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를 보호해야 한다 - 콜레주드프랑스 강의 1975~76년
미셸 푸코 지음, 김상운 옮김 / 난장 /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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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코의 강의를 요약하기는 무척 어렵다. 내용이 어려워서가 아니라, 처음부터 끝까지 빈틈없이 연결된 그의 설명에서 어느 한부분만 잘라내서는 의미(그 의미의 섬세함을)를 제대로 전달하기 힘들어서다. 그렇다고 그 의미를 온전히 살리려고 하면 아예 책을 그대로 옮겨 적어야 할 판이다. 그런데도 이러고 있는 것은 한 번 읽고 덮는 것보다 무어라도 써보는 것이 기억에 절대 유리하기 때문이다.

 

 

1강 1976년 1월 7일

 

최근 10년 혹은 15년 전부터 사물들, 제도들, 실천들, 담론들에 대한 막대한 비판가능성이 나타나고 있다. 이 국지적 비판은 ‘앎의 회귀’라 부를 수 있는 것을 통해 이루어졌다. 앎의 회귀란 ‘예속된 앎’의 봉기라 할 수 있다. 예속된 앎이란 기능적이고 체계적인 전체 속에 현존해 있으나 은폐되어 있는 역사적 앎의 덩어리들(박식의 앎)이자, 비개념적인 앎들, 자격을 박탈당한 채 서열상 하위에 있는 앎들을 가리킨다.

 

박식의 앎과 자격이 박탈된 앎의 짝짓기 속에는 지난 15년간의 비판에 중요한 힘을 실어주었던 요소가 있다. 이 두형식의 앎에 공통된 문제, 즉 투쟁에 관한 역사적 앎의 문제이다. 이 앎들에는 싸움의 기억이 깔려있다.

 

「이렇게 해서 계보학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이, 아니 다양한 형태를 취한 계보학적 연구들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 등장했습니다. 그것은 투쟁들의 정확한 재발견인 동시에 싸움의 생생한 기억이기도 합니다. 박식한 앎과 서민적 암의 찍 짓기로서의 이런 계보학은 단 하나의 조건에서만 가능하며, 이 조건 없이는 시도조차 할 수 없습니다. 위계질서와 이론적 전위의 특권을 지닌 총괄적인 담론의 전제가 제거된다는 조건이 바로 그것입니다. 만일 괜찮다면 그런 박식한 지식과 국지적 기억들의 결합을 ‘계보학’이라고 부릅시다. 이 짝짓기는 투쟁에 관한 역사적 앎을 형성하고, 그런 앎을 현재의 전술에서 활용하는 것을 허용합니다, 그러니까 지난 몇 년간에 걸쳐 제가 여러분과 함께 했던 것은 이런 계보학들에 대한 잠정적인 정의일 것입니다. p25」

 

푸코 자신이 말하는 ‘계보학’의 정의라 할 수 있다. 주류 담론에서 은폐되거나 배제되었던 담론을 재발견하여, 그것들이 가진 싸움의 생생한 기억 위에 ‘투쟁에 관한 역사적 앎’을 구성하여, 현재의 싸움에 활용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계보학은 앎들의 봉기다. 계보학은 과학적이라고 간주된 담론에 고유한 권력 효과들에 맞서 싸워야 한다. 계보학은 지식의 과학적 위계질서화와 이것에 내재한 권력 효과들에 맞서 국지적인 앎들을 활성화하는 것이다. 고고학은 국지적인 담론태의 분석에 고유한 방법이며, 계보학은 이렇게 서술된 국지적 담론태에서 출발해 이로부터 풀려난 탈예속화된 앎들을 작동시키는 전술이다.

 

여기서 푸코는 권력분석의 두 가지 체계를 대립시킨다. 하나는 18세기 철학에서부터 볼 수 있는 오래된 체계로서 계약-권력(압제) 도식이고, 다른 하나는 전쟁(투쟁)-억압의 도식이다. 전자는 사법적 도식인 반면 후자는 투쟁과 복종의 대립이다. 푸코가 최근 몇 년에 걸쳐 강의해 온 것은 투쟁-억압의 도식 안에 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푸코 스스로 이 도식을 실행하자마자, 이 도식을 재고하지 않을 수 없었다는 고백이다.

