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캉과 지젝 - 정치적, 신학적, 문화적 독법
강응섭 외 지음 / 글항아리 / 2014년 8월
평점 :
절판


지젝을 읽은 지 십년이 되어 간다. 지젝의 이름만 보이면 무조건 읽고, 신간이 나오길 목 빼고 기다리던 때도 있었다. 쉽지도 않은 책을 무엇에 홀려서 그리 읽었나 싶기도 하고, 그러고도 아직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다는 사실이 서글프기도 하다. 여하튼 지젝은 내가 서양철학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이다. 지젝을 읽다보면 무엇보다 헤겔과 라캉이 궁금하고, 헤겔을 읽으려면 칸트를 거쳐야 하고, 그러려면 데카르트가 필요하고, 뭐 그렇게 거꾸로 거슬러 올라가게 된다. 그렇다고 그렇게 읽었다는 것은 아니다. 또 한편으로는 라캉의 정신분석학이 있다. 라캉에게도 프로이트가 있고, 소쉬르의 언어학, 구조주의 따위가 따라 붙는다. 지젝도 헤겔도 라캉도 어느 하나 만만한 것이 없다. 쉬운 말을 모르는지, 쉬운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사상인지, 말이란 것이 원래 그런 것인지, 이해를 위해 쓰는 말인지, 오해를 하라고 꼬아버리는 말인지, 다들 난해하시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자꾸 읽게 된다. 그 난해함에 매혹 당한다. 그 매혹의 중심은 사실 텅 비어있을 지도 모르지만.

 

 

글항아리의 『라캉과 지젝』을 사두고 이제 읽었다. 9월말에 샀으니, 그리 오래된 것은 아니지만, 예전 같으면 득달같이 읽었을 것을 한 달이나 묵혀 두었다. 오래된 애인이 이제 시큰둥해 진 걸까? 그것보다는 원래, 여러 명이 쓴 짧은 글들을 묶은 책은 좋아하지 않는다. 분량 상 깊이가 있을 수도 없고, 이런 저런 주제들로 왔다갔다 산만하기 때문이다. 더구나 지젝과 라캉의 난해함을 이렇게 짧은글 속에 제대로 풀어내길 기대하기는 힘들다. 아니, 그렇게 압축해 낸 글들을 내가 이해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우리나라 학자들이 풀어낸 지젝과 라캉이라는 사실이 호기심을 자극했다. 공부를 하는 사람들은 내가 이해하지 못했던 것들을 어떻게 소화해내는지가 몹시 궁금하고 또 미리 부러웠다.

 

단적으로 말하자면 여덟 편의 글 중 세 편만 읽을 만 했다. 좋은 글을 쓰지는 못해도 좋은 글을 알아볼 수는 있는 것처럼, 라캉과 지젝을 잘 이해하지는 못해도 그들에 대해 잘 이해하고 잘 소화해 쓴 글인지 아닌지는 알 것 같다. 김정한, 이성민, 정혁현의 글은 좋았다. 가장 나쁜 글은 김석의 것이다. 라캉과 지젝에 대한 비교가 억지스럽게 느껴진다. 지젝의 의미가 그런 것이 아닌데, 비교를 위해 지젝을 자신이 만든 틀 속에 억지로 끼워 넣은 것 같다. 거두절미는 논객들만 하는 것이 아니라 때로는 철학자들도 한다.

 

헤겔도 그렇지만 라캉도 해석이 분분하다. 라캉 스스로도 견해를 끊임없이 바꾸었을 뿐 아니라, 어떤 개념에 대해 똑 부러지게 의미를 규정하지 않기 때문에, 읽는 사람에 따라 의미가 달라지기 일쑤이다. 이 책에서도 그런 경향이 드러나는데, ‘증상과의 동일시’ 와 ‘환상을 횡단하기’를 놓고 김석과 김정한은 전혀 반대의 해석을 하고 있다.

 

이 두 개념은 정신분석의 완료에 대한 두 가지 관점을 제시한다. 라캉에게 정신분석은 임상에 좀 더 가깝고 지젝에게는 정치와 깊이 관련된다. 임상이든 정치든 분석은 어느 시점에서 완료되는가? 혹은 성공하는가? 김석은 증상과의 동일시에서, 김정한은 환상의 횡단에서 정신분석의 완결을 보고 있다.

 

「정신분석 윤리의 근본 지향점은 개별 주체가 자기 욕망의 주인이 되고, 스스로의 존재를 정립하는 것이다. 존재는 상징화에 저항하며 기표적 질서에 대해 ‘탈존ex-sistence’하는 ‘무적인 것 ex-nihilo’ 이다. 존재가 자신을 가장 적극적으로 드러내는 현상이 바로 분석적 상황은 물론이고 일상에서 경험하는 증상이다. 증상은 말하는 주체가 붙잡을 수 있는 유일한 존재의 조각이다. 여기서 말하는 증상은 주체가 겪는 병적인 상태를 보여주는 프로이트적 의미의 임상 지표가 아니라 바로 실재의 메시지로서의 증상을 의미한다. 실재의 메시지로서의 증상은 해석이나 치료의 대상이 아니라 그 자체로 향유의 대상이다. 이제 증상을 통해 대타자가 박탈한 향유에 다가설 수 있다.

존재 회복은 최종적으로 증상에 대한 동일시를 통해 완수된다. 지젝은 환상을 가로질러 이데올로기의 중핵에 있는 실재적인 것과 조우하면서 상징적 질서 너머로 향한 것을 강조하지만, 라캉은 욕망에 대한 철저한 충실성을 통해 실재(증상)에 대해 도달할 것을 주장한다. 지젝이 사회적 환상을 가로질러 상징계를 전복하는 혁명을 주장한다면 라캉은 주체가 갖는 증상에 대한 동일시를 통해 기표 S1-S2로 이어지는 기표 연쇄가 결국 존재의 진리를 보증하지 못한다는 것을 드러냄으로써 상징계의 무능을 넘어서고자 한다. 정신분석의 윤리는 상징계가 거세하려는 존재를 향하며, 존재로의 귀환은 결국 실재에 속하는 증상에 대한 동일시를 통해 가능하다. p42~3 김석」

 

김석은 라캉과 지젝을 ‘증상과의 동일시’와 ‘환상을 횡단하기’로 각각 대비한다. 김석이 말하는 증상은 실재적인 것으로 이것과의 동일시를 통해 주체가 존재를 획득할 수 있다는 것이다. 상징계란 기표의 세계로, 주체는 상징계에 들어서는 대가로 존재를 상실한다, 즉 거세당한다. 김석은 환상을 횡단하는 것을 또 다른 환상 즉 기표의 세계로 들어가는 것으로 보는 것 같다.

 

이에 반해 김정한은 ‘증상과의 동일시’를 상징적인 것, 다시 말해 상징계에 적당하게 적응해 사는 것으로, 기각한다. 정신병 환자에 대한 임상적 치료는 보통 다른 사람들과 그럭저럭 잘 어울려 사는 것을 목표로 하는 것처럼 말이다.

