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트] 헤겔 레스토랑 + 라캉 카페 - 전2권 Less Than Nothing 시리즈
슬라보예 지젝 지음, 조형준 옮김 / 새물결 / 2013년 7월
평점 :
품절


4부 식후 끽연

 

 

 

12_

4인방 : 공포, 불안, 용기 ...... 그리고 열정

 

 

 

0.

 

  바디우와 지젝은 친구다. 『잃어버린 대의를 옹호하며』에서 지젝은 ‘진정한 우정’을 과시하며, 이 책을 바디우에게 바친다고 썼다. 그럼에도 혹은 그렇기 때문일까?, 지젝과 바디우 사이에는 항상 철학적 차이와 논쟁이 있어왔다.

   12장은 바디우와 지젝 사이의 차이를 ‘존재/세계/사건’ 이라는 3항을 중심으로 설명하고 있다. 그것은 “어떻게 헤겔을 구할 것인가, 어떻게 철저한 우연성이 지배하고 있는 우리 세계를 그를 위해 되찾아올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일련의 변주”이기도 하다.

 

   「존재 수준에서 다수들의 다수(성)는 ‘빗금 처진 일자’, 일자의 일자-되기의 불가능성으로서의 공백에 의해 보충되어야 한다. 출현 수준에서 세계언어-제약적인 것으로 파악되어야 한다. 각각의 세계는 주인-시니피앙에 의해 지탱되고 있는 것이다. 사건 수준에서 불안과 (죽음)충동의 ‘부정성’은 사건에 대한 긍정적 열정에 선행하는 것으로, 그것의 가능성의 조건으로 상정되어야 한다. p1417」

 

   빨간색 부분은 바디우의 입장이고, 파란색 부분은 이에 대한 지젝의 비판이다. 어쨌거나 지젝은 바디우에게 결여되어 있는 것이 ‘사건의 존재론’ 이라고 한다.

 

 

1. 존재 / 세계 / 사건

 

  바디우가 주장하는 세계들의 ’다수성’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바디우는 『세계들의 논리』에서, 존재의 순수 다수성으로부터 어떻게 (출현의) 세계가 등장하는가에 대한 답을 자신의 과제로 공언했지만 실제로 그는 그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다. 바디우는 “존재론적 비정합성과 존재적 정합성 사이의 관계” , 즉 존재로부터 세계로의 이행을 “명확히 하는 데 실패하고 있다.” 셸링과 헤겔이 공유하고 있는 핵심적인 특징은, 존재의 선행하는 질서 속에 존재하는 어떤 종류의 긴장 또는 적대성이나 모순과 관련해 출현의 등장을 설명하는 것이다. 그런데 바디우에게 이것은 선험적으로 배제된다. 또한 바디우는 진리들이 어떻게 상이한 세계들을 가로지를 수 있는지도 실제로 설명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바디우가 설명하는 것은 무엇일까? 일단 ‘안 존재하는 것’ 이란 개념에서 시작하자.

 

   “만약 세계의 다수성이 세계 안에 나타난다면 이 다수성의 한 요소 그리고 오직 한 요소만이 이 세계의 안 존재하는 것이다.”고 바디우는 말한다. 간단히 말하면 마르크스의 프롤레타리아 개념과 같다. “우리는 아무것도 아니었지만 모든 것이 될 것이다.” 의 ‘우리, 프롤레타리아’가 바로 안 존재하는 것이다. 지젝이 흔히 인용해왔던 용어로는 ‘part of no part' 일 것이다. 그렇다면 왜 모든 세계는 ‘안 존재하는 것’을 포함하고 있을까?

 

   「존재(환원불가능한 다수성)와 출현(원자들-일자들의 영역) 사이의 간극 때문에 존재와 출현(실존)의 통일(겹침)은 오직 부정적인 방식으로, 안 존재하는 것, (출현을 조절하는 초월론적 틀 내부로부터) 비-일자인 일자, 출현의 세계의 일부인 한편 그것에 의해 제대로 포함되지 않으며 최소한으로 그것에 참여하고 있는 원자 형태로 출현의 (초월론적) 공간 내에서만 나타날 수 있다. 이 안 존재하는 것이 세계의 증상적 비틀림의 점이다. 그것은 ‘보편적 단독자’로 보편성에 직접 참여하지만 이 세계 안에서 특정한 자리를 결여하고 있는 단독적 요소로 기능한다. 시니피앙의 논리의 형식적 수준에서 이 안 존재하는 것은 ‘시니피에 없는 텅 빈 시니피앙’, 특정한 의미를 모두 박탈당했기 때문에 의미의 부재, 비의미와 반대로 의미의 현존 자체만을 대표하는 0-시니피앙이다. p1427 」

 

   다시, 그렇다면 어떻게 사건은 세계를 -그것은 세계의 진리를 구현한다.- 변화시킬 수 있을까? 여기서 바디우의 ‘빼기’ 개념이 나온다. 어떤 상황 속으로의 몰입으로부터 물러나 그런 빠져나감이 상황의 다수성을 지탱하고 있는 최소 차이를 드러내고, 그것의 해체를 초래한다. 물론 이 빼기의 지점이 바로 안 존재하는 것, 즉 보편적 단독자이다. 프롤레타리아가 모호한 배경이 아니라 보편성의 직접적 담지자로 나타날 때 사건적 변형이 일어나는 것이다.

 

   그렇다면 바디우에게 제기해야 할 질문은 이것이다. 왜 사건은 세계의 초월성의 내적 법칙들 자체의 수정을 가리켜서는 안 되는가? 왜 실제로 우리는 하나의 세계에서 또 다른 세계로 나가지 않는가? 안 존재하는 것이 최대의 강도의 실존을 가진 존재로 변하려면 존재의 강도를 측정하는 규칙들 자체가 바뀌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세계의 증상적 비틀림의 점인 안 존재하는 것은 오직 또 다른 세계로 이행해야만 완전히 존재할 수 있도록 만들어질 수 있지 않을까? 

   늘 그렇듯이 지젝은 여기에 곧바로 답하지 않고 이 질문이 정말로 복잡하고 모호한 바디우의 사유로 우리를 이끈다고 말한다. 비정합성과 진리 사이의 관계가 그것이다.

 

 

2. 진리, 비정합성 그리고 증상적 점

 

   진리는 세계와 어떻게 다른가? 사건은 모든 상황(또는 세계)과 마찬가지로 증상적 비틀림의 점을 갖고 있는가? 진리-사건은 그저 하나의 세계로부터 또 다른 세계로의 이행일 뿐인가? 물론 바디우의 대답은 그렇지 않다 이다. 세계는 역사적이며 존재의 영역의 초월론적·역사적 조직화인 반면 진리는 영원한 것으로, 그것을 촉성하는 가운데 현실에 영원한 이데아를 촉성하게 된다. 세계는 인간적 유한성의 형성이며, 해석학적이다. 사건적 진리는 영원한 것이며 모든 가능한 세계 속에서 계속하여 우리를 사로잡는 영원한 이데아의 초역사적 지속이다.

 

   「세계와 진리-사건 모두 출현의 양식들이다. 세계는 출현의 초월론적 좌표들로 구성되는 반면 진리-사건은 출현한다기보다는 오히려 ‘빛나는 것’ 현실 속에서 발산되는 어떤 것이다. 세계의 지위는 해석학적이며 현실에 대한 우리의 경험을 규정하는 의미의 지평을 제공하는 반면 이데아의 지위는 실재로, 현실 속에서 흔적들을 식별할 수 있는 잠재적인 부동의 X이다. 다시 말해 세계의 보편성은 마르크스주의적인 이데올로기 비판적 의미에서 항상 기만적이다. 모든 세계는 증상적 비틀림의 점을 통해 찾아낼 수 있는 배제 또는 억압에 기반 해 있는 반면 진리의 보편성은 무조건적이다. 그것은 구성적 예외에 기반 해 있지 않으며, 증상적 비틀림의 점을 만들어내지 않는다. p1436 」

 

   세계는 증상을 만들지만, 진리-사건은 증상이 없는 보편성이라고 한다. 그런데 라캉은 사드는 칸트의 진리라고 말했다. 라캉에 대한 지젝의 해석은 칸트는 사드의 직접적인 진리가 아니라 증상이라는 것이다. 칸트가 자신이 발견한 진리를 어떻게 배신하고 있는가를 보여주는 증상으로서의 진리이다. 세계의 증상적 점과 칸트의 증상은 다른 방식으로 기능한다. 증상적 점은 세계 자체의 실패 또는 기만성을 가리키는 것으로서의 진리이지만, 칸트의 경우 혹은 이데아의 경우는 이데아에 대한 주체의 충실성이 실패했음을 가리킨다. 주체가 욕망을 타협해버렸다는 증언이다.

