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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의 에스프레소 - 위대한 철학자 34인의 일상과 사상
빌헬름 바이셰델 지음, 안인희 옮김 / 프라하 / 2011년 8월
평점 :
절판


2012년 1월 12일, 카페소모임 후 쓴 글입니다.

 

지브롤터님의 발제 글을 읽는데, 아무 기억이 나지 않았다. 이것이 진짜 내가 읽었던 책인가 싶어서, 다시 <철학의 에스프레소>를 빌려왔다. 사실 처음부터 중세 철학자들에겐 별 관심이 없었다. 아우구스티누스와 토마스 아퀴나스를 제외하면 이른바 ‘듣보잡’ 이어서, 왜 이렇게 중세 철학자를 많이 넣었냐고 바이셰델이란 저자에게 투덜대기도 했다. 그런데 “타인의 결점은 단지 우리 자신의 관점의 왜곡을 객관화한 것”이라는 말이 있듯이, 듣보잡은 그 대상의 속성이 아니라, 차라리 내가 듣고 보는 것에 게을렀다는 증거라 할 수 있다.

  어쨌거나 중세 철학을 간단히 암흑기로 치부해 버리게 된 더 큰 이유는 나를 만들어 온 환경에 있다. ‘신’이란 존재와는 전혀 역사적 ·정서적 교감이 없는 환경에서 자라나, 도대체 신이 내 삶의 한 귀퉁이에조차 들어 와 본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서양 문학이나 철학이, 혹은 신앙인들이 신을 두고 하는 고민에 현실감을 느낄 수가 없었다. 그런 까닭에 고민을 말하자면, 오히려 신을 고민할 수 없는 것이 고민이다. 숱한 문학작품 속의 주인공들이 신에게서 벗어나기 위해 혹은 신으로 되돌아가기 위해 고뇌하고 속죄하고 울부짖는 그 격정들이 내겐 너무도 덤덤하고 평면적이고 기이하기까지 하다. 주인공들의 의식을 꽉 붙들고 놓아주지 않는 신들의 존재가 내게는 언제나 수수께끼라고 할 수 있다.

  신에 대한 무지가, 사실은 지知의 차원이 아니겠지만, 여하튼 그 무지가 장애물로 느껴질 때면 간혹 성경을 뒤적이기도 했다. 처음에는 끝없이 이어지는 누가 누구를 낳고에 걸려서 덮어버리고, 또 어떤 때는 너무나도 잔인하고 독선적인 신의 모습에 놀라서 덮고, 또 어떤 때는 행하신 기적이 도저히 믿기지 않아서 덮어버리고를 반복하면서 이십여 년 간 마음속에만 있는 성경을 여전히 얼마 읽어내지 못하고 있다. 게다가 최근에 얻어 들은 새로운 정보는 더욱 절망적인데, 신은 보여서 믿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믿어야만 비로소 그 모습을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신을 보기 위해서는 혹은 알기 위해서는 믿어야 하는데, 그럼 믿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한다는 것인지...내게는 꽉 닫힌 원환이 아닐 수 없다. 신의 존재가 보이거나 혹은 이해되거나 해야 믿을 수 있는 것이지 어떻게 덮어 놓고 믿을 수가 있는 것인지, 누가 좀 가르쳐 주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나도 신의 존재가 절실히 필요해 질 때가 있기 때문이다. 이 미칠 것 같은 불안이 나를 덮쳐올 때 모든 것을 믿고 의지할 수 있는 신이 있다면 그 얼마나 좋을 것인가....

 

 

  중세 철학에는 신의 존재 증명이라는 주제가 있다. 다시 <철학의 에스프레소>를 읽으며 나는 일단 그 방법을 찾아보기로 했다. 여섯 명의 철학자 각각이 어떤 사상을 가졌나를 정확히 아는 것 보다 그것이 내게는 더욱 흥미롭기 때문이다. 그들의 증명에 동의할 수 있다면 내게도 드디어 신을 가질 방법이 생길 터이다.

  그런데 이 여섯 명의 철학자가 모두 신의 존재를 증명하려고 하지는 않았다. 어떤 이에게는 그것이 전혀 필요하지 않았을 뿐더러 그런 발상 자체가 신에 대한 모독으로 간주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것은 아마도 내가 진짜로 존재하는 것이 맞나 하는 회의를 데카르트 이전에는 할 수 없었던 것처럼, 어떤 시점 이전에는 그런 물음 자체를 의식에 떠올릴 수조차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것은 너무나 자명한 진리였을 테니 말이다. 그러고 보면 철학의 역사는 이전 시대가 자명한 진리로 전제한 것들에 대한 의심과 질문의 역사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이전 시대에는 당연하다고 전제했던 신을 두고 정말로 신은 존재하는 것인가?, 신의 모습은 어떠한가? 란 질문을 하고, 또 그 다음 시대는 한 번도 의심의 대상이 되지 않았던 사물을 두고 저것이 진짜 존재하는가? 그걸 보고 있는 나는 또 존재하는가? 란 의심을 하고, 최근에는 내가 하는 말의 주인이 진짜 나인가 아니면 거꾸로 언어가 나를 통해 말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질문까지 하고 있다. 그러나 이 질문들은 여전히 진행 중인데, 철학이 내놓은 답들이 그렇게 완벽하지는 못했던가 보다. 어떤 시대에는 정답으로 간주되었던 것이 시대가 바뀌면서 오답처리 되기도 하고, 폐기되었던 오답들이 새로운 답의 단서로 다시 살아나기도 하니 말이다. 플라톤과 데카르트, 스피노자는 그렇게 지금도 되풀이 되고 있다. 칸트와 헤겔도. 그래서 이들을 읽는 것은 과거의 윤곽을 그리기 위한 것일 뿐 아니라 현재의 문제를 풀기 위한 실마리를 찾기 위해서이기도 하다.

