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텔 정원에서 생긴 일
온다 리쿠 지음, 오근영 옮김 / 노블마인 / 200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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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책을 읽으면서도, 그리고 마지막 장을 덮으면서도 혼란스럽다. 도대체 소설 속 어디까지가 현실이고, 어디까지가 연극 대본인지를 알 수가 없다. 그래서 줄거리를 요약한다는 것도 쉽지가 않다.

소설은 크게 현실과 대본, 그리고 대본 속 연극(또는 극 중 극)이라는 세 가지 장소(?)에서 벌어지는 일이 뒤얽혀 있다. 현실에서는 빌딩 숲 사이 카페로 둘러싸인 광장에서 젊은 여자가 죽고, 극 중에선 극작가가 죽었다고 생각되어지지만 마지막 장을 덮고 나서는 이것마저도 확신할 수 없다. 각 장소에서 벌어진 사건들의 범인은 누구일까 곰곰히 쫓아가다보면 현실 속 범인과 극본 속 범인을 헷갈리게 된다. 아니 범인이 서로 상관관계를 맺으면서 극도의 혼란에 빠뜨린다. 그러니 줄거리를 요약해 보겠다는 생각은 포기한다. 다만 소설이 이야기하고 있는 사람과 세상의 관계에 대해서만 잠깐 이야기해보려 한다.

인생은 연극이라고 흔히들 말한다. 이때의 연극은 희노애락이 함께 녹아있는 터전이라는 뜻일테다. 그 속에서 웃고 울고있는 우리는 각자가 배우인 셈이다. 그런데 소설 속에선 말 그대로 우리의 삶이 연극이라고 말한다. 즉 우리는 각자 허구의 삶을 연기하며 살고 있는 배우이며, 인생은 바로 그런 허구들로 이루어진 연극이라는 것이다.

사람은 남들에게 보임으로써 예뻐진다. 여자만이 아니다. 남자도 그렇다. 사람은 타인의 시선에 의해 제2의 자신, 밖에서 본 자신이라는 존재를 완성해가는 것이다. 사람은 보이는 것, 연기하는 것에서 쾌감을 느낀다. 소설, 드라마, 게임. 전에 없을 정도로 허구가 소비되고 있는 이 시대. 자신을 허구 안의 등장인물로 간주하는 것이 큰 오락 가운데 하나가 된 것이다. 일찍이 그것은 은밀한 재미였다. 영화나 소설 속의 주인공에게 감정이입함으로써 사람들은 타인의 인생을 상상했다. 그러나 지금 사람들은 당당하게 타인이 되기를 원한다. 드라마 속의 주인공이 예전의 대스타에서 자신과 비슷한 타입의 사람으로 바뀌면서부터 자기도 히로인이 될 수 있다고 착각하기 시작한 것이다.(245쪽)

그래서 도시를 바라보면 상점이나 카페 등의 벽은 유리가 되어 서로 보이고 보는 것에 탐닉한다고 작가는 말한다.

자신을 연기하지 않는 사람은 이 세상에 없을 거예요., 자신에게 부여된 역할을 의식하고 집 안에서도 회사에서도 사회에서도 요구되는 모습을 연기하고 있지요. 그러니까 우리 배우는 당신들이기도 해요. (367쪽)

세상은 보여지고, 또 보는 것으로 관계되어진다. 그속에서 우리는 잘 보이기 위해 연기를 한다. 연기는 거짓이다.

인간은 누구나 거짓말을 하지요. 보신을 위해, 허영 때문에, 자존심 때문에. 무관심, 질투,회유, 자비, 상식, 변덕. 이 중 어떤 것이라도 거짓말을 할 이유가 되지 않겠습니까. 오히려 거짓말을 하지 않는 이유를 찾는 게 더 어려울 정도지요.(76쪽)

보여진다는 의식은 늘 허구를 갖고 있다. 내부 정원은 보는 자와 보여지는 자 쌍방에게 연기를 강요한다. (390쪽)

그렇다면 이렇게 거짓 연기로 이루어진 관계 속에서 타인에 대한 이해가 가능할까.

