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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철학사
한스 요아힘 슈퇴리히 지음, 박민수 옮김 / 자음과모음(이룸) / 2008년 9월
평점 :
이 시기철학은 한마디로 칸트 이후의 철학이다. 칸트를 넘어 나아가거나 칸트에 맞서 대결하지만, 어떤 방향이든 그 출발지는 칸트이다.
“칸트의 철학은 결과로 볼 때 분명 이원론적이다. 인간은 두 세계의 시민이다. 한편에는 현상의 세계가 있고, 다른 한편에는 자유의 세계가 있다. 칸트의 인식론 역시 이원론적이라 불릴 수 있다. 한편에는 재료로 주어진 것, 즉 감각이 있으며, 다른 한편에는 선험적 직관형식과 범주의 기능을 지닌 자아가 있다. 인식은 재료에 그런 형식이 적용될 때에야 산출된다. p666”
칸트는 역사를 자유의 실현에 근접하는 거대한 발전 과정으로 해석하고 있다. 창조적 자아 -자유- 역사로 이어지는 이런 사상의 계열이 독일 관념론이다. 한편 칸트는 앎, 특히 과학이란 현상의 왕국에서만 가능함을 입증했다. 19세기 철학의 또 다른 조류인 실증주의와 유물론은 이 길을 택했다. 여기서 철학은 과학의 지식을 요약하거나 종합하는 역할로 축소된다.
제3의 길도 있다. 칸트의 한 면씩을 계승하는 앞의 두 입장과는 달리 칸트에 정면으로 저항한 철학이다. 이 저항이 겨눈 것은 칸트 체계 혹은 칸트에서 정점을 이룬 계몽주의 전반의 합리주의 정신이다. 이 저항은 비지성적, 비합리적, 감정적 힘들을 그 근거로 한다. 보편적 필연적 법칙에 반발하여 개별자의 가치와 권리를 부각시킨다. 또한 기계적이고 정태적인 우주 해명을 비판하고 생명의 비기계적 역동성을 밝혀내려 한다. 이 유형의 저항은 낭만주의의 성격을 갖는다.
세 가지 방향은 종국에는 칸트 사상과 대립관계에 놓인다. 첫 두 방향은 칸트 체계의 한 면씩만 부각시킨 결과 칸트와 끝내 대립하게 되었고, 세 번째 방향은 처음부터 칸트에 적대적이었다. 이러한 세 가지 방향이 출현한 이후 이에 반발하여 다시 신칸트주의가 칸트사상의 비판적 재음미를 주장했다.
제 1장 낭만주의와 독일 관념론
Ⅰ. 칸트 철학의 계승과 발전 - 신앙철학자들
칸트의 전제들을 객관적으로 탐구하고 이에 반대했던 주요 사상가 세 명은 신앙철학자들이다. 그들은 게오르크 하만, 야코비, 헤르더이다. 하만과 야코비는 언어에 아주 특별한 의미를 부여했다. 하만은 철학 전체가 이성보다는 언어로 구성되어 있다고 추측했다. 야코비는 칸트에게는 이성의 메타비판이라 할 언어비판이 결여되어 있다고 지적했다. 헤르더는 이론이성과 실천이성을 가르는 칸트의 이분법을 ‘요술’이라 비판했다.
Ⅱ. 피히테 1762 ~ 1814
피히테에 따르면 논리 정연한 철학 체계는 딱 두 가지다. 철학이 설명해야 하는 것은 경험 즉 사물에 대한 우리의 표상이다. 감각론이나 유물론은 사물로부터 표상을 도출한다. 반면 관념론은 표상으로부터 사물을 도출한다. 피히테는 “어떤 종류의 철학을 선택하는가는 어떤 종류의 인간이냐에 좌우된다” 고 했다.
피히테는 관념론을 선택한다. 우리가 사물의 존재에서 출발하면 의식이 사물로부터 생성된 이유를 결코 설명할 수 없지만, 사유로부터 출발하면 사물에 대한 우리의 표상을 도출할 수 있기 때문이다. 피히테는 철학의 시초에 ‘사유하는 주체’가 있다고 보았다.(이건 데카르트와 비슷한 것 아닌가?) 사유하는 주체가 자기 자신을 정립한다. 사유하는 주체야말로 모든 것의 시원이자 피히테 철학의 출발점이다. 피히테는 칸트의 가정인 사물자체 Ding an Sich를 거부했다. 비아, 타자는 자아가 산출한 것이다.
