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과 평화 1 (양장)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45
레프 톨스토이 지음, 박형규 옮김 / 문학동네 / 2016년 11월
평점 :
절판



겨울엔 장편이고(from 유ㅂㅁㄷ님), 장편은 역시 러시아 장편이 제 맛이다. 문학동네 톨스토이 탐험단이 되어(from A 님 페이퍼) 『전쟁과 평화 1』를 선물 받았다.


톨스토이라고 한다면, 자타공인 세계 최고의 문호이다. 소설가, 시인이라는 설명을 넘어 사상가라는 호칭 또한 당연시된다. 고전은 지금 읽고 있다는 표현이 부적절한, 이미 읽었어야 했던 혹은 이미 읽은 책으로서, <전쟁과 평화>를 다시 읽고 있다고 말해야 옳겠지만.

얼른 가보자. <전쟁과 평화>는 처음이다.



1권은 3부로 이루어져있다. 1부는 각 인물이 소개되고, 화려한 사교계의 면면을 통해 당시의 문화를 보여준다. 2부는 러시아군의 일상이 소개되고, 3부는 모스크바 사교계와 러시아군의 전장을 오가며 그려진다.



소설의 중심에는 베주호프 백작(키릴 블라디미로비치 베주호프)의 아들인 피예르(표트르 키릴로비치[키릴리치] 베주호프, 키릴, 페탸, 페트류샤, 피에르)가 있다. 100여쪽을 읽어가는 동안 주요 등장인물이 소개된 맨 앞장을 연거푸 확인하는 수고를 덜기 위해, 빈 연습장에 인물이 등장하는 순서대로 등장인물의 이름을 적어보지만, 그런 수고로도 부족할 때가 다반사다. 피예르는 베주호프 백작의 유일한 아들이지만 서자이기 때문에,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를 수 없는 홍길동 운명이다. 다른 남자들보다 몸집이 큰 편이라 유독 눈에 띄어, 겁먹은 듯한 태도 역시 화려하고 세련된 예법의 사교계 사람들에게 조용한 놀림감이다. 이랬던 피예르가 아버지의 유언에 따라 막대한 유산을 상속받게 되어 베주호프 백작이 되다니, 그야말로 인생역전이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고독하나 근심 걱정 없는 신세였던 피예르는 별안간 부유한 베주호프 백작이 되어, 밤에 침실에 들어서야 비로소 혼자가 될 정도로 사람들에게 둘러싸이는 바쁜 몸이 되었다. .. 전에는 피예르의 존재 따위는 알려고도 하지 않았지만 이제는 그가 만나고 싶어하지 않기라도 하면 그야말로 화를 내거나 비관하는 많은 사람을 만나야 했다. (390)



활짝 갠 피예르의 인생에, 태양이 그 빛을 멈추고 어떤 먹구름이 끼게 될지는 다음 권에서



처음에 읽게 되었을 때는, 이런 부분이 좀 이상했다. 안나 파블로브나와 바실리 공작의 대화다.



오늘 축하연은 취소된 것으로 알고 있었어요. 사실 저는 그런 축하연이니 불꽃놀이니 하는 것이 모두 못 견디게 싫어졌어요.”

당신이 그런 기분이란 것을 알았다면 그 축하연은 그만둘 걸 그랬는데요하고 공작은 태엽이 감긴 시계처럼 대답했는데, 그것은 상대방이 믿길 바라지 않는 말을 할 때 나오는 입버릇이었다.

저를 괴롭히지 말아주세요. 그건 그렇고, 노보실초프의 긴급 공문서 건은 어떻게 결정됐죠? 당신은 다 알고 계실 테죠?” (15)



이탤릭체는 무슨 이유로 등장하는가,의 의문. 일러두기를 읽지 않아 생긴 일이다.

<일러두기>

5. 원서의 프랑스어(또는 기타 언어) 부분은 이탤릭체로 처리했고, 강조 부분은 고딕체로 처리했다.



