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의학의 권력 - 콜레주드프랑스 강의 1973~74년
미셸 푸코 지음, 오트르망 옮김 / 난장 / 201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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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코는 왠지 무서웠다. 『감시와 처벌』『광기의 역사』『성의 역사』『지식의 고고학』『말과 사물』. 어느것 하나 만만해 뵈지 않았다. 그런데 몇 년 전 『안전, 영토, 인구』라는 책이 번역되었는데, 덜컥 세미나 책으로 결정되어 버렸다. 제목만 봐도 한숨이 탁 나오는데, 그것도 푸코의 책이라니. 나의 첫 푸코가 하필 ... 
 
 
푸코는 1971년부터 1984년까지 한해만 빼고, 13년 동안 해마다 12주씩, 1주에 한 번, 콜레주드프랑스에서 강의를 했다. '사유체계의 역사' 라는 명칭 아래 진행된 이 강의에는 500명이 넘는 청중이 몰려 들었는데, 학생, 교사, 연구자 뿐만 아니라 호기심에 찬 일반인들, 외국인들이 원형강의실 두 개를 가득 메웠다고 한다. 말하자면 대중강의 혹은 공개강좌였다. 이 강의들은 많은 청강생들에 의해 녹음되었고, 푸코 사후에 유가족의 동의 아래 강의록의 형태로 출간되기 시작했다. 강의록은 총 13권이다. 출판사 '난장'에서는 2011년 『안전, 영토, 인구』를 처음으로, 2012년 『생명관리정치의 탄생』, 그리고 올해 『정신의학의 권력』을 번역 출간하였다. 물론 다른 출판사에서 먼저 번역한 것들도 있다. 
 
『안전, 영토, 인구』는 재미있었다. 강의여서 그런지 어렵지도 않았다. 무엇보다 강의의 치밀함이 놀라웠다. 사실 콜레주드프랑스의 강의들은 강의 자체가 목적은 아니다. 이 강의들은 한 해동안의 연구업적을 공개강좌를 통해 설명하는 자리이다. 그러니 이름값으로 설렁설렁하는 그런 강의와는 다르다. 강좌의 문이 열리자, 천정까지 쌓여 있던 기록들, 자료들, 문헌들이 우르르 쏟아져 나왔다. 저것들을 다 모으고 읽고 분석하려면 도대체 얼마나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했을까 궁금했다. 푸코의 탐구 방법을 흔히 고고학과 계보학이라고 한다. 무슨말인지 잘 이해가 가지 않았는데, 푸코의 강의들을 읽다보면 어렴풋이 이해가 간다. 푸코에게 중요한 것은 진리를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진리가 어떻게 '구성' 되는가 이다. 진리는 근원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역사적으로 만들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 역사적 과정을 추적하는 작업이 푸코의 고고학이다. 그렇게도 시시콜콜 세부적인 기록들과 그렇게도 엄청나게 방대한  자료들이 푸코에게 필요한 이유이다. 
 
『안전, 영토, 인구』는 '통치' 개념의 변화에 대한 고고학적 작업이며, 『정신의학의 권력』은 '정신의학'적 권력에 대한 고고학적 탐구라고 할 수 있다. 『정신의학의 권력』은 프로이트의 "정신분석" 개념이 도입되기 이전까지, 19세기 정신의학의 규율권력에 대해 다루고 있다. 재미로는 『안전, 영토, 인구』에 비해 떨어지는 편이다. 정신분석학에 관심이 좀 있는 편이라, 기대값이 높았던 탓인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정신분석학에 대해서는 거의 다루지 않고, 푸코는 정신분석학에 그다지 호의적이지도 않은듯한 느낌이다. 
 
난장 출판사의 또 다른 강의록인 『생명관리정치의 탄생』은 『안전, 영토, 인구』에 연결되는 강의이다. 푸코를 '감시와 처벌' 즉 규율사회를 강조한 학자로만 알고 있다면, 통상 푸코가 인용되는 방식이 그러니,  『안전, 영토, 인구』와 『생명관리정치의 탄생』은 무척 새로울 것이다. 나도 깜짝 놀랐다. 푸코는, 벤덤의 판옵티콘으로 상징되는 규율체제가  '생명관리정치' 로 대체되는 과정을 보여준다. 
 
"이때 처음으로 푸코는 생명관리권력, 혹은 생명관리정치라는 개념을 제창하고, 인구라는 개념을 도입하며, '전면화된 규율사회'라는 자신의 가설에 수정을 가했다." " '폐쇄된 규율들로부터 무한히 일반화가 가능한 판옵티콘 체제의 메커니즘에 이르게 되는 규율사회'라는 『감시와 처벌』의 가설을 수정함으로써 푸코는 『앎의 의지』의 두 번째 축인 생명의 축, '생명에 대한 권력의 조직'이라는 축, 다시 말해서 인구에 대한 생명관리정치의 축을 추가하기에 이른다." 
 
한병철의 『피로사회』는 20세기와 21세기를 각각 규율사회와 성과사회로 구분한 후, 논지를 펼쳐나간다. 이 규율사회는 말하지 않아도 푸코의 '감시와 처벌',  그리고 거슬러 올라가 벤덤의 '판옵티콘'에 닿아있다. 그런데 우연찮게도 그 때가 막 『안전, 영토, 인구』를 읽고 난 후였다. 푸코에 대한 (당연히 얻어들은 것 뿐인) 선입관과는 판이하게, 생명관리정치라는 개념에 신기해하고 있던 차에, 20세기를 규율사회로 규정한 한병철은 아무래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푸코는 이미 규율사회의 개념을 넘어서 있었다. 그리고 작년에 읽었던 『생명관리정치의 탄생』에는 독일과 미국의 신자유주의에 대한 자세한 논의가 있었다. 그때도 참 놀라웠다. 70년대 말에 벌써 신자유주의의 문제를 거론하다니, 우리나라에는 신자유주의라는 말 자체도 아마 없었을 텐데. 개발독재 아래 웅크리고 있던 그 때, 신자유주의를 알고 있던 학자는 도대체 얼마나 되었을까.  여하튼 『생명관리정치의 탄생』은 『안전, 영토, 인구』에 이어서 읽으면 꽤 재미있다.  『정신의학의 권력』은 기대만큼의 재미는 없었는데, 나는 『주체성과 진실』이나 『주체의 해석학』등 80년대 초반의 강의들이 번역되기를 기다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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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곰생각하는발 2014-08-05 17: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전 지식의 고고학 읽다가 정말 난해해서 포기한 적이 있습니다. 쉽게 접할 양반이 아니구나했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푸코가 좋습니다.감시와처벌, 광기의 역사, 성의 역사는정말 탁월했으니 말이죠. 안전, 영토, 인구.. 이거 세일하길래 사둘려고 장바구니 담았다가 포기하고는 했는데 다시 한번 의지를 불태워야겠군요..

말리 2014-08-06 09:38   좋아요 0 | URL
유명한건 다 읽으셨네요 ㅎㅎ. 전 지젝을 통해 철학에 가까워진 터라 좀 편향되어 있어요. 지젝이 별로 좋아하지 않는 철학은 잘 안 읽는 ㅋ;; 그런데 푸코 강의는 정말 좋았어요. 이런 공개강좌가 우리에게도 열리면 어디든 쫓아가고 싶어요. 12시간에서 13시간 정도 강의분량이라 시간도 많이 걸리지 않아요. 추천드리고 싶어요.
 