   근대성에 대한 아도르노와 하버마스의 생각을 대비시킬 수 있다.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의 ‘계몽의 변증법’의 핵심은 파시즘과 같은 현상은 근대성의 증상, 그것의 필연적인 결과라는 것이다. 하버마스에게는 정반대로 그것은 근대성이 아직 완수되지 못했다는, 미완의 기획이라는 사실에 대한 증상 혹은 지표들이다.

 

 

3. 인간 동물은 없다

 

   이제 존재의 한가운데서 어떻게 사건이 폭발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할 때가 되었다. 바디우는 “사건은 주어진 상황의 일부에 다름 아니라는 것을, 존재의 파편일 뿐이라는 것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했다. 그러나 존재의 질서 속에 자신을 기입하는 존재 너머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양자물리학적으로 비유하자면 사건은 존재로의 기입을 통해 존재의 공간을 휘게 하지 않는다. 반대로 사건은 단지 존재의 공간의 이러한 휨 자체일 뿐이다.

 

   「존재하는 모든 것은 작은 틈, 존재의 비-자기일치, 존재의 질서의 존재론적 비-폐쇄이다. 사건과 존재 사이의 차이란 바로 중립적 관찰자 눈에는 그저 일상현실의 일부로 보일 뿐인 현실에서 발생하는 동일한 계열의 일들이 관여된 관찰자 눈에는 사건에 대한 충실의 기입으로 보이게 해주는 차이라고 할 수 있다.p1447」

 

   그러나 p1474에 가면 바디우는 이런 생각을 정정한다. 지젝 역시 그렇다. 10월 혁명은 관여된 혁명가에게만 일어난 사건이 아니다. 그것은 모든 사람에게 영향을 끼친 것이 분명한 사건이었고 다만 그것에 반응하는 태도가 사람들에 따라 다를 뿐이다.

 

   이데아를 말할 때 바디우는 플라톤적이다. 그리고 바디우는 또한 칸트적인 입장을 드러낸다. 존재의 다수성과 특수한 세계(존재의 출현양식)를 구분하는 바디우의 입장이 그렇다. 즉자존재와 우리를 위한 존재를 구분하는 칸트적 입장과 일치한다. 이 관점에서는 사건과 존재 사이의 차이 자체는 우리 주관성의 유한성에 걸려 있게 된다. 우리의 유한성 때문에 존재의 무한성에 대해 중립적인 관점을, 존재의 파편으로서의 사건을 존재의 총체성 속에 위치시킬 수 있도록 해줄 관점을 받아들일 수 없다.

이런 칸트적 관점에 대한 유일한 대안은 헤겔적 관점뿐이다. 사건은 존재의 질서로 환원될 수 없다. 또한 그것이 즉자 존재로서 단지 ‘존재의 파편’ 이 아닌 것은 그것이 어떤 보다 높은 수준의 정신적 현실에 기반하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존재의 질서 속의 공백으로부터 출현하기 때문이다. 봉합이 가리키는 것이 바로 이 공백이다.

 

   바디우는 필멸적인 ‘인간 동물’ 로서의 인간을 진리-공정의 행위자로서의 ‘비인간적’ 주체와 구분하고 있다. 지력과 도구를 사용할 수 있는 동물로서의 인간은 행복과 쾌락을 추구하며 죽음에 대해 걱정한다. 반면 오직 진리-사건에 충실한 주체로서만 인간은 진정 동물성을 넘어설 수 있다.

   그러나 인간 동물은 존재하지 않는다. 인간 존재는 태어날 때부터 동물적 제약들로부터 떨어져 나오며 그의 본능은 ‘탈자연화되며’, 죽음충동의 순환성에 휘말려 쾌락원리를 넘어 기능한다. 한마디로 바디우의 이론에는 죽음충동을 위한 자리가 없다. 인간을 동물과 구분해주는 것은 의식이 아니라 무의식이다. 동물들도 의식은 가지고 있지만 무의식은 없다. 무의식 또는 죽음충동의 영역만이 인간을 진리의 주체로 변형시키는 것을 가능하게 해준다. 오직 무의식을 가진 살아있는 존재만이 진리-사건의 용기가 될 수 있다. 단순한 동물적 삶과 사건의 기적을 대립시키는 바디우는 너무도 칸트적이다.

 

 

4. 바디우 대 레비나스

 

   레비나스하면 ‘타자’가 자동 연상된다. 레비나스에 의하면 주체는 무기력하게 고통 받는 타자와의 트라우마적 조우에 대한 반응으로 출현한다. 그러나 유약함만으로는 윤리를 설명할 수 없다. 윤리적 주체의 최소 두 가지 구성요소는 이 주체의 유약성과 불멸의 진리에 대한 충실성이다. 오직 불멸의 진리의 이런 현존만이 인간의 유약함을 상처 입은 동물의 유약함과 다르게 만들어준다. 그리고 여기에 하나 더 덧붙여야 할 것이 있는데 악마적 불멸성이다. 이것을 가리키는 프로이트적 용어는 이웃-물의 핵심 자체인 (죽음)충동이다.

   이웃은 보편성에 저항하는 단독자적인 심연이다. 그렇다면 보편화가 불가능한 이웃이 우리의 윤리적·정치적 활동의 궁극적 지평이란 말인가? 최고의 규범은 이웃의 타자성을 존중하라는 명령일까? 여기서 다시 질문해 보아야 한다. 윤리적 보편성이 정말 이웃이라는 심연의 배제에 기반하고 있는가 아니면 이웃을 배제하지 않는 보편성도 존재하는가? 대답은 그렇다 이다. ‘비-부분의 부분’에 기반하고 있는 보편성, 사회적 총체성 속에서 정해진 위치를 결여하고 있는 사람들, 그러한 총체성 속에서 ‘어울리지 않으며’ 그 자체로서 직접적으로 보편적 차원을 대변하는 사람들 속에서 전형적으로 볼 수 있는 단독자적 보편성이 그것이다.

 

 

5. 공포로부터 열정으로

 

   바디우의 ‘해방 정치의 네 가지 근본 개념’은 공포, 불안, 용기, 정의이다. 지젝은 정의를 열정으로 바꾼다. 왜? 일단 공포에서 시작하자.

 

   우리 실존의 토대 자체가 공포에 의해 산산 조각날 때, 단순한 존재적 두려움이 공포로 바뀔 때 즉 우리 존재의 존재론적 공백에 직면하게 될 때 우리는 바디우가 실용주의적·쾌락주의적인 ‘동물적 삶’이라 부르는 것으로부터 폭력적으로 뜯겨 나오게 된다. 그러나 바디우와 라캉 사이에는 궁극적 차이가 있다. 바디우에게 불안은 사건의 전제 조건이다. 반면 라캉에게 부정성은 본원적인 존재론적 사실이다. 인간 존재에게 그에 선행하는 ‘동물적 삶’은 존재하지 않는다. 어떤 공간이 하나의 사건을 위해 열리는 것은 오직 ‘정상성’의 모든 실정적 질서가 완전히 텅 비어 있는 것을 공포로 체험하는 것을 통해서일 뿐이다. 즉 바디우의 출발점은 긍정적인 기획 그리고 그에 대한 충실성인 반면 라캉에게 본원적인 사실은 부정성의 사실로, 진리-사건에의 충실은 이차적인 것, 하나의 가능성으로 그것의 공간은 부정성에 의해 열리게 된다.

 

   진리는 지식과 반대로 오직 관여된 시선만, 그것을 믿는 주체의 시선만 볼 수 있는 어떤 것이라는 개념을 포기해야 한다. 바디우 본인도 그 명제를 정정하고 있다. 사건은 항상 세계 내에서, 세계의 초월론적 좌표들 내에서 일어나며 ,그것의 출현은 세계 전체에 영향을 미친다. 누구도 그것을 무시할 수 없다. 10월 혁명을 무시하려는 자유주의자는 이전의 자유주의자와 동일한 사람이 아니다. 어떤 것을 모르는 것과 모르는 것처럼 행동하는 것은 전혀 다르다.

   사건은 처음 출현할 때 불안을 초래한다. 규정상 세계의 초월론적 좌표를 산산조각내기 때문이다. 모든 사람에게, 세상의 모든 주체에게 영향을 미치는 것이 이 불안이며, 이 사건을 부인하거나 무시하는 것, 구세계의 좌표들 속으로 그것을 재통합하려는 것 등은 그러한 불안에 의해 촉발된 반응들, 사건의 트라우마적 충격에 대처하려는 반동적 방식들이다.