말 중간 중간에도 프랑스어를 섞어서 말한다는 뜻인데, 프랑스와 전쟁을 하고 있는 도중에도 우아한 프랑스어로 말하는, 혹은 말하겠다는 러시아 귀족들의 뜻 모를 도취감이 이탤릭체의 모양 그대로 전해진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 나는 겨우 1권을 읽었을 뿐이다. 눈앞에 있는 듯 세심하게 인간 군상을 그려내는 톨스토이의 솜씨에 감탄하고 박수치고 또 감탄한다. 다만 입이 반쯤 벌어진 모습이 예쁜가, 하고 묻고 싶다.



젊은 볼콘스카야 공작부인은 금수를 놓은 벨벳 손가방에 뜨갯감을 넣어가지고 왔다. 엷은 솜털로 약간 가뭇하게 보이는 귀여운 윗입술은 이가 드러날 만큼 짧았으나 오히려 입술이 빠끔히 벌어져 귀여웠고, 어쩌다 가끔 아랫입술에 닿아 입을 다물면 더 귀엽고 사랑스러워 보였다. 더없이 매력적인 여자에게 흔한 일이지만, 윗입술이 짧고 입이 반쯤 벌어진 그녀의 결점은 오히려 특유의 아름다움으로 여겨졌다. (23)



입이 반쯤 벌어지면 더 예뻐 보이나. 눈에 아무리 힘을 줘도 입을 반쯤 벌리면 사람이 좀 멍해 보이지 않던가. 더없이 매력적인 여자에게 흔한 일이라는데. 미의 기준이 바뀐 것인가 아니면 개인적 취향인가 혹 아니면, 멍해 보이는 여자가 예뻐 보이나. 그런가 혹은 그렇다고 말하고 싶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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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부만두 2017-12-17 22: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환영합니다!!!!! 여긴 겨울의 장편 소설 나라에요~~~~ 천천히 부담 없이 같이 읽어요, 우리....*^^*

단발머리 2017-12-17 22:54   좋아요 0 | URL
유부만두님 서재에서 만났던 아름다운 <전쟁과 평화> 4권과 러시아어 수능 특강이 눈 앞에 아른거리네요~~
오랜만의 장편이라 먼 길 잘 갈수 있을지 조금 걱정됩니다.
유부만두님 응원에 힘입어 달려보렵니다. 화이팅~~!!!

2017-12-18 08:4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12-23 17:44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7-12-18 10: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옛날 서구 남성들은 입을 살짝 벌린 여성에 성적 매력을 느꼈어요. 베르메르의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가 남성 중심의 시선이 많이 반영된 그림이에요.

단발머리 2017-12-23 17:45   좋아요 0 | URL
그렇군요. 그 소녀는 그렇게 멍해보이지는 않던데....
자세히 봐야겠군요, cyrus님처럼^^
 

이제 11월이 20분 정도 남았고
이 책은 470 페이지 정도 남았다.


바람 부는 겨울밤
나는 차분하게 그리고 진지하게
책을 읽어 나간다. 그런데
이런 대목에서는 어찌할 도리가 없다.


모두 잠들어 고요한 밤에
나 혼자 웃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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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galmA 2017-12-01 12:2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맨스플레인이 ‘내 앞에 꿇어‘ 심산이겠으나 요즘은 ‘나랑 싸우자!‘ 이꼴...뭐, 싸워도 자신이 이길 수 있다는 계산이겠지만 이런 정신 상태인 사람과 바람직한 대화가 이뤄지기 쉽지 않죠.

단발머리 2017-12-01 12:19   좋아요 1 | URL
으흠... 그러게요. 레베카의 실화가 증명하듯이 여자가 말해도 말이예요. 지금 맨스플레인할 타임이 아니예요~ 해도 그냥 직진이죠.
바람직한 대화 어려워요. 쉽지 않죠~~^^

다락방 2017-12-01 08:2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아....좋네요. 전 아직 사지도 않았는데 단발님은 또 벌써! 저보다 먼저! 읽으시네요. 아아. 왜이리 갈 길이 먼겁니까!

그나저나 남자들이 맨스플레인하는 걸 여자들은 아주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어요. 그쵸?

