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까지 쓸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일단 시작해 보자. 시작은 <제인 에어>다.
<제인 에어>에서는 초자연적인 목소리가 전면에 등장하는 경우가 몇 번 있는데, 그중에 하나는 ‘여성’, 구체적으로는 어머니의 목소리이고, 또 하나는 로체스터의 목소리이다. 여성의 목소리는 로체스체가 유부남임을 알게 된 그날, 제인의 결혼식이 중단되었던 바로 그날, 중혼을 종용하는 로체스터와의 사이에서 제인이 어찌할 바를 모를 때, 속삭이는 소리로 들려온다. “내 딸아, 유혹에서 몸을 피해라.”(<제인 에어>, 2권, 164쪽)
로체스터의 목소리는 세인트 존이 제인에게 청혼하는 와중에 고민에 빠져 괴로워하는 그녀에게 들려온다. 멀리서, 저 멀리서 들려오는 로체스터의 목소리. 자신의 이름을 애달프게 외쳐 부르는 로체스터의 목소리 때문에 제인은 세인트 존의 청혼을 뿌리치고 로체스터를 찾아보기로 결심한다. 두 목소리는 모두 외부에서 들려온다. 바깥에서 그녀를 부르는 소리다. 하지만, 소설을 전체적으로 지배하는 목소리는 제인, 그 자신의 목소리다. 이 소설에서 내가 제일 좋아하는 부분이 여기다.
...... 절망에 뒤따르는 무모함을 생각하고, 그를 달래고 구원하고 사랑하라. 그리고 너는 그를 사랑하고 있으며 그의 것이 되겠노라고 말하라. 세상에 너를 걱정할 사람이 누가 있느냐? 너의 행동으로 해를 입을 사람이 누가 있느냐?’
그러나 대답은 여전히 굴복하지 않는 것이었다. ‘내가 나를 걱정한다. 쓸쓸하고 고독하고 아무도 의지할 사람이 없으면 없을수록 나는 나 자신을 존경한다…. ‘ (<제인 에어>, 2권, 159쪽)
‘내가 나를 걱정한다. 아무도 의지할 사람이 없으면 없을수록 나는 나 자신을 존경한다.’ <제인 에어>라는 작품에 공명하는 지점은 사람마다 다를 테고, 같은 사람이라도 언제, 어떻게 그 소설을 읽었느냐에 따라 다를 것이다. 나는 그 소설을 남녀 간의 사랑 이야기로 읽었고, 한 여성의 독립 여정기로 읽었고, 로맨스와 인류애의 대결로 읽었고, 한 여성 속 두 자아의 대립으로 읽었고, 끝내 자신의 사랑을 쟁취하는 용기 있는 사람의 이야기로 읽었다.
실제 세계에서 제인은 특별할 것 없는 외모에 의지할 곳 하나 없는 가난한 20대 여성, 돈이 필요한 젊고 어린 가정교사이다. 하지만, 만들어진 세계, 만들어진 우주 속에서 그녀는 연약한 여성이 아니다. 창조주이자 주인이다. 소설 속에서 그녀는 소리 내어 말하고, 설득하고, 설명하고, 판단하며, 거절한다. 세상과 구별된 독립된 객체로서 자아를 소유한 ‘내’가 그 세계의 주권자로 자리매김 되어있다.
작가들의 초기작은 대부분 어린 시절에 대한 회고록 형태를 띤다. 오르한 파묵이 소설을 썼을 때, 가족들이 그와 절연하고 나섰던 이유와 같다. 그는 소설을 썼고, 그리고 소설을 읽은 사람들은 그것이 자신들의 이야기인 줄 알았다. ‘알아챘다’. 소설가는 피해 갈 수 있다. ‘그건 지어낸 이야기야!’ ‘그건 그냥 소설이라고!’ ‘제인은 내가 아니야!’ 픽션이라는 장르 속에서는 그게 가능하다. 작가는 주인공이기도 하지만, 아니기도 하다. 화자이기도 하지만, 아니라고 말할 수’도’ 있다. ‘쓰는’ 사람은 작품 속의 ‘나’와 실제의 ‘나’를 분리할 수 있다. 하지만 다른 글에서는? 다른 글에서도 그게 가능할까.
논픽션은 어떠한가. 논픽션 중에 ‘나’가 제일 많이 등장하는 형태는 일기일 것이다. 일기는 나에게 일어난 일을, 내가 서술한 글이다. 사람은 일기를 쓰면서도 진실을 감출 수 있다. 일기(라는 세계) 속에서도 거짓말할 수 있다. 나는 그랬다. 오랫동안 일기를 써왔던 나는 그랬다. 내가 남기고 싶은 일을 남기고, 내가 감추고 싶은 일을 감췄다. 나는 일기 속에서, 일기 쓰고 있는 나를 만들어 갔다. 나는, 나를 창조해 냈다.
다른 글도 마찬가지다. 인간이 무엇에 관해 쓰든, 결국 자신의 전기를 쓰게 된다고 말한 니체의 말을 돌아봐야 하는 지점이 바로 여기다. 책을 읽고 독후감을 쓰는 것 같지만, 사실 우리가 쓰는 건 ‘우리 자신’에 대한 이야기다. 우리는, 우리 자신에 대한 글을 읽고, 자신에 대한 글을 쓴다. 아는 만큼 쓸 수 있고, 쓰는 만큼 도달한다.