 

 

 

 

  인간적인 방탕함에 흠뻑 취했다가 뒷날 참회하고 훌륭한 신학 철학자가 되었다는 아우구스티누스는 그의 삶에 딱 접합한 방식인, 인간적 체험으로부터, 신을 증명해냈다고 한다. 그의 증명이란 것은 이렇다.

  “인간은 자신을 들여다보고 참이 있음을 안다. 그렇다면 이성이 참 안에 있는지 측정할 수 있는 척도도 있어야 한다. 이성을 판단하는 척도는 이성보다 더 높은 것이어야 하며, 이성보다 높은 것은 신이다. 그러므로 참의 척도인 신이 존재한다고 결론을 내린다.”

  이것을 증명이라고 할 수 있는지 참으로 의심스럽지만, 그 시대에는 아마 이런 증명법도 통용되었던가 보다. 더 높은 것, 인간이 알 수 없는 것의 존재는 곧바로 신의 존재에 대한 증거가 된다는 식이다. 그런데 같은 책에 이런 내용이 있다.

  “신에 대한 철학적 진술에 이를 수 있는 여러 가능성들에는, 인간과 나머지 현실이 신에 의해 창조되었다는 생각이 그 토대가 된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이것을 의심해본 적이 없다. 그래서 그는 그 근거를 제시할 필요도 없다고 생각했다. 신은 세계의 창조주이고, 세계는 신의 피조물이라는 생각은 아우구스티누스의 신학적 사유뿐만 아니라 철학적 사유의 토대를 이루는 제1전제이다.”

  뭔가 모순적이다. 사유의 제1전제를 그는 왜 다시 증명하려 했던 걸까? 앞 뒤 문맥을 이어보면 신의 존재는 근거를 제시할 필요도 없는 것이지만, 그는 또한 이성으로도 신의 존재를 증명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자 했던 것 같다. 그 이성이란 것이 천 오백년도 더 지난 후세의, 기독 사상의 영향 아래 있지 않은 일반인의 이성 개념과는 매우 다른 것 같지만 말이다. 어쨌든 아우구스티누스는 내게 신에 이르는 비법을 알려 주지 못했다.

 

 

  다음, 제목이 아예 ‘신의 증명’ 인 안셀무스가 있다. 그런데 조금 불길하게도 먼저 이런 문장과 만나게 된다.

  “신을 인식하는 일은 중립적인 앎이 아니고 신에 대해 무한한 관심을 가진 통찰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러한 인식은 신에 대한 사랑을 전제로 요구한다. 그리고 이 사랑이 바로 믿음이다. 그래서 안셀무스는 이렇게 말한다. ” 내가 믿지 않는다면 나는 절대로 이해하지 못한다.” ”

  믿음과 앎의 문제에서 믿음이 앞선다는 이 원칙은 현대에 급조된 것이 아니라 천년 이상의 역사를 가진 오~래된 명제였던 것이다. 어쨌든 이것과는 별도로 안셀무스는 “진짜로 전제가 없는 출발점이 될 증명 근거를 찾았다”고 하는데, 나에게는 유달리 고마운 일이다. 순수한 신의 개념 안에서 해냈다는 이 증명은 이렇다.

  “모든 인간은 바보이거나 믿지 않는 사람조차 신을 ‘그보다 더 큰 것을 생각할 수 없는 어떤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니까 인간의 정신에는 절대적으로 가장 큰 것인 신의 이념이 존재한다. 여기서 크기는 양적인 관계가 아니라 존재가능성들 중에서 가장 큰 풍부함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 결론은 다음과 같다. 오성에 신이 존재한다면 현실로도 존재하는 게 분명하다. 오성에만 존재하는 것이 오성과 현실에 존재하는 것보다 분명 더 작기 때문이다. 머릿속에만 있는 신에는 완전성, 곧 존재가 결핍되어 있다. 생각할 수 있는 한 가장 위대한 것으로서의 신은 현실적으로도 있지 않으면 안 된다.”