 

「뽐내려는 것은 아니지만, 저는 아주 오래 전부터 이 ‘억압’ 가설에 의심의 눈초리를 보냈습니다. 그리고 앞서 말한 계보학들, 즉 형법의 역사라든가 정신의학적 권력의 역사라든가, 소아성욕에 관한 통제의 역사 등과 관련해, 이런 권력형성체에서 작동하는 메커니즘은 억압과는 전혀 다른 것임을, 또는 적어도 그 이상의 것임을 보여주고자 했습니다. 저는 억압에 관한 이런 분석을 약간이나마 반복하지 않고서는, 제가 분명히 두서없이 억압에 관해 말했던 모든 것을 취합하지 않고서는 앞으로 나아갈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다음 강의는, 어쩌면 두 번에 걸친 강의가 될 수도 있는데, ‘억압’ 개념에 대한 비판적 재검토에 바쳐질 것입니다. 즉 권력메커니즘과 권력 효과를 규정하는 것으로 오늘날 널리 퍼진 이 억압 개념이 어째서, 왜 권력메커니즘과 권력 효과를 명확하게 정의하는데 부적합한 것인지를 보여주기 위해 전력을 다할 것입니다. p37」

 

 

2강 1976년 1월 14일

 

푸코는 주권이론과 규율적 권력을 대립시킨다. 주권에 관한 법적-정치적 이론은 중세에 군주제와 군주의 문제를 둘러싸고 구성되었다. 주권이론은 군주제를 정당화하는 도구였으나, 16~7세기부터는 왕권을 강화하는 동시에 왕권을 제한하는 도구로도 사용되었다. 주권이론은 왕당파 카톨릭 편에서도 반왕당파 프로테스탄트 편에서도 발견된다. 드디어 18세기에서는 루소와 그 동시대인에게서도 발견된다. 절대 군주제에 대항한 의회민주주의의 모델을 구축하기 위해서 주권 이론이 중요해진 것이다. 더불어 프랑스 혁명에서도 주권 이론은 똑같은 역할을 맡았다.

 

그런데 17~8세기에 또 다른 권력의 기제가 등장했다. 이것은 주권관계와는 결코 양립할 수 없어 보였다. 바로 규율 권력이다.

 

「이 새로운 권력의 기제는 토지와 그 생산물보다는 우선 신체와 신체가 행하는 것을 건드렸습니다. 이것은 신체로부터 재화와 부보다는 시간과 노동을 추출하는 것을 가능케 한 권력메커니즘입니다. 이것은 조세 부과와 만성적 의무의 체계에 의해 불연속적으로 행사된 것이 아니라, 감시에 의해 부단히 행사되는 권력의 유형입니다. 이것은 한 군주의 육체적 실존보다는 오히려 물질적 강제의 엄정한 구획 분할을 전제로 한 권력의 유형이었으며, 예속된 세력들을 증대시켜야만 하는 동시에 이 세력들을 예속시키는 쪽의 힘과 효율도 증대시켜야만 하는 것을 원칙으로 삼은 새로운 권력의 경제를 정의하는 것입니다. p55」

 

이 새로운 유형의 권력은 부르주아 사회의 위대한 발명품 중 하나다. 이 권력은 산업자본주의와 이것과 상관적인 사회 유형이 성립하기 위한 근본적 도구들 중 하나이다. 주권의 형태에는 낯선 이 규율적 권력은 주권이론이라는 거대한 사법적 구조물을 소멸 시킬 것으로 예상되었다. 그러나 주권이론은 이데올로기로서 그리고 대규모 법전들의 조직 원리로서 계속 존속되었다.

 

「제가 생각하기에는 여기에 두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한편으로 주권이론은 18세기에, 더 나아가 19세기에도 군주제에 맞서고 규율사회의 진전을 저해하는 모든 장애물에 맞서는 항구적인 비판 도구였습니다. 그렇지만 다른 한편으로, 이 이론, 그리고 이 이론을 중심으로 한 법전 편찬은 규율메커니즘에 법체계를 덧씌우는 것을 가능케 했습니다. 이 법체계는 규율메커니즘의 작동방식을 은폐하고, 규율에 포함된 지배와 지배의 기술을 지워버리고, 마지막으로는 국가의 주권을 통해 만인이 자신의 고유한 주권적 권리를 행사한다는 것을 만인에게 보증했습니다. 달리 말하면, 법 이론이든 법규이든 사법체계는 주권의 민주화를 허용했고, 집단적 주권 위에서 분절된 공법의 성립을 허용했습니다. 주권의 민주화가 규율적 강제의 메커니즘에 의해 깊숙이 채워졌음을 발견하게 됐던 바로 그때에, 그렇게 된 한에서, 그렇게 됐기 때문에 말입니다. 더 간결하게는 이렇게 말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규율적 구속이 지배의 메커니즘으로서 행사되는 동시에 권력의 효과적인 행사로서는 감춰져야만 했던 때부터, 주권 이론은 사법적 기구 속에서 주어지고, 법전들에 의해 부활․ 보완될 필요가 있었습니다. p56~7」

