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89년 프랑스 혁명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남녀 3명의 사랑이야기를 다룬 <혁명가의 연인>은 24년 전 소피 마르소의 모습을 볼 수 있다는 점에서도 반가운 영화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 혁명의 진행과정에 참여한 두 청년이 시민권이나 자유, 평등과 같은 대의에 의한 것이 아니라 사랑때문이었다는 감독의 시선은 무척 솔직해보인다.

 

영화의 내용은 이렇다. 어릴적 형제같이 지냈던 세 남녀가 프랑스혁명 당시 뿔뿔히 흩어진다. 오렐은 미국으로, 타르깽은 파리로, 셀린느(소피 마르소)는 고향에 남아 대부인 백작의 글라이더 작업을 돕는다. 4년이 지나 공화주의자로 변신한 타르깽은 고향에 돌아와 군대를 징집하고 공화정 정치를 펼치고자 한다. 그리고 셀린느에게 아이들 교육을 맡긴다. 원래 셀린느는 오렐을 좋아하며 긴 세월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때 마침 오렐도 고향으로 돌아오고, 셀린느와 타르깽의 관계를 오해한다. 그래서 공화정과 반대인 왕정파에 몸을 담는다. 하지만 이내 혁명으로 야기된 전쟁의 참혹함에 고개를 돌리고 셀린느의 변치않는 사랑을 확인하며 함께 탈출을 시도한다. 타르깽은 셀린느를 차지하고자 연적 오렐을 죽이고자 했으나 오히려 셀린느의 총에 맞아 사망하고 만다.

 

영화 속에서 타르깽은 시민의 보편적 권리와 자유를 내세우며 무단정치를 펼치는데 이는 셀린느에 대한 가질 수 없는 사랑때문이었으며, 오렐이 잠시 왕정파에 몸담았던 것 또한 사랑의 배신이 준 아픔을 복수하고자 함이었다. 혁명이라는 이름하에 이루어진 전쟁의 밑바탕엔 사랑과 배신, 복수라는 감정이 들끓고 있었던 것이다. 감독의 이런 시선은 마치 제1차 세계대전의 원인이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페르디난트 대공이 탄 자동차가 길을 잘못 들었기 때문이라는 마크 뷰캐넌의 <세상은 생각보다 단순하다>처럼 명쾌해 보인다. 그리고 일견 이런 시선이 거대 담론들보다 피부에 와닿기도 하다. 역사라는 거대한 물결밑엔 무수히 많은 사람들의 개인적 감정과 감정들이 물고기처럼 부단히 헤엄치고 있지 않았겠는가. 그것을 인정하는 시선이 솔직해 마음에 와 닿는다는 이야기다.

 

한편 영화속에서 오렐이 혁명으로 피폐해진 고향 풍경을 보면서 "웃고 떠드는 시대는 가고 근엄한 연설가의 시대가 온 것인가"며 한탄하는 장면이 나온다. 물론 웃고 떠드는 시대는 귀족 계층의 몇몇 소수만이 누렸던 특권이었을 테지만, 아무래도 이 말이 가슴에 비수를 꽂는듯 아프게 다가온다. 우리는 세상을 바꾸겠다며, 또는 세상이 바뀌기를 바라며 근엄한 연설가처럼만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닌가 둘러보게 된 것이다.

 

웃고 떠드는 시대는 진정 가버렸을까. 혁명의 시대엔 웃고 떠드는 것이 마땅치 않은 일일까. 오늘 하루하루가 웃고 떠드는 시대가 되기를 바라는 것, 이것이 진짜 혁명의 길이어야 하지 않을까. 아니 꼭 구태여 혁명이라는 말도 필요없다. 그저 하루하루가 웃고 떠드는 시대가 되었으면 좋겠다. 무슨무슨 푸어로 시름받는 세상이 살만한 세상으로 바뀌는 그 과정의 길에서도 엄숙함보단 웃고 떠들 수 있는 명쾌함이 함께 갈 수 있다면 좋겠다. 그래서 이번 대선이 축제의 장이 될 수 있기를 바라는 것이 과한 욕심이 아니길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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