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을 잃은 슬픔은 죽음에 이를만큼 고통스럽고, 사랑을 얻은 기쁨은 온 천하를 얻는듯 즐거워보인다. 영화나 드라마, 노래 속에서 말이다. 그래서 이런 사랑 앞에선 어느 누구라도 수퍼맨이 되는듯 착각에 빠지기 십상이다. 사랑하는 이를 위해선 하늘의 별이라도 딸 수 있고, 사랑하는 이가 곁에 있다면 세상에 못할 일은 없을 것만 같기에.

 

하지만 사랑에도 유효기간이 있다는 것이 과학자들의 설명이다. 물론 호르몬이라는 관점에서. 기껏해야 2년 반 정도의 시간, 우리는 콩깍지에 씌여  살아간다는 것이다. 그리고 호르몬이라는 묘약이 사라지면, 그때부터 우리는 소위 정이라는 가짜약을 만들어가면서 살아가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렇게 가짜약을 제조하는 이때부터 비극은 시작된다. 사랑 대신 믿음이 자리를 잡고 서로를 이해하며 살아가는 과정 속에서 갈등도 함께 자라기 시작하기 때문이다. 소위 가짜약의 부작용이 나타나는 것이다.

 

사랑할 때는 기대라는 것을 접고 산다. 하염없이 퍼주고 싶은 마음으로 살아가기 때문이다. 내가 무엇을 해주었으니, 응당 그에 상응하는 무언가를 받겠다는 마음을 갖고 있었다면 그건 사랑이 아니다. 그건 유효기간이 지난 사랑이다. 그리고 바로 이런 마음 속에서 갈등은 시작된다. 힘들때 기대고 싶다는 마음, 나의 고통을 알아줬으면 하는 마음, 이런 류의 마음은 모든 것을 퍼줄 때의 마음이 아니다. 이젠 받고 싶은 마음이 움트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 마음은 몹시도 모질어 조금이라도 충족시킬 수 없다면 분노가 솟아오른다. 사랑에서 분노로 그 행로가 바뀌는 것은 순식간이다.

 

그래서 사랑으로 인한, 아니 사랑이 끝나고 시작되는 갈등을 슬기롭게 넘기려면 기대를 내던져야 한다. 그저 상대방을 있는 그대로 인정해야 한다. 즉, 다시 시작하는 것이다. 사랑을 다시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으로서의 상대방이라는 시선으로 관계를 다시 시작해야 한다는 것이다.  기대를 버린다는 것은 욕망을 버린다는 것이다. 상대가 이래줬으면 하는 바로 그 욕망말이다. 그것이 새로운 관계를 맺는 출발점이다. 비록 그 길이 순탄치 않더라도 그랬을 때만이 사랑이 사라지고 난 자리, 서로 나 몰라라 남남으로 살아가지 않고, 인간 대 인간으로 성숙해질 수 있는 기회를 맞이하는 것이다.

 

사랑이 지나간 자리, 비로소 한 인간이 보이기 시작할 것이다. 수퍼맨은 이제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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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BS 월화드라마 '추적자'를 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등장인물들의 원초적 욕망이 여과없이 드러나면서 생겨나는 갈등이 손에 땀을 쥐게 만든다. 그 욕망의 싸움은 돈과 권력의 싸움으로 집약된다. 즉 한오그룹 서회장으로 대변되는 돈의 힘과 강동윤이 대변하는 권력의 힘이 맞짱을 뜨면서 불꽃이 튀는게 흥미진진한 것이다. 실상 주인공인 백홍석은 어찌보면 이 싸움의 들러리 일 수도 있겠다 싶다. 물론 드라마의 결론은 돈도 권력도 없는 평범(?)한 시민인 백홍석의 반란이 성공으로 끝날 가능성이 무척 높겠지만 말이다.