 

주권이론이 규율 메커니즘을 감추어주고, 나아가 우리(민중)가 주권의 주체라는 민주주의적 환상(?)을 만든다는 것이다. 오늘날 권력은 주권의 법과 규율적 기제를 통해 동시에 작동하는데, 규범화의 과정이 점점 법률의 과정을 식민화하고 있다. 이것이 푸코가 ‘규범화 사회’라고 부르는 것이다. 그렇다면 규율적 기제의 월권에 맞서 주궈에 호소해야 하는가?

 

「사실상 주권과 규율, 입법, 주권의 법과 규율의 기제는 우리 사회에서 권력의 일반적 메커니즘을 절대적으로 구성하는 두 개의 조각입니다. 진실을 말하자면, 규율에 대항해, 규율적이지 않은 권력을 추구하며 싸우기 위해 우리가 향해야 할 방향은 옛날의 주권의 법이 아닙니다. 반규율적이지만 동시에 주권의 원리로부터 해방된 새로운 법의 방향으로 향해야만 합니다. p59」

 

 

3강 1976년 1월 21일

 

클라우제비츠의 정식, “전쟁이란 지속된 정치에 불과하다.”는 푸코에 의해 이렇게 뒤집힌다. “정치란 다른 수단에 의해 계속되는 전쟁”이다.

 

내전과 종교전쟁이 끝난 뒤, 기존의 법학적-철학적 담론과는 아주 상이한 새로운 담론이 등장했다. 전쟁을 사회관계의 근간으로 삼는 역사적-정치적 담론이 그것이다. 이 담론은 잉글랜드에서는 군주제에 맞선 부르주아(민중을 포함)의 담론인 반면 프랑스에서는 귀족의 담론이었다.

 

법률은 전쟁의 포화에서 생겨나지만, 사회, 법률, 국가가 이런 전쟁의 휴전 혹은 최종적 비준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법률 아래에서 전쟁이 모든 권력메커니즘에 계속 작동하기 때문이다. 전쟁이야말로 제도와 질서의 원동력이다. 우리는 서로 전쟁상태에 있고, 전선이 사회 전체를 영속적으로 가로지르고 있으며, 이 전선이 우리 각자를 하나의 진영에 위치시킨다.

 

「중립적인 주체 따위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불가피하게 누군가의 적인 것입니다. 하나의 이항 구조가 사회를 가로 지릅니다. p71」

 

우리는 보편적, 총체적, 중립적 주체의 위치를 차지할 수 없다. 전투에서 주체는 불가피하게 어느 한편에 서야한다. 주체가 요구하는 것은 ‘그 자신의’ 권리 즉 편향된 권리이다. 그러므로 역사적-정치적 담론은 늘 관점을 가진 담론이다.

 

「한 진영으로의 귀속이야말로, 즉 편향된 위치야말로 진실에 대한 판독을 가능케 하며, 질서정연하고 평화로운 세계 속에 있다고 사람들로 하여금 믿게 만드는, 즉 적이 그렇게 믿도록 만드는 환상과 오류를 고발할 수 있게 해줍니다. p73」

 

