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철학사
한스 요아힘 슈퇴리히 지음, 박민수 옮김 / 자음과모음(이룸) / 200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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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7부 20세기 철학 사상의 주요 방향

 

제 2장 현대 철학의 주제와 문제

 

이 책의 저자는 20세기의 철학이 경험과학과 긴밀할 뿐 아니라 긴밀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7부 2장을 지금까지와 달리 인물이 아닌 주제 영역에 따라 나눈 것도 이 때문이다. 그런데 읽어갈수록 정말 그래야 하는지 잘 모르겠다. 다만 저자의 취향과 편향 때문은 아닌가 의심이 든다.

 

 

Ⅰ. 인간의 모습 (철학적 인간학)

 

칸트에 의하면 철학이 답해야 하는 세 가지 물음은 하나의 물음으로 집약될 수 있다. 그것은 ‘인간이란 무엇인가?’ 다.

 

 

Ⅱ.언어

 

20세기가 지나는 동안 언어는 철학의 핵심주제가 되었다. 언어는 인간의 인식과정에서 핵심적 역할을 하는데, 칸트는 이것을 간과했다. 칸트와 동시대인인 하만(1730~1788)은 “내게 중요한 문제는 ‘이성이란 무엇인가?’가 아니라 ‘언어란 무엇이냐?’ 이다. (....) 언어가 없다면 우리는 이성을 갖지 못할 것이다. 말이 없다면 이성도 없고 세계도 없다.”고 칸트를 비판하며 인식비판에서 언어비판으로 이행할 것을 주장했다. 또 다른 동시대 사상가인 헤르더(1744~1803)는 이성은 언어에 구속되어 있으며, 이성은 원칙적으로 언어적이라고 말했다. 이성은 경험과 역사 그리고 관심의 구속을 받는다. 실제로 언어에 관한 자립적 학문은 이 시대부터 발전하기 시작했다.

 

오늘날 지구상에는 최소한 5000개의 언어가 있다. 언어의 다양성보다 철학적으로 더 흥미로운 것은, 이런 모든 언어에 일정한 본질적 특징이 공통적으로 존재한다는 점이다. 이른바 언어적 보편자가 존재한다.

 

훔볼트(1767~1835)는 철학의 중심물음이 칸트가 제기한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것에 동의하면서, 인간이란 “언어를 통해서만 인간이다” 고 주장했다. 인간이 세계를 자신의 것으로 만들고 또 세계 안에서 방향을 잡아 나아가는 행위는 언어를 통해 이루어진다. 인간의 세계는 언제나 언어에 의해 매개되어 있다. 이 언어는 고정된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운동하는 것으로 오직 개개 인간의 생생한 발화 행위에서만 존재한다.

 

소쉬르(1857~1913)는 언어 고찰에 있어 패러다임의 전환을 일으키며 오랫동안 영향력을 행사했다. 소쉬르는 파롤parole 과 랑그langue를 구분한다. 파롤은 개인이 순간순간 사용하는 일회적이고 생생한 언어를 가리키며, 랑그는 기호와 규칙으로 이루어진 언어체계, 즉 모든 개인이 공유하고 있지만 언어공동체에 속하는 개인들의 총체에서만 완전하게 실존하는 체계를 가리킨다. 소쉬르에 의하면 모든 언어적 기호는 이중적 성격을 갖는다. 모든 언어에는 음성 형태, 즉 기표(시니피앙 signifiant)와 기의(시니피에 signifié)가 융합되어 있다. 두 요소의 결합은 임의적이고 우연적이다. 소쉬르는 구조주의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언어가 철학의 중심이 된 것은 오랜 역사적 발전의 결과이다. 이 과정에서 비트켄슈타인(1889~1951) 만큼 커다란 기여를 한 철학자는 없을 것이다. 무엇보다 현대철학에서 ‘언어적 전회’라는 말이 흔히 사용되는 것은 그의 사상 때문이다. 비트켄슈타인은 모든 텍스트를 독일어로 썼지만 그의 주요 활동 무대는 영국이다. 이것은 비트켄슈타인을 현대 영미철학자의 대표자로 간주하는 이유 중 하나가 될 것이다.

 

비트켄슈타인은 『논리-철학 논고』의 서문에서 “본질적인 점에서 문제들을 최종적으로 해결했다”고 쓰며, 자신이 2000년 이상 지속 되어온 철학의 난제를 해결했다고 믿었다. 그러나 후기 비트켄슈타인은 자신의 오류를 인정하고, 세계와 사상 및 명제에 의한 그 모사 사이에 명백한 관계가 있다는 『논고』의 생각 (그림이론)을 버린다. 사후 출간된 『철학적 탐구』에서 비트켄슈타인은 언어를 이루는 단어와 문장들은 대개가 다의적이고 모호하며 부정확하다고 생각했다. 단어의 의미는 그것이 사용되는 방식에 달려있다.(놀이이론)

 

‘언어적 전회’ 라는 간명한 표어는 철학적 문제들이 철학적 언어의 문제로 전환되기 시작했음을 가리킨다. 이런 철학의 대표적 집단은 빈학파이다. 그들에게 철학이란 명제나 그것들의 논리적 상호 관계를 명확히 하고 의미 있는 명제를 의미 없는 명제와 구분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활동이다. 의미 있는 명제란 참, 거짓이 명확하게 구분 가능한 명제이다. 예를 들어 칸트처럼 “현상 세계의 이면에는 사물 자체의 영역이 있다”는 식의 명제는 무의미하다. 無나 영혼, 세계정신 같은 단어들도 무의미하다. 빈학파는 이렇게 형이상학의 뿌리에 도끼날을 박았다.

 

오스틴(1911~1960)은 언어의 수행성을 주장했다. 언어에는 진술적인 것도 있지만 수행적인 것도 있다. “내가 약속한다”는 말은 곧 약속의 행위 자체이기도 하다. 오스틴은 이것을 ‘언어행위 Speech Act’ 라 불렀다.

 

 

Ⅲ. 인식과 지식

 

칸트의 활동에서 신칸트주의 번영에 이르기까지 100년 이상 인식론은 철학의 중심을 이루었다. 그 후 철학은 인식 문제를 외면하지는 않았지만, 그 초점을 두 가지로 이동시켰다. 하나는 언어, 특히 인식에서의 그 역할이었으며, 다른 하나는 과학 즉 인식이 계획적, 방법적으로 추진되고 점진적 성공을 거두는 영역이었다. 이렇게 해서 인식론은 과학론이 되었다.

 

1. 신실증주의

 

실증주의란 특정한 철학이론이나 학파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일정한 철학적·과학적 기본 입장을 가리킨다. 철학과 관련해서 합목적적인 태도는 실증적으로 주어진 것, 명백히 지각될 수 있는 것, 감성적 경험에 의해 확인될 수 있고 관찰될 수 있는 것만 중시하는 태도이다. 오귀스트 콩트(1798~1857)가 실증주의란 명칭을 철학에 도입했지만, 그것이 가리키는 내용은 아주 오래된 것이었다. 정신사에 등장한 사상조류 중에서 주어진 것만을 중시해야 한다는 일반적 요청을 내세우고 또 우리 인식에 주어지는 것은 감각적 인상들만으로 이루어진다는 견해를 표방하는 조류는 모두 실증주의라 불릴 수 있다. 실증주의는 언제나 형이상학을 거부해 왔다.

 

신실증주의란 명칭은 19세기 말에 시작되어 20세기 중반까지 지속된 하나의 철학적 학파를 지시한다. 이 학파는 ‘논리실증주의’나 ‘논리경험주의’라고도 불린다. 이 학파에 속하는 모든 사상가에게 논리학은 각별한 역할을 한다.

 

2. 새로운 논리학

 

기호논리학은 다른 모든 사실과학들과 달리 하나의 이론 체계가 아니다. 기호논리학은 하나의 인공 언어에 비교될 수 있다. 기호논리학은 기호들과 이 기호들의 사용규칙을 포함하는 하나의 체계다. 그러나 이런 언어구성에서는 개별 기호들이 우선은 해석되지 않고 있으므로 기호논리학은 차라리 언어의 골격 내지 도식이라 불려야 할 것이다. 이 기호들은 응용논리학의 영역에서야 구체적 내용을 지니게 된다. 기호논리학은 수학의 새로운 토대 정립에 제일 먼저 활용되었다.

 

간단히 말해 기호논리학은 우리가 수학시간에 배운 이런 표들을 생각해 보면 이해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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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러셀에서 분석철학까지( 신실증주의 : 빈학파 → 분석철학 : 일상언어철학)

 

러셀(18721970)은 제대로 기능할 수 있는 인식수단은 자연과학뿐이라고 생각했다. 철학이 다루는 문제는 도덕이나 종교가 아니라 과학에서 차용되어야 한다. 러셀은 만년에 이를수록 점점 더 실증주의로 기울어졌고 실증주의에 의해 인정되지 않은 모든 지식영역에 대해 회의적 태도를 견지했다. 러셀에 따르면 이 세계에는 물질도 없고 정신도 없고 자아도 없으며 오직 감각자료만이 존재한다. 우리 지식의 유일한 원천인 자연과학은 감각자료 외에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

 

20세기 철학유파의 하나로, 통일적이고 강력한 집단이었던 신실증주의학파는 ‘빈학파’라고 자처했던 일군의 학자들을 중심으로 형성되었다. 빈학파는 1938년 이후로는 대개 ‘분석철학’으로 지칭되며 때로는 ‘토대연구’라고도 불린다. 현대 논리학과 결부된 모든 철학은 분석철학이다. 이 학파는 기호논리학을 체계화했으며, 철학자들로 하여금 언어라는 현상에 주목하게 하여 새로운 통찰을 얻어냈다. 이들은 인식의 문제를 공공연하게 구호로 내걸고, 증명가능하고 확실한 인식, 즉 과학을 주장했다. 과학적 인식의 이론, 즉 과학론은 이 학파의 주요 관심사의 하나였다.

 

4. 두 명의 회의주의자

 

과학적 인식의 가능성에 대해 명백히 회의주의적인 태도를 가진 사상가로는 쿤(1922~1996)이 있다. 자연과학적 인식의 진보는 단계적·연속적으로 이루어지지 않고 변혁과 비약의 형태로 수행된다. 패러다임에 접합되지 않는 현상들은 근본적으로 새로운 사고와 이론적 발상을 요구하며 결국 패러다임의 교체를 강제한다.

 

5. 포퍼와 비판적 합리주의

 

포퍼(1902~1994)에 의하면, 세계 사건은 엄격하게 결정되어 있지 않고 모든 면에서 확실하게 예정되어 있지도 않으며(비결정론) 완전하게 인식될 수도 없다. 지식이란 언제나 잠정적, 가설적 성격을 갖는다. 이런 이유에서 포퍼는 확증 대신 반증을 내세운다. 가설이란 확증에 의해 입증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반증을 통해 반박될 수 있는 것이다.

