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시 베이비
가네하라 히토미 지음, 정유리 옮김 / 문학동네 / 200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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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19세에 아쿠타가와상을 수상한 가네하라 히토미라는 작가의 두번째 소설이란다. 그런데 책을 읽다보면 "이크!"하고 놀라게 된다. 수간에 자해, 유아성애가 등장하고 소설의 절반은 성의 묘사에 절반은 주인공의 고백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런 과격한 소재와 명확하지 않은 주제로 인해 일본에서도 찬반논쟁이 격하게 일어났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이책을 끝까지 놓지 않은 이유는 주인공 아야의 사랑에 대한 집착때문이다. 그리고 그 집착이란 소통의 불가능과 맞물려 있기에 아야의 외침이 송곳이 되어 독자의 가슴을 찌르게 된다. 또한 주인공 아야와 함께 그가 사랑하는 무라노의 캐릭터가 마음을 뒤흔든다.

소설의 줄거리는 대략 다음과 같다.

주인공 아야는 대학 동창인 호쿠토와 동거와는 약간 다른 룸세어라는 것을 한다. 말그대로 그냥 집을 나눠쓰는 것이다. 어느날 호쿠토의 소개로 무라노를 만나게 되고 그녀는 무라노에게 사랑을 느낀다. 또 호쿠토는 친척의 아이라며 갓난아기를 집으로 데려오는데 호쿠토는 이 아이를 성적 대상으로 삼는다. 소설 속에서 가장 큰 충격적인 부분이다.(도덕적으로 쉽게 용납될 수 없다는 점에서 더욱 그렇다) 아이에 집착하는 호쿠노는 직장도 나가지 않아 잘리게 되고, 아야는 무라노에 집착으로 자살을 꿈꾼다.

 아야와 무라노, 호쿠토는 모두 소통에 서툴다. 무라노에게 "사랑한다"고 아무리 외쳐도 벽에다 소리치는 것과 똑같다. 무라노는 모든 것에 무심한듯 하면서도 이상하게 직장 동료인 호쿠토에게는 신경이 쓰인다. 호쿠토는 세상과 문을 걸어잠그고 오직 갓난아이의 성기에 매달린다.

타인에 대해 너무 많은 걸 알아버렸을 때, 사람은 자기가 죽든가 그를 죽이든가 둘 중 하나를 선택할 수밖에 없지 않을까? 사생활이라는 걸 찾아볼래야 찾아볼 수 없는 관계를 자주 본다. 난 그런 사람들이 너무나도 무섭다. (중략) 나는 누구와 마음을 열고 사귀어본 일이 없다. 거부해왔는지도 모른다.(23쪽)

아야의 성격을 그대로 드러내주는 대목이다. 그러나 이것은 현대인이 가지고 있는 중병 중의 하나다. 아니다. 이것을 중병이라고 단순하게 진단해버릴 수는 없다. 이것이 현대인이 가지고 있는 특징일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모두가 자연스레 받아들인다면 그것이 병일 수는 없다. 마음을 연다는 것, 점점 어려워지는 시대다. 그리고 사람과 사람이 맞대고 서로 마음을 여는 법을 현재 세상은 결코 가르쳐주지 않는다.

나쓰코도 나도 적당히란 말을 아주 좋아했다. 뭐, 적당히. 그렇게 말하면 대개의 일들은 넘어갈 수 있다고 본다. 아니, 실제로 넘어갈 수 있다. 요즘 세상에 적당히가 아닌 것들은 그리 많지 않다.(108쪽)

적당히란 곧 마음의 문을 활짝 열지 않은 그 적당함이라고 할 수 있다.