법학적-철학적 담론에 의해 근본적으로 그리고 구조적으로 주변부로 쫓겨났던 역사적-정치적 담론은 16세기 말~ 17세기 중반에, 왕권에 대한 민중과 귀족의 도전이라는 이중적 작용을 시작했다. 이때부터 이 담론은 엄청나게 증식했고 19세기말과 20세기까지 그 범위가 확장되었다. 그러나 변증법이 이 담론을 철학적으로 재전환할 수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변증법은 투쟁, 전쟁, 대결을 최종적인 동시에 근본적이고 아무튼 비가역적인 합리성의 총체화와 갱신이라는 이중의 과정 속으로 회수한 것입니다. 마침내 변증법은 역사를 통해 보편적 주체의 구성, 화해된 진실의 구성, 모든 특수성이 마침내 그 질서정연한 자리를 갖게 될 법의 구성을 보증합니다. 헤겔의 변증법과 이것에 뒤따른 모든 변증법은 사회적 전쟁의 확인서인 동시에 선언이자 실천이기도 했던 이 역사적-정치적 담론에 대한, 철학과 법학에 의한 식민지화와 권위주의적 평정이었다고 이해해야 하며, 저는 여러분께 이것을 보여주고 싶습니다. p80~1」

 

잉글랜드 청교도파와 수평파의 담론으로 그리고 프랑스 귀족파의 담론으로, 17세기에 등장한 이 담론 속에는 전쟁이 역사의 중단되지 않는 씨실을 구성한다는 관념이 등장한다. 이항대립인 이 전쟁은 근본적으로 인종전쟁이다.

 

「우리가 사회 속에서 양극성으로, 이항 균열로 간주하는 것은 서로 외적인 두 인종의 대결이 아니라, 하나의 동일한 인종이 상위 인종과 하위 인종으로 둘로 쪼개진 것입니다. 아니 오히려, 하나의 인종으로부터 그 고유한 과거의 재등장입니다. 요컨대 인종 속에서 인종의 이면과 아래가 등장하는 것입니다. p84」

 

두 인종이란 말이 뜬금없이 들릴 수도 있는데, 요즘 식으로 호모 사케르 혹은 part of no part 가 하위 인종과 비슷한 개념이 아닐까 싶다. 여하튼 사회는 통일된 총체가 아니라 적대에 의해 가로질려 있다는 것이다.

 

「이로부터 다음과 같은 근본적인 결론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것이 등장해 기능하기 시작했던 순간인 17세기에는 본질적으로 편향된(탈중심화된) 진영을 위한 투쟁의 도구였던 이 인종투쟁의 담론은 재중심화되며 바로 권력의 담론으로, 중심을 지니고 중심화되고 중심화하는 어떤 권력의 담론으로 된다는 것입니다. 두 인종 사이에서 이뤄지고 있는 전투의 담론이 아니라 진실하고 유일한 것으로 주어진 한 인종이, 권력을 장악하고 규범(정상)을 정할 수 있는 자격을 지닌 인종이 이 규범과의 관계에서 일탈한 인종, 생물학적 형질에 있어서 위험하다고 간주된 인종에 대해 행하는 전투의 담론인 것입니다. p84」

 

여기에서 퇴화에 대한 생물학적-인종주의적 담론이 사회의 규범화 원리로 기능하도록 만드는 모든 제도가 성립된다. 이때부터 이 담론의 근본적인 정식은 폐기되고 새로운 정식이 등장한다. 즉 “우리는 사회에 맞서 우리 자신을 보호해야만 한다.” 는 폐기되고, “우리 자신의 뜻에 반해 우리 자신이 구성하고 있는 중인 이 다른 인종, 이 하위-인종, 이 대항-인종의 모든 생물학적인 위협으로부터 사회를 보호해야 한다.” 는 정식이 확립된다.

 

「바로 이 순간에, 인종주의적 테마군은 한 사회 집단이 다른 사회 집단에 맞서는 투쟁의 도구로서 등장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보수주의의 전반적 전략에 봉사하게 될 것입니다. 제가 말씀드렸던 이 담론의 목적과 관련해서도, 그리고 이 담론의 최초의 형태와 관련해서도 역설입니다만, 바로 이 순간에 국가인종주의가 등장하는 것입니다. p85」

 

이분된 사회에서, 중심으로부터 밀려난 진영의 투쟁 도구였던 인종투쟁이, 역으로 중심화된 진영의 권력 담론으로 바뀌었고, 급기야는 국가인종주의를 야기했다.

