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만적인 앨리스씨』를 읽고 《이동진의 빨간 책방》을 들었다. 『야만적인 앨리스씨』와『파씨의 입문』의 작가 황정은이 직접 나왔다. 약한 허스키에 성큼성큼한 그녀의 목소리가 작품보다 나는 더 매력적이었다. 상기된 두 호스트는 작품의 내용보다 작가와 그 주변 이야기 그리고 작품의 형식에 열을 올렸다. 사실 내용은 이렇게 말해도 된다면, 흔하다. 《그것이 알고 싶다》나 《궁금한 이야기 Y》에는 훨씬 끔찍하고 잔혹한 아동살해, 아동학대 사건들이 많다. 그것이 우리가 사는 세상이다.
물론 작가는 폭력을 고발하려는 것이 아니다. 아이가 어떻게 폭력을 내화하고 폭력 속에 매몰되는지 아니면 폭력에 맞설 수 있는지 질문하며, 독자를 그 물음 속으로 끌어 들인다. ‘그대는 어디까지 왔나.’ 폭력은 특히 가정폭력은 인간을 파괴한다. 어린 피해자가 불가항력일 때 당연히 그렇지만, 피해자가 분연히 주먹을 쥐고 돌아서 그 폭력을 되돌릴 때 더욱 그렇다. 존속상해는 근친상간에 못지않은 금기이다. 오이디푸스는 그러므로 세계사에 가장 비참하고 비극적인 인물이 되었다. 아버지를 향한 무자비한 발길질로 파괴되는 것은 아버지의 육체가 아니라 발길질하는 자식의 영혼이다. 『야만적인 앨리스씨』는 차마 발길질 대신 씨발년이라는 욕설로 이 되갚음의 폭력을 승화한다. 황정은은 백번이 넘는 ‘씨발’ 질에도 불구하고, 앨리시어를 극한으로 몰고 가지는 못한다. 차라리 드라마 <괜찮아, 사랑이야>가 더 독했다.
『야만적인 앨리스씨』를 읽고 특이했던 것은 작품의 시점이었다. 나는 빨간책방의 수다스런 호스트들이 굉장히 파고들 줄 알았는데, 생각만큼 호들갑을 떨지는 않았다. 작가 황정은은 무심하게 그렇게 써야할 것 같아서 그랬단다. 이 책은 전체적으로는 3인칭 시점으로 쓰여 있다. 그런데 사실은 1인칭 이다. 앨리시어는~, 앨리시어는~ 하고 앨리시어를 따라가는 제3의 시선이 말을 하지만, 이 삼자는 사실 앨리시어 자신이다. 이 책의 첫 머리에 앨리시어의 두 인칭으로의 분리가 마치 회화적 아니 영상처럼 표현된다. 처음에는 몰랐는데, 돌이켜 보니 그렇다.
내 이름은 앨리시어. 여장 부랑자로 사거리에 서 있다.
그대는 어디까지 왔나. 그대를 찾아 머리를 기울여 본다. 부채꼴로 펼쳐진 거리의 한쪽 모퉁이에서 다른 쪽 모퉁이까지 천천히 훑어본다. 고깃집과 카페와 각종 대리점과 백화점이 있다. 사거리 중앙엔 이 지점에 무언가 묻혔다는 표식처럼 열십자로 횡단보도가 그려져 있다. 신호가 바뀌면 사방에서 사방으로 사람들이 길을 건널 것이다. 앨리시어는 그들 가운데서 기다린다. 앨리시어의 복장은 완벽하다.
첫째 줄의 두 문장은 1인칭 앨리시어다. 그리고 둘째 줄부터 앨리시어는 3인칭으로 서서히 분리되어 마침내 여섯째 줄에 이르면 완벽하게 3인칭으로 변해있다. 마치 몸에서 스르륵 빠져나온 영혼이 1인칭 전지적 시점으로, 횡단보도 위의 3인칭 육신을 바라보고 있는 것처럼, 앨리시어의 영혼과 육체가 1인칭과 3인칭으로 나누어진다. 그리고 《이동진의 빨간 책방》에 의하면, 여기에 또 하나의 인칭이 호출되고 있다. - ‘그대는 어디까지 왔나.’ 그대, 2인칭 독자를 향한 1인칭 앨리시어의 부름이다. 단순히 보자면 이 책은 앨리시어가 독자에게 하는 말이자 추궁이다. 나는 이렇게 살았는데, 당신들은 무엇을 했나!
시점의 분리라는 특이한 서술법을 나는 처음 보았는데, 요즘 문단에서 드물지 않은 기법인지 굉장히 독창적인지 것인지 모르겠다. 여기서 내가 떠올린 것은 ‘발화행위의 주체’와 ‘발화 내용의 주체’ 혹은 ‘언표행위의 주체’와 ‘언표된 주체’ 의 분리이다. 말하자면 1인칭 앨리시어는 발화행위의 주체이고 3인칭 앨리시어는 발화 내용의 주체다.