 

아인슈타인(1879~1955)은 이론적 개념들은 우선 인간의 정신, 인간의 상상력에서 자유롭게 창조되며 이것이 나중에야 경험에서 검증되는 것으로 보았다. “내 확신에 의하면, 우리의 사유와 언어적 표현에서 등장하는 개념은 모두가 사유의 자유로운 창조물이며 감각적 체험에서 귀납적으로 획득될 수는 없는 것이라고 주장할 수밖에 없다. 다만 우리는 일정한 개념 및 개념 연관들을 습관적으로 감각적 체험에 굳게 결부시키며 그 결과 감각적 체험의 세계와 개념 및 언명의 세계 사이의 간극을 의식하지 못하기 때문에 이런 말을 하기가 쉽지 않은 것일 뿐이다. 예컨대 모든 계열의 수란 분명히 인간 정신의 고안물, 다시 말해 일정한 감각적 체험의 정리를 편리하게 하려고 인간이 창조한 도구에 지나지 않는다. 수의 개념을 체험 자체로부터 이를테면 자연스레 생성시키는 방도란 존재하지 않는다. 여기서 내가 수의 개념을 선택한 것은 그것이 과학 이전의 사유에 속함에도 불구하고 구성적 성격의 인식을 용이하게 하기 때문이다.”

 

포퍼는 과학의 가설들은 순간적이고 직관적인 깨달음에 의해 획득되는 것이며, 이것이 추후에 경험적으로 검증될 수 있는 가설로 변환된다고 보았다.

 

6. 해석학

 

해석학Hermeneutik이란 말은 헤르메스 신에서 유래했다. 헤르메스는 신들의 뜻을 전달할 뿐 아니라 이를 이해할 수 있게도 해주어야 했다. 그래서 헤르메스란 이름은 ‘설명하다, 해석하다, 석의하다’ 란 의미와 연결되어 있다. 20세기에 들어와 해석학은 철학의 고유한 학파를 형성하는데, 대표적 사상가는 가다머(1900~2002)이다.

 

가다머에게 해석, 즉 이해란 보편적 현상이다. 해석 내지 이해란 전승된 문헌과 정신적 산물의 수용은 물론 모든 인간 지식과 관련해서 기초적 성격을 갖기 때문이다. 모든 지식에는 기초적인 ‘선이해’가 선행되어야 한다. 가다머 사상의 중심에 놓인 것은 언어이다. “언어적으로 구성된 우리의 세계 정향에 속하지 않는 것이 무엇이겠는가? 인간의 모든 세계정향은 언어 습득에서 완성된다. 하지만 그것뿐이 아니다. 우리라는 세계-내-존재의 언어성은 경국 경험의 전체 영역을 표현한다.”

 

7. 구성주의

 

구성주의자들의 사유는 우리가 현실이라 믿는 것은 실제로 우리가 고안한 무엇, 우리 자신의 구성이 아닐까 라는 물음을 핵심 과제로 삼고 있다. 구성주의의 사상적 선구자 중 가장 중요한 인물로는 칸트를 꼽을 수 있다. 칸트는 현실이란 바깥에서 발견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인식 장치에 의해 구성되어 있다고 말했다.

 

8. 진화론적 인식론

 

진화론적 인식론자들은 이른바 ‘가설적 실재론’을 기본으로 공유한다. ‘인간에게는 궁극적 확실성을 지닌 지식이 허락되지 않는다. 인간은 틀릴 수 있으며, 인식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이 점은 학문의 전체 영역에서 타당성을 갖는다.’ 는 테제를 바탕으로 한다. 따라서 그 타당성을 엄밀하게 입증할 수 없지만 필연적이며 참된 것이라고 전제되는 ‘요청’이 필요하다.

 

9. 인식의 한계

 

20세기 후반에는 사유의 중심이 인식의 한계에 대한 물음으로 옮겨진다. 괴델(1906~1978)은 『수학의 원리』에서, 전개된 자연수의 공리체계는 비록 참이기는 하지만 이 체계의 틀 내에는 입증될 수 없는 명제들이 포함되어 있음을 간파했다. 어떤 공리체계에서 우리 인식을 확정짓는 일이란 원칙적으로 불가능하다는 점이 괴델을 통해 알려지게 되었다. 괴델의 ‘불완전성 정리’는 과학이란 현실을 정확하고 완전하며 일관되게 서술할 가능성을 갖지 못한다는 것을 확인시켜 준 것이다.

 

한편 하이젠베르크(1901~1976)는 양자역학을 통해 인간 인식의 한계를 확인했다.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 원리’에 의하면 한 미립자의 위치와 운동량은 상보적인 관계에 있다. 둘 중 하나가 정확하게 측정될수록 다른 하나의 측정은 정확성이 떨어진다. 측정 행위 자체가 미립자의 상태를 변화시키기 때문이다. 미립자의 상태에 대해서는 정확한 진술이 불가능하다. 다만 아주 많은 미립자의 상태에 대해서만 타당한 통계적 진술을 할 수 있을 뿐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단순히 우리 인식에 한계가 있다는 사실이 아니라 자연사건에는 불확실성의 요소가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그에 따라 인과성 개념은 상대화되며, 빈틈없는 결정론이란 견지될 수 없는 이론으로 전락한다.

 

 

Ⅳ.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잡다한 이야기가 있는데, 포퍼와 공리주의에 대해서 짧게 요약하고 넘어간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20세기는 철학의 ‘다성적 세기’ 라 너무 많은 학파들과 사상가들이 등장한다. 그럼에도 그다지 눈이 가는 사람은 없다. 다만 괴델의 불완전성 정리와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 원리가 매우 인상적이다. 체계 혹은 세계는 불완전하다. 세계에 대한 우리 인식의 한계는 세계 자체의 한계이기도 하다. 물론 이것은 인식론에 관한 철학이고, 여기서 곧바로 무엇을 해야 하는가에 대한 윤리적 해답을 찾기는 어렵다. 그러나 무엇을 하지 말아야 하는가에 대한 단초는 얻을 수 있지 않을까?

 

포퍼는 역사주의를 비판했다. 역사 발전의 근본 법칙을 인식하고 이를 바탕으로 미래 발전에 관해 근거 있는 진술을 전개하는 것이 가능하며, 이로부터 올바른 정치적·사회적 행위의 지침을 도출할 수 있다고 보는 입장이 역사주의다. 계시된 신의 의지나 선택받은 민족의 승리, 변증법적 법칙 또는 필연적인 사회경제적 발전이 역사의 시작과 끝을 이룬다고 주장하는 견해들이 그런 예이다. 『열린사회와 그 적들』의 1권은 이런 견해 형성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플라톤 사상을 공박하고 있으며, 2권은 헤겔과 마르크스 및 그 후계자들을 비판한다.

 

영미의 공리주의는 처음 들을 때는 매우 윤리적으로 들린다. 벤담이나 밀은 어떤 행위의 모든 당사자에게 가능한 한 최대의 이익 내지 최소의 피해를 가져오는 행위는 선하다는 원칙을 견지했다. 이로움이란 적극적으로는 행복이나 쾌락을 얻는 것에서 존재하며, 소극적으로는 고통이나 불쾌를 피하는 데서 존재한다. 따라서 언제나 행위의 결과가 중요하다.

 

그러나 이익, 유용성, 행위의 결과를 기준으로 고안한 벤덤의 판옵티콘은 푸코의 해석처럼 감시와 처벌이라는 결과를 낳았다. 윤리적 의도가 가장 비윤리적인 결과를 낳았던 것이다. 특히 결과를 최고로 중시하는 공리주의의 원칙이 최악의 결과를 낳았다는 것은 아이러니 그 자체다.

 

Ⅴ.뇌, 의식, 정신

 

플라톤 시대와 기독교적 중세에서 20세기에 이르기까지 서양 사상에서는 영혼과 육체, 정신과 물질의 형이상학적 이원론이 지배적이었다. 이런 대립은 인간도 반으로 갈라 놓았다. 일상적 욕구로 가득 찬 신체는 위대한 사상가들이 주목할 가치가 없는 영역이었다. 그러나 데카르트적 극장은 수많은 비판에 직면해 왔고, 20세기 혹은 20세기 후반의 철학사상의 특징은 데카르트적 이원론에서 탈피하는 것이다.

 

신경과학, 뇌과학 등의 발전으로 정신의 비밀은 풀릴 수 있을까? 이 책의 저자는 20세기의 철학이 경험과학들과 긴밀히 협력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20세기 철학 전체를 과학의 관점으로 바라보는 성향이 있지만, 그 역시 이 문제에 관해서만은 영원한 수수께끼로 남을 것이라 전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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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철학사
한스 요아힘 슈퇴리히 지음, 박민수 옮김 / 자음과모음(이룸) / 200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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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7부 20세기 철학 사상의 주요 방향

 

 

20세기는 다양한 학문이 비약적인 발전을 거듭했다. 철학도 이 학문들의 성과에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은 물리학이다. 양자역학과 상대성 이론은 물질 개념 자체를 바꾸어 놓았다. 유물론은 ‘물’ 의 개념 자체를 다시 설정해야 했다. 그 외에도 생물학에서 다윈의 진화론이 상식으로 자리 잡았고,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 소쉬르의 언어학 등이 커다란 영향력을 발휘했다. 특히 20세기 후반에 들어와서는 철학의 가장 중요한 주제 중 하나가 언어이다. 철학은 이 모든 문제를 다루어야 한다. 따라서 철학자들은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들과 협력해야 한다. 최소한 이런 점에서 ‘철학의 과학화’란 상당한 실재성이 있다.

 

아직 7부 2장을 다 읽지 못했지만, 저자는 20세기의 철학이 더 이상 독자적일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제 1장 20세기 전반의 사상가와 학파

 

20세기의 철학은 다양한 학파들이 병립해서 각축했다. 20세기 철학은 음악처럼 ‘다성적 세기’ 라 불릴 만하다.

 

 

 

Ⅰ. 생철학과 역사주의

 

생철학은 계몽주의와 합리주의에 반발하여 등장한 정신운동이다. 사유만으로는 포착할 수 없는 ‘생생한’ 삶을 파악하고자 한다. 생철학자들은 쇼펜하우어와 니체의 사상에 공통적으로 의존하는데, 이 두 철학자는 19세기의 계몽적 이성을 철학의 왕좌에서 몰아낸 장본인들이다.

 

현대 생철학을 최초로 발전시킨 사람은 프랑스의 앙리 베르그송 (1859~1941) 이다. 베르그송은 공간과 시간의 관계를 출발점으로 삼는다. 공간은 존재하는데 반해 시간은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생성중이다.

 

공간에 상응하는 인식능력은 지성인데 반해 시간의 순수한 지속은 오직 직관에 의해서만 포착된다. 지성은 ‘제작하는 인간 homo faber’의 기관이며, 직관은 ‘사유하는 인간 homo sapiens' 의 기관이다. 지성과 달리 직관은 실체적 행위에 기여하지 않는다. 지성은 실천과 연관해서 기능하므로 철학은 오로지 직관에 의해서만 시작될 수 있다. 철학에는 강제적인 논리적 증명이 결여될 수밖에 없다. 철학자는 자신이 직관해 의해 인식한 것을 직관적이고 영상적으로 서술하고 그렇게 해서 다른 사람들이 직관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 이상은 아무것도 할 수 없다.

