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읽는 독일 현대철학 처음 읽는 철학
철학아카데미 지음 / 동녘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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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읽는 독일 현대철학』, 첫 번째 묶음은 혁명의 대명사 마르크스와 로자 룩셈부르크 이다.

 

 

사실 이런 강의를 듣거나 책을 읽을 정도의 관심이 있는 사람들에게 마르크스는 어떤 식으로든 익숙한 이름이다. 조금씩은 알고 있다는 말이다. 그러니 겨우 이십여 쪽에 저자가 마르크스의 무엇을 담아낼 지가 나는 더 궁금했다. 본격적인 사상을 담기에는 지면이 너무 짧고, 대강 훑기에는 너무 잘 알려진 터라 저자의 고심이 컸을 것 같았다. 저자의 선택은 곧바로 19세기로 날아가는 것이다. 19세기는 흔히 부르주아의 시대라 불릴 만큼 자본주의가 급성장한 시기다. 이 시기를 살아가면서 마르크스가 어떤 생각을 갖고 있었고, 어떤 이야기를 했으며, 어떻게 행동했는지에 집중하겠다고 저자는 밝힌다. 그의 삶을 통해 사상을 따라가는 방식이다. 그 과정에 마르크스의 핵심개념들이 짤막하게 소개되고 있는데, 여기서 요약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하나만 기록해 두자면, 마르크스는 『루이 보나파르트의 브뤼메르 18일』에서 “자신의 고유한 업적이 있다면 그것은, 노동이 가치의 원천임을 밝힌 데 있는 것도 아니고, 사회가 계급으로 분화되어 있고 계급투쟁이 역사를 추동한다는 것을 밝힌 데 있는 것도 아니며, 오직 이 투쟁이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향해 나아가는 경향이 있음을 밝힌 데 있다” 고 했다는 것이다. 현재의 관점에서 보자면 의심스럽지만, 왜냐하면 대부분의 좌파철학자들도 역사적 유물론은 폐기한 것 같으니 말이다, 어쨌든 마르크스가 집중한 것은 이 발전의 ‘경향’ 이라고 한다. 사실 노동가치설 하면 우리는 대뜸 마르크스를 떠올리지만, 노동가치설이야말로 자유주의 부르주아 사상가들의 경제학이라고 한다. 홉스에 이은 로크가 사적 소유권의 근거로 내세운 것도 노동가치설이다. 원래 주인이 없는 자연물, 즉 하느님이 만드신 땅을 내 것이라고 할 수 있는 까닭은 그 땅에 나의 노동력이 더해졌기 때문이다. 쉽게 말해 식민지 팽창시절 아메리카 대륙에 간 백인들이 먼저 달려가서 깃발을 꽂으면 자기 땅이라고 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그 깃발을 꽂고, 울타리를 세운 ‘노동’ 이 사적 소유권의 근거가 되기 때문이었다.

 

식민지 말이 나왔으니 곧바로 연상되는 것이 식민지 전쟁이다. 제1차 세계 대전이 바로 극에 달한 식민지 쟁탈 전쟁이었는데, 마르크스는 자본의 잉여가치를 최종적으로 실현하기 위해 식민지 전쟁은 필연적임을 역설했다. 자본은 생산과정에서 발생한 잉여가치를 유통과정에서 실현해야 한다. 상품은 생산이 아니라 소비를 통해서 최종 가치가 실현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노동자들의 임금으로는 이 잉여가치 분을 모두 구매할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자본은 잉여가치의 실현을 위해 부단히 비자본주의적 시장을 자본주의적 시장으로 포섭해야 한다는 강제에 직면합니다. 이것이 자본주의적 근대에는 국경의 끊임없는 확장을 통한 시장 확대의 경향으로 나타났습니다. 여기에 식민주의 전쟁의 필연성이 있지요. 식민주의 전쟁은 원주민들을 그들이 속한 자연 환경에서 폭력적으로 분리시키는 시초축적 전쟁의 확장이라고 말 할 수 있습니다. 또한 시장 확대를 둘러싼 자본들 사이의 치열한 경쟁을 수반하고요. 이것이 제국주의 전쟁의 기초가 됩니다. p33~4” 스페인이 처음 남아메리카를 점령했을 때만 해도 수탈은 주로 식민지의 자원에 집중되었다. 식민지에 혈안이 된 이유가 은광이나 금광 따위에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자본주의가 발전하면서 더욱 절실해 진 것은 생산한 상품을 판매할 자본주의적 시장이었다. 단순히 가정해서, 노동자는 TV 1대 값의 임금을 받고, 적어도 TV 두 대를 만들어야 한다. 그러면 남는 한 대의 TV는 누가 구매할 수 있는가? 노동자에게는 두 대를 살 수 있는 구매력이 없다. 이 남는 TV 즉 잉여가치는 다른 곳에서 판매되어 한다. 식민지는 그렇게 해서 잉여가치를 실현할 자본주의 시장으로 재편되었던 것이다. 이것이 우리가 이른바 ‘근대화’라고 부르는 것이다. 뉴 라이트를 비롯해 떠들썩하게 우리를 웃겼던 문창극 같은 사람들이 찬양하는 일제 강점기 근대화론이라는 것이, 우리나라도 자본주의 시장으로 편입되어, 제국의 상품을 살 수 있는 소비자가 되었다는 뜻이다. 물론 우리는 약삭빠르게 살아남아 이제 우리의 잉여가치를 실현해 줄 제3국으로 진출하고 있기는 하다. 그러나 그것도 거대자본의 이익일 뿐이다. 여하튼 서구 자본주의국가들은 자본주의의 법칙 상 제국주의 전쟁을 할 수밖에 없었고, 전 세계를 재빠르게 자본주의 시장 경제로 바꾸어 놓아야 했다. 이 과정에서 식민지는 철저히 수탈당하고, 제국주의 국가의 노동자들에게도 수탈의 콩고물이 배분되었다. 마르크스가 1848년,『공산당 선언』에서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고 외쳤지만, 콩고물에 현혹된 제국의 노동자들과 좌파들조차도 제국주의 전쟁을 찬성하며, 프롤레타리아의 형제애를 배반해 버렸다.

 

 

 

로자 룩셈부르크는 제1차 세계대전에 반대한 독일 사회민주당 소속 의원 2명 중 한 명이다. 둘 다 전쟁이 끝난 후 살해당했다. 로자가 유명해 진 것은 ‘로자 대 베른슈타인 논쟁’, 즉 수정주의 논쟁 때문이다. “수정주의 이론을 대표한 사람이 에두아르드 베른슈타인이고요. 로자와 베른슈타인 논쟁의 핵심은 자본주의가 붕괴될 것이냐 아니냐의 문제였지요... 수정주의자들이 정통 맑스주의자들과 근본적으로 다른 점은 자본주의가 계속된다는 믿음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베른슈타인은 자본주의가 위기를 극복하는 ‘적응 수단’을 가지고 있다고 판단했습니다.p141”

 

베른슈타인의 근거는 마르크스의 예언과는 달리 영국과 독일 같은 선진 자본주의 국가들이 위기를 겪으면서도 붕괴되지 않고 살아남았고, 이들 국가의 노동자들이 조금씩이나마 살기가 좋아졌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베른슈타인은 마르크스주의가 수정될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이들 자본주의 국가들이 살아남은 이유는 마르크스 편에서 살펴보았듯이 식민지 수탈이다. 수정주의자들은 식민지 전쟁을 찬성했다. 수정주의의 물적 토대가 바로 제국주의이기 때문이다. 당시 제 2 인터내셔널에는 네 가지 커다란 논쟁이 있었는데, 수정주의 논쟁, 제국주의 논쟁, 총파업 혹은 대중파업 논쟁 그리고 반전 논쟁이다. 여기서 수정주의 논쟁은 식민지 논쟁과 밀접하게 연관을 맺고 있다. “제국주의를 옹호하고 그 틀 안에서 선진국 상층 노동자계급의 이익을 보장받으려 했던 수정주의자들에 맞서 제국주의라는 틀로 자본주의를 새롭게 이해해야 하고 자본주의 붕괴의 필연성은 변함이 없다고 주장한 이들이 바로 로자와 레닌이었습니다. 당시에 이들은 스스로를 ‘혁명적 사회민주주의자’ 라고 불렀지요. p142”

 

수정주의자들은 자본가 계급의 논리를 그대로 받아들여 제국주의를 정당화하려고 노력했다. 그들의 가장 전형적인 논리는 우리가 아이러니하게도 우리나라의 식민지 근대화론자들의 입을 통해 듣는 것과 똑같다. 후진적이고 야만적인 지역을 문명화하기 위해 식민지를 지배한다는 것으로, 그들이 말하는 문명은 기독교, 근대 계몽주의, 자본주의적 생산 양식이다. 수정주의자들은 자국의 상층노동자들의 이익을 위해 식민지 민중을 배반했다. “이것이 수정주의와 혁명적 사회민주주의의 결정적 차이이자 20세기 내내 서유럽 사민주의와 나머지 지역의 사회주의를 갈라놓은 지점입니다.p147” 한마디로 수정주의자들의, 자본주의는 붕괴하지 않고 노동자들의 실질 이익도 증가했다는 주장은, 식민지 민중들에 대한 가혹한 수탈과 착취에 눈감은 결과이다. 로자는 이런 수정주의 노선에 반대하며, 자본주의의 붕괴를 과학적으로 입증하려 노력했다.

 

로자는 이런 상황에서 자본주의의 붕괴를 어떻게 확신했을까? “로자는 혁명의 객관적 조건으로서의 자본주의의 붕괴는 경제적 붕괴로 나타나지 않고, 정치적 충돌을 통해 나타날 것이라고 보았습니다. 세계적인 규모의 전쟁의 형태로 말입니다. 그녀가 판단하기에 지구상에는 이미 비자본주의 영역이 거의 남아 있지 않았습니다. 선진 제국주의 열강들에 의해 전 세계가 거의 분할되었다고 본 것입니다. 따라서 제국주의 국가들 중에서 후발 제국주의 국가들은 자본주의의 확대재생산을 위해서 다른 제국주의 국가들이 지배하는 식민지를 재분할 하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었습니다.당시 제국주의 국가들 앞에 남은 역사적 과정은 식민지를 재분할하기 위한 충돌이었습니다. 그게 바로 세계적인 규모의 제국주의 전쟁이 닥칠 것이라고 로자가 판단한 이유입니다. 불행히도 그렇게 됐고요p147~8”

 

그러나 자본주의는 붕괴하지 않았다. 그러면 로자는 폐기되어야 하는 것일까? 마르크스와 함께 말이다. 아마도 보는 사람들의 관점에 달려 있을 것이다. 자본주의는 여전히 거대한 괴물로 성장 중이고, 소련의 공산주의는 채 한 세기를 넘기지 못하고 붕괴했다. 이것으로 역사는 종결된 것일까? 이미 철 지난 유행으로 취급되지만 후쿠야마의 ‘역사의 종말’ 이 이루어진 것일까? 자본주의가 변신을 거듭하며 위기 속에 살아남았듯, 자본주의에 대항한 공산주의 혹은 사회주의 역시 단지 어떤 과정 속의 침체기를 겪고 있는 것은 아닐까? 아마도 다음 시대의 역사가 그 답을 말해 줄지도 모르겠다.

