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해 전 80이 되신 어르신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무엇인가 이상한 기운을 감지했다. 말씀은 잘 하셨지만 눈에 총기가 없다는 느낌을 받은 것이다. 그로부터 두 달 후 이 어르신의 부고 소식을 들었다. 

 

3개월 전, 외할머니가 요양병원에 입원하셨다. 어렸을 적 외할머니 손에 컸던 터라 걱정이 앞섰다. 외할머니를 본 순간 눈에 총기가 없다는 것을 알았다. 하지만 그럭저럭 정정하신 모습이었다. 

 

몇 일 전, 다시 요양병원을 찾았다. 3시간 거리에 떨어져 계신다는 이유로 자주 찾아뵙지 못했다. 그런데 불과 석 달 만에 외할머니는 생기가 없는 모습이었다. 총기잃은 눈, 뼈만 앙상하게 남은 팔다리, 퉁퉁 부은 손발, 잘 삼키지도 못해 침을 흘리시고, 말씀은 하시지만 알아들을 수 없는 웅얼거림. 숨 쉬는 데도 산소흡입기의 도움을 필요로 하신 모습은 처량했다. 

 

맞다. 처량했다. 외할머니를 뵈러 갈 때면 언제나 환하게 웃으시며 반갑게 맞이하시던 그 모습을 볼 수 없다는 생각에 울컥했다. 증손녀가 나를 닮아 예쁘다고 주위 사람들에게 자랑하시던 그 모습도 이젠 기억 속에서만 찾아야 할 듯 싶다. 턱으로 흘러내리는 침을 닦아드리며 이를 앙다물었다.

 

그런데 이순간 외할머니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생각해본다. 죽음을 고귀하게 맞는다는 것은 무엇일까. 시설 좋은 요양원이나 요양병원 등에서 마지막까지 고통없이 살 수 있도록 주사를 비롯한 다양한 치료를 받으며 계시는 것- 말 그대로 연명하는 것이 고귀한 죽음일까. 아니면 점차 추레해지는 자신의 모습을 타인에게 보이지 않고 고독하게 죽음을 맞이하는게 나은 것일까. 

 

정말 사랑스러워했던 손주 앞에서 아무 말도 건네지 못하고 손 한번 굳게 잡아주지 못한 채 침을 흘리는 모습을 보여야 하는 외할머니가 마음을 다치지 않았으면 좋겠다. 아파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냥 그랬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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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드라마 <사임당>에서 주인공들의 운명을 가르는 사건이 하나 있다. 바로 운평사 난민 학살사건이다. 이 학살사건은 민치형이 난민을 몰살했다는 사실로 명확하게 드러나있다. 하지만 그 원인은 사건을 바라보는 사람의 시선에 따라 달리 읽힌다. 사임당은 자신의 그림과 싯구 때문이라 여기고, 난민 중 유일하게 살아남은 사람은 자신이 고려지 제작의 비밀을 넘겨준 탓이라고 생각한다. 사건을 해석하는 시각은 달라진다는 것이다.

 

2. 우리는 현재 사건을 해석하는 상반된 시각으로 심각한 갈등상황에 놓여있다. 그런데 실상 문제는 사건의 해석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사실 그 자체에 있다. <사임당>의 운평사 학살 사건처럼 대통령이 저지른 명확한 사실이 있음에도 그것마저 부정되고 있다. 즉 사실을 바라보는 해석의 차이가 아니라 사실 그 자체가 애시당초 다르다는 것이다. 

 

3. 사실이 뒤바뀌는 현실. 아마 그건 요즘 문제시되고 있는 거짓뉴스와도 관련이 있을 것이다. 사실을 전달하는 뉴스라는 것 자체가 의문을 받게 됐다는 것이다. 이젠 우리에게 들리는 모든 이야기들을 먼저 의심해보고 받아들여야만 한다. 사실을 바라보는 시선의 문제가 아니라 기본이 되는 사실 자체가 흔들리고 있는 것이다. 사실과 거짓을 판단하는 눈부터 길러야 되는 현실이 버겁다. 명확한 사실마저도 온전하게 드러내지 못하는 언론이 안타깝다. 사실이 숨바꼭질 하는 시대, 우리는 술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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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17-03-03 15: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드라마 보긴 하는데 딱히 끌리는 것도 아니고
안 끌리는 것도 아니고 좀 애매하더군요.
아무리 쟁쟁한 배우를 앞세워도 드라마가 좀 밋밋하고
펙션이라고는 하지만 어느 정도 사실을 바탕으로
해야하는데 제가 신사임당에 대해 너무 모르고 있는 것 같아
답답하더군요.ㅠ
뭐 좀 아시는 것이 있는지...ㅋ