 

「지젝에 따르면, 밀레의 정치적 입장은 그의 라캉 해석과 무관하지 않다. 정신분석 치료와 관련하여, 초기 라캉이 상상적 동일시를 떨쳐 내고 상징적 질서의 한계를 넘어 실재-물의 너머와 영웅적으로 대면하는 윤리를 제시한다면, 후기 라캉은 이런 ‘한계-경험’ 자체를 거부하고 급진주의를 포기하면서 온건한 방식으로 후퇴한다. 라캉에 따르면 “분석을 너무 멀리까지 밀고 나가서는 안 된다. 환자가 사는 게 행복하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후기 라캉에게 정신분석 치료는 주체성의 철저한 변형이 아니라 국소적 미봉책이다. 밀레는 이 후기 라캉에 초점을 맞추면서 정신분석의 끝을 ‘환상 가로지르기’로 개념화하는 것을 포기하고, 이와 반대로 분석의 목표를 ‘증상과의 동일시’로 재정식화한다. 주체는 자신의 독특한 향유 방식을 압축하고 있는 증환이 치유될 수 없다는 것을 받아들이고 그와 함께 사는 법을 배워야 한다는 것이다. 요컨대 밀레는 ‘환상 가로지르기’와 ‘증상과의 동일시’를 대립시키면서, ‘증상과의 동일시’를 통해 주체가 자신의 독특한 향유를 유지하는 길을 제시한다. 이것이 정치적 맥락에서 함의하는 바는 “냉소적인 자유주의적 보수주의” 인데 왜냐하면 주체의 안정적인 향유를 위해서는 기성 권력의 상블랑이 향유의 실재가 아니라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기성 권력이 규정하는 일상의 법과 전통을 존중하고 준수해야 한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상징적 상블랑들이 가짜 내지 허상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마치 그렇지 않은 듯 즐기라는 것은 냉소적인 윤리다.p54~5 김정한」

 

여기서 김정한은 별 다른 설명 없이 증상과 증환을 섞어 쓰고 있다. (엄밀히 이 두 개념은 다르며, 김정한처럼 증상을 상징계적으로 본다면 증환은 실재적인 개념이다.) 여기서 김정한은 아니 그보다는 지젝은 ‘증상과의 동일시’를 라캉이 아니라 그의 사위인 밀레의 탓으로 돌리며, ‘증상과의 동일시’를 존재의 회복으로 본 김석과는 다르게 존재의 타협으로 본다. 김정한에게 ‘환상 가로지르기’는 상징계의 궁극적 변혁인 반면 ‘증상과의 동일시’는 환자의 임시적 치유에 불과하다. 김정한은 밀레가 후기 라캉을 받아들이면서 ‘증상과의 동일시’를 주장한 반면, 지젝은 급진적 라캉을 바탕으로 ‘환상 가로지르기’를 정신분석의 완료로 보고 있다고 생각한다.

 

환상 가로지르기는 환상과의 과잉동일시를 통해 이루어진다. 왜냐하면 환상 즉 지배 이데올로기에는 반드시 피지배자들의 본래적 갈망이 결합되어 있기 때문이다. 지젝은 “지배적 이데올로기가 작동하기 위해서는 그것이 피착취/피지배 다수자가 자신의 본래적 갈망들을 인지할 수 있을 일련의 특징들을 통합시켜야 한다. 요컨대 모든 헤게모니적 보편성은 적어도 두 개의 특수한 내용을 통합시켜야 한다. ‘본래적’인 대중적 내용과, 지배와 착취의 관계들에 의한 그것의 ‘왜곡’” 이라고 지적한다. 피지배자가 이데올로기에 ‘속아’ 넘어가는 것은 사실 속아 넘어간 것이 아니다. 그 이데올로기에 피지배자가 원하는 가치가 내재해 있기 때문에 자발적으로 지지한다고 보아야 한다. 가령 프랑스 혁명의 자유와 평등은 부르주아지의 이데올로기였지만, 그 속에는 민중의 무조건적인 평등이라는 가치가 내재해 있었다. 부르주아지는 시장의 자유와 권리의 평등을 목표로 했지만, 민중이 갈망했던 것은 분배의 평등이었다. 분명히 부르주아지의 ‘자유와 평등’은 가로질러야 할 환상이었지만, 그것은 민중의 무조건적인 평등이라는 환상과의 과잉동일시를 통해서만 전복될 수 있었다. ‘평등? 그래봤자 부르주아지만 배부른 짓이지’ 라는 냉소가 아니라, ‘그래, 우리는 누구나 골고루 나누어 가지는 평등을 원해!’ 라는 것, 평등이라는 환상에 대한 철저한 믿음, 바로 그 과잉동일시가 1830년 이후의 부르주아 체제를 끊임없이 위협에 왔던 프랑스 혁명의 전개 과정이었다.

 

 

여하튼 지젝은 지젝으로, 라캉은 라캉으로 읽는 것이 가장 좋다. 그러나 라캉은 너무 어렵고 사실 라캉의 세미나들은 거의 번역이 되지 않아서 읽을 수도 없는 형편이다. 그렇지만 라캉의 정신분석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서들 혹은 입문서들은 꽤 있는 편이니 그것부터 읽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이 책의 글들은 연구논문 형태여서 학자들 사이의 논쟁에는 생산적일지 모르나 일반인들이 읽기에는 너무 지엽적이고 설명이 부족하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14-10-28 18:4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4-10-29 10:23   URL
비밀 댓글입니다.
 
모나리자 훔치기 - 왜 예술은 우리를 눈멀게 하는가 What's Up 7
다리안 리더 지음, 박소현 옮김 / 새물결 / 2010년 9월
평점 :
품절


절대반지는 사실 우리를 사로잡는 사악한 눈이다. 반지는 그것을 가진 사람을 꼼짝하지 못하게 사로잡아 사우론의 응시 아래 놓는다. 끊임없이 누군가에게 보여 지는 것은 참을 수 없는 공포다. 슈퍼맨이 매번 어벙한 클라크 기자로 돌아왔던 이유도 세상의 시선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였다. 인간은 사회적 페르소나를 연기할 때, 즉 가면을 쓰고 있을 때 가장 편안함을 느낀다. 부지불식간에 누군가 방문을 벌컥 열면 별 짓을 하지 않았는데도 우리는 수치심과 불안감을 느낀다.

   

고대의 이론들은 우리가 만화에서 보는 것처럼 눈이 빛을 내뿜는다고 믿었다. 그러

나 시각의 기하학은 데카르트의 유명한 그림처럼, 눈이 빛을 방출하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빛을 수용하는 기관이라 보았다. 그렇다면 빛을 뿜는 사악한 눈은 사라진 것일까? 1911년 루브르 미술관에서 <모나리자>를 훔친 페루지아는 모나리자가 자기를 향해 미소를 짓는 듯한 이상한 느낌을 받았다고 진술했다. 모나리자가 그를 응시했고, 그는 그것에 사로잡혔다는 것이다. 파울 클레는 “숲을 보고 있는 것은 내가 아니다, 나무들이 나를 보고 있다.” 고 말했다. 클레가 메뉴판에서 신문지의 여백에 이르기까지 끊임없이 그림을 그렸던 이유는 이렇게 무언가에 응시당하고 있는 느낌 때문이었다. 이것이 화가들이 그림을 그리는 이유다. 그림은 사악한 눈을 자신으로부터 돌리게 만드는 일종의 덫이다. 화가들은 살아남기 위해 이미지나 물건을 떨어뜨린다. 도망자가 일부러 돌을 던지거나 소리를 내서 추적자를 다른 곳으로 유인하는 것처럼 말이다. 라캉은 몇몇 시각 예술은 사악한 눈의 주의를 다른 곳으로 돌리고 무장해제시키기 위한 스크린으로 기능한다고 보았다. 회화는 눈을 위해 덫을 놓는 필사적인 행위이다.

 

보통 라캉의 스크린은 이중으로 기능한다. 그것은 가리개인 동시에 지시자이다. 미술사의 가장 유명한 일화인 제욱시스와 파라시오스의 핵심은 이것이다. 새들은 제욱시스의 포도에 속아 넘어갔지만, 제욱시스는 파라시오스의 베일에 속아 넘어 간다. 베일과 스크린은 그 뒤의 대상을 감추는 동시에, 그 뒤에 무엇인가가 있음을 가리킨다. 그러나 이것은 기만이다. 제욱시스는 엄청난 그림이 있을 것이라는 이미지에 속았다. 이미지는 인간의 욕망이 투영하는 것들을 반영하지만 실제로는 그런 대상을 가지고 있지 않다. 예술적 이미지의 속성은 현실에 대한 모방이 아니라 시선을 유혹하고 기만하려는 노력이다. 욕망의 궁극적 대상은 금지된 것이 아니라 그 자체가 불가능성이기 때문이다. 파라시오스의 베일 뒤에는 아무것도 없다. 텅 빈 공간만이 있을 뿐이다.