처음 읽는 영미 현대철학 처음 읽는 철학
철학아카데미 지음 / 동녘 / 201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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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들이 자신의 삶이 아니라, 아이의 삶을 사는 것이 문제인 것 같아요.” 소위 ‘아줌마’의 개념에 관해 이야기하다 나온 말이다. 신도시의 카페에 앉아 있으면, 여기저기서 학교 이야기, 과외 이야기, 시험 이야기, 유학 이야기가 끊임없이 들려온다. 느긋한 오전, 향 좋은 커피를 앞에 두고 친구들과 마주 앉아도, 아줌마들에게는 결코 자신만의 삶이 없다. 나의 사랑, 나의 욕망, 나의 고민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쉬지 않고 떠들어대는 그 많은 이야기 속에 정작 ‘나’ 자신은 사라지고 없다는 것을 눈치 채지도 못한다. 아이의 삶을 뺀 나의 삶은 없기 때문일 것이다. 방과 후 교사를 하는 어떤 지인은 매일 엄마들이 교실을 얼쩡거리기에 교장선생님에게 무슨 일이 있냐고 물었더니, “그냥 일을 만들어서 매일 오셔요” 하더란다. 일이 없으면 옥수수라도 한 자루 쪄서 온단다. 그렇게 엄마들은 두 번의 유년을 산다. 두 번의 유년. 좋은 점이 있냐고 했더니, 어떤 엄마가 말했다. 어린 시절 읽지 못했던 동화책들을 읽을 수 있어 좋아요. 옆에 있던 다른 엄마는, 어릴 때 입어 보지 못했던 예쁜 옷을 딸에게 입혀서 좋은데 나는, 호호 책이라니, 아이 부끄러워, 했다. 나도 동화책은 부럽다. 지방의 가난한 집에서 자랐고, 공공 도서관이 없던 때라(내가 몰랐던 것일까?), 언니 오빠의 교과서를 읽는 것 외에는 변변한 읽을거리가 없었다. 책 이야기를 하다보면 좋은 동화들이 참 많은 것 같다. 처음 읽는 어떤 창작동화들은 깜짝 놀랄 정도이다. 『프린들 주세요』도 그런 책들 중 하나다.

 

 

 

누구나 한번은 생각해 보았을 것이다. 왜 하필 저 높고 푸른 허공을 ‘하늘’ 이라고 부를까?, 달고 시원한 이 과일은 왜 ‘수박’ 이라 이름 붙였을까? 요즘 엄마들은 어떻게 대답 할지 모르겠지만, 내 어린 시절에는 욕이나 한바가지 얻어먹고 끝날 질문이었다. 하늘이 하늘이고 수박이 수박이지 그럼 뭐야! 『프린들 주세요』의 닉은 이렇게 순진한 물음에서 시작하지는 않는다. 선생님 골탕 먹이기의 천재 닉은 5학년이 되자, 드라마 <여왕의 교실>의 고현정 같은 막강한 적수를 국어 선생님으로 만난다. 닉은 겁 없는 아이답게 선제공격한다. “선생님, 이 교실에는 사전이 참 많아요. 특히 저 큰 사전이요. 그 많은 낱말들은 다 어디에서 온 거예요?” 수업 시간 종료를 몇 분 앞두고 닉은 사전을 좋아하는 선생님이 설명에 정신이 팔려 숙제 내는 것을 잊어버리도록 미끼를 던진 것이다. 그러나 선생님은 고현정 급이다. “여러분도 궁금한가요? 좋아요. 니콜라스가 이 문제를 조사해서 간단히 발표해 보겠니?” 1라운드는 닉의 패배다. 그러나 이렇게 물러나면 닉이 아니다. 다음 국어시간, 열심히 준비해 간 닉은 1시간 내내 지루한 발표를 함으로써, 선생님의 수업시간을 빼앗는다. 눈치를 챈 선생님이 발표를 마무리시키자, 닉은 급한 마음에 이렇게 질문을 한다. “그런데 왜 이런 낱말은 이런 뜻이고 저런 낱말은 저런 뜻인지는 아직도 모르겠어요. 예를 들어 ‘개’라는 말이 꼬리를 흔들며 왈왈 짓는 동물을 뜻한다고 누가 정했나요? 누가 그런 거죠?” “누가 개를 개라고 했냐고? 네가 그런 거야. 니콜라스. 너와 나와 이 반에 있는 아이들과 이 학교와 이 마을과 이 주와 이 나라의 모든 사람들이. 우리 모두 그렇게 하자고 약속한 거야.... 사전에 나오는 말은 다 우리가 만든 거란다.” 집으로 가던 도중 닉은 말을 못하던 아기 때 ‘과갈라’ 하면 엄마가 노래 테이프를 틀어주던 일을 기억해 내고, “네가 그런 거야” 란 선생님의 말을 이해하게 된다. 그렇게 전쟁은 시작되었다. 그때부터 닉은 펜을 ‘프린들’이라고 부르기 시작한다. 친구들과도 문구점에서도 선생님께도 닉은 굽히지 않고 ‘프린들’을 고집한다. 선생님은 펜을 ‘프린들’이라고 부르면 남아서 반성문을 쓰게 하지만, 선생님의 탄압이 계속되면 될수록 프린들은 닉의 반을 넘어 전 학교 그리고 전 지역에 퍼져 나가며, 프린들 열풍을 일으킨다. 10년 뒤 결국 ‘프린들’은 선생님이 사랑하던 사전에까지 실리게 되고, 선생님과의 전쟁은 끝이 난다. 『프린들 주세요』는 학교를 중심으로 한 전형적인 성장소설이기도 하고, 언어의 형성에 관한 재미있는 설명이기도 하다.

 

 

 

언어라니, 마침 며칠 전에 산 『처음 읽는 영미 현대철학』이 생각났다. 천천히 읽으려고 꽂아두었는데, 그 첫 번째가 비트겐슈타인이 아닌가. 『프린들 주세요』를 철학적으로 풀이해 볼 단서가 있을 것 같았다.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은 『논리-철학 논고 』와 『철학적 탐구』라는 두 권의 책으로 대표된다. 30대 중반에 『논리-철학 논고 』를 쓴 비트겐슈타인은 자신이 철학적 문제를 궁극적으로 해결했다고 믿는다. 그리고 손을 탁탁 털고 시골의 초등학교에서 6년간 교사생활을 한다. 그러다 『논리-철학 논고 』의 결정적 결함을 깨닫고 다시 돌아와 『철학적 탐구』를 집필하는데, 책은 사후에 출간된다.

 

비트겐슈타인하면 떠오르는 문장은 아마도 7번 명제인 “말 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일 것이다. 말 자체가 멋지게 들리니 여기저기 마구 이용되는 불운을 겪기도 한다. 단순히 말 할 용기가 없는 것에 대한 변명으로 쓰일 때가 제일 어처구니없다. 탄압이 두려워 말을 하지 못하는 것과 사고의 한계를 지적하는 ‘유의미하게 말할 수 없는 것’ 과는 아무 관계가 없다.