 

로자의 유명한 책 『사회 개량이냐 혁명이냐』에 대해 한마디만 덧붙이겠다. 베른슈타인의 수정주의를 비판한 책인데, 언뜻 보기에는 베른슈타인이 개량을, 로자가 혁명을 주장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 이분법은 베른슈타인이 만든 것이고, 로자는 이 문제 설정 자체가 잘못되어 있음을 비판하고 있다. 혁명이냐 개량이냐는 찬 소시지냐 뜨거운 소시지냐를 고르는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혁명과 개량은 같은 범주의 것이 아니라, 혁명이 상위의 개념이다. 혁명으로 가는 길에 개량적 전술도 있고, 무장봉기의 전술도 있다. 민주주의를 부르주아식 의회민주주의의 동의어로 보면 의회민주주의에 반대하는 모든 운동은 테러가 되어 버린다. 로자는 의회민주주의가 충분히 민주적이지 않기 때문에 더욱 근본적인 민주주의를 추구했다. 로자에게 그것은 파리 코뮨이나 소련의 소비에트와 같은 민중의 기구인 ‘평의회’ 였다. 그러므로 로자를 폭력적 테러리스트로 규정하며, 2001년 베를린 시의 ‘로자 기념조형물’을 반대한 우파의 주장은, 80년 전 수정주의자들의 그것과 닮았다. 로자는 부르주아 민주주의와는 다르지만, 더욱 본질적인 민주주의를 실현하려 한 혁명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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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읽는 독일 현대철학 처음 읽는 철학
철학아카데미 지음 / 동녘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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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가 직업인 지인들은 이런 책을 읽지 말라고 했다. 개설서나 입문서 백번 읽느니 철학자가 직접 쓴 책 한권을 읽는 것이 진짜 공부라고 말이다. 어려워도 그렇게 해야 제대로 된 시작이란다. 그런데도 나는 이런 책들이 보이면 눈이 반짝 거린다. 옳은 말하는 지인들이 모르는 것이 하나있다. 그들이 이삼십년 전에 훌륭하신 교수님들로부터 배워 익힌 그 기초라는 것이 이과 출신인 내게는 전혀 없다는 것을. 칸트가, 헤겔이 어떤 맥락 속에 있는지, 현상학이 무언지 해석학이 무언지 관념론이 무언지, 심지어는 형이상학과 철학이 어떻게 다른지도 모른다. 내게 『순수 이성 비판』은 ABC만 겨우 익히고 셰익스피어 원서를 집어 드는 것과 같다. 뭐 사전 들고 햄릿을 읽지 못하란 법은 없다. 영화 <더 리더>에는 문맹인 한나가 감옥에서 녹음된 책을 들으며 글자를 익히는 장면이 나온다. 그러나 나는 자유인 아닌가. 일반 시민의 철학적 교양을 위해 특별히 쉽게 만든 이런 책을 읽지 않는다는 것은 눈앞의 밥상을 걷어차는 것과 같이 미련한 일일 것이다.

 

 

『처음 읽는 독일 현대철학』은 철학 아카데미의 ‘처음 읽는 철학’ 시리즈 두 번째 권이다. 첫 번째는 프랑스 현대철학이었다. 작년에 읽었는데, 꽤 재미있었다. 현대철학하면 보통 포스트모더니즘을 떠올리고, 포스트모던하면 아무래도 프랑스 철학이다. 모두 포스트모던 철학자는 아니지만 하여튼 샤르트르, 알튀세르, 라캉, 푸코, 데리다, 들뢰즈, 바디우 등등 짱짱한 철학자들이 출연한다. 이 시리즈의 특징은 먼저 철학아카데미에서 강의한 내용을 묶었다는 것이고, 저자들은 각각의 철학자들을 전공한 학자들이다. 한 사람이 현대 프랑스 철학을 죽 개괄한 것이 아니라, 각각의 개별 강의를 모아 놓은 것이라 현대철학사라고 보기에는 통일성이 없다는 단점이 있다. 그러나 전공자들이라 각 철학자들의 핵심 개념을 잘 짚어주고 있다. 전체 철학사의 맥락 속에 개별 철학자들의 위치를 알고 싶었던 나는 살짝 아쉬웠지만, 그만하면 나쁘지는 않았다.

 

『처음 읽는 독일 현대철학』은 프랑스 편 보다는 대체로 쉬웠다. 프랑스 사람들 보다 독일 사람들이 생각과 말을 더 똑 부러지게 하는 편인지, 저자들이 더 쉽게 강의를 풀어냈는지 모르겠지만, 하여튼 독일이 주는 그 딱딱한 느낌 때문에 더 어렵고 지루하리라 예상했는데, 의외였다. 프랑스 편은 12명의 철학자 모두가 20세기에 태어난 사람들이다. 1901년 라캉부터 대부분 20세기 초반에 태어나, 20세기의 사상을 이끌었던 인물들이다. 그래서 현대철학하면 20세기부터 쳐주는가 보다 생각했다. 그런데 독일편에는 19세기 출생자가 반이 넘는다. 그것도 1818년에 태어난 마르크스는 아예 19세기의 사상가이고, 니체 1844년, 프로이트 1856년, 후설 1859년, 로자 룩셈부르크 1871년, 하이데거 1889년, 벤야민 1892년생이다. 근대와 현대를 가르는 기준이 뭔지 다시 한번 궁금해진다. 잘 모르지만 아마도 데카르트를 시작으로 하는 주체중심, 이성중심의 근대 관념론 철학이 헤겔에게서 완성된 이후, 이 관념론 철학에 대항하는 새로운 사상들을 현대철학으로 분류한 것이 아닐까 싶다. 마르크스의 유물론, 프로이트의 정신분석, 후설의 현상학 등이 그런 사상들로,『처음 읽는 독일 현대철학』의 앞자리를 차지하게 된 것이 아닐까, 혼자 생각했다.

 

 

‘처음 읽는 철학’ 시리즈의 목차는 거의 생년을 기준으로 순서가 정해진다. 그러다 보면 맥락상으로는 좀 왔다 갔다 한다. 예를 들어 프랑크푸르트학파가 세 명 나오는데 떨어져 있어, 죽 연결해서 읽는 것 보다는 산만하다. 리뷰를 하나하나 써 볼까 하다가 작년 여름에 프랑스편을 쓸 때, 고생한 것이 기억나 포기했다. 덥기도 했거니와 사실 스무 여 쪽 정도의 분량에 한 철학자의 사상을 압축해 놓은 것을 다시 줄여 리뷰하는 것이 무리기 때문이다. 내가 잘 아는 철학도 아니고, 생판 처음 읽는 철학자도 많은데, 이 짧은 글을 읽고 내가 알면 무엇을 얼마나 알았다 할 수 있겠나. 여하튼 그래서, 12명의 철학자들을 곰곰이 들여다 보다 몇 개의 묶음을 지어보았다. 일관된 기준은 아니고 그냥 쉽게 연상되고 연관되는 대로 묶은 것이다.

 

먼저 마르크스와 로자 룩셈부르크. 둘 다 꽤 알려진 인물이라 쓸 것이 없을지도 모르지만 일단 혁명가로 묶어 놓았다. 그 다음, 이 책은 ‘독일’이라는 특수성 때문에 연관되는 철학자들이 있다. 니체, 하이데거, 벤야민, 아렌트. 이들을 묶는 연관어는 ‘나치’ 다. 하이데거는 나치에 직접 가담한 전력으로 유명한 철학자이고, 아렌트는 하이데거의 제자이자 연인이었지만, 유태인 박해를 피해 미국으로 망명한 유태인 철학자다. 나치와 유태인이라는 비극적 한 쌍. 벤야민 역시 유태인으로 나치를 피해 망명하던 도중 자살한 비운의 사상가이다. 니체는 ‘힘에의 의지’ 라는 그 유명한 사상 때문에 나치의 이론적 근거로 은근히 이용당했다는 소문이 있다. 그 다음으로는 현대 독일철학의 대표주자인 프랑크푸르트학파 3인방이다. 1세대의 아도르노, 2세대의 하버마스, 3세대 호네트가 해당 되신다. 마지막으로 딱히 철학적 공통점은 없지만, 새로운 사상의 대표로서의 공통점을 가진다고 할 수 있는 3인의 철학자가 있다. 정신분석의 아버지 프로이트, 현상학의 창시자 후설, 현대 해석학하면 떠오르는 인물 가다머 이다. 현상학과 해석학, 제일 개념이 안 잡히는 까다로운 철학이지만, 뭐 어쨌든 이 책의 내용을 한번 따라가 볼 생각이다. 이제 틈틈이 가능하면 짧게, 그러나 네 묶음이나 되어버린 『처음 읽는 독일 현대철학』의 본격적인 리뷰를 마음먹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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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트] 헤겔 레스토랑 + 라캉 카페 - 전2권 Less Than Nothing 시리즈
슬라보예 지젝 지음, 조형준 옮김 / 새물결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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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리적인 것의 정치적 정지 

 

 

 

드디어 마지막이다. 작년 8월부터 읽기 시작했으니 7개월 정도 걸렸다. 작년 말에 끝내려 했지만, 이것도 일이라고 너무 지쳐서 두어 달 책을 덮어 버렸다. 여하튼 끝을 보게 되니 혼자라도 뿌듯하다. 사실 혼자가 아니란 생각이 들기도 한다. 누군가는 아마 이 어지럽고 의심스런 리뷰를 꾸준히 읽어주셨던 듯하다. <공감>란에 달린 1 혹은 2란 숫자가 참 따뜻한 힘이 되었다. 그래서 더 미안하다. 부디 이 글이 지젝에 이르는 길에 장애물이 되지 않기를 바란다.