   하지만 오직 사건에 대한 본래적 주체적 충실성만이 불안을 열정으로 전환 시킬 수 있다. 그것은 불안을 해방투쟁의 열정으로 변형시킬 수 있는 용기를 보여준다. 이런 의미에서 불안은 열정의 필수적인 배경이다. 불안 없이는 열정도 없다. 열정은 그 자체로 시작되지 않으며, 형식적으로는 불안의 전환의 결과이다. 따라서 주체성의 출현은 사건에 대한 열정적인 승인이 아니라 불안에 한정된다.

 

 

6. 바디우와 반철학

 

   바디우와 반철학? 반철학이란 용어를 처음 사용한 사람이 라캉, 그리고 이것을 이어받아 발전시킨 사람이 바디우라고 한다. 그런데 바디우는 반-반철학자가 아닌가? 플라톤의 진리 개념을 수용한 바디우니까... 아닌가;; 바디우의 다수성 개념이 관련이 있는 건가? 6절을 다 읽어도 바디우와 반철학의 관계를 한마디로 요약하기가 힘들다. 이 책 전체가 다 그렇기는 하지만.

 

   반철학의 기본주제는 철학적 개념들 또는 재현의 네트워크로 환원될 수 없는 그리고 이 네트워크와 관련된 초과적인 순수한 어떤 것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마르크스에게는 사회의 현실적 삶이, 키르케고르에게는 실존이, 쇼펜하우어와 니체에게는 의지가 그렇다. 포스트-헤겔적인 반철학의 위대한 주제는 재현에 대한 현존의 전-개념적 생산성의 초과이다.

 

   바디우와 관련해 문제는 현존/재현이라는 쌍을 존재/세계/사건이라는 3항과 어떻게 관련시킬 것인가이다. 존재가 비정합적인 다수성의 현존을 가리키는 이름인 한, 그리고 세계가 그것의 재현을, 세계의 내재적인 초월론적 요소들에 의해 규제되는 정합적인 상황 속으로 이 세계가 조직화되어 들어가는 것을 가리키는 이름인 한 현존과 재현의 쌍과 관련해 사건을 어떻게 파악할 것인가?

   여기서 딱 부러지게 답을 요약하면 좋겠지만 잘 모르겠다. 단지 바디우가 역사로부터 존재론으로 한발 물러섰다는 것, 그리고 경제는 항상 정치경제학이라는 마르크스주의의 근본 통찰을 무시했다는 것 등의 설명이 이어졌다고만 써둔다. 이어지는 내용들도 다 관련성을 가지겠지만...

 

   다수성에 대한 반철학적 찬양이 놓치고 있는 것은 일자의 자신과의 비일치, 일자를 자신의 대립물의 출현의 형식 자체로 만드는 비일치다. 모든 일자를 내부로 부터 폭발시키는 것은 일자의 통일성을 전복시키는 복잡성이 아니라 공백은 모든 일자의 일부라는 사실이다. 일자라는 시니피앙, 다수성을 하나로 통일시키는 또는 총체화하는 시니피앙은 자기 자신의 공백의 이러한 다수성 속으로 기입되는 지점이다. 들뢰즈의 ‘최소 차이’를 빌려 말한다면, 현실적인 동일성은 항상 잠재적인 최소 차이에 의해 유지되고 있다.

 

   「라캉의 S1, (악)명 높은 ‘주인-시니피앙’ 또는 ‘팔루스적 시니피앙’은 역설적으로 ‘일자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리고 ‘존재하는 것’은 모든 일자로 셈해진 것 한가운데서 원래의 이접을 구성하는 공백이라고 쓸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일자로 셈해진 것은 항상 이자이다. S1은 ‘일자는 존재하지 않는다.’로 묘사할 수 있는 것의 수학소이다... 존재하는 것은 순수 다수가 아니라 이자이다. 아마 이것이 라캉의 핵심적 통찰일 것이다. p1490 」

 

   헤겔의 사유는 철학과 반철학 사이의 이행의 계기를 나타내고 있다. 주인담론으로서의, 다수성을 총체화하는 일자의 철학으로서의 철학과 실재는 일자의 파악을 벗어나는 것이라고 주장하는 반철학 사이의 이행.

 

   「헤겔에게서 일자 속에서-총체화하기는 항상 실패하기 마련이며, 일자는 항상 이미 자신과 관련해 초과적이며, 자체가 자신이 달성하려고 하는 것의 전복이며, 일자를 일자로 만들며 동시에 그것을 탈구시키는 것 -이것이 변증법적 과정의 모터이다- 은 일자에 내재적인 그러한 긴장, 이 이자-임이다. 다시 말해 헤겔은 실제로는 개념적 재현들의 네트워크에 외적인 실재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가 정기적으로 절대적 관념론자로 오독되는 것은 이 때문이다.) 하지만 여기서 실재는 상징적 재현들의 포괄적인 자기 관계적 놀이 속에서 사라지지 않는다. 그것은 내재적 간극, 장애물로서 복수하기 위해 돌아오며, 그것 때문에 재현들은 결코 자신을 총체화할 수 없으며, 그것 때문에 비전체이다. p1498 」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직업으로서의 정치 나남신서 1190
막스 베버 지음, 전성우 옮김 / 나남출판 / 2007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이 글은 『인문고전강의』중 마지막 4개의 고전에 대한 발제이다. 발제를 위해 베버가 대학에서 강의한 내용을 엮은 책인 『직업으로서의 정치』를 읽었다.  짧지만 근대국가와 정치, 폭력의 관계가 잘 정의되어 있다. 리뷰가 아닌 요약 자료라서 읽기용으로는 적합하지 않다.

 

 

 

 

『직업으로서의 정치』, 1919

폭력으로서 다스려지는 세계

 

 

베버, 1864~1920

 

 

31강 물리적 강제력, 근대국가의 수단

 

1. ‘모던modern’ 의 두 가지 의미

   ① 패러다임 : 15C부터 오늘에 이르는 세계를 구조적 틀의 측면에서 가리킬 때

   ② 역사적 시기 : 15C부터 19C 중반 (1850년대)까지를 근대, 그 이후를 현대라고 세분한다.

   ③ 근대적 패러다임 안에 역사적 시기로서 근대와 현대가 존재하며, 막스 베버는 근대에서 현대로 넘어가는 전환기의 학문적 태도를 잘 반영하고 있다.

 

2. 독일 국민국가의 가장 취약한 문제

   독일 시민계층이 정치적으로 성숙하지 못했다는 것인데 베버는 이론적 작업을 통해 이 시민계층을 교육시키려 하였다. 베버 사후의 나치즘을 예견한 우울한 통찰이라고 할 수 있다. (독일은 1차대전 막바지인 1918년에야 비로소 공화국 수립)

 

3. 근대의 정치란?

   ① 권력’에 참여하려는 노력, 권력 배분에 영향력을 행사하려는 노력

   ② 정치의 탈도덕화, 탈가치화, 탈德화 : 마키아벨리에서 시작

   ③ 영혼을 구제하려는 자는 정치를 해서는 안 된다. 정치는 ‘폭력’의 수단을 통해서만 완수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4. 근대국가의 정의

   ①「근대국가는 ... 한 특정한 영토 내에서, 정당한 물리적 폭력을 지배수단으로 독점하는데 성공한 지배조직입니다. 원문 p30」

   ②「국가는 정당한 강제력이라는 수단에 기반 하여 성립되는 인간의 인간에 대한 지배관계입니다. 원문 p21」

   ③ "모든 국가는 폭력에 기초를 두고 있다.“ (트로츠키)

 

5. 폭력이란 무엇인가? : 법이나 국가 자체가 폭력

   “법은 법이다.” “아버지는 아버지다” : 합리적 근거 없이 폭력적으로 규정

 

6. 지배 정당성 : 전통적, 카리스마적, 합법적

 

 

32강 근대의 정치, 악마적 힘들과 관계 맺기

 

1. 근대정치 사상의 출발 : 홉스와 폭력

   홉스는 개인이 가진 폭력이라는 자연권을 절대군주에게 양도함으로써 인간은、 만인에 대한 만인의 전쟁상태로부터 시민사회로 이행한다고 주장했다. 사적권력이 공권력으로 양도된 것이다. 그러므로 근대국가는 처음부터 폭력을 독점적으로 행사할 수 있는 권리만을 가졌으며, 종교와 도덕과는 아무 관련 없는 서양만의 아주 독특한 개념이다.

 

2. 악마적 힘들과 관계 맺기 : 모든 폭력에는 악마적 힘이 내재해 있다.

   정치의 수단은 합법적으로 획득한 폭력이다. 그러므로 정치가는 모든 폭력성에 잠복해 있는 악마적 힘들과 관계를 맺을 수밖에 없다.

 

3. 절대윤리, 신념윤리와 책임윤리 : ex) 안티고네 와 크레온 ?