 

「《논리-철학 논고》의 최종 결론인 7번 명제를 통하여 우리는 “말할 수 없는 것”이 《논리-철학 논고》의 핵심 개념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사실상 《논리-철학 논고》의 목적은 비트겐슈타인이 머리말에서 밝히고 있듯이, 사고의 한계를 긋는 것이었습니다. 비트겐슈타인은 말할 수 있는 것과 말할 수 없는 것을 명확하게 구분하려 했습니다. 말하자면 말할 수 없는 것은 사고의 한계 밖에 있다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이러한 한계는 어떻게 그을 수 있을까요? 비트겐슈타인은 이렇게 말합니다. “한계는 오직 언어에서만 그어질 수 있을 것이며, 그 한계 건너편에 놓여 있는 것은 단순히 무의미가 될 것이다” 라고요. p25」

 

비트겐슈타인이 유의미하게 말할 수 있는 것으로 판단한 것은 “자연과학의 명제들” 뿐이다. 우리 보통 사람들끼리 하는 말로 참, 거짓이 똑 부러지는 것, 그런 것들만 말할 수 있다는 것이다. 신이나 진리, 선악 심지어 아름다움 같은 것들은 참 거짓을 구분할 수도 없고, 그 말이 그림으로 그려지지도 않는다. “여기 한 사람과 개 한마리가 있다.” 이 문장은 그림으로 그릴 수 있다. 그런데 “이 사람은 착하다.” 이건 그림으로 그릴 수 없다. 그래서 《논리-철학 논고》의 주장을 “그림 이론” 이라고 한다. 한 명제는 사실이나 현실에 대한 그림이기 때문에 뜻을 지닐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비트게슈타인이 ‘말 할 수 없는 것’을 열등한 것으로 본 것은 절대 아니다. 오히려 정반대인데, 그는 “말 할 수 없는 것은 스스로 드러나는 것이며 신비스러운 것” 이라고 했다. 《논리-철학 논고》의 요점은 윤리적인 것이며, 자신이 쓴 부분 그러니까 ‘말할 수 있는 것’ 이 아니라 쓰지 않은 부분인 ‘말 할 수 없는 것’ 이 더 중요하다고도 했다. 그렇다면 비트겐슈타인은 왜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는 결론을 내리며 사고의 한계를 분명히 해야 했을까?

 

「《논리-철학 논고》에 따르면 철학은 “언어 비판”을 하는 것으로서 “철학의 목적은 사고의 논리적 명료화”입니다. 그렇다면 왜 명료화와 언어 비판이라는 활동이 필요한가요? 비트겐슈타인에 따르면, 언어는 사고를 위장하며, 그리하여 명제의 외견상의 논리적 형식은 실제 형식과 완전히 다를 수 있습니다. 만일 이 실제 형식과 논리를 이해하지 못하면 무의미한 물음들과 명제들이 생겨날 수 있지요. 따라서 그러한 물음들이나 명제들이 ‘거짓’이 아니라 ‘무의미’하다는 점을 보이기 위해서는 “언어 비판”이 요구된다는 것입니다. p41 」

 

“언어 비판”의 비판은 칸트의 “수수이성 비판”의 그것과 비슷한 것이 아닐까? 칸트는 이성을 비판함으로써 이성의 한계를 명확하게 했다. 순수이성은 물자체에 가 닿지 못하지만 그럼에도 칸트에게 물자체는 현상 너머에 실재하는 것이었다. 비트켄슈타인도 언어를 비판함으로써 언어를 통한 사고의 한계를 명확히 했다. 그러나 윤리나 미학, 세계, 신 등 ‘말할 수 없는 것’ 들은 스스로 드러나는 신비스러운 것들로 더 중요하다고 했다.

 

『논리-철학 논고 』는 출판되자마자 떠들썩하게 유명세를 타며, 논리실증주의자들의 바이블이 되었다. 이후 논리실증주의자들의 주요 주장들은 『논리-철학 논고 』의 영향 아래 놓인다. 20세기 영미 철학의 대표자로 단연 비트겐슈타인이 손꼽히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러나 중기 비트겐슈타인은 『논리-철학 논고 』의 문제들을 비판하면서 새로운 사상을 모색했으며, 사후 출간된 『철학적 탐구 』는 그 작업들의 최종 결과물이다.

 

비트겐슈타인은 초기의 ‘그림 이론’ 을 포기하고 ‘사용의미 이론’과 ‘가족 유사성’ 개념을 도입한다. 사용의미 이론의 핵심은 ‘언어 놀이’ 이다. 그림 이론에서 하나의 언어적 표현은 하나의 대상을 가리킴으로써, 문장과 그림은 일대일 대응 관계를 가진다. 그러나 언어 놀이에서 하나의 말은 그 말이 가리키는 하나의 지시 대상으로 고정되지 않는다. 예를 들어 ‘벽돌’ 이라고 할 때, 공사 현장에서 벽돌은 ‘벽돌을 가져 오라’는 의미가 되지만, 태권도장에서 벽돌은 ‘벽돌을 격파하라’ 는 의미가 된다. 하나의 언어적 표현의 의미는 그것이 어떻게 사용되는 가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다.

 

「사용의미 이론은 한 언어적 표현의 의미는 사용에 있다는 주장을 토대로 합니다. 비트겐슈타인은 《철학적 탐구》에서 자신의 사용의미 이론을 다음과 같이 제시하고 있습니다. “한 낱말의 의미는 언어에서의 그것의 사용이다.” “문장을 도구로 간주하라. 그리고 문장의 뜻은 그 사용이라고 간주하라!” 라고요. P35」

 

전라도의 ‘거시기’, 경상도의 ‘쫌’ 따위가 바로 언어놀이의 대표적 사례다. 다른 지방 사람들이 ‘거시기’나 ‘쫌’의 의미를 정확히 파악할 수 없는 이유는 그들은 이 낱말들을 직접 ‘사용’하는 사람들이 아니기 때문이다. 거시기가 전라도에서, 쫌이 경상도에서는 아무런 문제없이 다양한 상황에서 훌륭한 소통의 도구가 되는 것은 그 지역 사람들은 그것들을 실제로 사용하며 다 함께 ‘언어놀이’에 참여하고 있기 때문이다. “언어를 말한다는 것이 어떤 활동의 일부, 또는 삶의 형식의 일부” 임을 부각시키기 위해 비트겐슈타인은 ‘언어놀이’라는 개념을 고안했다. 그런데 당신이 ‘거시기’ 라는 말을 정말 그 말의 규칙을 제대로 따라 사용했다고, 즉 이런 뜻이 아니라 저런 뜻이라고 어떻게 확신할 수 있느냐고 질문할 수 있다. 개떡 같은 말을 진짜 찰떡 같이 알아들은 것이 맞는가?

 

「우리는 언어놀이에 참여하면서 예컨대 “하얗다”와 관련된 규칙을 실천을 통해서 배웠습니다. 우리는 그러한 배움과 규칙을 따르는 데 있어 생각이 일치합니다. 그것은 실천, 관습, 제도이며, 넓게는 삶의 형식입니다. 비트겐슈타인에 따르면 우리는 사적으로 규칙을 따를 수 없습니다. 언어놀이, 제도, 삶의 형식과 얽힌 행함과 실천에서 우리는 각각의 경우에 필요한 기술을 지배하고 있습니다. 비트겐슈타인에 따르면 이러한 기술의 지배는 “체험의 논리적 조건” 이지요. P39~40」

 

 

『프린들 주세요』의 닉과 선생님의 전쟁은 10년이 지나서야 끝났다. 닉과 선생님의 직접적 대립은 몇 달을 넘기지 않고 금방 끝났다. 그러나 프린들이라는 이름과 그것을 둘러싼 언어놀이는 닉의 손을 떠나 학교와 지역사회를 넘어 전국에 퍼져나갔다. 장난꾸러기 닉의 ‘프린들’ 이라는 언어놀이는 사용과 실천을 통해 관습이 되고 드디어 10년 후 사전이라는 제도에 정착되었다. 비트겐슈타인의 언어놀이를 이렇게 『프린들 주세요』에 직접 연결시켜도 되는지 사실 자신은 없지만, 거칠게 이해하자면 이렇게 생각해도 되지 않을까?

 

 

이렇게 초기의 비트겐슈타인과 후기의 비트겐슈타인의 이론은 완전히 달라진다. 그러나 그렇다고 비트겐슈타인의 철학관 자체가 완전히 변한 것은 아니다.

