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이 내리고 온 세상이 하얗게 뒤덮혔다. 길도 사라졌다. 순백의 세상이다. 아무도 걷지 않은 이 하얀 도화지에 발자국을 남기는 것은 왠지 모를 설렘을 준다. 먼저 걷는 기분. 두려움과 설렘이 교차하는 묘한 느낌이다.

 

누군가 이 발자국을 따라 걸을 것이다. 이내 다른 길로 접어들지 모르지만 발자국은 길을 인도한다. 그러나 한명 두명 발자국이 이어지다 보면 이 길은 가장 먼저 빙판길이 되어버린다. 발에 밟힌 눈이 점차 녹아 추위에 얼어붙는 것이다. 누군가 걸어간 길은 이렇게 미끄러운 법이다. 아무 생각없이 걷다가는 꽈당 넘어지기 십상이다.

 

그러니 긴장하라. 남의 길은 넘어지기 일쑤이니. 그러니 걸어보라. 새로운 길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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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강하게 장수를 누리다 돌아가신 어르신이 장기 기증을 하셨다. 그런데 심장을 보니 20대의 것처럼 튼튼했다고 한다. 언뜻 생각하기엔 이렇게 심장을 튼튼하게 유지했기에 장수가 가능한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실상은 20대 심장을 유지하기 위해 많은 영양분을 쏟아부어야만 했다. 즉 다른 장기에 골고루 쓰여져야 할 영양분이 낭비가 된 셈이다. 심장이 다른 장기와 비슷하게 늙어갔다면 이 어르신은 보다 더 오래 사셨을 가능성이 높다. 건강에 있어서도 지나침은 부족함만 못한 것이다.

동양의 오행을 바탕으로 한 인체관에 있어서 목,화,토,금,수 중 어느 하나가 너무 과해도 건강상에 문제가 발생한다. 힘이 세고 튼튼하면 좋은 것처럼 보이나 결코 그렇지 않은 것이다. 화평지인, 즉 중용의 도는 나의 몸을 건강하게 유지하는 데서도 꼭 필요한 방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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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물간의 관계는 경쟁, 공생, 포식, 기생 이렇게 4가지로 구분할 수 있다. 자본주의는 이중 경쟁을 특화해서 문명의 발전을 꾀한 것은 아닌가 생각해본다. 그런데 자연 속에서의 경쟁은 일정한 한계점을 둔다. 자원을 선점하기 위한 쟁탈 경쟁에 있어서 서로간의 영역을 침범하지 않는 선에서 생태계의 균형이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이 균형이 힘에서 비롯된 것인지, 협상에 의한 것인지는 정확히 알 수가 없지만 말이다.

자본주의를 굴러가게 만드는 경쟁은 시간이 지나면서 그 정도가 심해지게 되고, 급기야 경쟁으로 인해 포식이나 기생이라는 관계로 나아간듯하다. 즉 경쟁에서 이긴 개체가 모든 것을 다 갖는 포식자로서의 위치를 점하게 된 것이다. 이것이 바로 1%대 99%로 나뉘게 된 현재의 모습이지 않을까. 그리고 그 1%에 기생해서 겨우 목숨을 이어가는 사람들도 등장하게 된다. 하지만 이런 포식과 기생은 결코 영원할 수 없다. 포식의 대상이 되는 99%가 무너지면 포식자 또한 굶어죽게 마련이니까.

그래서 등장한 것이 바로 공생이다. 착한 경제라는 말로, 또는 복지라는 말로 우리 사회에 등장하게 된 공생은 생물간의 관계를 유지하기 위한 마지막 탈출구인 셈일지도 모른다. 경쟁은 하되 공생할 수 있는 법을 찾자는 것. 그것이 바로 이번 대선의 중요 쟁점사항이 될 것이며, 진짜 공생의 길로 함께 나아갈 수 있는 바른 지도자를 뽑는 것이 한국이라는 생태계가 살아남는 현명한 선택일 것이다. 우리는 공생해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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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니엘 크레이그가 제임스 본드가 된 이후 007 영화는 극장에서 보고 있다. 그의 맨몸 액션을 온몸으로 느끼고 싶어서다. 이번 스카이폴 또한 그의 액션을 기대했다. 그런데 이제 갓(?) 44세인 그가 몸을 사리기 시작했다.(테이큰의 리암 니슨이나 익스펜더블 속의 액션 영웅들의 나이는 환갑이 기본이다) 아날로그적인 그의 액션이 아날로그를 찬양한 이번 영화 속에서 아날로그를 말아먹는 기이한 현상이 일어나고 말았다.

