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61 | 162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

태평농법 전파하는 농사꾼 이영문

 

"쟁기질 써레질을 왜 합니까"




    '논 팔아 굿하니 맏며느리가 춤춘다’는 속담이 있다. 며느리가 덩실거리는 것은 굿이 흥겨워서가 아니라 힘들고도 지겨운 노역을 조금이라도 덜 수 있게 됐다는 데서 오는 홀가분함 때문일 것이다. 농사란 전래적으로 ‘뼛골 빠지는’ 일로 인식돼왔다. 모처럼 농촌 들녘 나들이에 나선 도회인들이 “나도 이런 농촌에 와서 씨 뿌려 가꾸며 살고 싶다”고 뇌까리곤 하는데, 땅을 일궈 농사를 짓는다는 일이 어디 도시 사람들이 먼발치에서 바라볼 때처럼 목가적이기만 한 생활인가. 귀농을 하겠다고 마음 다잡고 내려간 도시 젊은이들 중에 1년을 못 참고 다시 보따리를 싸는 경우가 비일비재한 것만 봐도 농사의 어려움은 더 말할 여지가 없다.
경상도 하동 땅의 한 농촌에 갔다. 농사가 기계화됐다고는 하나 망종(芒種)을 눈앞에 둔 시기라 밀·보리 수확하랴, 모 쪄서 논에 내랴, 부지깽이도 달려나와 거들어야 할 만큼 바쁜 때였다. 그런 때 가장 민망스러운 사람은 모처럼 볼 일이 있어서겠지만 멀쩡하게 차려입고 마을을 찾은 외지인이다. 유유자적 논둑길을 걸으며 땀 흘리는 사람들을 구경하자니 뒤통수가 스멀거리고, 그렇다고 구두 벗어던지고 남의 논바닥으로 빠져들 수도 없잖은가.
그런데 농번기에도 이 사람의 논을 지날 때에는 그 미안함이 덜하다. 갈고 엎고 물대고 심고 하느라 정신없는 다른 논들과는 달리, 그의 논에는 아직 평화롭게 밀·보리가 익어간다. 양말까지 챙겨 신고 논둑을 어슬렁거리며 걷는 주인의 표정 어디에도 ‘재 너머 사래 긴 논을 언제 갈아’ 모를 낼까 따위의 걱정 한 주름 없다. 밀과 보리도 딴사람들 모내기가 다 끝나갈 무렵에나 슬슬 거둘 생각을 하고 있다. 그뿐인가. 벼농사 짓겠다는 사람이 못자리조차 가지고 있지 않다. 이쯤 되면 필시 금년 벼농사를 포기한 사람이거나, 동네에서 아예 내놓은 게으름뱅이거나, 그것도 아니라면 논바닥이 손바닥만해서 서두르고 말고 할 건덕지가 없는 경우리라.




혼자서 쌀농사만으로 연간 억대 매출




그런데 그렇지가 않다. 이 사람이 1년에 짓는 논농사만 줄잡아 3만5000 평이다. 보리나 밀을 빼고 쌀만 400가마 넘게 수확하고, 순전히 쌀농사만으로 연간 억대에 가까운 매출을 올린다. 그는 대농(大農)에 속하는 그 많은 일을 혼자서 거뜬히 해치운다. 그렇게 큰 농사를 지으면서도 집 안에 비료포대, 농약포대 하나 보이지 않는다. 무슨 마술이라도 동원하는 것일까?
어쨌든 필자가 그를 찾아갔을 때 모내기철을 맞아 바삐 돌아가는 다른 들녘과는 달리 그의 논에는 걱정스러울 만큼 태평스럽게 밀과 보리가 하늘거리고 있었고, 그 들판을 바라보는 주인의 표정도 한정없이 태평스러워 보였는데, 바로 이 ‘무사태평’이 농사꾼 이영문씨 (45)의 농사철학과 그의 독특한 영농법을 설명해줄 화두다.
경남 하동군 옥종면 청룡리에 있는 그의 농기계수리점 겸 태평농법을 전파하는 사무실에는 ‘태평농업’이라는 간판이 붙어 있었다. 미안스럽게도 들에 나갔던 그가 서울에서 방문객이 찾아왔다는 전갈을 받고 소형 승합차를 몰고 서둘러 돌아왔다.
―태평농법으로 농사 짓는 사람은 다른 사람 모내기가 한창인 요즘 오히려 특별히 할 일이 없다고 들었는데, 들판에서 무슨 일을 하고 오셨습니까?
“특별히 할 일은 없습니다. 작년 홍수로 무너진 논둑을 좀 손보고 있던 중이었어요.”
―태평농법이라… 그러니까 무사태평으로 게으름 피워가면서 농사 짓는 방법입니까?
던져놓고 나니 너무 무례한 질문인 성싶었다. 사전 귀동냥에 의하면 요즘 그는 농사 짓는 데 쓰는 시간보다 전국 각지에서 그 농법을 배우러 오는 사람들에게 농사 요령을 설명하고, 정부기관이나 대학, 크고 작은 농민·사회단체에 불려가서 강연하느라 빼앗기는 시간이 더 많다고 했다.
“한번 따져봅시다. 옛날의 부자를 천석꾼이니 만석꾼이니 하지 않습니까. 대부분을 다 소작 주고 몇 백 마지기만 지었다고 쳐보자고요. 경지정리도 안 된 쪼가리 논이어서 일하기가 대단히 힘들었을 텐데, 과연 소 몇 마리하고 머슴 몇 사람 데리고 일일이 쟁기로 갈아엎고 써레질해서 농사를 짓는 게 가능했겠느냐고요. 불가능합니다. 지금처럼 기계화 영농이 일반화하고 경지정리가 잘 된 상황에도 한 가구에서 수백 마지기 농사 짓는 건 어렵습니다. 그렇다면, 옛날 우리 조상들이 모두 항우 장사나 홍길동 같은 역발산 기개세(力拔山 氣蓋世)를 가졌거나 신출귀몰한 사람들이 아니었을 바엔, 지금 방식으로는 하지 않았을 것이다, 뭔가 다른 방식이 있었을 것이다, 그게 뭐냐….”