 

「사고의 논리적 명료화를 위한 “언어비판”이라는 《논리-철학 논고》의 철학관과 “우리의 언어 수단에 의해 우리의 지성에 마법을 걸려는 것에 대한 투쟁” 이라는 《철학적 탐구》의 철학관은 본질적인 측면에서 연속성과 유사성을 보이고 있습니다. 철학적 문제들이 표현되는 언어에 대한 일관된 관심이 바로 이것입니다.P42」

 

여하튼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이라고 하면 한마디로 ‘언어’ 라고 할 수 있으며, 그리고 언어에 대한 감시, 언어가 우리의 사유와 지성을 속이려고 하는 것에 대한 비판이 그의 일관된 철학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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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읽는 독일 현대철학 처음 읽는 철학
철학아카데미 지음 / 동녘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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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읽는 독일 현대철학』, 네 번째 묶음은 총 12명의 철학자 중 묶여지지 않는 나머지이면서, 각각 철학의 새로운 장을 펼친 태두 혹은 거두 3인이시다. : 정신분석학의 프로이트, 현상학의 후설, 해석학의 가다머.

 

 

 

인간 역사의 3대 굴욕 혹은 세 번의 혁명은 프로이트의 잘 알려진 이야기다. 첫 번째가 ‘코페르니쿠스의 천체 혁명’이다. 우주의 중심에서 주변부로 쫓겨난 인간의 범우주적굴욕. 두 번째는 ‘다윈의 진화론’이다. 인간은 신이 특별히 만든 창조물이 아니라 진화의 산물일 뿐. 세 번째는 프로이트 자신이 주창자인 ‘무의식의 혁명’ 이다. 인간은 자기 자신의 주인조차 아니다? 내 마음 나도 몰라 되시겠다. 프로이트의 정신분석은 바로 이 무의식을 탐구하는 학문이다.

 

『처음 읽는 독일 현대철학』의 프로이트 편 저자는 ‘이드, 에고, 수퍼에고’ 로 이루어진 정신기구, 욕망과 충동, 꿈 등에 관해 다루고 있다. 이 중 무의식의 작동법칙을 드러내주는 꿈에 대해 조금 정리해 놓겠다.

 

꿈은 크게 꿈의 내용과 꿈 사고로 나뉜다. 우리가 꿈에서 본 꿈이 꿈의 내용이며, 이 꿈이 의미하는 바를 꿈 사고라고 한다. 꿈의 내용과 사고가 분리되는 이유는 의식의 검열 때문이다. 수배자가 검색대를 통과하기 위해 변장을 하듯이 무의식 역시 의식의 검열을 피하기 위해 꿈을 기괴하고 비논리적인 모습으로 바꾸어버린다. 이 과정을 꿈 작업이라고 하는데, 전치와 압축이라는 두 가지 방법이 이용된다. “꿈 작업은 압축과 전치를 통해 잠재된 꿈 사고를 드러난 꿈 내용으로 바꾸는 작업이고, 꿈의 해석은 드러난 꿈 내용 속에서 잠재된 꿈 사고를 찾아나가는 작업입니다. p64” 여기서 꿈의 해석은 물론 우리가 심심풀이로 하는 해몽과는 다르다. 그런데 왜 무의식은 의식의 검열을 피해야 하는 걸까? 무의식은 사회적으로 용인되지 않는 욕망이나 충동을 숨기고 있기 때문이다. 꿈은 결국 숨겨진 무의식적 욕망의 표현이다. 무의식의 욕망은 꿈뿐만 아니라 농담, 말실수, 실착행위 그리고 증상을 통해 드러나기도 한다. 라캉은 ‘증상은 곧 사람’이라고 말한다. “우리가 겪고 있는 증상은 숨겨진 나의 본질과 무의식을 보여줍니다. 그렇기 때문에 증상을 덮어놓고 부벙해서는안되고 증상을 통해서 본질, 숨겨져 있는 욕망을 그대로 찾아낼 필요가 있다는 것이죠.p73”

 

 

 

서양 철학에 관심을 가지면서 이것저것 읽어본지가 10년 가까이 되어 가는데, 가장 개념이 잡히지 않는 것 중 하나가 ‘현상학’ 이다. 몇 년 전 현상학이 뭔지 도대체 아리송하던 차에 우연히 도서관에서 『현상학이란 무엇인가』라는 책을 발견했다. 그러나 ‘바로 이거야’ 라는 흥분도 잠깐, 곧바로 좌절하고 말았다. 이해가 불가능한 내용이었다. 그 책의 목차에 등장한 철학자가 후설, 하이데거, 사르트르, 메를로-퐁티 였으니, 이들의 철학이 현상학과 관련이 있구만 하는 확인이 성과라면 성과였을 뿐이다.

 

그래서 『처음 읽는 독일 현대철학』의 후설편이 은근히 기대가 되었다. 대중 강연이니 어쩌면 쉽고도 똑 부러진 설명을 읽을 수 있지 않을까? 저자는 하트라는 교수를 인용해 후설의 현상학은 ‘수많은 거봉을 품고 있는 웅장한 산맥’ 이라고 표현한다. 알프스산맥이나 에베레스트 정도 된다는 말일 테니, 동네 뒷산도 헉헉거리는 처지에 덤비는 것은 언감생심이 분명하다. 저자 역시 짧은 지면으로 약수터 산책객들을 에베레스트 정상으로 이끌 중뿔난 방법은 없을 것이다. 성마른 기대가 민망했으나, 어떻게 약수터라도...

 

후설이 현상학을 창시하게 된 배경은 20세기 들어와 실증주의가 발호하면서 철학에 위기가 왔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후설이 보는 실증주의는 실증 과학이 모든 학문의 토대가 된다고 주장하는 그릇된 철학이다. 여기서 실증주의는 실증 과학과는 다르다. 실증 과학은 과학이고 실증주의는 철학인데, 후설이 비판하는 것은 철학으로서의 실증주의이다. 실증주의는 자연과학적 방법으로 인식되지 않는 다양한 현실을 설명하지 못한다. 현상학은 뇌 과학과 같은 의식에 대한 자연과학적 연구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뇌 과학 역시 현상학의 한 분야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현상학은 뇌 과학이 의식을 연구할 수 있는 유일한 학문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후설의 ‘현상학적 심리학’ 과 ‘초월론적 현상학’ 은 내적 지각의 능력을 토대로 의식의 신비를 해명하려는, 의식에 관한 현상학이다. 내용 설명은 어차피 수박겉핥기가 될 것이 다분하기 때문에 생략한다.

 

 

 

『처음 읽는 독일 현대철학』의 마지막 주자는 가다머다. ‘해석학을 존재론적 차원으로 끌어올린, 20세기 철학사에 커다란 획을 그은 철학자’ 로 소개되어 있다. 그래서 가다머를 ‘존재론적 해석자’ 라고 부르는데, 그가 추구했던 것은 ‘사람이 어떤 존재냐는 문제’ 다. 여하튼 꼴이 일단 해석학부터 알아야 할 것 같은데, 해석학이라고 검색하면 먼저 미적분에서 발전한 수학분야라는 설명부터 나온다. 그리고 역사, 성서 등등에 ‘해석학’이 붙어 줄줄이 뜬다. ‘해석의 이론과 방법을 연구하는 학문’ 이라는 동어반복 같은 사전적 의미를 보니, 해석할만한 분야에는 다 해석학이 있을 듯하다. 그런데 영미 분석철학이니 뭐 그런 것은 들어봤어도 해석 철학은 조금 생소하다. 분석과 해석은 사촌지간 아닌가? 숙질간인가? 다행히(?) 그저께 『처음 읽는 영미 현대철학』이 배달되었으니, 조만간 분석철학에 대해서는 조금이나마 알 수 있지 않을까 싶다. 혈통 비교는 그 때 가서 해보고, 일단은 『처음 읽는 독일 현대철학』가다머 편의 저자 설명을 조금만 덧붙여 놓는다.