 

지젝의 결론이 마음에 안 드는 사람이 많을 것 같다. 나도 아직 고개가 갸우뚱하는 부분이 없지 않다. 너무 급진적이기도 하고 어쩌면 반대로 너무 낡은 유물로의 복귀이기 때문이다. 어쨌거나 이 마지막 장은 매우 쉽고 재미있다. 한나절이면 술술 넘겨볼 수 있으니, 직접 읽어 보는 것이 가장 좋을 것이다.

 

 

지젝의 1988년 데뷔작(?)인 『이데올로기의 숭고한 대상』에서부터, 지젝이 꾸준히 비판해온 대상은 냉소주의자이다. 라캉의 사위인 자크 알랭 밀러 역시 이 무리에 속한다.

 

「주체는 상징적 상블랑들 (이상들, 주인-시니피앙, 이것 없이는 어떤 사회도 산산이 조각나고 말 것이다)의 필요를 인정하면서도, 그것들이 상블랑들이며 유일한 실재는 육체적 주이상스의 실재임을 알기 때문에 그것들과 멀리서 관계를 맺는다는 밀레의 냉소적·쾌락주의적 생각에 맞서 우리는 “향유하고 다른 사람들도 향유하도록 하자”는 그러한 태도는 진정한 특이성들을 위한 장을 열어줄 새로운 공산주의적 질서에서만 가능할 것이라는 점을 강조해야 한다. p1697」

 

라캉의 “속지 않는 자가 길을 잃는다”에 대한 밀레의 독법과 지젝의 독법은 완전히 반대이다. 밀레에 따르면 가치들, 이상들, 규칙들 따위는 단지 상블랑들일 뿐이지만 그것을 훼손하면 사회의 구조가 해체되기 때문에 마치 그것들이 실재인 양 행동해야 한다는 냉소적 격언에 이르게 된다. 그러나 본래 라캉적 관점은 정반대이다.

 

「즉 진짜 환상은 상징적 상블랑들을 실재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실재 자체를 실체화하는 것에, 실재를 실체적인 즉자 존재로 받아들이고 상징적인 것을 상블랑들의 단순한 텍스처로 환원시키는 것에 있다. 다시 말해 길을 잃는 사람은 정확히 상징적 텍스처를 단순한 상블랑들로 기각하며 그것의 효력은, 상징적인 것이 실재에 영향을 미치는 방식은, 우리가 상징적인 것을 통해 실재에 개입할 수 있는 방법은 보지 못하는 냉소주의자들이다. 이데올로기라고 하는 것은 기본적으로 주이상스의 핵심을 둘러싸고 있는 상징적 상블랑들의 네트워크를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데 있지 않다. 보다 근본적인 수준에서 이데올로기는 주이상스의 실재와 관련해 그러한 상블랑들을 ‘단순한 상블랑들’로 냉소적으로 기각하는 데 있다. p1699~70」

 

헤게모니적 이데올로기의 물질적 힘을 가장 잘 보여주는 명언이 있다. “파국적이지만 심각하지는 않다.” 전지구적 곤경을 눈앞에 두고 우리는 파국이 임박했다는 것을 알지만 어쨌든 그것을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는다. 내가 보고, 아는 것을 거부하게 하는 것, 그것이 이데올로기의 물질적 힘이다. 금융 붕괴의 전망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이러한 위협에 대처하기 위해 우리의 집단적 이데올로기는 애써 무시하려는 직접적 의지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이 의지를 포함해 시치미 떼기와 자기기만의 메커니즘을 동원하고 있다. “위협받고 있는 인간 사회들에서의 일반적인 행동 유형은 그러한 일이 닥치면 위기에 초점을 맞추기 보다는 눈을 가리는 것이다.” 파국적이지만 심각하지는 않다... p1744」

 

금융 위기 이후 일어난 영국 교외에서의 폭동은 이처럼 진행 중인 위기에 대한 0-수준의 반응이었다. 이 폭동은 무엇을 적극적으로 요구하는 것이 아니었다. 단지 반동적이며, 무력한 분노이자 힘의 과시로 가려진 절망, 득의 만연한 카니발로 가려진 질투였다. 그렇다면 이런 폭력적인 반응으로부터 어떻게 사회적 삶의 총체성의 재조직화로 나갈 수 있을까?

 

여기서 지젝은 놀랍게도 새로운 4인방을 제시한다. 신속한 결정을 내리고 그에 필요한 가혹함으로 그것을 실현할 수 있는 강력한 기구가 요구되기 때문이다. 그것은 인민 - 운동 - 당 - 지도자라는 4인방이다. 지젝은 이 4인방을 통해 공산주의를 불러 온다. 인민, 운동, 당은 그렇다 치고, 지도자까지.

 

그렇지만 인민은 더 이상 의지를 구현해야 할 신화적인 주권적 주체가 아니다. 새로운 질서로 적극적으로 한 발 내딛는 것은 인민의 능력 밖이다. 진정한 보통 사람을 추어올리려는 모든 시도와 반대로 우리는 그들이 정치적 행위자들로 변형되는 과정은 더없이 폭력적이라고 주장해야 한다. 인민은 정치적 과정의 수동적 배경이다.

 

언뜻 동의하기는 힘들다. 인민주권은 어떻게 되는 걸까? 지젝은 영화를 통해 논리를 펴려하지만 잘 모르겠다.

 

「운동 속에서 직접 ‘자신을 조직’하려고 할 때 인민이 창조할 수 있는 최대의 것은 발언자들이 복권 추첨처럼 선택되며, 모든 사람에게 발언 기회가 주어지는 등의 평등한 논쟁 공간뿐이다. 하지만 그러한 항의 운동은 행동해야 하는, 새로운 질서를 부여해야 하는 순간이 되자마자 부적합한 것으로 드러난다. - 이 지점에서 당과 같은 어떤 것이 필요해진다. 심지어는 급진적인 저항운동에서도 인민은 자신이 원하는 것을 알지 못하며 새로운 주인에게 그것을 말해달라고 요구한다. 하지만 만약 인민이 모른다면 당은 알까? 여기서 우리는 역사적 통찰력을 소유하고 있으며 인민을 지도하는 당이라는 통상적인 주제로 되돌아온 것은 아닐까? p1748~9」

 

그러나 당의 역할은 당이 어떤 특권적 지식에 접근하는 것과는 무관하다. 당은 알고 있다고 가정된 주체의 형상이 아니라 모든 가능한 오류가 일어나는 지식의 열린 장이다. 이들이 인민을 대변한 이유는 정치적 동역학에서 이들이 동원하는 역할을 한 것에 달려 있다. 당은 조직하는 역할을 하는, 집단적인 정치적 주체와 관련된 새로운 유형의 지식의 권위이다.

 

하지만 인민들 자체를 정치적 주체화의 조직화된 형태들과 분리시키는 간극은 어쨌든 극복되어야 한다. 인민과 당 사이를 긴밀하게 하는 것은 답이 아니다. 그것 이상의 어떤 것이 필요한데, 그것이 ‘지도자’ 이다. 지도자는 헤겔이 옹호하는 군주제의 절대군주와 같은 역할을 한다. 스탈린주의적 지도자의 문제는 과도한 개인숭배가 아니라 정반대이다. 그는 주인으로 충분했던 것이 아니라 관료적인 당-지식의 일부, 전형적인 알고 있다고 가정된 주체로 남아 있었던 것이다.

 

오늘날의 실업자는 노동예비군이라는 고전적 개념을 넘어 새로운 범주를 갖는다. 일시적 실업자부터 더 이상 고용이 불가능해진 영구 실업자를 거쳐 슬럼가나 그 밖의 다른 유형의 게토에 사는 사람들과 전지구적 자본주의적 과정으로부터 배제된 지역, 인구들, 국가들에 이른다. 실업은 자본주의 자체의 본질을 구성하는 축적과 팽창의 동력학과 구조적으로 분리 불가능하다. 프레드릭 제임슨은 이처럼 새로운 구조적 실업을 착취의 한 형태로 특징짓는다. 이 피착취자들은 라노비치의 농담을 통해 묘사할 수 있듯 이중의 착취 속에 있다. “왜 착취당한다고 생각해?” “두 가지 이유에서지. 내가 일할 때 너희 자본가들이 나의 잉여가치를 가져가지.” “하지만 너는 실업자잖아.” “그것이 바로 두 번째 이유지.” 구조적 실업은 착취의 또 다른 형태이다.

 

「착취에 대한 이러한 강조의 중요성은 그것을 지배와, 즉 다양한 버전의 포스트모더니즘의 ‘권력의 미시정치학’이 선호하는 주제인 지배와 대립시켰을 때 분명해진다. 간단히 말해 푸코와 아감벤의 이론은 불충분하다. 지배의 규율 권력의 메커니즘에 대한 두 사람의 모든 상세한 정교화들, 배제된 자들, 벌거벗은 생명, 호모 사케르 같은 모든 풍부한 개념들은 착취의 중심성에 의해 정초되어야 한다. 경제적인 것에 대한 이러한 참조 없이 지배에 맞선 투쟁은 “본질적으로 도덕적인 또는 윤리적인 것으로 그칠 것이며, 그러한 생산양식 자체의 변혁이 아니라 간헐적인 반란과 저항 행위로 그치고 말 것이다.” - 그러한 권력의 이데올로기들의 적극적 프로그램은 일반적으로 이런저런 유형의 ‘직접’ 민주주의 중의 하나인 경우가 많다. 지배에 대한 강조의 결과는 민주주의적 프로그램인 반면 착취에 대한 강조의 결과는 공산주의적 프로그램이다. p1754~5」

 

지배 개념이 알아채지 못하는 것은 오직 자본주의에서만 착취가 자연화 된다는 것, 경제가 기능하는 방식 속에 새겨진다는 것이다. 시장 경제에서 사람들 간의 관계는 상호 인정된 자유와 평등의 관계인 것처럼 나타난다. 지배는 더 이상 직접적으로 구현되지 않으며 그 자체로는 보이지 않게 된다.

