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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을 불쾌하게 만드는 생각들 ㅣ 글항아리 이슬람 총서 3
슬라보예 지젝 지음, 배성민 옮김 / 글항아리 / 2015년 3월
평점 :
절판
지젝을 좋아하는 사람보다 안 좋아하는 사람이 더 많아 보이는데도, 그의 책은 참 재빠르게도 번역된다. 글항아리의 『신을 불쾌하게 만드는 생각들』은 샤를리 에브도 사건과 이라크-시리아 이슬람 국가 즉 IS에 대한 고찰로, 원어 출판이 2015년이다. 그러나 물리적으로 이게 가능할까 염려할 필요는 없다. 사실 이 책은 책이라고 하기에 민망할 정도로 얄팍하다. 읽는데 한 두 시간이니, 번역에 하루면 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은 문외한의 허파 뒤집는 소리일 수 있어도, 일주일을 넘기지는 않았을 것 같다. 지젝 자신도 그렇게 오래 걸려 쓴 글은 아닐 것 같다. 늘 하던 이야기에, 샤를리 에브도와 IS를 대입했을 뿐이기 때문이다. 새롭지는 않다는 말이다.
이 책의 원제는 『Islam and Modernity』 다. 이슬람은 흔히 생각하듯 전근대적이 아니라 지극히 근대적 체제라는 주장이다. 다만 서구 근대의 외설적 이면으로서의 초자아적 근대이다.
「윌리엄 버틀러 예이츠가 쓴 《재림》은 오늘날 우리가 처한 궁지를 완벽하게 기술한 것 같다. “가장 나은 인간은 신념을 모두 잃어버렸지만, 가장 나쁜 인간은 열정이 넘친다.” 예이츠는 빈혈에 걸린 사람처럼 창백한 자유주의자와 열정이 충만한 근본주의자의 대립을 탁월하게 기술했다. “가장 나은 인간”은 (상황에) 개입할 능력이 없는데, “가장 나쁜 인간”은 인종주의와 종교적, 성차별적 광신에 적극 가담한다. p17~8」
그러나 지젝은 예이츠가 아니라 벤야민의 통찰이 옳았다고 말한다. 이슬람 테러리스트가 보여준 열정은 역설적으로 자신이 우월하다는 진짜 인종주의다운 확신이 없음을 증거하기 때문이다. 믿음이 얼마나 약했으면 풍자 주간지의 한심한 만화 따위에 위협을 느낀단 말인가.
「최근 이슬람 근본주의의 추세를 보면, 발터 벤야민의 오래된 통찰이 옳았음을 알 수 있다. “하여간 파시즘이 부상한다는 것은 혁명이 실패했음을 입증한다.” 즉 파시즘의 부상은 좌파가 실패했음을 뜻한다. 그러나 파시즘의 부상은 동시에 좌파가 미쳐 동원할 수 없었던 혁명적 잠재력과 불만이 있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벤야민의 통찰은 오늘날 이른바 “이슬람 파시즘”에도 똑같이 적용되지 않을까? 이슬람교를 받아들인 국가에서 세속 좌파가 사라졌다는 것은 이슬람 근본주의의 부상과 정확히 상응하지 않는가? p19~20」
자유주의는 근본주의에 맞서 자유와 평등을 지킬 만큼 강하지 않다. 자유주의 자체의 결함이 반성적으로 드러난 것이 근본주의이기 때문이다. 자유주의는 끊임없이 근본주의를 만들어 낸다. 즉 자유적 방임과 근본주의의 대립은 가짜이다. 두 세력은 대립하는 듯이 보이지만 사실은 서로를 만들어낸다.
「호르크하이머는 이미 1930년대에 파시즘과 자본주의의 관계를 논했는데, 자본주의를 비판하지 않으려는 사람은 파시즘에 대해 논하지 말아야 한다고 지적했다. 호르크하이머의 지적은 오늘날 근본주의에도 적용되어야 한다. 자유주의적 민주주의를 비판하지 않으려는 사람은 종교 근본주의를 논하지 말아야 한다. p21~2」
IS는 근대화를 반대하는 세력이라기보다 도착적 근대화를 보여주는 사례다. 그들이 말하는 내용은 전통적일지 몰라도 세계화에 반대하는 방식은 완전히 근대적이다. 그들은 이미 근대성의 언어로 말한다. IS를 보수적 근대화의 흐름 안에서 파악해야 한다. 보수적 근대화는 일본의 메이지 유신에서 비롯되었다.
