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쁘다.
모든 감상을 쓰기 이전에, 이 책이 너무 예쁘다는 것을 말하고 싶다. 그 어떤 사진과 그 사진에 덧칠된 필터 효과로는 이 단단한 책 표지를 손끝으로 쓰다듬으면 책의 활자들이 조금씩 묻어나와 내 피부에 스며들 것 같은 느낌을 전달할 수 없다.
이 책은 '순간'에 대한 이야기이다. 지금의 내가 지난날을 되돌아볼 때, 문득 특정한 어떤 '순간'과 그 순간으로 연결된 인물과 사건이 지금의 '나'를 결정지었다고 지배적으로 생각이 될 때의 그 순간이다.
우리는 무수히 많은 순간들을 경험하지만, 우리의 완전한 세계가 고양되는 순간, (스탕달 Stendhal이 기술한 바와 같이) 모든 진액을 빨아들인 꽃들이 순식간에 한데 모여 결정을 이루는 바로 그 순간은, 언제나 단 한순간, 오직 한 번 뿐입니다. p17, <감정의 불안>
그 때의 그 시간이 지금의 나를 결정지어 버렸던 것입니다. p103, <감정의 불안>
연속적인 시간 속에 '일상'은 한정된 공간에서 별반 다를 것 없는 '인물'들과 특별하지 않은 반복되는 일들로 구성되어있다. 날씨며 회의며 이벤트들은 불쑥불쑥 일상에서 특별하게 일어나는 것 같지만 그마저도 주, 달, 분기, 연마다 반복될 뿐이다. 그래서 어떤 인생의 변화를 위해서는 일상에서 습관으로 야금야금 시도해보라고 한다.
하지만, <감정의 혼란>은 다른 방식의 변화를 이야기한다. 스티븐 제이 굴드의 단속 평형이론과 같이 인생의 변화는 아주 짧은 시간에 심대하게 일어난다는 것을 이야기한다.
단속 평형이론(斷續平衡理論,punctuated equilibrium)은 유성 생식을 하는 생물 종의 진화 양상은 대부분의 기간 동안 큰 변화 없는 안정기와 비교적 짧은 시간에 급속한 종분화가 이루어지는 분화기로 나뉜다는 진화 이론이다.[1]
Ref: 위키백과 - 단속 평형이론
60대의 롤란트가 돌아본다.
그저 젊음을 방탕하게 즐기다 기숙사로 찾아온 아버지에게 민낯을 들켜서 어느 조용한 대학으로 가게 되었고, 거기서 자신의 내면에 있던 문학에 대한 불꽃을 타오르게 한 교수를 만나 그가 사는 건물에 같이 살며 교수가 구술한 내용을 필사하고 정리하며 책을 써나가는 것에 몸과 마음을 모두 불사른다. 그런데 그 교수는 기이했다. 상냥했다가도 얼음송곳같이 대하고, 갑자기 어디론가 떠나고, 친절했다가 마구 화를 내고, 무기력하고 흐릿했다가 강의실의 모든 이를 지적으로 최고의 절정에 끌어올려 환희에 차게 했다. 젊고 매력적인 그의 아내와는 남처럼 지냈다. 그 교수는 그를 사랑했다. 그 교수는 스승과 제자 간의 사랑이 아닌 사랑을 그에게 품었지만 참아왔다.
또 갑자기 사라졌던 교수가 롤란트에게 모든 것을 이야기하고 마지막 입맞춤을 한 후, 괴로워하는 그에게 교수의 아내가 이야기한다.
"괴로워하지 말아요. 롤란트, 괴로워 할 필요 없어요. 나는 다 알고 있었어요. 이미 이럴 줄 알고 있었다고요." p142, <감정의 불안>
문학에 눈을 뜨게 했고, 30년간의 교수 생활을 하게한 계기가 된 그 교수와의 만남은 그의 인생에서 그 '순간' 중의 하나였다.
활자의 스며듦을 느끼며 책장을 덮고, 나의 그런 '순간'들을 생각해보았다. 그것들은 이질적이었고, 결이 달랐으며, 계획되거나 의도되지 않았던 것들이며, 무엇보다도 나와 달랐다. 마치 내가 아닌 누군가가 잠시 나에게 들어와 있었던 것 같다. 그것이 습관의 총량으로 발현된 것이든, 우연히 일어난 일이든 말이다.
순간은 우리를 훨씬 더 변하게 만든다. p205, <감정의 불안>
책의 마지막은 츠바이크가 브라질에서 남긴 그 유명하고 가슴 저미는 유언장으로 맺는다.
바라건대 그들은 이 긴 밤이 지나면 떠오를 아침노을을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나는, 너무 성급한 이 사람은 여러분보다 먼저 떠납니다. p213
<광기와 우연의 역사>와 <어제의 세계>를 듣고 읽고 그에게 완전히 매료되었다. 번역된 문장들이지만, 그의 점잖고 지적이며 조곤조곤하면서도 단단하며 한 발자국 떨어져 있는 듯하면서도 깊게 그리고 통찰을 가지고 서사하는 그에게 완전히 빠졌다. 1920~1930년대 최고의 작가였고, 릴케, 프로이트 등 수많은 지성인과 친구였던 츠바이크는 히틀러와 나치에 의해 가장 크게 나락으로 떨어진 작가 중의 한 명이며, 마지막 망명지 브라질에서 아내와 동반 자살한 이 비운의 위대한 문호 츠바이크에게 매료되었다.
"그의 작품은 인간의 '데모니슈'(demonisch) 즉, 인간을 초월해서 존재하는 감정들에 대한 이야기를 탁월한 심리묘사를 통해 그리고 있는 것들이 많다." p9-11, <감정의 불안>
1차 세계대전 이전의 예술의 오스트리아 빈부터 두 세계 대전을 겪은 츠바이크야말로 어쩌면 '초월적' 존재가 아닐까 생각한다.
집시같이 자유롭고 지적이며, 혜안을 가졌으며 유쾌하며 감성적인 크눌프가 헤세를 투영한 것처럼, <감정의 혼란>은 츠바이크가 현대사의 비극들을 겪으며 통찰하며 겪었던 '순간'들을 자신을 투영하며 쓴 책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