사람의 마음과, 뭔가를 달성하는 동기라는 건 도무지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기껏해야 이렇지 않았을까 상상하거나 어거지로 끼워맞추거나 설명할 수 있는 말을 찾는 것이 고작입니다.(337쪽)

이해할 수 있기 때문에 그 사람을 좋아하게 되는 경우도 있고 이해할 수 없기 때문에 그 사람을 좋아하게 되는 경우도 있어. 사람의 마음이란 참 이상한 거지.(240쪽)

그래서 인생이란 어떤 모습일 것인가?

그토록 원했지만 가질 수 없는-그렇다, 지금 우리처럼. 그야, 현실이란 그런 게 아닌가. 대부분의 인생은 사람이 그렇게 오래도록 원하기만 하고 인생 쪽에서는 사람을 원하지 않는다.
(350쪽)

"내 속엔 내가 너무도 많아"라는 가삿말은 수많은 가면을 쓰고 있는 나를 표현하는 또다른 말일 것이다. 가면은 내가 서 있는 장소에 따라 바뀐다. 또 내가 지금 대면하고 있는 사람에 따라서도 바뀐다. 마치 중국 사천 지방 특유의 경극인 변검술을 익힌 사람들처럼 말이다. 난 절대 그렇지 않다고 부정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 것인가. 아니 한명이라도 존재할 수 있으려나. 그래, 그 가면들을 인정한다면 세상은 또 타인은 어떻게 대해야 할 것인가. 거짓을 없애자고 칼을 휘둘러 허영과 그림자를 물베듯 베려 허우적대지 말고, 차라리 그 수많은 가면들을 인정하는 것은 어떨까. 비록 그것이 이해가능한 수준을 넘어설지라도 사람과 사람을 잇는 끈이 더욱 견고해질 수는 있지 않을까. 그리고 나를 향한 그 가면에 집착하지 않되 그 가면을 벗고 다른 가면을 쓰지 않도록, 그리고 나 또한 그 사람 또는 그 환경 앞에선 흐뜨러지지 않도록 최선을 다한다면 그것으로 족한 것은 아닐까. 가면을 쓰고 최대한 멋진 연기를 펼친다면 박수를 받으며 퇴장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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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쉬 스토리
이사카 고타로 지음, 김소영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0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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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최근 읽은 일본 소설 중 가장 재미있게 읽었다. 이사카 코타로라는 작가 기억해야 겠다. 단숨에 읽게 만드는 힘은 어디에 있을까. 대부분 수수께끼를 풀어나가는 방식 그 자체의 재미와 함께 소설이 이야기하고 싶어하는 것에 대한 흥미 두 가지 모두를 잘 잡아나가고 있기 때문이지 않을까 싶다.

소설은 4개의 단편으로 구성되어 있다. 동물원의 엔진, 새크리파이스, 피쉬스토리, 포테이토칩.

동물원의 엔진은 한밤중 동물원 늑대 우리 앞에서 엎드려 자고 있는 남자와 이를 지켜보는 세명의 남자들의 이야기다. 왜 이 남자는 늑대 우리 앞에서 자고 있을까 하는 의문에서부터 시작해 최근 일어난 시장 살인사건과 늑대의 우리 탈출이 얽혀 들어간다. 개인적으로 이 소설은 세상에 대한 냉소로 가득차 있다고 보여진다. 우리로 둘러싸인 세상, 또는 지금 자신이 살아가고 있는 환경이 바로 동물원 우리와 같다고 했을 때, 과연 이 우리로부터의 탈출은 유토피아일까. 소설은 탈출해봤자 별거없다고 말한다. 오히려 예상치못한 위험에 직면하거나 무기력증에 빠질 뿐이다. 이것은 늑대와 늑대 앞에 있는 남자가 말해주고 있다. 반면 우리 안에서 생활하는 것은 안전하면서도 그나마 달콤한 생활을 보장해 주는 것일까. 우리 앞 남자를 지켜보던 주인공을 포함한 세남자들이 우리 안의 생활 또한 별볼일 없다고 말해준다. 그럼 도대체 어쩌란 말인가. 그래서 작가는 말한다. 그래서 어쩌겠냐고.