"태평농법은 조상들의 농법을 되찾는 것"




―그럼 쟁기질이나 써레질을 하지 않고 벼를 재배했을 거란 얘긴가요?
“언제부터 쟁기질을 했고 언제부터 써레질을 했는지를 여기저기 다 뒤져봐도 나와 있지 않습니다. 내 나름으로 내린 결론은 이렇습니다. 경사진 땅을 파서 편평한 논을 만들 때 안쪽의 흙을 바깥쪽으로 끌어내서 평탄작업을 하지 않습니까. 그랬을 때 흙을 깎아냈던 안쪽은 바닥이 단단해서 농작물이 뿌리를 내릴 수 없단 말이에요. 그곳만 쟁기질 써레질로 일궜다는 얘기지요.”
그래서 그가 개발한 농법(그는 아주 먼 옛날 우리 조상들이 했던 농법을 되찾은 것이라 했다)이 바로 태평농법이다. 태평농법을 짧게 설명하면 이렇다.
논에 보리나 밀을 파종한다. 6월 중하순쯤에 밀과 보리를 베어내고, 그 자리(쟁기질을 하지 않은 마른 논바닥)에 볍씨를 뿌린다. 그런 다음 보릿짚이나 밀짚으로 덮는다. 그걸로 파종이 끝난다. 화학비료도 뿌릴 필요 없고 농약과 제초제는 더더욱 필요없다. 물? 열흘이나 보름 간격으로 2∼3일 동안만 대주면 된다. 가을이 되면 벼가 익는다. 보리파종도 간단하다. 벼를 수확하고 난 마른 논바닥을 갈지 않고 그대로 둔 상태에서 보리 씨앗을 뿌리고 벼 수확하면서 생기는 짚을 논바닥에 덮어두면 보리가 저 알아서 잘 자란다. 이 농법으로 벼농사를 지으면 땅을 갈 필요가 없으니 쟁깃날도 필요없고 써렛날도 필요없다. 보리 베고 그 자리에 마른 볍씨를 뿌리기만 하면 되니 못자리도 필요없고 장화를 신을 일도 없다. 수만 평 농사를 혼자서 지어도 여유가 있으니 인건비도 필요없다.
그러나 아무래도 장난같이만 들리는 이 농사법을 처음 듣고 ‘정신나간…’ 운운하지 않는다면 오히려 그게 이상하지 않겠는가. 필자도 그랬고, 현장을 보고 온 지금도 고개가 갸웃거려지기는 마찬가지다. 그렇지만 이씨는 한정없이 한갓진 듯 보이는 그 농법을 정착시키기 위해서 20년 동안이나 끈질긴 실험을 해왔고, 지금 그는 한두 뙈기의 논에 실험적으로 해보는 게 아니라, 3만5000평의 자기 논 전부를 바로 그 태평농법으로 경작하고 있다. 아니 경작의 ‘耕’은 ‘논밭을 간다’는 뜻이니 괭이질 한 번 하지 않고 벼를 재배하는 태평농법에 ‘경작’이라는 말은 걸맞지 않은 표현이다.




중1 두번 중퇴가 학력의 전부




태평농법에 대한 세세한 내용을 따져보기 전에, 그가 어떤 연유로 ‘쟁기질하고, 써레질하고, 못자리 만들고, 비료 주고, 농약치는’ 고전적인 쌀농사 방법에 문제가 있다는 발상을 하게 되었는지부터 먼저 알아보기로 한다.
농사꾼 이영문은 1954년 경남 사천의 농촌에서 빈농의 외동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부친 이름으로 된 농지는 한 뼘도 없었고, 얼마 안 되는 종중논을 일궈서 간신히 끼니를 잇고 살았다. 외아들이었으니 어지간하면 고등교육을 시켜보겠다는 엄두를 냈을 법도 한데, 그의 아버지는 자식 교육은 물론 보릿독 바닥 드러나는 것에도 관심이 없는 ‘한량’이었다. 어머니의 호미품팔이로는 중학공부마저 제대로 해낼 수 없었다. 중1 중퇴. 중학교 문턱에 들어가자마자 나와버린 셈이다. 서울에 가면 돈도 벌고 공부도 할 수 있을 것 같다는 환상을 안고 무작정 상경길에 올랐으나 어렵게 들어간 야간 중학마저 다시 그만둬야 했다. 발육이 제대로 안 돼 왜소한 체구인 그를 받아줄 일터가 없었던 것이다. 결국 고생만 ‘엄청시리’한 끝에 고향으로 내려가야 했다. 두 번씩이나 중학교에 입학을 했다 1학년 때 그만둔 게 그의 학력 전부다.
그 무렵 부친도 ‘정신을 차리고’ 세 식구를 이끌고 지금의 하동군 옥종면으로 이사를 했으나 비빌 언덕이 없었던 탓에 이영문은 기술을 배워보겠다고 나섰다. 뭐든 뜯었다 맞췄다 하는 데에는 남다른 재주를 타고난 그가 농촌에서 소질을 살릴 수 있는 유일한 분야가 다름 아닌 농기계였다.
기술 서적을 갖다놓고 밤낮 없이 기계에 매달린 끝에 드디어 어떤 농기계에도 자신이 붙었다. 때마침 정부에서 기계화 영농을 농업 근대화 정책으로 내걸었고, ‘기계로 논밭을 간다’는 것은 당시 모든 농사꾼의 소망이었기 때문에 농기계 보급이 빠른 속도로 확산돼 가고 있었다. 그러나 70년대만 해도 농기계에 대한 지식이 빈약하던 시기라 농민들은 나사 하나만 죄면 될 일을 가지고도 큰 고장이 난 줄 알고 수리점을 찾곤 했다. 그런데 아무리 심하게 고장이 난 기계도 그의 손에만 오면 해결됐으니, 그의 농기계 수리점은 수지가 맞았고, 찌든 ‘가난의 때꼽재기’도 벗을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평범한 농기계 수리공이 아니었다.
“대부분의 기계가 완제품을 수입해서 조립한 겁니다. 그런데 왜 이게 자꾸 고장이 나느냐, 우리 토양에 맞지 않기 때문 아니냐, 그리고 한 걸음 더 나아가서 과연 소로 쟁기질하고 써레질하던 전래 농사법을 팽개치고 기계에다 쟁깃날 달고 써렛날 달아서 마구 파헤치는 농사법이 과연 옳은 것이냐, 이런 의문에 봉착한 것이지요.”
이씨는 영농현장에 적용시켜보지 않고는 농기계를 제대로 알기 힘들다고 판단하고, 외국산 농기계를 쓰는 영농과 소를 이용한 경작의 차이를 논에서 직접 실험하고 관찰했다. 실험 관찰 끝에 내린 결론은 기계에 의한 영농방식이 ‘틀려먹었다’는 것이었다.