단발머리 2017-12-01 12:25   좋아요 1 | URL
좋죠좋죠~~~162쪽, 235쪽 가히 압권입니다.
우리의 갈길은 멀지만 함께 가니까 좋아요.

저는 제인 오스틴이 작품에서 맨스플레인 은근하게 까는 거 보고서 깜놀했던 때가 아직도 생생해요. 여자들은 아주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더라구요. ㅎㅎㅎㅎㅎㅎㅎ 웃어야지요 ㅎㅎㅎ

stella.K 2017-12-01 13: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남자들은 대체로 쌍방향소통이란 걸 잘 못하는 경우가 많죠.
맨스플래인이 곧 소통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아요.
대화 좀 하려고 하면 싸우자고 덤비는 걸로 오해하는 경우도 많고.
그런데 여자들도 그것을 묵인 방조해왔던 건 아닌가 싶기도 해요.
대화의 기술을 좀 배우면 좋을텐데.ㅠ

단발머리 2017-12-03 22:35   좋아요 0 | URL
전부는 아니라고 생각해요. 남자 중에도 쌍방향소통을 할 수 있는, 할 만한 남성도 있을 거라는 희망^^

진지한 대화를 시도할 때 많은 경우, 남자들은 화를 내더라구요.
여자들이 그걸 묵인방조했다 볼 수도 있겠지만,
그 정도로 상황이 별로였다는 생각도 드네요.
 

 




나는 포도가 새겨진 거울을 청소할 때 쓸데없는 짓이라는 걸 알면서도 가끔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을 쳐다본다. 응접실의 오후 햇살에 비친 내 피부는 희미해져 가는 멍 자국처럼 옅은 자주색이고, 이는 푸르스름하다. 나는 나에 대해 오갔던 이야기들을 모조리 떠올려본다. 나는 잔인한 악마이고, 불한당에게 끌려가 목숨이 위험했던 순진한 희생양이고, 나를 교수형에 처하면 사법 당국이 살인을 저지르는 게 될 만큼 아무것도 모르는 바보이고, 동물을 좋아하고, 안색이 밝은 미녀이고, 눈은 파란색인데 어디서 말하기로는 초록색이고, 머리는 적갈색인 동시에 갈색이고, 키는 크거나 작은 편이고, 옷차림이 단정하고 깔끔한데 죽은 여자를 털어서 그렇게 꾸민 거고, 일에 관한 한 싹싹하며 영리하고, 신경질적이며 뚱한 성격이고, 미천한 신분인 것에 비해 조금 교양이 있어 보이고, 말 잘 듣고 착한 아이라 나를 나쁘게 말하는 사람이 없고, 교활하며 비딱하고, 머리가 멍청해서 바보 천치와 다를 바 없다. 나는 궁금하다. 내가 어떻게 각기 다른 이 모든 사항들의 조합일 수 있을까? (38)


여기 38쪽까지 읽고 잠깐 멈췄다. 그리고는2의 성』을 펼쳤다. 밑줄을 긋고 포스트잇 플래그를 해둔 페이지들을 훑었다. 생각보다는 금방 찾았다.




신화를 설명하기란 언제나 어려운 일이다. 신화는 손쉽게 파악되지도 이해되지도 않는다. 신화는 사람들의 의식과 밀접한 관계가 있지만, 결코 고정된 대상으로서 의식의 정면에 놓이는 일이 없다. 너무나도 변덕스럽고 모순 투성이라 그 통일성을 파악할 수 없다. 데릴라(삼손을 유혹한 여자)와 유디트(적장을 죽인 열녀의 전형), 아스파지아(고대의 탕녀)와 루크레티아(정숙한 여자의 전형), 판도라(미녀의 상징)와 아테네(제우스의 딸, 지혜의 여신)처럼, 여자는 이브인 동시에 성모 마리아이다. 여자는 우상이고, 하녀이며, 생명의 원천이고, 암흑의 세력이다. 진리의 소박한 침묵인가 하면 기교이고, 수다이면서 거짓말이기도 하다. 여자는 의사이며 마술사이고, 남자의 먹이이며 파멸의 씨앗이다. 여자는 남자에게 없으나 남자가 갖고 싶어하는 전부이며, 남자의 부정이고 남자의 존재이유이다. (192)


우상이며 하녀, 생명의 원천이며 암흑의 세력. 침묵이며 수다이고 의사이며 마술사. 남자가 아닌 것 그리고 남자가 원하는 전부.