그런데 세번째 소설 새크리파이스를 보면 또다른 느낌을 건넨다. 20여년전과 현재, 그리고 30여년 전과 10년 후. 과거와 미래의 시간을 오가며 세상이 어떻게 얽혀있는지를 보여준다. 노래 한 곡이 어떤 인연의 끈을 타고 흘러가 세상을 구하게 되는가 하는 사연이 정말 극적으로 펼쳐진다. 세상은 준비된 자의 뜻대로 이루어진다는 이야기다. 슈퍼영웅에 대한 이야기처럼 들리지만 평범한 사람이 세상을 구하게 된 이야기다. 그것도 아주 평범한 사건을 계기로. 그런데 작가의 시선이 흥미롭다. 세상을 구한다고? 그래서 뭐 어쩔건데라는 듯 소설 속 주인공을 바라보는 것 같다.

두번째 새크리파이스는 본업은 빈집털이범이면서 부업은 탐정인 구로사와라는 남자가 행방불명인 사람을 찾아 오지 마을에 들어가 벌어진 일을 다루고 있다. 옛날옛적 산적들로부터의 피탈을 피하고자 이루어졌던 이상한 풍습에 대한 이야기가 주를 이룬다. 풍습에 대한 작가의 시선이 따갑다.

풍습이란 건 다 그런 거 아니겠어. 무엇을 숨기려고 그럴싸한 이유를 갖다 붙이는 거지. 공포나 죄책감 같은 거 말이야. 그리고 욕망 같은 거. 그런거야. 그런 것들을 어영부영 얼버무리려고 풍습이라든가 설화라든가, 그런 게 생기는 거 아닐까.(74쪽)

정보라는 건 진실의 정도나 증거보다는 받아들이는 사람의 수요에 반응하는 거야.(130쪽)

소설을 읽고나면 세상에 존재하고 있는, 너무나 당연시받아들이고 있는 풍습 또는 제도에 회의적인 눈길을 보낸다. 정말 이것은 어떻게 해서 탄생했을까, 그리고 지금도 그것은 유효한가. 맹목적으로 살아가는 것, 그리고 회의하는 것, 세상은 어떻게 달라질까. 작가는 이런 것에서도 장난을 친다. 그래서 소설은 즐겁다.

마지막 단편 포테이토칩은 범상하지 않은 듯, 또는 약간 모자라는듯, 하지만 마음만은 너무나도 착한 빈집털이범에 대한 이야기다. 야구선수 오자키의 집을 털려다 문득 걸려온 전화를 받으면서 우연한 사건에 휘말리게 되는 이야기. 하지만 정작 이야기의 중심은 핏줄과 연관되어 있다. 하지만 이것을 바라보는 작가의 시선은 여유롭다. 콩소메맛을 먹고 싶었지만 무심코 집어먹은 소금맛 포테이토칩도 괜찮다고 깨닫는 주인공 여자친구 오니시의 심정과 똑같다.

절망으로 빠지지 않은 세상에 대한 냉소. 그렇다고 장밋빛 희망으로 넘쳐나 있는 것도 아니다. 세상은 그저 SO WHAT일뿐. 즐거울수도 슬플 수도 있다. 때론 절망 속에서 희망을 보기도 한다. 하지만 희망은 지속되지 않는다. 그래서 세상은 돌고 우리는 살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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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위 들고 달리기
어거스텐 버로스 지음, 조동섭 옮김 / 시공사 / 200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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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당신이라면 살 수 있겠는가? 13세. 어머니는 정신분열증을 겪는 시인. 아버지는 알코올 중독자. 어머니는 아버지가 가족을 살해할 것이라는 과대망상증에 시달린다. 그래서 의지하고 있는 사람이 핀치 박사. 하지만 이 정신과 박사는 오히려 정상이 아닌듯하다. 그리고 또 그 가족은 어떤가. 자유방임 가족이다. 이 가족 밑에서 살아야하는 아이. 30대 사내와 동성애에 빠진 아이. 이건 소설이다. 하지만 실화다.