   절대윤리, 신념윤리는 무조건적 윤리를 주장하며 결과를 중시하지 않는다. 책임윤리는 인간의 평균적 결함들을 고려하여 그 결과를 중요시하는 윤리다.

 

4. 삶의 구원으로서의 정치, 도덕의 정치는 불가능한가?

  

 

 

 

『파놉티콘 Panopticon』 1791

기계화 되는 인간

 

벤담, 1748~1832

 

33강 이익이 모든 것의 중심이 되는 사회

 

1. 근대의 심성구조

   ① 근대 구성의 3가지 요건 : 국민국가, 자본주의, 합리주의(계몽주의)

   ② 『파놉티콘』: 합리주의의 심성구조가 어떤 방식으로 제도화되는지를 보여줌

 

2. 벤담의 시대

   ① 인간의 삶을 극적으로 바꾼 기술혁명의 시대

   ② 1765년 와트 증기기관, 1770년 산업혁명

   ③ 기계가 생산의 주체가 되고 인간의 몸이 기계에 맞춰 움직이는 시대

 

3. 계산 가능성과 유용성 : “내 인생의 모든 순간은 계산되어 있다.”

   「그가 설계했던 파놉티콘은 기술공학적인 아이디어이고, 그것의 원리는 유용성의 원리입니다. 철학적으로 말하면 파놉티콘은 공리주의에 바탕을 두고 있으며, 모든 것을 철저하게 경제적 질서 아래에서 계산할 수 있는 시스템이며, 노동가치설에 바탕을 두고 있습니다. p478」

 

4. 감옥 : 소유권을 인식시키기 위한 처벌 강화

   「다수의 죄수들은 과거에는 그다지 큰 범죄로 취급하지 않던 행위를 저질렀으나 새로운 처벌제도에서 처벌 대상이 된 사람들이었다. 이들 다수는 음식을 훔치는 등의 경범죄를 저지른 사람이나 노동하지 않는 거지나 유랑자였다. 이들에게 노동의 가치와 자본주의 경제 질서를 습득하게 하는 것이 사회 혼란을 해결하는 근본적인 방법이라 여겨졌으며 감옥은 이를 위한 교육 장소였다. p481」

 

 

 

34강 내면화되는 감시의 시선

 

1. 『파놉티콘』: “국가가 여러 주요 목적에 사용할 수 있는 정말 유용한 도구 - 벤담” (Ex 감옥, 병원, 학교 등) 즉 ‘돈벌이를 위한 사업계획서’

 

2. 파놉티콘을 통한 새로운 질서의 원리 :감독inspection

감각보다 상상을 자극’ 하여 공포를 내재화 시키는 도덕극장을 목표

 

3. 관리의 원칙 : 경제성의 원칙

   ① 벤담의 경제성은 곧 사적 이익이므로 감옥의 민영화를 주장 : 공정하고 투명할 것이라고 판단

   ② 공리주의의 사회적 효용이란 모든 새로운 현상을 실질적인 이익의 관점에서 판단하는 것이다.

   ③「권력에 대한 애정은 잠에 빠지는 것을 피할 수 없으나 금전적 관심은 잠을 자지 않는다. p496 」

 

4. 교화의 방식 : 노동

   사적 소유권과 노동의 가치를 확립하는 것이 감옥 교화의 목적이며, 노동을 통해 이윤을 창출할 수 있다.

5. 벤담의 문제점

   ① “여러 행정기관들이 입법부를 대체해 버리는 것 -폴라니”

   ② 근대 이후 의회를 경시하는 풍조는 벤담의 공리주의의 영향 : 유용성, 효율성

 

 

 

 

『거대한 전환』, 1944

현대 세계의 파탄과 혼돈의 시작

 

폴라니, 1886~1964

 

35강 자기조정 시장의 파탄

 

1. 폴라니의 ‘백년의 평화’

   ① 1815(나폴레옹 몰락) ~1915(Great War) : 빈체제로 시작된 보수반동 체제

   ② 국내정치 : 자유주의 입헌국가 - 사유재산권을 바탕으로 한 국가

   ③ 국내경제 : 자유주의 시장경제 - 토지, 노동, 화폐의 상품화

   ④ 국제정치: 세력균형 체제

   ⑤ 국제경제 : 금본위제

 

2. 붕괴의 원인 : 자기조정시장의 파탄(폴라니)과 자유입헌국가의 허구성(강유원)

   ① 자기조정 시장이라는 환상 : 토지, 노동, 화폐라는 상품화 불가능한 것마저 매매대상으로 삼은 자유주의 시장은 토대 자체가 불가능한 환상, 수요 공급의 원리에 맞지 않음

2차 산업혁명: 경기침제(1873) → 식민지쟁탈전 (세기말) → Great War (1914)

   ② 자유주의 입헌국가 : 데카르트적 자아의 몰락과 로크의 사적 소유권의 허구성

공동체와의 모든 연결을 끊고 오로지 개인으로만 존재할 수 있다는 데카르트적 개인중심주의나 노동의 산물은 오직 자신의 것이라는 로크의 사적 소유권 모두 허구적 사상

 

 

36강 물건으로 변해버린 인간

 

1. 개인주의와 자유주의의 병폐 : 인간 소외

 

2. 우리 삶의 최종 근거는 무엇인가?

   폴라니는 ‘자기조정 시장의 최종근거는 어디에 있는가?’, ‘ 우리 삶을 시장에 통째로 맡길 수 있는 최종근거는 어디에 있는가?’ 와 같은 근본적인 물음을 던지고 있다. 벤담에게 그것은 이윤과 효율이었으며, 플라톤에게는 이데아, 단테에게는 ‘신의 사랑’ 그리고 공자에게는 ‘仁’ 이다. 그렇다면 우리에게는?

 

 

 

 

『논어』

역사에게 묻는 인간

 

공자, BC 551~479

 

37강 정치적 현실, 유가의 출발점

 

1. 儒 : 장례절차 등을 조언하고 집행하는 집단

   ① 공자는 어릴 때 祭器를 가지고 놀기를 좋아했다.

   ② 공자는 전통을 익히고 예의와 올바름을 갖춘 군자를 지향했다.

 

2. 정치사상가, 공자

   『논어』는 제대로 된 정치를 위한 모든 것을 담고 있는 책

 

3. 不惑

   자신의 학문과 이론을 확고히 세우고 그것을 가르칠 수 있는 준비가 되었다.

 

 

38강 사심을 이겨내고 로 돌아간다

 

1. 사문斯文 : 문왕 사후의 문화전통 (공자는 내 몸에 있다고 말함) ↔ 사문난적

 

 

2. 이란? 克己復禮

   ① 를 기준으로 삼아 자신을 이기고 (克己)를 회복하는 것 (復禮)

   ② 상태가 아니라 끊임없는 극기복례의 활동

   ③ 이 활동은 역사 속에서 평가 받음

 

 

39강 ‘이 문화’의 보존과 계승

 

1. 군자란 인격적 완성에 도달한 사람이자 참다운 정치가

 

2. 「지식인의 역할은 사람들에게 자기 관조를 촉구하고, 관조할 때 기준으로 삼을 수 있는 당위를 제시하는 것입니다. p562」

 

 

 

40강 남이 알아주지 않아도 화내지 않는다

 

1. 공부법?

   ① 學而時習之

   ② 溫故而知新

   ③ 學而不思則罔, 思而不學則殆

      ⒜ 사문을 배워서 연구하여 뭔가 보태진 사문을 만들어내는 것

          새로운 사문을 공론에 내어놓아 토론을 통해 검증받는 것

          즉, 배우고 생각해서 내놓은 것을 토론하면서 다시 배워야 한다.

      ⒝ 일반적인 해석은 배우기만 하고 생각하지 않으면 그물에 갇힌 것처럼 어둡고, 생각만 하고 배우고 토론하지 않으면 혼자만의 생각에 빠져 위태롭다는 것.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서구 정치사상 고전읽기 통합적 사유를 위한 인문학 강의 1
강유원 지음 / 라티오 / 2008년 4월
평점 :
품절


  강유원의 『인문고전강의』를 공부하면서 그의『서구정치사상 고전읽기』를 참고하고 있다. 다음번 세미나 내용인 『통치론』부분을 조금 정리해 놓는다. 이글은 리뷰라기 보다는 일종의 발제문이다. 
 