  

 

역설적이게도 <모나리자>는 그것이 사라진 이후에야 불후의 명성을 얻게 되었다. 남녀노소 수많은 프랑스인들은 그림이 아니라 그림이 사라진 것을 보려고 루브르 미술관으로 몰려들었다. 이전에 한 번도 모나리자를 본 적이 없는 사람들이 말이다. 군중들이 보려고 몰려든 것은 모나리자가 사라지고 남은 텅 빈 공간이었다. 모나리자가 거기 있기 때문이 아니라 거기 없기 때문에 보러 간 것이다. 모나리자는 ‘잃어버린 숭고한 대상’ 이 되었다. 소련의 공산당 서기장이던 브레즈네프가 ‘못생겼지만 똑똑해 보이는 여자’ 라고 했던 그 그림이 말이다. 사람들은 이 텅 빈 장소에서 무엇을 보고 있는 것일까?

 

「프랑스의 한 신문이 보도한 대로 루브르가 재개관했을 때 “군중들은 다른 그림은 보지 않았다. 그들은 불과 일주일 전만 해도 성스러운 <모나리자>가 미소 짓고 있던 먼지투성이 공간을 한참 동안 응시했다. 그리고 열광적으로 몰두하기 시작했다. 그들에게는 <조콘다>가 거기 있는 것보다 사라진 것이 훨씬 더 흥미진진한 일이었다.” 라캉의 주장에 따른다면 <모나리자>가 도난당한 뒤 루브르에 몰려든 군중들은 미술작품의 진정한 기능을 입증해 주었다 미술작품의 진정한 기능이란 물物 Das Ding 이라는 텅 빈 장소, 다시 말해 미술작품과 그것이 점하고 있는 장소 사이의 틈새를 환기시켜 주는 것이었다. 텅 빈 공간을 보러 몰려든 군중들에 대해 한 신문에서 말한 것처럼 “어떤 사람들은 미술작품 자체를 좋아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미술작품이 차지하고 있는 장소 때문에 미술작품을 좋아한다.” 그리고 이 장소는, 적어도 『르 피가로』에 따르면, “무시무시하게 입을 쩍 벌리고 있는 거대한 공백” 이었다. p133~5」

 

 

物 Das Ding 이란 일종의 ‘부재하는 원인’ 이다. 이글대는 우리의 욕망은 사악한 눈과 같다. 이 사악한 눈, 욕망을 사로잡은 물物 Das Ding 은 그러나 덫이다. 클레의 강박적인 그림이자 파라시오스의 베일이다. 이 대상은 결코 욕망을 충족시키지 못한다. 욕망은 원초적으로 충족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신의 맛을 찾아다니는 그 어떤 미식가도 ‘절대 맛’을 찾을 수 없고, ‘절대 음’을 위해 피를 토하는 창극인도 경지에 이를 수 없다. 어떤 영웅도 금지된 대상을 손에 넣을 수 없었던 것은 신이 금지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이 애초에 부재하기 때문에, 불가능성의 대상이기 때문이다. 궁극적으로 물物 Das Ding이 텅 빈 장소여야 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어떤 실체적 대상도 텅 빈 장소 혹은 욕망의 베일을 대신할 수 없다. 최고의 덫은 텅 빈 물物 Das Ding이다. 한 번도 모나리자를 본 적이 없는 수많은 사람들이 먼지투성이의 텅 빈 장소에 열광했던 이유가 이것이다. 우리의 욕망이 어떤 실체적 대상에 절망할 위험 없이 지속될 수 있기 때문이다. 프로이트는, 인간은 사회가 보지 못하도록 금지한 무엇인가를 찾는 것이 아니라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불가능한 것을 찾는다고 주장했다. 애초에 결코 존재한 적이 없는 것을 찾으려는 노력이야말로 너무나 인간적인 특징이 아닌가? 그러므로 2여년 뒤 모나리자가 돌아왔을 때 사람들의 기이한 반응은 별로 이상할 것이 없다.

 

「<모나리자>가 도난당했을 때, 진짜 <모나리자>는 이미 수년 전에 도난당해서 없고, 이번에 도난당한 <모나리자>는 모조품이라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그리고 <모나리자>가 다시 루브르에 돌아 왔을 때 그것은 진짜 <모나리자>가 아니라는 이야기가 엄청나게 회자되었다. 이러한 추측들을 쓸데없는 어림짐작으로 간주하는 대신 장소와 그것을 채우고 있는 요소, 즉 욕망의 텅 빈 공간과 욕망을 충족시켜 줄 것이라 주장하는 모든 대상들 사이의 필연적인 틈새가 초래한 구조적 결과로 해석하는 것은 어떨까? 무언가가 항상 우리에게 대상과 장소 사이의 그러한 틈새를 환기시켜 줄 것이다. 프로이트에게는 그 장소가 결코 존재한 적 없는 대상의 장소라면 모든 경험적 대상은 그 장소를 어떻게 채울 수 있을까? p171」

 

사람들이 진짜 모나리자를 거부하는 것은 당연할 지도 모른다. 모나리자가 사라지고 남은 텅 빈 장소에 사람들이 열렬히 투여했던 그 욕망을 결코 진짜 모나리자가 충족시킬 수 없기 때문이다. 사람들에게 진짜는 진짜 대상이 아니라 진짜에 대한 갈망 혹은 욕망 또는 환상이기 때문이다.

 

「완성된 것은 실제로 결코 성취될 수 없음을 알기 때문에 완성된 것이라는 이상은 미완성 된 대상들을 통해서만 희구될 수 있다. 따라서 모든 예술은 결코 눈의 욕망을 충족시켜 줄 수 없다는 점에서 미완성이다. 즉 어떤 예술도 눈이 추구하는 것을 보여 줄 수 없다. p238」

 

사우론의 눈, 사악한 욕망의 눈은 결코 충족을 모른다. 그러므로 욕망은 끊임없이 완성을 미룬다. 히스테리증자와 같이 ‘내가 원하는 것은 그것이 아니어요.’ 라고 말한다. 베일 뒤에는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을, 텅 빈 장소에서 욕망이 보는 것은 욕망 그 자체뿐이라는 것을, 욕망이 만든 환상이라는 것을, 보려고 하지 않는다. 사악한 눈은 역설적이게도 보지 않으려 한다. 욕망이 눈멀어 있기 때문이다. 베일 뒤의 無 그 자체를 똑 바로 바라보게 될 때 우리를 구성하던 환상의 전체 틀이 무너진다. 좌표가 사라지는 것이다. 이것이 라캉이 말하는 ‘환상을 횡단하기’ 이다. 욕망은 환상의 횡단을 거부하지만, 근본적인 틀을 뒤바꾸기 위해서는 반드시 환상을 건너야 한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곰곰생각하는발 2014-10-22 15: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글 최고입니다. 그렇잖아요. 이 책 바구니에 담고 관심을 가지는 중인데 이렇게 만나네요.....요즘 반값 할인을 하거든요....

말리 2014-10-22 21: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반값하길래 얼른 샀습니다 ㅎ. 지젝보다 친절하고 훨씬 쉬워요. 이 책 내용과 어디선가 제가 읽었다고 생각하는 내용을 마구 섞어 써서 책읽으시면 다르다고 생각하실 지도 모르겠어요ㅎ;
 

『야만적인 앨리스씨』를 읽고 《이동진의 빨간 책방》을 들었다. 『야만적인 앨리스씨』와『파씨의 입문』의 작가 황정은이 직접 나왔다. 약한 허스키에 성큼성큼한 그녀의 목소리가 작품보다 나는 더 매력적이었다. 상기된 두 호스트는 작품의 내용보다 작가와 그 주변 이야기 그리고 작품의 형식에 열을 올렸다. 사실 내용은 이렇게 말해도 된다면, 흔하다. 《그것이 알고 싶다》나 《궁금한 이야기 Y》에는 훨씬 끔찍하고 잔혹한 아동살해, 아동학대 사건들이 많다. 그것이 우리가 사는 세상이다.