난, 이런 때조차 나 자신밖에 생각하지 않는다. 그녀가 얼마나 괴로울까 따위를 생각할 수 없다. 아니, 혹시나 생각한다 하더라도, 나하고는 관계없는 일이고, 혹시 내가 그런 상황에 처한다면 절대 울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겠지. (114쪽)

지독한 자의식 과잉이다. 그러나 거울을 바라보는 현대인은 그런 자의식 속에 빠져있기 십상이다. 이런 자의식 과잉은 소설 곳곳에서 드러난다. 원래부터 비참한 인간이었는지도 모르지만(122쪽) 나약하고 바보스럽다. 하지만 그래서 어떻다는 건 아니지만. 어쨌든 우린 울고싶을만큼 약하다. 약한 것을 상처입힐 만큼 약하다. 그래봐야 우린 분명 자기를 위해서밖에 울지 않을테고, 계속해서 상처입히겠지만.(129쪽) 나는 현재 나 자신이 가지고 있는 최소한의 것만으로 충분하다. 그 이상의 것을 가진다는 건 거기에 부수되는 책임까지 떠안아야 한다는 것이기 때문에 어깨가 너무 무겁다. 책임감이라는 말만큼 나에게 어울리지 않는 말은 없다. 그런 것에 속박될 정도라면 차라리 죽는게 나을지도 모른다. 아니, 차라리 죽고 싶다. 차라리 죽여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누구라도 좋으니까.(133쪽) 원래 사람에 대해 고집하는 일 자체가 없었다. 인간관계 따위, 맺고는 바로 흘려보내면 그뿐이라고 생각했다.(148쪽) 왜 그는 이렇게 미묘한 거리에 나를 붙들어매는 걸까? 그 자신은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 것, 그 누구에게도, 그 무엇에도 휘둘리지 않는 것. 나는 그의 그런 기질에 녹아들고 싶은 것이다.나는 그에게 죽음을 선사받고 싶은 것이다. (163쪽) 사실은 마음을 열고 싶으면서도 거부당할 것이 두려워 죽여줬으면 좋겠다는 생각 쪽으로 도망치고 있는지도 모른다. 사실은 그에게 자신을 전부 드러내고, 모조리 까 보이고, 그러고도 사랑해주길 바라는 오만한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도 모른다. 아니, 그게 아닐지도 모른다. 사실은 언제까지고 계속 거부당하길 바라는지도 모른다.(169쪽) 나처럼 그의 반응을 보고 상처입는 일도 없을거고, 그가 뭘 생각하고 있는지 신경이 쓰여 잠 못 이룰 일도 없을 거고, 그의 전화를 기다리다 울음을 터뜨리는 일도 없을 거다. (172쪽)

세상이 가르쳐주는 교훈엔 홀로서기가 있다. 성공의 지름길은 인맥관리에 있다고도 한다. 사람과 사람간의 관계. 아마 세상을 살아가는데 있어 가장 어려운 문제일듯싶다. 그리고 자의식이 과잉 상태인 현대인에게 아야처럼 누군가에게 마음을 활짝 열고 다가서기란 죽음에 가까이 있는 것과 다르지 않음을. 아야는 곧 내 속에 감추어진 두려움의 화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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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늘의 계절
요코야마 히데오 지음, 민경욱 옮김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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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조직은 과두체제를 형성한다. 즉 일명 피라미드 구조를 띠고 있다. 직위가 올라갈수록 담당자의 수는 줄어들고, 결국 그 직위를 차지하지 못하는 사람은 떨어져나가야 한다.

군대에서는 줄을 잘 서야 한다고 한다. 이때의 줄은 복불복의 줄이다. 앞에도 뒤에도 서지 않는 중간을 형성하는 줄. 그러나 조직에서는 썩은 동아줄이라도 잡아야 한다. 그것이 중간에 떨어질지라도 혹시나 조금이라도 위로 끌어올려줄 수 있다면 썩었더라도 상관없다. 만약 그것이 튼튼한 동아줄이라면 더할 나위 없을 것이다.

이 책은 명령에 살고 명령에 죽을 것 같은, 확실한 계급으로 움직일 것 같은 일본 경찰의 조직원들을 그리고 있다. 소위 경찰을 그리고 있는 것이다. 사건이 발생하고 그것을 해결하는 경찰이 주인공이라기 보다는 경찰내 인사를 담당하고 있는 자가 주인공으로 나서고 있다. 경찰이라는 것도 일반 회사와 같아 줄이라는 세력이 형성되어 있고, 그 안에서 갖가지 권력싸움이 생겨난다.