 

「현대의 좌파들이 반복하는 이야기 중에 보편적인 열정에 의해 선출된 지도자나 당은 ‘새로운 세계’를 약속해 준다는 것이다. (만델라, 룰라 등) 하지만 그런 다음 조만간 통상 몇 년 후에 그들은 핵심적인 딜레마에 봉착한다. 즉 과감히 자본주의 메커니즘에 메스를 들이대느냐 그저 ‘시늉만 할 것인가?’ 하는 것이 그것이다. 메커니즘을 교란시키면 거의 즉각 시장의 동요, 경제적 혼란에 의해 ‘처벌 받을 것이다.’ 따라서 비록 반자본주의가 정치적 행동의 직접적 목표가 될 수 없는 것이 사실이지만 -정치에서 우리는 익명의 ‘체계’가 아니라 구체적인 정치적 행위자와 그들의 행위에 반대한다- 우리는 여기서 목표와 목적을 구분하는 라캉의 방법을 적용해야 한다. 즉 반자본주의는 해방정치의 즉각적인 목표는 아니지만 궁극적 목적이, 모든 행위의 지평이 되어야 한다. p1757」

 

그렇다면 어떻게 탈정치적인 탈-역사화의 교착 상태를 벗어날 수 있을까? 월가를 점령하라 이후 무엇을 할 것인가? 이 운동은 진실로 하나의 진공을 창조했다. 헤게모니적 이데올로기의 장 속에서 말이다. 이 진공을 적절한 방식으로 메우려면 시간이 필요하다.

 

「우리 앞에는 먼 길이 놓여 있으며, 곧 진정 어려운 질문을 다루어야 할 것이다. - 우리가 무엇을 원하지 않는지가 아니라 우리가 진정 무엇을 원하는지에 대한 질문 말이다. 어떤 형태의 사회조직이 지금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자본주의를 대체할 수 있을까? 우리는 어떤 유형의 새로운 지도자들을 원하는가? 통제와 억압을 포함해 어떠한 종류의 기관을 원하는가? 20세기의 대안들은 분명히 먹히지 않는다. ‘수평적 조직화’의, 평등주의적 연대와 아무런 제한도 없는 열린 토론을 벌이는 시위 군중의 즐거움들을 즐기는 것은 황홀하나 그러한 토론들은 몇몇 새로운 주인-시니피앙들 주위뿐만 아니라 ‘무엇을 할 것인가’라는 낡은 레닌주의적 질문에 대한 구체적 대답 속에서 합쳐져야 한다. p1761」

 

지젝은 우리에게, 월가를 점령하라 이후 열려진 공간 속에, 시간을 가지고 질문을 던질 것을 제안한다. 우리에게는 매우 당혹스럽게도, 근대적 패러다임인 자본주의와 민주주의는 아니라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더욱 당황스럽게도, 이미 인민은 답을 알고 있다는 것이다. 지금 필요한 것은 답이 아니라 그 답에 이르는 적절한 질문이다.

 

「대답을 가진 것은 인민이며, 이들은 단지 답을 가진 것에 대한 질문을 알지 못할 뿐이다. p1763」

 

지식인의 역할이 바로 이것이다. 지식인들은 그것들이 무슨 질문에 대한 대답인지를 제시해야 한다. 이것은 정신분석의 상황과 같다. 환자는 대답을 알고 있지만, 증상이 바로 답이다, 그것들이 무슨 질문에 대한 대답인지는 모른다. 분석가는 이 질문들을 정식화해야 한다. 오직 그처럼 인내심 있는 작업을 통해서만 강령이 나올 수 있을 것이다.

 

「일반 대중들 다수는 아직 제기되어본 적이 없는 질문들에 대한 답을 갖고 있다. 그리고 벽들보다 더 오래 살 수 있는 능력을 갖추고 있다. 그러한 질문들이 아직 제기되지 않은 것은 그렇게 하려면 진실처럼 들리는 말과 개념이 필요한데 민주주의, 자유, 생산성 등 현재 사건들을 명명하기 위해 사용되고 있는 것들은 무의미해졌기 때문이다. 새로운 개념들과 함께 그러한 질문들은 곧 제기될 것이다. 역사는 정확히 바로 그렇게 질문하는 과정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곧 이라고? 한 세대 안에. p17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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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트] 헤겔 레스토랑 + 라캉 카페 - 전2권 Less Than Nothing 시리즈
슬라보예 지젝 지음, 조형준 옮김 / 새물결 / 2013년 7월
평점 :
품절


14_

양자 물리학의 존재론

 

 

0.  

 

   물질의 세계 속에서 사유는 어떻게 가능한가? 사유는 어떻게 물질로부터 나타날 수 있는가? 주체 또한 마찬가지다. 나는 정확히 나의 몸이 아니다. 어떻게 불완전한 존재론으로부터 주체성의 등장을 설명할 수 있을까?

 

 

1. 존재론적 문제   

 

   EBS에서 <빛의 물리학>이란 다큐를 방송한 적이 있다. 뉴턴의 고전물리학에서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과 양자 물리학까지, 물리학의 역사를 꿰뚫는 대단히 흥미로운 프로그램이었지만, 무척이나 어려운 내용이기도 했다. 특히 코펜하겐학파, 슈뢰딩거의 고양이, 이중 슬릿 실험 따위가 나오는 양자 역학은 도무지 뭐가 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 여기 14장에 또 그 이야기가 나온다. 지젝이 이전에는 살짝살짝만 인용하던 양자 물리학을 아예 통째로 한 장에 걸쳐 들고 나온 것이다. 양자 역학이 과학자들에게도 어렵다는데 지젝이 얼마나 정확하게 이해하고 철학적 접근을 시도하는지 나는 모른다. 다만 살짝 의심을 하기는 했다. 그래봤자 내가 이해하지 못하는 내용을 다른 사람이 이해하고 있는 건지 아닌지를 가려낼 재주는 없다. 여하튼 그런 의미로 이 장을 요약하지 말고 넘어갈까 하다가 그래도 이제껏 정리해 온 것이 아까워 조금만 해볼까 한다. 하긴 언제는 제대로 이해해서 요약했었나...

 

   오늘날 철학적 재사유를 요구하는 과학적 발견은 양자 물리학이다. 양자 물리학과 우주론은 철학적 함의를 갖고 있으며, 철학에 도전을 재기한다는 것을 받아들여야 한다. 양자 공식들에 의해 포괄되고 있는 현상들의 존재론적 지위는 무엇인가? 분명히 우리의 일상현실의 일부는 아니지만 이 현상들은 과학자의 상상력이나 담론적 구성물로 환원될 수 없는 지위를 갖고 있는 것이 틀림없다.

 

   「양자 물리학에 따르면 정신이 현실을 창조한다는 등등의 이와 유사한 사변에 굴복하는 것을 피하려면 무엇보다 먼저 양자 물리학의 명제들은 오직 복잡한 수학적 형식화의 장치 안에서만 기능한다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따라서 상식적인 존재론과 이 물리학의 역설적 함의들(공시성, 뒤로 흐르는 시간 등)을 상식적인 존재론을 갖고 직접적으로 대결하면서 그러한 수학적 형식화의 장치를 무시하면 뉴에이지의 신비주의로 나가는 길이 열리게 된다. p1604 」

 

   이 작업에는 피해야 할 지뢰도 만만치 않다. 여하튼 우리의 얄팍한 상식으로 양자 물리학과 철학을 엮으려다간 엉뚱하게 도인이 될 수도 있다는 말, 일단 새기고 시작하자.

 

 

2. 실재 속의 지식   

 

   상징적 현실과 양자적 원-현실에는 유사성이 있다. 일종의 누빔점이 그것이다. 누빔점 비유는 슈뢰딩거의 고양이연상시키는데, 지젝은 보어를 옹호하며 코펜하겐 학파의 이론을 채택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즉 우리가 상자의 문을 열고 확인하기 이전에는 죽은 고양이와 산 고양이가 중첩되어 있으며, 관찰자의 개입과 동시에 파 기능의 붕괴가 일어나면서 고양이는 죽었거나 살았거나 하나의 현실로 확정된다는 것이다. 이 누빔점을 통해 양자적 원-현실은 보통의 현실로 이행된다.

 

   「상징적 현실의 기본적인 특징은 존재론적 불완전성, 비전체에 있다. 그것은 아무런 내재적 정합성도 갖고 있지 않으며, ‘부유하는 시니피앙들’의 다수성으로, 그것은 오직 주인-시니피앙의 개입을 통해서만 안정될 수 있다. - 어떠한 상징적 개입 없이도 그저 있는 그대로 존재하는 자연적 현실과는 분명히 반대로 -아무튼 그렇게 보인다 - 말이다. 하지만 정말 그럴까? 양자적 원-현실 또한 자신을 안정화시켜 일상적 대상들과 시간적 과정들로 이루어진 보통의 현실 속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상동적인 ‘누빔점(여기서는 파 기능의 붕괴라고 불리는 것)’을 필요로 한다는 것이야말로 양자 물리학의 핵심적인 존재론적 결과가 아닌가? 그리하여 우리는 여기서 또한 비정합적 원-현실과 그것을 완전한 현실로 구성하는 그것의 등록의 탈중심화된 작인 사이의 (시간적) 간극과 마주치게 된다. 여기서도 또한 현실은 완전히 자기 자신이 아니며, 자신과 관련해 탈중심화되어 있다. 그것은 소급적으로, 자신의 등록을 통해 자기 자신이 된다. p1615」

 

   「개시 또는 은폐의 구조, 사물들은 항상 배경의 일부가 잘려나간, 결코 완전히 존재론적으로 구성되지 못한 공백으로부터 출현한다는 사실은 현실에 대한 우리의 유한한 지각만이 아니라 현실 자체의 구조이자 사실이다. 아마 바로 거기에 양자 물리학의 궁극적인 철학적 결론이 있을 것이다. 양자 물리학의 가장 탁월하고 대담한 실험들은 그것이 제공하는 현실 묘사가 불완전하다는 것이 아니라 현실 자체가 존재론적으로 불완전하며, 불확정적임을 입증하고 있다. - 현실에 대한 우리의 제한된 지식의 결과로 간주되는 결여는 현실 자체의 일부인 셈이다. p1621~2」

 

   지젝이 라캉과 헤겔을 통해 귀에 못이 박힐 정도로 주장한 비전체, 빗금친 대타자 같은 것들이 양자 물리학을 통해서도 입증되고 사유된다는 말이다.