 

 

4강 1976년 1월 28일

 

푸코는 인종주의 담론과 인종전쟁 담론의 차이를 주장하며, 자신은 인종전쟁 담론을 찬양한다고 말한다. 19세기 말까지 인종전쟁 담론은 하나의 대항역사이기 때문이다. 대항역사는 의무를 부과하는 주권자의 법률의 통일성을 해체한다. 권력이 사회체의 한쪽만 밝게 비추고 다른 쪽은 그늘 속에 내버려두는 빛임을 폭로한다. 인종들의 투쟁 서사와 더불어 생겨난 이 대항역사는 그늘의 편에서, 이 그늘에서 출발해 말할 것이다.

 

「한마디로 사람들은 중세 말기에, 16~17세기에, 역사의식이 여전히 로마 유형이었던 사회, 즉 여전히 주권의 의례와 주권의 신화를 중심으로 했던 사회에서 벗어났다고, 또는 벗어나기 시작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고 나서 우리는 사회, 달리 표현할 단어도 없고 그 단어의 의미가 완전히 텅 비어 있으니까 쓰는 것인데, 이를테면 ‘근대적’ 유형의 사회 속으로 진입했던 것입니다. 주권과 그 창설의 문제가 아니라 혁명, 미래의 해방에 대한 혁명의 약속과 예언을 중심에 둔 역사의식을 가진 사회 속으로 말입니다. p105」

 

그런데 19세기 전반에 인종투쟁이라는 통념이 계급투쟁이라는 통념으로 대체되기 시작했다. 그와 더불어 한편에서는 인종투쟁의 담론을 계급투쟁이 아니라 인종주의적 투쟁 즉 생물학적․ 의학적 의미에서의 인종들 간의 투쟁이라는 용어로 전화시키려는 시도가 일어났다. 계급투쟁이라는 혁명적 유형의 대항역사가 형성되던 바로 그 순간에 또 다른 대항역사가 형성되고 있었던 것이다. 바로 인종주의가 될 어떤 것의 등장이었다.

 

「이것은 낯선 것이 (사회 속으로) 침입해 들어온다는 관념, 일탈자는 이 사회의 부산물이라는 테마입니다. 국가는 필연적으로 정의롭지 않다는 인종들의 대항역사에서 테마는 결국 정반대의 테마로 변형될 것이었습니다. 즉, 이제 국가는 한 인존이 다른 인종에 맞서 사용하는 도구가 아니라 인종의 완전성․ 우월성․ 순수성의 보호자이며, 또한 그래야만 합니다. 인종의 순수성이라는 관념은 그것이 수반하는 일원적․ 국가적 ․ 생물학적 성격과 더불어, 인종투쟁의 관념을 대체할 것이었습니다. p106」

 

사회 내의 적대를 분명히 보여주면서 혁명적 투쟁의 담론으로 기능했던 인종투쟁의 관념이 이제 국가를 위한 이데올로기로 봉사하게 되었다. 국가의 주권은 이 담론을 인종 보호의 정언명령으로 삼고, 혁명적 호소에 대항하기 위한 장벽을 쌓았다. 19세기에 시작된 인종주의는 20세기에 들어와 두 개의 변형태를 보였다. 하나는 나치식 변형이고, 다른 하나는 소비에트 유형의 변형이다.

 

 

5강 1976년 2월 4일

 

전쟁이 어떻게 16세기 말~ 17세기 초에 권력관계에 대한 분석틀로 나타나기 시작했는지를 검토하기 위해, 푸코는 5강에서 잉글랜드 담론을 6강에서 프랑스 담론을 추적한다.

 

‘만인에 의한 만인의 전쟁’ 때문에 흔히 홉스를 전쟁과 정치권력의 관계를 다룬 이론가로 생각하지만, 그와 정반대로 홉스는 역사적 현실로서의 전쟁을 배제하고 싶어 했을 뿐 아니라, 주권의 발생으로부터 전쟁을 배제하고 싶어 했다. 홉스의 철학적-법학적 담론은 정치적 역사주의를 차단하려 했다.

 

「그러므로 반란의 논리적․ 역사적 필연성은 전쟁이 사회적 관계들의 영구적인 특질이며, 권력제도와 권력체계의 씨실이자 비밀이라고 폭로하는 모든 역사 분석의 내부에 기입되었습니다. 저는 홉스의 가장 거대한 적수가 바로 이것이었다고 생각합니다. p144」

 

궁극적으로 홉스가 제거하려 했던 것은 푸코가 ‘정치적 역사주의’ 라고 부른 것이다. 이 담론은 권력관계에 관련된 사람들은 사법 속에 있는 것도, 주권 속에 있는 것도 아니라, 지배 속에 있다고 주장한다. 17세기 홉스의 철학적-법학적 담론과 19세기의 변증법적 유물론은 이 정치적 역사주의를 차단하려 했다.