 

가다머는 나치의 출현으로 무엇보다, 과학기술문명이 우리 삶을 어떻게 오도하는지에 대해 깊이 파고들었다. 거의 모든 현대철학자들처럼 가다머 역시 그 원인을 데카르트 이래 절대화된 ‘도구적 이성’에서 찾아낸다. 현대철학 시리즈를 보면 데카르트는 만악의 근원처럼 보인다. 신으로부터 인간을 독립시킨 프로메테우스적 영웅이 악마의 화신으로 추락한 셈이다. 오! 데카르트... 그러나 현대는 여전히 ‘modern' 이기도 하다. 여하튼 가다머는 나치 독일의 현실을, ‘자신을 절대화함으로 자신 외의 모든 것을 대상화와 배제, 차별하는’ 도구적 이성의 오만함 때문으로 규정한다.

 

가다머는 도구적 이성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긴 성찰 끝에 고대 희랍에서 근대의 이성과는 다른, 삶의 현실성 안에서 살아 움직이는 사유의 전체성을 만나게 된다. 그 결과 근대의 이성과 다른 새로운 이성 개념으로서의 ‘이해’를 제안한다. “가다머가 말하는 이해는 무엇을 파악하기 위한 수단이나 방법이 아니라 마주하는 모든 것들을 하나로 융합하면서 나를 있게 하는 전체성의 지평을 가리킵니다. 나와 이해를 분리할 수 없는 하나 안에서 파악하는 것이지요. 우리가 어떻게 이해하는가에 따라 우리는 달리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쉽게 이야기해서 이해를 달리함으로 존재도 달리한다는 것이지요. p294” 이성과 이해의 차이는 우리가 흔히 쓰는 일상어의 뉘앙스에서 찾아볼 수 있다. ‘나는 너를 이해해’ 는 ‘나는 너를 이성적으로 다 파악했어.’ 와는 다르다. 가다머의 말이 이런 뜻이 맞는지는 모르겠지만, 책을 읽다보면 그런 생각이 든다. 여하튼 이해는 곧 존재라는 의미에서 가다머를 ‘존재론적 해석학자’ 라고 부른다. 가다머는 이해는 곧 적용이자 해석이라고도 한다. ‘이해는 언제나 이미 적용이며, 적용은 또 해석’ 이다. 이해와 적용과 해석은 앎에 관여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를 생성해 나오는 삶의 일이다. 이것이 가다머 철학의 특징이다. 이러 가다머에 대해 과거로 회귀하고, 주관주의에 빠지고, 무비판적이고, 자기이해 중심이라는 비판이 있다고 한다. 저자는 여러분의 생각은 어떠세요? 라고 묻고 있지만, 알 리가 있겠는가, 다만 저자의 권유대로 가다머의 대표작 『진리와 방법』을 정독해 본다면 어렴풋이나마 판단이 가능할 수 있지 않을까? 문제는 그러자면 가다머의 비판자들의 책도 다 읽어보아야 한다는 것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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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읽는 독일 현대철학 처음 읽는 철학
철학아카데미 지음 / 동녘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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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읽는 독일 현대철학』, 세 번째 묶음은 프랑크푸르트학파로, 1세대 아도르노, 2세대 하버마스, 3세대 호네트 이다. 호네트편 저자가 프랑크푸르트학파의 개요와 각 세대별 패러다임의 전환에 대해 잘 요약해 놓고 있어 먼저 인용한다.

 

프랑크푸르트학파는 1930년대부터 독일 프랑크푸르트 소재 사회연구소에서 호르크하이머를 중심으로 공동 연구를 추진했던 일단의 연구자들을 지칭한다. 철학 주도의 학제 간 공동연구를 통해 현존 사회를 비판하고 대안적 사회를 모색한 이들의 이론은 흔히 ‘비판이론’ 이라 불린다. 그러나 이들이 어떤 단일한 사회비판 모델이나 대안적 사회상을 제시한 것은 아니다. 세대와 시대에 따라 그들의 비판이론도 변화해 왔다.

 

프랑크푸르트학파의 1세대는 『계몽의 변증법』을 공동 집필한 호르크하이머와 아도르노로 대표된다. 프랑크푸르트학파는 초기에 맑스주의를 표방했으나, 나치 치하의 독일을 떠나 미국으로 망명하면서 이들의 패러다임도 전환을 겪었다. 미국 독점 자본주의의 비인간성과 전체주의로 변질된 스탈린체제, 그리고 나치의 가공할 폭력 앞에서 그들은 인류의 문화 과정 자체에 대해 근본적으로 회의했다. 『계몽의 변증법』은 그 결과물이다. 인류의 역사는 계몽의 역사이며, 계몽의 과정은 현대사회에 이르러 정점에 이르렀지만, 역설적이게도 그 끝은 ‘새로운 야만’ 으로 귀결되었다. 인간의 이성이 신을 대신하며, 자연을 지배하고 조작했지만, 근대사회는 결국 인간이 인간을 지배하고 통제하는 물질중심 사회가 되어버렸다. 그러나 호르크하이머와 아도르노는 계몽주의자로서, 계몽의 미완이 야만을 불러왔다고 판단했다.

 

푸랑크푸르트학파의 2세대로는 단연 하버마스가 유명하다. 하버마스는 우리가 보기에 대단히 상식적이다. 그의 <의사소통 행위 이론> 은 쉽게 말하면 소통만 잘 되면 된다는 정도로 보인다. 근대의 합리성에는 두 가지가 있는데, 도구적 합리성과 의사소통 합리성이다. 그런데 도구적 합리성이 점점 우세한 힘을 가지며 의사소통의 합리성을 파괴해 버리면서, 현대 물질문명의 문제를 야기했다. 그러므로 의사소통적 합리성이 활성화된다면 『계몽의 변증법』이 문제 제기한 야만성은 극복될 수 있다.

 

프랑크푸르트학파의 3세대 대표주자는 호네트이다. 호네트의 이론은 ‘인정’과 ‘무시’라는 일상적 언어로 전개된다. 인간은 인정을 받음으로써 아무런 훼손 없이 자아실현에 이를 수 있으며, 인정의 반대는 무시이다. 인간은 사회구성원으로써 동등한 권리를 인정받고 행복하게 살기 위해 끝없이 ‘인정투쟁’을 벌인다.

 

 

 

 

『처음 읽는 독일 현대철학』의 아도르노편은 그러나 프랑크푸르트학파나 『계몽의 변증법』에 관한 언급은 거의 없다. 다만 칸트와 헤겔의 비판적 사유를 비판적으로 계승한 아도르노의 ‘부정변증법’ 을 소개하고 있다. 아도르노는 이론의 실천과정에서 피할 수 없이 발생하는 폭력의 문제에 깊이 고민하며 예술에 집중했다. 예술은 사회적 폭력을 흡수하는 상징체계로 기능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론과 실천을 엄격히 구별한 그의 태도는 현실적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 실천을 원했던 학생들과 충돌했다.

 

 

『처음 읽는 독일 현대철학』의 하버마스편은 의사소통행위이론과 생활세계 식민화에 대해 집중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하버마스 철학의 핵심개념은 이성적 ‘대화’라고 할 수 있다. 하버마스는 대화 속에서 갈등을 넘어선 공존과 화해의 가능성을 모색해 왔다.

 

하버마스는 인간의 행위 유형을 ‘도구적 행위’, ‘전략적 행위’, ‘의사소통 행위’ 로 구별한다. 『계몽의 변증법』은 문명화 과정 전체를 인간의 자연 지배, 타자 지배, 자기 지배 등의 도구적 행위 과정으로 파악한다. 그러나 하버마스는 인간에게는 타자를 도구화하지 않고 타자의 타자성을 인정하는 의사소통 행위의 가능성이 존재함을 보았다. 의사소통행위는 사회적 행위자들이 상호 이해를 목적으로 서로의 행위 계획을 조정하는 데에서 성립한다.