여성이 현실이 아닌 신화의 자리에 있을 때, 여성은 추앙의 대상이 되거나 혹은 혐오의 대상이 된다. ‘순결한 성녀가 아니면 몸을 막 굴리는 년이고, 위대한 어머니가 되어 자식의 영광을 함께 누리지 못한다면, 천성이(라고 믿어지는) 분명한 모성을 거부한 매정한 어머니가 되어 모두에게 버림받는다.

시몬 드 보부와르의 글은 김이설에게까지 닿는다.




윤서 엄마의 논리대로라면 성적에 목숨 건 여자아이는 되바라진 여자애였고, 성적에 관심 없는 여자애들은 아이돌이나 따라다니면서 화장이나 하는 골빈 여자애였다. 윤서도 내 딸아이도 요즘 여자애들이라는 것을 잊은 사람 같았다. <「경년」, 김이설>

 





여자에게는 중간이 없다. 여자는 미녀이거나 추녀이며, 성녀이거나 마녀이다. 그 중간은 없다. 어떤 사람이 인간답다고 말할 때, 그 사람은 여자가 아니다. 여자는 인간의 범주에 포함되지 않기 때문이다. 인간이라는 개념 속에 여자는 포함되지 않는다. 여자는 인간이 될 수 없기에, 인간 표준 중의 하나가 될 수 없다. 인간의 기준이 되는 남자 앞에서 여자는 항상 모자란 사람으로, 무언가 부족한 사람으로 해석된다. 게다가 이렇게 말하고 생각하는 사람, 나는, 여자가 아닌가.


38쪽까지 읽고 너무 길었다.

다시 그레이스에게로 간다. 그녀가 왜 괴물이 됐는지 아니, 그녀가 정말 괴물이 맞는지 확인해 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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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발머리 2017-11-29 14:0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다락방님~~~~~

여러분 빨리빨리~~ 페이퍼로 <현남오빠에게> ebook 특별이벤트 알려줘서 고마워요.
한참 후에나 찾아 읽었을텐데, 다락방님 덕분에 ‘손 안의 책‘이 됐어요. 땡큐요~~*^^*

다락방 2017-11-29 15:33   좋아요 1 | URL
우앙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잘되었네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짱이네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저 참 잘했네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으쓱으쓱)

단발머리 2017-11-29 15:46   좋아요 1 | URL
참 잘했어요~~~ 다락방님^^
언제나처럼, 어김없이, 여전히...
참 잘했어요~~~~ : )
 
남아 있는 나날 민음사 모던 클래식 34
가즈오 이시구로 지음, 송은경 옮김 / 민음사 / 2010년 9월
평점 :
품절



평생을 달링턴 홀의 집사로 일했던 스티븐스는 새주인이 빌려준 포드를 타고 생애 첫 여행을 떠난다. 젊은 시절 함께 일했던 켄턴 양을 만나러 가는 길, 앞으로 나아가는 만큼 기억을 되살려 지난 날 자신의 삶을 되돌아 본다.

 

책뒷면의 줄거리 부분에서는 자신이 평생을 충직하게 모셔왔던 달링턴 경이 나치 지지자였다는 진실 앞에서 자신이 지켜왔던 명문과 신뢰가 허망하게 무너지고, 이제 인생의 황혼기에 이르러서야 지나가 버린 자신의 인생과 사랑을 깨닫게 된다,라고 적혀 있는데, 좀 허술한 서술이 아닌가 싶다. <인생의 황혼 녘에 비로소 깨달은 잃어버린 사랑, 그 허망함과 애잔함에 관한 내밀한 기록>이라는 문구가 광고를 위해 필요하다는 점은 이해하지만, 스티븐스에게 켄턴 양에 대한 애잔한 마음이 있었던가, 나는 아니라는 데 한 표를 건다.