 

물론 작가는 폭력을 고발하려는 것이 아니다. 아이가 어떻게 폭력을 내화하고 폭력 속에 매몰되는지 아니면 폭력에 맞설 수 있는지 질문하며, 독자를 그 물음 속으로 끌어 들인다. ‘그대는 어디까지 왔나.’ 폭력은 특히 가정폭력은 인간을 파괴한다. 어린 피해자가 불가항력일 때 당연히 그렇지만, 피해자가 분연히 주먹을 쥐고 돌아서 그 폭력을 되돌릴 때 더욱 그렇다. 존속상해는 근친상간에 못지않은 금기이다. 오이디푸스는 그러므로 세계사에 가장 비참하고 비극적인 인물이 되었다. 아버지를 향한 무자비한 발길질로 파괴되는 것은 아버지의 육체가 아니라 발길질하는 자식의 영혼이다. 『야만적인 앨리스씨』는 차마 발길질 대신 씨발년이라는 욕설로 이 되갚음의 폭력을 승화한다. 황정은은 백번이 넘는 ‘씨발’ 질에도 불구하고, 앨리시어를 극한으로 몰고 가지는 못한다. 차라리 드라마 <괜찮아, 사랑이야>가 더 독했다.

 

 

『야만적인 앨리스씨』를 읽고 특이했던 것은 작품의 시점이었다. 나는 빨간책방의 수다스런 호스트들이 굉장히 파고들 줄 알았는데, 생각만큼 호들갑을 떨지는 않았다. 작가 황정은은 무심하게 그렇게 써야할 것 같아서 그랬단다. 이 책은 전체적으로는 3인칭 시점으로 쓰여 있다. 그런데 사실은 1인칭 이다. 앨리시어는~, 앨리시어는~ 하고 앨리시어를 따라가는 제3의 시선이 말을 하지만, 이 삼자는 사실 앨리시어 자신이다. 이 책의 첫 머리에 앨리시어의 두 인칭으로의 분리가 마치 회화적 아니 영상처럼 표현된다. 처음에는 몰랐는데, 돌이켜 보니 그렇다.

 

내 이름은 앨리시어. 여장 부랑자로 사거리에 서 있다.

그대는 어디까지 왔나. 그대를 찾아 머리를 기울여 본다. 부채꼴로 펼쳐진 거리의 한쪽 모퉁이에서 다른 쪽 모퉁이까지 천천히 훑어본다. 고깃집과 카페와 각종 대리점과 백화점이 있다. 사거리 중앙엔 이 지점에 무언가 묻혔다는 표식처럼 열십자로 횡단보도가 그려져 있다. 신호가 바뀌면 사방에서 사방으로 사람들이 길을 건널 것이다. 앨리시어는 그들 가운데서 기다린다. 앨리시어의 복장은 완벽하다.

 

첫째 줄의 두 문장은 1인칭 앨리시어다. 그리고 둘째 줄부터 앨리시어는 3인칭으로 서서히 분리되어 마침내 여섯째 줄에 이르면 완벽하게 3인칭으로 변해있다. 마치 몸에서 스르륵 빠져나온 영혼이 1인칭 전지적 시점으로, 횡단보도 위의 3인칭 육신을 바라보고 있는 것처럼, 앨리시어의 영혼과 육체가 1인칭과 3인칭으로 나누어진다. 그리고 《이동진의 빨간 책방》에 의하면, 여기에 또 하나의 인칭이 호출되고 있다. - ‘그대는 어디까지 왔나.’ 그대, 2인칭 독자를 향한 1인칭 앨리시어의 부름이다. 단순히 보자면 이 책은 앨리시어가 독자에게 하는 말이자 추궁이다. 나는 이렇게 살았는데, 당신들은 무엇을 했나!

 

시점의 분리라는 특이한 서술법을 나는 처음 보았는데, 요즘 문단에서 드물지 않은 기법인지 굉장히 독창적인지 것인지 모르겠다. 여기서 내가 떠올린 것은 ‘발화행위의 주체’와 ‘발화 내용의 주체’ 혹은 ‘언표행위의 주체’와 ‘언표된 주체’ 의 분리이다. 말하자면 1인칭 앨리시어는 발화행위의 주체이고 3인칭 앨리시어는 발화 내용의 주체다.

 

‘나는 밥을 먹고 있다’ 라는 단순한 문장에서도 주체의 분리를 볼 수 있다. 밥을 먹고 있는 ‘나’는 발화 내용의 주체다. 이 말을 하는 나는 발화행위의 주체다. 이 두 주체가 하나인 것 같지만, 사실 주체는 말을 통해 분열된다. 주체의 분열은 흔히 거짓말쟁이의 역설이라고 하는 것에서 분명히 드러난다.

 

‘나는 거짓말쟁이다.’ 발화내용이 참이라고 생각해보자. 그러면 발화내용의 주체는 거짓말쟁이다. 이번에는 발화행위의 차원에서 들여다보자. 나는 거짓말쟁이라는 것은 참이므로, 발화행위의 주체인 나는 진실을 말했다. 발화행위의 주체는 거짓말쟁이가 아니다. 발화내용의 주체와 발화행위의 주체는 ‘나는 거짓말쟁이다’는 말을 통해서 뚜렷한 분열을 드러내고 있다. 진실은 어느 쪽에 있을까? 이번에는 발화내용이 거짓이라고 가정하자. 이 말은 발화행위의 주체가 거짓말쟁이라는 의미다. 이 문장이 거짓이므로, 문장 속의 주어 즉 발화내용의 주체는 거짓말쟁이가 아니다. 결국 누가 되었건 둘 중 하나는 거짓말쟁이고 나머지 하나는 거짓말쟁이가 아니다. 주체는 이렇게 거짓말하는 주체와 거짓말 하지 않는 주체로 분리된다. “발화행위의 나는 결코 발화내용의 나가 아니다.”

 

조금 더 흥미로운 사례는 가장 능란한 사기꾼의 수법에 있다. 깔끔한 사기꾼은 엄청난 거짓말로 사기를 치는 것이 아니라, 진실을 말함으로써 사기를 친다. 이 사기의 성공은 사실 사기꾼의 혀가 아니라 상대의 마음에 달려 있다. 속지 않으려는 자가 더 쉽게 속아 넘어가기 마련이다. 의심이 많은 사람은 상대의 말을 거꾸로 받아들인다. 탈무드에 이런 대화가 있다.

 

“네가 가는 곳은 크라코비인데, 네가 렘베르크로 가고 있다고 내가 믿도록, 크라코비로 간다고 나에게 말하면서, 왜 너는 거짓말을 하니?”

 

크라코비로 간다고 한 ‘너’의 말은 진실이다. 즉 발화내용의 주체인 너는 진실을 말했다. 그런데 발화행위의 차원에서 ‘너’는 거짓말을 한 것이다. 왜냐하면 크라코비로 간다고 하면 렘베르크로 간다고 내가 믿을 것임을 ‘너’는 알고 있기 때문이다. 즉 발화행위의 주체인 너는 실제로는 거짓말을 했다.

 

우리에게도 익숙한 이야기가 있다. 청개구리 동화다. 엄마 청개구리는 뭐든지 반대로만 하는 아기 청개구리에게 “내가 죽거든 개울가에 묻어라”고 말했다. 발화내용의 주체로서의 엄마 청개구리는 개울가에 묻어달라고 했지만, 발화행위의 주체로서의 엄마 청개구리의 욕망은 개울가에 절대로 묻지 말라는 것이다.

 

욕망이 발화 ‘행위’ 속에 드러나는 것은 말 즉 발화 ‘내용’이 주체가 원하는 것을 제대로 담을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종종 느끼는, 말로 표현할 수 없다는 답답함은 말이 욕망을 온전히 담아내지 못함을 우리가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을 멋지게 패러디한 것이 “남자에게 좋은데, 정말 좋은데, 뭐라고 표현할 빵법이 없네~” 라는 광고가 아닐까. 표면적으로는 광고규제에 대한 우회적 패러디이지만, 실제로는 언어학적 그리고 정신분석학적 주체의 분리를 훌륭히 은유하고 있다. 경상도 사투리가 고백하는 발화내용의 실패는 발화행위의 차원에서 제품의 특징을 강타하며, 성공한 발화(광고)의 전형이 되었다.