조직내에서 버티려고 하는 자, 올라서려고 하는 자, 남을 짓누르려 하는 자 등등. 아귀다툼은 끝이 없다. 물론 이런 조직의 권력싸움으로부터 멀찌감치 떨어져 있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그 주인공은 이 책이 아닌 같은 저자의 다른 책 속에서 주인공으로 나온다. 그리고 그 주인공인 검시관은 사건 해결에 있어서 인간적 감동을 준다. 사건 해결만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사건으로 인한 다양한 인간의 감정을 헤아릴 줄 아는 풍부한 감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

물론 이 책에서도 인사 담당자의 이런 감성적 측면이 곳곳에 드러난다. 그러나 오히려 책을 읽는 독자의 입장에선 따듯한 감성보다는 차가운 조직의 논리가 눈에 먼저 들어오는 것은 어쩔 수 없다. 특히 같은 조직에서 오랫동안 몸을 담가왔다면 더욱 그럴 것이다. 점차 세력이라는 것이 눈에 보이기 시작하고, 미래의 불투명성과 그것을 헤쳐나갈 방책도 조금은 눈에 보인다. 하지만 그 방책을 위해 해야 할일이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도 알 것이며, 이것은 끝없이 개인의 도덕성이나 신념, 가치관과 충돌하게 만든다. 문제는 바로 이 점에 있다.

조직의 논리와 자신의 가치관과의 충돌지점.

양자택일의 입장에 처해있다면 당신은 어떤 길을 갈 것인가. 물론 이 입장 또한 현재 자신의 개인적 상황을 또다시 염두에 두어야만 한다. 또한 조직이 처한 상황도 마찬가지다.

조직에서 살아남는다는 것은 피라미드의 꼭대기 근처에 있다는 것을 의미하며, 그것이 개인과 충돌하지 않을 가능성은 거의 제로에 가깝다. 조직이라고 하는 거대한 괴물에겐 피가 흐르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그 꼭대기를 향해 질주한다. 피라미드에서의 추락, 또는 도주는 결국 실패자의 모습일까.

그늘의 계절에 한숨을 쉬지않고 미소를 지을 수 있는 삶은 어떻게 가능할지 생각해보게 만든다. 계속 걸어가다보면 그 꼭대기에 도달할 수 있을련지, 썩었는지 튼튼한지 모를 줄을 잡아야 할 것인지, 아니면 그냥 피라미드에서 뛰어내려야 할 것인지. 물론 이런 선택의 결과 또한 자신의 의도대로 결코 흘러가지 않는다는 점에서 인생은 역시 알수 없다는 것을 또다시 깨우치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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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드보일드 에그 작가정신 일본소설 시리즈 16
오기와라 히로시 지음, 서혜영 옮김 / 작가정신 / 200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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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공인 나는 필립 말로와 같은 탐정을 꿈꾼다. 그래서 탐정사무소를 차렸지만 그가 맡는 일이라곤 대부분 잃어버린 동물을 찾아 주는 것이다.

학창시절 왕따 당하기가 일쑤였던 주인공은 동급생들의 빵을 사다주고, 책가방을 들어주던 일을 때려치고 과감히 혼자만의 고독 속으로 찾아든다. 순전히 필립 말로 덕분이다. 물론 그 과정엔 상처만이 가득했지만...

