과사전 중 

존엄사란 최선의 의학적 치료를 다하였음에도 회복 불가능한 사망의 단계에 이르렀을 때, 질병의 호전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현 상태를 유지하기 위하여 이루어지는 무의미한 연명치료를 중단하고 질병에 의한 자연적 죽음을 받아들임으로써 인간으로서 지녀야 할 최소한의 품위를 지키면서 죽을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이에 비하여 안락사는 질병에 의한 자연적 죽음이 아니라 인위적 행위에 의한 죽음이라는 점이 다르다. 안락사 중에서도 환자의 요청에 따라 고통을 받고 있는 환자에게 약제 등을 투입하여 인위적으로 죽음을 앞당기는 것을 '적극적 안락사', 환자나 가족의 요청에 따라 생명 유지에 필수적인 영양공급이나 약물투여 등을 중단함으로써 환자를 죽음에 이르게 하는 행위를 '소극적 안락사'라고 한다. '소극적 안락사'를 존엄사와 동일시하는 견해도 있다.

 

2. 지행일치의 어려움

한편으론 최윤희씨가 말한 행복은 머리로 알았던 행복이지 않았을까 생각해봤다. 물론 자신의 경험치만큼 쌓인 행복에 대한 지식이었을 테다. 자신이 살아온 꼭 그만큼의 지식으로 사람들에게 행복을 전도하지는 않았을까. 그래서 어떤 고통과 어려움이 닥치더라도 행복을 떠올리라고 말했을지도 모른다. 자신이 죽음에 이르기 직전까지 그러했듯이 말이다. 그리고 결국 자신의 죽음으로 행복 전도사는 행복에 대한 자신의 정의를 새롭게 내리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직접 몸으로 부딪혔든 책이나 강의, 대화를 통해 얻었든 간에 경험이 가져다 주는 지식은 그 사람의 행동을 결정하곤 한다. 하지만 때때로 자신이 쌓아온 지식과 선택의 상황에서 내린 결정이 어긋나는 경우도 간혹 있다. 그 지식이 가슴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머리로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그 지식은 마땅히 그러해야 한다는 당위성은 있지만 실제 내 몸을 움직이게 만드는 힘은 없다. 그에게 길은 가르쳐주지만 실제 발걸음을 옮기는 용기까지 주지는 못한다. 마음으로 가슴으로 얻은 것이 아니기 때문일 수 있다. 혹시 행복전도사의 전도는 머리로만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을까.    

책이 나를 변화시키지 못한다면 그 책은 결코 읽은 것이 아니라는 가르침은 가슴으로 쌓는 지식의 참된 힘을 말해주는 것은 아닐까. 지행일치가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새삼 깨닫는다. 또한 내가 알고 있는 것을 행동으로 옮길 수 있는 진정한 용기를 지닐 수 있기를 바라본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빈다. 그곳에서 진짜 행복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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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살이 2010-10-11 11: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죽음에 대한 권리도 제대로 누릴 수 있는 세상이 와야겠죠.
 

'누군가 옳다고 생각했을 때가 가장 위험할 때이다' 

어디서 이런 이야기를 들었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머릿속에서 지워지지 않고 계속 맴도는 것을 보면 다소 충격적으로 다가온 듯하다. 최근 미국 플로리다의 테리 존스라는 목사가 9.11 테러 추모일에 코란을 불태우겠다고 해서 지구가 들썩이고 있다. 한때 철회했다 다시 철회를 번복하는 등 이슬람을 믿는 사람들과의 갈등을 더 키우고 있다. 아마 존스 목사는 자신이 코란을 불태우는 것이 옳다고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바로 그때가 가장 위험할 때이다. -우리의 과거 역사를 돌이켜 봐도 이와 비슷한 일이 떠오를 것이다. 군부 독재시절 독재자들이 난 사리사욕을 위해 이 자리에 섰다고 생각하진 않았을지도 모를 일이다. 

역사적 사건들 속에서만 이러한 일들이 벌어지는 것은 아니다. 개인의 삶 속에서도 이런 일들은 쉽게 벌어질 수 있다. 무엇인가 확신에 차 있을 땐 주위 상황이 눈에 잘 들어오지 않는 법이니까. 그래서 생각해본다. 내가 지금 옳다고 생각하는 것, 그래서 행동하고자 하는 것, 진짜 옳은 것일까. 그런데 이런 번민이 자꾸 실행을 더디게 만든다. 그럼 이런 주저함은 옳은 일인가. 실소를 머금어 본다. (아무튼 자신의 행동이 주위에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생각해보는 것은 꼭 필요한 일 아니겠는가. 그러기 위해선 열린 귀를 가져야 할 것이다. 반면 때론 위험을 감수해야만 하는 순간도 닥쳐올지 모를 일이다.) 오락가락한 날씨 마냥 머리속도 오락가락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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