 

스티븐스는 자신이 영국의 진정한 집사, 위대한 집사의 대열에 설 만한 사람이라는데 대해 의심하지 않는다. 평생 동안 자신의 일에 대해 그리고 자신이 모시고 있는 주인에 대해 커다란 자부심을 느끼고 있다. 자신의 아버지가 위독한 상황에서도 업무에 소홀함이 없도록 최선의 노력을 다하는 모습에서 확인할 수 있다. 그는 여러 번, 자신이 진정한 신사를 모시고 있음에 대해 자신만만해 했다. 하지만, 그랬던 그가 지금은 뭐라고 말하는가.


 

그래, 노인장이 정말 그 달링턴 경 밑에서 일했습니까?”

, 아니요. 나는 미국 신사이신 존 패러데이 어르신께 고용된 몸이오. 그분이 달링턴 가문으로부터 그 저택을 사셨거든요.” (153)

 

얘기해 봐요, 스티븐스. 그 달링턴 경은 대체 어떤 사람이었죠? 보아하니 그 사람 밑에서 일한 모양인데.”

아닙니다, 부인. 아니에요.”

, 난 그런 줄 알았어요. 그런데 내가 왜 그렇게 생각했는지 모르겠군요.” (157)

 

당신은 달링턴 경 밑에서 일했습니까.

아니요, 아니에요.

 

그의 대답은 이를 데 없이 단호하다. 물론, 나치의 지지자로서 법적으로 사회적으로 호된 비판을 받았던 옛 주인 달링턴을 옹호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스티븐스는 주인이 하고 있는 일에 관여하는 것은 자신의 직무를 벗어난 일이라고 판단했다. 더 넓은 세상을 대면한, 더 많은 정보를 소유한 주인의 의견이 무조건 옳은 것이라 한결같이 믿어왔다. 그러면서도 유대인 하녀들을 저택에서 내쫓으라는 잘못된 지시를 묵묵히 수행한다. 그는 옛 주인 달링턴의 지시를 그대로 이행하는 것만이 집사로서 자신의 임무라고 확신했다. 달링턴 집사로서의 삶은 그의 전부다. 그런데 지금 그는 무엇을 말하는가. 그는 자신이 그토록 자랑스러워했던 주인을 모른 척 하고 있다. 그와의 관계에서만 이해될 수 있는 자신의 과거를 부정하고 있다. 그에게 바쳤던 충성스러웠던 그의 인생 전부를 부인하고 있는 것이다. 이해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호감 가는 모습이라고는 할 수 없는 모양새다.

 


여행길에서 보여 준 스티븐스의 언행은 어처구니없는 정도를 넘어서 웃음을 자아낸다. 포드 자동차에 여느 신사와 다름없는 우아한 옷차림, 자연스럽게 몸에 밴 예법과 고급스러운 어투 때문에 시골 사람들은 그를 모두 진정한 신사로 생각한다. 선생님~ 선생님~ 하며 그를 극진히 대접한다. 물론 스티븐스가 유도한 일은 아니지만, 상황이 여의치 않음을 느꼈다면 자신은 진정한 신사가 아니라, 신사를 모시던 진정한 집사였음을 밝혀야 할 텐데, 바로 이 부분에서는 이전의 단호함이 감쪽같이 사라져 버린다.

 


실례합니다만 선생님, 혹시 처칠 씨도 만나 보셨나요?”