  아마 중세에는 절대적으로 가장 큰 것을 신 이외의 개념으로는 상상할 수 없었나보다. 나는 ‘더 큰 것을 생각할 수 없이 큰 것’은 당연히 신이라는 생각자체를 상상할 수 없는데 말이다. 그리고 또 하나 재미있는 것은, 신은 가장 큰 어떤 것이기 때문에 관념으로 존재한다면 당연히 현실로도 존재해야 한다는 발상이다. 관념만으로 있는 것 보다는 관념+현실로 있는 것이 더 큰 것이니까, 무엇보다 더 큰 신은 현실로도 존재해야 한다는 증명법이다. 이 방법도 그다지 그럴듯해 보이지 않는다. 일단 가장 높고 큰 것에는 무조건 신의 이름을 붙인다는 전제에 동의하기가 힘들다.

 

 

  이성과 신앙이 각자 고유한 영역을 가지고 있다는, 당시로서는 매우 급진적인 사상을 펼쳤던 토마스 아퀴나스에게 다시 해답을 구해보아야겠다. 그는 “신앙은 초자연적인 참과 관계한다. 세속적인 것들을 인식하는 분야에서 신앙은 직접적으로는 아무 관계도 갖지 않는다. 그에 반해 자연적인 이성은 무엇보다도 세계의 현실을 지향한다. 이 분야에서는 이성적으로 일이 진행되어야 한다.” 는 생각을 가졌다. 그러나 그 역시 신학자였다.

  “예를 들어서 존재하는 모든 것은 그것이 존재하는 원인을 가진다는 것을 우리는 알 수 있다고 토마스는 말한다. 이 원인은 다시 더 높은 원인에서 기원한다. 그러나 이런 원인의 사슬을 무한히 거슬러 올라갈 수는 없다. 그러니까 최초의 원인이 있음이 분명하고 이 최초의 원인이 바로 신이라는 것이다.”

  ‘최초의 원인’에 관한 탐구는 지금도 진행 중인 걸로 나는 알고 있다. 우주는 빅뱅과 함께 시작되었다지만, 여전히 그 최초의 운동, 빅뱅이 일어난 원인이 무엇인지는 모르고 있다. 새로운 해답이 이미 제시되었는지 여부를 확신할 수는 없지만 내가 알고 있는 한, 혹은 지식 검색이 찾을 수 있는 한, 여러 가지 의견이 분분하기만 할 뿐 정설로 인정되는 것은 없는 것 같다. 어찌되었든 토마스 아퀴나스가 제기했던 ‘최초의 원인’이라는 질문은 정작 그 자신의 명쾌한 해답과는 상관없이 지금도 과학자들의 골칫거리이자 탐구욕의 대상이다. 그러나 ‘이성의 세례’를 받았다는 토마스 아퀴나스 역시 ‘말 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 하는 대신 신의 이름을 붙여 주었다. 여기서 잠깐 고백하고 넘어갈 것이 있다. ‘말 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 는 우리가 제일 나중에 공부할 비트켄쉬타인이라는 철학자가 언명한 유명한 말이다. 그런데 나는 이 말 이외에 비트켄쉬타인에 대해 아는 바가 없고, 이 말 역시 어떤 맥락에서 쓰였는지 읽어 본 적이 없다. 단지 무척 멋지게 들리는 말이라는 것과 어떤 사람들은 얼토당토않게 이 말을 오용한다는 것이다. 진실을 말하면 무슨 불이익을 당할지 몰라 침묵하는, 인정상 충분히 공감은 가지만 결코 자랑스럽지는 않을 그런 상황에다가 이 말을 떡 갖다 붙이고 합리화하는 것을 볼 때 진짜 욕이 치민다. 그리고 놀란다. 나 역시 여기저기서 주워 읽은 것들을 이런 식으로 인용하고 있지는 않나 하는 불안 때문이다. 이 모임에 대한 나의 작은 소망 중 하나는 이런 오류를 저지르지 않을 지식을 갖는 것이다. 누구나 인용할 수 있고 또 흔히 인용하는 유명한 명제들을 제대로 이해하는 것 혹은 적어도 엉뚱하게 오독하지 않는 것. 문제는 간단할 지도 모른다. 모르면 안 쓰면 그만이다. 그런데도 사람이란 엉뚱한 욕망에 시달리는 허영의 동물인지, 멋진 건 쓰고 싶고 맛있는 건 먹고 싶어진다. 욕망을 탓하지 말고, 그 욕망에 제대로 된 길을 터주는 것이 좋을 것 같단 생각을 한다. 어쨌건 고백의 요지는 말하자면, 비트켄쉬타인에 대한 나의 인용 역시 충분히 의심스럽다는 것이다...;; 더불어 다시 결론을 내리자면, 토마스 아퀴나스의 증명 역시 내게는 신의 존재를 입증하기에 미흡한 것으로 보인다.

 

 

 

  이 세 명의 철학자는 신을 훌륭하게 입증해 냈지만, 내게는 여전히 갇힌 원환처럼 보인다. 믿어야 보이고, 보이니 더욱 믿는다. 그것의 전제는 인간의 인식으로 알 수 없는 것, 존재하는 모든 것 보다 더 높은 것 혹은 더 큰 것, 이런 것들에 대한 개념적 필요성이 곧 신의 존재를 증거하고 있다는 것이다. 필요가 곧 존재를 입증한다는 사상이 아무래도 나는 납득하기 힘들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중세적 '믿음'은 오늘날까지 폐기되지 않고 있다. 아니 오히려 그 필요성이 더욱 절실해 지고 있기까지 하다.