 

 

Ⅱ. 실용주의

 

실용주의와 더불어 철학사에 최초로 미국이 등장한다. 윌리엄 제임스 (1842~1910)는 미국 실용주의의 창시자였으며, 국제적 중요성을 지닌 최초의 미국철학자이다. 『여인의 초상』의 작가인 헨리 제임스의 형이기도 하다.

 

'실용주의Pragmatismus' 는 그리스어 pragma (행동, 행위)에서 유래한다. 제임스의 정의에 따르면 실용주의란 “최초의 사물, 원리, 범주 또는 이른바 필연성이란 것을 도외시하고 마지막 사물, 결실, 결과 또는 사실에 주목하려는 입장‘ 이다. 실용주의의 특징이 되는 것은 무엇보다도 진리의 특수한 개념이다. 즉 여기서는 유용성과 가치 또는 성공이 진리의 기준이 된다.” 현재 우리의 생각과 비슷하다. 제임스가 profit 이나 result처럼 미국인들이 즐겨 쓰는 표현을 자주 사용한 것도 당연해 보인다.

 

미국 실용주의의 두 번째 대표자는 존 듀이(1859~1952)로, 자연과학과 실천적 경험에만 관심을 쏟았고 이 영역을 초월하는 모든 것은 철저히 배제했다. 그에게 이론이란 행위를 위한 도구였으며, 사상에는 도구적 가치만이 부여되었다. 따라서 듀이의 철학은 ‘도구주의’ 라 불린다.

 

 

Ⅲ. 새로운 존재론과 새로운 형이상학

 

아리스토텔레스에서 스콜라철학에 이르기까지 서양철학을 지배한 전통적 존재론은 하나의 보편자가 모든 사물에 형태를 부여하는 규정적 본질이라는 명제에 근거한다. 지고한 보편자에서 모든 개별자가 도출될 수 있다고 믿었으며, 경험적 현실을 초월하려 시도했다.

 

그러나 칸트를 정점으로 하는 비판적 인식론은 전통적 존재론의 전제를 궁극적으로 타파했다. 칸트 비판의 결과는 그 누구도 배제하거나 되돌릴 수 없었다. 따라서 새로운 존재론은 비판적 존재론일 수밖에 없다. 이는 무엇보다 새로운 존재론이 선험적 개념이나 방법론에서 출발할 수 없다는 것을 뜻한다. 존재의 범주는 선험적으로 인식될 수 없다. 문제가 되는 것은, 존재범주들이 우리의 인식범주들과 일치하는 것이라면 인식범주로부터 존재범주가 도출될 수 있는가 여부이다.

 

실재하는 세계를 인식하기 위해 하르트만(1882~1950)의 ‘비판적 실재론’이 취하는 방식은 거의 모든 전통적 존재론과 두 가지 점에서 차이를 보인다. 첫 째, 하르트만에게 실재세계란 전적으로 인식될 수 없는 것도 아니고 전적으로 인식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실재세계는 일정한 한계까지는 개념적으로 인식될 수 있다. 둘 째, 하르트만은 철학이 흔히 범하는 오류, 즉 특정한 존재 영역에서 타당한 것으로 인식된 원리를 아무 검증 없이 다른 영역에 전용하는 오류를 피하려 한다.

 

현대의 형이상학자들은 경험주의자들이다. 이들은 모두 경험에서 출발하며 선험적 인식을 거부한다. 그렇지만 이들은 경험을 외적 경험, 즉 감성적 경험으로 국한시키지 않고 지적인 경험을 인정한다. 이들은 생철학이나 현상학과는 달리 직관적이 아니며, 합리적, 지성적, 이성적이다. 새로운 형이상학은 존재자 일반을 파악하는 데 중점을 둔다. 존재를 직접적으로 포착하려 한다는 점에서 구체적인 것을 지향하는 거대한 실재론적 사유운동과 같은 맥락 속에 있다. 20세기의 형이상학은 종합적이고 포괄적이고 보편적인 양상을 띤다.

 

 

Ⅳ. 현상학

 

생철학이나 실용주의 등의 20세기 철학 대부분은 칸트에게서 이탈하려는 경향을 지니고 있었다. 현상학도 마찬가지다. 후설의 현상학은 실존주의의 모태가 되었다.

 

현상학Phänomenologie 이란 무엇인가? 이 말은 그리스어 phainesthai (나타나다, 밝혀지다)에서 유래했다. 어원을 철학적 맥락으로 보면, 감관에 현상한다는 의미를 갖는다. 철학에서 현상학이란 말은 특히 헤르더와 헤겔에 의해 사용되었다.

 

칸트는 현상phenomenon을 사물 자체noumenon에 대립시켰다. 후설(1859~1938)은 현상학을 사실학문이 아니라 본질학문으로 정초하려는 의도를 갖고 있었다. 본질을 인식하기 위해서는 특수한 태도가 필요하다. 후설은 자연적인 인식 태도를 중지시키고 전체 자연세계를 ‘괄호 안에 묶었다.’ 실재 세계 전체를 괄호로 묶고 순수한 사태로 향하는 이 과정을 에포케(판단중지)라 부른다.

 

 

Ⅴ. 실존철학

 

실존주의의 원천은 키르케고르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실존철학자들은 개인과 개인의 구체적 상황에 관심을 집중시키고, 현존재의 근본사실인 불안과 인간의 고독 그리고 인간존재의 극복 불가능한 비극성에 주의를 기울이는데, 이것은 이미 키르케고르에서 나타난 것이다.

 

키르케고르의 사상에 근원을 둔 실존철학자들의 공통점은 첫 째, 실존이란 언제나 인간의 실존이라는 점이다. 실존철학은 인간을 중심에 둔 인본주의적 철학이다. 둘 째, 실존은 언제나 개인의 실존이다. 실존철학은 주관적이다. 세 째, 인간은 사물과 달리 자신의 본질을 스스로 만든다. 인간은 사물과 관련된 범주에 의해 파악될 수 없고 그런 범주에 의해 적절히 해석될 수 없다. 네 째, 방법적으로 실존철학자들은 현상학자들이다. 존재자의 직접적 파악이 주 관심사이다. 그러나 후설이 구체적 실존을 판단중지한 것과 비교하면, 실존철학의 출발점과 목표는 현상학과 다르다. 다섯 째, 실존철학은 역동적이다. 실존은 ‘시간-내-존재’ 다. 실존은 불변이 아니며 시간과 시간성에 구속되어 있다. 여섯 째, 현존재는 언제나 ‘세계-내-존재’ 이며, ‘타자와 연결된 존재’ 이다. 실존철학은 인간을 구체적 상황에서 고찰하고 세계 및 타자와 연관시킨다.

 

카를 야스퍼스(1883~1969)의 기본 개념에는 포괄자, 실존, 초월자 등이 있다. 야스퍼스에 의하면 인간은 객관적으로 인식될 수 있는 모든 것 이상의 존재다. 실존은 완결된 학설의 개념들에 의해 서술될 수 없다. 실존은 자유, 소통, 역사성의 범주에 의해 해명될 수 있다. 실존이란 존재가 아니라 존재할 수 있음 이다. 실존은 끊임없이 선택의 기로, 결단의 기로에 서 있다. 그러므로 실존은 자유롭다. 실존은 결코 사유될 수 없고 오직 행위에 의해서만 실현될 수 있다. 실존이란 “선택의 순간에 근원에서 일어나는 자기 창조” 이다. 인간은 아무도 혼자서는 행복할 수 없다. 실존은 다른 자기존재와 실존적 유대관계를 맺는 가운데서만 실현될 수 있다. 실존은 또한 언제나 상황 속에 있다. 실존이 직접적으로 실현되는 상황이 존재한다. 죽음과 고뇌, 투쟁, 죄책 같은 것들에서 실존이 실현된다. 우리가 눈을 똑바로 뜨고 이런 상황을 받아들일 때, 우리는 완전한 우리 자신이 된다.

 

샤르트르(1905~1980)는 이해하는 실존이란 단순하고 순수하며 적나라한 존재 즉 존재 자체, “어떤 무엇인가가 아니라 단순히 있는” 무엇이다. 사물은 어떤 무엇이지만 인간은 확정된 존재가 아니기 때문에 어떤 무엇이 아니다. 인간은 우선은 ‘무無’ 이다. 인간은 무를 바탕으로 지속적인 창조를 거듭하는 가운데 비로소 자기 자신이 된다. 인간은 “자유라는 선고를 받았다.” 인간은 자유롭다. 인간은 세계 내에서 참여적이 될 수 있다. 그리고 자신의 행위에서 가치를 정립할 수 있다. 인간의 자기실현은 ‘자유로운 기투’를 통해 이루어진다. 그러므로 사르트르의 사상은 인간에게 극도의 책임을 지운다. 자신의 머리채를 붙잡고 무에서 빠져나와야 하며 무의 지속적인 위협을 막아내야 한다. 인간은 홀로 책임을 지며 그 밖의 누구도 특히 신은 그를 돕지 못한다. 더욱이 인간은 자신만 책임지는 존재가 아니라 언제나 동시에 타인에게 책임이 있는 존재다. 하나의 자아와 다른 모든 자아의 불가분의 연관성, 이러한 상호주관성에 사르트르의 윤리학이 근거하고 있다.

 

 

Ⅵ. 존재 물음의 전개 : 마르틴 하이데거 1889~1976

 

오랫동안 하이데거는 실존철학자로 간주되었지만, 하이데거는 이를 거부했다. 하이데거에 처음부터 중요했던 문제는 ‘존재’의 의미다. 하이데거에 의하면 고대철학과 기독교적 서양철학은 인간의 현존재를 사물의 존재양식과 다름없이 규정하려 했다는 점, 즉 인간의 존재를 사물의 나타남과 현존함의 방식으로 이해했다는 점에서 비난받을 만하다. 다시 말해 그들은 존재를 물음의 대상으로 삼지 않았다. 존재 자체는 사물 즉 존재자가 아니다. 존재 자체는 모든 존재자의 근원이며 우리에게 대상으로 맞서 있지 않다. 존재에 대한 물음은 철학에 의해 망각되고 간과되었다. 모든 존재자와 존재 사이의 근본적인 차이가 간과되었다. 이 차이를 하이데거는 존재론적 차이라고 부른다.

 

하이데거는 존재와 존재자를 구분하고, 둘의 차이인 존재론적 차이를 밝히려 했다. 그러나 ‘존재’는 하이데거 해석자들에게 난제 중의 난제다. 무수한 논문들에도 불구하고 이 개념에 대한 일치된 견해는 없다. 존재는 부정신학의 신개념을 연상시킨다. 신에 관해서는 아무것도 직접적으로 진술할 수 없다. 존재에 관해서도 마찬가지다. 언제나 무엇이 존재가 아닌가 만을 서술할 수 있다.