 

발화내용과 발화행위의 차이는 언어학적인 구분이다.

 

「방브니스트 같은 구조주의 언어학자들 사이에서 발화 행위énonciation 차원과 발화 내용énoncé의 차원을 구분하는 것은 일반적 관례가 되어 있다. 발화 내용 차원의 담론에서 항상 문제가 되는 것은 발화의 수신자가 품게 되는 의문, 즉 발화의 송신자가 전달하는 표면적 발화 내용 너머에 ‘그는 과연 나에게서 무엇을 원하는가 Che vuoi?’와 같은 의문이다. 다시 말해서 발화 행위 차원의 담론에 대한 질문이다. 이것은 언어 행위 속에 내재한 결핍으로서의 욕망의 존재를 말해준다. 언어 행위 속에는 딱히 구체적으로 요구 조건으로는 포착할 수 없는 욕망의 그림자가 어른거린다. <라캉 : 재현과 그 불만(이하 인용은 모두 이 책)> p135~6 」

 

라캉은 언어학적 문제를 정신분석학으로 끌어왔다. 라캉의 후기구조주의적 정신분석학의 특징이 언어학적 관점에서 정신분석학을 읽고 정신분석학적 관점에서 언어학을 읽은 결과이다.

 

「언어학에서 말하는 담론이 갖는 두 측면, 즉 발화내용과 발화행위의 구별은 의식적 담론과 무의식적 담론의 구별에 효과적으로 적용할 수 있다. 라캉은 이 구분법을 ‘말하여진 것 let dit’ 과 ‘말하는 것 le dire’ 사이의 차이로 설명하고, 주체의 진실은 ‘반쯤 말하여진 것 un mi-dit’에서 드러난다고 한다. p91 」

 

정신분석에서 주체는 언어를 통해 형성된다. 언어의 세계, 상징계로 들어와야만 주체가 탄생한다. 언어의 세계를 거부하는 사람을 우리는 정신병자라고 부른다. 언어의 세계는 정상인이 되기 위해 받아들여야만 하는 강요된 선택이다. 그런데 이 선택에서 주체는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 한조각의 대상a, 주체의 진실이다. 의식의 주체에게 이 진실은 억압되는데, 억압된 것은 반드시 회귀한다는 라캉의 명제에 따라 상실된 진실은 무의식의 주체를 통해 얼핏얼핏 그 모습을 드러낸다.

 

「그렇다면 이 존재의 진실은 어떻게 표현되는가. 그것은 언어의 음성적 발성, 즉 발화행위를 통해서 표현된다. 그러므로 무의식의 주체, 욕망의 주체는 바로 발화 행위의 주체의 차원과 연결된다. 라캉의 말대로 “대타자의 영역에 위치하기 위해서 무의식의 존재는 담론의 발화 행위 속에서 찾아져야 한다.” 다시 말해서, 무의식은 ‘말하는’ 발화 행위 속에서 드러나는 반면, ‘말하여진’ 발화 내용 속에서는 자신을 은폐한다. 주체의 진리, 무의식의 목소리가 들리게 하기 위한 주체의 전략은 그것을 반쯤 말하는 것이다 .p91~2 」

 

다시 ‘나는 밥을 먹고 있다’로 돌아가 보자. 밥을 먹고 있는 ‘나’와 그 말을 하는 ‘나’는 다르다. 발화내용의 주체와 발화행위의 주체가 분열된 것인데, 라캉에 따르면 진정한 주체는 그 틈바구니 속에서 순간적으로 나타났다가 사라진다.

 

앨리시어는 비실비실 웃으며 그의 뒤를 따라간다. 가로등 불빛을 벗어나 어둠 속으로 들어가고 이제 나는 그들의 뒷모습을 놓친 채로 밤 속에 남는다.

 

『야만적인 앨리스씨』에서도 딱 다시 한 번 불쑥 1인칭 앨리시어가 나타난다. 1인칭 앨리시어는 책 첫 문장에서 한 번 나왔다 사라지고 앨리시어는 내내 3인칭으로 서술되었다. 그런데 1인칭 앨리시어 나는 3인칭 앨리시어 나를 놓치고 유령처럼 모습을 드러냈다. 사실 그때서야 나(이 글을 쓰는 말리;;)는 이 이야기의 화자가 다른 누구도 아닌 앨리시어 자신인 것을 깨달았다.

 

왜 여기서 1인칭 앨리스는 갑자기 모습을 드러내야 했던 걸까? 이 무의식의 주체는 어떤 욕망의 주체인가? 여장을 한 부랑자 앨리시어는 끊임없이 거리를 배회한다. 자신을 현시한다. 여장과 악취로 사람들의 눈과 코에 들러붙는다.

 

그대의 무자비한 점막에 앨리시어는 도꼬마리처럼 달라붙는다. 갈고리 같은 작은 가시로 진하게 들러붙는다. 앨리시어는 그렇게 하려고 존재한다. 다른 이유는 없다.

 

발화행위의 주체, 1인칭 앨리시어의 욕망은 우리의 주의를 끄는 것, 우리가 앨리시어로부터 벗어나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여장으로든 악취로든 혹은 아직도 떨어지고만 있는 잔혹 동화 속의 소년 앨리스로든. 그러고도 불안한 앨리시어의 욕망은 중간 중간 우리를 호출하며 확인한다.- ‘그대는 어디까지 왔나.’ 나를 놓치지는 않았나, 나를 잊은 것은 아닌가하는 앨리시어의 불안함. 그 불안함은 3인칭 앨리시어의 뒷모습을 놓치고 어둠 속에 남겨졌을 때 아마도 극에 달한 것은 아니었을까. 앨리시어도 앨리시어를 의식에서 놓아버리는데, 우리들은, 그대들은 정말 앨리시어를 놓치고 있지 않은가, 그 두려움이 3인칭 앨리시어의 뒤에 감추고 있던 1인칭 앨리시어의 얼굴을 드러내게 한 것은 아닐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늘 세상이 편치 않던 내게도 치기에 찬 시절이 있었나 싶은데, 문득 떠오른 것이 있다. 스무 살 무렵이 될 때까지, 한글로 쓰인 책은 모두 다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더불어 한국말도. 말이 안 통한다는 말을 이해하지 못했던 것이다. 어떻게 보면 그 이후의 삶은 말이 통하지 않는 사람들과 이해하지 못하는 책들과 부딪히며 세계의 불투명성과 스스로의 한계를 깨쳐가는 과정인지도 모르겠다.

 

 

 

그 이해하지 못한 책들 중에도 단연 최고는 헤겔의 『정신현상학』이다. 2011년 여름 무렵 지인들과 『정신현상학』 세미나를 했다. 나만 빼면 나름 학문이 업인 사람들인데, 이 책에 대해서만은 별반 그럴듯한 이해력을 보여주지 못했다. 발제조차 어떻게 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당시 어떻게든 이해해 보려고 해설서를 찾아보았는데 만만해 보이는 책이 없었다. 도서관에 있던 한자경의 『헤겔 정신현상학의 이해』는 차라리 안 보느니만 못할 정도로 횡설수설이었다. 그 세미나는 차라리 인내심의 시험이었는데, 한 문장을 열 번 되풀이 읽어도 그 말뜻이 머리는커녕 눈에도 들어오지 않는 책이라, 끝까지 읽어내는 것이 목표가 되어 버렸다. 게다가 분량도, 두 권으로 나뉜 한길사판이 총 832쪽이나 되었다. 어떤 사람은 『정신현상학』읽기의 최고 성과는 다른 책에 대한 독해력이 높아지는 것이라고도 했다. 여하튼 지금도 『정신현상학』이 무슨 내용이냐고 묻는다면 횡설수설 외에 조리있는 말은 한마디도 못할 것 같다. 그럼에도 이 책의 명성은 끝 간 데가 없는지, 인문학 책들 여기저기에 수시로 출몰한다.