  어느 책에서 읽은 발터 벤야민의 「역사철학테제」제 1번에는 이런 말이 있다. “ ... 역사적 유물론이라는 꼭두각시는 언제나 승리한다. 역사적 유물론이 신학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인다면, 누구와 싸워도 그 게임은 승산이 있다. 오늘날 신학은 알다시피 보기 흉할 정도로 비쩍 마른 터라,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게 해야 한다.” 옛날에 체스 명수인 꼭두각시가 있었는데, 사실은 탁자 안에 숨은 체스의 달인 곱사등이 난쟁이가 손으로 끈을 조종해서 체스를 둔 것이었다는 얘기에 신학과 역사적 유물론을 빗댄 것이라고 한다. 벤야민은 또한 신학 없이는 혁명이 승리할 수 없다고도 했다. 언뜻 보아 상극일 것 같은 역사적 유물론과 신학이 공생의 관계에 있다는 말이 이상스럽게 들린다. 그런데 여기 벤야민의 이 테제를 다시 뒤집어 천명한 사람이 있다. “신학이라는 꼭두각시는 언제나 승리한다. 신학이 역사적 유물론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인다면, 누구와 싸워도 그 게임은 승산이 있다. 오늘날 역사적 유물론은 알다시피 보기 흉할 정도로 비쩍 마른 터라,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게 해야 한다.” 이 역전은 무슨 의미일까? 나는 정확한 답을 모른다. 내 나름대로의 개략적인 답에도 자신이 없다. 좀 더 많이 공부하게 되면 좀 더 확실한 답을 만들 수 있지 않을까 헤아리고 있을 뿐이다. 여기서 잠깐 진중권의 글 한 대목을 소개하는 걸로 얼마간 답을 대신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진중권의 <아이콘>이란 책은 ‘진중권의 철학 매뉴얼’이라는 소제목을 달고 있는데 현대 철학자들의 사상을 진중권식 사회비평을 통해 소개하고 비판하는 글이다. 어떤 글들은 솔직히 내가 이해하고 있는 철학자의 모습과 조금씩 엇나 있어 당황스럽기는 하지만, 일단 그는 진중권이 아닌가! 여하튼 진중권이 발터 벤야민의 「역사철학테제」제 1번을 인용하고 있는 '유물론자의 신학'이란 글에는 이런 내용이 있다.

  “유물론적 과학이 왜 신학의 조종을 받아야 하는가? 그것은 유토피아의 실현이 과학으로 대체할 수 없는 세속 종교적 신앙, 과학으로 설명할 수 없는 비합리적 열정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지젝은 말한다. "신학적 차원 - 베냐민에 따르면 이것 없이는 혁명이 승리할 수 없다 - 이 바로 충동 과잉의 차원, ‘지나치게 많음’의 차원이 아닌가?" 사실 광적인 예수쟁이들의 문제는 열정의 과도함에 있는 게 아니다. 그 열정을 시도 때도 없이, 아무 데서나, 아무한테나 드러내는 데에 있다. 이는 좌파 신학자들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진중권이 언급하고 있는 지젝이라는 사상가는 그의 여러 저작들에서 ‘믿음의 도약’이라는 말을 되풀이 주장한다. 혁명적 순간에 필요한 것은 바로 이 믿음의 도약이다. 혁명은 어쩌면 끔직한 재앙으로 돌아올지 모른다. 왜냐하면 어떤 혁명도 새로운 세상의 모습을 보증할 수 없기 때문이다. 도래할 세상에 관한 완벽한 지식이 혁명에 대한 열정을 불러일으키는 것이 아니라, 혁명에 대한 믿음이 새로운 세상을 가능케 한다고 읽어야 할 것이다. 여전히 문제는 믿음이다. 그런데 앎 없이 어떻게 믿을 수 있단 말인가! 

  “다시 시작하라, 다시 실패하라, 더 잘 실패하라 Try again, fail again, fail better. "

  믿음이 약한 자에게 보내는 지젝의 전언은 베케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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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의 에스프레소 - 위대한 철학자 34인의 일상과 사상
빌헬름 바이셰델 지음, 안인희 옮김 / 프라하 / 2011년 8월
평점 :
절판


2012년 1월 6일 카페 소모임을 다녀온 후 쓴 글입니다.

 

나는, 누가, 내 삶의 주체가 내가 아니라고 말할 수 있다는 것을 꿈에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그럼 먹고 자고 울고 웃고 공부하고 일하는 이 육체, 이 확실하게 만져지는 실체는 도대체 뭐란 말인가? 사실 ‘주체’라는 말은 북한에 ‘주체사상’이란 것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뭐 요상한 사상이 다 있구나 하는 정도 외에는 귀에 들어오지도 않는 말이었다. 지구가 둥근 것처럼 내가 내 삶의 주체인 것은 너무나도 당연해서, 굳이 나와 주체를 구분해 생각할 이유가 없었다.