 

   「 다시 한번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하이데거와 관련해 칸트로부터 헤겔로의 이행을 반복해야 한다는 것이다. 즉 하이데거의 존재의 역사는 궁극적으로 칸트적 초월론의 역사적으로 발본화된 버전이다. 하이데거에게서 존재의 역사는 인간에게 운명으로 주어진 존재의 의미의 시대적 개시의 역사이다. 이 역사는 그 자체로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의 궁극적인 한계이다. - 우리의 모든 지식은 이미 역사적으로 주어진 존재의 개시를 전제하고 그것 내에서 움직이며, 단지 일어날 뿐인 이러한 개시들의 심연 같은 놀이가 바로 우리의 한계이다. 양자 물리학의 존재론적 함의는 우리가 그러한 한계를 넘어서 더 앞으로 나아가 현실 자체를 꿰뚫어 볼 수 있다는 것이 아니라 하이데거에 의해 설정된 한계는 즉자 존재 자체에 속한다는 것이다. 공백으로부터, 즉 '무로부터' 나타날 수 있는 다수의 존재자로 그득한 것으로서의 없음(무)이라는 양자적 개념의 기저에 깔린 함의가 바로 이것이 아닐까? 현실-그-자체는 없음, 공백이며, 이 공백으로부터 부분적인, 즉 아직 완전히 구성되지 않은 현실의 정황들이 출현한다. 이 정황들은 결코 '전체'가 아니며, 마치 특정한 제한된 관점으로부터만 보일 수 있는(존재하고 있는)듯이 항상 존재론적으로 일부가 잘려나가 있다. 오직 일부가 잘려나간 다수의 우주만 존재할 뿐이다. 전체라는 관점에서 볼 때 공백만이 있을 뿐이다. 또는 과감하게 단순화해 정식화해보자면, '객관적으로'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한정적인 우주는 제한된 관점에서 볼 때만 존재하기 때문이다. p1622 」

 

   지젝이 선호하는 양자 물리의 이론을 한 번 들여다보자.

 

   「양자 혁명은 여기서 파와 입자라는, 본래적이며 환원 불가능한 이원성을 상정할 뿐만 아니라 그러한 이원성 내에서 (정도 차이는 있지만 공개적으로) 파에 특권을 부여한다. 예를 들면 파를 입자들 사이의 상호작용으로 이해하는 것으로부터 입자들을 파들의 상호작용에서의 결절점으로 이해하는 쪽으로 전환할 것을 제안하고 있다. 따라서 양자 물리학에서 파는 입자(또는 입자에 일어나는 것)의 속성으로 환원될 수 없다. 또한 보어가 양자물리학은 현상들의 ‘배후에서’ 실질적 토대로 ‘숨어 있는’ 어떤 것이 아니라 현상들을 다룬다(측정한다)고 주장한 것은 이 때문이다. ... ‘물’의 물로서의, 실체적인 존재자로서의 출현 자체가 지각을 통한 파 기능의 붕괴의 결과이다. 그리하여 다시 한번 상식적인 관계는 뒤집힌다. 즉 ‘객관적’ 사물이라는 개념은 지각에 의존하는 주관적인 것인 반면 파의 동요가 지각에 앞서며, 그리하여 보다 ‘객관적’인 셈이다. p1628」

 

 

3. 행위자적 실재론

 

   ‘행위자적 실재론’은 ‘바라드’라는 철학자(?)의 논리이며, 바라드는 보어의 물리학을 체계화함으로써 자신의 이론을 세공하는 것처럼 보인다. 어쨌든 이 절에서 보어는 바라드를 통해, 바라드는 지젝을 통해 내게 읽히는 셈이니, 그렇게 이해해야 하는 보어가 얼마만큼 보어에 부합하는지 잘 모르겠다.

 

   여하튼 보어의 교훈은 현실이 주관적이라는 것이 아니라 관찰하는 주체인 우리가 관찰하는 현실의 일부라는 것이다. 즉 보어는 레닌의 『유물론과 경험비판론』의 소박한 실재론적 인식론과 존재론에 대한 유물론적 비판과 같다.

 

   「보어는 그러한 입장의 관념론적 전제를 폭로한다. 즉 만약 현실이 ‘저기 바깥에 존재하며’, 우리가 그것에 무한대로 접근한다면 -최소한 함축적으로는- 관찰자인 우리는 이 현실의 일부가 아니며, 그것의 외부 어딘가에 서 있게 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어떤 현상의 뒤엉킨 통일(성) 내에는 관찰 주체와 관찰 대상을 구분할 수 있는 선험적인 명백한 방법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한 구분은 모두 현상의 통일(성) 내에서의 우연적인 행위자적 절단에, 단지 ‘주관적’인 정신적 결정이 아니라 ‘구성되며’, 행위자에 의해 구현되며, 물질적 조건의 제약을 받는 절단에 달려 있다. p1634」

 

   「우주를 전체로 측정하기 위해 측정하는 행위자들이 가야 할 우주의 바깥은 정말로 존재하지 않는다...우주에 바깥은 없기 때문에 체계 전체를 서술할 방법은 없다. 따라서 그러한 서술은 항상 내부에서 이루어진다. 오직 세계의 한 부분만이 따로따로 자신에게 이해할 수 있도록 만들어질 수 있을 뿐이다. 세계의 다른 부분은 자신과 구별해야 하는 부분이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p1636」

 

   바라드에 대한 지젝의 비판은 그녀가 순수 차이를 무시한다는 데 있다. 그런데 이 차이를 만드는 단락의 원-버전을 양자의 장에서 발견할 수 있다. 왜 그리고 어떻게 양자적 우주 자체가 내재적으로 파 기능의 붕괴를 요구하는 것일까? 측정 행위에서 파 기능의 붕괴 문제는 양자적 용어가 아니라 고전적 용어로 정식화 되어야 한다.

 

   「파 기능의 붕괴가 양자역학에서 이례적인 위치를 차지하는 이유이다. 그것은 관찰이 이루어진다는 사실에 의해 요구되지만 양자 이론에 의해 예견되지 않는다. 그것은 추가적 가정으로, 양자역학이 정합적인 것이 되려면 그렇게 가정되어야 한다. p1644」

 

  양자 물리학이 제안하는 것은 전체적인 불안정성이 국소적 안정의 토대라는 것이다. 즉 우주 안의 존재자들은 안정적인 규칙들에 따라야 하며, 인과관계의 연쇄의 일부이지만 우연적인 것이 이 연쇄의 총체성 자체이다.

 

   연결도 안 되는 문장들을 몇 가지 나열해 봤다. 말이 되게 이 절을 요약하기에는 바라스, 보어, 파 기능의 붕괴, 힉스장 까지 너무 많은 것들이 어지럽게 얽혀있다.

 

 

4. 두 진공

 

   2013년에 힉스입자를 발견했다고 떠들썩했던 적이 있다. 그런데 힉스 입자는 뭐지? 검색하다가 좋은 글을 발견했다. 물론 제대로 이해되지는 않았지만, 일단 힉스 입자 혹은 힉스장이 궁금하면 여기를 먼저 읽어보자. 그리고 지젝이 설명하는 힉스장과 두 진공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그렇다고 더 잘 이해된다는 말은 아니다.

 

   「힉스장은 힘과 입자들이 다르게 행동할지 말지를 규정한다. “스위치가 켜지면” 기본 입자들 사이의 균형은 무너지며, 입자들 사이의 차이의 복잡한 패턴이 출현한다. “스위치가 꺼지면” 힘들과 입자들은 서로 구분이 불가능해지며 체계는 진공 상태에 있게 된다. - 입자 과학자들이 그토록 필사적으로 힉스 입자를 찾으며, 종종 그것을 ‘신의 입자’라고까지 언급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이 입자는 라캉이 소문자 대상a, 욕망의 대상-원인이라고 부르는 것, 즉 진공의 균형을 깨뜨리는 원인, 균형을 깨뜨리고 차이를 도입하는 X와 등가물이다. - 간단히 말해 다름 아니라 바로 무(진공, 순수한 잠재성들의 공백)로부터 어떤 것(현실적으로 차이가 나는 입자와 힘들)으로의 이행의 원인에 다름 아닌 것이다. p1653」

 

   힉스장 스위치의 on과 off에 따라 두 가지 진공을 설정한다. off 상태가 가짜 진공 즉 모든 힘과 입자들이 구분 없이 순수 균형을 이루고 있다. 이 진공이 가짜인 것은 그 균형을 위해 일정한 양의 에너지 지출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on 상태가 진짜 진공이다. 입자와 힘들은 구분되지만 지출되는 에너지는 0이기 때문이다. 에너지적으로 말하자면 힉스장이야말로 거꾸로 무활동, 절대적 휴면 상태이다. 처음에는 가짜 진공이 있다가, 이것이 방해를 받으면 균형이 무너지면서 진짜 진공 상태가 된다. 모든 에너지 체계와 마찬가지로 힉스 장 역시 에너지를 최소화하는 방향으로 나가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 “아무것도 없는 것이 아니라 어떤 것이 있는 것”은 이 때문이다. 에너지적으로 어떤 것이 있는 것이 없는 것보다 저렴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여기서 데모크리토스의 덴이라는 개념으로 돌아가게 된다. ‘무 보다 저렴한 어떤 것’, 무보다 못한 기묘한 전존재론적 ‘어떤 것’으로 말이다.