Ⅲ. 셸링 1775 ~ 1854
셸링의 철학은 동일철학이다. 칸트의 물자체를 거부한 피히테는 우리가 ‘자연’이라고 부르는 것은 단지 자아의 산물이라고 보았다. 셸링은 피히테를 뒤바꾼다. 자연이 정신의 산물이 아니라, 정신이 자연의 산물이다. 자아가 가능한 것은 오직 자연이 근원적 정신이기 때문이고, 자연과 정신, 실재와 관념이 근원적으로 동일한 것이기 때문이다.
Ⅳ. 헤겔 1770~ 1831
헤겔철학의 난해함은 대부분의 철학자들도 동의한다. 그럼에도 헤겔철학의 영향력은 막강하여 그를 빼고 근대철학을 말하기 힘들다. 헤겔 입문서로 가장 뛰어난 책은 프레드릭 바이저의 『헤겔』이지 싶다. 별 생각 없이 읽었는데, 눈이 반짝 뜨일 정도로 재미있고 이해가 쉬웠다. 바이저에 의하면 난해함 덕분인지 헤겔철학에 대한 오해가 많다고 한다. 대표적인 것이 ‘정-반-합’을 변증법의 핵심으로 설명하는 것인데, 헤겔 자신은 정립-반정립에 대해 말하지 않았다.
『세계 철학사』에는 헤겔의 정립과 반정립을 ‘지양’ 의 개념으로 설명한다. 지양에는 세 가지 뜻이 있다. 제거한다, 보존한다, 들어 올린다. 지양은, 선행하는 두 가지가 서로 배타적으로 대립하지 않는 더 높은 단계로 올라섬을 의미한다.
19세기 독일관념론은 피히테, 셸링, 헤겔로 대표된다. 피히테 철학은 주관적 관념론, 셸링 철학은 객관적 관념론, 헤겔 철학은 절대적 관념론이다. 헤겔의 절대정신은 주관정신과 객관정신보다 위에 있다. 헤겔에 따르면 세계 전체의 발전 과정은 ‘정신의 자기 전개’다.
“역사 속에서 행위해 나가는 것은 개인이 아니라 이 개인을 자신의 행위 수단으로 이용하는 세계정신이다. 어떤 인물들을 위대한 역사적 위인으로 만드는 것은 그의 인격적 특성이나 정력, 열정, 선견지명 혹은 지성이 아니다. 왜냐하면 세계정신은 자신이 목적한 바를 이루기 위해 흔히 자격도 없고 미흡하기만 한 개인들을 이용하기 때문이다. 사실 그러한 개인들에서는 역사적 필연성, 다시 말해 ‘시대정신’이 자신을 구현시켜 나가는 것이다. p708”
헤겔의 ‘이성의 간계(지)’ 가 여기서 나온다. 영웅이 역사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역사적 필연성이 영웅을 수단으로 사용하는 것이다. 물론 이들은 특정한 시점에서 세계사적 이성에 합치하는 존재들이다. “왜냐하면 역사란 객관정신의 자기전개이므로 특정 시점까지 역사적으로 형성된 것은 그 특정 시점에서 필연적인 것이며 동시에 ‘이성적인 것’, 다시 말해 세계사적 이성에 합치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p709” 그냥 들으면 무슨 소리인지 이해가 되지 않는 ‘현실적인 것이 이성적인 것이며, 이성적인 것이 현실적인 것이다’ 의 뜻은 이런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이때 이성은 개인의 이성이 아니라 세계사적 이성이다.
헤겔은 말년에 프로이센의 국가철학자가 되었다. 그는 당대 프로이센을 세계사적 이성에 궁극적으로 도달한 지혜의 구현이라 선언하고 자신의 철학 체계는 모든 철학의 완성이라고 천명했다. 헤겔의 견해에 의하면 일종의 역사적 종결상태가 도래한 것이다. 여기서 사유의 과제란 이미 일어난 사건을 조망하고 이를 순수한 의식으로 고양시키는 것뿐이다. “미네르바의 올빼미는 황혼녘에야 날기 시작한다.” 가 나온 배경이다.
그러나 역사적 종결상태란 헤겔의 변증법적 원리와 정면으로 배치된다. 역사에서 변증법이란 보수적 원리가 아니라 혁명적 원리이기 때문이다. 헤겔학파는 변증법에 따라 좌우로 분열되었다. 마르크스는 헤겔의 변증법을 활용해 역사상 유례없는 심대한 변화를 초래했다.