농기계 수리업 포기 후
벼의 '무경운(無耕耘)재배' 선언




“소로 갈 때는 말입니다. 소가 쟁기를 끄는 힘에 한계가 있기 때문에 깊이 갈 수가 없습니다. 쟁기를 보면 끝부분에만 금속이 붙어 있지 않습니까. 많이 갈아야 20cm예요. 20cm 밑에 있던 흙이 위로 올라오고, 온갖 잡초의 씨앗이 떨어져 있던 표면의 흙이 그만큼의 깊이 아래로 들어갑니다. 거기다가 써레질은 기껏해야 5cm 정돕니다. 그런 상태에서 모를 심으면 뿌리가 직근(直根)합니다. 왜냐고요? 20cm 아래에 잡초 씨앗이나 뿌리가 달린 흙덩어리가 그대로 있어서 산소가 존재하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수입 농기계로 갈고 써레질을 하는 경우는 땅을 무지막지하게 파헤치는데다, 흙을 믹서에 야채 갈 듯 완전히 파괴시키기 때문에 무게별로 지층이 형성됩니다. 맨 위에는 점토질이 형성되면서 흙보다 가벼운 잡초 씨앗도 모두 위로 떠올라요. 그 상태에다 작물을 심으면 뿌리가 착근하지 못하고 옆으로 퍼져서 뻗기 때문에 성장이 잘 안 되는 겁니다.”
―제초제라는 것도 기계화 영농이 본격화하면서 보급됐는데, 제초제가 단순히 김을 맬 일손을 덜기 위해서 나온 게 아니라, 그걸 쓰지 않으면 안 될 정도로 잡초가 무성하다 보니까…
“딱 맞는 얘깁니다. 논바닥의 흙을 마치 체로 흔들 듯이 해놓으니까 잡초 씨앗이 모두 위로 올라오게 되잖습니까. 옛날 소로 농사 지을 때에도 잡초는 났지만 사람이 손으로 뽑아도 될 정도였어요. 게다가 기계로 파헤치는 경우 뿌리가 수직으로 착근하지 못하고 옆으로 퍼지니까 화학비료를 쓰지 않으면 제대로 성장이 안 되는 겁니다.”
―그렇다면 가령 날을 짧게 한다든가 하는 방식 등으로, 기계를 이용하면서도 예전에 소로 경작하는 효과를 거둘 수 있는 농기계를 만들어보시지 그랬어요? 농기계에 ‘도사’시라면서요?
“만들어봤지요. 우리 환경에 맞는 농기계를 만들어보자고 작심하고, 써렛날이 현재 일반 농가에서 사용하고 있는 것의 1/8에 불과하고 동력 손실도 1/5밖에 안 되는 한국형 농기계를 시제품까지 만들었는데, 그걸 받아서 생산할 업체가 있어야지요.”
―왜 그랬을까요? 동력 손실이 적으니 기름값도 덜 들고, 제초제나 화학비료도 덜 쓸 수 있어서 효율적이었을 텐데.
“물정 모르는 말씀 마세요. 농기계 제작·수입 업체로서는 엔진도 크고, 파손도 잦고, 가격도 비싸야 자꾸 신형으로 교체할 것이고, 그래야 장사가 될 것 아닙니까. 제가 만든 것처럼 작은 엔진에다 고장도 잘 안 나고 간단하기 짝이 없는 기계, 그거 만들어봤자 수지가 안 맞아요. 농민들 사이에도 비싼 수입 농기계를 써야 최고인 줄 아는 인식이 확산됐는데, 그렇게 된 데에는 바로 그런 농기계에 의한 영농이 표준농법인 양 지도를 한 농업 지도기관의 영향도 크지요.”
실망한 그는 농기계 수리업을 포기했다. 자신이 개발한 기계가 받아들여지지 않았기 때문만은 아니다. 수지 맞는다는 소문이 나자 여기저기에 농기계 수리점이 생겨났고, 80년대 들어 소 파동에다 작물 파동 등이 잇따라 자꾸 외상만 깔리는 등 운영에 어려움이 닥친 탓이었다. 이제 그는 농사를 짓기로 작심했다. 다른 사람의 논을 임차하고 일부는 구입도 해서 벼농사에 돌입하는데, 수입 농기계를 중심에 두고 진행되고 있는 관행적인 영농방식에 문제가 많다는 점을 익히 알고 있는 터라, 어떤 방식으로 농사를 지을 것인지가 문제였는데, 그는 벼의 ‘무경운 재배’를 선언한다. 무경운(無耕耘), 논을 아예 갈지 않고 벼농사를 짓겠다는 것이다.
―한 해 농사를 그르치면 손해가 막심한데, 무턱대고 그런 생소한 농법을 실험하겠다고 나섰다는 것은 대단한 모험으로 보이는데요?
“주먹구구식으로 덤벼든 게 아닙니다. 이론적으로 충분히 확신이 섰어요. 갈고 써레질 하는 이유가 뭡니까. 흙을 부드럽게 하자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보리나 밀이 자라고 있는 땅의 흙을 만져보세요. 대단히 부드럽습니다. 보리나 밀을 한 번이라도 베어본 사람이면 다 압니다. 낫질 서투른 사람은 자꾸 뿌리째 뽑아놓지 않던가요. 그러니까 인위적으로 갈아 엎어서 부드럽게 하지 않아도 자연 스스로 미생물에 의해서 충분히 제 살을 부드럽게 만들고 있는 거예요.”