하루살이 2017-03-03 17:11   좋아요 0 | URL
저도 잘 알고 있는게 없어요. 사임당이 화가로서 뛰어난 재량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당쟁 탓에 화가보다는 오히려 현모양처의 표본이 되었다. 정치적으로 이미지가 이용된 셈이다. 라는 것 정도밖에는 아는 것이 없네요.
드라마 호흡이 느리다보니 사람들을 끌어당기는 힘도 조금 달리는 것 같습니다. 안타깝다는 마음뿐 ^^;
 

 

어라? 대추나무에 가시가 있었네요?

그랬다. 어린 대추나무에는 가시가 있었다. 동물들에게 새순을 먹히지 않으려고 가시를 세웠다. 꿰 단단하고 날카로운게 야무지다. 

그런데 다 큰 대추나무에서는 가시를 못봤다. 어떻게 된 일이지?

대추나무는 가시를 품고 자란다고 한다. 가지가 커지면서 가시도 굵은 가지와 하나가 되어 자라나는 것이다. 다 큰 대추나무는 동물들에게 잡아먹힐 염려가 없는 것이다. 아마도 새들이나 짐승이 열매를 먹고 먼 곳에 퍼뜨리길 바라거나, 아니면 열매가 독성을 지니고 있어 짐승들이 멀리 하거나 일 것이다. 정확한 이유는 모르겠지만 어쨋든 다 큰 대추나무에겐 가시가 없다.

사람이 성장하는 것도 이러면 싶다. 혹시나 남들한테 피해을 입을까 가시돋힌 말로 거리를 두었던 사람들도, 이렇게 성장했으면 좋겠다. 연약하기에 자신을 지키려 가시를 치켜세웠던 사람들도 이렇게 성장했으면 좋겠다. 의연하게, 당당하게, 그렇게 성장했으면 좋겠다. 더이상 가시를 품고 있지 않아도 될 만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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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강한 몸을 가지고 있지않다. 염증과 친하다. 피부염, 중이염, 비염...

특히 피부염으로 고생이 많다. 최근엔 가볍던 비염 증세도 조금씩 심해지고 있다. 잠을 자는게 불편할 정도다. 잠도 깊숙이 들지 못하고 자주 깬다.

코로 숨을 쉬는게 괴로워 입으로 숨을 쉬면서 목도 부었다.

하루는 기어코 코로 숨을 쉬고 싶다는 오기가 생겼다. 불을 끄고 잠자리에 들었다. 의식적으로 코로 숨을 들이쉬고 내뱉었다. 바늘구멍만한 틈으로 공기가 들어갔다 빠져나오는 듯하다. 꽉 막힌 코 사이로 공기가 드나들면서 코곯이같은 소리도 난다. 한 번 숨을 들이쉬고 내뱉는데까지 걸리는 시간이 1분이 넘을 것 같은 느낌이다. 숨이 컥 막혀 죽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냥 입으로 쉴까. 주저주저했다.

에이, 그래도 오늘은 기필코 코로 숨을 쉴테다. 참고 또 참았다. 머리가 띵하고 질식할 것 같은 느낌이 계속됐지만 코로 숨쉬기를 멈추지 않았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는 모르겠다. 바늘구멍만하던 숨구멍이 이쑤시개만해지고, 젓가락만해지고, 숨쉬는게 어느 정도 자유로워졌다. 그렇다고 비염이 나은 것은 아니다. 그런데 코로 숨을 쉬는게 편해졌다. 그리고 나서는 다시 코가 꽉 막히는 일은 아직까지 벌어지지 않았다. 물론 다시 말하지만 비염이 나은 것은 아니다. 하지만 코로 숨을 쉰다는 자유로움을 얻었다. 의지가 몸의 변화를 가져올 수 있다는 것. 다른 사람의 사례나 이론적으로 가능하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직접 체험해보니 참 신기하다.

이 경험이 어떻게 발전해갈지는 모르겠다. 그저 한 번의 신기한 경험으로 그치고 말지도 모른다. 하지만 무엇인가 가능성의 문을 연듯하다. 몸은 살과 뼈와 피로만 이루어진 물질적 덩어리가 아니라는 것을 새삼 또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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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파트 통로에 눈이 쌓였다. 처마로 인해 전체를 뒤덮진 못했다.

이래저래 경계는 형성되지만 굳건할것같던 이 선도 결국은 사라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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