과연 주인공은 소위 우리가 말하는 정상적인 아이로 자랄 수 있었을까? 차라리 자살을 꿈꾸는 것이 나을법도 하건만, 그는 그 가족들 사이에서 자기 방식대로 끝까지 버텨냈다. 아니, 살아냈다. 그리고 희망을 찾아냈다. 그것이 절망이 아닌 체념으로 비쳐질지라도 그것은 그에게 희망이었을지도 모른다. 마치 컬트 무비를 보는듯한 소설은 정말 현실인가를 의심하게 하지만, 사람이란 얼마나 끈질긴가를 보여주고 있는 듯하다.

핀치 가족과 더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면서 학교라는 이 똥통이 내 인생에서 얼마나 큰 낭비인지 절감하게 되었다. 별다른 계획이나 생각이 없는 아이들을 가둬두는 감방일 뿐이었다. (121쪽)

핀치 가족은, 규칙은 자기 스스로 정해야 한다는 사실을 나에게 몸소 가르쳐주었다. 내 인생은 나의 것이며 어떤 어른도 대신 내 인생의 틀을 잡아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122쪽)

바로 이 깨달음이 주인공을 현실에서 버티고 나아가게 만든 힘이었다고 생각한다. 혼돈 속에서 지켜내고 믿을 것은 오직 자신밖에 없다.

넌 자유의지를 가진 자유인이다. 핀치 박사는 그렇게 말하곤 했다. 그런데 왜 늘 그렇게 갇힌 듯한 기분이 들었을까? (중략) 무엇보다 나는 자유롭고 싶었다. 하지만 무엇으로부터? 그것이 문제였다. 무엇으로부터 자유롭고 싶은지 알 수 없으니, 콱 막혔다. (358쪽)

자유의 참뜻을 생각하게끔 만드는 부분이다. 세상을 버텨나가기 위해 스스로 세운 규칙으로, 다시 말해 자기 마음대로 살아가지만, 그것이 오히려 삶을 막막하게 만든다.

우리 인생은, 가공식품 패스트푸드와 가끔 생기는 위기나 재미있는 호기심으로 쉼표가 찍히는 끝없는 불행의 연속이다.(379쪽)

그의 인생을 돌이켜보건대 필시 그럴 것이다. 막막함 속에서 암흑 속에서, 그럼에도 그는 어떻게 굳건히 살아갈 수 있었는가.

물론, 세상이 달랐다면 더 좋았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눈을 굴리고, 어쩔 것인가? 어깨를 으쓱한다.(417쪽)

그렇다. 어깨를 으쓱할 뿐이다. 그 으쓱한 어깨 사이로 희망이 찾아온다. 붉은 태양과 같은 희망이 아닐지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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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혼녘 백합의 뼈
온다 리쿠 지음, 권남희 옮김 / 북폴리오 / 200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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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이 소설은 음모의 냄새가 풀풀 풍긴다. 감춰진 것들을 들춰내기 위한 가족들간의 심리전과 어둠의 집을 둘러싼 집안 사람들과 동네 사람들간의 관계가 소설을 흥미진진하게 만든다. 게다가 뜻하지 않은 반전. 그리고 끝났다고 생각하는 순간 또 다시 찾아오는 반전. 반전의 반전은 기대하지 않은 하지만 그랬어야만 하는 결과를 가져온다. 소설의 재미가 한층 업그레이드되는 부분이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소설이 재미있는 것은 왠지모를 음습함이다. 그 음습함은 악와 선의 싸움에서 비롯된다.  