 

하버마스는 또한 생활세계와 체계라는 개념을 도입한다. “모든 사회는 그것의 존속을 위해 물질적 차원과 상징적 차원에서의 재생산을 필요로 한다는 것이지요. 하버마스는 상징적 차원의 재생산을 생활세계에, 물질적 차원의 재생산을 체계에 할당합니다. 상징적 차원의 통합과 재생산, 물질적 차원의 통합과 재생산이 각각 생활세계와 체계라는 개념을 통해 포착됩니다.p317” 그런데 자본주의체제 안에서 이루어지는 사회 진화는 체계의 명령이 생활세계에 침투하는 ‘생활세계 식민화’를 야기한다. 다시 말해 화폐나 권력 같은 물적 차원이 생활세계를 지배하는 것이다. 하버마스는 이런 병리적 현상을 해소하는 것은 민주주의의 활성화를 통해서만 가능하다고 보고 토의민주주의를 주장한다. 토의민주주의는 시민사회의 공론을 기초로 입법 행위를 함으로써 국민주권의 이념을 실현하고, 체계의 생활세계 식민화를 제어하려는 기획이다. 그러나 하버마스가 생활세계 식민화 테제를 도출하던 1980년대는 복지국가의 틀이 유지되고 있던 때인데 반해, 사회적 양극화가 심화되고 있는 현재 시점에서 하버마스의 이론이 얼마나 적절한 시대진단인가에 대해서는 검토가 필요하다.

 

하버마스의 이론은 우리 일반인의 상식과 딱 부합하는 것처럼 보이는데, 아무리 소통을 외쳐도 불통만 심해지고 있는 이 시대에 과연 소통이론이라는 것이 현실성이 있는 것인지 의문이 든다. 인간은 타인을 이해할 수 있는 존재인가?

 

『처음 읽는 독일 현대철학』의 호네트편은 그의 ‘인정이론’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인정과 무시라는 그의 개념은 우리가 쓰는 일반적인 뜻과 비슷하다. 여기서 인정은 현존성, 동등성, 독특성에 대한 인정이 기본이 된다. 첫째는 무시 즉 안 보이는 사람 취급이 아니라, 사람으로서의 존재를 인정하라는 것이고, 둘째는 권리의 동등성을 인정하는 것, 셋째는 여성 장애인 성소수자 등등 개별적 독특성을 인정하는 것이다. 이렇게 타인의 존재를 인정할 때, 구성원 개개인의 자아실현이 보장되는 사회가 가능하다. 호네트는 인정과 긍정적 자기의식과의 관계를 세 가지 유형을 들어 설명한다. 사랑은 자신감을, 권리의 부여는 자존심을, 사회적 연대는 자부심을 가져다준다. 한 사회가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사회적 배려, 권리 부여, 사회적 연대 등의 사회적 인정을 경험할 수 있게 하느냐에 따라 사회의 건강성이 결정된다. 인정이 아니라 무시가 횡행하는 사회는 병리적 사회이며, 이런 사회일수록 구성원의 인정투쟁이 격화될 수밖에 없다. 사회의 도덕적 진보는 인정투쟁을 통해 사회적 인정의 대상과 내용이 지속적으로 확대되는 것이다.

 

 

 

프랑크푸르트학파의 이론은 매우 상식적이고 평이해 보인다. 우리가 합리적 이성을 믿을 수 있는 한 프랑크푸르트학파의 이론은 매우 현실적으로 보일 것이다. 그런데 도대체 사회가 흘러가는 모양을 보면, 인간에게 과연 소통이라는 것이, 상호인정이라는 것이 가능한 것인지 의심스럽다. 당장 우리나라의 동서로 갈라진 지역차별과 적대부터가 소통의 불가능성을 입증하는 사례가 아닌가 싶다. 진정 합리적 이성을 가진 인간이라면, 상호 인정과 소통이 가능하다면, 세월호 참사라는 명백한 하나의 사건을 두고도 이렇게 대립할 수 있는 것일까. 그리고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을 보면 비단 이 빈관적 상황은 우리민족만의 비합리성 때문인 것 같지도 않다. 의자와 소파까지 가져다 놓고 가자지구에 떨어지는 백리탄을 관람하며 맥주를 즐긴다는 이스라엘 국민들을 보라. 스데롯 시네마! 저것이 합리적 이성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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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읽는 독일 현대철학 처음 읽는 철학
철학아카데미 지음 / 동녘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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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읽는 독일 현대철학』, 두 번째 묶음은 나치와 철학자들 : 니체, 하이데거, 아렌트, 벤야민 이다. 물론 내 마음대로 묶음일 뿐, 저자들은 나치에 관해 별 말을 하지 않는다. 작은 지면으로 핵심만 소개하기도 바쁜 터에, 민감한 곁가지까지 건드릴 여유도,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나는 그냥 호기심으로 묶어보았다. 서양 철학을 읽다보면 눈에 띄는 것이 하나 있는데, 유난히 유대인 철학자들이 많다는 사실이다. 유대인은 전 세계 인구 70억 명 중 1300~1400만 명 정도다. 대략 1/500 의 비율인데, 이 책에만 해도 마르크스, 프로이트, 후설, 룩셈부르크, 벤야민, 아도르노, 아렌트 까지 7명이나 되니 놀랍다. 유대인이 각 분야에서 뛰어난 인물이 많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지만, 사상적 흐름을 주도하는 철학계의 거장들을 보면 늘 의문이 든다. 이런 인물들을 배출한 민족임에도, 어떻게 이스라엘이라는 국가는 그렇게 야만적일 수 있는지. 이천년 전의, 신화인지 뭔지도 모를 말씀 하나를 근거로, 이천년을 살아온 민족을 몰아내고 주인 행세를 할 수 있는지. 나치와 지금의 이스라엘이 근본적으로 동일함을 그들이 어떻게 모를 수 있는지. 이 책을 보다 문득 생각이 나서, 나치와 유대인과 철학을 엮어 보았다.

 

 

 

니체는 나치와 직접적으로는 연관이 없다. 히틀러가 그의 이미지를 나치의 ‘초인’ 이론에서 따왔다고 해서 자동 연상되는 불운을 겪고 있다. 최근에 출간된 『히틀러의 철학자들』에는 칸트, 헤겔, 포이어바흐, 피히테 등이 줄줄이 히틀러에 의해 엮인 모양이고, 그 중에서도 니체는 히틀러에게 가장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철학자로 선정된 모양이다. 니체의 의도와 상관이 있든 없든 여하튼 히틀러가 니체의 사상에서 뭔가 영감을 받은 것은 사실일 것이다. 그것이 무엇인지 잘은 모르겠지만 『처음 읽는 독일 현대철학』의 니체 편에서 중점적으로 다루고 있는, ‘힘에의 의지’를 읽으며 뭐 그럴 수도 있겠다는 느낌을 받았다. 물론 수박겉핥기식의 개론과 주마간산 식 독서가 합작한 폐해겠지만, ‘힘에의 의지’ 라는 말 자체가 풍기는 뉘앙스만으로도 히틀러가 좋아했겠다 싶다.

