쓸 말을 먼저 쓰고, 할 말을 뒤에 하겠다. 둘의 차이를 나는 모른다.
아마존 프라임에서 <the idea of you>를 봤다. 우리 집은 OTT를 안 보는 집이라 이게 얼마나 큰 일인지를 좀 설명하고 싶지만, 갈 길이 멀다. <킹덤>, <오징어 게임>, <더 글로리> 안 본 눈 삽니다, 하면 내가 나서면 된다. 아무튼 이 영화를 봤다.
오더블 아이디로 들어갈 수 있어서, 아침에 영화를 봤는데, 띠링! 책 선물이 도착했다. 이 책의 원작이었다. 내가 이 영화를, 이 책을 좋아할 줄을 아는, 그러니까 나를 잘 아는 친구의 선물이었는데, 이미 영화를 봤다는 내 말에 친구가 더 놀라는 듯했다. 항상 빈둥거리는데 갑자기 재빨라진 나.
여기서부터는 본격 영화 이야기라, 내용을 알고 읽어야 한다. 여기(https://blog.aladin.co.kr/fallen77/15522693)에 다락방님 페이퍼가 있다.
세계 최고의 보이밴드의 리드보컬 헤이즈(니콜라스 갈리친)와 사귀게 된 솔렌(앤 해서웨이)은 일상이 공개되는 것은 물론이고, 악플의 공격에 더해 딸아이까지 곤경에 처하게 된다. 괜찮냐는 친구의 말에 솔렌이 대답한다. 난 사람들이, 내가 행복하다고 이렇게 빡쳐 할 줄 몰랐어. 친구가 답한다. 내가 전에 말하지 않았어? 사람들은 행복한 여자를 미워해.
아, 여자만은 아니겠지. 하지만, 여자에게 더욱 가혹한 현실. 동화 속, 가장 착한 여자는 죽은 여자, 잠든 여자, 누워 있는 여자. 행복한 여자는 공공의 적이 되기 십상이다. 그게 우리의 현실이다. People hate happy women. 그런 세상에 저항하는 길은 더 행복해지는 것 뿐이다. 더 건강하고, 더 활력 있게. 더 재미있고, 더 행복하게.
기억에 남는 장면은 헤이즈가 솔렌에게 유럽 투어를 같이 가자고 말하는 부분이다. 아이 문제도 있고, 일도 해야 하는 솔렌. 갤러리 때문에 안 된다고 하자, 헤이즈가 자기가 갤러리의 작품을 이미 다 샀지 않느냐고 말한다. 그 때, 솔렌은 가볍게, 그러나 확실하게 헤이즈의 뺨을 때린다. 툭!
자본주의 사회를 사는 우리, 돈처럼 중요하고 돈처럼 필요한 건 없다.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할 시간을 더 많이 갖고 싶어서, 그 시간의 필요를 돈으로 해결하는 생활 방식은 이제 우리의 삶 깊숙이 들어와 있다. (실례; 배달의 민족) 나 역시 헤이즈의 그 생각이 100% 나쁜 제안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런데도, 솔렌이 헤이즈의 뺨을 소리 나게 딱! 때렸을 때, 나는 그 순간이 시원하게 좋았다. 그러니까 헤이즈가 맞아서 좋았다는 게 아니라(저, 막 때리고 그런 사람 아니에요), 좋아하고 아끼고 소중한 사람이라 해도 예의 없게 행동했을 때, 그 사실을 알려주는 게 두 사람의 건강한 관계를 위해서 필요하기 때문이다. 한편으로는, 작품 속의 설정상 헤이즈가 솔렌보다 16살 연하이기 때문에 그런 ‘교정(?)’ 시도도 가능한 게 아닐까, 생각해 보기도 했다.
남자주인공을 맡은 니콜라스 갈리친은 내 스타일은 아니다 (자나깨나 베일리 스타일). 그냥 딱 봤을 때, 전형적인 미남 스타일은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연기를 잘해서 그런 건지, 모르던 매력을 발견해서 그런 건지, 보면 볼수록 괜찮았다. 왜 그런가 빤히 보고 있다가 한참 후에야 알게 됐는데, 목소리. 찾아보니 니콜라스는 미국 배우가 아닌 영국 배우였는데, 미국의 팬들이 그렇게나 좋아한다는 ‘영국 엑센트’ 때문이 아닌가 싶다. 영어도 잘 못하면서, 영국 영어와 미국 영어 구별하지도 못하면서, 나도 모르게 영국 엑센트에 반했던 걸까. 나만 반하는 이상한 상황. 헤이즈가 솔렌에게 반했다고 고백하는 장면이 있는데, 그때 헤이즈가 이렇게 말한다. “I think you’re smart and, you know, y-you’re also just-just… y-you’re hot, or whatever. [핫] 아니고, [하흐:트].
영화를 보면서 가끔, 아주 가끔은 내가 그 환경, 그 세팅 속으로 들어가게 된다. 꿈꾸게 된다. 세계 최정상 보이밴드의 아이돌이 나 같은 중년의 아줌마를 좋아할 리 만무하지만, 아무튼 이건 픽션이고, 상상이고, 꿈이고. 그래서, 그렇게 상상의 나래를 펴는 순간. 아니, 펼치려 하는 순간, 갑자기 찾아오는 현타. 내 인생에, 24살 때에도 이렇게 다정하게, 적극적으로, 필사적으로 대시하는 24살의 남자가 없었는데, 내 나이가 이제 중년인데, 설마 이런 일이. 내 나이 24살에도 없던 일이 일어날 수 있단 말인가. 그럴 수는 없고, 없을 테고, 없었던 것이며. 하지만 계속 터져 나오는 웃음.
hot. 내 평생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말을 니콜라스가 해줬다. 내게 한 건 아니지만, 아무튼 내가 있는 쪽을 바라보면서 한 거니까. 니콜라스가 그 말을 했다. 내게 한 건 아니지만, 아무튼 하긴 했다. … you’re ho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