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

 

 

 

 두타산 쌍폭포

 

모든게 얼어붙었다. 한강도 그 출렁거림의 자태 그대로 멈춰섰다. 산 중의 폭포도 꼼짝하지 못한다. 언다는 건 마치 시간이 정지한듯한 인상을 준다. 움직임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 즉 변화가 없다는 것은 시간이 사라진 것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 삶도 얼어붙어 있는 것은 아닌지 연초 돌아보는 것은 어떨까. 변화없는 일상의 되풀이. 물론 안정적인 삶이라는 자양분 속에서 행복을 키워나갈 수도 있겠지만 그보다는 왠지 모를 권태가 느껴지는 단어다. 느림이 주는 여유가 아니라 바삐 돌아가지만 반복되는 것, 그래서 내가 어디 서 있는지조차 가끔씩 잊어버리게 하는 것. 우린 얼음 나라에 살고 있는 것은 아닐까. 아님 나를 얼려버리고 얼음 속에 갇혀 지내온 것은 아닐까.

수십년 만의 한파 속에서 내 몸과 마음이 온통 꽁꽁 얼어있었던 것은 아닌지 생각해본다. 살아움직인다는 것, 그것은 얼음을 깨고 봄을 부른다는 것이다. 변화의 싹을 틔운다는 것이다. 그래, 기지개 한번 켜고 봄을 불러보자. 세상이 온통 얼어붙어 있다 하여도.

 

 

 

 얼어붙은 꽃망울 속에서도 봄은 움트고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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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행동 하나도 정성을 기울여 하는 것이 곧 명상이고 마음 공부라는 생각이 든다. 차 한 잔을 마실 때도 시선을 가능하면 먼곳에 두고 천천히 한 모금씩 마시면서 감사하는 마음을 갖는 것이 곧 명상하는 태도다. <지리산에서 보낸 산아초 차이야기 2> 61쪽

멈추지 않으면 볼 수 없고, 보지 않으면 귀 기울일 수 없다는 말은 숨길 수 없는 진리다. 114쪽

 

습관적으로 하는 행동들이 있다. 좋은 습관도 있고, 나쁜 습관도 있을 것이다. 우리가 이렇게 습관을 갖는 것은 매 순간 순간 새로운 것을 배우고 행하듯 살아간다면 그 정보의 홍수에 뇌가 지쳐 쓰러질지도 모르기 때문일 것이다. 어떤 상황에서 어떤 행동을 할 것인지를 순간마다 결정하는 것은 무척 피곤한 일이지 않던가. 그래서 우리는 습관을 만든 것일지 모른다.

그런데 습관이 형성되면 우리는 마치 자동기계처럼 행동해버린다. 그 습관의 동기화 따위는 잊어버린채 말이다. 그래서 가끔은 그 습관을 바라보는 일이 필요하다. 왜 이런 습관이 생겼고 이것이 나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 살펴보는 것은 나를 새롭게 만드는 일이기도 하다. 이렇게 습관을 새롭게 바라보는 것, 이것이 바로 명상이지 않을까. 작게는 커피나 차를 마시는 일에서부터 크게는 오늘 하루 전체를 돌아보는 일. 그리고 곰곰히 귀 기울이고 들여다보는 일. 명상이 따로 있는 것은 아닐듯 싶다.

그렇기에 나를 바꾸고자 한다면 명상을 해보는 것이 어떨까. 나의 습관을 천천히 들여다보는 일부터 시작해보는 것은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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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타산 관음암과 관음폭포

 

 

강원도 두타산에 있는 두타산성에서 바라본 겨울 관음암은 절경이다. 마치 관음암에서 떨어지는듯 길게 얼어붙은 관음폭포가 그 신비함을 더해준다. 나무들 사이에 숨기듯 안겨있는 관음암은 자세히 들여다보지 않으면 놓치기 십상이다.

이렇듯 대부분의 암자는 사람을 피해 숲으로 들어간다. 관음 즉 관세음보살이란 중생의 고통에 찬 소리를 듣고 대자대비의 마음으로 고통을 걷어내고 왕생의 길로 인도하는 보살이다. 그런데 왜 관세음보살암자는 산으로 들어간 것일까. 왜 사람들의 소리를 듣지 않는걸까. 깨우침은 관계를 끊음으로써만 가능한 것일까. 깨우친 후에야 비로소 산을 걸어나오는 것일까. 청정한 곳에서의 깨우침은 과연 풍진 세상의 중생들에게 어떤 의미로 다가설 수 있을까.

반대로 관음암을 바라보고 있는 두타산성은 피로 얼룩진 곳이다. 임진왜란 때 피난 온 백성들을 왜구들이 무자비하게 살육한 곳이다. 이곳 험한 산 중턱까지 산성을 쌓고 목숨을 부지하고자 했던 백성들을 쫓아와 죽여야만 했던 그 잔인한 마음은 어디에서 온 것일까.