   따라서 두 개의 무를 구분하는 것이 핵심적이다. 전존재론적 덴, ‘무 보다 못한 것’의 무와 그 자체로, 직접적 부정으로 상정된 무가 그것이다. - 어떤 것이 출현하려면 전존재론적인 무가 부정되어야 하며, 직접적/명백한 텅 빔으로 상정되어야 하며, 어떤 것은 오직 이러한 텅 빔 내에서만 출현할 수 있으며 ‘아무 것도 없는 것 대신 어떤 것’이 있을 수 있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따라서 최초의 창조 행위는 공간을 텅 비우는 것, 무를 창조하는 것이다. p1655」

 

   「이것은 이 두 진공은 또한 대칭적이지 않음을 의미한다. 즉 우리는 양극성이 아니라 쫓겨난 일자를, 말하자면 자신과 관련해 지연되고, 항상 이미 무너진, 항상 이미 균형이 깨진 일자를 다루고 있는 것이다. ‘순수한’ 진공은 항상 ‘가짜’로 자신을 드러내고, 이미 최소 행위와 방해를 포함함고 있는 ‘진짜’ 진공의 균형을 향해 끌려가고 있다. 이 두 진공 간의 긴장을 유지하는 것이 핵심적이다. 즉 가짜 진공은 단순히 오직 진짜 진공만을 남기는 한갓 환상에 불과한 것으로, 그리하여 유일하게 진정한 평화는 부단한 활동, 균형 잡힌 원환적 움직임에만 있을 수 있는 것으로 기각될 수는 없다. - 진짜 진공 자체는 영원히 트라우마적 방해로 남아 있을 것이다. p1662」

 

 

5. 덴이 존재한다

 

   ‘덴’은 1장의 <일자에서 덴으로> 에 나오는 데모크리토스의 개념이다. 실재로서의 無 또는 'less than nothing' 이며, 힉스 입자다. “유물론의 근본적 공리는 공백/없음이 (유일하게 궁극적) 실재라는 것, 즉 존재와 공백은 구분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이 절에서 지젝은 “사유는 생각하기의 죽음을 어떻게 생각하는가?” 라는 브래지어의 질문을 출발점으로 이 책 전체를 요약하려 한다. 그러니 다 했던 말이란 소리다.

 

   「진짜 문제는 어떻게 마치 내가 이미 죽은 것처럼 또는 좀 더 구체적으로는 멸종된 것처럼 나 자신을 사유할 수 있는가이다... 그리고 바로 이것이 코기토, ‘객관적’ 과학을 지탱하고 있는 분리된 시선의 이러한 0-점이다. 자신을 대상의 일부로, 이미 죽은 것으로 생각할 수도 있는 이처럼 분리된 X, 이 ‘안 죽은’ X가 주체로, 따라서 문제는 정신없이 즉자 존재를 사유하는 것이 아니라 사유하는 것 자체의 이 0-점의 ‘대상적’ 지위를 사유하는 것이다. 이처럼 영원히 손에 잡히지 않는 주체의 대상적 맞짝, 주체‘인’ 화석이 바로 라캉이 대상a라고 부르는 것으로, 유일하게 진정한 즉자 존재는 이 역설적 대상뿐이다. p1670」

 

   덴은 일자들-보다-못한 것( 무 보다 못한 것)의 전존재론적인 비정합적인 다수성을 가리키는 이름이다. 그것이 즉자 존재를 가리킬 수 있는 유일한 변증법적 유물론적 후보이다. 그렇다면 변증법적 유물론의 관점에서 ‘물-자체’란 무엇인가?

 

   「변증법적 유물론의 대답은 이렇다. 즉 오직 이 어떤 것이 무보다 못한 것일 때, 덴의 전존재론적인 원-현실일 때만, 이 원-현실의 내부로부터 일상적인 현실은 ‘객관적 현실’을 구성하는 주체의 출현을 통해 나타난다. 일자들의 모든 긍정적 현실은 이미 현상적인 것, 초월론적으로 구성된 것, 주체와 ‘상호 관련된’ 것이다. p1676」

 

   그렇다면 어떻게 원-현실의 즉자 존재로부터 초월론적으로 구성된 본래적 의미의 현실로 이행할 것인가?

 

「주체와 객체라는 쌍에서 즉자 존재는 주체 쪽에 있다. 분열된 주체가 있기 때문에 (‘외적 현실의’)(초월론적으로 구성된) 대상들이 있으니까 말이다. (주체와 객체 사이의 분열에 선행하는) 주체의 이러한 구성적 분열은 주체‘인’($) 공백과 이 주체의 불가능한-실재적인 대상적 맞짝, 즉 순수하게 잠재적인 대상a 사이의 분열이다. 우리가 (실정적으로 존재하는 대상들의 구성적인 장으로) ‘외부 현실’이라고 부르는 것은 빼기를 통해, 즉 어떤 것이 그것으로부터 제해질 때 나타난다. - 그리고 이 어떤 것이 대상a다. 따라서 주체와 대상(객관적 현실) 사이의 상호관계는 그와 동일한 주체-대상이라는 상관항, 불가능한-실재 대상에 의해 유지되며, 이 두 번째 상관관계는 완전히 다른 종류의 것이다. p1677」

 

   이것은 실제로는 실재의 존재론은 존재하지 않음을 의미한다. 존재의 실정적 질서의 장은 실재를 빼냄으로써 나타나기 때문이다. 즉 존재의 질서와 실재는 상호 배제적이다.

 

   또한 실재는 상징적인 것의 효과이다. 상징화 과정은 내속적으로 좌절되며, 실패할 운명인데, 실재란 상징적인 것의 이러한 실패이기 때문이다.

 

   「실재는 (즉자존재가 아니라) 자신에게 가닿으려는, 자신을 완전히 실현하려는 상징적인 것의 실패의 결과이다. 하지만 그러한 실패는 상징적인 것이 그 자체로서 실패하기 때문에 일어난다. 라캉에게서 주체 자체가 ‘실재의 대답’인 것은 이러한 의미에서이다. 즉 주체는 무엇인가를 말하기를 원하지만 실패하며 이 실패가 주체이다. - ‘시니피앙’의 주체는 말 그대로 자신이 되는 것에 실패한 데 따른 결과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또한 상징적 공간 내에서 결과는 원인에 맞선 반응인 반면 원인은 원인의 소급적 결과이다. 즉 주체는 실패하는 시니피앙을 생산하며, 실재로서의 주체는 이러한 실패의 결과이다. p16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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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트] 헤겔 레스토랑 + 라캉 카페 - 전2권 Less Than Nothing 시리즈
슬라보예 지젝 지음, 조형준 옮김 / 새물결 / 2013년 7월
평점 :
품절


13_

4인방 : 투쟁, 역사성, 의지 ....... 초연한 내맡김

 

 

 

   13장의 대상은 하이데거이다. 지젝은 하이데거로 박사 학위 논문을 받았다. 지젝은 여러 책에서 하이데거를 다루고 있는데, 특히 그의 나치즘과의 연루를 정면으로 파헤치고 있다. 그 결론은 다소 거북할 수 있는데, 하이데거는 올바른 발걸음을 내디뎠다는 것이다. 『잃어버린 대의를 옹호하며』의 1부 3장의 제목은 <금지된 지식인들, 혹은 왜 하이데거는 1933년 (비록 잘못된 방향일지라도) 올바른 발걸음을 내디딘 걸까> 이다. 이것을 두고 지젝을 전체주의자라고 비난할 수도 있다. 그런데 이에 대한 지젝의 대답은 그의 또 다른 책의 제목 『전체주의가 뭐 어쨌다고?』로 돌아오지 않을까 싶다. 13장의 철학적 논의들은 결코 당당할 수 없을 것 같은 그의 주장이 어떻게 철학적 타당성을 획득하는가를 위험하게 설파하고 있다.

 

 

1. 왜 라캉은 하이데거주의자가 아닌가?

 

   하이데거는 데카르트의 코기토에 대한 주요한 비판자이다. 라캉은 적어도 1950년대에는 하이데거를 받아들였다. 라캉은 언어의 본질은 존재의 개시라는 하이데거의 개념을 배경으로 프로이트의 ‘원초적 긍정’이라는 개념을 설명한다. 그런데 이후 라캉은 입장을 완전히 바꾸어 데카르트의 코기토를 무의식의 주체로 받아들였다. 왜?

 

 

2. 헤겔 대 하이데거

 

   우스갯소리를 하자면, 이 대결의 승자는 보나마나 헤겔이다. 지젝에게 헤겔은 거의 절대자다. 내 기억으로는 지젝이 헤겔을 제대로 비판하는 것은 보지 못한 것 같다. 라캉마저도 헤겔과 붙여 놓으면 항상 라캉이 헤겔을 오독한 것으로 판정이 내려진다. 하이데거와 라캉의 경우라면 라캉의 승리가 될 것이다. 결과적으로 하이데거 < 라캉 < 헤겔 이라고 볼 수 있다. 칸트와 헤겔 역시 헤겔의 절대 승이다. 마르크스 대 헤겔도 당연히 헤겔이다. 부정적으로 보자면, 헤겔에 대한 무수한 비판들 모두 지젝에게는 헤겔에 대한 오독에서 비롯된 것일 뿐이다. 지젝이 맞는지는 모르겠지만, 지젝을 읽을 때 참조하고 보면 적어도 지금 지젝이 누구를 옹호하고 누구를 비판하는지를 가리기에는 한결 수월해 진다. 책이 워낙 어렵다보니 별 꼼수를 다 부린다, 내가.

 

   「이처럼 헤겔적인 ‘경험’을 절망의 길로 묘사하면서 하이데거가 놓치고 있는 것은 그것이 포함하고 있는 심연의 본질 그 자체이다. 즉 죽음에 직면해야 할 때 산산이 조각나는 것은 자연적 의식뿐만 아니라 자연적 의식이 자신의 부적합성 또는 실패로 간주하는 것의 척도로서의 초월론적 배경 또는 틀 또한 그렇게 된다. - 헤겔의 표현대로 하자면, 만약 우리가 참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진리의 척도에 맞지 않는다면 이 척도 자체를 포기해야 한다. 하이데거가 변증법적 과정의 현기증 나는 심연을 놓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자연적 의식이 고통스러운 경험을 통해서 서서히 접근할 수 있는 진리의 기준 같은 것은 없다. 이 기준 자체가 과정에 사로잡혀 있으며, 그리하여 되풀이해서 기반이 침식당하기 때문이다. p1526」

 

   그렇다면 하이데거가 간과하는 고통의 차원은 무엇일까?

 

 

3. 언어의 고문실

 

   벤야민은 인간이 폭력이 아닌 방법으로 갈등을 해결할 수 있는 가능성을 언어에서 찾는다. 언어는 상호 이해의 고유한 영역이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 인간은 말을 할 수 있기 때문에 어떤 짐승들보다도 폭력을 더 잔인하게 행사할 수 있지 않을까? 하이데거 역시 언어가 가진 많은 폭력적 양상에 주목한 바 있다.

   라캉은 하이데거의 “언어는 존재의 집”이라는 모티브를 변주하여, 상징적 질서 이론의 기초를 만들었다. 그러나 이것은 하이데거가 미처 보지 못했던 언어의 폭력적 양상 중 하나로 라캉은 하이데거의 모티브를 프로이트 쪽으로 선회시켜 하이데거의 집을 고문실로 특징 지웠다.