처칠 씨요? 그분도 저희 집에 여러 차례 오셨지요. 그러나 솔직히 말해, 테일러 부인, 제가 중대한 문제들에 한창 깊이 관여하던 시절의 처칠 씨는 그다지 중요한 인물도 아니었을 뿐더러 그런 인물이 되리라는 기대조차 받지 못했답니다. … (232)

 


시골 사람들은 처칠 씨를 직접 보았다는 스티븐스의 말에 모두 존경과 감탄을 연발한다. 저명인사와의 관계 속에서 자신의 역할이 직접적이지 않았다는 그의 말은 모호함의 극치를 보여준다. 아니라고 아니하셨으니, 아닌 것이 아닌 것으로 여겨주세요. 진짜 신사의 예리한 포착 때문에 자신의 정체가 탄로났을 때, 스티븐스는 오히려 잘 됐다고 생각하고, ‘홀가분하다고 말한다. 정말일까. 정말 그렇다면, 그 홀가분한 일을 왜 그렇게 미뤄 두었을까.

 

마지막까지 좋아할 수 없는 주인공이었다. 가즈오 이시구로까지 좋아하지 않는다는 말은 아니지만, 아무튼 스티븐스씨는 좋아할 수 없는 사람이다. 이런 사람 별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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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7-11-29 12:5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 저는 어째서..왜때문에... 단발님이 별 셋을 준 이 리뷰를 읽고 이 책이 읽고 싶어지는 겁니까? 망설이지 않아도 좋긴 해요. 책은 이미 집에 사두었으므로... 몇 년전에....다른 많은 책들과 함께........ 하하하하하.


단발머리 2017-11-29 13:19   좋아요 1 | URL
별점 조금 더 줘야겠어요. 3.5입니다. 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
아니, 근데 다락방님은 이 책을 몇 년전에 사두었다는 말이예요?
역시, 다락방님의 안목~~ 가즈오를 미리 알아보셨군요.
저는 노벨문학상 때문에 이 작가를 알게 되었고, syo님이 가즈오 소설 주르르 읽는 거 보고 자극받아서 ㅋㅋㅋㅋㅋ
그래서 읽습니다. 한 권 더 읽으려고요. <나를 보내지 마>, 보내지 마아~~~^^
 
혐오사회 - 증오는 어떻게 전염되고 확산되는가
카롤린 엠케 지음, 정지인 옮김 / 다산초당(다산북스)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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혐오사회 증오와 멸시가 공고화되는 과정을 추적한다. 인종, 종교, 성적 지향, 성별 등에서 자신과다른 사람 불편해하며 두려워하는 사람들이 자신들의 증오와 혐오를 어떤 방식으로 강제하는지 살펴본다. 민족, 국가라는 공동체를 지키기 위한동질성 강요, 성별의 본원성 또는 본연성에 대한 주장, 순수에 대한 맹목적인 숭배가 얼마나 허구적인지를 고찰한다. 


구체적인 사례로 동영상을 통해 세계에 알려진 클라우스니츠 사건이 소개된다. 난민 여성들과 아이들을 태운 버스를 둘러싸고우리가 국민이다라고 외치는 사람들, “꺼져! …… 꺼져! ……” 반복하는 사람들, 그들을 둘러싸고 멀지 않은 곳에서 이런 상황을 구경하는 사람들, 그리고 사태를 방관하는 경찰관들. 그들에게 난민은 충분히 가까운 거리에 있어 마음대로 미워할 있는 존재일 뿐만 아니라, 보이지 않는 존재이기에 보편적인우리 일부로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난민 사람, 사람은 개인으로 인식되지 않고, 괴물처럼 위험한 존재로만 인식된다. 그들은 사람, 사람이 아니라 무리의그들로만 받아들여진다. 그들은 우리가 없는 사람들로서, 영원히그들이다. 



클라우스니츠에서 증오를 일으킨 이데올로기는 클라우스니츠 안에서만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작센 안에서만 만들어진 것도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난민들을 원칙적으로 자신과 동등하며 고유한 존엄을 지닌 인간으로 없게 만드는 모든 인터넷 포럼과 토론 포럼, 출판물, 토크쇼, 노래 가사의 맥락에서 만들어진 것이다. (76) 