 

 

 

그러다 이번에 하세가와 히로시의 『헤겔 정신현상학 입문』을 발견했다. 일본 저자라 좀 탐탁찮았지만, 이상하게도 일본책은 잘 읽히지 않는다. 아직 하루키도 한번 읽어 보지 않았다, 도서출판 b 의 <헤겔총서> 시리즈라 기대를 갖고 읽었다. 이 시리즈의 첫 번째 책인 프레드릭 바이저의 『헤겔』이 무척 훌륭했기 때문이다. 『정신현상학』이후 헤겔이라면 넌더리가 나면서도, 한편 도전정신이 잠복해 있던 터에 우연히 도서관에서 읽게 된 책이다. 영어로 책을 쓰는 독일 관념론 철학자라는데, 헤겔 사상의 핵심을 그리 어렵지 않으면서도 흡인력 있게 설명하고 있었다. 『정신현상학』뿐만 아니라 지젝의 책들을 읽으며, 매우 궁금했으나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던 여러 가지 개념들을 나름대로 정리할 수 있었다. 도서관에서 읽고 다시 구매해서 또 읽었는데도 아주 좋았다.

 

 

하세가와 히로시의 『헤겔 정신현상학 입문』은 기대와 달리 혹은 어느 정도 예상한대로 그다지 좋지는 않았다. 일단 일본식 문장을 직역한 한글 번역문은 어쩔 수 없이 눈에 거슬렸다. 차라리 살짝 윤색을 하면 나았지 싶을 정도인데, 이건 뭐 개인 취향이다. 내용으로 말하자면, 다 덮어두고, 이 책을 통해 『정신현상학』에 대해 더 잘 이해하게 된 것이 있냐고 묻는다면, 글쎄요... 라고 대답하게 될 것 같다. 어떻게 보면 원서의 혼란에 해설의 혼란을 더한 것도 같고, 어느 정도는 이해에 도움이 된 것도 같은데, 전체적으로, 아! 헤겔의 말이 이런 뜻이었구나, 하는 깨달음은 주지 못한다. 게다가 또 눈에 밟히는 것은 역자인데, 이신철은 바로 바이저의 『헤겔』 역자이기도 하다. 철학박사로 헤겔에 관한 몇몇 책들을 번역했다고는 하지만, 일본어에도 능통하신 분인지 약간 의문이 든다. 원래 일본식 문장을 안 좋아하니까 번역문도 눈에 거슬리는 것인지 모르겠지만.

  

 

 

 (파일을 뒤져보니 처음 『정신현상학』을 읽을 때 웹에서 찾은 그림이 있는데, 출처가 어디였는지는 모르겠다.)

 

여하튼 『헤겔 정신현상학 입문』에 의하면, 일반적인 상식이지만, 『정신현상학』은 ‘의식의 여행’ 이다. 절대적 앎을 향해 가는 지도 없는 여행 말이다. 혹은 내 생각에는 아이가 사고를 배워나가는 과정 같기도 하다. 첫 단계는 그저 앞에 무엇인가가 ‘있다’라는 것을 인지하는 감성적 확신 즉 감각이다. 의식의 첫 단계가 감각이란 말이다. 두 번째는 지각이다. 사물을 인지하는 단계. 세 번째는 지성 혹은 오성이다. 이 세단계의 의식을 통틀어 그냥 ‘의식’ 이라고 한다. 그 다음 단계는 ‘자기의식’이다. 자기를 의식한다는 것은 곧 타자를 의식하는 것이기도 하다. 자기의식은 타자의 의식에 대한 인정과 투쟁이다. 그 다음 단계는 ‘이성’ 이다. 이성에 대한 헤겔의 유명한 정의로는 ‘이성적인 것은 현실적인 것이며, 현실적인 것은 이성적인 것이다’ 가 있다. 마지막 단계는 정신이다. 정신의 단계에서 공동체와 세계가 중심을 이룬다. 정신은 공동체로부터 태어나는 것이다.

 

「개별자로서의 정신이 공동체 정신 내부를 자유롭게 오고가며, 역사라는 정신의 마당도 자유자재로 왕래한다. 그러한 정신의 운동이 앎과 사유에 이끌려 전개될 때, 정신은 『정신현상학』의 마지막 장 ‘C.(DD) 절대지’ 의 경지에 놓인다. p198」

 

「종교와 연결하여 말하자면, 절대지란 신의 관점을 스스로의 것으로 할 수 있다는 확신 위에 서는 앎을 가리키며, 교양 및 도덕과 연결하여 말하자면, 전 세계에 통용되는 교양과 도덕을 획득할 수 있다고 확신한 앎을 가리킨다. p199」

 

의식의 최고 형태인 정신이 여행의 끝에 도달하는 곳은 ‘절대지’, 절대적인 앎이다. 세계를 움직이는 근본원리, 사회적· 윤리적· 법적 토대를 형성하고 조망하는 경지가 절대지가 아닌가 싶기도 하다.

 

 

그러나 의식의 여정을 서술한 『정신현상학』의 핵심은 ‘부정성’이다. 의식은 끊임없는 투쟁과 부정을 통해 절대지에 도달한다. 부정성은 여정을 이끄는 에너지, 동력이다. 『정신현상학』서문 중 가장 유명한 부분이기도 한 이 구절이 아마도 가장 많이 인용되는 이유기도 할 것이다.

 

「정신이란 그 자신이 절대적인 분열 속에 몸담고 있음을 알아차리는 가운데 진리를 획득하는 것이다. 정신은 부정적인 것에서 눈길을 돌려 긍정적인 쪽으로 쏠림으로써 힘을 발휘하는 것이 아니다. 무언가가 주어졌을 때 그것은 아무 의미도 없는 쓸모없는 것이라고 하면서 당장 고개를 내저으며 다른 쪽으로 마음을 돌리는 것은 정신이 취할 자세가 아니다. 참으로 정신이 힘을 발휘하는 이유는 바로 부정적인 것을 직시하며 그 곁에 머물러 있기 때문이다. 그것을 따돌리지 않고 그 곁에 함께 머무르는 바로 그때, 여기에 부정적인 것을 존재로 전화되게 하는 마력이 생겨나는 것이다.

이 마력이란 앞에서 주체라고 일컬어졌던 것과 동일한 것이다. 즉 주체란 자기가 관여하는 범위 안에 있는 내용에 독자적인 존립을 부여함으로써 추상적이고 직접적인 존재 일반을 지양하여 실체를 진리로 이끌어 가는 것이다. 부정이나 매개를 자기의 외부에 맡겨놓다시피 한 무기력한 존재가 아니라 스스로 분열과 매개를 행하는 존재만이 주체라 불릴 수 있는 것이다. 『정신현상학』 p71,72」

 

‘부정성과 함께 머무르기’ 를 통해 주체가 탄생하고, 주체의 정신은 절대적 앎의 경지에 다다를 수 있다. 하세가와 히로시가 설명하는 헤겔 주체사상을 잠깐 읽어보자.

 

「세계 전체를 확고부동하고 완성된 질서로 파악하는 것이 스피노자식의 ‘실체’의 사상이라고 한다면, 거기에 분열과 대립과 부정을 가지고 들어와 질서의 해체와 재생의 끊임없는 운동 속에서 참된 현실의 모습을 보는 것이 헤겔의 ‘주체’의 사상이었다. ‘주체’는 무엇보다도 우선 스스로 움직이는 것이거니와, 완성된 질서를 이루어 내고서 긴장을 푸는 것은 허용되지 않았다.