말로는 당시 내 주위에 있던 그 누구와도 닮지 않았다. 그 시절 선생님들은 어떻게 하면 다른 사람을 제치고 성적을 더 올릴 수 있을까 하는 방법밖엔 가르쳐주지 않았고 주위의 어른들은 어떻게 하면 남보다 더 행복하게 보일까 하는 데만 부심했다. (18쪽)

주인공의 학창시절에 대한 고백은 나를 뒤돌아보게 만든다. 진짜 행복한게 아니라 남들에게 행복하게 보이는 방법에 몰두하는 모습. 그래서 다들 "행복이란 무엇이다"라고 정의하고 그 정의에 근접한 삶을 자랑하려고 한다. 그러나 진짜 행복감은 모두가 공통적으로 생각하는 바로 그런 행복의 정의와 닮아있지 않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망각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주인공은 말로 처럼 여인들과의 로망을 꿈꾼다. 그래서 여사원을 구하지만, 웬걸 할머니가 찾아와 떡하니 그 자리를 차지해버린다. 하지만 할머니와의 티격태격 속에서 삶은 성숙되어 간다.

 "익숙해지면 나쁜 일만 있진 않아요"라고 위로하는 불법이민자의 말은 그의 삶에도 적용이 될련지 차츰 할머니와의 동행에도 익숙하게 된다. 그러던 중 살인사건과 직면하는 주인공은 비로소 탐정다운 일이라는 것을 해본다. 그리고 주인공의 맹활약에 힘입어 사건은 해결된다. 반전도 재미있고, 특히 버려지는 애완견에 대한 신랄한 비난도 짜릿하다. 귀엽다고 예뻐해주다가 어느 순간 길거리에 내팽겨쳐지는 유기견이 우리나라에도 많기에 그냥 흘려듣기에는 마음이 아프다.

옛날 개한테는 물면 물 만한 이유가 있었는데 요즘 개는 느닷없이 물어. 자기 주인도 상관 안 해. 뭐, 마음의 병 같은 거지. 권세증후군이라고... 자신을 무리의 보스라고 착각하는 거지. 자신이 가장 위대하고 뭐든 자기 뜻대로 된다고 믿어버려. 그렇기 때문에 마음에 들지 않는 일이 있으면 갑자기 감정을 폭발시켜. 봐, 요새 아이들하고 똑같잖아. .. 강아지 때 과잉보호를 받으며 자라는 것이 원인이야.(242쪽)

이 대목 또한 허투루 흘려듣기에는 현실비판적 시선이 매섭다.

사람간의 신뢰, 또는 사람과 동물 간의 사랑 등을 둘러싼 관계라는 것이 때론 맹목적으로 때론 선입관으로 이뤄지기도 하고, 그래서 시간만이 그 진면목을 보여주기도 한다.

세상은 꼭 자신이 원하는대로 흘러가진 않지만, 그래서 좌절할 수도 있고 포기할 수도 있게지만, 그래도 유쾌할 수 있다는 것. 아니 유쾌하게 내가 고집한 길을 살아갈 수 있다는 희망이 책 곳곳에 숨어 있다. 물론 그 길이 내가 원하는 그곳으로 향하진 않을지라도... 그러니 고독하더라도 그 길을 걸어가보는 것은 어떨까 잠시 생각해본다. 아님 그 생각만으로 현실을 위로하고 있는 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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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여우 2008-05-23 21: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독한 밤에 바삭한 토스트를 먹으면서 읽으면 좋을 책일 것 같군요.
내 길이라...길이 잘 안보일 땐 누군가 같이 앉아서
수다를 떨어줬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간혹 합니다.

하루살이 2008-05-26 08: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생각보다 유쾌한 책이랍니다.
맞아요. 잠시 멈춰서는 법을 알아야 길도 잘 보이기 마련이죠. ^^
 
이 책이 세상에 존재하는 이유
가쿠타 미쓰요 지음, 민경욱 옮김 / Media2.0(미디어 2.0) / 200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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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아마 저자는 세월이 흐르면 인간은 성숙하기 마련이라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그럴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닐 수도 있다. 나이를 거꾸로 먹는다고 할 정도의 사람들도 있지 않은가. 아무래도 세월이 주는 것은 성숙이라는 이름보다는 변화라는 말이 맞을 듯 싶다.