 

「정치적 역사주의는 두 가지 장애물과 마주쳤습니다. 17세기에 이것의 자격을 박탈코자 노력했던 것은 철학적-법학적 담론이라는 장애물입니다. 19세기에 그것은 변증법적 유물론입니다. 홉스의 작업은 정치적 역사주의 담론을 침묵시키기 위해 철학적-법학적 담론의 모든 가능성, 가장 극단적인 가능성조차 동원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그 역사를 연구하고 찬미하고 싶었던 것이 바로 정치적 역사주의의 담론입니다. p145」

 

 

6강 1976년 2월 11일

 

프랑스에서는 절대왕권에 대항한 귀족파의 담론이 역사주의 담론으로 등장했다. 왕의 앎은 법적 앎과 관료조직의 앎으로 구성되어 있다. 귀족은 이에 대항해 역사적 앎이라는 무기를 들었다.

 

「… 법원 서기들의 앎에 맞서 역사는 거꾸로 배반당하고 모욕당한 귀족의 무기가 될 것입니다. 기록물 뒤에서, 모든 통용되지 않은 것의 너머에서 해독하고 기억을 되살리고 이 앎이 은폐하는 뚜렷한 반목을 고발한다는 극히 반-법적인 형태를 취하는 역사. 왕의 앎을 다시 차지하기 위해 귀족이 첫 번째 거대한 적수에 맞서 개시하고자 했던 역사적 앎이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p168」

 

「그러니까 부의 분석이 아니라 귀족이 끝없는 전쟁 속에서 파산해가는 방식을 보여주는 역사입니다. 교회가 계략으로 땅과 수입을 차지해온 방식의 역사, 부르주아지가 귀족들을 빚지게 만든 방식의 역사, 왕의 재정이 귀족의 수입을 좀먹게 됐던 방식을 그린 역사 말입니다. p169」

 

기존의 역사는 권력이 자기 자신에 대해 말하는 이야기였다면, 귀족의 역사는 권력에 관한 권력의 담론에 맞서 역사적 앎의 기능 자체를 깨뜨리는 담론이다. 여기서 한편으로는 역사의 서술과, 다른 한편으로는 권력의 행사, 그 의례적 강화, 공법의 이미지화된 정식화 사이의 귀속이 해체된다. 17세말 반동적 귀족의 담론과 더불어, 역사의 새로운 주체/주제가 나타난다.

 

「국가에 관한 국가의 행정적 혹은 법적 담론을 배척하려고 할 때 나타난 이 새로운 주체/주제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당시의 한 역사가가 ‘사회’라고 불렀던 것입니다. 즉 신분에 의해 결집된 개인들의 연합, 집단, 전체로 이해된 사회, 또한 자신의 고유한 습관 ․ 관행이나 자기만의 특별한 법률을 지닌 일정수의 개인으로 이뤄진 사회 말입니다. 이제부터 역사 속에서 말하고 역사 속에서 발언하고 역사 속에서 말해지게 될 이 어떤 것은 당시의 어휘로는 ‘민족’이라는 말로 지칭됐던 바로 그것입니다. p171」

 

이때의 민족에는 국경선도 국가도 없었다. 그저 하나의 집단, 하나의 사회였다. 귀족도 하나의 민족이었다. 이 통념으로부터 19세기의 민족주의의 기본 개념들이 생겨나고 인종 개념이 생겨났다. 그리고 마침내 계급 개념도 생겨난다.

 

이 새로운 유형의 역사적 앎, 이 새로운 담론은 우파에서부터 좌파에게까지, 귀족적 반동에서부터 부르주아적 혁명 기획에까지 유포되었다. 왕권 역시 이 담론을 통제하려 했다. 왕권은 1760년부터 이 역사적 앎을 조직하고, 이른바 자신의 앎과 권력의 게임 속에 다시 놓으려 했다. 18세기의 정치적 대결의 시기에, 역사적 앎이 절대 군주제의 행정적 앎의 유형에 맞서는 무기였던 시대에, 군주제도 이 앎을 다시 식민화하려 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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