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리정치 - 신자유주의의 통치술
한병철 지음, 김태환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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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병철은 2010년 『피로사회』 이후 2012년에 『투명사회』, 2014년에 『심리정치』를 독일어로 출판했다. 대단히 압축적인 이 세 권의 책은 신자유주의 사회를 분석한 일종의 시리즈물이다. 종합하자면 ‘피로사회’와 ‘투명사회’는 신자유주의의 통치술인 ‘심리정치’가 만들어 낸 자기착취와 자기감시의 사회다.

 

『피로사회』는 자기계발이란 환상 아래 자기착취에 빠져드는 성과사회의 모습을 간명히 드러냈다. 『투명사회』는 SNS 상의 자기현시와 인정욕구가 결국 디지털 판옵티콘에 봉사하는 자기감시임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심리정치』는 이것들의 배후에 신자유주의의 숨겨진 통치술이 있음을 역설하고 있다.

 

사실 신자유주의는 아무것도 숨기지 않는다. 오히려 모든 것을 투명하게 드러냄으로써 거대한 ‘빅 데이터’의 숲을 만들뿐이다. 체스터턴은 추리소설 <부러진 검>에서 이렇게 말했다. “현명한 사람은 나뭇잎을 숲속에 숨긴다.” 나뭇잎은 드러남으로써 숨겨진다.

 

데이비드 브룩스라는 분이 <뉴욕 타임즈> 칼럼에서 데이터 혁명의 도래를 선포했다. 현대의 선지자가 예언한 이 새로운 신앙의 이름은 “다타이즘 Dataismus,데이터주의”이다. 그에 의하면 데이터는 “감정적, 이데올로기적 편견을 걸러내는 투명하고 신뢰할 만한 렌즈이며, 우리에게 이를테면 미래를 예언하는 것 같은 놀랄 만한 능력을 준다. p80”

 

데이터에 관한 신앙은 이것이 처음이 아니다. 볼테르의 시대에 ‘통계학’은 계몽주의를 의미했다. “통계학은 신화적 이야기에 맞서서 숫자로 증명된, 숫자에서 나오는 객관적 지식을 내세운다. p81” 이성은 신화를 폐기하고 통계에 의존했다. 그러나 계몽의 변증법은 곧이어 이성의 또 다른 얼굴이 야만임을 드러냈다.

 

이데올로기적 편견에 반기를 든 다타이즘은, 한병철은 이것을 제2차 계몽주의라고 부른다, 어떨까? 오늘날의 이데올로기는 계몽주의 시대의 신화와 같은 처지로 전락했다. 제2차 계몽주의의 구호는 투명성이다. 데이터는 물화된 투명성이다.

 

「이론조차 이데올로기의 혐의에 빠진다. 데이터가 충분하기만 하다면 이론은 불필요하다. 2차 계몽주의는 데이터를 동력으로 하는 지식의 시대다. 크리스 앤더슨은 예언자적 수사법으로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언어학에서 사회학에 이르기까지 인간 행동에 관한 모든 이론은 과거지사가 되었다. 분류법도, 존재론도, 심리학도 모두 잊어라. 왜 인간이 이러저러한 행동을 하는지 대체 누가 말해줄 수 있단 말인가? 사람들은 그저 그렇게 행동할 뿐이다. 우리는 유례없이 정확하게 그들이 어떤 행동을 하는지 알아내고 측량할 수 있게 되었다. 데이터가 충분하기만 하다면, 숫자가 모든 것을 말해준다.” P82」

 

그러나 2차 계몽주의에도 변증법은 어김없이 작동한다. 다타이즘은 디지털 전체주의로 귀결될 운명이다. 모든 이데올로기를 기각하고 투명한 데이터를 신봉하고자 하는 다타이즘 또한 하나의 이데올로기로, 데이터 야만주의로 돌변할 것이다.

 

눈을 감으면 어딘가 재생된 데이터가 만든 또 하나의 세계가 있을 것만 같다. 수 십 억 명의 사람들이 쏘아올린 글과 이미지와 수치들이 우주의 빈 공간에 새로운 천지를 창조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현실세계의 복사판을 만들만큼 방대한 이 데이터들은 빅브라더가 강제적으로 수집한 것이 아니다. 우리 스스로 자랑스럽게 현시한 것들이다. 컴퓨터, 스마트폰 그리고 시계처럼 신체에 직접 장착한 기기들이 우리의 모든 것을 데이터로 만들어 전송한다.