군에 입대하기 전, 톰 크루즈가 주연했던 <어 퓨 굿맨>이라는 영화를 봤었다. 군부대의 구타와 관련된 재판과정을 담은 영화였다. 구타란 무조건 용납할 수 없다고 생각하던 시절이었다. 군 제대 후 다시 이 영화를 우연히 보게됐다. 그리고 구타란 무조건이 아니라 조건적으로 용납할 수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삶과 죽음의 갈림길에서 누군가의 실수로 타인이 죽을 수 있는 상황이라면, 그 실수를 줄이기 위한 구타는 용납되어져야 하는가, 또는 용납될 수 없는가. 이 질문에 군이라는 경험은 그 대답을 다르게 만들었다.

이런 극단적 예는 아니지만 왕가위 감독의 <동사서독>도 보면 볼 수록 다른 느낌을 주었다. 무려 5번을 봤고, 5번의 다른 느낌을 얻었다.

책도 마찬가지다. <어린 왕자>나 <데미안>은 중고등학교 시절 때 읽었던 느낌과 대학교 시절, 그리고 직장에 다니면서 다시 읽게 되면 그 의미가 많이 달라진다. 책은 그대로인데 그 의미는 달라지는 것이다.

이런 책들뿐만은 아니다. 밑줄을 그었던 책들을 다시 꺼내들면 왜 그당시 이 부분에 밑줄을 그었을까 라는 생각을 떠올리게 만드는 책들도 있었다. 아마 세월이 흘러 다시 읽게 되면서 밑줄을 다른 색연필로 그으라고 한다면 책은 온통 무지갯빛 줄로 가득차게 될지도 모른다.

소설 <이 책이 세상에 존재하는 이유>는 이런 책에 대한 이야기들이다. 9편의 단편들이 책에 대한 소중함과 추억을 이야기한다. 책과의 인연을 통해 자신이 또는 타인이 변해가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 속에서 인생에 대한 통찰을 잔잔하게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 책의 장점이라 할 수 있다.

불행의 씨앗이라고 생각하는 책을 친구에게 빌려줬는데, 그 책이 친구에게 불행을 가져다 줬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친구는

불행이랄거 하나도 없었어. 나는 웃는 일도 우는 일도 없는, 좋지도 나쁘지도 않은 담담한 매일이 되풀이되는게 불행이라고 생각해. 그런 의미에서라면 이 책이 내게 있었던 지난 몇 년동안 나는 행복했다고 생각해. (93쪽)

그래서 책을 빌려줬던 친구도 깨닫는다.

슬픈 생각이나 풀 길 없는 분노를 몇 번 맛본다고 해도, 또 누군가를 좋아하게 되는 것, 친구의 집에서 밤늦게까지 술을 마시며 수다를 떠는 일, 갓 나온 꽁치를 먹고 맛있다는 탄성을 지르는 것, 영화를 보며 다른 사람을 의삭하지 않고 우는 것과 같은, 특별할 거 하나 없는 나를 받아들이는 것 또한 이 책이 여기에 있기 때문이라고.(95쪽)

이제 책을 통해 과거를 되돌아본다. 그리고 슬픈 사실 하나를 소설 속 주인공처럼 똑같이 깨닫느다. <서랍 속>이라는 단편에 나오는 책은 그 책안에 사람들이 자신의 가장 소중한 또는 최초의 기억을 써 놨다는 소문이 무성하다. 그래서 주인공은 생각한다. 과연 그 책을 만나면 자신은 그 책에 무엇을 쓸 수 있을까.

그럼 가장 소중한 기억이라면... 그런데 아무 것도 떠오르지 않는다. 만족스러웠을 때라는 기억에 다다르자 더 오리무중이다. 그 사실에 놀랐다. 찾지 못한 것이다. 소중한 시간도, 만족스러웠던 시간도. (111쪽)

과연 나는 그 기억을 떠올릴 수 있을까.