볍씨 처음 뿌린 87년엔
잡초만 무성한 도깨비밭




―화학비료는 그렇다 쳐도 퇴비도 줄 필요가 없습니까?
“식물이 퇴비를 먹고 자란다는 인식부터 버려야 합니다. 유기물을 먹는 게 아니라 무기물을 먹는 거예요. 흙 위에 유기물을 얹어놓으면 토양 속의 미생물이 그걸 먹고 무기물을 분비하는데 식물은 그 무기물을 먹는 겁니다. 그런데 그런 무기물을 지속적으로 공급할 수 있는 라인이 이미 흙 속에 갖춰져 있어요.”
―그렇다면 물은 왜 댑니까? 옛날에는 산간지역에서 밭벼를 재배하기도 했잖습니까?
“벼는 물에서도 잘 자라고 물 없는 데서도 잘 자랍니다. 아마 아열대 식물인 벼를 처음 도입했을 때에는 마른 땅에서 했을 겁니다. 그런데 중간에 왜 논에 담수를 했느냐, 물이 있는 곳에서 재배를 해보면 잡초가 훨씬 덜 납니다.”
―태평농법에서는 물을 보름 간격으로 2∼3일만 넣어주면 된다고 했는데, 순전히 잡초를 없애기 위한 방편인가요?
“아닙니다. 소출을 높이기 위해섭니다. 2~3일 동안 물을 대주면 그 물을 토양이 다 가져가기 때문에 일부러 빼줄 필요가 없습니다. 물에는 혐기성(嫌氣性:산소를 싫어하는) 미생물이 많고, 마른 논에는 호기성(好氣性:산소를 좋아해서 공기 중에서 잘 자라는) 미생물이 많습니다. 그 미생물들이 살아 있을 때 분비하는 물질이 바로 식물의 먹이가 되는 겁니다. 따라서 물을 넣어줬다 빼줬다 하면 혐기성 미생물과 호기성 미생물의 분비물이 풍부해져서 작물 성장이 더 활발해지지요.”
그러나 한국의 기후는 몬순 기후여서 쌀농사를 짓는 데에 물걱정을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 이씨의 설명이다. 적당한 시기에 비가 와서 담수 됐다 말랐다를 저절로 해준다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농업용수를 확보하기 위해서 애쓸 필요가 없다는 얘기가 된다. 인위적으로 파 헤집어놓은 논바닥은 조금만 가물어도 거북등처럼 갈라지지만, 자연에 의해서 부드럽게 유지돼온 흙은 아무리 가물어도 아래쪽에 수분이 있어서 멀쩡하다는 얘기다. 농촌에서 농사를 지어본 경험이 있는 필자로서도 그의 빈틈없는 논리에 수긍하지 않을 수 없는 대목이다.
―그래서 처음 그런 방식으로 농사를 지어서 보란 듯이 성공했나요?
필자의 질문에 이영문씨가 씁쓸하게 웃었다. 결과는 참패. 웃음거리였다.
“될 것 같았어요. 아니, 이론적으로 반드시 돼야 했어요. 그때가 아마 87년도였던 것 같은데, 자신만만하게 볍씨를 뿌렸던 논에는 잡초만 무성했지요. 도깨비밭이었어요. 그래도 드문드문 벼가 있긴 했는데….”
알 만했다. 동네 사람들의 손가락질이 그를 향했을 건 뻔하다. 히야아, 그 잡초숲을 뚫고도 자란 벼가 있긴 하네 그려. 아예, 산에다 볍씨를 뿌리지 그래. 제초제 뿌리는 법 모르면 내가 가르쳐 줄까?




"한 해쯤은 잡초가 맘껏 자라도록
방치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그럴수록 관행으로 굳어져 온, 농기계로 파헤집는 식의 농사를 지어서는 안 된다는 인식은 굳어져만 갔다.
“그러나 나도 완강했지요. 너희들이 잡초 없애겠다고 10년간 제초제를 뿌렸으면 풀이 완전히 없어져야 옳은 것 아니냐. 그런데 한 해만 농사 안 지으면 무성하게 우거진다 이 말이지. 이건 제초제로 잡초를 없앨 수 있다고 주장했던 사람들의 패배예요.”
그의 실험은 계속되었다. 잡초를 없애는 것이 급선무였다. 그러다 발견한 것이 짚으로 논바닥을 덮어줘야 한다는 것이었다. 반드시 이모작을 해야 한다는 사실도 그때 발견했다. 그러니까 초기에는 마른 논에 그냥 볍씨만 뿌려놓고 말았는데, 다음 실험으로 그는 밀과 보리를 심어서 수확해낸 다음에, 그곳에 볍씨를 뿌리고 밀짚과 보릿짚을 덮었다. 그렇게 하니 새가 주워 먹지도 않았고, 잡초도 거의 돋아나지 않았다. 성공이었다. 태평농법은 그렇게 해서 탄생한 것이다.
―그러면 그동안 수입 농기계로 갈아엎고, 화학비료나 농약, 제초제를 뿌려서 농사 지어온 농토에도 어느 해 갑자기 보리 재배했다가 마른 논에 볍씨 뿌리고 짚풀을 덮어주기만 하면 태평농법으로 농사 짓는 게 가능하다는 얘긴가요?
“가능합니다. 첫해부터 갈지도 않고, 비료도 안 치고, 농약도 안 치고 해야 지력이 금방 회복됩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으로부터 미쳤다는 손가락질을 받을 용기가 없는 사람은, 첫해에는 제초제와 비료를 조금은 써야 합니다. 왜냐하면 워낙 그런 농법으로 단련된 토질이기 때문이죠. 저는 애당초 70%의 소출만 올리면 성공이라고 생각하고 시도했었거든요.”
제대로 해볼 양이면 수확량 걱정하지 말고 아예 처음부터 제초제나 비료 따위를 쓰지 말고 시도해보는 것이 좋다고 그는 말한다. 독한 제초제를 쓰다가 한 해만 안 써도 잡초가 무성하게 치올라오는 것은 자연이 스스로를 복구하기 위한 몸부림이라는 것, 그걸 보고 인간은 반성할 줄 알아야 한다는 것, 파괴해버린 자연을 원상으로 돌린다는 차원에서라도 한 해쯤은 잡초를 맘껏 자라도록 방치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 그의 철학이다.
“이 얘기도 잘 안 믿겠지만….”
필자가 워낙 못 미더워하자 이씨는 답답해하며 그런 사족을 달았다.
“논에 피가 많이 나서 너도나도 피사리를 하느라 땀을 흘렸지 않습니까. 그러나 피는 뽑아서 없어지지 않습니다. 한 해만 농사를 안 짓고 방치해보세요.”
―그러면 다음해엔 논이 온통 피밭이겠지요.
“그렇습니다. 씨가 엄청나게 떨어져서 피가 많이 나지요. 그러나 그 다음해에는 어떻게 될 것 같습니까. 잔디처럼 논바닥을 뒤덮을 것 같지요? 천만에요. 훨씬 줄어들고 3년째엔 피가 한 포기도 안 납니다. 그게 자연의 이치입니다.”
―태평농법으로 벼농사를 짓기 위해서는 반드시 밀이나 보리를 병작(竝作)해야 한다는 얘긴데, 같은 땅에다 이 작물 저 작물을 번갈아 심으면 지력이 쇠해서 소출이 줄어든다는 것이 상식 아닙니까?
“전혀 잘못된 상식입니다. 이것 저것 많이 심어줄수록 지력은 좋아집니다. 물론 단작(單作)일 때에는 지력이 떨어집니다. 단작을 되풀이하면(같은 작물을 거듭 파종하면) 미생물의 종류가 다양해지지 못하기 때문이죠. 그러나 여러 작물을 파종하게 되면 미생물의 종류가 다양해져서 흙이 한결 부드러워집니다. 산(山)의 토양을 생각해보세요. 다양한 종류의 나무가 자라는 산의 흙은 기름진 부엽토지만, 한 가지 나무만 자라는 곳의 흙은 그렇지 않습니다. 논밭도 마찬가지예요.”
이렇게 논리가 유수 같은데 그렇다면 어째서 초기에는 참패를 면치 못했을까? 이유가 있었다. 보리나 밀을 베어낸 자리에 볍씨를 뿌려놓기만 했을 뿐 덮어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가 보릿짚 밀짚을 덮으면 잡초가 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발견한 때가 1987년이었다. 그 전까지만 해도 수확을 하는 둥 마는 둥했었는데, 이때부터 제대로 소출을 올리게 된 셈이다.
“제가 ‘이상한’ 농사법으로 농사를 짓는다는 소문이 퍼지자 정부의 연구기관에서 찾아왔더라구요. 이 사람들이 와서 정말로 논을 안 갈고 파종을 하는지, 비료나 제초제를 안 주는지, 물을 안 대주는지 등을 면밀하게 관찰하고 실험도 했어요. 그런데 자기들이 땅 갈고 농약치고 비료 주는 방식으로 한 켠에다 시험농사를 했던 곳보다 내 방식으로 지은 곳에서 오히려 수확이 더 나온 겁니다. 300평당 488kg이 생산됐어요. 이렇게 되니까 내 방식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됐지요.”