관음암과 두타산성. 서로 마주보고 있는 인간의 두 건축물이 삶의 비애를 한껏 느끼게 만든다. 피하고자 했지만 피할 수 없는 곳, 피해야만 피하지 않을 수 있는 곳. 삶은 아이러니다.

 

 

 

 

 

동해 등대에서 바라본 두타산, 청옥산 전경. 가운데 부분 제일 먼 곳에 보이는 산줄기가 두타산과 청옥산 정상이다. 두타산, 청옥산을 가려면 동해고속터미널에서 길건너편 시내버스를 타고 1시간 가량 들어가면 된다. 시내버스는 약 30분마다 1대씩 무릉계라 써있는 것(12로 시작되는 버스)을 타면 된다. 두타산의 시작은 해발 150m 정도여서 다른 산들에 비해 낮은 곳부터 걸어올라가야 한다. 그만큼 생각보다 힘든 곳이다. 두타,청옥을 한번에 종주하려면 7~9시간 정도 넉넉히 잡아야 한다. 겨울산행 미끄러운 길을 생각한다면 더 서둘러야 할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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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률의 <끌림>이라는 책에선 이런 대목이 나온다.

어딘가 먼 곳으로 여행을 갔다가 너무나도 소중하게 생각한 걸 그만, 두고 온 거다. 도저히 포기할 수 없는 건데 과연 나는 찾으로 갈 성격인가, 아닌가 하는 생각.

그것이 물건이라면 포기하겠지만 사람이라면 아주 많이 다를 것이라는 저자의 생각에 100% 동감한다. 그런데 그 사람이 나를 따라오지 않겠다면 어떡해야 할까. 아니, 그렇게 포기할 수 없을 정도로 소중한 사람이 있긴 한걸까.

사람을 믿지 않으면 끝이다. 그렇게 되면 세상은 끝이고 더 이상 아름다워질 것도 이 땅 위에는 없다.

위의 말은 또 어떤가. 맨처음 했던 가정에 대입해보자. 이번엔 반대로 내가 남겨진 대상이라고 해보자. 홀로 낯선 곳에 떨어져 있을 때 누군가가 나를 데리러 올 것이라 믿는 그 사람이 있는가. 지금 사랑하고 있는 바로 그 사람은 끝끝내 나를 찾으러 올 것인가. 그 믿음이 흔들린다면 세상이 흔들린 거다. 그러나 믿는다. 누군가 흔들리는 나의 손을 잡아줄 것임을. 나또한 흔들리는 누군가의 손을 잡을 것임을. 기어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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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간 자리엔 흔적이 남습니다.

폭풍우로 인해 나무가 쓰러지기도 하고, 거센 파도에 휩쓸려 해안도로가 무너지기도 합니다. 지나간 것들이 너무나 거대하기에 남겨진 흔적도 큰 상처를 남기기 십상입니다.

하지만 부드러운 봄바람에 꽃망울이 터지기도 하고, 잔잔한 파도가 지나간 모래사장 위엔 아름다운 무늬가 만들어지기도 하지요. 따듯한 어루만짐 뒤에는 아름다우면서도 새로운 무엇인가가 탄생합니다.

 

 

그렇다면 사랑이 지나간 자리엔 어떤 흔적이 남아있을까요. 

폭풍우같은 정열적인 사랑이 끝난 자리엔 가슴을 후벼파는 생채기만 남아있을까요. 사람의 체온처럼 크게 변하지 않으면서도 따스했던 사랑이 아련하게 떠나가면 아름다운 추억만이 고스란히 빈자리를 차지할까요.

사랑이 지나간 자리의 흔적은 사랑의 크기와 별 상관이 없어보입니다. 아주 작은 생채기도 마음을 도려낸 듯한 큰 상처도 아프긴 매 한가지이니까요. 더 큰 아픔이란 그저 산수일 뿐입니다. 아픔에는 더 큰 것도 작은 것도 없어보입니다. 다만 언제쯤 상처가 아물지 그 시간의 정도에 차이가 있을지 모르겠네요. 그러나 절대 비례관계는 아니라는 것이 우리를 더욱 슬프게 만듭니다. 흔적은 끝끝내 아무런 흔적도 없이 사라지지 않는 법이니까요. 그 흔적이 아름답게 남아있기만을 빌 뿐입니다. 저주의 말을 내뱉지 않는, 미워하지 않는, 서러워 않는, 그래서 비온 뒤 해가 뜨면 무지개라는 흔적을 남겨주듯. 그렇게 사라져가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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