  그런데 한 8~9년 전쯤에 어떤 사이트에서 나는 참 요상한 용어를 보았다. : ‘빗금친 주체, $’

주체Subject는 자유롭지 못하고 항상 빗금이 쳐져 있다는 것이다. 마치 감옥의 창살과도 같은 빗금 말이다. 그 분이 쓴 글은 참으로 아름다웠는데, 지금 기억으로는 미국 법정 드라마 ‘앨리 맥빌’에 관한 평문 비슷한 글이었다. 그 글에서 빗금친 주체가 어떤 맥락으로 쓰였는지는 지금 전혀 기억나지 않지만, 어쨌든 그 글은 참 멋져 보였고, 나는 간간이 올라오는 그 분의 글을 읽는 재미에 홀딱 빠지고 말았다. 그리고 어느 날 드디어 “그런데, 빗금친 주체가 뭐예요?”라는 참고 참았던 질문을 하고 말았다. 그 분이 어떤 답글을 달았는지 역시 기억나지 않지만, 그 후 10년 가까이 흐르면서도 가끔 그 때 그 댓글이 떠오를 때면 나는 쌉쌀달콤하게 웃지 않을 수가 없다. 얼마나 난감하셨을까, 그분은. 나는 정말 그때는 아무것도 몰랐다. ‘주체’라는 것이 철학의 역사 속에서 그 긴 세월 동안 수많은 철학자들을 괴롭히고 있는 주제라는 것도, 그리고 그 문제의 ‘빗금친 주체’의 문제적인 성격도. 그러니 철학의 ‘철’자도 모르는 것처럼 보이는 아줌마에게 그 오랜 역사를 어떻게 설명할 엄두를 낼 수 있었겠는가.

 

 

  철학자들의 사상이 한 마디로 요약되기 힘든 것은 아마도 그 한 단어 혹은 한 문장 안에 세대에 세대를 이어 오며 거듭된 고민과 부정의 부정이 역사로서 켜켜이 쌓여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니 우리가 (80년대에) 윤리시간에 배웠던 줄긋기 식 서양사라는 것이 무슨 공부가 될 수 있었겠는가.

탈레스 - 만물의 근원은 물,  소크라테스 - 너 자신을 알라,  플라톤 - 이데아,  데카르트 -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파스칼 -인간은 생각하는 갈대,  헤겔 - 변증법 .....

  하지만, 어제 ‘철학의 에스프레소’ 독서 모임을 하면서,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역시 그 줄긋기에 핵심이 들어있기는 있었구나. 한 철학자의 인생을 축약한 저 짧은 어구, 저 간결한 한 문장을 철학의 역사 속에서 풀어낼 수 있다면, 그 철학자의 사상 뿐만 아니라 철학사의 흐름도 이해할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을 했던 것이다. 물론 말처럼 그렇게 쉽지도 않을 것이고, 거꾸로 철학을 조금이라도 제대로 이해하게 되었을 때야 어쩌면 소크라테스의 ‘너 자신을 알라’는 말을 겨우 알아먹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렇게 되면 아마도 소크라테스 자신 보다 더 ‘너 자신을 알라’는 말을  많이 이해하게 될 것이다. 인간의 역사는 소크라테스 이후 2,000년을 이어오며 나 자신, 자아, 자기, 인간, 주체에 대해 탐구해 왔기 때문이다. 소크라테스는 ‘너 자신을 알라’는 말로 너 보다 내가 더 많이 안다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사실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을 가르치려 했다는데, 데카르트가 세운 ‘자아의 확실성’ 이라는 것도 근대를 통과하면서 와장창 무너지고 인간은 여전히 인간이란 무엇인가? 주체란 무엇인가? 라는 고민을 하고 있다고는 하지만, 아마도 현대의 주체론은 소크라테스가 상상할 수 있었던 것 보다 훨씬 깊고 넓은 고민을 담고 있는 것일 터이다.

  물론 우리가 배웠던 윤리학 책을 조금 더 길고 재미있게 늘여 놓은 것과 크게 다르다고 할 수 없을 지도 모르는 <철학의 에스프레소>라는 책으로는 사실 많은 것을 배울 수는 없을 것 같다. 어떤 철학자는 지루하고, 어떤 철학자는 뭘 저런 고민을 평생토록이나 했나 싶기도 하다. 철학 전공자나 깊은 학식이 있는 사람들의 눈에는 세계지도처럼 사상사의 지도를 한 눈에 볼 수 있는 잘 짜여진 내용일 수도 있지만, 초보자의 눈으로는 한 사람 한 사람이 따로 따로 놀고 있어 아무리 두 눈을 부릅떠 봐도 보이는 것이 별로 없는 것도 사실이다. 만약에 한 가지 주제를 놓고 그리스 철학자들부터 현대 철학자들이 그 고민을 어떻게 변화시켜왔나를 살펴볼 수 있는 그런 구성이었으면 조금 더 흥미롭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들기는 한다.