이 책은 두 개의 장으로 나누어져 있는데, 2장은 이슬람교가 왜 그토록 여성을 억압하는지를 분석한다. 에릭 센트너는 공식적인 상징 역사와 그 역사의 외설적 타자를 구별한다. 말하자면 이슬람의 공식적 역사에는 남성이, 억압된 비사에는 여성이 주체라는 것이다.
「상징 역사 뒤에 있는 외설적 타자는 승인될 수 없는, “유령 같은”, 환상적 비사(비밀역사)를 뜻한다. 이 비사는 상징 역사를 실제로 지탱하지만 비사가 제대로 작동되려면 (미리) 폐쇄 되어 있어야 한다. p50」
여성을 극단적으로 억압하는 이슬람교는 역설적이게도 여성 없이는 지탱되지 못한다는 말이다. 그 기원에 아브라함에게 아들을 낳아준 하갈이라는 여자가 있다. 무함마드의 첫 번째 아내인 하디자도 있다. 그녀는 무함마드가 정말로 천사 가브리엘을 만났는지를 검증하고 무함마드가 알라의 대변자로 사역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
「억압은 ‘자신의 기원’을 억압해야 한다. 이슬람교에 나타난 계보에서 여자의 모습은 변한다. 이것이 이 계보에서 중요한 요소다. 여자는 진리를 검증할 수 있는 유일한 인간이다. 그런데 여자는 원래 이성과 믿음이 부족하고 남자를 속이며 부추긴다. 더구나 짜증나게 하는 얼룩처럼 신과 남자 사이에 끼어든다. 그래서 여자는 결국 통제되고 보이지 않게 배제되어야 했다. 여자가 즐기는 과도한 향락은 남자를 집어삼킬 만큼 무서웠기 때문이다. p77~8」
이슬람교는 여자를 불신한다. 그런데 그 방식은 여성 주체성이 품은 외상적, 전복적, 창의적, 폭발적 힘을 역설적으로 드러낸다. 이슬람 여자들이 쓰는 베일이 대표적이다. 베일의 궁극적 목적은 무엇일까? 제욱시스와 파라시오스의 내기를 생각해 보자. 제욱시스의 포도 그림은 새들마저 속였지만, 파라시오스의 베일은 베일 뒤에 진실이 있다는 착각을 불러 일으켰다. 베일 뒤에 실제로 어떤 것이 있다는 환상을 유지하는 것이 베일의 궁극적인 목적이라면, 이슬람 여자들의 베일은 어떤 역할을 할까?
「니체는 진리와 여성이 같다고 판단했는데, 우리도 니체를 따라 여자 이슬람교도가 쓰는 베일을 궁극적인 진리를 가리는 베일이라고 기술해보자. 그러면 이슬람교에서 사용되는 베일이 왜 중요한지 더 분명해 질 것이다. 여자는 대단하다. 여자는 진리가 “결정 불가능하다”는 것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여자는 나부끼는 베일들 뒤에도 궁극적인 진리는 없다는 것을 뜻한다. 다시 말해 우리는 여자를 베일로 가리면서 환상을 만들어 낸다. 베일 뒤에 여성다움의 진실이 숨어 있다는 환상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여기서 여성다움의 진실이란 거짓과 속임수 같은 끔찍한 진리를 가리킨다. 거짓말하고 남을 속이는 것이 여성성의 진짜 모습이라는 뜻이다.) 이슬람교를 걸려 넘어지게 하는, 숨은 걸림돌이 바로 이것이다. 여성은 진리와 거짓을 구별할 수 없다는 사실을 스스로 구현하는 존재이지만, 여성만이 진리를 보증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여자는 베일로 가려져야 한다. p8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