 

1. 노장은 죽지 않는다

이번 007 스카이폴은 세대교체에 대한 이야기다. 아니, 나이 먹는게 죄가 아님을 선포한 영화다. 나이는 단지 숫자라는 CF카피를 영화로 표현한 것이다.

시대가 변해가니 첩보국도 불필요한 존재가 된 것이 아닌가 의구심이 들기 시작하고, 국장 M 또한 판단력에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닌지 의심받기 시작했으며, 제임스 본드 또한 죽어서도 살아나지만 체력적인 문제로 현장근무에서 떠나야 하는건 아닌가 염려되기 시작했다. 이는 오륙도를 지나 사오정, 삼팔선이 일상화된 우리나라만의 문제가 아니라 이젠 영국은 물론 전세계에 퍼진 구조조정의 칼날이 도처에 번득이고 있음을 보여준다. 하지만 우리의 본드는 체력적인 문제에도 불구하고 죽음에서 부활해 어려운 문제를 깨끗하게 정리해버린다. 나이 들었다고 무시하지 말라는 투다. 경륜, 연륜이라는 장점뿐만이 아니라 열정이 살아있다면 그 누구도 본드를 현장에서 내칠 수 없다고 말한다. 

감독의 이런 시선은 영화 곳곳에서 과거로의 회귀를 통해 강조된다. 007의 큰 재미중 하나였던 신무기 대신 과거 골동품에 가까운 총기가 달린 자동차가 나오고, 본드의 어린 시절이 담긴 고향이 주무대로 등장한다. 물론 그렇다고 무조건 옛것을 찬양하는 것은 아니다. M은 자동차를 보며 농담을 건네고, 본드는 고향집을 무척이나 싫어한다. 그럼에도 이 둘은 영화 속에서 본드를 살려주는 역할을 톡톡히 해낸다.

반대로 신무기 개발팀의 박사는 앳된 젊은이다. 본드는 백발의 박사가 아닌 젊은이가 개발팀에 있는 것이 흡족하지 않다. 하지만 그가 발명한 송신기로 목숨을 구한다. 또한 본드를 도와주는 여자 파트너는 현장근무를 택하지 않고 본드의 충고를 받아들여 사무직을 선택한다. 젊으면 현장에서, 나이들면 사무실에서. 이런 고정관념이 첩보국 안에서 다 깨져버린다. 결국 나이란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을 본드는 말하고 있는듯하다.

 

2. 그러나 그의 액션은 너무 나이가 들어버려 안타까울 지경이다. 맨몸으로 부딪히고 깨지는 액션은 약해지고 화력만이 거세졌다. 파르쿠르(야마카시)를 연상시키는 화려함 대신 무기를 선택한 것이다. 영화 초반 잠깐 비쳐진 액션, 그리고 중후반 이퀄리브리엄을 연상시키는 그림자 액션이 잠깐 눈에 들어올 뿐, 하이라이트라고 할 수 있는 종반의 액션은 과거로 회귀함으로써 다니엘 크레이그의 재능을 썩혀버리고 말았다. 아날로그에 대한 향수는 그저 휙 던져진 칼 한자루가 전부였다. 나이란 그저 숫자에 불과하다는 007스카이폴의 이야기는 그의 액션과 화답하지 못하고 돈만 쏟아붓는 안타까운 풍경을 자아냈다.