수확과 파종을 동시에 하는
'농비 제로 직파기'




이 무렵 이씨는 이미 자신의 농법에 맞는 농기계를 만들어두고 있었다. 이름하여 ‘농비 (農費) 제로 직파기’다. 보리나 밀을 수확하면서 동시에 볍씨를 논바닥에 자동으로 뿌려주는, 또는 벼를 수확하면서 보리나 밀의 씨앗을 동시에 파종하는 기계였다. 그러니까 보리 베는 작업 따로 하고 볍씨 뿌리는 작업을 따로 하는 게 아니라 베어내면서 바로 다음 작물의 씨앗을 뿌리는 기계였다. 그는 자신이 만든 이 기계를 가지고 정부 연구기관의 작물시험장에 찾아가 파종을 해주기도 했다.<ㅔ> “그런데 말입니다. 이 사람들이 그 농사법을 ‘무경운건답 이모작 직파농법 (無耕耘乾畓二毛作直播農法)’이라고 이름을 붙여서는 자신들이 연구 개발해낸 농법인 양 보고를 한 겁니다. 제가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그 방식을 실험해온 것을 빤히 아는 주변 사람들은 남의 연구성과를 가로챘느니 어쨌느니 하면서 분개했지만, 저는 참 잘 된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왜냐하면 일개 농부인 내가 아무리 획기적인 농사법을 찾아냈다고 해봤자 정부 기관으로부터 검증이 안 된 상태인데 농민들이 그 농법을 도입하겠습니까? 그리고 이해관계에 있는 사람들(농기계업체나 비료·농약제조업체 등)의 조직적인 반대가 있을 게 뻔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정부의 연구·지도기관에서 권장한다면 차원이 다르거든요. 어쨌든 저는 농민들이 이 농법을 많이 도입해서 토양이 살아나고 국민들이 무공해 쌀을 먹을 수만 있다면 그걸로 만족합니다.”
물론 지금은 정부기관이나 학계에서도 이 농사법을 ‘이영문의 태평농법’이라 부른다. 동네 농민들이 이씨를 부르는 별명도 ‘태피이’다. 남들은 장화 신고 온몸에 흙칠해가면서 논을 간다 모내기를 한다 야단일 때(태평농법으로 농사를 지으면 그럴 필요가 없으므로), 논둑길로 흰고무신에 양말까지 갖춰 신고 천하태평으로 돌아다닌다 해서 ‘태평이’란 별명이 붙은 것이다(태피이는 태평이의 경상도식 발음이다).
태평농법이 일반에 알려진 데에는 경상대학교 농과대학측에서 이 농법에 관심을 갖고 이씨와 더불어 지속농업산학연구회를 만든 게 계기가 되었다. 이제 태평농법이 안정적인 농사법의 틀을 갖췄다고 생각되자 이씨는 그동안 하고 싶던 말을 쏟아놓았다. 농민들이 쓰는 화학비료의 인산(燐酸) 때문에 우리 농토가 다 죽어간다는 등의 주장을 공공연하게 내놓은 것이다. 그러자 무서운 협박이 날아들었다. “목숨이 두 개냐?” “쥐도 새도 모르게 죽이겠다”는 전화폭력이 시도 때도 없이 계속된 것이다.
―농기계 업체 쪽에서도 달갑잖아 하겠는데요?
“물론입니다. 아마 8월쯤 되면 현재의 농기계 업체들이 신제품이라고 하면서 또 다양하게 수확기(收穫機)를 수입할 겁니다. 이미 선진국에서는 구형으로 밀려난 것들이에요. 그러면 작년에 구입했던 것은 또 창고로 밀려나게 되지요. 엄청난 낭비입니다. 제가 개발한 농비 제로 직파기가 지금 전국에 800대 가량 보급돼 있습니다. 그런데 IMF로 그 기계 만들던 회사가 문을 닫아버렸어요. 그래서 이번에 아예 일본이나 유럽에서 들여오는 어떤 콤바인에도 부착해서 사용할 수 있는, 호환성 있는 직파기를 다시 내놓을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생산비는 한 마지기에 1만원




