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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드러운 볼 1
키리노 나츠오 지음, 권남희 옮김 / 산성미디어 / 2000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이기적인 것은 백번 알고 있다. 그러나 이기적이 되는 데 이렇게 용기가 필요할 줄이야. 다른 것들을 모두 버리더라도 자기 자신으로 있고 싶다. 지금까지 생각도 하지 못했다. 만약 자신으로 있지 못한다면, 남은 생은 죽은 것과 마찬가지다. 42쪽
주인공 카스미는 불륜에 빠졌다. 자신의 가족은 물론 불륜 남자의 가족과 함께 별장에 휴가와서 남몰래 사랑을 나눌 정도로 열정에 빠졌다. 하지만 갑자기 자신의 큰 딸이 사라졌다. 고등학교 시절 어촌에서 부모님 몰래 가출해 도쿄로 온 이후 한번도 연락하지 않은 대가일 수도 있다. 또는 불륜과 거짓이라는 죄의 대가일지도 모른다. 카스미는 아이가 사라지고 나서 4년이 지났지만 아이를 잊지 못하고 계속 찾아다닌다. 그 와중에 상대방 가족도 무참히 깨졌고, 자신의 가족도 와해됐다.
소설은 중간중간 아이가 없어진 상황을 꿈을 통해 드러낸다. 그 범인은 다양한 주위 인물로 구성된다. 처음 꿈을 접했을 땐 깜짝 놀란다. 아니, 이런 이유로 아이를 유괴하고 죽였단 말인가. 하지만 이내 이것이 꿈이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리고 이어지는 다른 가정들. 마치 일본영화 나생문을 떠올리듯 관점에 따라 사건이 달라진 것처럼, 주변 인물을 범인으로 내세울 때마다 사건은 다양한 모습을 보여준다. 질투, 시기, 욕망, 복수 등등 인간의 감정이 저질러내는 끔찍한 일들에 비통해지는 심정이 된다. 그리고 단단하게 매여있을 것 같던 가족이라는 울타리도 힘없이 무녀져 내린다. 심지어 모성이라는 것조차 욕망에 휩싸인 순간 저버릴 수 있는 한낱 감정에 불과할 뿐이다.
부족함이 없는 날들에 매력이 있을까. 54쪽
라고 말하지만 그런 부족함이 이런 사건을 만들어낸다면 매력없이 살아도 좋을듯 하다. 그러나 사람은 그렇지 못하다. 항상 부족함을 느끼고 그것을 채우기 위해 살아간다. 그 부족함과 허기는 감정의 허기다. 사람을 향한... 그래서 불교에선 그토록 연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연은 결국 업을 쌓게 되는 것일테다.
난 그걸로 좋다고 생각해요. 아니, 어쩌면 그게 전부가 아닐까 싶어요. 사람이 사람을 동경하거나, 욕심내는 것 말이죠.162쪽
할 수 없다. 살아간다는 것은 그렇다. 연과 업을 쌓아가는 수밖에. 그러나 떄론
사람이란 모든 것에 익숙해가는 법이다. 카스미는 슬픔이라고도 체념이라고도 할 수 없는 감정으로 타인의 무관심을 바라보는 것이다. 123쪽
그 격한 감정의 흐름이 무디어지는 순간도 있다. 그것이 바로 매력이 사라진 순간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이 순간은 고요한 순간이기도 하다.
병이 인간에게 고독을 강요하는 것은 육체의 아픔과 괴로움을 누구와도 공유할 수 없기 때문이다. 육체는 지극히 개인적이어서 그것을 말로 전하려는 노력은 너무나 무력한 것이었다 하물며 우츠미는 말에 의지해 타인에게 뭔가를 전하고자 노력해온 인간도 아니다. 아니, 타인과 서로 완전히 이해한다는 것은 처음부터 환상이라고 생각하며 살아왔다. 185쪽
당사자를 대신할 수 없는 이상 누구나 가질 수 있는 공감 따위는 그저 상대를 더 초조하게만 할 뿐이다. 2권 141쪽
이것이 바로 인간을 고독하게 만든다. 욕망의 대상과 내가 합일되지 못한다는 사실의 자각. 그 감정도 결국 흘러가서 변화된다는 것.
이제 더 이상 할 이야기도 없어요. 서로에 대한 흥미도 없어졌고 공유하는 것도 없어요. 그때의 열병은 대체 뭐였나, 하는 씁슬한 기분이 들더군요. 그런 걸까요, 사는 게 다...
누군가와 산다는 것은 타협의 연속이죠. 아닙니까. 난 혼자 있을 겁니다. 끝까지.
고집쟁이든 뭐든 카스미를 대신할 사람이 어디에도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나의 운명을 대신할 자도 없다. 온세상 어디를 뒤져도 없다. 너는 너 이외의 사람은 모두 너와는 다르다는 당연한 진실을 경험해본 적 있는가. 내 배의 통증이 네게 전해지는가. 우츠미는 쿠미코에게 분노를 느끼면서, 묵묵히 다다미만 바라보고 있었다. 142쪽
그래서 사람은 혼자서 살아가게 된다.
그럼, 뭐가 목적이야. 목적은 없어요. 그저 꿋꿋이 살아가는 거죠. 210쪽
라는 자세로.
삿포로에 가자. 이시야마처럼 흐르는 대로 살다 보면 언젠가는 마음을 충족시켜 주는 것도 나타날는지 모른다. 자신은 꿋꿋이 살아갈 것이다.255쪽
나도 상대도 휩쓸어가버리는 감정의 격랑에서 벗어나 살아가기를 희망하지만 그러다보면 생겨나는 공허함을 채우기 위해 또 그 격랑속으로 온몸을 맡기는 인생. 격랑의 소용돌이 그 자체를 만들고 거부하는 것을 인위적이지 않고 흘러가는대로 내맡긴다는 것은 또 얼마나 힘든 일인가. 그러니 꿋꿋하게 살아가자고 말할 수밖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