 

한국의 자본주의가 지금처럼 발전하기 전까지는 권력의 힘에 의해 기업의 운명이 좌지우지됐었다. 즉 권력이 무소불위의 힘을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돈이 전부인 것처럼 느껴지는 세상이다. 흔히들 말하지 않던가. 한 대기업의 정보력이 국가 정보기관의 정보력보다도 더 막강하다고... 그래서 서회장은 강동윤을 두려워하면서도 그를 적토마 또는 황소처럼 부려먹을 수 있다는 생각을 품게 된다. 또한 드라마 속에서 그는 국가 권력을 지닌 세력을 자신의 마음대로 움직이기도 한다. 돈이 권력의 우위에 있는 것이다. 그렇기에 강동윤의 목표 또한 대통령이 아니다. 대통령은 그저 거쳐가는 단계일뿐 그가 목표로 하는 것은 한오그룹의 총수 자리인 것이다.

 

'추적자'가 보여주는 돈의 막강함은 이승기와 하지원이 주연을 맡았던 '더 킹 투 하츠'로부터 발전된 모습이기도 하다. 이 드라마에서도 한 나라의 왕인 이재하와 다국적 기업의 총수인 김봉구의 싸움이 큰 줄기였다. 김봉구 또한 돈의 힘으로 세계 각국의 정부들을 움직였다. 하지만 위기에 봉착했을 때 국가는 기업의 뜻을 거부했다. 물론 김봉구의 좌절로 끝나는 싸움은 아니었다. 김봉구는 또다른 김봉구를 계속 낳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돈은 권력을 쉽게 꺽을 수 있는 세상의 전부가 아니었던 셈이다. 하지만 '추적자'에선 어느덧 돈이 최상의 힘을 갖추고 있다.

 

'추적자'의 명목상 주인공인 백홍석은 돈도 권력도 없는 시민을 대변한다. 그가 권력을 얻을 수 없는 것은 그 권력을 위임한 대의민주주의때문이기도 하며, 그가 돈을 얻을 수 없는 것은 부익부 빈익빈으로 치닫는 신자유주의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즉 그는 한낱 하수인에 불과한 것이다. 드라마가 극적으로 흐른다면 그건 하수인이 반란에 성공할 때일 것이다. 그렇지만 사람들은 기억할 것이다. 반란의 성공보다는 돈이 갖는 힘에 대한 공포를. 그래서 우리는 동경할지 모른다. 돈을 마음껏 갖을 수 있는 자리를. 바로 강동윤처럼. '추적자'가 매력적인 것은 바로 그런 욕망들을 숨김없이 까발렸기 때문이지 않을까. 하지만 이 드라마에서 진정 행복한 사람은 누구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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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12일 저녁 뉴스에 성조숙증에 관련된 보도가 있었다. 성조숙증이란 사춘기가 정상보다 너무 일찍 찾아오는 걸 말한다. 뉴스에선 성조숙증으로 치료를 받은 어린이가 지난 2004년 백94명에서 지난 2010년 3천6백여 명으로 6년 새 19배나 급증했다고 보도했다. 비만과 환경호르몬의 증가 그리고 스트레스나 각종 매체들의 성적 자극이 주된 원인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뉴스 말미에선 의사 인터뷰에서 "콩 단백 성분을 두 살 이전에 많이 먹었을 때 그게 사춘기, 나중에 조숙으로 유발될 수 있는 것으로 많이 우려가 되고 있다"는 내용을 전했다.

 

그런데 곰곰히 생각해보자. 주된 원인으론 비만과 환경호르몬, 스트레스, 성적 자극이라면서 먹는 것으론 콩을 말한다. 비만 등을 따지자면 오히려 콩이 도움이 되고 패스트푸드나 고기가 원인일텐데 말이다. 아마도 콩이 가지고 있는 여성호르몬인 이소플라본 때문에 그런 우려를 하고 있는 것같다. 하지만 그런 주장은 치료를 받았던 아이들의 전수조사나 역학조사 등을 실시하여 그 원인을 직접 밝혔거나, 이소플라본이 영유아에게 끼치는 영향에 관한 연구 사례가 뒷받침된 것일까. 