‘나는 밥을 먹고 있다’ 라는 단순한 문장에서도 주체의 분리를 볼 수 있다. 밥을 먹고 있는 ‘나’는 발화 내용의 주체다. 이 말을 하는 나는 발화행위의 주체다. 이 두 주체가 하나인 것 같지만, 사실 주체는 말을 통해 분열된다. 주체의 분열은 흔히 거짓말쟁이의 역설이라고 하는 것에서 분명히 드러난다.
‘나는 거짓말쟁이다.’ 발화내용이 참이라고 생각해보자. 그러면 발화내용의 주체는 거짓말쟁이다. 이번에는 발화행위의 차원에서 들여다보자. 나는 거짓말쟁이라는 것은 참이므로, 발화행위의 주체인 나는 진실을 말했다. 발화행위의 주체는 거짓말쟁이가 아니다. 발화내용의 주체와 발화행위의 주체는 ‘나는 거짓말쟁이다’는 말을 통해서 뚜렷한 분열을 드러내고 있다. 진실은 어느 쪽에 있을까? 이번에는 발화내용이 거짓이라고 가정하자. 이 말은 발화행위의 주체가 거짓말쟁이라는 의미다. 이 문장이 거짓이므로, 문장 속의 주어 즉 발화내용의 주체는 거짓말쟁이가 아니다. 결국 누가 되었건 둘 중 하나는 거짓말쟁이고 나머지 하나는 거짓말쟁이가 아니다. 주체는 이렇게 거짓말하는 주체와 거짓말 하지 않는 주체로 분리된다. “발화행위의 나는 결코 발화내용의 나가 아니다.”
조금 더 흥미로운 사례는 가장 능란한 사기꾼의 수법에 있다. 깔끔한 사기꾼은 엄청난 거짓말로 사기를 치는 것이 아니라, 진실을 말함으로써 사기를 친다. 이 사기의 성공은 사실 사기꾼의 혀가 아니라 상대의 마음에 달려 있다. 속지 않으려는 자가 더 쉽게 속아 넘어가기 마련이다. 의심이 많은 사람은 상대의 말을 거꾸로 받아들인다. 탈무드에 이런 대화가 있다.
“네가 가는 곳은 크라코비인데, 네가 렘베르크로 가고 있다고 내가 믿도록, 크라코비로 간다고 나에게 말하면서, 왜 너는 거짓말을 하니?”
크라코비로 간다고 한 ‘너’의 말은 진실이다. 즉 발화내용의 주체인 너는 진실을 말했다. 그런데 발화행위의 차원에서 ‘너’는 거짓말을 한 것이다. 왜냐하면 크라코비로 간다고 하면 렘베르크로 간다고 내가 믿을 것임을 ‘너’는 알고 있기 때문이다. 즉 발화행위의 주체인 너는 실제로는 거짓말을 했다.
우리에게도 익숙한 이야기가 있다. 청개구리 동화다. 엄마 청개구리는 뭐든지 반대로만 하는 아기 청개구리에게 “내가 죽거든 개울가에 묻어라”고 말했다. 발화내용의 주체로서의 엄마 청개구리는 개울가에 묻어달라고 했지만, 발화행위의 주체로서의 엄마 청개구리의 욕망은 개울가에 절대로 묻지 말라는 것이다.
욕망이 발화 ‘행위’ 속에 드러나는 것은 말 즉 발화 ‘내용’이 주체가 원하는 것을 제대로 담을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종종 느끼는, 말로 표현할 수 없다는 답답함은 말이 욕망을 온전히 담아내지 못함을 우리가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을 멋지게 패러디한 것이 “남자에게 좋은데, 정말 좋은데, 뭐라고 표현할 빵법이 없네~” 라는 광고가 아닐까. 표면적으로는 광고규제에 대한 우회적 패러디이지만, 실제로는 언어학적 그리고 정신분석학적 주체의 분리를 훌륭히 은유하고 있다. 경상도 사투리가 고백하는 발화내용의 실패는 발화행위의 차원에서 제품의 특징을 강타하며, 성공한 발화(광고)의 전형이 되었다.
발화내용과 발화행위의 차이는 언어학적인 구분이다.
「방브니스트 같은 구조주의 언어학자들 사이에서 발화 행위énonciation 차원과 발화 내용énoncé의 차원을 구분하는 것은 일반적 관례가 되어 있다. 발화 내용 차원의 담론에서 항상 문제가 되는 것은 발화의 수신자가 품게 되는 의문, 즉 발화의 송신자가 전달하는 표면적 발화 내용 너머에 ‘그는 과연 나에게서 무엇을 원하는가 Che vuoi?’와 같은 의문이다. 다시 말해서 발화 행위 차원의 담론에 대한 질문이다. 이것은 언어 행위 속에 내재한 결핍으로서의 욕망의 존재를 말해준다. 언어 행위 속에는 딱히 구체적으로 요구 조건으로는 포착할 수 없는 욕망의 그림자가 어른거린다. <라캉 : 재현과 그 불만(이하 인용은 모두 이 책)> p135~6 」
라캉은 언어학적 문제를 정신분석학으로 끌어왔다. 라캉의 후기구조주의적 정신분석학의 특징이 언어학적 관점에서 정신분석학을 읽고 정신분석학적 관점에서 언어학을 읽은 결과이다.