  가령 ‘인간은 자유로운 존재인가?’ 혹은 ‘우리 눈에 보이는 사물은 실제로 존재하는 것인가?’ ‘우리가 보는 사물과 있는 그대로의 사물은 일치하는가?’ 또는 조금 더 실용적으로 ‘민주주의는 가능한가?’ ‘민주주의란 무엇인가?’ ‘국가는 필요한가?’ 같은 물음들을 철학사의 맥락 속에서 살펴 볼 수 있다면 재미있지 않을까 싶다.

  플라톤은 민주정을 두 번째로 나쁜 정치체로 폄하했고, 스피노자는 ‘대중은 공포에 떨지 않을 때 공포스러운 존재가 된다.’는 발언을 했고(그렇다고 스피노자가 인민주권을 부정한 것은 아니다), 니체는 민주주의를 반대했다고 하고, 지금 현재는 전 지구적 자본주의를 탈출하기 위한 해법으로서 민주주의가 지켜져야 할 가치인지 과감히 버려야 할 장애물인지에 대한 논쟁이 불붙고 있다고 한다.

  지금 우리도 자본주의와 결합된 자유민주주의의 시대에 1%대 99%의 대결이라는 극한 상황에 내몰려 있다. 자유민주주의에서 자본주의를 떼어 내면 이 문제가 해결될 것인지, 자유에서 민주주의를 분리해 내면 될 것인지, 자본주의와 자유민주주의의 분리 불가능성을 주장해야 할 것인지 등등의 문제가 사실 우리 눈앞에 있다. 거창한 담론 같지만 당장 내년에 닥친 두 번의 선거와 이 문제는 밀접히 관련되어 있다. 선거 혹은 대의제는 자유민주주의의 핵심이다. 투표에 의한 선거가 민의를 제대로 반영하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사실 의심스럽다. 국민이 뽑은 대표라는 국회의원들이 국민 99%의 뜻을 대변한다고 보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뽑기는 했지만 혹은 뽑기도 싫어서 투표도 안했지만, 어쨌든 국회의원들은 그저 국회의원들이고 시쳇말로 우리 아랫것들과는 다른 윗것들일 뿐이라고 생각하고들 있지 않은가. 그렇다면 ‘인민주권’이 의미하는 우리들의 권리는 어떻게 국가 속에서 제대로 반영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문제를, 우리 스스로의 이익의 관점에서 그리고 나의 투표 행위가 갖는 의미의 측면에서 고민하지 않을 수 없는 때가 된 것이다.

 

 

  이런 고민은 이제 와서 불쑥 인류에게 닥친 문제는 아니다. 그리스 때부터 이런 고민은 계속되어 왔다. 플라톤의 고민은 형이상학적인 이데아에만 머문 것이 아니라, 어떤 국가 형태가 가장 훌륭한 형태인가에 대해 집중되어 있다. 그의 <국가(政體)> 완역판은 700쪽이 넘는 방대한 책이다. (아직 읽어 보지는 않았다. 주문만 했다.;;)

  나는 소위 ‘철학’ 이란 것을 지극히 우연적으로 그리고 사적으로 읽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체계도 없고 계보도 없이 중구난방 읽어 오고 있다. 소설도 아닌데, 밥 먹고 사는 일과 아무 관련도 없는데, 누가 읽으라고 한 것도 아닌데, 틈틈이 꾸준히 읽어 올 수 있었던 것은 우리 아버지의 핏줄인 탓도 있겠지만 (아버지는 집안 살림은 굳이 외면하시고 논어, 맹자, 주역 같은 것을 혼자 방에 앉아서 오랫동안 읽으며 사셨다. 아버지는 가끔 주역에는 우주의 모든 법칙이 있다고 하셨지만 나는 전혀 믿지 않았다.), 철학자들이 제기하는 문제들이 형이상학이나 관념에만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나의 삶, 우리 삶의 조건, 사회가 만들어지고 굴러가는 방식과 너무너무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실 대부분 무슨 말인지 무지하게 어려워서 욕을 절로 내뱉으며 읽기는 하지만, 그래도 왠만한 소설이나 어떤 놀이보다도 이 철학 책 읽기가 나는 재미있다. 그리고 읽다 보면 이상하게 끌리는 철학자들이 있다. 문장이 매혹적이어서 혹은 발상이 발칙해서, 반전이 놀라와서 등등으로 시작했다가 차츰 그의 사상에 이끌려 이 책 저 책을 찾아 읽게 되는데, 가만히 읽다 보면 그가 말하는 생각들은 대부분 그 자신의 것이 아니라 그 이전의 철학자들의 사상에 기대고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물론 거기에는 그 자신의 독창적인 해석이 들어있다. 이미 잊혀진 철학자를 다시 불러내어 자신의 철학 체계에 발판으로 삼는다. 그래서 그들은 또 늘 싸운다. 자신이 불러 온 철학자에 대한 다른 철학자들의 비판을 다시 비판하고, 서로 네가 오독했네, 내가 제대로 이해했네, 지지고 볶으며 때로는 절교하고, 인신공격도 해가면 피 터지게 싸우면서 자신의 사상을 확립하는 것이다.