 

「오늘날 우리가 하는 모든 클릭, 우리가 입력하는 모든 검색어는 저장된다. 웹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행보는 관찰되고 기록된다. 우리의 삶은 디지털망에 완벽하게 모사된다. 우리의 디지털 습관은 우리의 인격, 우리의 영혼을 매우 정확하게 재현한다. 디지털 습관을 통한 재현은 어쩌면 우리가 스스로에 대해 가지고 있는 이미지보다 더 정확하고 완벽할지도 모른다. P87」

 

웹은 디지털 파놉티콘이다. 웹 위의 주체는 자기 감시자다. 디지털 파놉티콘은 벤담의 파놉티콘 보다 효율적이다. 오웰의 빅브라더는 수감자들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무엇을 소망하는지는 전혀 모른다. 그러나 빅 데이터는 우리의 욕망과 심리, 심지어는 무의식까지 읽어낼 수 있다.

 

우리가 스스로 헌납한 빅데이터는 빅딜과 마이크로 마케팅의 대상이 된다. 하루에도 몇 통씩 걸려오는 스팸 광고는 이미 우리의 외형적 데이터가 탈탈 털리고 팔려서 마케팅 도구가 되었음을 입증한다. 트위터나 카톡이 추천하는 네가 좋아할만한 친구, 알라딘이 제공하는 네가 혹할 것 같은 책, 끈질기게 쌓이는 스팸 메일은 나의 취향과 습관과 욕망에 딱 맞춘 상품들이다. 나의 욕망은 미사일의 표적처럼 마이크로 타게팅 되어 있다.

 

「오늘날 빅데이터는 빅브라더의 모습으로만 등장하지 않는다. 빅데이터는 빅딜이기도 하다. 빅데이터는 무엇보다 큰 장사다. 개인 관련 데이터는 남김없이 상품화되어 금전적 거래의 대상이 된다. 오늘날 인간은 경제적 이익을 위해 이용할 수 있는 패키지로 다루어지고 거래된다. 인간 자신이 상품으로 전락한다. 빅브라더와 빅딜은 동맹을 맺는다. 감시국가와 시장은 하나가 된다. P92~3」

 

오늘날 빅데이터에 대한 열광은 통계학에 대한 18세기의 열광과 비슷하다. 하지만 통계학적 이성은 낭만주의 운동과 같은 저항에 부딪혔다. “평균적인 것, 범상한 것에 대한 혐오는 낭만주의의 근본 정서에 속한다. P105” 니체는 통계학적 이성을 혐오했다. “통계학은 역사에 법칙이 있음을 증명한다. 그렇다. 통계학은 군중이 얼마나 구역질 날 정도로 천박하게 획일적인지를 증명하는 것이다. P105”

 

획일화는 오늘날의 투명사회, 정보사회의 특징이기도 하다. 모든 것이 즉시 드러난다면 일탈은 거의 불가능해진다. 투명성으로부터 이질성에 대한 배제가 발생한다. 다타이즘은 동일화를 강화한다. 빅데이터는 통계 밖의 유일무이한 것을 알지 못한다.

 

「빅데이터는 사건을 보지 못한다. 역사를, 인류의 미래를 규정하는 것은 통계적 개연성이 아니라 개연적이지 않은 것, 유일한 것, 사건이다. 따라서 빅데이터는 미래도 보지 못한다. P107」

 

한병철이 말하는 사건은 푸코의 ‘사건’ 개념이다. 사건은 이전 상태에는 전혀 없었던 무언가가 일어나게 하는 것이다. 한병철은 한번도 지젝이나 바디우를 언급한 적이 없다.(지젝은 확실하고, 바디우는 그런 것 같다.) 그런데 『투명사회』와 『심리정치』의 곳곳에서 나는 지젝과 바디우를 읽는 듯 했다. 헤겔의 부정성을 강조하는 것은 지젝을 연상시킨다. 단절과 불연속성으로서의 사건은 내게 바디우를 떠올리게 한다. (물론 내가 읽은 것이 그들뿐이라서 그럴 것이다.)

 

한병철이 결론으로 제시하는 것은 사건과 바보다. 우리는 바보가 됨으로써 진정한 자유의 공간을 여는 사건을 맞이할 수 있다. 바보는 그 자체로 자유롭기 때문이다. 바보는 기존의 질서, 네트워크에서 자유로운 자, 아웃사이더, 일종의 면역학적 이물질이다. 정상적 작동을 가로막는 면역반응은 시스템을 방해하고 지연시킨다.