   스탈린 시절 최고위직 당 간부가 물러났다는 것이 발표되면 사람들은 그가 물러남을 당했다는 사실을 알았다. ‘인간 존재는 말하는 것이 아니라 말해진다.’ 라는 라캉의 명제는 정확히 이런 방식으로 읽어야 한다. 이것은 언어, 즉 큰타자의 지위는 주체의 고문실이라는 의미이다. 주체가 말을 똑떨어지게 하지 못하고 거시기 거시기를 연발할 때 우리는 그것을 내적 혼란, 모호한 감정의 표현 등으로 간주한다. 하지만 이 설명은 충분하지 않다. 말하는 것은 단지 트라우마적인 심리적 삶을 등록하거나 표현하지만은 않는다. 말하기로 들어가는 것 자체가 트라우마적 사실이다. 내적 혼란이란 ‘언어의 고문실’에 거주하는 것의 트라우마에 대한 반응이다.

 

   「몸에 새겨지는 전환증상부터 완전한 심리적 와해에 이르기까지 프로이트가 묘사하는 모든 정신병리학적 현상은 이러한 영원한 고문의 상처들, 주체와 언어 사이의 본래적인, 치유 불가능한 간극의 수많은 표시, 인간은 결코 자기 집에서 편안할 수 없다는 수많은 표시이다.p1530」

 

  하이데거가 몰랐던 것이 바로 이것이다. 하이데거는 존재의 집에 거주하는 것의 이처럼 어두운 측면을 무시했다. 그러므로 하이데거의 건축물에는 주이상스의 실재를 위한 자리가 없다. 그러므로 “진리를 말하도록 언어를 고문해야 한다.” 언어를 고문하는 가장 기본적인 형식은 시다. 시는 언표의 자유로운 흐름을 리듬과 각운이라는 고정된 형식의 프로크루테스 침대에 억지로 끼워 맞춘다.

 

   이것이 라캉이 하이데거에 맞서 주체라는 문제적 용어를 고수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하이데거는 주체를 근대의 기술 지배의 대리인으로 역사화 하며, ‘주체’를 인간-임의 본질을 가리키는 용어인 현존재로 대체해 버렸다. 하이데거가 주체성의 핵심적 차원을 놓쳤다고 비판할 때 라캉은, 하이데거가 인간이 언어에 사로잡혀 있는 것의 수동성 자체가 가진 본래적인 의미의 트라우마적 충격을 놓치고 있음을 지적하는 것이다. 주체가 존재하는 것은 인간 동물이 언어에 맞지 않기 때문이며, 라캉적 주체는 고문당한, 훼손된 주체이다.

 

   하이데거는 홀로코스트의 희생자들의 명백한 고통을 ‘비본래적인 것’으로 번역해 버린다. 그는 수용소에서는 본래적으로(진정으로) 죽는 것이 아니라 산업적으로 몰살당할 뿐이라고 암시한다. 그는 정확히 그들이 어떻게 자신들의 곤경을 주체화했는가라는 질문을 제기하지 못했다. 그들의 죽음은 집행자들에게는 정말로 산업적인 몰살 과정이었지만 그들에게는 그렇지 않았다.

 

   라캉이 그의 가르침의 마지막 20년 동안 자신을 반철학자로 강조한 것은 하이데거에게는 없는 이것, 상징화(로고스)에 저항하는 ‘주이상스의 실재’ 때문이다. 철학은 존재-론이며, 그것의 기본적인 가정은 ‘사유하는 것과 존재는 동일’ 하다는 것이다. 하이데거를 포함해 철학이 염두에 두고 있던 존재는 항상 언어를 집으로 하는 존재, 언어에 의해 지탱되고 있는 존재, 언어에 의해 지평이 열리는 존재였다. 비트켄슈타인이 말했듯, 나의 언어의 한계는 나의 세계의 한계인 것이다. 라캉은 철학의 이러한 존재-론적 가정에 맞서 비록 완전히 언어 외적인 것과는 거리가 멀지만 상징화에 저항하며, 내부에 이질적 핵심으로 남아있으며, 단절, 절단, 간극, 비정합성 또는 불가능성으로 나타나는 어떤 것으로서의 주이상스의 실재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라캉은 존재와 로고스 사이의 일치를 받아들이지만 하이데거와 달리 그것을 넘어서 주체와 주이상스 사이의 불가능한 연결에 의해 지시되는 실재의 차원으로 움직인다.

 

   「라캉적 ‘주체’는 상징적인 것 속의 간극을 가리키는 이름으로, 그것의 지위가 실재이다. -발메가 지적하는 대로 환상의 논리에 대한 핵심적인 세미나(1966~7)에서 하이데거와 10년 이상 투쟁해온 후에 라캉이 결국 역설적으로 그리고 전혀 예기치 않게 하이데거로부터 데카르트로, 데카르트적인 코기토로 돌아가 버리고 만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p1539」

 

「주이상스의 실재는 오직 우리가 존재의 영역을 벗어났을 때만 접근될 수 있다. 라캉에게서 코기토는 순수한 사유의 자기투명성으로 환원되지 말아야 할 뿐만 아니라 역설적으로 코기토가 무의식의 주체인 것은 이 때문이다. -그것은 주이상스의 실재가 뚫고 지나가는 존재의 질서 속의 간극 또는 절단면이다. p1539」

 

   라캉은 무의식의 주체로서의 코기토에 대한 사유를 ‘나는 내가 사유하는 곳에 존재하지 않는다.’에서 시작한다. 그러나 비합리주의적 생철학의 위험을 인식하고, 라캉은 ‘나는 내가 존재하지 않는 곳에서 사유한다.’로 나아간다. 사유와 존재의 외견상의 동질성에 나 있는 갈라진 틈을 지적함으로써 이 둘이 겹친다는 환상을 기반에서부터 무너뜨리는 것이 라캉의 목표였다. 그리고 마지막에 이르러서야 마침내 이 둘이 겹친다고 주장하는데, 그것은 분명히 부정적인 방식으로다. 라캉은 마침내 데카르트적 코기토의 가장 철저한 0-점을 존재와 사유 사이의 부정적인 교차점으로 파악하게 된다. 내가 사유하지 않으며 그리고 내가 존재하지 않는 소실점으로 말이다. 나는 존재하지 않는다. 나는 실체, 물, 어떤 것이 아니며, 나는 존재의 질서 속에 있는 공백으로, 간극으로, 틈새로 환원된다. 나는 생각하지 않는다. 순수한 코기토로서 나는 생각하지 않으며, 나는 대립물과 일치하는, 즉 아무 내용도 없으며, 그 자체로는 생각하지 않는 ‘순수한’ 사유로 환원된다.

 

   “오늘날 사회에서 벌어지고 있는 모든 것은 포스트모던한 지구화 또는 그에 대한 반응과 저항의 동역학의 결과이다.” 는 민주주의적 유물론의 새로운 공리다. 민주주의적 유물론은 하나의 무한한 보편적 진리를 격렬하게 거부한다. 그것은 정치에서 겪은 대로 전체주의를 수반하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유물 변증법은 하나의 단서를 추가한다. “단, 진리의 급진적-해방적 정치는 예외로 하고.” 물론 이 진리를 명료하게 드러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언어 안에서이다. - 언어를 고문하는 방식으로 말이다. 헤겔은 이미 알고 있었듯이 사유할 때 우리는 언어에 맞서 언어 속에서 사유한다.

 

 

4. 대안적 하이데거

 

   하이데거의 나치 연루는 1933년~1934년 겨울 학기의 세미나인 ‘자연, 역사, 그리고 국가의 본질과 개념에 대해’에서 가장 뚜렷하게 나타나 있다. 이 시기의 텍스트들은 통상 하이데거의 최악의 부분으로 취급된다. 그러나 지젝은 여기서 이 동일한 텍스트들이 그것과는 완전히 다른 방향, 급진 해방 정치를 향한 방향을 가리키는 가능성을 열어주고 있다는 명제를 제시한다. 비록 하이데거 자신은 계속 밀고 나가지 않았지만 지젝은 그 불길한 그림자들 속에서 해방정치의 가능성을 주장한다. 지젝은 하이데거가 나치즘에 빠진 이유는 다름 아니라 바로 그가 그의 기획을 끝까지 밀고나가지 못했기 때문이며, 그의 기획에 충실하지 못하고 물러섰기 때문이라고 결론짓는다.

   1930년대 중반의 하이데거는 미래의 공산주의자였다. 나치와의 연루는 단순한 실수가 아니라 오히려 ‘잘못된 방향으로의 올바른 일보’ 였다. 하이데거는 단순히 독일의 민족적-반동으로 기각될 수 없다.

 

   하이데거의 출발점은 존재자들과 존재 사이의 존재론적 차이를 인민과 국가 사이의 관계로 직접 옮겨 놓는 것을 포함하고 있다. 즉 국가는 “인민의 존재의 한 방식이며 존재의 한 종류이다. 인민은 그의 존재가 국가인 존재자이다.”

 

   「인민의 성원들은 자신들의 국가에 대해 알고, 관심을 가지며, 그것을 의지한다. 인민들에게 자신들의 국가는 단지 복리의 도구일 뿐만 아니라 중요한 것, 그들이 사랑하고 그것을 위해서라면 기꺼이 희생을 무릅쓸 에로스의 대상이다. 국가의 헌법은 단지 합리적 검토와 협상의 문제, 개인들의 복리를 규제하는 사회계약의 문제만이 아니라 공유된 삶의 비전에 대한 헌신이기도 하다. p1547」

 

   하이데거에게 국가는 홉스와 로크의 사상을 기반으로 한 자유주의 국가와는 다르다. 국가는 단순히 사회계약에 의해 개인의 재산을 보호해주는 공권력이 아니다. 국가는 공유된 삶의 비전을 가진, 헌신의 대상이다. 여기서 지배의 문제가 등장한다.