하나의 사례는 에릭 가너다. 길에서 줄담배를 판매했다고 의심받아 경찰의 검문을 받게 에릭 가너는 다른 시민이 녹화한 동영상 속에서 작게 말한다. “이런 일은 오늘부로 끝나야 .” 에릭 가너는 경찰의 제지에 반항하지 않았고 무기를 소지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여러 명의 경찰에 의해 무참하게 살해된 데는, 흑인을 멸시하고 경멸하고 학대해도 결코 처벌을 받지 않는다는 혐오의 유산이 작용했기 때문이다 (타네히시 코츠). 이미 불법이 초크chokehold(목을 졸라 질식시키거나 머리로 피가 공급되지 못하도록 압박하는 격투기술) 사용해 에릭을 압박하고, 숨을 없다고 말하면서 정신을 잃은 에릭을 길에 방치한 경찰은 그의 죽음에도 전혀 당황하지 않는다. 당시의 상황을 녹화한 푸에르토리코 출신의 시민보다 백인 경찰관인 자신이 신뢰를 받으리라는 확신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다.  


아랍계 난민, 흑인, 혼혈인, 동성애자, 트래스인에 대한 사람들의 공포는 계속해서 연구하고 탐구해볼 만한 과제다. 자신과 다른 존재에 대해 인간은 두려움과 함께 호기심도 느낀다. 어쩌면 이것은 아주 자연스러운 일이다. 하지만, 자신과 다른 존재의존재자체를 싫어한다는 것은 그러한 두려움이 자랄 있게 하는토양 존재 때문이라고 저자 카롤린 엠케는 지적한다. 



내가 여기서 말하는 혐오와 증오는 개인적인 것도 우발적인 것도 아니다. 단순히 실수로 또는 궁지에 몰려서 자기도 모르게 분출하는 막연한 감정이 아니다. 그것은 이데올로기에 따라 집단적으로 형성된 감정이다. 이것이 분출되려면 미리 정해진 양식이 필요하다. 모욕적인 언어표현, 사고와 분류에 사용되는 연상과 이미지들, 범주를 나누고 평가하는 인식틀이 미리 만들어져 있어야 한다. 혐오와 증오는 느닷없이 폭발하는 것이 아니라 훈련되고 양성된다. 그것을 자발적이거나 개인적인 것으로 해석하는 모든 사람은 자기도 모르게 감정들이 계속 양성되는 일에 기여하는 셈이다. (22) 



동질한 것만이 정상이라는 믿음, 유기적 단일성에 대한 집착이 자신과 다른 존재를받아들이지못하게 한다. 자신과 다른 종교, 자신과 다른 문화, 자신과 다른 옷차림, 자신과 다른 식생활문화, 자신과 다른 생김새, 자신과 다른 성적취향을견디지 하게 한다. 



증오에 대한 대응이 눈길을 끈다. 



증오에 대처하려면 자신과 똑같아지라는 증오의 유혹을 뿌리치는 수밖에 없다. 증오로써 증오에 맞서는 사람은 이미 자기도 따라 변하도록 허용한 셈이며, 증오하는 자가 원하는 모습에 가까워진 것이다. 증오에는 증오하는 자에게 부족한 , 그러니까 정확한 관찰과 엄밀한 구별과 자기회의로써 대응해야 한다. (25)  



증오하는 자에게는 이렇게 대응해야 한다. 정확한 관찰과 엄밀한 구별, 그리고 자기회의. 그리고 마지막으로진실 말하기 Wahrsprechen’. 저자는 공공의 영역에서진실 말하기 더해 다양한 권력 구조에 저항하는 과제로서진실 말하기 제안한다. 자신이 속한 사회적 환경, 이를테면 가족과 친구, 종교공동체, 자신이 활동하는 정치적 맥락에 대해서도 반대할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자신이 속한 집단 내에서 자신도 개인적으로든 집단적으로든 배제하고 낙인찍는 독단론과 관행을 공고히 하는데 일조하고 있지 않은지 주의하라는 당부다. (241) 



아랍계 난민으로 유대계 혼혈인이며 성소수자인 나를 상상해 보라는 것이다. 

그래서, 아랍계 난민으로 유대계 혼혈인이며 성소수자인 나를 상상하면서 책을 덮었다. 