제 2장 실증주의, 유물론, 마르크스주의
Ⅰ. 프랑스 실증주의 : 콩트 1798 ~ 1857
19세기 전반 프랑스는 대혁명의 성과를 쟁취하려는 계급들 간의 투쟁으로 점철되었다. 왕정복고 세력과 제 3계급인 부르주아, 제4계급인 민중 사이의 치열한 투쟁 끝에 1848년을 기점으로 부르주아 계급이 주도권을 장악했다. 프랑스혁명이 부르주아혁명으로 불리기도 하는 이유다.
철학 사상도 세 가지 방향으로 발전하는데, 좌파의 요구는 이른바 유토피아적 사회주의 형태로 표현되었다. 생 시몽, 푸리에, 프루동이 대표적이다. 그러나 당시 프랑스가 배출한 가장 중요한 사상가는 생시몽 백작의 제자였던 콩트이다.
‘실증주의positivismus’라는 명칭은 콩트가 처음 사용한 것으로, 형이상학에 대한 거부의 의미를 갖고 있다. 실증주의는 주어진 것, 사실적인 것 즉 실증적인 것에서 출발하고 이를 넘어서는 모든 논의와 물음을 무용한 것으로 거부한다. 실증적인 것은 ‘현상’이다. 실증주의는 철학을 비롯한 모든 학문을 현상의 영역으로 제한한다.
콩트는 사회학의 창시자이다. 개인이 아니라 종속의 사회적 생활에서 나타나는 사태를 다루는 것이 사회학의 과제이다. 콩트는 사회학을 학문체계의 최고로 보았다. 콩트의 영향은 사회학에서 가장 두드러진다. 철학의 경우에는 특히 영국 사상에 두드러진 영향을 끼쳤다.
Ⅱ. 영국 실증주의
로크의 경험론, 흄의 회의론, 형이상학적 사변에 대한 영국 민족 특유의 거부감, 영국인의 냉정한 현실감각 등은 콩트의 철학이 고국 프랑스 보다 영국에서 더 큰 반향을 일으키기에 충분한 정신적 토양이 되었다. 영국은 프랑스와는 달리 극단적 대립 없이 발전해 갔다. 혁명 보다는 개인의 자유라는 오랜 자유주의적 원리와 사회진보의 이념을 통합시키려는 노력이 일반적이었다. 이런 경향은 영국 사회주의의 특징이다.
제레미 벤담과 콩트의 사상 및 영국 경험론의 전통은 존 스튜어트 밀(1806~1873)에게서 하나로 합쳐진다.
찰스 다윈(1809~1882)의 진화론은 허버트 스펜서(1820~1903) 등의 철학에 큰 영향을 끼쳤다.
Ⅲ. 독일 : 헤겔학파의 붕괴와 유물론의 대두
독일은 늦게야 시민계급이 형성되었고 1848년 혁명도 완전한 성공을 거두지 못했으며 사회갈등도 그만큼 뒤늦게야 표면화되었다. 슈트라우스와 루트비히 포이어바흐의 저작은 독일에서 일대 논쟁을 일으켰다. 그러나 이들의 저작은 이미 백 년 전 볼테르 시대의 시민적-계몽주의적 정신이 뒤늦게 표현된 것이다. 종교와 싸우는 과정에서 철학적 비판이 훨씬 예리해졌다.
“이제 중요한 것은 신이 존재하느냐 아니냐의 문제가 아니라 인간이 존재하느냐 아니냐의 문제이다. 이제 중요한 것은 신이 우리와 동일한 존재이냐 아니냐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인간이 서로 동등하냐 아니냐의 문제이다. 또한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인간이 어떻게 신 앞에서 정의로울 것인가의 문제가 아니라 신이 어떻게 인간 앞에서 정의로울 것인가의 문제이다. 우리가 먹는 빵이 주님의 육신이냐 아니냐가 중요한 문제가 아니라 우리가 우리 자신의 육신을 위해 빵을 얻는 것이 중요한 문제이다. 그리고 신의 것은 신에게, 황제의 것은 황제에게 주는 일이 중요한 문제가 아니라 우리가 마침내 인간의 것을 인간에게 주는 일이 중요한 문제이다.p748”
Ⅳ. 마르크스 : 1818 ~ 1883
마르크스의 철학사상은 헤겔의 철학 체계를 출발점으로 삼고 있다. 헤겔의 체계가 포이어바흐의 철학, 프랑스의 혁명 이론 특히 유토피아적 사회주의자들의 이론, 그리고 영국 고전경제학의 지식과 통합되었다. 유럽 사상의 3대 조류가 마르크스에게 흡수된 것이다.