새삼스럽게 해명할 것까지도 없이 여기서 말하는 ‘주체’는 인간의 얼굴을 가진 개별자로서의 주체가 아니다. 그것은 훨씬 더 넓은 의미에서의 주체이다. 자신을 포함하는 세계 속에 일정한 질서가 주어졌을 때 거기에 안주할 수없는, 그리하여 그것을 때려 부수고 새로운 질서를 산출하고자 하는 힘을 지니는 것 - 그러한 것을 헤겔은 모두 ‘주체’라는 이름으로 부르는 것이다. 그리고 헤겔은 현실 세계의 이르는 모든 곳에서 그러한 부정의 힘을 보기 때문에, 세계 그 자체도 주체라고 말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또한 세계 속의 형태를 지닌 모든 것도 주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p39」

 

이렇게 주체와 부정성은 뗄 수 없는 관계이다. 이 부정성은 즉각 헤겔의 변증법을 연상시킨다. 그런데 흔히 오해하고 있듯 헤겔의 변증법을 대표하고 있는 것은 ‘정-반-합’의 도식이 아니다. 『헤겔』저자 프레드릭 바이저는 헤겔 자신은 결코 이 용어법을 사용하지 않았으며, 모든 도식의 사용을 비판했다고 한다. 정립과 반정립의 개진은 원래 칸트의 것이다. 헤겔을 독특하게 해석하여 심지어는 사이비로 비판받기도 하지만, 지젝은 헤겔 변증법을 부정과 ‘부정의 부정’으로 설명하고 있다. 그런데 두 번째의 부정 즉 부정의 부정은 소위 정-반-합에서 말하는 행복한 합일이 아니다. 부정의 부정은 부정의 극단이며, 관점의 전환이다. 첫 번째 부정에서 부정적으로 보았던 것을, 부정의 부정에서는 긍정적으로 보는, 시차적 관점으로 전환할 뿐이다. 불가능성의 조건을 가능성의 조건으로 바꾸어 보는 것, 그것이 부정의 부정이다. 12척박에 없는 것이 전쟁의 불가능성의 조건이라 여겨졌지만, 이순신 장군에게는 가능성의 조건이 되었던 것처럼 말이다. “신에게는 아직 열 두 척의 배가 남아있사옵니다.” 를 통해 이순신 장군은 헤겔의 변증법을 실행 했다.

 

 

사족으로 따뜻한 위로 한마디를 전하며, 마무리를 지을까 한다. 『정신현상학』은 우리에게만 어려운 것이 아니라 심지어는 하세가와 히로시에게도 어려웠던 듯하다. 사실 『헤겔의 정신현상학 입문』은 <『정신현상학』의 난해함> 이란 장으로 시작한다. 『정신현상학』이 쓸데없이 어려운 이유는 이 책을 쓸 당시의 헤겔이 기백과 패기에 넘친 젊은이였다는 데 있다. 말하자면 넘치는 의욕을 사유가 따라잡지 못했다고 할 수 있다. 군데군데 사고의 모순과 관념의 비약이 있다고 하세가와 히로시는 보고 있다. 더 큰 이유는 ‘의식의 여정’ 이 순탄할 수 없고, 절대지라는 목적이 호락호락 달성될 수 없기 때문은 물론이다. 여하튼 어렵다고 너무 슬퍼하지 말고, 관심이 있다면 도전해 보자.

 


댓글(0)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처음 읽는 영미 현대철학 처음 읽는 철학
철학아카데미 지음 / 동녘 / 2014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처음 읽는 영미 현대철학』을 띄엄띄엄 읽다보니, 3주가 넘게 걸렸다. 예상대로, 그렇게 재미있지는 않았다. 이 시리즈는 프랑스철학, 독일철학, 미국철학으로 일단 완성되었다. 서양 현대철학에서 더 나올 것이 없지 싶은데, 철학아카데미 측의 의중은 모르겠다. 각각의 책은 나라이름에서 느껴지는, 그런 일반적 특성을 갖고 있다. 프랑스철학은 화려하고, 독일철학은 깊이 있고, 영미철학은 건조하다. 프랑스철학의 현란한 언어 속에는 다양한 사유가 거침없이 뻗어있고, 독일철학의 묵직한 언어에는 근원에 대한 질문과 현실의 고뇌가 녹아있다. 영미철학의 또박또박한 언어는 곧장 공리와 실용을 향해 나간다.

 

 

『처음 읽는 영미 현대철학』의 11편 중 기록해 두고 싶은 것은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과 리처드 로티, 그리고 프레드릭 제임슨이다. 비트겐슈타인은 현대 영미철학의 초석을 놓은 철학자로 비트겐슈타인 없이는 영미철학 자체를 말할 수 없고, 제임슨은 라캉주의 좌파(이렇게 규정할 수 있는지 모르겠지만)로 지젝에 의해 여러 차례 언급되었고, 로티는 그의 철학 자체 보다는 이유선의 로티 소개가 아주 훌륭하기 때문이다. 비트겐슈타인은 지난번에 대략 요약했고, 오늘은 리처드 로티의 <문화정치로서의 철학>을 간단히 정리하려 한다.

 

 

 

바로 로티에 의해 박사후 과정을 지도받은 이유선은 로티의 핵심개념을 한마디로 ‘자유주의 아이러니스트’ 라고 정의한다. 자유주의 아이러니스트? 선뜻 감이 잡히지 않는데, 『우연성, 아이러니, 연대성』이란 책에서 로티 자신이 사용한 어휘이다.

 

로티는 서양철학에 대한 분석을 플라톤에서 시작한다. 플라톤 이래 근대철학의 인식론, 현대의 언어철학은 기본적으로 모두 동일하다.

 

「그런데 로티가 볼 때는 이게 다 똑같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서구철학사가 플라톤의 주석이다.’라는 말의 뜻을 로티식으로 다시 말하면, 주관과 객관의 이런 표상관계를 변형해온 역사라는 것이죠. 로티는 표상이라고 하는 개념 자체가 플라톤이 썼던 하나의 은유였다고 봅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거기에 너무 사로잡혀서 전혀 헤어나지 못하고 이 틀 안에서만 생각했다는 거예요. 그래서 철학에서의 진리의 문제가 그렇게 중요하게 된 것이죠. 진리의 문제에 대해서 따지지 않으면 철학자가 아닌 게 돼버려요. p239~240」

 

플라톤은 현실을 이데아의 그림자 혹은 거울상 즉 표상이라고 보았다. 근대 인식론의 핵심 역시 인간이 어떻게 객관세계의 진리를 주관적으로 인식할 수 있는가에 있다. 즉 인식 주관과 객관 세계와의 거울상에 대한 탐구이다. 언어적 전회를 겪은 현대철학도 이 표상관계에 천착한다. 언어가 세계를 반영하고 있다는 것이다. 언어를 논리적으로 분석하면 세계가 어떻게 존재하는지 알 수 있다는 것이 분석철학의 기본 테제이다. 로티가 보기에 근대철학 뿐만 아니라 현대철학도 여전히 진리 찾기에서 벗어나지 못하면서, 표상의 방식만이 변했다. 로티는 이에 반해 반표상주의를 주장한다.

 

그런데 후기구조주의, 언어철학 등이 모두 표상주의가 맞는 것인지에 조금 의문이 든다. 원본 없는 다양한 복제품들, 진리가 아닌 차이를 강조하는 포스트모더니즘도 ‘진리의 강박’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으로 볼 수 있는가? 어쩌면 그럴 수도 있겠다. 진리가 있다고 하든 없다고 하든, 그 답은 ‘진리’라는 문제에 대한 것이다. 어느 것이든 ‘진리문제’의 틀 속에 놓여있다. 로티가 아이러니스트가 되는 계기는 철학이 이 진리의 틀을 벗어나야 한다는 깨달음에서 시작되었다.

 

로티는 처음에 분석철학을 한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유태인 중심의 비엔나 논리실증주의자들이 미국으로 오면서, 미국의 강단철학은 급속히 분석철학 중심으로 바뀐다. 그런데 교수가 되고나서 로티는 분석철학에 회의를 느낀다. 분석철학은 개념을 논리적으로 분석하고 그에 관련된 논문을 발표하는 건데, 백날 해봐도 철학자가 아니라 마치 변호사가 된 것 같았기 때문이다. 분석철학은 법정의 논리싸움과 비슷했다. 로티가 어렸을 때 플라톤을 읽으며 꾸었던 꿈, 현자가 되어서 세상의 악을 응징하고 정의를 실현하며 삶의 의미를 찾겠다는 꿈과는 전혀 관계가 없었던 것이다. 로티는 듀이, 헤겔, 니체, 프로이트, 데리다, 하버마스, 가다머 등 분석철학자들은 쳐다보지도 않는 독서를 하면서, 자신의 이론을 만들어 나간다.