 

여하튼 하이데거의 존재에 접근하려면, 그가 ‘현존재Dasein’라 부르는 인간에서 시작해야 한다. 인간만이 모든 존재자 중에서 이미 ‘존재’를 이해하고 있는 존재자이기 때문이다. 현존재란 본질적으로 ‘세계-내-존재’ 다. 인간 현존재는 언제나 이미 그의 의지에서 벗어나 있고 교체될 수 없는 특정한 장소에 있다. 인간 현존재는 “거기에 내던져져 있다.” 세계 내 현존재는 근심, 하이데거의 표현으로는 ‘염려Sorge’라는 존재 양식을 갖고 있다. 또한 인간의 근본경험은 ‘불안Angst’ 이다. 불안해 하는 것은 현존재가 세계 내 존재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현존재는 ‘죽음으로 향한 존재’ 로 존재한다. 절대적 한계인 죽음과의 마주침에서 인간 현존재의 고유한 의의와 간절함이 생겨난다. 하이데거의 사상에서 죽음은 인간 존재의 근거이자, 한계, 그 지평인 시간과 시간성을 해명하는 열쇠이다. 시간성은 본래적인 배려의 의미이고 현존재의 근본 사건이다.

 

하이데거는 20세기 사상가 중 가장 위대한 언어사상가이다. 하이데거에게 언어는 단순한 소통과 이해의 수단이 아니다. 언어는 단순히 인간의 도구가 아니라 ‘존재의 집’ 이다. “우리가 언어를 가진 것이 아니라 언어가 우리를 갖고 있다.” 사유의 본질은 언어의 본질로부터 파악될 수 있다. 그리고 언어의 본질은 시의 본질로부터 파악된다.

 

 

Ⅶ. 마르크스주의의 영광과 종말

 

하나의 철학에서 발생하고 그 철학에 근거한 운동이 마르크스주의처럼 거대한 힘을 행사한 것은 역사상 유례가 없는 일이다.

 

유물론적 변증법은 논리학이자 인식론이라는 주장이 있다. 물질적 현실은 변증법에 따라 발전하며 인간 의식의 발전은 그러한 현실적 발전을 반영하는 것뿐이다. 그런데 “사유 과정이 현실의 발전 과정과 실제로 합치하며 따라서 우리가 오류를 범하지 않을 것임을 보장하는 것은 도대체 누구 혹은 무엇인가?” 라는 물음이 제기될 수 있다. 마르크스주의자의 대답은 실천이다. 즉 인식의 토대는 물질과의 실천적 교류이다.

 

마르크스에서 출발하는 모든 사상가, 즉 인간이란 “세계 바깥에 웅크린 존재가 아니라” 사회적 존재라는 마르크스의 인식을 진지하게 다루는 사상가들을 우리는 넓은 의미에서 사회철학자라 부를 수 있다. 마르크스를 단순히 신봉하지 않고 비판적으로 다루는 사상가들을 비판적 사회철학자라 부를 수 있다. 이 비판적 사회철학자는 흔히 프랑크푸르트 학파를 가리킨다. 이 학설은 ‘사회의 비판 이론’으로도 불리는데, 대표자로는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가, 그리고 후일의 하버마스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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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공산당 선언 펭귄클래식 80
칼 마르크스.프리드리히 엥겔스 지음, 권화현 옮김 / 펭귄클래식코리아(웅진)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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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매중지


마르크스 ·엥겔스의 『공산당 선언』은 굉장히 짧습니다. 펭귄클래식 코리아 판으로 45쪽 정도의 분량입니다. 그런데도 이 책 자체는 꽤 두껍습니다. 개레스 스테드먼 존스라는 정치학자가 쓴 서설이 200쪽 가까이 되기 때문입니다. 서설 중 ‘공산주의’ 의 개념에 관한 내용을 조금 옮겨봅니다. 우리나라에서는 빨갱이라는 말로 변형되어 일상용어처럼 쓰이지만, 이 말을 정확한 개념을 가지고 쓰는 사람은 별로 없을 듯합니다.

 

『공산당 선언』의 너무나도 유명한 첫 문장은 “하나의 유령이 유럽을 배회하고 있다. 공산주의라는 유령이.”입니다. 다음은 “구 유럽의 모든 세력들, 교황과 차르, 메테르니히와 기조, 프랑스의 급진파와 독일의 경찰 밀정이 이 유령을 쫓아내기 위해 신성한 동맹을 맺었다.” 로 이어집니다.

 

유럽의 구세력들이 결집하여 결사적으로 쫓아내려 하는 이 유령, 공산주의는 무엇일까요? 공산주의의 어원 자체는 중세 말 기독교에 반기를 든 수도원 결사체들 중 급진파들이 처음 사용했다고 들었습니다. 존스의 서설에서는 범위를 좁혀 이 용어가 현재의 의미를 획득해 나가는 과정을 프랑스 혁명기부터 살피고 있습니다.

 

『공산당 선언』은 1848년 발표됩니다. 선언 자체는 1848년 전 유럽으로 번진 혁명 때문에 큰 주목을 받지 못하고 오히려 묻혀 버립니다. 그렇다 해도 ‘공산주의’는 당시 유럽사회에 널리 퍼진 골칫거리였습니다. 독일의 유명한 백과사전인 『국가사전』1846년 ‘보유’편에는 이런 기술이 있습니다. “독일에서는 지난 몇 년간 온통 공산주의에 관한 이야기밖에 없었다. 공산주의는 누군가가 두려워하고 또 누군가가 두려움을 불어넣기 위해 이용하는 위협적인 유령이 되었다.” 우리가 놀라운 표현으로 받아들이는 “하나의 유령이 유럽을 배회하고 있다. 공산주의라는 유령이.” 는 당시에는 전혀 새로울 것 없는 진부한 수식에 불과했습니다. 그러나 불과 12년 전 인 1834년 『국가사전』초판에는 ‘공산주의’라는 용어가 실리지도 않았습니다. 공산주의가 유럽사회에 두드러진 위치로 떠오르는 과정은 놀랍도록 급속했던 것입니다.

 

공산주의라는 말은 1840년대 초에 널리 쓰이기 시작했습니다. 프랑스의 1830년 7월 혁명 때 재등장한 공화주의 운동의 초급진적 분파를 묘사하기 위한 용어로 사용된 것입니다. ‘재등장한 공화주의’ 라는 표현이 의미하는 것은 이들이 대혁명 당시의 급진 자코뱅이 주장한 공화주의를 계승했다는 것입니다. 자코뱅적 공화주의의 핵심은 ‘평등’입니다. 혁명 당시 생존자(테르미도르 반동이후)의 회상에 의하면 “자신들을 ‘평등파’라 부르는 혁명 공모자들은 불평등이 그대로 남아 있는 한 인민 주권과 고덕한 공화국은 결코 보장될 수 없을 것이라고 믿었다. 따라서 부패한 테르미도르 정부는 2년 전 공포정치를 주재한 공안위원회와 유사한 ‘현자들’의 비상 ‘독재’에 의해 타도되고 대체되어야 했다. 이 기구는 부자들의 재산을 압류하고, 토지를 몰수하고, 재화의 공유를 수립한 연후에 평등주의적이고 민주주의적인 공화국에 참여할 인민에게 권력을 돌려줄 생각이었다.”

 

이 사상이 1830년 7월 혁명으로 형성된 급진 공화주의 협회들에서 재등장한 것입니다. 이들에게 7월 혁명의 결과로 세워진 루이 필립의 ‘7월 왕정’은 배신이었습니다. 루이 필립은 의회 군주정, 유산계급 참정권, 자유방임 경제를 실행하려 했기 때문입니다. 한마디로 부르주아의 권력이 강화된 것입니다. 부르주아 자본주의는 평등과는 관련이 없습니다. 부르주아들이 중시한 것은 개인의 자유, 그 중에서도 사적 소유의 권리와 자유입니다. 자본주의의 단짝은 자유주의입니다. 이 때문에 프랑스 혁명은 거의 100년을 끌었습니다. 빅토르 위고의 『레미제라블』의 주요 배경인 1832년 6월 봉기가 발생한 이유도 이 때문입니다. ABC 회원들이라는 학생들이 마지막 바리케이드 전투에서 전멸합니다. 급진 공화주의 협회는 주로 학생들과 불만을 품은 장인들로 이루어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거듭된 실패에도 불구하고 급진 공화주의 협회들이 계속 반란을 시도하자 결국 1835년 공화주의 협회가 불법화되었으며 공화국에 대한 옹호도 모두 금지되었습니다.

 

공화주의 협회가 불법화되자, 합법을 선호하는 일부 급진 공화주의자들이 1830년대 말 ‘평등주의 공화국’ 대신 평화적이고 비정치적인 대체물로 제시한 것이 바로 ‘공산주의’입니다. 현대사의 관점에서 보면 아이러니하게도 공화주의는 자본주의와 결합하여 온건한 이미지로 살아남고, 공산주의는 독재와 폭력의 이미지로 점철되어 패퇴했습니다. 물론 공화주의는 지금도 양쪽 모두에 사용되고 있습니다. 북한의 공식명칭은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입니다. 우리나라의 영문 표기는 ‘Republic of Korea’입니다.

 

공산주의는 1840년 공적 주목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여기서 공산주의는 사회주의와 합류합니다. 정치 지형이 변화되면서, 평등에 집중하는 급진 공화주의와 노동 문제에 대한 해법으로서 결사에 관심을 기울이는 새로운 사회주의가 합류했던 것입니다. 정치적 차원의 평등을 최고의 가치로 삼는 공산주의가, 사회공동체와 경제적 협동을 지향하는 사회주의와 만났습니다. 노동 문제에 직면하여 불편한 동거를 시작했던 것입니다.

 

이후 공산주의는 새로운 자리매김을 해나갑니다. 공화주의적 뿌리와 분리되면서 프롤레타리아트와 관련됩니다. 1841년 보수주의 프러시아 국가신문은 공산주의를 “현대사회의 산업적 궁핍”과 연결시켰고, 공산주의 사상을 “불행하고 광기에 찬 계급의 비통한 외침”으로 정의했습니다. 1840년대 독일에서 프롤레타리아트는 우리가 지금 생각하는 것처럼 현대 산업세계와 연결되는 것이 아니라 궁핍, 빈곤, 범죄와 연결되었습니다. 이 시대의 프롤레타리아트의 의미는 ‘하층계급’이었습니다. 마르크스는 1843년에 프롤레타리아트를 “자연적으로 나타나는 빈민이 아니라 인위적으로 빈곤화된 사람들이며 .... 사회의 대대적인 해체에서 귀결되는 대중들” 이라고 정의했습니다. 우리가 지금 노동자 계급이라고 이해하는 것과는 사뭇 다릅니다. 산업화의 내부에 포함된 노동자가 아니라 산업화 밖에 내팽겨진 빈민입니다.