 
 
 
『통치론』 

    
존 로크,  1689
 

  


  25강 물질주의적 인간관
  
 1. 『통치론』저술 동기 
    ① 토지 귀족 중심의 토리당과 산업상업 부르주아 계급의 정당인 휘그당이 ‘배척법안’을 둘러싸고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는 정치적 상황에서, 로크는 자신이 속한 휘그당의 이해관계를 옹호하고 그 당파성을 정당화하기 위해 『통치론』을 저술하였다. 
    ② 배척법안은 국왕의 권한에 대한 헌법적 제한을 강화하고 선출된 하원의 권리를 보호하며 찰스 2세의 가톨릭교도 동생인 제임스를 왕위계승에서 배척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였다.  (『서구정치 사상 고전 읽기』 p150) 
    ③ 처음에는 익명으로 출간할 만큼 위험을 무릅쓰고 휘그당을 옹호하였으나 명예혁명(1688)의 성공으로 ‘영광된 만년’을 맞이하면서, 『통치론』은 영국과 미국의 정치사상의 근간을 이루게 되었다. 출간은 1689년이었지만 저작은 명예혁명이 일어나기 전인 적어도 1683년에 완성된 것으로 인정된다. 
 
 2. 홉스의 자연권과 사회계약론 
    ① 「인간은 두려움과 이기심으로 움직이는 존재다. 자연 상태의 인간은 자연권을 가지고 있다. 그중에서 개명된 이기심을 가진 인간들이 자연법의 명령에 따라 시민사회로 이행한다. 이때 자연권의 일부를 절대주권에게 양도하는 사회계약이 만들어진다. 절대주권은 공권력을 가진다. 계약을 어긴 자는 공권력이 제재를 가한다. p379」
    ② 만인 대 만인의 투쟁이 이루어지는 자연 상태 즉 전쟁 상태에서 살아남으려면 계약을 통해 시민사회로 이행해야 한다는 것이고, 잉글랜드 내전(청교도 혁명 1642~1651) 을 고스란히 겪은 홉스는 최소한의 평화를 위해 『리바이어던』이라는 평화의 정치학을 제공했다.
  
3. 다윈의 진화론을 왜곡한 사회진화론  : “진화는 진보가 아닌 다양성의 증가다.” 
    ① 스티븐 J. 굴드는 진화론의 핵심을 “.. 국지적으로 변하는 환경에 우연히 가장 적합한 특성을 가진 개체들” 이 생존하게 되고, 이 개체들이 유전을 통해 “오랜 세월 유리한 변이가 축적되면서 진화적 변화”가 일어나는 것으로 요약했다.  다윈의 진화론은 경쟁을 통한 진화나 진보가 아니라 ‘변이’를 통한 생명의 ‘다양성’을 밝혀낸 이론이다. 오해를 불러일으키는 ‘적자생존’의 ‘적자’는 경쟁에 살아남은 강한 개체가 아니라 우연히 변화하는 환경에 잘 적응하게 된 변이체를 의미한다. 그러므로 사회진화론이 다윈의 진화론을 근거로 힘을 가진 놈이 진화되고 진보된 존재라고 주장하는 것은 다윈에 대한 왜곡 일뿐이다. 
    ② 한국 현대사에서 서구 근대 사상이 수용되는 전형적인 사례는 윤치호이다. 전통적 화이관, 기독교의 형식적 수용과 사회진화론적 세계관, 철저한 내선일체를 받아들임으로써 힘을 통한 제국주의적 지배를 근대화, 문명화의 길로 정당화하는 것이다. 친일파와 이어지는 뉴라이트 운동 역시 아마도 이런 사상적 근거를 가지고 있는 것 같다. 
  



 26강 자유주의 국가의 목표 : 자산가의 이익을 극대화

 1. 『통치론』이해의 배경 지식
    ① 신흥 부르주아의 당파성을 대변하는 테스트 
    ② 인클로저 운동으로 경제적 이익의 맛을 알게 된 사람들, 로크도 속함
    ③ 부르주아들은 명예혁명을 통해 자신의 이익을 관철한 ‘자유주의국가’를 건설
    ④ 자유주의 국가의 목표는 자산가의 이익을 극대화하는 국가 
 
 2. 『통치론』을 편집한 레슬릿의 정리
  「『통치론』은 역사적으로 굉장히 중요한 저작이다.
       존 로크가 전제왕정에 대한 역사적 공격을 개시한 것이 바로 이 책이다. - 지상의 통치자는 그들의 통치권을 신으로부터가 아닌 인간에 의해 체결된 계약으로부터 이끌어낸다는 것, 그리고 인민은 계약을 위반한 통치자에 대항하여 반란을 일으킬 권리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논증하면서. 
       여기서 로크는 자연법사상과 인간의 자유와 평등에 관한 사상을 전개하는데, 이 사상들은 미합중국의 건국의 아버지들, 특히 토머스 제퍼슨에게 깊은 영향을 끼쳤다. 
      로크가 전개한 재산권 이론은 부르주아 사회에 대한 마르크스주의의 본질적인 사례이자 중요한 겨냥점이 되었다. p397」
   


27강 재산으로 증명되는 인간의 정체성 

 1. 『통치론』의 재산 property : 생명life, 자유liberty, 자산estate . 재산을 지키자는 것은 곧 자유를 지키자는 말과 같은 호소력을 지님. 서구근대사상에서 자유는 곧 재산인임이 드러나는 듯. 자유주의란 곧 재산을 늘리고 소유할 자유가 되는 듯. 
  2. 로크의 자연법 혹은 자연 상태 
    자신의 소유물과 인신을 처분할 수 있는 완전한 자유의 상태. 사적 소유권이 자연적 권리임을 역설
  3. 사회계약을 맺는 이유 : 이런 자유를 더 안전하게 누리기 위해 즉 재산의 보존 
  4. 로크는 인간의 권리, 자연 상태, 정치사회로의 이행 모두를 ‘재산’을 중심으로 설명한다. 인간의 가치는 재산의 소유와 재산을 위한 활동에 의해 결정된다.   
  


 28강 세계의 중심을 차지한 ‘소유권’  
  
1. 소유를 욕망하는 개인 : 자유주의 정치철학의 출발점 
    「사람들에게 세계를 공유물로 주신 하느님은 또한 그들에게, 삶에 최대한 이득이 되고 편의에 봉사하도록 세계를 이용할 수 있는 이성을 주셨다.p407 」
  소유에 대한 욕망의 도구로 전락한 이성에 대해 흄은 ‘이성은 정념의 노예’라 했다. 
  2. 노동가치설 : 공유물로부터 소유권을 만들어내는 ‘노동’ 
    자연이 제공한 것에 자신의 노동을 섞고 뭔가를 보태면 자신의 소유가 된다는 것. 노동이 소유권의 핵심요소이다. 토지 소유권은 합리화했지만 노동이 포함되지 않은 상속권은? 로크는 이 문제는 설명하지 못했다.   
    노동가치설이나 당파성 같은 개념은 흔히 오해하듯 마르크스주의로부터 시작된 것이 아니라 잉글랜드의 자유주의 정치철학에서 비롯되었다. 
  3. 소유와 합리의 일치 : 경제학은 인간을 합리적인 행위자로 전제한다.  부자는 합리적이고 가난한 사람은 비합리적 인간이 된다. 소유가 합리성의 기준이 된다. 
  4. 국가commonwealth 의 역할 : 부주아 계급의 소유권을 보호하는 도구 
    소유는 법적으로 보호받아야 하며, 소유를 침해하는 일체의 폭력으로부터 재산을 지키는 것이 국가의 임무. 로크의 국가는 소유권 보호를 최고의 임무로 삼는 경찰국가 혹은 도구적 국가
    로크가 사용한 국가는 state가 아닌 commonwealth이다. 즉 국가를 재산의 관점에서 바라고 있다. 영국에서 발전된 이 독특한 개념은  영연방의 공식명칭인 Commonwealth of Nations에 지금도 남아있다. 
  5. 인민의 저항권 : 부르주아 혁명론 
    정부가 동의 없이 개인의 재산을 건드리면 인민은 복종의 의무를 면제받고 혁명을 일으킬 수 있다. 이 때 로크의 인민은 합리적인 사람 즉 재산으로써 합리성을 입증할 수 있는 사람이다. 
  6. ‘인간’에서 ‘소유권’으로 
    「데카르트에서 인간은 세계의 중심이 되었습니다. 로크는 이것을 이어받아 인간의 소유권을 중심에 놓았습니다. 그러나 시대가 흐르면서 ‘인간’은 사라지고 ‘소유권’만 남았습니다. 다시 말해서 소유권이 세계의 중심에 놓이게 된 것입니다. 로크도 21세기가 이런 세상이 되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p419~20」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공산당 선언 펭귄클래식 80
칼 마르크스.프리드리히 엥겔스 지음, 권화현 옮김 / 펭귄클래식코리아(웅진) / 2010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마음에만 있고 선뜻 읽지는 못했던 책을 읽게 되는 때가 가끔 온다.  우연하게도 자꾸 눈에 뜨인다거나, 믿을만한 사람이 권한다거나 할 때가 그렇다.  작년 말부터 읽게된 강유원의 책들 중 『역사 고전 강의』를 방학 동안 두명의 이웃과 함께 공부하고 있다.  책의 특성상 다루고 있는 고전을 함께 읽어야 하지만 영 엄두가 나지 않는다. 데카르트의 『방법서설』이나 콩드르세의 『인간정신의 진보에 관한 역사적 개요』같은 고전을 읽을 수 있는 능력과 열의가 우리에게는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으니까 말이다. 그런데 그 중에는 그래도 한번 읽어볼만한 고전이 아주 없지는 않다.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이나 마르크스·엥겔스의 『공산당 선언』이 그렇다. 공통점은 두 책 다 비교적 얇다는 것이다. 『공산당 선언』은 작년 말에 언니네 갔다가 조카의 책꽂이에서 우연히 보았다. 책의 명성에 짓눌려 그랬는지 그 책이 그렇게 얇다는 것이 너무 신기했다. 한마디로 좀 만만해 보였다는 것이다. 백 페이지도 안되니, 어려워봤자 그걸 못 읽기야 하겠나 자신감이 생긴 것이다. 그리고 『역사 고전 강의』에서 『공산당 선언』을 다시 만나게 되니 꼭 읽어야 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이다. 우연히 눈에 뜨이기도 했고 믿을만한 사람이 권하기도 하니 진짜로 때가 온 것이 틀림없으니 말이다. 그렇게 해서 그 유명한, 그러나 말로만 들어봤던  『공산당 선언』을 내 눈으로 직접 읽게 되었다.