 

이유선은 로티의 대표작으로『우연성, 아이러니, 연대성』를 꼽는데, 이 책은 소설 작품을 분석하면서 철학 얘기를 하는 파격적인 서술로 쓰인 책이다. 유럽에서는 아니겠지만, 영미 분석철학의 전통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글쓰기 방식이다. 이 책의 핵심 주제가 바로 ‘자유주의 아이러니스트’ 인데, 여기서 로티는 문학과 철학의 경계를 완전히 허물어뜨린다. 로티는 철학자들은 진리에 대한 강박을 갖고 있다고 비판한다. 자신이 진리를 발견해야 한다는 욕망, 헤겔이 그 대표자로 『정신현상학』을 통해 헤겔은 철학의 종결을 꿈꾸었던 것이다. 이에 반해 니체는 위버멘쉬를 통해 진리의 세계는 없다고 선언한다. 초인은 영원불멸의 진리를 깨달은 인간이 아니라, 가변적이고 일시적이고 우연적이고 상대적인 것을 긍정하는 개념이다. 이 세상 밖에는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이 세상을 긍정하는, 절대 긍정이 바로 니체의 사상이다. 니체에게 이런 초인의 모델은 시인이다. 왜냐하면 시인은 바로 자율성을 획득한 인간이기 때문이다. 시인의 목표는 진리가 아니다. 시인은 자기를 서술해 줄 아름다운 시를 한 편 씀으로써 자기 삶을 긍정할 수 있는 힘을 얻는 자이다.

 

로티는 이런 시인을 아이러니스트라고 부른다. ‘시인의 불안’이 그를 아이러니스트로 만든다. 시인은 자신이 누군가의 시를 복제한 것이 아닐까 하는 불안 속에 산다. 시의 복제는 삶의 복제이다. ‘내가 혹시 누군가의 복제품이 아닐까?’ 하며 끊임없이 불안해하는 것이 아이러니스트이다. 그러니 인간은 모두 아이러니스트인 것이다. 로티는 프루스트를 가장 뛰어난 아이러니스트로 평가하는데, 『잃어버린 시절을 찾아서』는 자기 자신의 어휘로, 자기 자신을 재 서술한 것이다. 프루스트는 이 소설 작업을 통해 비로소 프루스트가 된 것이다. 이 책이 없었다면, 프루스트는 프루스트가 될 수 없었다. 결국 우리는 세계 밖의 어떤 진리에 의존하지 않고, 자기 재서술을 통해 자신을 긍정함으로써 아이러니스트가 되어야 한다는 것.

 

그런데 아이러니스트가 되는 것은 사적인 욕망이다. 아이러니스트가 된다고 해서 훌륭한 인간이 되는 것은 아니다. 오타쿠도 아이러니스트이다. 로티는 여기서 아이러니스트는 동시에 ‘타자의 고통에 대한 감수성을 키우는 자유주의자’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로티가 말하는 자유주의의 의미는 굉장히 넓어요. 어떻게 하면 사회적 약자, 고통당하는 사람들을 위해서 그 고통을 없앨 수 있는 실천을 하는가, 이게 자유주의자의 골자입니다. 자유주의자를 판별하는 기준은 타자의 고통에 대한 감수성입니다. 아이러니스트의 핵심은 자기완성에 대한 욕망이에요. 근데 이 두 가지는 사실 그렇게 자동적으로 연결되지 않습니다. p252」

 

여기서 로티는 혹은 이유선은 무엇이 고통이고 무엇이 잔인한 것인가는 상식적으로 알 수 있다고 말한다. 철학적 정초가 필요한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오히려 철학적 정초를 찾기 시작하는 순간 실천과는 멀어진다고 주장한다. 로티에 따르면 자유주의적 실천은 잘못된 제도와 관습에 의해 고통당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제도와 관습을 고쳐나감으로써 고통을 줄여나가는 것이다. 무엇이 우리사회의 문제인가는 어려운 것이 아니라 누구나 아는 것이니까. 그런데 정말 그런가?

 

8월 16일 프란치스코 교황이 집전하는 시복식을 중계방송으로 보았다. 신자가 아닌데도 교황의 인자하고 환한 얼굴에 가슴이 울컥거렸다. 아무것도 곧바로 해결되지 않겠지만, 유민이 아빠는, 승현이 아버지는, 그리고 세월호의 가족들은 교황과의 그 공감각만으로도 마음의 응어리가 조금은 풀렸을 것 같다. ‘타자의 고통에 대한 감수성’, 그 기준으로만 말하자면 교황은 훌륭한 자유주의자이다. 그런데 이런 공감각은 누구에게나 자연스럽고 상식적인 감성인가? 세월호 참사의 파국적 전개 과정을 보면, 회의하지 않을 수 없다. 눈앞에서 죽어가는 학생들 그 타인의 고통 앞에서, 해경 구조대 123정은 ‘당황해서 깜박 잊고’ 선내 진입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 선내 진입을 하지 않은 것도 기가 막히지만, 변명보다 조롱처럼 들리는 ‘어머 깜박, sorry’ 에는 더 이상 할 말이 없다. 실종자를 바다에 두고도 경제를 위해 이제 그만하자던 대통령의 말은 벌써 언제였는지도 가뭇하다. 거기에 국민들은 ‘7.30 재보궐선거 새누리당 압승’ 으로 화답했다. 15곳의 재보궐 선거 지역민들이 별난 괴물이거나 냉혈한이 아닌 바에야, 그것이 기껏해야 수천에서 수만 정도의 여론조사보다는 훨씬 정확한 민심일 것이다. 우리 국민들은 유달리 타자의 고통에 대한 감수성이 떨어지는 인간들인가?

 

그것이 아니라면 타자의 고통에 대한 감수성은 단순하고 직관적인 감각에 불과한 것이 아니지 않을까? ‘무엇이 우리 사회의 문제인가?’는 어려운 것이 아닌 것이 아니라, 오히려 지극히 복잡한 것이 아닌가? 물론 세월호 사건이 발생했을 초기에, 우리 국민들은 앞 다투어 분향소로 몰려갔다. 40일 만에 안산 합동분향소는 55만 명이 넘게 조문했다는 기사가 나왔다. 유명 연예인들도 수억씩 쾌척했다. 그러나 딱 거기까지였다. 눈물은 흘려줄 수 있고, 돈도 던져줄 수 있지만, 거기까지였다. 그러나 타인의 고통은 감각적인 눈물과 돈 몇 푼에 치유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고통은 눈물과 감상적 동정이 끝난 자리에서 비로소 시작된다. 그러므로 타인의 고통에 대한 감수성은 나의 즉각적인 감성이 사라진 자리에서, 그때서야 진정으로 요구되는 것이다. 세월호 유가족들이 바라는 것은 눈물이 아니라 진상 규명이며, 돈이 아니라 재발방지 대책이다. 유민이 아빠가 목숨을 걸고 단식하는 것도, 승현이 아버지가 십자가를 지고 장정을 떠났던 것도, 그것들 없이는 고통을 치유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타인의 고통에 대한 감수성’ 이 우리에게 벌써부터 사라져 버린 이유는 무엇인가? 무엇이 우리사회에서 이 문제를 해결하는 것을 가로막고 있는가? 이유선에 의하면 로티는 ‘타자의 고통에 대한 감수성을 키우는 자유주의자’를 역설했다. 그러나 이유선의 강의에는 어떻게 그 감수성을 ‘키울 수’ 있는가에 대한 언급은 없다. 그건 고통이 무엇인가를 아는 것만큼이나 자연스럽게 획득될 수 있다는 것인가? 그러나 정작 우리들은 세월호 유가족의 진정한 고통이 무엇인가에 대해서조차 공감하지 못하고 있다. 고통에의 공감이란 단순히 눈물과 동의어가 아니기 때문이다. 고통에 대한 공감을 위해서는 먼저 관점에 대한 공감이 필요한 것은 아닐까? 이것이 내가 로티의 ‘자유주의 아이러니스트’에 충분히 만족하지 못하는 이유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