―그럼 이제 구체적으로 한 번 따져봅시다. 태평농법을 도입해서 농사를 지을 사람들한테 태평농법의 원조(元祖)가 어떤 작황을 올리고 있는지를 정직하게 알리는 것 이상의 홍보효과가 없을 것 같은데요. 무공해 농법이고, 토양을 살리는 자연친화적인 농법이라는 사실만으로는 다른 사람들을 설득하는 데에 한계가 있을 것 같습니다. 단위 면적당 수확량이 일반 농가에 뒤지지 않습니까?
“이 농법이 자리를 잡은 게 5년 전부턴데, 98년도의 경우만 보더라도 단보(300평)당 전국 평균 생산량이 413kg이었는데, 나는 그보다 85kg 많은 498kg을 수확했어요.”
―판매는 어떤 방식으로 이뤄집니까?
“가을 수확기가 되면 대개 금년 수확량이 얼마다 하는 게 나옵니다. 도시 소비자들이 1년간 먹을 쌀값을 미리 갖다 줍니다. 돈을 미리 받고 소비자들이 필요하다는 연락이 올 때마다 택배로 보내줍니다.”
―태평농법으로 생산한 고유쌀이니까 품질인증을 받으면 더 유리하지 않을까요? 이름도 근사하게 무슨 쌀, 혹은 무슨 미(米)라고 붙이고….
“그런 것 안 합니다. 이영문이가 생산한 쌀이 가령 태평미라는 이름으로 인증을 받았다고 칩시다. 1년에 400가마 남짓 출하하는데, 서울의 어떤 백화점에 200가마, 부산의 한 백화점에 200가마를 납품했단 말이에요. 그럼 백화점에서 그 200가마 팔고 나면 손털고 말 것 같습니까. 1년 내내 태평미 팝니다.”
―농비가 제로(0)라고 했지만 기계를 빌려 쓰는 경우 기계삯도 있을 것이고…생산비가 얼마나 듭니까?
“우선 이 지역에서 일반농법으로 농사 짓는 경우를 예로 들어봅시다. 남의 농기계를 빌려서 짓는 경우를 기준으로 할 때, 200평 한 마지기를 기계로 갈아주는 데에 1만5000원이고, 써레질하는 데에 역시 1만5000원이 듭니다. 이앙기로 모를 심는 데 2만원이고, 수확해주는 데에 2만원입니다. 제초제며 비료값이 마지기당 1만5000원 정도 듭니다. 여기다 종자값 등 기타 경비를 합하면 200 평당 13만원에서 18만원이 듭니다. 그럼 태평농법은 어떠냐. 보리나 밀을 벨 때 기계를 빌려 쓰면 2만원인데, 밀·보리를 수확하면서 동시에 벼를 파종합니다. 기계가 한 번만 논바닥을 지나가면 끝이에요. 벼 수확할 때에는 보리파종을 동시에 해버리고… 한 번에 2만원이 드는데 그걸 수확비용에 넣어야 합니까, 파종비로 계산해야 합니까. 두 가지 중 한 번은 빼줘야 하지 않습니까.”
굳이 계산하자면 마지기당 1만원이 든다는 얘기다. 더구나 수만 평 농사를 혼자 ‘태평’ 하게 어슬렁거리며 관리할 수 있으니 인건비 부담 역시 전무하다고 봐야 할 것이다. ‘농비 제로’가 빈 말이 아니다. 그러면서도 판매가는 일반농법으로 생산한 쌀보다 약간 비싸다. 그야말로 무공해 청결미인 셈이니 품질면에서 우월하다고 할 수 있겠다. 그러나 농사 현장을 둘러본 소비자 중에는 “생산비가 전혀 안 드니 쌀값을 더 내려야 하는 것 아니냐”고 묻는 사람도 있다. 그렇다고 더 싸게, 혹은 같은 값으로 받을 수는 없다는 것이 이씨의 행복한 고민이다.




개인적 실험인가, 혁명적 농법인가




이영문씨의 태평농법을 극히 특이한, 그리고 개인적인 한 실험으로 좁혀볼 것이냐, 혁명적인 농사법으로 받아들여야 옳으냐 하는 것을 필자로서도 명쾌하게 정리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의 태평농법이 너무 황당하게 들리는 구석이 있기 때문이다. 만일 전국의 모든 농민이 기존 농사법을 집어치우고 태평농법으로 전환해서 성공적인 영농을 해낸다고 가정해보자. 그렇다면 ‘한국농업=쌀농사’라는 등식이 당연하게 들릴 정도로 주곡인 쌀 의존도가 높은 우리 실정에, 이 농법은 우리 농정사에 가장 획기적인 혁명이 아닐 수 없다. 농지개량조합과 수세 징수 문제로 티격태격할 필요도 없고, 전국의 농약·비료 공장은 문을 닫아야 할 것이며, 비싼 돈 주고 농기계를 수입해올 필요도 없을 것이고, 농촌 일손 부족 문제도 옛 얘기가 된다. 생산비가 제로에 가까운데다 글자 그대로 무공해 농산품이니 가격 경쟁력이 현저히 높아져서 쌀시장의 전면개방을 걱정할 필요도 없게 된다. 또 이 농법은 이모작을 전제조건으로 하기 때문에 운동본부까지 차려서 우리 밀을 살리자고 외치지 않아도 된다. 그리고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것은 토양을 전혀 파괴하지 않고 자연을 자연답게 존중하면서 먹을거리를 구할 수 있다는 점이다.




일본서도 모방한 이씨의 태평농법




그런데 무엇이 문제인가? 이영문씨의 명쾌한 대답은 ‘문제가 없다’이다. 전체적으로 보면 아직은 극히 일부이긴 하지만 이미 곡창인 호남지역에서 태평농법으로 농사를 짓는 농민이 늘어나고 있다. 이영문씨를 찾는 농민들도 1년이면 수천명에 이른다. 여름철에 와서 보고 고개를 갸웃거리며 갔던 농민들이 가을 수확기에 와서 보고는 ‘과연!’ 하며 돌아간다.
―그러니까 일반 농사 방법으로 벼를 재배하던 사람이 당장 내년부터라도 보리 베어내고 마른 논에 볍씨 뿌려서 농사 지을 수 있다는 얘깁니까?
“수십년 동안 땅을 갈아엎고 독한 농약 쓰고 화학비료 쓰고 해온 땅을 단번에 되돌리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나 3∼4년 후면 땅이 본연의 상태로 되돌아옵니다. 그 때 땅을 향해서 ‘그동안 괴롭혀 드려서 죄송합니다’ 하고 큰절 한 번 올린 다음에 태평농법으로 농사를 지으면 됩니다.”
―정부에서는 태평농법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습니까?
“몇 년 전만 해도 위험한 농법이라고 농민들을 말렸는데 지금은 최소한 말리지는 않고 있는 단곕니다.”
취재를 마치고 돌아와 작물시험장 재배과에 전화를 걸어 태평농법에 대한 견해를 물었다. 이 농법을 잘 안다는 김순철 박사의 얘기는 이렇다.
“우리 실정상 벼농사는 생산성 극대화를 추구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아직 태평농법의 생산성은 불안한 상탭니다. 이런 상황에 태평농법을 일반화하는 것은 모험이지요. 물론 토양을 살리는 환경친화 농법으로 나름의 의미는 있습니다.”
개인이 소규모로 그런 방식의 농사를 시도하는 것 자체는 의미가 있으나 일반화하기는 위험이 따른다는 얘기였다.
그런데도 이씨에게는 종자를 보내달라는 주문이 쇄도한다. 태평농법으로 농사를 지어보고는 싶은데, 땅을 갈아엎고 농약과 비료를 쳐서 수확한 벼를 종자로 하는 것보다는 태평농법으로 수확한 볍씨가 더 좋을 것이라는 생각 때문이다. 특기할 만한 것은 모방의 천재인 일본 사람들이 이씨의 농법을 배워가서 벼농사에 적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들은 이씨의 무경운 이모작 직파농법(일명 태평농법)을 글자 하나만 바꿔서 ‘불경운 이모작 직파농법’으로 명명해놓고 있다. 한국에서 배워왔노라고 얘기하기가 싫은 탓일까.