 

 

  『공산당 선언』은 한마디로 하자면 공산주의자들의 '커밍아웃'을 선언하는 팜플릿이다. 본문만 치면 46쪽 (펭귄 클래식 판)밖에 안되는 소책자다. 그러니 당연히 어렵지 않다. 누가 '커밍 아웃'을 어려운 말로 하겠는가! 그런데도 부르주아지의 탄생과 자본주의의 발전 양태, 다가올 프롤레타리아트의 혁명까지 근대의 역사와 미래의 전망을 충실히 담아내고 있다. 힘이 넘치는 문장은 신랄하면서도 유려하다. 누구나 한번쯤은 들어보았을 첫 문장, "하나의 유령이 유럽을 배회하고 있다. 공산주의라는 유령이"와  마지막 문장인 "지배계급으로 하여금 공산주의 혁명 앞에 전율케 하라. 프롤레타리아들이 잃을 것이라고는 그들의 쇠사슬밖에 없다. 그들이 얻을 것은 세계 전체이다.   만국의 노동자들이여, 단결하라!" 만 보아도 이 팸플릿의 선동성이 어떠했을지 짐작이 간다. 

 

  공산주의 체제의 몰락을 지켜보아야 했던 현재의 우리들에게 『공산당 선언』은 실패한 예언이기도 하다. 그러나 책 내용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부르주아 자본주의에 관한 분석과 묘사는 여전히 유효하다. 다만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부르주아들의 힘을 너무 만만히 보았던 것 같다.  경제뿐만 아니라 정치와 사상, 문화 등 세계 전부를 장악해 버린 부르주아는 죽음 의 불길 속에 새 생명을 얻는 불사조처럼 악마적 힘을 가졌다는 사실을 예견하지는 못했던 것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그들이 예언했던 많은 것들이 지금 우리를 옭아매고 있는 현실이 된 것도 사실이다.

 

  처음 도서관에서 『공산당 선언』을 검색했더니 강유원의 『공산당 선언』이 걸렸다. 마르크스·엥겔스의 『공산당 선언』은 없고 강유원의 것만 있었다. 어떤 대학이었는지 궁금하지만 여하튼 놀랍게도 대학 야간강의 내용을 바탕으로 한 책이었다. 시험도 보고 학점도 주는 정식 강의에서 한 학기 동안 마르크스·엥겔스의 『공산당 선언』을 강의한 것이다. 씨네21의 '정훈이' 삽화도 있고, '젊은 세대를 위한 마르크스 입문서'라는 부제도 붙어있다. 같이 읽으면 재미있다. 

 

  요즘 『살아있는 세계사 교과서』와 『아틀라스 세계사』도 함께 공부 중이다. 세계사를 전반적으로 그려보는데 매우 좋은 책이다. 청소년용이지만, 청소년 정도의 지식밖에 없는 처지라 아주 재미있다. 여하튼 조금 알게 된 역사에 따르면 『공산당 선언』이 발표된 1848년은 유럽 근대사에 아주아주 중요한 해이다. 프랑스에서  2월 혁명이 일어나 입헌군주제가 폐지되고 제2 공화정이 시작되었고, 이 혁명의 불길은 전 유럽으로 퍼저 나가 온 유럽이 혁명의 소용돌이 속에 있었다. 그러나 곧바로 이 혁명의 승자는 부르주아지임이 드러나고, 승기를 잡은 부르주아지는 혁명의 맨 앞줄에 내세웠던 프롤레타리아트를 탄압하기 시작했다. 그 비극적 귀결은 1871년의 파리코뮌 대학살이다. 1789년의 프랑스 대혁명이 그 자체로 부르주아지가 지배권을 확보하기 위해 귀족과 잡았던 손을 놓고 프롤레타리아트를 이용했던 혁명이기는 했지만, 혁명정신은 그 자체로 성장을 거듭했고, 부르주아지는 상황에 따라 프롤레타리아트를 이용하기도 하고 견제하기도 하면서 지배권을 확보했던 것이다.

  이런 복잡한 구도 속에서 1848년에 이미 마르크스·엥겔스는 프롤레타리아트의 주적이 부르주아지임을 명백히 천명하면서, 봉건적 사회주의, 소부르주아적 사회주의, 독일 사회주의, 보수적 사회주의, 부르주아적 사회주의, 비판적-유토피아적 사회주의 등 각종 사회주의를 비판했다. 이들 사회주의들은 궁극적으로 자본주의를 존속케하는 지지대의 역할을 할 뿐이며 오직 공산주의만이 프롤레타리아트의 해방을 가져올 수 있다는 것이다. 

  아주 흥미로운 사실은  마르크스가 낭만주의적 유토피아적 사상을 끝장내야 한다고 주장했다는 것이다. 그가 처음 깊은 영향을 받았던 것이 바로 낭만적-유토피아적 사회주의였는데, 1848년에 마르크스는 이것과 결별했던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지금 바로 그 마르크스 자신의 사상을 낭만적이며 유토피아적인 사상으로 여기게 되고 말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라캉 카페 Less Than Nothing 시리즈 2
슬라보예 지젝 지음, 조형준 옮김 / 새물결 / 2013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11_

비전체 또는 성적 차이의 존재론

 

 

  11장을 두 달 가까이 끌었다. 모든 장이 다 그랬지만, 특히 11장은 머리가 아팠다. 비전체not-all 라면 전혀 모르는 개념도 아닌데 읽기가 너무 힘들었다. ‘비-비-대상’, ‘비-비-미학’, ‘비-비-담론’ 따위의 ‘비-비-~’ 에서 손을 놓았다. 개념 자체의 난해함도 있지만, 역시나 번역의 문제가 그 난해함에 혼란을 더했다. ‘비’로 뭉뚱그린 우리말 번역으로는 술어의 부정과 비술어의 부정을 구분하기 힘들었다. 어쨌거나 다시 읽은 11장은 두 달 전보다는 눈에 들어오는 부분이 많았다. 아마 반년 이상 붙들었던 책에 질려있었던 것 같다. 11장을 끝내면 이제 4부 ‘식후 끽연’만 남았다. 어쩌다 일 년에 한두 번 붙여보는 담배지만, 담배란 느긋한 마음의 여유가 아니던가. 11장만 어서 끝내자!

 

 

 

1. 탈주술화된 세계 속에서의 성적 차이

 

  제목이 상당히 거시기하다. 성적 차이 혹은 그것의 합일 따위는 주술화된 세계의 영역으로 치부되었다, 적어도 근대에는. 그런데 라캉은 근대 과학의 장 내에서 성적 차이의 존재론적 지위를 다시 주장하고 있다. 도대체 성적 차이란 무엇일까?