마르크스는 헤겔의 변증법에서 혁명의 원리를 발견한다. 변증법의 핵심은 이 세계가 완성된 사물의 복합체가 아니라 과정의 복합체라는 사상이다. 존재하는 것은 오로지 생성과 소멸의 부단한 과정뿐이다. 마르크스는 변증법을 헤겔과는 달리 관념론이 아니라 유물론적 세계관에 결부시켰다.
변증법 이외에도 마르크스에게 헤겔의 유산은 적지 않다. 마르크스는 헤겔과 마찬가지로 전체 세계사란 통일적 법칙에 따라 궁극목표를 향해가는 진행과정이라 보았다. 이 과정에서 생성되는 모든 현실적 존재는 전체 과정의 필연적인 통과 단계를 뜻하며, 이런 점에서 이 존재들이 이성적 성격을 갖는다는 점도 두 사상가의 일치된 견해이다. 마르크스의 유물론 이면에는 이념과 현실, 이성과 현실의 완전하고 실제적인 일치가 가능하다고 보는 (헤겔적) 관념적인 신념이 숨어있다.
마르크스는 사회적 삶에서 경제적 토대가 갖는 의미, 엄연한 역사적 사실로서의 계급투쟁, 이 요인들이 문화적 정신적 발전에 미치는 영향을 최초로 완전하게 인식했다. 마르크스는 이러한 인식에 사로잡혀 이를 세계 해명의 유일한 출발점으로 삼았다.
제 3장 쇼펜하우어, 키르케고르, 니체
Ⅰ. 아르투르 쇼펜하우어 : 1788 ~ 1860
쇼펜하우어의 저작은 1850년경, 그의 노후에 와서 반향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독일과 유럽 각지에서 1848년 혁명이 실패로 끝나자 환멸감에 사로잡힌 지식인층은 쇼펜하우어의 염세주의적 세계관을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염세주의의 물결이 유럽 문학계를 휩쓸었다. 헤겔학파가 지배하던 시대의 종말이었다.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라는 제목은 쇼펜하우어 사상의 전모를 분명하게 표현하고 있다. 세계란 의지와 표상이다. 이 책의 첫 문장은 “세계는 나의 표상이다.”로 시작한다. 이 명제는 칸트의 것과 다르지 않다. 칸트의 업적은 현상을 사물 자체와 구별한 점에 있다. 그러나 칸트와 쇼펜하우어의 결정적 분기점이 사물 자체이기도 하다.
쇼펜하우어에게 사물 자체는 의지이다. 의지의 작용과 신체의 움직임은 어떤 원인에 의해 연결된 서로 다른 두 가지가 아니다. 이 둘은 동일하다. 신체적 활동은 의지가 객관화된 활동 즉 의지가 직관에 나타나는 활동일 뿐이다. 신체란 공간과 시간에서 객관화된 의지다. 인간을 좌지우지하는 것은 무의식적인 생의 의지다. 오직 의지만이 불변의 것이다. 의지는 우리의 모든 표상의 근저에 놓여있다.
의지는 자유로운가? 전체로서의 세계의지는 자유롭다. 세계의지에 제약을 가할 수 있는 것은 세계의지 자체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개체들의 의지는 자유롭지 못하다. 그것은 상위의 전체 의지에 의해 규정되기 때문이다.
쇼펜하우어는 독일 관념론을 끊임없이 비방했다. 관념론자들에게 궁극적 절대자는 정신, 즉 목표를 향해 자신을 전개해 나가는 이성이다. 쇼펜하우어에게 절대자는 맹목적 의지 즉 비이성적이고 비합리적인 세계근거다. 이성이 아니라 비이성이, 정신이 아니라 의지가 궁극의 절대자이다. 이성은 비이성적 의지의 도구에 불과하다.
쇼펜하우어의 업적 중 하나는 인간 의식의 이면에 대한 안목을 철학에 제공한 것이다. 서양학문에서 무의식의 철학과 심리학으로 나아가는 길을 개척한 사람이 쇼펜하우어다.
Ⅱ. 쇠렌 키르케고르 : 1813 ~ 1855
키르케고르는 시인이자 사상가다. 사상가로서의 키르케고르는 자신의 본질적인 생각을 말하려 할 때 동시에 시인이 될 수밖에 없었다. 모든 보편적인 것, 모든 추상적인 것을 거부하기 때문이다. 키르케고르 이전의 대부분의 철학은 거대한 보편적 물음을 다룬다. 개별적이고 구체적인 물음은 보편적 원리에서 저절로 도출된다.