악은 모든 것의 근원이다. 선 따위, 어차피 악의 윗물 중 한 부분에 지나지 않는다. 약을 돋보이게 하는, 말하자면 손수건 테두리의 자수 같은 것일 뿐이다. 그렇지 않고는 왜 늘 선이 그렇게 약하고 무르고 덧없는 것인지에 대해 설명할 수 없다. 이 세상 모든 것은 거대한 악의 침대에서 태어나는 것이다. 그리고 악의 침대는 늘 새로운 피가 필요하고, 그 피를 타고난 자는 어느 시대에나 반드시 존재한다. 악의 존속은 인간의 필연이며, 자연의 섭리에 따라 강하게 운명지어지는 것이다. 그러나 와타루는 다르다. 와타루는 윗물의 행복한 한 방울. 그는 밝은 빛 속을 걸어갈 수 있다. (157쪽)

소설 전체의 분위기는 바로 이 부분때문에 음습하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왜 악의 근원인 주인공들이 선을 지키려 애쓰는지 의문이다. 바로 그 부분에서 소설이 진행되는 힘을 얻는다.

그렇다. 선 따위는 악의 윗물의 한 방울. 악의 매력에 비하면 이른 아침의 덧없는 안개 같은 것. (293쪽)

하지만 그 안개는 또는 한 방울은 절대 악의 물에 섞여들지 않는다. 안타까움은 그곳에서 발생한다. 악마끼리 손을 잡은 그림을 본 기억이 없다. 물론 천사끼리도 그런 것 같다. 하지만 끼리끼리 통하는 법. 악마도 때론 천사를 자신의 친구로 삼고 싶어할지도 모른다. 그 마음은 악인가, 선인가.

소설이 생명을 얻는 부분이 바로 이런 갈등 때문이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소설의 맥락과 전혀 상관없을지라도 이런 고뇌가 소설 읽는 재미를 더했다.

이렇게 자각하지 못하는 악은 무엇인가. 그녀의 바탕에는 내가 감히 다가갈 수 없는, 깊고 넓은 악의 늪이 펼쳐져 있는게 아닐까. 그런 늪은 나 같은 사람도 삼켜버리는 게 아닐까.(300쪽)

이 부분이 소설을 소름끼치도록 만드는 부분이다. 악마는 악을 의식하고 악을 저지르지만, 악을 의식조차 하지 못하고 저지른 사람들은 도대체 무엇일까. 흔히들 사이코패스라고 부르는 그런 도덕적 의식 자체가 사라진 것과는 사뭇 다르다. 악의 무의식이 의식을 뚫고 나왔다가 이내 의식이 자리를 잡으면 사라지는 악. 그러나 영원히 자리 잡고 있는 악의 무의식. 세상이 무서운 것은 바로 이 악의 무의식 때문이지 않을까. 소설의 마지막 장을 덮으면서 악마보다도 무서운 것을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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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caru 2007-06-28 16: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일단 보관함에 넣습니다. 삼월의 붉은 구렁이 인가 뭔가를 위시하여...
요즘 이 작가를 말하는 사람들이 많이 보이더라고요.
아직 한편도 읽을게 없지만. 몹시도 궁금터라는.. "악"을 잘 묘사하는 사람인가 보군요.
 
마호로 역 다다 심부름집 - 제135회 나오키 상 수상작
미우라 시온 지음, 권남희 옮김 / 들녘 / 200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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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은 다다와 교텐이라는 두 남자의 이야기다. 고교 동창이라는 사실, 교텐의 잘렸다 다시 붙여진 새끼 손가락과 서로 연관이 있었다는 사실 정도만 남겨두곤 역 앞에서 우연히 만나 생활을 같이 하게 되는 두 이혼남이다. 둘의 사랑, 결혼, 이혼 등에 대해서는 마치 수수께기를 풀어가듯 이야기가 펼쳐지니, 굳이 여기에서 밝힐 필요는 없을 것같다.