 

 

2. 성적 차이의 실재

 

  「그리하여 얼핏 섹슈얼리티는 어떤 형상을 비틀어버리는 힘, 현실에 대한 ‘객관적’ 시각을 왜곡시키는 어떤 것처럼 보인다. 그 자체로 그것은 환원 불가능한, 도저히 능가할 수 없는 존재론적 추문, 칸트가 그렇게나 큰 충격을 받은 진짜 ‘이성의 안락사’를 가리킨다. 현실을 총체성 속에서 사유하려는 모든 시도는 교착 상태, 비정합성으로 끝나게 되어 있다는 것이 그것이다. 여기서 역설 -그리고 진정 헤겔적인 통찰-은 우리의 지각을 왜곡하는 이러한 ‘성적 편향들’이 우리를 현실 그 자체로부터 분리시키기는커녕 그것과 직접적으로 연관될 수 있도록 해준다는 것이다. ‘섹슈얼리티’는 존재론적 교착 상태, 현실 그 자체의 불완전성이 주체성 속에 기입되는 방식이다. 그것은 객관적 현실에 대한 주관적 왜곡이 아니라 직접적으로 현실 자체의 비전체, 비정합성/어긋나 있음과 동일한 주관적 왜곡이다. p1313~4」

 

  「‘젠더의 사회적 구성’ 이라는 문제틀은 주체를 주어진 것으로 전제하며, 우연적인 상징화의 공간을 전제하는 반면 라캉에게서 ‘성구분’은 주체의 구성 자체를 위해, 상징화의 공간 속으로 진입하기 위해 치러야 할 대가이다. 바로 거기에 성적 차이의 지위와 관련된 정신분석과 철학의 핵심적인 차이가 있다. 철학에서 주체는 내속적으로 성화된 것이 아니며, 성 구분을 주체의 출현 자체를 위한 형식적으로 선험적인 일종의 조건으로 격상시킨다. 따라서 철학이 생각할 수 없는 것이 철학적 (존재론적) 차원에서의 성적 차이라는 주장을 옹호해야 한다. 성적 차이는 원초적 적대성을, 모든 총체성을 교란시키는 비전체를 나타낸다. p1317」

 

  두 개의 인용문에는 성 및 성적차이와 관련해 두 개의 단어가 나온다. 블완전성과 비전체가 그것이다. 불완전하고 비전체인 것은 현실이다. 성적 차이는 그것을 드러내고 있을 뿐이다. 두 성은 이 비정합성을 드러내는 상이한 방식이다.

 

 

3. 성 구분 공식 : 예외가 있는 전체

 

  「따라서 성적 차이는 궁극적으로 양성 간의 차이가 아니며 각각의 성의 정체성의 한가운데를 가로지르며 그것을 불가능성의 표시로 낙인을 찍는 차이이다. 만약 성적 차이가 양성 간의 차이가 아니라 각 성을 내부로부터 절단하는 차이라면 양 성은 도대체 어떻게 서로 관련을 맺을까? 라캉의 대답은 ‘무관심’ 이다. 성적 관계는 없다. - 양성은 조화를 이루지 못한다. p1340」

 

  라캉의 성 구분 공식은 우리가 아는 수학적 공식과는 다른 논리 구조를 가진다. ‘예외가 있는 전체’는 남성의 공식이다. 모든 x는 F(x)에 속한다. 단, F(x)에 속하지 않는 어떤 x가 하나는 있다. 예외가 있으면 전체가 될 수 없다는 것이 논리에 관한 우리의 상식이지만 성 구분 공식에서는 예외가 있어야만 전체가 될 수 있다. 여성의 공식은 ‘비전체’ 이다. 모든 x가 F(x)에 속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F(x)에 속하지 않는 어떤 x가 있는 것도 아니다. 여성 공식에서는 예외가 없지만 비전체이다. 각각의 성은 자체로, 그 내부에서 모순적이다. 이 모순은 상대의 성과는 아무 관계가 없다. 여하튼 남성 공식이 ‘역학적 이율배반’ 이고, 여성 공식은 ‘수학적 이율배반’ 이다.

 

  보편성과 그것의 구성적 예외의 논리에는 세 개의 계기가 있다. (1) 보편성의 대한 예외가 있다. 모든 보편성은 그 틀에 맞지 않는 특수한 예외를 포함한다. (2) 보편성의 특수한 사례들은 모두 예외다. 보편성에 딱 맞는 특수성은 없다. (3) 여기서 변증법증 비틀기가 나온다. 예외에 대한 예외. 예외이지만 그 예외가 보편성 자체와 직접 연관된 요소가 있다. 단독적 보편성으로서의 예외가 그것이다.

 

  「모든 특수한 존재자는 보편성과 관련해 예외의 위치에 있다. ‘정상적인’ 예외의 계열과 관련해 주체를 대신하는 주인-시니피앙은 예외에 대한 예외, 직접적 보편성의 유일한 자리이다. 다시 말해 주인-시니피앙에서 예외의 논리는 재귀적인 극단으로까지 추구된다. 주인-시니피앙은 보편적 질서로부터 (그러한 질서 내에 적당한 자리가 없는 ‘비-부분의 부분’으로서) 전면적으로 배제되며, 그 자체로서는 직접적으로 특수한 내용과는 정반대되는 보편성을 나타낸다. p1345~6」

 

  그러면 보편성이 어떻게 구현될 수 있을까? 쉽게 말해 어떻게 해서 우리는 예외의 예외가 아닌 일반적 보편성을 얻게 되는 것일까? 

 

 「즉 주체는 보편성 속의 하나의 금, 실체적 총체성 속에 위치시킬 수 없는 X일 뿐만 아니라 오직 주체만을 위한 보편성도 있다. 오직 최소한으로 면제된 주체적 관점으로부터만 전체가, (특수한 예시화와는 다른) 보편성이 결코 이 보편성의 특수한 계기로 완전히 구현된 어떤 사람이나 어떤 것에게가 아니라 그 자체로 나타날 수 있다. 이러한 의미에서 예외는 말 그대로 보편성을 정초한다. p1347」

 

  보편성은 객관적이 아니라 주체의 주관적 관점에서만 획득된다는 말인 것 같다. ‘모든 크레타인은 거짓말쟁이다.’ 이 말을 한 사람 역시 크레타인이지만 그는 자신을 예외에 놓는다. 거짓말쟁이의 패러독스는 언표행위자를 모든 크레타인 속에 포함시킴으로써 발생한 것이다. 이 언표가 보편성을 획득하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언표행위자는 예외의 자리를 차지해야 한다. 위의 인용문이 이런 뜻인지는 정확히 모르겠지만 이렇게 이해하면 조금 쉬워진다.

 

 

4. 성 구분 공식 : 비전체

 

  여성은 비전체이다. 그런데 비전체를 만드는 어떤 예외도 허용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비전체를 만드는 것은 무엇인가? 답은 無이다. 우유를 넣지 않은 커피는 그냥 맨커피와 다르다.

 

  「다시 말해 ‘이것이 그것을 위해 비-Fx를 고수하고 있는 x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집합을 비전체적인 것으로 만드는 x는 단지 이 무 자체, 빗금처진 $일수밖에 없다. $와 a의 불가능한 접속(관계)은 바로 이런 식으로 읽어야 한다. 즉 주체는 공백이며, 텅 빈 위치, 술어 없는 주어인 반면 a는 그에 고유한 주어가 없는 술어이다. - 우유를 넣지 않은 커피와 같은 것이다. p1358」

 

5. 성적 차이의 이율배반

 

  성적 차이는 적대적 성격을 갖고 있다. 각 성은 다른 성을 보충하지 않으며, 다른 성이 완전한 정체성을 갖는 것을 방해한다.

 

  「성적 차이는 ‘실재-불가능한 것’ 이라는 라캉의 주장은 ‘성적 관계는 없다’는 주장과 완전히 동일한 것이다. 성적 차이는 ‘정적인’ 상징적 대립들 그리고 포함/배제의 고정된 집합이 아니라 교착 상태, 트라우마, 열린 질문, 모든 상징화의 시도에 저항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성적 차이를 일군의 대립들로 번역하는 것은 모두 실패할 수밖에 없는 운명이며, 성적 차이가 의미하게 될 것을 위한 헤게모니투쟁의 영역을 여는 것이 바로 이 ‘불가능성’ 자체이다. p1373」

 

 

6. 왜 라캉은 유명론자가 아닌가?

 

  이 질문에 대해 간결이 요약하려면 먼저 유명론자가 무엇인지를 알아야 하는데, 어렴풋이만 알지 구체적으로는 알지 못한다. 여기서는 알튀세르와 대비하여, 알튀세르는 ‘유물론적 유명론’, 라캉은 ‘주이상스의 실재론’을 주장하는 것으로 설명한다.