 

「바보는 현대의 이단아다. 이단häresie은 본래 선택을 의미한다. 즉 이단아는 자유로운 선택권을 쥐고 있는 자다. 그는 정통에서 이탈할 용기가 있다. 그는 순응의 압력을 용감하게 떨쳐 버린다. 이단아로서의 바보는 합의의 폭력에 맞서는 저항의 형상이다. 그는 아웃사이더의 마력을 보존한다. 순응의 압박이 점점 더 강화되어가는 오늘날, 이단적 의식의 날을 벼려야 할 필요성은 그 어느 때보다 더 절실하다. P114」

 

처음에 디지털 네트워크는 무제한의 자유를 주는 매체로 인식되었다. 네그리의 다중은 네트워크를 통해 승리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무제한의 자유와 커뮤니케이션은 해방이 아니라 디지털 파놉티콘을 가져왔다.

 

주체는 원래 예속된 존재다. 글자 그대로 subject이다. 자유는 막간극에 불과하다. 자유의 감정은 하나의 삶의 형태에서 다른 삶의 형태로 넘어갈 때 잠깐 지속될 뿐이다. 주체가 진정한 주인이 되는 것은 혁명의 짧은 순간이다. 시스템 안에서의 자유는 본질적으로 가짜 자유다. 아메리카노에 시럽을 넣을 것인가 말 것인가를 선택하는 자유와 다르지 않다.

 

그럼에도 신자유주의 시대가 특히 자유의 위기로 다가오는 것은 신자유주의가 자유 자체를 착취하기 때문이다. 자유로운 성과주체는 자기착취의 주체다. 자유로운 데이터 교환은 디지털 빅브라더를 만든다. 감시와 억압, 타자에 대한 착취는 큰 성과를 올리지 못한다. 주체가 구속을 느끼고 저항하기 때문이다. “자유 자체의 착취야말로 최상의 수익을 낳는다. p12” 자유롭다고 생각하는 주체는 스스로 착취에 봉사한다.

 

신자유주의가 자유를 착취하는 기술, 통치술을 한병철은 ‘심리정치’ 라고 부른다. 신자유주의 체제는 생산성을 높이기 위해 감성을 이용한다. 규율사회의 합리성은 감성으로 대체된다. 감성은 자유의 감정, 개성의 자유로운 발산을 동반한다. 감성자본주의는 자유를 이용한다.

 

「신자유주의 경제는 생산성의 향상을 위해 점점 더 연속성을 해체하고 가변적 요소를 도입하면서 생산과정의 감성화를 촉진한다. 커뮤니케이션의 가속화 역시 커뮤니케이션의 감성화에 유리하게 작용한다. p68 」

 

더 많이 더 빠르게 팔기 위해 자본주의는 욕망을 가속화시킨다. 오늘 기분과 내일 기분이 다르고 작년에 좋아보이던 것이 올해는 쳐져 보여야 상품의 회전 속도가 빨라진다. 일 년만 지나면 스마트폰이 구형이 되고, 오년만 지나면 TV가 고물이 된다.

 

「게다가 소비자본주의는 구매를 충동하는 자극을 늘리고 더 많은 욕구를 생성하기 위해 기분을 동원한다. 감성 디자인은 기분을 모델링한다. 즉 소비의 극대화를 위해 표본적 기분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는 결국 사물이 아니라 기분을 소비한다. 사물은 무한히 소비할 수 없지만 기분은 충분히 그럴 수 있다. 기분은 사용가치의 피안에서 전개되어 간다. 이로써 새로운 소비의 장이 무한히 펼쳐진다. p68」

 

소비자의 심리는 그들 자신이 기꺼이 바친 빅데이터에 의해 마이크로마케팅의 대상이 된다. 제니 홀저의 “내가 원하는 것에서 나를 지켜줘.” 는 백화점으로 돌진하는 쇼퍼홀릭의 마지막 비명처럼 들린다. 신자유주의의 감성팔이에서 벗어나는 길은? 감성도 욕망도 지능도 없는 백치가 되는 것. 주체를 포기하는 것.

 

「그것은 주체를 그 자신에게서 해방시켜, “저 측량할 수 없는 텅 빈 시간 속으로” 보내는 부정성이다. 바보는 주체가 아니다. “차라리 꽃의 실존. 빛을 향한 단순한 트임.” p118 」

 

헤겔의 세계의 밤이 떠오른다면 너무 생뚱한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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