두 아들도 농업전문학교 졸업반




이씨의 태평농법은 벼농사에만 한정되는 게 아니다. 그는 고추나 배추, 상추, 시금치, 파 등도 경운하지 않고 재배한다. 그는 그런 채소들을 가을철에 파종한다. 식물은 밤을 감지하기 때문에 밤에 자란다, 따라서 밤이 길어지면 결실도 크다, 그래서 가을에 심는다는 것이다. 배추며 상추가 겨울에 얼어죽지 않느냐고 이씨에게 물었다간 또 한참 동안 지청구를 들을 각오를 해야 한다. 비닐하우스가 생기면서 배추, 상추가 요즘처럼 됐지, 본시 그것들 모두가 월동식물이라는 것이다. 그는 고구마나 감자를 캘 때 알맹이만 빼내고 줄기가 어지럽혀져 있는 상태에 구멍을 내고 그 자리에 마늘을 심는다. 그래야 이듬해 잡초가 적게 난다는 설명이다. 한 마디로 땅에서 자란 것 중에서 먹을 것만 가져오고 나머지는 고스란히 두고 와야 한다는 것이다.
이씨의 두 아들은 경기도 화성에 있는 한국농업전문학교 졸업반이다. 자식들이 가업으로 전승하기를 망설이는 사람이 농사 짓는 얘기가 사람들에게 얼마나 신뢰를 주겠느냐는 취지에서 자식들한테 진학을 권했는데, 아버지의 농법하고는 반대되는 지식만 가르치니 공부할 맘이 안 난다고 투정이 대단하단다.
주로 벼농사 얘기만 소개했으나 사실 쌀 얘기는 그의 삶을 설명하는 데에는 그야말로 쌀 한 톨에 지나지 않는다. 그는 파도의 힘으로 손쉽게 전기를 일으켜 축전하는 파력 발전장치를 손수 만들어 그 아이템을 대덕연구단지에 넘겨줬고, 시화호같이 썩어가는 담수호를 살려내기 위한 그 나름의 실험을 몇 년째 하고 있다. 썩어가는 호소(湖沼)를 살릴 수 있는 그의 비책을 잠깐 들어보면 이렇다.
“부력 있는 천을 물 위에 띄워놓고 볍씨를 뿌립니다. 그러면 벼뿌리가 부영양화시킬 수 있는 물질을 영양분으로 흡수하게 되니까 물이 살아납니다. 또 햇볕을 차단하게 되니 부영양화를 막을 수도 있습니다.”
그의 농사 짓는 얘기와 땅에 대한 철학, 그리고 태평농법에 대한 상세한 얘기는 그가 최근에 펴낸 책 <모든 것은 흙속에 있다>(양문출판)에 담겨 있다.
이영문씨, 그는 이 진땀나는 농번기에 보리와 밀이 바람에 물결치는 자신의 들판을 태평스럽게 바라보고 서 있다. 속으로 이렇게 얘기하고 있는지 모른다. 이제 농민도 좀 쉬자.

 

-- 신동아 99년 7월호 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선자령 



경포 해수욕장 


 

"저번에 한번 항구에 갔는데 고등어가 엄청나더구만. 그냥 몇마리 사려고 했는데 어부 양반이 아이스박스를 가져오래. 그러더니 삽으로 푹푹 퍼서 담아줘. 그리고 나서 만원만 달래. 그래서 집에 가 마릿수를 세 봤지. 글쎄 56마리나 되더구만. 이걸 다 먹을 수 있나. 아파트 사람들하고 나눠 먹었지. 생물이라 그런지 정말 맛있더구만." 

식당의 손님들이 주고 받는 말이 옆 테이블까지 들린다. 아마도 연탄불에 양미리를 굽고 있는 모습을 보고 이야기를 꺼낸 듯 싶다.  

"요즘, 양미리 철인데 양미리가 안보여. 요 몇일 바람이 세서 배가 나가질 못한 모양이야. 이러다 어부들 손가락 빨게 생겼어. 날씨 더 추워지면 양미리 살이 통통 올라 맛있는데..." 

바다에 고기들이 넘쳐나도 바람이 세면 말짱 헛것이다. 어부들과 항구의 상인들은 바람이 멎기만을 바랄 뿐이다. 

그러나 그 바닷가엔 젊은 청춘들이 모여든다. 겨울 바다가 내뿜는 하얀 포말을 보기 위해서다. 바람이 거세면 그들의 웃음소리도 더욱 커진다. 겨울산을 찾는 사람들에게도 바람은 추억이다. 한바탕 눈 위를 걸으며 찬 바람을 맞아야 비로소 겨울맛을 느낀다.  

세상의 이치는 우산장수와 짚신장수 자식을 둔 엄마의 심정과 같은지도 모른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대구의료원 황성수 박사는 고혈압이 생겨 동맥경화증이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동맥경화증으로 인해 고혈압, 뇌졸중 등의 증상이 나타난다고 말한다. 동맥경화증은 기름진 식사가 원인이라고 분석하고 있다. 그래서 환자들에게 100% 현미밥과 채식, 과일 만을 먹도록 당부한다. 금지식품목록엔 고기, 생선, 흰쌀밥, 달콤한 것. 계란, 우유 등이 들어있다. 식이요법에 들어가는 순간부터 고혈압 약은 단 한알도 먹지 않는다.  

MBC 스페셜 <편식으로 고혈압잡기>에선 황 박사의 요법에 따라 고혈압을 치료해 간 사람들이 나온다. 그들은 평소 먹던 음식만을 바꿈으로써 평생 먹고 살아야만 된다고 생각했던 약을 끊을 수 있게 됐다는 희망을 본다. 다큐 속에선 나오지 않았지만 아마 중간에 포기하거나 또는 기대치에 못미치는 결과를 얻은 환자들도 물론 있었을 것이다.   