 

  「라캉에게서 주이상스는 어떠한 실체적 실천성도 갖고 있지 않은 기묘한 실체이다. 그것은 오직 상징적 상블랑들의 텍스처에서 나타나는 금들, 왜곡들, 불균형들의 잠재적 원인으로만 식별될 수 있다 즉 현실과 관련해 라캉은 예외들(또는 클리나멘들)에 대한 알튀세르의 유물론적 유명론에 동의한다. 실제로 존재하는 것은 오직 예외들뿐이며, 그것들이 존재하는 현실의 모든 것이다. 하지만 유명론이 보지 못하는 것은 다수의 현실을 낳는 잠재적인 원인인 어떤 불가능성 또는 적대성의 실재이다. p1375」

 

  라캉이 유명론자가 아닌 이유는 유명론이 현실의 잠재적 원인인 적대성의 실재를 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제임슨이‘대안적 근대성’에 대해 비판하고 있는 것 역시 바로 이런 점이다.

 

  「다수에 의지하는 것은 근대(성)의 독특한 고정된 ‘본질’을 인식하지 못하기 때문이 아니라 여기서 다수화는 근대(성)라는 개념 자체에 내재하는 적대성에 대한 부인으로 기능하기 때문에 오류이다. 즉 그것의 오류는 근대(성)라는 보편적 개념을 적대성으로부터, 이 근대(성)가 자본주의 체제에 끼워 넣어져 있는 방식으로부터 자유롭게 만들어주는 사실에 있다. 이 측면을 그저 이 체제의 역사적 아종 중의 하나로 치부함으로써 말이다. 이러한 내속적 적대성을 ‘거세적’ 차원으로 부를 수 있는 한 근대(성)들의 다수화를 물신주의적 부인의 형식으로 파악하기는 쉬울 것이다.

  따라서 대안적 근대(성)에 대한 제임슨의 비판은 보편성과 특수성 간의 본래 변증법적인 관계를 위한 모델을 제공해준다. 이 양자의 차이는 특수한 내용이 아니라 보편성 쪽에 있다. 보편성은 특수한 내용의 모든 것을 담는 용기, 특수성들 사이의 갈등을 위한 평화로운 매개자나 배경이 아니다. 보편성 ‘그 자체’는 견딜 수 없는 적대성 또는 자기모순의 자리이며, 그것의 특수한 종(의 다수)은 궁극적으로 그러한 적대성을 모호하게 만들고‘화해시키고/제어하기 위한 수많은 시도에 다름 아니다. 다시 말해 보편성이란 문제-교착 상태의, 화급한 문제의 자리를 가리키는 이름이며, 특수성들은 이 문제를 해결하려고 시도되었지만 실패한 대답들이다. p1377~8」

 

  우리가 어떤 형태의 근대를 발전시켜 왔던 적대는 실재한다는 말일까? 지금 우리 현실의 문제를 우리가 이룩했던 근대성의 문제로 보는 것은 실재하는 적대성에 대한 부인이라는 비판인 것 같다. 이 실재적 적대성이야말로 현실의 잠재적 원인이기 때문이다. 현실은 실재가 아니라 상블랑이다. 현실은 실재적 적대성을 흐리는 어떤 환상을 물질화하고 있다는 의미에서 상블랑이다. 그렇다면 실재는 무엇인가?

 

  「1960년대부터 계속해서 실재는 더 이상 모든 상징적 세계들에서 동일한 것으로 남아 있지 않게 되었다. 현실에 대한 통념과 관련해 실재는 어떤 대상에 대한 다수의 상이한 관점들에도 불구하고 그대로 지속되는, 기저에 놓인 동일한 것이 아니다. 그와 반대로 실재는 그러한 차이들을 낳는 것, 다수의 관점이 찾으려는 (그리고 실패하는) 파악하기 어려운 핵심이다.  가장 순수한 형태의 실재가 순수 가상인 것은 이 때문이다. 대상의 어떠한 실재적, 특징들 속에도 정초될 수 없는 차이이다. ‘순수’ 차이인 것이다. p1380」

 

  라캉의 실재 개념은 변화해 왔다. 초기에는 항상 동일하게 남아 있는 어떤 핵심, 단단한 고갱이로 인식되었지만 후기에 와서 실재는 순수 가상 또는 순수 차이이다. 장자의 나비 꿈 이야기에서 나비인지 장자인지 알 수는 없지만, 하여튼 장자와 나비 사이에는 분명히 차이가 존재한다. 이 간극이 바로 실재이다. 실재는 진짜 현실이 아니라 하나의 꿈을 다른 꿈과 분리시키는 간극이다.

 

 

7. 부정의 부정 : 라캉 대 헤겔

 

  라캉은 자신의 부정의 부정은 헤겔의 그것과는 다르다고 반복해서 주장했다. 헤겔처럼 부정의 부정의 결과 어떤 종류의 실정성으로 돌아가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런데 지젝은 헤겔을 독창적으로 해석하여 라캉과 헤겔이 라캉 자신의 주장만큼 멀지는 않다는 것을 늘 암시해왔다. 똑 부러지게 단언하지는 않는데, 여기서도 아마 비슷하지 않을까?

 

  라캉의 부정의 부정은 성구분 공식의 여성적 측면 즉 비전체에 있다.

 

  「즉 담론의 사실이 아닌 것은 아무것도 없다. 하지만 이 비-비-담론은 모든 것이 담론이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정확히 비전체가 담론임을 의미한다. - 밖에 있는 것은 실정적인 어떤 것이 아니라 대상a, 무 이상이지만 어떤 것, 일자는 아닌 어떤 것이다. 이를 다른 식으로 표현해보자면, 거세되지 않은 주체는 없지만 이것이 모든 주체가 거세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물론 거세되지 않은 잔여가 대상a 이다). 여기서, 이러한 이중 부정에서 건드리게 되는 실재는 칸트적인 무한판단, 비-술어의 긍정과 연결될 수 있다. p1386~7」

 

  헤겔의 부정의 부정은 지양이다. 그런데 이 지양에 대해 지젝은 오해가 있다고 주장한다. 아기를 씻은 더러운 물에 비유해서 설명한다. 보통은 아기는 남겨두고 더러운 물만 버리는 것으로 인식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지젝은 더러운 물이 아니라 아기를 내다버리는 것이라고 한다.

 

  「바로 거기에 지양에 대한 유토피아에 고유한 오해가 있다. 즉 현상 속에서 건강한 핵심과 이 핵심의 완전한 실현을 막는 불행한 특수한 조건을 구분하고, 그런 다음 핵심이 완전히 잠재력을 실현할 수 있도록 그러한 조건을 제거하는 것이 그것이라는 것이다. 그리하여 자본주의는 공산주의에서 지양된다. 본질적인 핵심은 더 높은 수준으로 끌어올려 지기 때문에 부정되지만 보존된다는 것이다. 그러한 접근법은 핵심의 완전한 전개를 막는 장애물은 동시에 그것의 가능성의 조건이며, 따라서 특수한 조건의 거짓 껍데기를 제거하면 이 핵심 자체도 잃어버린다는 사실을 못보게 한다. 여기서 다른 어느 곳에서보다 더 진정한 과제는 더러운 물은 내다 버리고 아기는 남겨두는 것이 아니라 소위 건강한 아기를 내다 버리는 것이다. (그리고 더러운 물은 저절로 사라질 것이다.) p1396~7」

 

 

8. ‘비관계가 있다’

 

  ‘~관계가 없다’ 와 ‘비관계가 있다’는 다르다. 라캉은 ‘성적 관계는 없다’에서 ‘비관계가 있다’로의 이행 문제를 가지고 씨름했다. 이것은 부정판단으로부터 무한판단으로의 칸트적 이행을 환기시킨다.

 

  「‘성적 관계는 없다’의 ‘비관계가 있다’로의 이러한 전도, 부정성 자체가 긍정적 실존을 얻도록 해주는 역설적 대상이라는 이 개념은 핵심적인 의미를 갖고 있다. 즉 이것 없이는 우리는 ‘두 개의 대립적 원리의 영원한 투쟁’이라는 추상적 수준에 머물게 된다.

  ‘성적 관계는 없다’로부터 ‘비관계가 있다’로의 이행은 또한 헤겔에게서 찾아볼 수 있는 이행 즉 규정적 반성으로부터 반성적 규정으로의 이행과 상동적이다. - 또는 실로 유물 변증법으로부터 변증법적 유물론으로의 이행이라는 마르크스주의적 이행과 상동적이다. 우리가 여기서 다루고 있는 것은 (억압적인) 체계로부터의 해방의 난무로부터 (독일관념론자들이) 자유의 체계라고 부른 것으로의 핵심적인 변증법적 전환이다. - 부정성의 폭발들과, 상상 가능한 모든 형태의 ‘저항’과 ‘전복’과 사랑에 빠져 있지만 자체가 선행하는 실정적 질서에 기생하는 것은 극복할 수 없는 ‘부정 변증법’으로서는 가장 파악하기 힘든 전환이다. p1404」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