 

나는 오랫동안 ‘힘에의 의지’ 라는 말을 오해했다. 우리말 ‘힘에의 의지’는 뭔가 힘에 의지하고 싶어 하는 수동적인 느낌을 준다. 그런데 ‘힘에의 의지’ 란 힘을 향한 의지, 힘을 갖고 싶어 하는 의지라는 편이 맞을 것이다. 이럴 때 ‘의지’ 란 마치 어떤 실체처럼 느껴지지만, 저자에 의하면 번개와 같은 것이다. ‘번개가 치다’에서, 문장 구조상으로는 번개라는 실체가 있고, '치다'는 번개의 행위로 보이지만, 실제로 번개는 칠 때만 존재하지, 가만히 있는 번개가 별개로 존재하지 않는다. 번개의 존재는 곧 번개의 생성이다. 의지란 곧 힘에의 추구이다. “니체에게 이 세계는 다수의 힘에의 의지들의 거대한 관계의 네트워크입니다. 힘에의 의지는 주지하다시피 ‘항상 힘 상승과 강화와 지배를 추구하는 의지작용’입니다. 지배와 더 많은 힘 그리고 더 강해짐에 대한 추구는 의지들에 내재하는 본성입니다. 즉 모든 의지는 힘의 상승과 강화 및 지배를 추구하지요. 그래서 힘에의 의지는 다른 의지들 외부에 독립적으로 존립하는 제3의 의지가 아닙니다. 오히려 의지들은 그것이 의지인 한에서 힘 상승을 추구하며, 그래서 모든 의지를 힘에의 의지라는 명칭으로 부를 수 있는 것입니다. 세계는 이런 힘에의 의지들이 구성해내는 관계-세계인 것이고요. p84” 그다지 쉬운 설명은 아닌데, 힘에의 의지는 실체적 행위자가 아니라는 것과 관계적 운동이기 때문에 독립적인 힘이 아니라는 것이다. 니체의 세계는 모든 힘들이 동시에 각축하는 관계-세계이다. 개인도 마찬가지다. “개인은 세계 전체와의 동시적 상호작용에 의해 공동으로 구성되는 개인이고, 세계도 공동으로 구성되는 세계입니다. 이것은 개인과 세계에 대한 근대적 모델로부터 완전한 전회를 이루는 새로운 모델이지요. 근대적 개인은 일종의 원자적-실체적 개인입니다. 즉 원자적인 ‘나’의 존립이 먼저 전제되고, 타인과의 관계 맺음은 그 후의 일이며, 그 관계의 유무에 무관하게 ‘나’는 ‘나’로서 존립합니다. 근대적 사유는 바로 이런 개인관을 토대로 개인과 공동체와의 문제를 해결합니다. 하지만 니체의 관계론은 이런 원자적-실체적 모델 자체를 폐기합니다. p100” 관계는 단수가 아니라 복수에만 가능한 것이다. 들뢰즈에 의하면 니체 철학의 본질은 복수성이다. 니체는 위대한 사건들을 믿은 것이 아니라 사건의 복수적 의미를 믿었다.

 

10여 년 전 나는 니체의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읽었다. 뭐라고 말했는지 지금은 다 잊어버렸고, 그때도 모르기는 마찬가지였다. 어려웠다. 그 때 니체를 읽은 이유는 순전히 들뢰즈 때문이다. 이진경이 일으킨 들뢰즈 바람이 우리나라에 한창 불던 시절이다. 소련 몰락 후의 좌파 철학의 대표주자로 우리나라에 소개되었고, ‘생성, 탈주, 유목, 되기, 기계’ 따위 개념이 덕분에 유행했다. 들뢰즈는 니체를 덮쳐서, 자신의 아이를 낳았다. 들뢰즈는 철학적 비역질로 유명하다. “나는 어떤 작가의 등에 달라붙어서 그의 애를 만들어낸다고 상상했지. 그것은 그의 아이가 될 것이고, 흉물스러울 것이었지. 그것이 그의 아이라는 사실이 아주 중요해. 실제로 그 작가는 내가 시키는 대로 말을 해야 했으니까. <신체 없는 기관>” 니체도 들뢰즈의 여러 상대들 중 하나이다. 들뢰즈의 <니체와 철학>은 그렇게 탄생한 아이일 것이다. 여하튼 10여 년 전 쯤, 니체는 들뢰즈의 파트너로 우리에게 왔던 것 같다.

 

 

 

벤야민은 나치 때문에 희생된 비극적인 철학자이다. 유대인인 벤야민은 1940년 망명 도중 스페인 국경마을에서 자살했다. 프랑스로 귀환되어 나치에게 인계될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그를 자살로 몰아갔다. 그런데 2000년대 초 어느 매체에, 벤야민은 자살한 것이 아니라 스탈린의 스파이들에게 살해당했다는 기사가 실렸다. 나치가 아니라 스탈린이 그를 살해해야 했던 이유는 그의 「역사철학 테제」때문이란 것이다. 벤야민이 프랑스에서 스페인 국경을 넘을 때 품안에 「테제」의 초고를 품고 있었는데, 이를 알고 있었던 스탈린이 어떻게 해서든 이 테제에 근거한 새로운 책의 간행을 막으려고 그를 죽였다. 나는 이 웃긴 이야기를 지젝의 『시차적 관점』 서주에서 읽었는데, 지젝은 스탈린이 설혹 「테제」를 읽었다 하더라도 그의 관점에서는 「테제」의 진정한 차원을 간파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며 일축했다. 「역사철학 테제」는, 그 불가능한 소문을 퍼뜨린 매체에, ‘마르크스주의의 실패에 대한 짧지만 충격적인 분석’ 으로 소개되어 있다.

 

여러 책들에서 벤야민이란 이름을 보게 되면서 나도 벤야민을 읽어보려 한 적이 몇 번 있다. 그런데 번번이 실패했다. 명성만큼 혹은 인용된 문구만큼 그렇게 매력적인 벤야민을 찾기가 어려웠다. 『아케이드 프로젝트』가 출간되었을 당시, 그 무시무시한 두께에 놀라며 책을 펼쳤는데, 두께도 두께려니와 왜 이런 내용을 이렇게 시시콜콜 묘사하고 있는지 이해하기 어려워 바로 덮었다. 다음으로는 그 유명한 『기술복제 시대의 예술작품 / 사진의 작은 역사』였는데, 여기서도 별 재미를 느끼지 못했다. 그런데 인터넷 검색을 통해 전문을 읽게 된 「역사철학 테제」는 정말 훌륭했다. 체스 두는 자동인형과 난장이의 비유로 시작하는 제 1 테제를 비롯해 클레의 천사 그림으로 진보를 설명하는 제 9 테제 등 우리가 어디선가 보았던 유명한 문장들의 출처가 바로 이 「테제」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처음 읽는 독일 현대철학』의 벤야민 편은 이런 것들을 다루지는 않는다. 매체철학과 도시공간에 관한 논문들을 쓴 저자는 거두절미하고 벤야민의 ‘아우라’ 개념을 파고든다. 아우라는 원래 ‘신비한 기운’ 이라는 종교적 의미를 가지고 있었으나, 벤야민이 예술과 관련해 사용하면서 매우 논쟁적인 철학 개념이 되었다고 한다. 벤야민은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을 한마디로 ‘아우라의 몰락’ 이라고 규정했다. 저자는 아우라가 무엇인지, 왜 벤야민이 몰락을 말했는지, 그리고 현대 문화예술에서 몰락했다던 아우라가 어떻게 재아우라화되는지를 설명하고 있다. 그런데 예술 쪽에는 완전 문외한이라 그다지 흥미롭지 않았다. 아우라는 아우라지 뭐.