변함없이, 이런저런 일이 일어난다. 슬픈 일도, 기쁜 일도, 다 틀렸다고 생각할 정도로 힘든 일도. 그때마다 나는 늘 할머니의 말을 떠올린다. 벌어진 일보다 미리 생각하는 게 더 무섭다. 그래서 될 수 있으면 생각하지 않으려 한다. 눈앞의 일을 하나씩 처리한다. 그러다 보면 어느새 벌어진 일들이 다 끝나 사라지고, 기억 밑바닥으로 가라앉는다.(161쪽)

희. 노. 애. 락. 삶은 그렇게 우리에게 다가와 우리 곁을 떠난다. 세월은 그 희노애락의 깊이와 색깔을 다르게 만들어줄 뿐이다. 그리고 우리는 그 희노애락에 감사할 줄 알게 됐을 때 비로소 철이 들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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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데아의 동굴
호세 카를로스 소모사 지음, 김상유 옮김 / 민음사 / 200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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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내가 생각하는 유토피아와 당신이 생각하는 유토피아는 같은 유토피아일까? 서로 다르다면 유토피아는 60억가지의 유토피아가 존재하는 셈일까? 누구나 똑같이 생각할 수 있는 유토피아란 불가능한가? 아마 그런 유토피아가 있다면 그것이 바로 유토피아에 대한 이데아일 것이다. 그런 이데아는 존재하는 것이며, 도달 가능한 것일까.

소설은 이데아에 대한 이런 의문점을 내비친다. 플라톤과 필로텍스토스와의 대결. 지식의 5가지 요소인 이름, 정의, 심상, 토론, 이데아를 둘러싼 이들의 대결이 전체 맥락이다.

이 와중에 이성과 감정의 대립 또한 드러난다. [동굴]이라는 원본이라 여겨지는 액자 소설 속에 등장하는 사건이 그렇다. 플라톤이 이끄는 아카데메이아의 학생이 죽으면서 발생하는 연쇄살인사건. 그리고 그 와중에 보여지는 디오니소스를 숭상하는 사람들과 그것을 뛰어넘어 광기로까지 이어지는 종교집단이 등장한다. 소설의 재미는 이 사건의 범인과 범죄동기에 대한 궁금증을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와 함께 [동굴]이라는 원본을 번역하는 번역자가 역주를 달면서 점점 텍스트 속으로 빨려들어 현실과 텍스트가 교묘하게 뒤얽히는 모습에 있다.

그런데 아테네 시절의 철학을 근간으로 하고 있는 이 소설이 현재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지닐 수 있을까? 현재 우리가 처한 현실이 수많은 텍스트들로 꽉 차 있기 때문에 많은 것을 생각해볼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이라 여겨진다. 우리는 지금 맨 눈으로 세상을 보고 있지 않으니 말이다.  

네가 똑같은 텍스트를 읽고 나서 반대의 주장을 하는 것 말이야. 책들 속의 단어들이 형성하는 심상이나 이데아들이 그렇게 깨지기 쉽다는 사실이 끔찍하다는 거지... 우리 주장과는 별개의 최종적인 이데아가 존재해야 해.-번역자

라고 우리도 생각할지 모른다. 그러나 처음에 이야기했듯이 누구나 똑같은 이데아가 과연 존재할 수 있단 말인가? 

아테네인들은 말장난이나 궤변, 텍스트나 대화에 대한 당신들의 열정 말이오! 듣고 읽고 단어를 풀이하고 끊임없는 대화 속에서 논쟁과 반론을 만들어내며, 엉덩이를 의자에 붙인 채로 배우는 당신들의 방식 말이요! 아테네인들은 사유하며 음악을 듣는 사람들로 이루어진 나라이며 또한 글을 읽지도 쓰지도조차 못한 채 즐기며 고통받는 사람들로 이루어진, 더욱더 무수하지만 한 우두머리에 의해 지배받는 또 다른 나라요.(105쪽)

바로 우리의 모습도 그와 똑같지 않을까.