아랍계 난민으로 유대계 혼혈인이며 성소수자가 되고 보니, 말을 없다는 사실이 제일 먼저 다가온다. 어렵게 도착했지만 이 곳의 말을 모른다. 들을 있으나 이해하지 한다. 

말을 잃었다. 잃어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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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yo 2017-11-23 16: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억 오늘 도서관에서 신간으로 꽂힌 걸 보고서 가져올까 말까 고민하다 놓고왔는데......

단발머리님의 글을 두 시간만 일찍 만났어도 업어왔겠어요.

단발머리 2017-11-23 16:20   좋아요 0 | URL
키햐~~~ 아쉽네요. syo님의 선택을 받았어야 하는데....
카롤린 의문의 1패입니다. ^^

cyrus 2017-11-23 16: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좀 더 살펴봐야겠지만, ‘진실 말하기’ 개념이 푸코의 ‘파레시아(진실을 말하는 용기)’과 유사한 느낌이 들었어요. 푸코의 파레시아를 이해하면서 페미니즘이 파레시아를 실천할 수 있는 학문이라고 확신했습니다.

아무개 2017-11-23 19:36   좋아요 0 | URL
진실... 진실을 말하는 용기라. . . 그거 하고 있습니다. 아시고 계시니까 하시는 말씀이라 생각합니다.

아무개 2017-11-23 19: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혐오는 권력을 가진 쪽에서만 가능하죠. 여성이 장애인이 성소수자가 비성인인 청소년이나 유아가 그리고 전라도가 과연 어떤 혐오권력을 실재로 휘두룰수 있을까요. 현실에서 이미 벌어진 사건에 대한 미러링 따위로 권력자들이 실제로 죽지는 않으니까요.
혐오는 대체적으로 권력문제라 생각해요.
조만간 뵈요^^

단발머리 2017-11-24 06:51   좋아요 0 | URL
정확한 지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이 책을 읽으면서 <양성평등에 반대한다>와 <김대중 죽이기>가 자꾸 겹쳐지더라구요.
그 이야기도 페이퍼에 같이 써보려 했는데, 정교하게 써내려가기가 힘들어서 중간에 포기했어요.
아무개님 댓글이 제 글보다 낫네요~~~~~

맞습니다. 혐오는 권력을 가진 쪽에서만 가능한 일이죠.
특히 전라도 문제가 많이 생각났어요.
경상도도 지역투표고 전라도도 지역투표다. 둘 다 똑같다. ....
엄연히 혐오의 피해자로 생존을 위해 몸부림치는데 그것마저도 혐오로 해석된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자세한 이야기는 만나서 해요^^

AgalmA 2017-12-01 08:19   좋아요 0 | URL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503 비롯 기타 등등의 정치인들을 혐오하는 게 우리가 권력이 있기 때문은 아니니까요. 제 견해로는 ‘권력을 가진‘도 해당되지만 ‘세력을 가지려는‘ 자들의 감정수단이기도 합니다. 이 글에서도 ‘공동체를 지키기 위한 동질성의 강요‘라고 기술하셨죠. 세력을 가진 측의 예로는 빨갱이니 종북이니 프레임을 덮어씌워 반대편을 무력화시키려 했던 것이 있겠죠. 방송이니 언론플레이, 온갖 공작을 해서 그렇게 만들 수 있었던 휘두를 수 있는 힘은 2차적인 거죠. ‘세력을 가지려는 측‘의 부정정인 예는 각종 테러 집단을 예로 들 수 있을 겁니다. 긍정적인 예는 이 사회에 대한 혐오와 울분이 표출된 촛불운동이 해당된다고 생각되네요
약자라고 혐오가 없겠습니까. 사회를 움직이는 이런 정서들은 쉽게 재단해 볼 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문제를 명쾌하게 보자고 단순화시킬수록 놓치는 게 생기니까요. 아이러니하게도 페미니즘도 하나의 세력 강요처럼 여겨지고 있죠.

깐도리 2017-12-30 15: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도서관 희망 도서로 끼웠네요..궁금한 책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