   물론 나는 누구 말이 맞는지 모른다. 인지상정으로 내가 좋아하는 철학자의 말이 맞거니 싶지만, 그걸 또 내가 어떻게 알겠는가? 그런 생각이 들면 이제는 그들이 오독이네 뭐네 하는 그 원 철학자의 책을 읽고 싶어진다. 물론 너무 어렵다. 철학자들끼리도 잘못 읽었네, 아니네 하는데 내가 그걸 직접 읽는다고 어떻게 제대로 읽을 수 있겠는가 말이다. 그래도 또 그걸 꾸역꾸역 읽어 보고 싶은 마음이 드는데 어쩔 것인가. 그러다 보면 나도 모르게 칸트도 흘끔거리고 헤겔도 뒤적이고 라깡의 세미나도 찾아보고, 뭐 그런 욕심을 내고 만다.

  사실 누구 말이 맞는가는 별 의미가 없는 것 같단 생각을 요즘에 한다. 철학자들이 과거의 철학자들을 불러내는 이유는 그 과거의 철학자들의 사상을 그 과거의 철학자 자신이 생각한 것과 온전히 일치하게 읽어 내려는 예의바른 후배의 가상한 태도를 견지하기 위해서는 아닌 것 같다. 그들은 단지 자신이 말하고자 하는 것을 위해, 자신의 사유에 체계를 세우기 위해, 자기가 보고 싶은 대로 과거의 철학자들을 다시 그려 내는 것일 뿐이다. 그러니 얼짱 각도라는 것도 있는 것처럼 한 사람의 얼굴도 보는 방향에 따라 다 다른 것인데, 한 사람의 사상이라고 해서 관점에 따라 왜 다르게 읽혀지지 않겠는가. 어떤 관점에서 보았건 그 자신의 사유 체계 안에서 모순되지 않고 논리성을 획득할 수 있다면 그것이 올바른 독해가 아닐까 싶은 것이다.

 

 

  꼬리에 꼬리를 무는 것이 어디 영어나 한자뿐이겠는가? 생각은 늘 꼬리에 꼬리를 물게 마련이어서 어제 독서 모임의 후기를 쓰려다 후기는 쓰지 못하고, 떠오르는 생각의 꼬리를 따라 가다가 꼬리에 꼬리를 물고 말았다. 철학 책 읽기도 이와 같아서 아마도 <철학의 에스프레소>는 꼬리에 꼬리를 무는 독서의 첫 번째 꼬리가 되지 않을까 싶다. 나는 니체를 좋아하지는 않지만, <철학의 에스프레소>에서 가장 멋지게 보이는 철학자는 니체였다. 역시 위험한 남자는 매력적인가? 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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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의 에스프레소 - 위대한 철학자 34인의 일상과 사상
빌헬름 바이셰델 지음, 안인희 옮김 / 프라하 / 2011년 8월
평점 :
절판


2012년 1월 4일, 카페 소모임에서 공부하며 쓴 글입니다.

 

‘Cogito, ergo sum’

라틴어로 좀 멋을 냈지만,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존재한다.’라는, 이 유명한 말을 들어보지 못한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그러나 ‘내가 존재한다.’는 자명한 사실을 확신하는 데 그토록 머리를 쥐어뜯었다는 데카르트가 생뚱맞다고 생각하기도 전에 벌써, 그런 ‘자명한 나’, 그런 ‘투명한 주체’ 같은 것은 없다는 것이 또 현대 철학의 대세라고 하니, 철학이란 뭔 별 세계인가 싶기도 하다. 그러나 철학을 멀고 먼 별 세계의 유희쯤으로 치부하다가도 어느 날 문득 나 역시 그런 물음들을 품고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될 때가 있다. “내가 누구지?” “내 의지라는 게 진짜 내 것일까?” “인간은 평등할까?” 내가 철학에 호기심을 갖는 것은 아마도 이 때문일 것이다. 드라마 ‘뿌리 깊은 나무’는 윗것들의 싸움이 아랫것들의 삶과 결코 무관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아랫것들의 삶을 구조적으로 결정짓는 싸움이라는 것을 보여주고자 했다. 어쩌면 철학 역시 우리의 평범한 일상을 구조 짓는 가장 실질적인 학문은 아닐까?, 철학에 관한 우리의 독서가 이 질문에 대한 단초가 되었으면 좋겠다.

 

 

아래는 데카르트와 파스칼에 대한 본문의 짧은 요약이다.