 

   「지배와 따름의 관계는 본래적인 방식에서는 공동의 의지, 공유하는 목표에 대한 헌신에 근거하고 있다. “지도자와 그가 이끄는 사람들이 역사적 운명 속에서 그리고 하나의 이념을 실현하기 위한 투쟁 속에서 하나가 되는 곳에서만 진정한 질서는 자란다.” 투쟁에의 결의를 정초하는 이러한 공유된 헌신이 결여되어 있는 곳에서는 지배는 착취로 변하며, 질서는 인민에게 강요되고, 외적으로 강제된다. p1548 」

 

   지배와 따름은 착취와 강요가 아니라 공유된 비전을 위한 헌신이다. 현대의 자유주의 국가들에 없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현대 자유주의 국가는 인민의 의지를 표현하는 대신 모든 폭력을 독점한 채 개인들의 의지를 제약하는 법의 대리인으로 기능한다.

   「공동체의 의지에 대한 의식에 관한 질문은 모든 민주주의에서 문제이다. 그것은 오직 지도자의 의지와 인민의 의지가 본질적 특징 속에서 인식될 때만 생산적인 것이 될 수 있다. 오늘날 우리의 과제는 우리의 공통적 존재의 기본적 관계를 인민과 지도자의 이러한 현실성을 향해 이끄는 것인데, 여기서 이 둘은 현실 속에서 하나다. 둘은 분리될 수가 없기 때문이다. p1549」

 

   1934년의 이 발언은 하이데거가 나치의 권력 찬탈을 인정한 이유를 너무 잘 설명해 주고 있다. 여기서 덧붙여야 할 질문은 하이데거의 사상과 나치즘 사이에 직접적 관련성이 있는가 아니면 단지 하이데거가 정치적으로 너문 순진했을 뿐인가 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지젝은 여기서 제3의 노선을 제안한다.

 

   「하이데거의 사상과 나치즘 사이에 직접적 관련성을 주장하지도 않고 또 둘을 분리시키는 간극을 강조하지도 말고, 이 간극을 그의 사유 자체의 핵심으로 옮겨 놓은 다음 나치에 참여할 수 있는 공간이 그의 사유의 내재적 실패 또는 비정합성에 의해, 그의 사유 자체의 관점에서 보더라도 ‘부당한’ 비약과 이행에 의해 열리게 되었음을 입증하는 것이 그것이다. 진지한 철학적 분석이라면 어느 것에서나 외적인 비판은 내재적 비판에 근거를 두어야 한다. p1550」

 

 

5. 역사성의 비역사적 핵심

 

  죽은 나치 병사의 옷 속에서 칸트가 발견되었다 따위의 이야기들이 있다. 그러나 의지의 자율성이라는 칸트적 윤리는 이미 주어진 도덕 법칙을 인식하고 따르는 윤리가 아니다. 즉 윤리적 행위에서 나는 단지 나의 의무를 따를 뿐만 아니라 나의 의무가 무엇인지를 결정한다. 이런 이유로 칸트는 본인의 의지를 국가나 지도자의 의지에 떠미는 것을 전적으로 거부한다. 도덕적 자율성이란 정확히 내가 나의 의무를 확고하게 떠맡으며, 결코 타자의 의지의 도구가 된다는 터무니없는 입장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서 하이데거의 문제는 역설적으로 그가 충분히 ‘주체주의적 결단론자’가 아닌 데 있다. 그의 초기 결단론은 지나칠 정도로 사전에 미리 정해진 운명에 응하는 것과 정반대 것이었다. 철저한 주체주의와 보편주의는 대립적인 것이 아니라 단독적 보편성이라는 동일한 입장의 두 측면이다. 이 둘 모두가 대립하고 있는 것은 공동체(인민)의 특수한 운명이다. 바로 여기서 히틀러를 따를 가능성이 나타나는 것이다. 그에게서 보편적 이성의 목소리가 아니라 독일 민족의 구체적인 역사적 운명의 목소리를 인식할 때 말이다. p1571」

 

   하이데거는 기술의 시대에 존재자들과 기술과의 관계를 어떻게 설정했을까? 그는 두 가지 생각 사이에서 동요하는 것처럼 보인다.

 

   「물론 우리가 기술적 대상들을 이용하기는 하지만 동시에 그것을 올바로 이용할 경우 우리는 그것들로부터 아무런 구속도 받지 않을 수도 있으며, 그리하여 우리는 언제나 그것들을 풀어-놓게 되지요.... 저는 기술 세계에 대해 긍정하면서도 동시에 부정하는 이러한 태도를 옛날 말로 ‘사물들에 이르는 초연한 내맡김’ 이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하이데거<동일성과 차이>) p1573」

 

   여기서 하이데거는 최악의, 쿨한 포스트모던적 태도를 보인다. 쿨한 사람은 무관심한 또는 내적으로 거리를 둔 듯한 태도로 모든 것을 하는 것이다.

 

 

 

6. 초연한 내맡김에서 계급투쟁으로

 

   하이데거는 “오직 고국이 팽창적으로 될 때만, 바깥과 상호작용할 때만 - 하나의 국가가 될 때만 인민의 존재의 방식이 된다.” 고 했다. 하이데거에게 플레모스(투쟁, 전쟁)는 분명히 외부의 적과의 다툼이다. 하이데거는 마르크스주의자들과는 달리, 플레모스를 지배하는 자들과 그들에게 예속된 자들 사이의 투쟁으로 읽는 독법을 무시하는 것이다. 하이데거는 존재적 갈등으로 환원될 수 없는 계급투쟁의 본래적인 의미에서의 존재론적 지위를 무시하는 것이다. 그러나 인민의 존재 방식은 국가가 아니라 계급투쟁(사회적 적대성)이다. 국가가 존재하는 것은 이런 적대성을 모호하게 할 뿐이다.

 

   여기서, 1934년에 있었던 하이데거의 문제적 발언으로 돌아가 보자.

   「공동체의 의지에 대한 의식에 관한 질문은 모든 민주주의에서 문제이다. 그것은 오직 지도자의 의지와 인민의 의지가 본질적 특징 속에서 인식될 때만 생산적인 것이 될 수 있다. 오늘날 우리의 과제는 우리의 공통적 존재의 기본적 관계를 인민과 지도자의 이러한 현실성을 향해 이끄는 것인데, 여기서 이 둘은 현실 속에서 하나다. 둘은 분리될 수가 없기 때문이다. p1549」

 

   정치적 참여에 대한 하이데거의 생각은 외부의 적에 대한 공동의 투쟁 속에서 인민과 이들을 이끄는 지도자 사이의 통일이라는 개념을 포함하고 있다. 그러나 만약 계급투쟁을 정치적 삶을 구성하는 플레모스로 간주한다면 공통의 정치적 의지 문제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나타날 것이다. 계급투쟁에서 피억압자들의 집단적 의지를, 계급적 플레모스를 극단까지 밀고 나갈 해방의 의지를 어떻게 형성할 것인가가 그것이다. 이 집단적 의지가 공산주의의 핵심적 구성요소이다.

 

   로베스 피에르, 아이티의 흑인 독립운동가 투생 루베르튀르, 존 브라운, 체 게바라 등의 지도자들에게서 전형적인 예를 발견할 수 있다. 이들은 공산주의 혹은 평등의 이념을 실현하기 위해 그 수단들이 적합한 것, 정당한 것 또는 심지어는 가능한 것으로 공인되기 이전에 아무런 타협 없이 곧바로 그것을 실현하기 위해 분투했다. 그 고투 자체가 불가능한 것을 가능한 것으로 전환시켰다. 이러한 집단적 행동은 하이데거가 말했듯 인민과 지도자가 분리될 수 없는 하나의 현실성이 됨을 보여주었다.

 

   「이러한 생각에 따라 최근 바디우는 혁명적인 공산주의적 ‘개인숭배’의 복권을 제안한 바 있다. 진리-사건의 실재가 (지도자의) 고유명 -레닌, 스탈린, 모택동, 체게바라- 을 통해 상징적 픽션의 공간 속에 기입되는 것이다. 지도자의 고유명의 숭배는 혁명 과정의 부패를 알리는 신호이기는커녕 그러한 과정에 내재적이다. 이를 다소 조야한 용어로 표현해 보자면, 정치 운동은 대중을 동원하는 고유명의 역할이 없다면 개념적 범주들에 의해 드러나는 존재의 실정적 질서에 사로잡혀 있을 수 있다. -불가능한 것을 요구하는 것, 가능한 것처럼 보이는 것의 윤곽 자체를 바꾸는 차원은 오직 고유명의 개입을 통해서만 나타날 수 있다. p1581~2」

 

   집단적 의지 자체나 집단적 의지가 지도자를 통해 드러나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집단적 의지를 올바르게 구현하지 못한 개인을 지도자로 잘못 인식한 것이 문제라는 것이다. 물론 이에 대해, “하이데거의 정치를 공산주의적으로 발본화하는 것을 옹호하다가는 의지의 근대적인 전체주의적 결단론이라는 최악의 덫에 빠져 하나의 파시즘적 전체주의를 그것의 좌파적 거울 이미지로 대체하게 되리라”고 바디우 혹은 지젝을 비판할 수 있다. 그러나 지젝은, 히틀러가 가진 문제는 정신 나간 것처럼 들릴지 몰라도 그가 충분히 폭력적이지 않은 것에 혹은 충분히 본질적이지 않은 것에 있다고 주장한다.

 

   「그의 모든 행위는 근본적으로 반응이었다. 그의 행동은 자본주의가 살아남을 수 있도록 유사-혁명의 대규모 장관을 연출함으로써 실제로는 아무것도 변하지 않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부르주아적 진부함에 대한 반응이었지만 파시즘은 그것에 대한 내속적 부정으로 남아 있었으며, 부르주아 사회의 지평 안에 사로잡혀 있었다는 아렌트의 (암묵적으로 하이데거와 정반대되는) 지적은 올바르다. 나치즘의 진짜 문제는 전권을 행사하는 주체주의적·니힐리즘적 교만 쪽으로 ‘너무 많이 나간 것’이 아니라 충분히 나가지 않은 것에, 나치즘의 폭력이 궁극적으로는 자신이 경멸하는 질서에 봉사하는 데 머무르고만 무기력한 행위화였던 데 있다... 나치즘은 수많은 경멸의 대상이 된 데카당스한 부르주아적 질서를 효율적으로 흐트러뜨리기는커녕, 독일인들을 만족에의 몰입으로부터 깨어나게 하기는커녕 계속 그렇게 살아가는 것을 가능하게 해준 꿈이었다. p1584~5」

 

   그러므로 하이데거를 나치즘으로부터 구하려면 좀 더 많은 의지와 투쟁 그리고 좀 더 적은 초연한 내맡김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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