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는 가정 밖에서 일하면서 독립적인 수입을 얻을 자유에 대한 대가로 이중 노동을 한다. (123쪽)
이건 사실이다.
출근을 하게 된 이후, 나는 평소와 똑같은 시간에 일어나 밥을 하고 반찬을(거의 만들지는 않지만) 암튼 먹을 반찬을 준비하고, 식구들을 깨워 학교로 보내고, 준비를 하고 집을 나선다. 바깥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면, 나는 다시 아침의 그 '나'이고, 빨래를 시작하고, 청소기를 돌리고, 저녁을, 내가 먹을 것을 준비하거나 집에 있는 음식을 꺼내 먹는다. (이번 주에는 외식 한 번에, 두 번 저녁으로 먹을 것을 사가지고 왔다)
그러니까, 출근부터 퇴근 때까지의 내 생활은 100% 바뀌었지만, 그 나머지 시간은 예전과 똑같다. 나는 가정 밖에서 일하면서 내 소유의 수입을, 적은 수입을 얻게 되었지만, 가사 노동의 주된 책임자는 여전히 나다.
나는 19년간 전업주부였는데, 그 기간에 직무유기와 태만으로 일관했던 내 생활이 얼마나 나태했는지를 고백하는 순간, 온 세상이 온통 나를 부러워할 것이기에 여기에 뭔가를 보태지는 못 하겠다. 나는 보통보다 살림을 안 하는 편이고, 남편은 보통보다 살림을 많이 하는 편이다. (관여나 도움, 협조 등의 단어를 쓰는 거 자체가 불합리하다. 나는 적확한 단어를 골랐다. 살림.)
딸과 장남 아닌 아들을 전부 상속에서 배제하는 베아른의 상속 체계에서 장남 이외의 아들이 법률적, 직업적인 측면에서 '가정부'에 해당한다는 지적은 새삼 놀랍다.(77쪽) 가장과의 결합으로 지위가 결정되다는 게 주요한 포인트인데, 이는 여성이 자신이 결혼한 남성과 맺는 관계와 심각하게도(?) 유사하다.
여성은 자신의 남편이 속한 계급으로 취급(?)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두 사람이 이혼했을 때, 여성은 이혼함으로써 더욱 가난해지고, 남성은 더 부유하게 된다는 통계가 이를 증명해준다. 여성은 출산과 육아로 인해 더 이상 시장에서 '경쟁력' 있는 상품이 아니고, 결혼 이전의 직업과 지위에 접근하는 것이 어렵고, 결과적으로는 경력 단절 등의 이유로 비숙련 저임금 노동에 내몰린다. 결혼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경제 활동을 이어왔던 남성은 이혼 그 자체만으로는 사회적 지위는 물론 경제적으로도 아무런 타격을 입지 않는다. 이런 상황에서 이혼 후 남편이 약속한 양육비를 지급하지 않는다면? 암묵적으로 강요되었던 육아에 대한 강제는 현실이 되어 나타난다. 아이와 하나로 묶인 여성은 경제적 어려움에서 벗어나기 어렵다.
마가렛 애트우드의 <시녀 이야기>에서 여성 집단을 고립시키기 위한 첫번째 단계가 '은행 계좌 동결'이었던 이유가, 고소득의 사회적 명망과 지위가 보장되는 '선호' 직업군으로 여성의 진입이 어려운 이유가, 여성들이 주로 수행하는 감정노동, 돌봄노동이 저평가되는 이유가, 여전히 동일 업무에 대해서도 여성이 남성에 비해 돈을 덜 받고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전 세계적인 신자유주의의 발흥과 플랫폼의 발달, AI의 출현등으로 이제 인간은 인간에게 뿐만 아니라, 기계에게도 손쉽게 대체되는 '상품'이 되고 말았다. 인간이 직접 수행해야만 하는, 아직 기계의 발전이 도달하지 않은 영역에서의 노동, 특히 돌봄노동과 감정노동의 경우, 오히려 남성보다 여성의 노동력이 더 많이 요구되며, 그런 경우 노동자의 임금은 낮게 책정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노동의 여성화'가 가속화되는 와중에 일시적으로는 여성의 노동 참여로 인해 남성에의 예속이 약화되는 현상도 나타나고 있다. 저소득층의 아내가 임금노동으로 인해 폭력 가정에서 탈출할 수 있는 가능성이 높아진 사례가 그런 경우에 속한다.
마르크스주의가 페미니즘과 교차되는 지점을 '완전히' 나몰라라 할 수 없는 지점이 바로 여기에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생산 수단을 소유하지 못한 여성은, 자신의 젊음과 육체에만 의존하도록 '사회화된' 여성은, 영원히 노동자일 수 밖에 없다. 결혼 상태에서도 그러하고, 이혼 상태에서도 그러하다. 계급의 혁파는 경제에서 시작된다. 노동 혹은 수입, 또는 일 그리고 그에 대한 가치에 따라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