키르케고르는 진정한 삶의 문제란 언제나 실천적인 개별문제의 유형이라고 보았다. ‘특정한 인간인 내가 특정한 상황에서 이런 일을 할 수 있는가?’ 가 참된 문제다. 이것은 실존적 문제다. “객관적 사유는 주체와 그 실존에 무관심하지만, 실존적 존재로서의 주관적 사상가는 자신의 사유에 관심을 가지며 그 사유에서 실존한다.”, “실존과 본질적 관계를 맺는 인식만이 본질적 인식이다.”
키르케고르는 종교적 해명을 추구하는 사람이나 철학적 물음을 제기하는 사람들로부터 객관적 지주를 빼앗아 버리며, 모든 개인을 각자의 실존이 지닌 불확실하고 모호한 심연으로 되던져 버린다.
20세기 철학에서 실존철학이나 기초존재론과 관련된 모든 사상은 키르케고르를 떠나서 생각할 수 없다. 이미 ‘실존철학’ 이라는 명칭이 키르케고르의 ‘실존적 사상’과 명백히 연결되어 있다. 키르케고르의 고독, 내던져 있음, 부조리, 인간존재의 기본 사실로서의 불안 등은 마르셀에서 까뮈에 이르는 일련의 사상가들에게서 다시 나타난다. 이런 사상적 모티프들은 현대 예술과 서정시, 희곡작품들에서 두드러지게 표출된다. 이런 모티프들이 더욱 발전하면, 본질적으로 종교적 색채를 지닌 키르케고르의 실존이 무신론자인 샤르트르와도 연결될 수 있다. 키르케고르 이후의 세계는 그 이전의 세계와 다른 모습일 수밖에 없다.
Ⅲ. 프리드리히 니체 : 1844 ~ 1900
니체의 철학은 쇼펜하우어의 것과 마찬가지로 의지의 철학이다. 니체에게 세계의 본질은 의지, 좀 더 정확히 말하면 힘에의 의지이다. 그리고 그 이외에는 아무것도 아니다. 니체는 일체의 형이상학을 거부한다. “신은 죽었다.” 니체가 차라투스트라를 통해 한 이 말은 그의 사상의 요체다. 영원한 이념, 사물 자체, 피안 등은 모두 망상이나 환영, 착각에 지나지 않는다.
니체는 세계를 일정한 크기를 가진 힘의 덩어리로 간주한다. 그 안의 존재자는 헤아릴 수 없이 많지만 무한하지는 않다. 시간은 무한하다. 따라서 사물들은 언젠가 이미 나타났던 것일 수밖에 없다. 니체가 영원회귀를 말하는 이유가 이것이다. 만물이 영원히 회귀한다는 사상을 받아들이고 긍정하는 것,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가장 강렬한 긍정의 형식이다.
니체는 냉철한 비판적 철학자는 아니었다. 그는 증명을 제시하지 않았다. 단지 새로운 믿음을 선언하고 제시할 뿐이었다. 현대 사상가 중 누구보다 니체를 집중적으로 연구한 사람은 마르틴 하이데거다.
제 4장 신칸트주의
“거의 60년간 조용하고 고독한 인생을 살아온 쾨니히스베르크 출생의 이 위대한 인간, 이 스코틀랜드인의 후예는 1781년 유명한 《순수이성비판》을 내놓아 세상을 ‘독단의 잠’에서 깨웠다. 그때부터 오늘날까지 ‘비판철학’은 그 지배적 권좌를 변함없이 유지해 왔다. (.....) 쇼펜하우어의 철학은 낭만주의의 물결을 타고 잠시 성행했으며 (.....) 1859년 이후에는 진화론이 대두하여 이전의 모든 것을 일소해 버렸다. 그리고 19세기 말에는 니체의 통쾌한 우상파괴의 철학이 무대를 장악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표면의 부차적 흐름이었을 뿐, 그 저변에서는 칸트주의의 억세고 부단한 조류가 깊게 흐르고 있었다. p824”
칸트사상의 재성찰 움직임은 자연과학 분야에서 비롯되었다. 독일을 포함한 유럽 여러 나라에서 칸트 르네상스가 시작되었고 무수한 칸트 관련 논문이 쏟아져 나왔다. 이러한 신칸트주의는 곧 여러 학파로 갈라졌지만 몇 가지 공통점이 있다.
칸트를 이해한다는 것은 칸트를 되풀이하는 것이 아니라 그를 넘어선다는 것이다. 신칸트주의자들이 무엇보다 비판한 것은 칸트의 사물자체였다. 사물자체를 칸트이후 나타난 모든 오류와 오해의 근원이라 보았다. 칸트의 주요 관심사는 인식 이론이 아니라 실천적 윤리적 문제였다. 그런데 많은 신칸트주의자들은 인식론적 문제에 주안점을 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