 

이 프롤레타리아트가 공산주의와 결부되자 공산주의에 대한 공포가 확산되었습니다. 『공산당 선언』의 첫 문단에서 언급된 ‘구 유럽의 모든 세력들’은 직조공 반란, 농민봉기, 영국의 새 구빈법 등 모든 것의 배후에 공산주의자들이 있다는 두려움을 갖게 되었습니다. “현존하는 세계에 대한 불만의 천둥을 뒤따르는 번개의 섬광 속에서 공산주의의 창백한 유령이 드러났다.” 당시 공산주의가 갖게 된 이미지입니다.

여기에는 공산주의가 프롤레타리아트의 궁핍과 분노를 언어로 표현했다는 두려움, 공산주의가 프롤레타리아트와 동일한 것이라는 두려움이 깔려 있습니다. 1840년대에는 프롤레타리아트를 위험한 계급, 사유재산에 대한 약탈적 적대와 동일시하는 것이 보편적이었습니다. 공산주의라는 유령은 빈부 사이의 전쟁의 징후였습니다.

 

『공산당 선언』에서는 프롤레타리아트에 대한 새로운 이미지가 제시됩니다. 더 이상 궁핍하고 뿌리 없는 빈민이 아닙니다. 프롤레타리아트는 산업화의 산물이며, 공장들과 그들이 모이는 도시들에 의해 단련됩니다. 범죄적이며 부정적인 하층계급으로서의 프롤레타리아트는 ‘룸펜프롤레타리아트’로 따로 분류됩니다. 이것은 엥겔스가 발전시킨 이미지입니다.

 

그러나 부르주아의 재산에 대한 위협은 여전히 남아있습니다. 공산주의자들은 계속해서 “현존하는 모든 사회적 조건들의 폭력적 타도”를 강조했으며, 프롤레타리아트는 이 선고를 실행하는 집행자가 되었습니다. 프롤레타리아트를 폭력과 소위 ‘절도 욕구’와 연결하는 것은 부정되지 않았습니다. 대신 그것은 변증법적 진보로 바뀌었습니다. 진보의 최고 단계는 프롤레타리아의 혁명과 공산주의 목표의 성취입니다.

 

『공산당 선언』이 당장의 효과를 나타낸 것은 아닙니다. 이 선언의 효과는 부르주아뿐만 아니라 노동자들도 두렵게 했습니다. 한 세대 후 1860년대와 1870년대에 사회민주주의 운동이 독일에 등장했을 때, 공산주의라는 말은 기피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공산주의의 모태는 공화주의, 공화주의의 가치는 평등입니다. 자본주의는 자유주의와 함께 출발했습니다. 흔히 우리는 공산주의와 자본주의를 경제 체제로서의 대척점으로 바라봅니다. 그러나 여기서 추적해 본 공산주의는 정치적 개념으로 시작합니다. 물론 마르크스 이후 공산주의는 생산관계의 역사적 최종 단계로 규정되면서 경제적 개념에 밀착됩니다.

 

조금 웃기는 것은 우리나라를 비롯한 자본주의 국가들이 스스로를 공화주의 체제로 천명한다는 것입니다. 흔히들 자유와 평등은 궁극적으로 양립불가능하다고 합니다. 서로가 서로의 권리를 침해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사적 소유의 자유가 바탕이 되는 자본주의가 평등을 추구하는 공화주의와 어느 한도까지 양립할 수 있을지 의문이 듭니다. 여기에 민주주의라는 개념을 추가하면 상황은 훨씬 복잡해집니다. 민주주의는 民, People이 주인인 체제입니다. 북한을 비롯해 중국 등 공산주의 국가들은 인민, People을 공식 명칭에 포함하고 있습니다. 자본주의 국가들 역시 민주주의체제임을 역설합니다. 돈이 근본인 자본資本주의와 民이 주인인 민주주의民本 는 또 어디까지 양립할 수 있을까요? 資本과 民本은 1원1표와 1인1표에서 그 차이를 극명히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돈이 주인인 경제체제에 살고 있으면서 국민이 주인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혹은 국민이 주인인 정치제제에 살고 있으면서 돈을 주인으로 모십니다. 공산주의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인민을 주인이라고 주장하지만 실제로 모든 권력은 당의 지도자가 가집니다.

 

공산주의, 자본주의, 민주주의, 공화주의 !

우리는 민주주의적 자본주의 공화국에 살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지구상에서 가장 우수한 가치들을 조합했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러나 개념상으로 충돌할 수밖에 없는 이 최고의 조합은 현실에서도 끊임없이 삐걱 대고 있습니다. 쏟아지는 뉴스들만 보아도 우리가 이 국가의 주인임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새로 가입한 독서 카페의 토론에 참여하기 위해 쓴 글입니다. 이 글은 카페에도 올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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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철학사
한스 요아힘 슈퇴리히 지음, 박민수 옮김 / 자음과모음(이룸) / 200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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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기철학은 한마디로 칸트 이후의 철학이다. 칸트를 넘어 나아가거나 칸트에 맞서 대결하지만, 어떤 방향이든 그 출발지는 칸트이다.

 

“칸트의 철학은 결과로 볼 때 분명 이원론적이다. 인간은 두 세계의 시민이다. 한편에는 현상의 세계가 있고, 다른 한편에는 자유의 세계가 있다. 칸트의 인식론 역시 이원론적이라 불릴 수 있다. 한편에는 재료로 주어진 것, 즉 감각이 있으며, 다른 한편에는 선험적 직관형식과 범주의 기능을 지닌 자아가 있다. 인식은 재료에 그런 형식이 적용될 때에야 산출된다. p666”

 

칸트는 역사를 자유의 실현에 근접하는 거대한 발전 과정으로 해석하고 있다. 창조적 자아 -자유- 역사로 이어지는 이런 사상의 계열이 독일 관념론이다. 한편 칸트는 앎, 특히 과학이란 현상의 왕국에서만 가능함을 입증했다. 19세기 철학의 또 다른 조류인 실증주의와 유물론은 이 길을 택했다. 여기서 철학은 과학의 지식을 요약하거나 종합하는 역할로 축소된다.

 

제3의 길도 있다. 칸트의 한 면씩을 계승하는 앞의 두 입장과는 달리 칸트에 정면으로 저항한 철학이다. 이 저항이 겨눈 것은 칸트 체계 혹은 칸트에서 정점을 이룬 계몽주의 전반의 합리주의 정신이다. 이 저항은 비지성적, 비합리적, 감정적 힘들을 그 근거로 한다. 보편적 필연적 법칙에 반발하여 개별자의 가치와 권리를 부각시킨다. 또한 기계적이고 정태적인 우주 해명을 비판하고 생명의 비기계적 역동성을 밝혀내려 한다. 이 유형의 저항은 낭만주의의 성격을 갖는다.

 

세 가지 방향은 종국에는 칸트 사상과 대립관계에 놓인다. 첫 두 방향은 칸트 체계의 한 면씩만 부각시킨 결과 칸트와 끝내 대립하게 되었고, 세 번째 방향은 처음부터 칸트에 적대적이었다. 이러한 세 가지 방향이 출현한 이후 이에 반발하여 다시 신칸트주의가 칸트사상의 비판적 재음미를 주장했다.

 

 

 

 

 

제 1장 낭만주의와 독일 관념론

 

Ⅰ. 칸트 철학의 계승과 발전 - 신앙철학자들

 

칸트의 전제들을 객관적으로 탐구하고 이에 반대했던 주요 사상가 세 명은 신앙철학자들이다. 그들은 게오르크 하만, 야코비, 헤르더이다. 하만과 야코비는 언어에 아주 특별한 의미를 부여했다. 하만은 철학 전체가 이성보다는 언어로 구성되어 있다고 추측했다. 야코비는 칸트에게는 이성의 메타비판이라 할 언어비판이 결여되어 있다고 지적했다. 헤르더는 이론이성과 실천이성을 가르는 칸트의 이분법을 ‘요술’이라 비판했다.

 

Ⅱ. 피히테 1762 ~ 1814

 

피히테에 따르면 논리 정연한 철학 체계는 딱 두 가지다. 철학이 설명해야 하는 것은 경험 즉 사물에 대한 우리의 표상이다. 감각론이나 유물론은 사물로부터 표상을 도출한다. 반면 관념론은 표상으로부터 사물을 도출한다. 피히테는 “어떤 종류의 철학을 선택하는가는 어떤 종류의 인간이냐에 좌우된다” 고 했다.

 

피히테는 관념론을 선택한다. 우리가 사물의 존재에서 출발하면 의식이 사물로부터 생성된 이유를 결코 설명할 수 없지만, 사유로부터 출발하면 사물에 대한 우리의 표상을 도출할 수 있기 때문이다. 피히테는 철학의 시초에 ‘사유하는 주체’가 있다고 보았다.(이건 데카르트와 비슷한 것 아닌가?) 사유하는 주체가 자기 자신을 정립한다. 사유하는 주체야말로 모든 것의 시원이자 피히테 철학의 출발점이다. 피히테는 칸트의 가정인 사물자체 Ding an Sich를 거부했다. 비아, 타자는 자아가 산출한 것이다.

 

 

Ⅲ. 셸링 1775 ~ 1854

 

셸링의 철학은 동일철학이다. 칸트의 물자체를 거부한 피히테는 우리가 ‘자연’이라고 부르는 것은 단지 자아의 산물이라고 보았다. 셸링은 피히테를 뒤바꾼다. 자연이 정신의 산물이 아니라, 정신이 자연의 산물이다. 자아가 가능한 것은 오직 자연이 근원적 정신이기 때문이고, 자연과 정신, 실재와 관념이 근원적으로 동일한 것이기 때문이다.

 

 

Ⅳ. 헤겔 1770~ 1831

 

헤겔철학의 난해함은 대부분의 철학자들도 동의한다. 그럼에도 헤겔철학의 영향력은 막강하여 그를 빼고 근대철학을 말하기 힘들다. 헤겔 입문서로 가장 뛰어난 책은 프레드릭 바이저의 『헤겔』이지 싶다. 별 생각 없이 읽었는데, 눈이 반짝 뜨일 정도로 재미있고 이해가 쉬웠다. 바이저에 의하면 난해함 덕분인지 헤겔철학에 대한 오해가 많다고 한다. 대표적인 것이 ‘정-반-합’을 변증법의 핵심으로 설명하는 것인데, 헤겔 자신은 정립-반정립에 대해 말하지 않았다.

 

『세계 철학사』에는 헤겔의 정립과 반정립을 ‘지양’ 의 개념으로 설명한다. 지양에는 세 가지 뜻이 있다. 제거한다, 보존한다, 들어 올린다. 지양은, 선행하는 두 가지가 서로 배타적으로 대립하지 않는 더 높은 단계로 올라섬을 의미한다.

 

19세기 독일관념론은 피히테, 셸링, 헤겔로 대표된다. 피히테 철학은 주관적 관념론, 셸링 철학은 객관적 관념론, 헤겔 철학은 절대적 관념론이다. 헤겔의 절대정신은 주관정신과 객관정신보다 위에 있다. 헤겔에 따르면 세계 전체의 발전 과정은 ‘정신의 자기 전개’다.