본 시리즈도 맷 데이먼이 빠지자 액션이 빛을 잃기 시작하더니 다니엘 크레이그 마저도 몸을 사리다니 너무 아쉽다. 이젠 이런 류의 액션은 테이큰 시리즈만 남은 건가. 애시당초 디지털로 무장된 액션이 아니라면 화력은 잠시 낮춰주는 것이 좋지 않을까. 익스펜더블의 노장들이 아쉬울 것 없이 퍼붓는 그런 화력은 그저 애처로울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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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89년 프랑스 혁명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남녀 3명의 사랑이야기를 다룬 <혁명가의 연인>은 24년 전 소피 마르소의 모습을 볼 수 있다는 점에서도 반가운 영화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 혁명의 진행과정에 참여한 두 청년이 시민권이나 자유, 평등과 같은 대의에 의한 것이 아니라 사랑때문이었다는 감독의 시선은 무척 솔직해보인다.

 

영화의 내용은 이렇다. 어릴적 형제같이 지냈던 세 남녀가 프랑스혁명 당시 뿔뿔히 흩어진다. 오렐은 미국으로, 타르깽은 파리로, 셀린느(소피 마르소)는 고향에 남아 대부인 백작의 글라이더 작업을 돕는다. 4년이 지나 공화주의자로 변신한 타르깽은 고향에 돌아와 군대를 징집하고 공화정 정치를 펼치고자 한다. 그리고 셀린느에게 아이들 교육을 맡긴다. 원래 셀린느는 오렐을 좋아하며 긴 세월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때 마침 오렐도 고향으로 돌아오고, 셀린느와 타르깽의 관계를 오해한다. 그래서 공화정과 반대인 왕정파에 몸을 담는다. 하지만 이내 혁명으로 야기된 전쟁의 참혹함에 고개를 돌리고 셀린느의 변치않는 사랑을 확인하며 함께 탈출을 시도한다. 타르깽은 셀린느를 차지하고자 연적 오렐을 죽이고자 했으나 오히려 셀린느의 총에 맞아 사망하고 만다.

 

영화 속에서 타르깽은 시민의 보편적 권리와 자유를 내세우며 무단정치를 펼치는데 이는 셀린느에 대한 가질 수 없는 사랑때문이었으며, 오렐이 잠시 왕정파에 몸담았던 것 또한 사랑의 배신이 준 아픔을 복수하고자 함이었다. 혁명이라는 이름하에 이루어진 전쟁의 밑바탕엔 사랑과 배신, 복수라는 감정이 들끓고 있었던 것이다. 감독의 이런 시선은 마치 제1차 세계대전의 원인이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페르디난트 대공이 탄 자동차가 길을 잘못 들었기 때문이라는 마크 뷰캐넌의 <세상은 생각보다 단순하다>처럼 명쾌해 보인다. 그리고 일견 이런 시선이 거대 담론들보다 피부에 와닿기도 하다. 역사라는 거대한 물결밑엔 무수히 많은 사람들의 개인적 감정과 감정들이 물고기처럼 부단히 헤엄치고 있지 않았겠는가. 그것을 인정하는 시선이 솔직해 마음에 와 닿는다는 이야기다.

 

한편 영화속에서 오렐이 혁명으로 피폐해진 고향 풍경을 보면서 "웃고 떠드는 시대는 가고 근엄한 연설가의 시대가 온 것인가"며 한탄하는 장면이 나온다. 물론 웃고 떠드는 시대는 귀족 계층의 몇몇 소수만이 누렸던 특권이었을 테지만, 아무래도 이 말이 가슴에 비수를 꽂는듯 아프게 다가온다. 우리는 세상을 바꾸겠다며, 또는 세상이 바뀌기를 바라며 근엄한 연설가처럼만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닌가 둘러보게 된 것이다.

 

웃고 떠드는 시대는 진정 가버렸을까. 혁명의 시대엔 웃고 떠드는 것이 마땅치 않은 일일까. 오늘 하루하루가 웃고 떠드는 시대가 되기를 바라는 것, 이것이 진짜 혁명의 길이어야 하지 않을까. 아니 꼭 구태여 혁명이라는 말도 필요없다. 그저 하루하루가 웃고 떠드는 시대가 되었으면 좋겠다. 무슨무슨 푸어로 시름받는 세상이 살만한 세상으로 바뀌는 그 과정의 길에서도 엄숙함보단 웃고 떠들 수 있는 명쾌함이 함께 갈 수 있다면 좋겠다. 그래서 이번 대선이 축제의 장이 될 수 있기를 바라는 것이 과한 욕심이 아니길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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