당신이 여기서 나가 첫번째 발견하게 될 것은 단 하나의 진리라고 할 만한 것이 없다는 것이오.(107쪽)-크란토르

이 사람은 번역자요. 다른 언어로 쓰인 텍스트의 신비를 풀고자 하는 남자인데, 단지 단어는 새로운 단어로, 그리고 생각은 새로운 생각으로 유도되지만, 진리에는 결코 도달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오.(189쪽)

나는 단지 내가 볼 수 있는 것만 믿는다네. 추론은 사물을 보는 또다른 방법이지.(132쪽)-헤라클레스

이데아에 대한 맹목적 믿음, 하나의 진리란 없다고 말하는 상대주의적 태도, 과학적 합리주의로 대변되는 소설 속 세 가지 태도에서 우린 쉽게 마지막 태도를 긍정하게 된다. 물론 액자소설의 주인공이 지니고 있는 태도이기도 하려니와 현대인의 태도와도 가장 어울리기 때문이다.

하지만 크란토르의 경고를 주의해서 들어야 한다.

언제나 설명들을 찾아다니는 사람은 그것들을 꾸며내는 위험의 소지가 있지.(134쪽) 스핑크스는 자신의 질문에 정확하게 답변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잡아먹었지. 그렇지만 헤라클레스, 가장 공포스러운 게 무엇인지 아나? 가장 공포스러운 건, 스핑크스가 날개를 지녔기에 어느 날 날아올라 사라졌다는 거야. 그때부터 사람들은 스핑크스에게 잡아먹히는 것보다 엄청나게 더 나쁜 걸 겪고 있다네. 우리의 답변이 옳은지 그른지 알 수 없다는 것일세(138쪽)

기하하적인 형태를 도안하고 엄격하게 규범에 따른 윤곽을 그리고 있소! 우리는 즉흥성과 힘과 아름다움을 잃어버렸소!(183쪽)과거에 철학은 힘이자 충동이었소! 지금은 무엇이오? 순전히 지성이오! 무엇이 우리의 관심사였소? 만물의 물자체요. 그런데 지금은? 이데아의 세계에 대해서요!(185쪽)-조각가 메네크로스

현재 우리의 모습은 어디에 있을까,  

인간은 본능이 아니라 이성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네.(348쪽)

라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을까. 아니면 우리가 이제 창조성을 중요하게 여기듯이 즉흥성과 힘과 아름다움으로 또다시 변모하고 있는 것일까.

숨겨진 이데아나 최종적인 열쇠나 궁극적인 의미 찾기를 중단하시오! 읽기를 멈추고 삶을 사시오! 텍스트에서 빠져나오시오! 당신들은 무엇을 보고 있소?단지 암흑만을? 더 이상 찾지 마시오!(366쪽)

액자소설 속에서 그리고 현실 속 번역자와 또 다른 번역자 간에 되풀이되는 논쟁. 결국 사건을 해결된다. 그리고 대결은 끝난다.

범인은 누구이고, 어떤 이유로 사건이 벌어진 것인지에 대한 추리소설적 재미가 소설에서 손을 떼지 못하게 하는 큰 요소이다. 그리고 또하나, 이데아와 열정이라는 이름의 본성간의 관계에 대한 논쟁이 흥미를 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남겨진 것은?

계속 굴러가는 텍스트에서 벗어나 현실에 정착하라는 것일까. 정보의 홍수 속에서 생겨난 가상현실은 또다른 현실이 될 수 있을까. 책을 덮고나서도 의문은 끝이나지 않았다.

그래서 결국 어쩌지? 이상도 열기도 사라진 차디찬 현실에 발을 내디뎌라? 그런데 그 현실이 이미 텍스트들로 이루어져 있다면... 당신의 본능에 충실해야 할 것인가?

이상과 본능이 뒤얽힌 현실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고민하게 만든다. 도대체 유토피아는 도래할 것인가? 쾌락은 충만할 것인가? 우리는 어디에 위치해 있으며, 어디로 향해야 하는 것일까?

내가 원하는 것을 타인도 똑같이 원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일단 깨닫는 것으로부터 출발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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