 

 

 

나치와 철학자를 말할 때 가장 문제적인 인물은 아마도 하이데거일 것이다. 하이데거는 변명의 여지없이 나치에 가담한 철학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이데거를 무시하고 현대철학을 말할 수는 없다. 하이데거주의자들은 이런 곤경에서 벗어나기 위해 그의 나치 가담은 잠깐 동안의 실수에 불과할 뿐이며 그의 철학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하이데거로 박사학위를 받고, 그의 주요 이론서에는 어김없이 하이데거를 등장시키는 지젝은 이렇게 말한다. “받아들이기 어려운 진실은 하이데거의 ‘위대함’은 나치에 참여했음도 불구하고가 아니라, 바로 그 때문이라는 것, 그 참여가 하이데거의 ‘위대함’을 구성하는 핵심이라는 것이다.” 그는 『잃어버린 대의를 옹호하며』에서 이 문제를 자세히 다루고 있다. 하이데거는 나치에 의해 프라이부르크 대학 총장으로 임명된 뒤 나치당원이 되지만, 10개월 만에 총장직에서 물러났다. 그러나 하이데거는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나치즘’이 인종-기술주의적인 니힐리즘에 의해 배반당했다고 비판했을 뿐, 그 내적 위대함에 대해서는 여전한 믿음을 갖고 있었다. 1930년대 내내 하이데거는 일관되게 이 배반당한 ‘내적 위대함’, 나치 운동의 세계사적 잠재성을 구원하고자 노력했다. 지젝은 하이데거의 오류를 나치의 오류와 동일한, ‘비겁함’ 에 있었다고 본다. “나치의 ‘용기’는 그들 사회의 핵심 특질인 자본주의적 생산관계를 공격하지 않은 비겁함에 의해 지탱되었다.”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히틀러의 폭력은 가장 끔찍한 순간에서조차 여전히 ‘존재적’인 것으로, 나치 운동이 부르주아적 공동 존재의 근본 좌표와 대결-의문시-해체하는 실제적인 ‘비장소’가 되지 못한 무능을 폭로하는 무력한 행위로의 이행이었다. 그렇다면 하이데거 자신의 나치 참여 역시 일종의 행위로의 이행으로 볼 수 있다. 그것은 자기 안에서 발견한 이론적 곤경을 해소하지 못한 무능을 증명하는 파괴적인 분출이 아니었을까?”

 

나치즘은 민족(국가) ‘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이라는 명칭에서 알 수 있듯이, 자본주의의 무능과 병폐에 반대하여 조직된 일종의 사회주의 정당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부르주아 자본주의 체제를 공격하지 못하고, 독일인민의 분노가 유대인을 향하도록 돌려놓음으로써, 오히려 부르주아 자본주의 체제가 지속되도록 복무했을 뿐이다. 지젝은 이것을 비겁함이라 부른다. 하이데거가 지지했던 나치즘은 비겁했던 현실의 나치가 아니라, 자유민주주의적 자본주의 체제를 전복시킬 내적 위대함을 지닌 나치였다. 그러나 지젝은 하이데거 역시 자신의 이론적 곤경에 정면으로 맞서지 못했던 바로 그 비겁함 때문에 나치에 가담하게 되었다고 해석한다. 물론 지젝은 그 ‘이론’에 대해 자세하게 분석하고 있지만, 하이데거의 이론이란 것은 정말 이해하기 쉽지 않다. 오죽했으면 그의 『존재와 시간』을 두고 독일 사람들도 독일어가 맞는지 의심스러워했다는 말이 있을 정도다. 하이데거 관련 글을 읽다보면 존재, 존재자, 존재적, 존재론적 같은 ‘존’ 자 돌림 단어들이 사람을 미치게 만든다. 그러니 여기서 하이데거가 처한 이론적 곤경에 대한 언급은 하지 않는 것이 현명할 것이다.

 

그런데 『처음 읽는 독일 현대철학』의 하이데거 편은 그다지 어렵지 않다. 하이데거의 ‘존재’가 무엇인지를 설명하고 있는데, 저자의 말대로 쉽고 분명한 편이다. 그래서 밋밋하다. 이런 정도면 왜 하이데거를 우회해서는 현대철학을 말하기 어려운지 잘 이해가 되지 않는다. 사실 『How to read 하이데거』라는 입문서를 읽고 놀란 적이 있다. 하이데거에 대한 악명 때문에 잔뜩 긴장했는데, 의외로 너무 술술 읽혔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이데거에 대한 내 생각은 쉽게 접근하면 그 어떤 사상 보다 쉽고, 구체적으로 파고들면 무슨 말인지 머리가 아플 정도로 어렵다로 정리되어 있다. 어려운 것이 좋은 것은 아닌데, 어려움 속에는 쉬움 속에 없는 독특한 무엇이 있다. 읽기의 즐거움은 사실 그 독특함을 발견하는 것은 아닐까? 하이데거의 ‘존~’ 시리즈는 그렇게 밋밋한 개념은 아닌 듯싶다.

 

 

 

유대인인 한나 아렌트는 하이데거의 제자이자 연인이었다. 18살에 당시 30대 중반이었던 하이데거를 만나 사랑에 빠졌다. 현대 철학계의 거의 유일한 여성 철학자인 아렌트와 하이데거의 사랑은 나이차, 불륜관계, 그리고 무엇보다 나치와 유대인이라는 점에서 주목받았다. 나치의 박해가 심해지자 아렌트는 미국으로 망명하는데, 돈도 없고 영어도 잘 하지 못했던 아렌트는 5년 동안 가사 도우미 일을 했다고 한다. 아렌트를 대중적으로 유명하게 만든 사건은 나치 전범인 아이히만의 재판이었다. 1960년 아렌트는 미국 <뉴요커>란 잡지의 특파원 자격으로 예루살렘에서 직접 이 재판을 지켜본 후,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을 썼다. ‘악의 평범성’ 이란 말로 유명해 진 이 책에서 아렌트는 아이히만이 악마도 괴물도 아닌 평범하고 성실한 생활인임을 발견하고 경악했다. 그렇다면 유대인을 대량 학살한 그 악마적 행동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아렌트의 결론은 악의 평범성이란 사유의 부재에서 비롯된다는 것이다. 아이히만은 그저 명령에 충실하게 따랐을 뿐, 그 명령의 정당성에 대해서는 전혀 사유하지 못했던 것이다.

 

『처음 읽는 독일 현대철학』의 아렌트편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이는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의 의미를 묻는 능력과 직결됩니다. 자신이 하는 일의 의미를 묻지 못했던 아이히만의 모습. 이 모습은 오늘날 열심히 자신에게 주어진 일을 하며 살아가는 현대인의 모습과도 닮아 있습니다. 악은 평범한 모습을 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p277”

 

저자는 첫 부분에서 한병철의 『피로사회』를 잠시 언급하는데, 아렌트에 대한 비난에 비약이 있음을 지적한다. 아렌트의 활동적 삶, vita activa는 정치적 삶을 의미하는 것으로 한병철이 말하는 과잉활동hyperactivity 와는 다르다. 아렌트는 인간의 활동을 노동labour ,작업work, 행위act로 나눈다. 노동이란 농사, 가사 같이 생존과 직결되는 일이며, 작업은 집, 옷 등을 만드는 일에 해당한다. 행위란 희랍세계의 폴리스에서 행해지던 활동과 같은 공적인 행위이다. 폴리스시민들은 폴리스에서 행해지는 모든 일을 정치적인 것으로 보았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인간은 ‘폴리스에서 사는 동물’이다가 ‘정치적 동물’ 이다로 번역되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폴리스적인 삶에 대비되는 것이 사적인 삶, 오이코노미아(oikonomia)다. economy 의 어원인 오이코노미아는 가정경영, 가정에서 일어나는 일이다. 희랍시대에 먹고사는 일은 가정에서 해결해야 할 사적인 영역이었다. 아렌트의 노동과 작업은 오이코노미아에, 행위는 정치적 삶에 해당된다. 이런 분류를 통해 아렌트는 사라져 가는 정치 영역의 회복을 주장하고 있다. 그러므로 아렌트 사상의 핵심을 두 가지만 짚자면 정치의 회복과 깊은 사유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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