 

오히려 반대의 경우는 있다. 2008년 미국소아과학회에서는 콩의 이소플라본이 인간의 생식 발달이나 내분비계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친다는 증거를 찾을 수 없었다고 밝표했다. 어린시절 콩유아식을 먹은 어린이 400명과 우유 분유를 먹은 아이 400명을 대상으로 20년 후 임신결과와 성장을 추적 관찰한 결과다.(중앙일보 6월 11일)  또한 미 농무성 산하 아칸소 아동센터에서 모유, 분유, 콩유아식을 4개월간 먹인 결과 성조숙증과 관련된 어떤 증거도 찾지 못했다고 한다. 오히려 어렸을 때부터 콩을 많이 먹으면 비만, 난소암, 유방암, 전립선암 등에 걸릴 위험이 적다는 역학조사가 있다.

 

그렇다면 도대체 어떤 근거로 두 살 이전에 먹은 콩 단백 성분이 성조숙을 유발한다는 이야기가 나오게 됐을까. 여성호르몬을 과다 섭취하면 당연히 성적 징후가 일찍 찾아올 것이라는 상식적 추측에서 비롯된 것은 아닐까.(이 분야의 전문가가 아니기에 관련 연구 결과를 모두 검색해 본 것은 아니다. 콩이 성조숙증과 연관있다는 연구결과가 있다면 알려주시길...) 뉴스 보도라면 이에 대한 직접적인 연구 결과를 토대로 인터뷰를 하거나, 인터뷰가 끝나고 그 내용이 맞는지 확인하는 절차를 거쳤어야 하지 않을까. 그냥 지나칠수도 있는 전문가의 말 한마디가 때론 아이들을 키우며 뭘 먹일까를 고민하고 있던 부모들에게 잘못된 선입견이나 편견을 심어줄 수도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뉴스는 적확해야 하며, 논란이 되고 있는 것이라면 양쪽의 의견을 모두 밝혀야 옳은 것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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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저씨, 내리실겁니까" 

"아... 네..." 

시내버스에서 나이 지긋한 어르신이 곤혹스러워 하신다. 버스 뒷문이 열린지 한참이 됐는데도 어르신은 내리지를 못하고 연신 카드 단말기에 카드를 대고 계신다. 하지만 단말기는 고장이 난 상태. 어르신은 한참을 단말기와 씨름하며 그렇게 서 계시고 있었던 것이다.   

출입문 바로 뒷좌석의 남자가 보다못해 한마디 건넨다.  

"이쪽이요" 

다른 쪽 카드 단말기에 카드를 대라고 알려주니, 그제서야 어르신은 카드를 대고 급히 버스에서 내리신다. 그때 버스 문은 닫힐 뻔했다. 그냥 출발할 태세였다.  

사람들은 가끔 실패 속에 갇혀 살 때가 있다. 빨리 다른 방법을 택하거나 다른 길을 걸어야 할 때인데도 불구하고 자신이 알고 있는 그 한가지 방법만을 고집하다 낭패를 당하곤 한다. 아니면 실패하고 있다는 것도 알아채지 못하고 그냥 아무 생각없이 하던 일을 되풀이 하고만 있다. 다람쥐 쳇바퀴 돌듯 말이다.  

버스에서 전전긍긍했던 어르신은 단말기가 카드를 읽지 못하자 지갑에서 카드를 꺼냈다. 그리고 다시 수십번 카드를 대본다. 하지만 단말기에선 아무런 반응이 없다. 그때 빨리 깨달아야 한다. 그냥 포기하고 내리거나 다른 단말기를 선택하거나. 그냥 계속 카드만 대고 있으면 아무 것도 해결 될 것은 없다.  