이번 다큐는 그 제목에서부터 제작자들의 의도가 엿보인다. 편식으로라는 단어를 씀으로써 우리들의 선입견에 일타를 가한다. '편식하면 안돼' 라는 금과옥조를 무너뜨리는 이 다큐는 그래서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고혈압 치료만으로 2조원 이상이 쓰이는 상황은 단순히 2조원이라는 숫자의 문제가 아니다. 만약 대부분의 사람들이 고기와 생선을 끊고 살아감으로써 동맥경화증과 관계된 질병들을 예방할 수 있다고 가정한다면 그것은 2조원의 문제를 떠나 사회적 변혁까지도 유발할 수 있기 때문이다. 고기를 끊는다는 것은 단순히 채식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병원과 제약회사, 낙농업, 화학회사, 수자원 등등 많은 기업들과 연관되어 있기 때문이다.(자세한 내용을 알고싶다면 <육식의 종말><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누가 우리의 밥상을 지배하는가> 등등을 참고)  

다큐는 이런 사회적 문제보다는 개인적 문제로 접근하고 있다. 이런 관점에서 지켜본 다큐 중 궁금했던 부분은 70, 80을 넘긴 할머니들의 선택이다. 30~40대들이야 평생 약을 먹고 살아간다는 것이 끔찍하게 느껴질뿐더러 약이라는 것이 근원적인 치료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기에 그 불확실성에 조마조마한 삶을 살고 싶어하지 않았을 것이다. 더군다나 약으로 인한 부작용도 문제가 될 수 있다. 하지만 생이 얼마남지 않은 분들이 자신이 좋아하는 생선이나 고기먹는 것을 포기하고 식이요법을 택하는 것은 언뜻 이해하기가 힘들었다. 그만큼 약을 먹는 것이 고통스러운 일이기도 하겠지만 그래도 먹고싶은 것을 못먹는 고통과 비교한다면야... 

그래서 곰곰히 생각해봤다. 표면적으로는 약을 끊는다는 것 자체가 큰 즐거움을 주기 때문이겠지만 심층적으로는 언제 죽을지 모른다는 두려움으로부터의 해방 때문에 선택한 것이지는 않을까. 고혈압으로 인한 뇌졸중의 위협으로부터 벗어난다는 사실 그 자체가 행복한 것일지도 모르겠다는 말이다. 그만큼 죽음은 공포스러운 것이니까. 아무리 죽음에 대해 덤덤하려 해도 그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니까.  

3탄까지 준비된 이 다큐가 과연 국민들에게 편식 바람을 일으킬 수 있을지 궁금하다. 물론 그 바람은 다른 바람이 그랬듯 잠깐 일고 잠잠해지겠지만. 더군다나 이 다큐가 죽음에 대한 직접적 공포를 전달할 순 없기에 더욱 그렇다. 그래도 그 바람의 영향을 받은 사람은 후일에 보다 더 큰 바람을 일으킬 수 있는 원동력이 될 것이다.   

 

 


댓글(1)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rkkf 2009-12-30 17: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좋은 정보 감사합니다.
자연정혈요법으로 질병의 고통에서 벗어나세요.
아파야 할 이유가 없습니다.
내 병은 내가 고치고 내가족은 내가 지킨다.
건강은 예방이 최 우선입니다.
http://blog.daum.net/sejnp
 

프리허그라는 캠페인이 있다. free hugs라고 쓴 피켓을 들고 포옹을 원하는 사람들을 안아주는 운동이다. 안아준다는 행위를 통해 따뜻함을 서로 나누는 것이다. 온정이 넘치는 사회를 만들기 위한 작은 실천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림의 오른쪽 밑부분에선 두 명의 병사가 진한 포옹을 나누고 있다. 전쟁터에서 살아돌아온 사람과 그를 애타게 기다렸을 사람의 마음이 포옹 하나로 모두 표현됐다. 이 포옹의 감격을 더욱 강렬하게 느끼도록 만드는 것은 왼쪽에 그려진 다치고 피흘려 죽어가는 병사들이다.  

현대사회는 하루하루가 전쟁이라고 한다. 치열한 경쟁 속에 놓여져 있기 때문이다. 프리허그는 그래서 그 하루하루를 살아남았다는 위로의 포옹일 수도 있겠다. 그러나 한편으론 보이지 않는 곳에서 쓰러져가는 사람들이 존재한다. 포옹조차 불가능한... 하지만 그들마저도 끌어안겠다는 것이 프리허그 운동일 것이다. 과연 불가능할 것처럼 보이는 그 꿈이 실현될 날이 올까. 일단 내 옆에 있는 사람부터 '꼬옥~'. 잘 살아가고 있다고... 잘 살아보자고.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MBC 주말 드라마 '보석비빔밥'엔 재미있는 캐릭터가 있다. 한국말을 잘 하는 외국인 카일. 그는 스님이 되기 위해 공부중인데 때론 어른스럽고 때론 어린아이 같은 그의 마음이 동정심을 일으킨다. 

하루는 비취가 같은 집에 세 들어 사는 영국을 아침식사에 초대한다. 즐거운 웃음 소리가 들려오는 가운데 카일은 혼자서 눈물 섞인 아침밥을 먹는다. 루비가 뚱해 있는 그에게 이유를 묻자 왜 자기만 차별하는냐고 서운해한다. 집에서 나와 집밥을 먹은지 오래돼 따뜻한 밥 한끼가 그리웠던게다. 루비는 비취 언니가 카일이 어색해할까봐 배려한 것이라고 말한다. 카일은 그걸 왜 자기한테 묻지도 않고 스스로 생각해 결정해버리냐고 서운해한다.  

갈수록 차가워진 세상 속에서 온기를 찾기 위한 방법으로 사람들은 배려를 말한다. 하지만 그 배려라는 것이 소통이 부재한 상태에서 이루어질 땐 배신감을 자아낸다. 배려가 우려와 염려를 자아내는 것이다. 상대방을 생각해 한 행동인데 그걸로 인해 상대방이 상처를 받고, 배려를 했다고 생각한 본인은 생각코 한 행동을 기뻐하지 않는 상대방을 보며 괘씸해한다. 이렇게 배려가 엉뚱하게도 상처를 주는 경우는 부모.형제.부부간에도 마찬가지다. 그렇기에 소통이 필요한 것이다. 속으로 생각하지 말고 겉으로 표현해야 할 때가 있는 것이다. 인간관계는 때론 말하지 않으면 모르는 게 당연하다는 전제로부터 출발해야 할 필요가 있다. 우린 남의 마음을 읽는 마술사, 초능력자가 아니기 때문이다.     

소통하지 않는 배려는 가시 달린 장미를 그대로 건네는 것과 같다. 가시를 제거하지도 조심하라는 주의사항을 말하지 않음으로써 간혹 상대에게 상처를 주는 것이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2009-10-19 18:18   URL
비밀 댓글입니다.

하루살이 2009-10-19 18: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보석비빔밥의 카일과 같은 처지를 한번 당하고 나서 곰곰히 생각하게 된 터라...
저도 타인에게 이렇게 행동하지 않았을까 많이 반성했다는...
 
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61 | 162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