그렇다면, 나는 누구인가. 쓰는 나, 쓰고 있는 나는 누구인가. 알라딘 서재에서 책을 읽고, 그에 대한 감상을 적어 온 시간이 이제, 꽤 되었다. 알라딘은, 알라딘 이웃들은 이제 내 생각에서, 내 일상에서 빼놓을 수 없는 소중한 일부가 되었다. 쓰는 ‘나’는 누구인가. 닉네임 단발머리인, 나는 누구인가. 두 아이의 엄마이고, 40대 후반의 기혼 여성, 서울에 사는 평범한 가정주부인 나는. 나는 누구인가.
나는 여러 번 이 고민을 이곳에 써 두었지만, 여태 답을 찾지 못했다. 이제 나는, 본질이란 존재하지 않으며, 자아는 구성되는 과정 중에 있음을 안다. 하지만, 여전히 나는, ‘총체로서의 나’로 존재하고, ‘나’의 경계는 외부 세계와 구분된다. 실제의 나보다, 실존하고 있는 나보다 글 쓰는 단발머리는 훨씬 더 나은 존재다. 더 사려 깊고, 더 착한 심성을 가지고 있다. 더 조심스럽고, 더 진중하다. 나는 그 간극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몰랐다. 그런 나를, 그 간극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알지 못했다.
나 자신을 잃을 일 따위는 없다는 사실을 돌연 깨달았다. 내게는 나를 위해 싸워줄 서술자가 있었다. 이 서술자는 자신이 곧 어머니처럼 되었기에 그 곁을 떠나지 못한 여자, 바로 나였다. "또 혼자"라는 상황에 겁먹지 않는 서술자. 생각해보면, 그는 도시를 걸어 다니는 사람, 혹은 이혼한 중년의 페미니스트, 혹은 경제적으로 불안정한 작가인 나에게도 크게 휘둘리지 않았다. 이 서술자는 그저 견고하고 제한된 자아로, 중심을 잘 잡고 있는 듯 보였다. 나는 내가 해낸 일이 무엇인지 알았다. 페르소나를 창조해낸 것이다. (<상황과 이야기>, 30쪽)
그러니까, 비비언 고닉의 말을 그대로 따른다면 그건 전혀 고민할 일이 아니었다. 나는, 나를 위해 싸워줄 이 서술자를 믿고, 그저 따라가기만 하면 될 것이었다. 이 페르소나, 논픽션 페르소나를 받아들이면 될 것이었다.
간단히 말해, 내 이야기에 더 자유로운 연상을 허용해줄 유용한 관점이 필요했다. 내가 오랫동안 보지 못하고 놓쳤던 점은, 나인 동시에 내가 아닌 서술자에게서만 이런 관점이 나올 수 있다는 사실이었다. (<상황과 이야기>, 29쪽)
나인 동시에 내가 아닌 서술자. 내가 찾던 바로 그것을, 그렇게 고닉의 책에서 찾아냈다. 너무 하찮은 일이라 이 글을 올려도 될지 고민했다. 모든 사람이 알고 있는 것을 이제 발견해 놓고는 호들갑을 떠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에 저어되기도 했다. 하루에 방문자가 50명도 안 되고, 그조차도 다른 책들과 연동해서 내 서재에 들어오는 사람들을 생각하면, 새 글을 썼을 때 각 잡고 내 글을 진지하게 읽어줄 사람이 30명도 안 되는 그런 내가 할 만한 고민은 아니라는 생각이 여러 번 들었지만, 아무튼 이 이야기를 썼다. 쓰고 싶었다. 고백하고 싶었다.
글을 쓰도록 우리를 강제하는 것이 '고백 성향', 고백 욕망, 고백의 맛을 맛보고자 하는 열망입니다. 고백하고 싶은 욕구와 그 불가능성 둘 다죠. 대체로는 우리가 고백하는 순간 속죄의 함정에 빠지기 때문입니다. 고백, 그리고 건망증이라는 함정이죠. 고백은 최악의 것입니다. 고백은 자신이 시인한 것을 부인합니다. (<글쓰기 사다리의 세 칸>, 86쪽)
내가 읽은 문장과 내가 겪은 일들과 내 생각과 주장과 판단과 고민과 흔적을, ‘나 아닌 나’의 목소리로 말해도 된다는 허락을 받아서 기뻤다. 기억과 기억 사이의 경합과 경험에 대한 판단을, 나보다 훨씬 나은 나, 훨씬 현명한 나, 훨씬 윤리적인 나에게 맡기면 된다는 말에, 부담감이 크게 줄어들었다. 그 간극이 주는 무게를 감당하지 않아도 될 것이었다. 쓰면 될 것이다. 이제, 쓰면 될 것이다. 이제부터.
다시 말해, 독립해가는 자의 투쟁과 가치를 기록하고 말하는 남자만이 남는다. (<상황과 이야기>, 117쪽)
맞다. 독립해가는 자의 투쟁과 가치를 기록하고 말하는 사람만이 남는다. 기록하고 말하는 사람만이 남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