그렇다면 지금 시도하고 있는 일이 무의미하거나 실패할 수밖에 없는 일이라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 보통 단말기에는 붉은색 글자와 녹색 글자가 있다. 처리된 금액과 잔액으로 구분되는데 보통 잔액란은 녹색숫자로 시간이 표시된다. 그런데 어르신이 카드를 댔던 단말기는 녹색숫자의 시간 대신에 이상한 영문자가 떠 있고, 붉은색 글자란에도 숫자가 잔뜩 쓰여 있었다. 평소 단말기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면 고장난 것이라는 것을 금세 깨달을 수 있었을 것이다. 무심코 카드를 단말기에 대고 오르내리다 보니, 그리고 이와 비슷한 상황을 겪지 못했기 때문에 고장난 것이라는 것을 간파하지 못한 것이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부딪히는 많은 문제들도 이와 비슷하지 않을까. 되풀이 되는 일상을 아무 생각없이 살아가다 보면 일상의 어딘가가 잘못되어 있다는 것을 알아채지 못하고 지나갈 것이다. 아무런 성과없는 또는 보람없는 헛된 시간만이 흘러갈지도 모른다. 잘못된 상황을 빨리 파악하고 대체할 수 있는 능력, 또는 빨리 포기하고 새로운 도전을 선택할 수 있는 능력이란 평소 우리가 생활하는 바로 그 환경을 유심히 살펴본 사람에게만 주어질 것이다. 단말기가 고장 나 있다는 것을 알아채기 위해선 단말기가 어떻게 작동되고 있는지를 알고 있어야 하는 것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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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도 배워야 하는 시대가 왔다. 내년엔 중학교 2학년을 대상으로 한 행복 교과서가 시판될 예정이다. OECD 국가 중 청소년 자살률은 최상위권이면서. 행복지수는 최하위권인 상태를 벗어나기 위해 만들어졌다고 한다.(중앙일보 11월 17일자) 당연히 행복도 연습과 훈련을 통해 단련될 수 있는 기술이라는 전제를 깔고 있다. 즉 무엇인가를 목표로 내세우고 그것을 완성했을 때 행복해지는 것이 아니라, 어떤 조건에서든 그 상황을 활용해 행복을 느낄 수 있는 기술을 가르친다는 것이다. 이 행복의 기술은 긍정심리학에서 차용됐다. 즐거운 삶, 몰입하는 삶, 의미있는 삶을 통해 행복해 질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취지하에 나온 교과서가 혹시 지금의 교육방식처럼 주입식으로 변질되면 어떻게 될까. 행복이란 무엇인가. 행복하기 위해선 어떤 삶의 방식을 택해야하는가. 라는 질문에 정답을 찾기 위해 교과서를 달달달 외우기만 한다면 과연 행복의 기술을 터득할 수 있을까. 물론 성적과 관련된 시험과목이 아니라면 걱정할 필요도 없는 일이다. 하지만 성적과 관련되지 않은 과목이라면 또 학생들이 얼마나 관심을 가져줄까. 

한편 88만원 세대라는 말이 결코 과장이 아닌 사회에서, 사다리에서 걷어차이지 않고 무한 경쟁에 뛰어들어야 하는 사회에서, 행복은 돈으로 주어진다는 배금주의가 팽배한 상황에서, 아이들이 행복의 기술을 배운다고 하더라도 현실과의 괴리감을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까. 또는 불평등하거나 부조리한 현실을 허허 하하 하며, 긍정의 심리로, 행복하다는 '최면'으로 넘어가버린다면 변화 또는 변혁의 꿈마저 저버리는 것은 아닐까. 삶에 지친 도시인의 한 사람으로 쓸데없는 기우에 빠져본다.  

 

사족 

수많은 행복론 속에선 결코 행복을 찾을 수 없다는 것을 가르쳐 준 '행복에 걸려 비틀거리다'라는 책 일독을 권한다. 이 책 또한 'ㅇㅇㅇ하면 행복해 질 수 있다'라는 것이 함정임을 가르쳐준다. 다른 한편 과연 행복이란 것이 우리 삶의 지상 과제인지도 생각해볼 문제이다. 왜 우리는 행복에 그토록 천착하는가. 그리고 나와 당신의 행복은 과연 같은 행복일까. 누군가는 행복이라 쓰고 도전이라 말하고, 누군가는 행복이라 쓰고 만족이라고 말한다면 모두가 행복을 느낄 수 있는 것이 가능한 일일까. 그렇기에 행복이라는 단어 그 자체가 가지고 있는 의도하지 않은 갈등. 부정적 힘에 대한 성찰도 필요한 때이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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