 

“역사 속에서 행위해 나가는 것은 개인이 아니라 이 개인을 자신의 행위 수단으로 이용하는 세계정신이다. 어떤 인물들을 위대한 역사적 위인으로 만드는 것은 그의 인격적 특성이나 정력, 열정, 선견지명 혹은 지성이 아니다. 왜냐하면 세계정신은 자신이 목적한 바를 이루기 위해 흔히 자격도 없고 미흡하기만 한 개인들을 이용하기 때문이다. 사실 그러한 개인들에서는 역사적 필연성, 다시 말해 ‘시대정신’이 자신을 구현시켜 나가는 것이다. p708”

 

헤겔의 ‘이성의 간계(지)’ 가 여기서 나온다. 영웅이 역사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역사적 필연성이 영웅을 수단으로 사용하는 것이다. 물론 이들은 특정한 시점에서 세계사적 이성에 합치하는 존재들이다. “왜냐하면 역사란 객관정신의 자기전개이므로 특정 시점까지 역사적으로 형성된 것은 그 특정 시점에서 필연적인 것이며 동시에 ‘이성적인 것’, 다시 말해 세계사적 이성에 합치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p709” 그냥 들으면 무슨 소리인지 이해가 되지 않는 ‘현실적인 것이 이성적인 것이며, 이성적인 것이 현실적인 것이다’ 의 뜻은 이런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이때 이성은 개인의 이성이 아니라 세계사적 이성이다.

 

헤겔은 말년에 프로이센의 국가철학자가 되었다. 그는 당대 프로이센을 세계사적 이성에 궁극적으로 도달한 지혜의 구현이라 선언하고 자신의 철학 체계는 모든 철학의 완성이라고 천명했다. 헤겔의 견해에 의하면 일종의 역사적 종결상태가 도래한 것이다. 여기서 사유의 과제란 이미 일어난 사건을 조망하고 이를 순수한 의식으로 고양시키는 것뿐이다. “미네르바의 올빼미는 황혼녘에야 날기 시작한다.” 가 나온 배경이다.

 

그러나 역사적 종결상태란 헤겔의 변증법적 원리와 정면으로 배치된다. 역사에서 변증법이란 보수적 원리가 아니라 혁명적 원리이기 때문이다. 헤겔학파는 변증법에 따라 좌우로 분열되었다. 마르크스는 헤겔의 변증법을 활용해 역사상 유례없는 심대한 변화를 초래했다.

 

 

 

제 2장 실증주의, 유물론, 마르크스주의

 

Ⅰ. 프랑스 실증주의 : 콩트 1798 ~ 1857

 

19세기 전반 프랑스는 대혁명의 성과를 쟁취하려는 계급들 간의 투쟁으로 점철되었다. 왕정복고 세력과 제 3계급인 부르주아, 제4계급인 민중 사이의 치열한 투쟁 끝에 1848년을 기점으로 부르주아 계급이 주도권을 장악했다. 프랑스혁명이 부르주아혁명으로 불리기도 하는 이유다.

 

철학 사상도 세 가지 방향으로 발전하는데, 좌파의 요구는 이른바 유토피아적 사회주의 형태로 표현되었다. 생 시몽, 푸리에, 프루동이 대표적이다. 그러나 당시 프랑스가 배출한 가장 중요한 사상가는 생시몽 백작의 제자였던 콩트이다.

 

‘실증주의positivismus’라는 명칭은 콩트가 처음 사용한 것으로, 형이상학에 대한 거부의 의미를 갖고 있다. 실증주의는 주어진 것, 사실적인 것 즉 실증적인 것에서 출발하고 이를 넘어서는 모든 논의와 물음을 무용한 것으로 거부한다. 실증적인 것은 ‘현상’이다. 실증주의는 철학을 비롯한 모든 학문을 현상의 영역으로 제한한다.

 

콩트는 사회학의 창시자이다. 개인이 아니라 종속의 사회적 생활에서 나타나는 사태를 다루는 것이 사회학의 과제이다. 콩트는 사회학을 학문체계의 최고로 보았다. 콩트의 영향은 사회학에서 가장 두드러진다. 철학의 경우에는 특히 영국 사상에 두드러진 영향을 끼쳤다.

 

 

Ⅱ. 영국 실증주의

 

로크의 경험론, 흄의 회의론, 형이상학적 사변에 대한 영국 민족 특유의 거부감, 영국인의 냉정한 현실감각 등은 콩트의 철학이 고국 프랑스 보다 영국에서 더 큰 반향을 일으키기에 충분한 정신적 토양이 되었다. 영국은 프랑스와는 달리 극단적 대립 없이 발전해 갔다. 혁명 보다는 개인의 자유라는 오랜 자유주의적 원리와 사회진보의 이념을 통합시키려는 노력이 일반적이었다. 이런 경향은 영국 사회주의의 특징이다.

 

제레미 벤담과 콩트의 사상 및 영국 경험론의 전통은 존 스튜어트 밀(1806~1873)에게서 하나로 합쳐진다.

 

찰스 다윈(1809~1882)의 진화론은 허버트 스펜서(1820~1903) 등의 철학에 큰 영향을 끼쳤다.

 

 

Ⅲ. 독일 : 헤겔학파의 붕괴와 유물론의 대두

 

독일은 늦게야 시민계급이 형성되었고 1848년 혁명도 완전한 성공을 거두지 못했으며 사회갈등도 그만큼 뒤늦게야 표면화되었다. 슈트라우스와 루트비히 포이어바흐의 저작은 독일에서 일대 논쟁을 일으켰다. 그러나 이들의 저작은 이미 백 년 전 볼테르 시대의 시민적-계몽주의적 정신이 뒤늦게 표현된 것이다. 종교와 싸우는 과정에서 철학적 비판이 훨씬 예리해졌다.

 

“이제 중요한 것은 신이 존재하느냐 아니냐의 문제가 아니라 인간이 존재하느냐 아니냐의 문제이다. 이제 중요한 것은 신이 우리와 동일한 존재이냐 아니냐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인간이 서로 동등하냐 아니냐의 문제이다. 또한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인간이 어떻게 신 앞에서 정의로울 것인가의 문제가 아니라 신이 어떻게 인간 앞에서 정의로울 것인가의 문제이다. 우리가 먹는 빵이 주님의 육신이냐 아니냐가 중요한 문제가 아니라 우리가 우리 자신의 육신을 위해 빵을 얻는 것이 중요한 문제이다. 그리고 신의 것은 신에게, 황제의 것은 황제에게 주는 일이 중요한 문제가 아니라 우리가 마침내 인간의 것을 인간에게 주는 일이 중요한 문제이다.p748”

 

 

Ⅳ. 마르크스 : 1818 ~ 1883

 

마르크스의 철학사상은 헤겔의 철학 체계를 출발점으로 삼고 있다. 헤겔의 체계가 포이어바흐의 철학, 프랑스의 혁명 이론 특히 유토피아적 사회주의자들의 이론, 그리고 영국 고전경제학의 지식과 통합되었다. 유럽 사상의 3대 조류가 마르크스에게 흡수된 것이다.

 

마르크스는 헤겔의 변증법에서 혁명의 원리를 발견한다. 변증법의 핵심은 이 세계가 완성된 사물의 복합체가 아니라 과정의 복합체라는 사상이다. 존재하는 것은 오로지 생성과 소멸의 부단한 과정뿐이다. 마르크스는 변증법을 헤겔과는 달리 관념론이 아니라 유물론적 세계관에 결부시켰다.

 

변증법 이외에도 마르크스에게 헤겔의 유산은 적지 않다. 마르크스는 헤겔과 마찬가지로 전체 세계사란 통일적 법칙에 따라 궁극목표를 향해가는 진행과정이라 보았다. 이 과정에서 생성되는 모든 현실적 존재는 전체 과정의 필연적인 통과 단계를 뜻하며, 이런 점에서 이 존재들이 이성적 성격을 갖는다는 점도 두 사상가의 일치된 견해이다. 마르크스의 유물론 이면에는 이념과 현실, 이성과 현실의 완전하고 실제적인 일치가 가능하다고 보는 (헤겔적) 관념적인 신념이 숨어있다.

 

마르크스는 사회적 삶에서 경제적 토대가 갖는 의미, 엄연한 역사적 사실로서의 계급투쟁, 이 요인들이 문화적 정신적 발전에 미치는 영향을 최초로 완전하게 인식했다. 마르크스는 이러한 인식에 사로잡혀 이를 세계 해명의 유일한 출발점으로 삼았다.

 

 

 

제 3장 쇼펜하우어, 키르케고르, 니체

 

Ⅰ. 아르투르 쇼펜하우어 : 1788 ~ 1860

 

쇼펜하우어의 저작은 1850년경, 그의 노후에 와서 반향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독일과 유럽 각지에서 1848년 혁명이 실패로 끝나자 환멸감에 사로잡힌 지식인층은 쇼펜하우어의 염세주의적 세계관을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염세주의의 물결이 유럽 문학계를 휩쓸었다. 헤겔학파가 지배하던 시대의 종말이었다.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라는 제목은 쇼펜하우어 사상의 전모를 분명하게 표현하고 있다. 세계란 의지와 표상이다. 이 책의 첫 문장은 “세계는 나의 표상이다.”로 시작한다. 이 명제는 칸트의 것과 다르지 않다. 칸트의 업적은 현상을 사물 자체와 구별한 점에 있다. 그러나 칸트와 쇼펜하우어의 결정적 분기점이 사물 자체이기도 하다.

 

쇼펜하우어에게 사물 자체는 의지이다. 의지의 작용과 신체의 움직임은 어떤 원인에 의해 연결된 서로 다른 두 가지가 아니다. 이 둘은 동일하다. 신체적 활동은 의지가 객관화된 활동 즉 의지가 직관에 나타나는 활동일 뿐이다. 신체란 공간과 시간에서 객관화된 의지다. 인간을 좌지우지하는 것은 무의식적인 생의 의지다. 오직 의지만이 불변의 것이다. 의지는 우리의 모든 표상의 근저에 놓여있다.

 

의지는 자유로운가? 전체로서의 세계의지는 자유롭다. 세계의지에 제약을 가할 수 있는 것은 세계의지 자체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개체들의 의지는 자유롭지 못하다. 그것은 상위의 전체 의지에 의해 규정되기 때문이다.

 

쇼펜하우어는 독일 관념론을 끊임없이 비방했다. 관념론자들에게 궁극적 절대자는 정신, 즉 목표를 향해 자신을 전개해 나가는 이성이다. 쇼펜하우어에게 절대자는 맹목적 의지 즉 비이성적이고 비합리적인 세계근거다. 이성이 아니라 비이성이, 정신이 아니라 의지가 궁극의 절대자이다. 이성은 비이성적 의지의 도구에 불과하다.

 

쇼펜하우어의 업적 중 하나는 인간 의식의 이면에 대한 안목을 철학에 제공한 것이다. 서양학문에서 무의식의 철학과 심리학으로 나아가는 길을 개척한 사람이 쇼펜하우어다.