이책은 이혼과 결별이라는 상처로 인해 가슴 속에 품어둔 허무와 절망이 두 남자의 만남 속에서 희망으로 변해가는 모습을 담았다고 말할 수도 있겠다. 그래서 작가는 마지막 결론에 행복은 재생된다고 다다의 입을 통해 자신있게 전달하고 있는 것이다.

다다는 심부름집을 한다. 교텐은 보조라고 하기에는 오히려 일을 망치는 그래서 가만히 있는게 도와주는 사람이다. 하지만 알고보면 꽤 도움이 많이 된다. 그런 잡다한 이야기들이 소설을 이끌어간다.

타인의 속마음을 추축해 보는 것은 참으로 오랜만이었다. 다다는 타인과 함께 생활하면서 겪는 번거로움과 낯간지러운 작은 기쁨을 동시에 느꼈다. (68쪽)

혼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익숙함과 편함. 공동생활의 번거로움. 하지만 그 뒤편엔 분명 작은 기쁨들이 놓여있다. 번거로움과 기쁨 사이에서 어느 것이 더 자신에게 크게 다가오느냐에 따라 삶의 방식의 선택이 달렸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소설 속에선 선택의 자유로움은 없고 운명처럼 함께 살아가게 되지만 말이다.

누군가한테 필요한 존재라는 건 누군가의 희망이 된다는 의미야(105쪽)

때론 그 희망때문에 절망으로 빠질터이지만, 그래도 희망은 항상 밝은 것 아니던가.

살아 있으면 언젠가는 기회가 있어. 그걸 잊지마.(162쪽)라고 우리는 혹시 우리 자신을 위로하고 속이고 있는 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게 속아넘어간들 또 어떠랴.

혼자 있고 싶어. 누가 있으면 외로우니까. 하지만 이런 생각을 한다는 것 자체가 이미 몹시 외롭기 때문이 아닐까.(228쪽) 결국 또다시 절망으로 빠지는 다다. 딱 우울증 증상이다. 그것을 깨뜨리는 것은 주변의 관심이라고 항상 말하지 않던가. 그래서 교텐은 그에게 말썽꾸러기인듯 하면서도 힘이 되어주는 존재가 된다.

불행하지만 만족할 순 있지. 후회하면서 행복할 순 없어. 어디서 멈출지는 스스로 결정할 일 아냐(290쪽)

악의가 없었다고 해서 죄가 아닌 건 아냐(328쪽)

그래서 세상은 요지경이다. 그래서 세상은 서로 품어줘야만 되는 곳인지도 모른다. 다다와 교텐이 그러는 것처럼.

소설 속 장면들을 몇개 빼내다보니 왠지 우울한 소설처럼 보인다. 하지만 정말 명랑유쾌한 소설임을 밝힌다. 그러니까 순전히 우울한 부분만, 또는 심각한 부분만 간추렸다고 볼 수 있으려나... 재미있는 에피소드들이 실은 행복이란 무엇일까를 생각하게 만든다는 것을 보여주려 했을 뿐이다.

때로는 배려라고 생각했던 것이 악의로 변하기도 하고, 무심한 것이 도움을 주기도 하는 곳이 세상이다. 철저히 혼자이고자 해도 혼자일 수 없는 것이 세상의 이치다. 그래서 만남은 끊임없이 일어나고 그 만남을 통해 우리는 삶의 방식에 대한 선택의 상황에 자주 처한다. 그리고 그 선택은 오로지 자신에게 달렸다. 자신이 처한 환경의 조건을 완전히 바꿀 수 없는한. 우리가 그 조건을 바꾼다는 것은 만남의 폭을 넓힘으로써 가능하다는 전제가 있어야 하겠지만. 허무한 두 남자가 어떻게 행복을 찾아가는지 소설을 통해 슬그머니 느끼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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