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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아 있는 나날 ㅣ 민음사 모던 클래식 34
가즈오 이시구로 지음, 송은경 옮김 / 민음사 / 2010년 9월
평점 :
품절
평생을 달링턴 홀의 집사로 일했던 스티븐스는 새주인이 빌려준 포드를 타고 생애
첫 여행을 떠난다. 젊은 시절 함께 일했던 켄턴 양을 만나러 가는 길,
앞으로 나아가는 만큼 기억을 되살려 지난 날 자신의 삶을 되돌아 본다.
책뒷면의 줄거리 부분에서는 자신이 평생을 충직하게 모셔왔던 달링턴 경이 나치
지지자였다는 진실 앞에서 자신이 지켜왔던 명문과 신뢰가 허망하게 무너지고, 이제 인생의 황혼기에 이르러서야
지나가 버린 자신의 인생과 사랑을 깨닫게 된다,라고 적혀 있는데, 좀 허술한
서술이 아닌가 싶다. <인생의 황혼 녘에 비로소 깨달은 잃어버린 사랑, 그 허망함과 애잔함에 관한 내밀한 기록>이라는 문구가 광고를
위해 필요하다는 점은 이해하지만, 스티븐스에게 켄턴 양에 대한 애잔한 마음이 있었던가, 나는 아니라는 데 한 표를 건다.
스티븐스는 자신이 영국의 진정한 집사, 위대한 집사의 대열에 설 만한 사람이라는데 대해 의심하지 않는다. 평생
동안 자신의 일에 대해 그리고 자신이 모시고 있는 주인에 대해 커다란 자부심을 느끼고 있다. 자신의
아버지가 위독한 상황에서도 업무에 소홀함이 없도록 최선의 노력을 다하는 모습에서 확인할 수 있다. 그는
여러 번, 자신이 진정한 신사를 모시고 있음에 대해 자신만만해 했다.
하지만, 그랬던 그가 지금은 뭐라고 말하는가.
“그래, 노인장이 정말 그 달링턴 경 밑에서 일했습니까?”
“아, 아니요.
나는 미국 신사이신 존 패러데이 어르신께 고용된 몸이오. 그분이 달링턴 가문으로부터 그
저택을 사셨거든요.” (153쪽)
“얘기해 봐요, 스티븐스. 그 달링턴 경은 대체 어떤 사람이었죠? 보아하니 그 사람 밑에서
일한 모양인데.”
“아닙니다, 부인. 아니에요.”
“오, 난 그런 줄 알았어요. 그런데 내가 왜 그렇게 생각했는지 모르겠군요.” (157쪽)
당신은 달링턴 경 밑에서 일했습니까.
아니요, 아니에요.
그의 대답은 이를 데 없이 단호하다. 물론, 나치의 지지자로서 법적으로 사회적으로 호된 비판을 받았던
옛 주인 달링턴을 옹호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스티븐스는 주인이 하고 있는 일에 관여하는 것은 자신의
직무를 벗어난 일이라고 판단했다. 더 넓은 세상을 대면한, 더
많은 정보를 소유한 주인의 의견이 무조건 옳은 것이라 한결같이 믿어왔다. 그러면서도 유대인 하녀들을
저택에서 내쫓으라는 잘못된 지시를 묵묵히 수행한다. 그는 옛 주인 달링턴의 지시를 그대로 이행하는 것만이
집사로서 자신의 임무라고 확신했다. 달링턴 집사로서의 삶은 그의 전부다. 그런데 지금 그는 무엇을 말하는가. 그는 자신이 그토록 자랑스러워했던
주인을 모른 척 하고 있다. 그와의 관계에서만 이해될 수 있는 자신의 과거를 부정하고 있다. 그에게 바쳤던 충성스러웠던 그의 인생 전부를 부인하고 있는 것이다. 이해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호감 가는 모습이라고는 할 수 없는 모양새다.
여행길에서 보여 준 스티븐스의 언행은 어처구니없는
정도를 넘어서 웃음을 자아낸다. 포드 자동차에 여느 신사와 다름없는 우아한 옷차림, 자연스럽게 몸에 밴 예법과 고급스러운 어투 때문에 시골 사람들은 그를 모두 ‘진정한
신사’로 생각한다. 선생님~
선생님~ 하며 그를 극진히 대접한다. 물론 스티븐스가
유도한 일은 아니지만, 상황이 여의치 않음을 느꼈다면 자신은 ‘진정한
신사’가 아니라, 신사를 모시던 ‘진정한 집사’였음을 밝혀야 할 텐데,
바로 이 부분에서는 이전의 단호함이 감쪽같이 사라져 버린다.
“실례합니다만 선생님, 혹시 처칠 씨도 만나 보셨나요?”
“처칠 씨요? 그분도 저희 집에 여러 차례 오셨지요. 그러나 솔직히 말해, 테일러 부인,
제가 중대한 문제들에 한창 깊이 관여하던 시절의 처칠 씨는 그다지 중요한 인물도 아니었을 뿐더러 그런 인물이 되리라는 기대조차 받지
못했답니다. … (232쪽)
시골 사람들은 처칠 씨를 직접 보았다는 스티븐스의
말에 모두 존경과 감탄을 연발한다. 저명인사와의 관계 속에서 자신의 역할이 ‘직접적’이지 않았다는 그의 말은 ‘모호함’의 극치를 보여준다. 아니라고 아니하셨으니, 아닌 것이 아닌 것으로 여겨주세요. 진짜 신사의 예리한 포착 때문에
자신의 정체가 탄로났을 때, 스티븐스는 오히려 ‘잘 됐다’고 생각하고, ‘홀가분하다’고
말한다. 정말일까. 정말 그렇다면, 그 홀가분한 일을 왜 그렇게 미뤄 두었을까.
마지막까지 좋아할 수 없는 주인공이었다. 가즈오 이시구로까지 좋아하지 않는다는 말은 아니지만, 아무튼 스티븐스씨는
좋아할 수 없는 사람이다. 이런 사람 별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