 

. 쇠렌 키르케고르 : 1813 ~ 1855

 

키르케고르는 시인이자 사상가다. 사상가로서의 키르케고르는 자신의 본질적인 생각을 말하려 할 때 동시에 시인이 될 수밖에 없었다. 모든 보편적인 것, 모든 추상적인 것을 거부하기 때문이다. 키르케고르 이전의 대부분의 철학은 거대한 보편적 물음을 다룬다. 개별적이고 구체적인 물음은 보편적 원리에서 저절로 도출된다.

 

키르케고르는 진정한 삶의 문제란 언제나 실천적인 개별문제의 유형이라고 보았다. ‘특정한 인간인 내가 특정한 상황에서 이런 일을 할 수 있는가?’ 가 참된 문제다. 이것은 실존적 문제다. “객관적 사유는 주체와 그 실존에 무관심하지만, 실존적 존재로서의 주관적 사상가는 자신의 사유에 관심을 가지며 그 사유에서 실존한다.”, “실존과 본질적 관계를 맺는 인식만이 본질적 인식이다.”

 

키르케고르는 종교적 해명을 추구하는 사람이나 철학적 물음을 제기하는 사람들로부터 객관적 지주를 빼앗아 버리며, 모든 개인을 각자의 실존이 지닌 불확실하고 모호한 심연으로 되던져 버린다.

 

20세기 철학에서 실존철학이나 기초존재론과 관련된 모든 사상은 키르케고르를 떠나서 생각할 수 없다. 이미 ‘실존철학’ 이라는 명칭이 키르케고르의 ‘실존적 사상’과 명백히 연결되어 있다. 키르케고르의 고독, 내던져 있음, 부조리, 인간존재의 기본 사실로서의 불안 등은 마르셀에서 까뮈에 이르는 일련의 사상가들에게서 다시 나타난다. 이런 사상적 모티프들은 현대 예술과 서정시, 희곡작품들에서 두드러지게 표출된다. 이런 모티프들이 더욱 발전하면, 본질적으로 종교적 색채를 지닌 키르케고르의 실존이 무신론자인 샤르트르와도 연결될 수 있다. 키르케고르 이후의 세계는 그 이전의 세계와 다른 모습일 수밖에 없다.

 

 

. 프리드리히 니체 : 1844 ~ 1900

 

니체의 철학은 쇼펜하우어의 것과 마찬가지로 의지의 철학이다. 니체에게 세계의 본질은 의지, 좀 더 정확히 말하면 힘에의 의지이다. 그리고 그 이외에는 아무것도 아니다. 니체는 일체의 형이상학을 거부한다. “신은 죽었다.” 니체가 차라투스트라를 통해 한 이 말은 그의 사상의 요체다. 영원한 이념, 사물 자체, 피안 등은 모두 망상이나 환영, 착각에 지나지 않는다.

 

니체는 세계를 일정한 크기를 가진 힘의 덩어리로 간주한다. 그 안의 존재자는 헤아릴 수 없이 많지만 무한하지는 않다. 시간은 무한하다. 따라서 사물들은 언젠가 이미 나타났던 것일 수밖에 없다. 니체가 영원회귀를 말하는 이유가 이것이다. 만물이 영원히 회귀한다는 사상을 받아들이고 긍정하는 것,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가장 강렬한 긍정의 형식이다.

 

니체는 냉철한 비판적 철학자는 아니었다. 그는 증명을 제시하지 않았다. 단지 새로운 믿음을 선언하고 제시할 뿐이었다. 현대 사상가 중 누구보다 니체를 집중적으로 연구한 사람은 마르틴 하이데거다.

 

 

 

제 4장 신칸트주의

 

“거의 60년간 조용하고 고독한 인생을 살아온 쾨니히스베르크 출생의 이 위대한 인간, 이 스코틀랜드인의 후예는 1781년 유명한 《순수이성비판》을 내놓아 세상을 ‘독단의 잠’에서 깨웠다. 그때부터 오늘날까지 ‘비판철학’은 그 지배적 권좌를 변함없이 유지해 왔다. (.....) 쇼펜하우어의 철학은 낭만주의의 물결을 타고 잠시 성행했으며 (.....) 1859년 이후에는 진화론이 대두하여 이전의 모든 것을 일소해 버렸다. 그리고 19세기 말에는 니체의 통쾌한 우상파괴의 철학이 무대를 장악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표면의 부차적 흐름이었을 뿐, 그 저변에서는 칸트주의의 억세고 부단한 조류가 깊게 흐르고 있었다. p824”

 

칸트사상의 재성찰 움직임은 자연과학 분야에서 비롯되었다. 독일을 포함한 유럽 여러 나라에서 칸트 르네상스가 시작되었고 무수한 칸트 관련 논문이 쏟아져 나왔다. 이러한 신칸트주의는 곧 여러 학파로 갈라졌지만 몇 가지 공통점이 있다.

 

칸트를 이해한다는 것은 칸트를 되풀이하는 것이 아니라 그를 넘어선다는 것이다. 신칸트주의자들이 무엇보다 비판한 것은 칸트의 사물자체였다. 사물자체를 칸트이후 나타난 모든 오류와 오해의 근원이라 보았다. 칸트의 주요 관심사는 인식 이론이 아니라 실천적 윤리적 문제였다. 그런데 많은 신칸트주의자들은 인식론적 문제에 주안점을 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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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철학사
한스 요아힘 슈퇴리히 지음, 박민수 옮김 / 자음과모음(이룸) / 200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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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5부 계몽주의 철학과 이마누엘 칸트의 저작

 

제 2장 이마누엘 칸트

 

Ⅰ. 생애, 인품, 저작 1724 ~ 1804

 

1781년에 출간된 칸트의 첫 번째 주저 『순수이성비판』은 유럽 계몽주의 운동을 완성시킨 동시에 좀 더 높은 단계에서 극복한 저작이다.

 

Ⅱ. 비판철학 이전 시기

 

칸트가 대학을 다니고 학자로서 활동하기 시작했던 시기에 독일의 지배적 철학 체계는 라이프니츠- 볼프 사상이었다. 이 사상을 한마디로 말하면, 독단적 방법의 합리론이다. 합리론이란 내 이성이 세계에 관해 말해주는 것이 곧 진리라고 보는 이성철학이다. 이때 이성은 타고나는 것 (본유적)으로, 경험의 도움은 전혀 필요하지 않다. 그러나 독단적 합리론자들은 실제로 이성이 경험과 무관하고 경험을 초월하는 인식을 제공할 능력이 있는지에 관해서 먼저 비판적 검토를 해보지 않았다.

 

칸트 역시 독단적 합리론에서 출발했지만, 흄에 의해 ‘독단의 잠’에서 깨어났다. 경험론의 선구자 로크는 지성에는 감성에 의해 미리 주어지지 않은 것이란 전혀 없다고 했으며, 흄은 이를 끝까지 밀고 나갔다. 경험론의 입장에서는 경험만이 우리 인식의 원천이고 한계이기 때문에, 초감성적인 것에 관한 학문인 형이상학은 불가능하다.

 

한편에서는 합리론을, 다른 한편에서는 경험론을 주장한다. 칸트는 어느 것이 옳은지 판단을 내리려면 먼저 참다운 비판적 방법을 동원하여 ‘전체 인간의 사유기관이 지닌 구조’를 탐구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칸트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15년 동안 혼신의 노력을 기울였다. 그는 57세에 마침내 『순수이성비판』을 내놓았다.

 

Ⅲ. 순수이성비판

 

여기서 이 책이 요약하는 『순수이성비판』의 개념을 다시 축약․ 정리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그렇게 해서 이해될 내용이면 『순수이성비판』이 어렵다는 소문도 없을 것이다. 8~9년 전인가, 『순수이성비판, 이성을 법정에 세우다』를 읽었다. 지인의 지인이 쓴 책이고 비교적 쉽다고 해서, 호기심을 갖고 읽었는데 그때도 어려웠다. 12가지 범주에 관한 설명을 보며 생각했던 것은, 철학자란 이렇게도 꼼꼼한 인간인가 싶었다. 예전말로 밑 닦은 휴지까지 모을 놈 같았다. 칸트야 워낙 그 방면으로 유명하긴 하다.

 

순수이성비판이란 말을 처음 들었을 때 궁금했던 것은 순수이성과 비판의 관계였다. 순수이성이 비판을 하는 것인지, 순수이성을 비판하는 것인지 헷갈렸다. 칸트라면 계몽주의의 정점이고, 계몽이란 놈은 이성을 신처럼 떠받드는데, 이성을 비판한다는 것이 언뜻 이해가 가지 않았기 때문이다.

 

흄에 의해 독단의 잠에서 깨어난 칸트가 이성이 누리는 신적 지위가 과연 합당한지를 먼저 따져야 한다고 판단하고, 이성 자신을 법정에 세운 것이 칸트 비판체계의 출발이다. 칸트에게 ‘비판’은 면밀한 검사나, 검증 한계 규정의 의미를 갖는다.

 

『순수이성비판』의 중심물음은 ‘선험적 종합판단은 어떻게 가능한가?’ 이다. 세분하면 순수 수학은 어떻게 가능한가?, 순수 자연과학은 어떻게 가능한가?, 형이상학은 어떻게 가능한가? 이다. 이 문제를 다루는 것이 순수이성비판이라는 특수학문이다. 여기서 순수이성이란, 어떤 것을 선험적으로 인식하는 원리를 자체 안에 지니고 있는 이성을 말한다. 이 책에 비판이란 이름을 붙인 것은 이 책의 의도가 순수이성의 완전한 체계를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 순수이성의 원천 및 한계를 비판적으로 판정하는 데 있기 때문이다.

 

순수이성의 모든 원리는 초월적transzendental이다. 초월적이란 개념은 경험의 피안이나 경험을 넘어서라는 의미가 아니라, ‘일체의 경험에 앞서서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이란 의미를 갖는다. 칸트에 의하면, 대상들이 아니라 대상들에 대한 우리의 인식 방식을 다루는 모든 인식은 초월적이다.

 

칸트는 물 자체 Ding an sich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알 수 없다고 한다. 우리 외부에 있는 그 무엇은 언제나 감관이 내게 전달해 주는 형식으로만 내게 ‘현상’ 한다. 현상 배후에 있는 것, 즉 물 자체 (칸트는 예지체 noumenon라고도 부른다)에 관해서 나는 알 수 없고, 그 한계를 절대로 뛰어 넘을 수 없다. 물론 칸트는 그럼에도 물 자체의 존재를 인정했다. 헤겔 혹은 지젝에 의해 해석된 헤겔은 이 물 자체를 현상 안으로 들여왔다. 물 자체는 현상 너머가 아니라, 현상으로서의 현상이라는 것이다. 무슨 말인지 여전히 아리송하지만, 칸트와는 달리 현상 너머의 그 무엇, 마치 플라톤의 이데아 같은 실재를 부정한다. 그렇다면 지젝에게는 현상이 전부인가? 그렇지는 않다. 실재를 현상으로서의 현상 혹은 현상의 틈으로 해석하는 것 같다. 지젝은 칸트와 헤겔의 차이는, 어쩌면 유일한 차이는 그것이라고 한다. 칸트가 불가능한 것으로 세계 밖에 밀쳐놓은 것을 세계 안의 틈, 부정성으로 끌어들인 것이다. 여하튼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자.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대상들을 인식할 수 있는가? 간단히 말해 우리 모두가 하나의 물物에 대해 사과를 사과라고 어떻게 동일하게 말할 수 있냐는 것이다. 칸트의 대답은 물 자체에 대해서는 모르지만, 그 물의 ‘현상’에 대해서는 보편적이고 필연적인 타당성을 가지고 말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인식은 선험적 형식으로서의 공간과 시간, 열두 범주들이 초월적 판단력을 가지고 하는 작업이다. 다시 말해 순수이성의 인식능력 덕분에 우리 모두는 사과를 배가 아니라, 사과라고 말할 수 있다.