「언어학에서 말하는 담론이 갖는 두 측면, 즉 발화내용과 발화행위의 구별은 의식적 담론과 무의식적 담론의 구별에 효과적으로 적용할 수 있다. 라캉은 이 구분법을 ‘말하여진 것 let dit’ 과 ‘말하는 것 le dire’ 사이의 차이로 설명하고, 주체의 진실은 ‘반쯤 말하여진 것 un mi-dit’에서 드러난다고 한다. p91 」
정신분석에서 주체는 언어를 통해 형성된다. 언어의 세계, 상징계로 들어와야만 주체가 탄생한다. 언어의 세계를 거부하는 사람을 우리는 정신병자라고 부른다. 언어의 세계는 정상인이 되기 위해 받아들여야만 하는 강요된 선택이다. 그런데 이 선택에서 주체는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 한조각의 대상a, 주체의 진실이다. 의식의 주체에게 이 진실은 억압되는데, 억압된 것은 반드시 회귀한다는 라캉의 명제에 따라 상실된 진실은 무의식의 주체를 통해 얼핏얼핏 그 모습을 드러낸다.
「그렇다면 이 존재의 진실은 어떻게 표현되는가. 그것은 언어의 음성적 발성, 즉 발화행위를 통해서 표현된다. 그러므로 무의식의 주체, 욕망의 주체는 바로 발화 행위의 주체의 차원과 연결된다. 라캉의 말대로 “대타자의 영역에 위치하기 위해서 무의식의 존재는 담론의 발화 행위 속에서 찾아져야 한다.” 다시 말해서, 무의식은 ‘말하는’ 발화 행위 속에서 드러나는 반면, ‘말하여진’ 발화 내용 속에서는 자신을 은폐한다. 주체의 진리, 무의식의 목소리가 들리게 하기 위한 주체의 전략은 그것을 반쯤 말하는 것이다 .p91~2 」
다시 ‘나는 밥을 먹고 있다’로 돌아가 보자. 밥을 먹고 있는 ‘나’와 그 말을 하는 ‘나’는 다르다. 발화내용의 주체와 발화행위의 주체가 분열된 것인데, 라캉에 따르면 진정한 주체는 그 틈바구니 속에서 순간적으로 나타났다가 사라진다.
앨리시어는 비실비실 웃으며 그의 뒤를 따라간다. 가로등 불빛을 벗어나 어둠 속으로 들어가고 이제 나는 그들의 뒷모습을 놓친 채로 밤 속에 남는다.
『야만적인 앨리스씨』에서도 딱 다시 한 번 불쑥 1인칭 앨리시어가 나타난다. 1인칭 앨리시어는 책 첫 문장에서 한 번 나왔다 사라지고 앨리시어는 내내 3인칭으로 서술되었다. 그런데 1인칭 앨리시어 나는 3인칭 앨리시어 나를 놓치고 유령처럼 모습을 드러냈다. 사실 그때서야 나(이 글을 쓰는 말리;;)는 이 이야기의 화자가 다른 누구도 아닌 앨리시어 자신인 것을 깨달았다.
왜 여기서 1인칭 앨리스는 갑자기 모습을 드러내야 했던 걸까? 이 무의식의 주체는 어떤 욕망의 주체인가? 여장을 한 부랑자 앨리시어는 끊임없이 거리를 배회한다. 자신을 현시한다. 여장과 악취로 사람들의 눈과 코에 들러붙는다.
그대의 무자비한 점막에 앨리시어는 도꼬마리처럼 달라붙는다. 갈고리 같은 작은 가시로 진하게 들러붙는다. 앨리시어는 그렇게 하려고 존재한다. 다른 이유는 없다.
발화행위의 주체, 1인칭 앨리시어의 욕망은 우리의 주의를 끄는 것, 우리가 앨리시어로부터 벗어나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여장으로든 악취로든 혹은 아직도 떨어지고만 있는 잔혹 동화 속의 소년 앨리스로든. 그러고도 불안한 앨리시어의 욕망은 중간 중간 우리를 호출하며 확인한다.- ‘그대는 어디까지 왔나.’ 나를 놓치지는 않았나, 나를 잊은 것은 아닌가하는 앨리시어의 불안함. 그 불안함은 3인칭 앨리시어의 뒷모습을 놓치고 어둠 속에 남겨졌을 때 아마도 극에 달한 것은 아니었을까. 앨리시어도 앨리시어를 의식에서 놓아버리는데, 우리들은, 그대들은 정말 앨리시어를 놓치고 있지 않은가, 그 두려움이 3인칭 앨리시어의 뒤에 감추고 있던 1인칭 앨리시어의 얼굴을 드러내게 한 것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