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포도가 새겨진 거울을
청소할 때 쓸데없는 짓이라는 걸 알면서도 가끔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을 쳐다본다. 응접실의 오후 햇살에
비친 내 피부는 희미해져 가는 멍 자국처럼 옅은 자주색이고, 이는 푸르스름하다. 나는 나에 대해 오갔던 이야기들을 모조리 떠올려본다. 나는 잔인한
악마이고, 불한당에게 끌려가 목숨이 위험했던 순진한 희생양이고, 나를
교수형에 처하면 사법 당국이 살인을 저지르는 게 될 만큼 아무것도 모르는 바보이고, 동물을 좋아하고, 안색이 밝은 미녀이고, 눈은 파란색인데 어디서 말하기로는 초록색이고, 머리는 적갈색인 동시에 갈색이고, 키는 크거나 작은 편이고, 옷차림이 단정하고 깔끔한데 죽은 여자를 털어서 그렇게 꾸민 거고, 일에
관한 한 싹싹하며 영리하고, 신경질적이며 뚱한 성격이고, 미천한
신분인 것에 비해 조금 교양이 있어 보이고, 말 잘 듣고 착한 아이라 나를 나쁘게 말하는 사람이 없고, 교활하며 비딱하고, 머리가 멍청해서 바보 천치와 다를 바 없다. 나는 궁금하다. 내가 어떻게 각기 다른 이 모든 사항들의 조합일
수 있을까? (38쪽)
여기 38쪽까지 읽고 잠깐 멈췄다. 그리고는 『제2의 성』을
펼쳤다. 밑줄을 긋고 포스트잇 플래그를 해둔 페이지들을 훑었다. 생각보다는
금방 찾았다.
신화를 설명하기란 언제나 어려운 일이다. 신화는
손쉽게 파악되지도 이해되지도 않는다. 신화는 사람들의 의식과 밀접한 관계가 있지만, 결코 고정된 대상으로서 의식의 정면에 놓이는 일이 없다. 너무나도
변덕스럽고 모순 투성이라 그 통일성을 파악할 수 없다. 데릴라(삼손을
유혹한 여자)와 유디트(적장을 죽인 열녀의 전형), 아스파지아(고대의 탕녀)와
루크레티아(정숙한 여자의 전형), 판도라(미녀의 상징)와 아테네(제우스의
딸, 지혜의 여신)처럼, 여자는
이브인 동시에 성모 마리아이다. 여자는 우상이고, 하녀이며, 생명의 원천이고, 암흑의 세력이다.
진리의 소박한 침묵인가 하면 기교이고, 수다이면서 거짓말이기도 하다. 여자는 의사이며 마술사이고, 남자의 먹이이며 파멸의 씨앗이다. 여자는 남자에게 없으나 남자가 갖고
싶어하는 전부이며, 남자의 부정이고 남자의 존재이유이다.
(192쪽)
우상이며 하녀, 생명의 원천이며 암흑의 세력. 침묵이며 수다이고 의사이며 마술사. 남자가 아닌 것 그리고 남자가
원하는 전부.
여성이 현실이 아닌 신화의 자리에 있을 때, 여성은 추앙의 대상이 되거나
혹은 혐오의 대상이 된다. ‘순결한 성녀’가 아니면 ‘몸을 막 굴리는 년’이고, 위대한
어머니가 되어 자식의 영광을 함께 누리지 못한다면, 천성이(라고
믿어지는) 분명한 모성을 거부한 매정한 어머니가 되어 모두에게 버림받는다.
시몬 드 보부와르의 글은 김이설에게까지 닿는다.
윤서 엄마의 논리대로라면 성적에 목숨 건 여자아이는 되바라진 여자애였고, 성적에 관심 없는 여자애들은 아이돌이나 따라다니면서 화장이나 하는 골빈 여자애였다. 윤서도 내 딸아이도 요즘 여자애들이라는 것을 잊은 사람 같았다. <「경년」, 김이설>
여자에게는 중간이 없다. 여자는 미녀이거나 추녀이며, 성녀이거나 마녀이다. 그 중간은 없다. 어떤 사람이 인간답다고 말할 때, 그 사람은 여자가 아니다. 여자는 ‘인간’의 범주에
포함되지 않기 때문이다. 인간이라는 개념 속에 여자는 포함되지 않는다.
여자는 인간이 될 수 없기에, 인간 표준 중의 하나가 될 수 없다. 인간의 기준이 되는 남자 앞에서 여자는 항상 모자란 사람으로, 무언가
부족한 사람으로 해석된다. 게다가 이렇게 말하고 생각하는 사람, 나는, 여자가 아닌가.
38쪽까지 읽고 너무 길었다.
다시 그레이스에게로 간다. 그녀가 왜 괴물이 됐는지 아니, 그녀가 정말 괴물이 맞는지 확인해 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