 

우리 인식이 대상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대상이 우리 인식을 따른다! 칸트 스스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지금까지 사람들은 우리의 모든 인식이 대상들에 따라야 한다고 가정했다. 그러나 이러한 전제 아래서는 대상들에 관해 무엇인가를 선험적으로, 개념들에 의거해 이루려는 모든 시도가 수포로 돌아갔다. 그러므로 한 번쯤 대상들이 우리의 인식을 따라야 한다고 가정해 보고 그렇게 하면 형이상학의 과제를 더 잘 다룰 수 있을지 알아보는 것도 시도해 봄직한 일이다. 그러한 가정은 (...) 대상들에 대한 선험적 인식의 가능성과 더 훌륭하게 합치한다. 이런 생각은 코페르니쿠스의 최초 사상과 마찬가지 의의를 갖는다. 코페르니쿠스는 전체 별무리가 관찰자를 중심으로 회전한다는 가정에서는 천체운동에 대한 설명이 제대로 진척되지 않자 관찰자를 회전시키고 별들을 정지시키면 더 나은 설명이 주어지지 않을까 생각했다.p618"

 

코페르니쿠스는 옛날부터 참 인기가 높았던 것 같다. 프로이트뿐 아니라 칸트까지도 코페르니쿠스에 자신을 비유하다니! 그럼에도 우리는 여전히 사물이 실재하기 때문에, 모든 사람들이 똑 같이 사물을 본다고 생각한다. 지구가 도는데도 여전히 태양이 동쪽에서 서쪽으로 진다고 말하는 것처럼. 그렇지 않다면 우리의 일상은 엉망이 될지도 모른다. 칸트가 말하는 세계는 영화 <매트릭스>에서나 한번 고민해 보고 말 일이다. 가끔 적외선 카메라 따위가 세상을 비춰줄 때, 이 세상이 내가 아는 세상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긴 한다. 내가 아는 세상은 나의 인식이 보여주는 세상이다. 어떤 다른 감관과 다른 지성을 갖춘 생물체는 전혀 다른 세상을 보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세상이 있긴 있는 것 아닌가? 무언가가 없다면, 감각을 촉발 하는그 무엇이 없어도 세상이 현상할 수 있는 걸까? 진짜 매트릭스처럼? 나는 잘 모르겠다.

 

우리가 세상을 인식하는 데에는 몇 단계의 도구가 필요하다. 감성, 지성, 이성이 그것이다. 감성은 외부의 그 무엇으로부터 인상을 받을 수 있는, 우리 안의 능력이다. 개별 대상들에 대한 직접적 표상을 직관이라고 하는데, 오직 감성만이 직관을 제공한다. 지성은 열 두 범주를 사용하여 직관의 재료들을 개념으로 정리한다. 이성은 다양한 개념과 판단을 다시 결합하여 좀 더 높은 차원의 통일성을 만들어 낸다.

 

이성은 이런 통일화 활동에서 자기통제에 실패할 때가 있다. 다양을 단지 상대적으로 더 높이 통일하는 데 만족하지 못하고 완전한 통일성을 산출하려는 욕구를 갖는다. 이성은 하나의 무조건자를 추구한다. 이 욕구를 이끄는 것은 ‘지도적인 이성개념들’ 즉 이념이다. 완벽한 통일성을 추구하다보면 필연적이게도 최초의 원인인 신의 이념에 다다르게 된다. 신에 대한 이념은 사유할 수 있다. 그러나 인식은 불가능하다. 순수이성의 감관으로 직관할 수 없다. 신은 이성에 의해 증명될 수도 없고 반증될 수도 없다. 칸트는 우리의 (이론) 이성의 한계에 대해 질문한다.

 

“그 한계는 가능한 경험 지식의 영역이 끝나는 지점과 일치한다. 그 한계 너머에 있는 것에 관해 이성은 아무것도 결정할 수 없다. 이는 두 가지 의미를 갖는다. 이성은 신, 자유, 불멸성과 같은 일반적인 형이상학적 이념들 -이것들이야말로 칸트에게는 연구의 유일한 목적이고 다른 모든 것은 이 목적을 위한 수단에 불과하다 - 을 증명할 수 없다. 하지만 이성은 그런 이념들을 반증할 수도 없다. 그리고 이런 한에서 그것들을 믿을 수 있는 여지가 마련된 것이다. p622”

 

Ⅳ. 윤리와 종교

 

칸트의 『실천이성비판』에서 가장 유명한 것이 정언명령일 것이다. “네 의지의 준칙이 동시에 보편적 법칙 수립의 원리로서 타당할 수 있도록, 그렇게 행위하라.” 준칙이 뭔지 모르면서도 대충 때려잡아 멋진 말로 기억한다. 원래 언어란 그렇게 문맥 속에서 감으로 배우는 것이다. 그러나 깐깐하기로 소문난 철학자들에게는 정확한 개념 정의는 탐구의 출발점이다. 일상어와는 다르게 쓰여, 어리둥절하게 만드는 개념들도 꽤 있다. 칸트는 ‘개별적 인간의 행위에만 타당한 원칙’ 을 준칙이라 부른다. 그래서 보통은 내가 하는 행위를 그대로 내가 당해도 군말 없이 받아들일 수 있는, 그런 행위만 하라는 식으로 이해한다.

 

정언명령이란 보편적이고 무조건적으로 타당한 명제를 말한다. 이론이성의 명령은 강제적 성격인 반면, 실천이성은 요구적 성격이이다. ‘마땅히 어떠어떠하게 행동해야 한다’ 고 하지만, 요구하는 것이지 강제하는 것은 아니다. 이것은 명령과 같다. 명령은 따를 수도 있지만 무시할 수도 있다. 물론 결과는 자신이 책임져야 한다.

 

보편적이고 조건 없이 타당한 것은 어떤 특수한 객체에 근거할 수 없다. 보편적 실천 법칙은 객체 즉 질료가 아니라 형식에 의해서만 근거를 제시할 수 있다. 칸트가 발견한 원칙은 순전히 형식적이고 모든 경험적인 것에서 벗어난 것이다. 정언명령이 그렇게 추상적으로 들리는 것은 이 때문이다. 거기에 어떤 내용이 담긴다면, 보편타당 할 수 없다. 플라톤이 『향연』에서 말한 에로스도 ‘언제 어디서나 옳고 좋은 것’ 이다. 그런데 어떤 사람에게 옳은 것은 반대편 사람에게는 나쁜 것이 될 수 있고, 오늘 좋은 것이 내일은 싫은 것이 될 수도 있다. 정언명령이 임의의 모든 내용에 적용될 수 있는 것은 순전히 형식적인 성격을 갖기 때문이다.

 

  

 

 

 

 

정언명령은 ‘마땅히 따라야 하는 것’, sollen이다. 그런데 그것을 따르는 것이 가능한가? 정언명령은 우리가 그것을 준수할 가능성이 있을 때, 다시 말해 우리에게 그것을 따를 자유가 있을 때만 의미가 있다. 칸트는 여기서 ‘너는 할 수 있다. 왜냐하면 해야 하기 때문이다!’ 라는 명제를 제시한다. 실천의 가능성, 실천의 자유는 이론이성으로는 결코 입증할 수 없다. 다만 실천이성은 우리로 하여금 의지의 자유가 존재한다고 생각하도록 강제한다. 인간은 윤리적 행위를 할 때 현상으로서의 사물 세계를 벗어나 초감성적인 세계로 올라서게 된다. 이 세계에서 우리는 자유롭다. 인간은 순수이성의 영역에서는 자유롭지 않다. 그러나 실천이성의 영역에서는 인과의 사슬에서 벗어나 의지의 자유를 획득한다. 자유는 우리에게 윤리법칙에 대한 의무를 강제한다.

 

인간은 두 세계의 시민이다. 현상의 영역에서 인간의 존재와 행위를 이루는 모든 것은 거대한 필연적 연관 속의 자그마한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동시에 인간은 공간과 시간을 초월하는 영역, 즉 초감성적인 자유의 영역에서 속해 있다.

 

“자주 그리고 오래 생각하면 할수록 늘 새롭고 더욱 큰 경탄과 외경의 마음을 갖게 하는 두 가지가 있으니, 그것은 내 위의 별빛 찬란한 하늘과 내 안의 도덕률이다. (.....) 처음 것, 즉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세계군을 보고 있노라면 동물적 피조물로서의 나의 중요성은 사라져버린다. 동물적 피조물은 짧은 시간 동안 생명력을 부여받고 나면 자신을 이루었던 질료를 행성에 돌려줄 수밖에 없다. 그에 비해 두 번째 것은 예지적 존재자로서의 내 가치를 내 인격성을 통해 한없이 드높인다. 인격성에서 도덕 법칙이 내게 현시하는 것은 동물성은 물론 전체 감성 세계와 무관한 삶이다. p630~1”

 

 

Ⅴ. 판단력 비판

 

판단력이란 특수를 보편 아래 포함된 것으로 사유하는 능력이다. 판단력은 이론이성과 실천이성, 자연의 왕국과 자유의 왕국을 이어주는 연결 매체다. 판단력은 한편으로 지성이 궁극목적을 염두에 둔 체계적 자연고찰을 수행하도록 도와주며, 다른 한편으로 실천이성으로 하여금 목적의 관점에서 현상을 고찰하게 하여 세계의 윤리적․ 이성적 궁극 목적에 대한 윤리적․ 종교적 믿음을 갖게 한다.

 

세 비판서 모두에서 칸트는 보편성과 필연성, 즉 합법칙성을 추구했다.  그러나 이 법칙은 우리에게서 연원한다. 우리가 세계에 법칙을 이식한다. 그러므로 법칙들을 발견하려면, 세계가 아니라 인간 정신을 탐색해야 한다.

 

자연법칙은 우리 인식 능력의 선험적 형식에서 유래한다. 행위에서 합법칙성은 우리 욕구 능력의 선험적 원리에서 유래한다. 세상만물을 목적의 관점에서 판정할 수 있는 가능성은 우리 반성적 판단력의 선험적 원리에서 유래한다.

 

 

Ⅵ. 비판철학 이후의 저작

Ⅶ. 칸트에 대한 비판과 평가

 

는 생략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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