 

 

 

 

13. 가면 뒤의 철학자 혹은 데카르트

 

 

1. 내가 생각하는 모든 것, 내가 인식한다고 믿는 모든 대상이 의심스러운 것이라 하더라도, 이 대상에 대한 나의 생각만은 존재한다. 그럼으로써 이 생각을 가지는 나도 존재한다. 의심조차도, 그리고 바로 그 의심이야말로 내가 여기있음을 증명한다.....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있다” “나는 의심한다, 그러므로 나는 있다” “나는 기만당한다, 그러므로 나는 있다.” p200

 

 

2. 데카르트가 중세의 철학이 거의 관행적으로 행하던 대로 가장 근본적인 확실성의 지점을 신에게서 찾지 않고 인간에게로 자리를 옮겼다는 것은 이후의 철학에 결정적인 모습을 부여했다. 그 이후로 근대의 사색은 인간을 자기 자신 위에 세우고, 그를 자신에게서 나온 확실성에만 맡기는 것이 특징이 된다. 그것은 바로 ‘나’의 자율성으로서, 데카르트에게서 최초이며 결정적인 철학적 토대를 얻었다. p201

 

 

3. 데카르트가 구상한 인간에 대한 견해에서 또 다른 불행한 발전과정이 시작되었다. 그에게 있어서 ‘나’의 본질은 생각하기일 뿐이다....그로써 의식을 가진 존재, 곧 ‘생각하는 물건’인 인간과, 의식이 없고 생각하지 않는 존재인 다른 것들 사이에 건너가기 어려운 심연이 열렸다. ‘나’는 구체적인 세계 속에 있는 구체적인 인간으로 사유되지 않았다. 단순히 의식 속에 살고 있는 ‘나’는 물건들과의 접촉을 잃어버렸다. 데카르트와 더불어 현실이, 한 편에는 세계 없는 주체로, 다른 한 편에는 단순한 객체로 나뉘어버리는 근대의 특성도 시작되었다. 이것은 오늘날에도 인간에 대한, 그리고 세계에 대한 철학에 부담이 되고 있다. p202

 

 

 

 

14. 십자가에 못 박힌 이성 혹은 파스칼

 

 

1. 동시에 인간의 완전한 무력함도 드러난다. “수증기 조금이나 물 한 방울이 인간을 죽이기에 충분하다.” 인간은 “생각하는 갈대”다. 그러나 또한 다른 것이기도 하다. 인간은 자신의 무력함을 생각할 힘이 있고, 그것을 이해하면서 받아들일 수 있다. “모든 것이 그를 갈기갈기 찢어놓는다 해도 인간은 자기를 죽이는 그것 보다 더 고귀하다. 그는 자기가 죽는다는 것과 모든 것이 자기보다 얼마나 우월한지 알기 때문이다. 모든 것은 그것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른다. ” p211

 

 

2. 원죄는 ‘가장 이해할 수 없는 비밀’ 이다. 그래서 파스칼은 인간의 지적 이해력에 어울리는 통찰의 가능성들을 넘어간다. 이성이 아니라 인간에게 있는 다른 것이 참된 확실성을 가능하게 한다. 곧 믿음이 그것인데, 믿음의 장소는 이성이 아니라 심정(마음)이다..... 믿음은 객관적인 확실성을 갖지는 않는다. 종교는 “확실한 것이 아니다.” 신과 인간 사이에는 ‘끝없는 카오스’가 열려 있다....그렇기 때문에 믿음은 특별한 종류의 확실성을 가져다주는 모험이다. .....“너희의 모든 통찰은, 너희 안에서는 참도 구원도 찾아낼 수 없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데까지만 도달할 수 있다. 철학자들은 찾아낼 것을 약속했으나 실현하지 못했다. ” p216~7

 

 

 

 

덧붙임 : 데카르트의 주체가 근대의 유물로 퇴락한지 오래라고 하지만, 여기 다시 데카르트적 주체를 재단언하고자 하는 주장이 있다. 오늘 우리가 다시 마주한 코기토가 여전히 유용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까다로운 주체>의 서문을 조금 소개한다. 무슨 말인지는 나도 잘 모른다. ;;

 

 

하나의 유령이 서구의 학계를 배회하고 있다.....

 

.... 데카르트의 주체라는 유령이. 모든 학술 권력들은 이 유령의 성스러운 사냥을 위하여 동맹하였다. (새로운 전체론적 접근법을 지향하면서 ‘데카르트적 패러다임’의 권좌를 노리는) 뉴에이지 반계몽주의자와 (데카르트적 주체를 담론적 허구이자, 탈중심화된 텍스트적 기제들의 효과라고 보는) 후근대적 해체주의자. (데카르트의 독백적 주체성으로부터 담론적 간주체성으로의 이동을 역설하는) 하버마스적 의사소통 이론가와 (작금의 약탈적 허무주의에서 절정에 이르는 근대적 주체성의 지평을 ‘횡단’해야 할 필요성을 강조하는) 존재의 사유에 대한 하이데거적 지지자. (자아의 고유한 무대라는 것은 결코 없으며 단지 경쟁하는 힘들의 복마전이 있을 뿐임을 경험적으로 증명하려고 노력하는) 인지과학자와 (무자비한 자연 착취의 철학적 기반을 제공했다는 이유로 데카르트의 기계론적 유물론을 비난하는) 심층 생태론자. (부르조아적인 사고하는 주체의 환영적 자유는 계급 분할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고 주장하는) 비판적 (후-)마르크스주의자와 (이른바 무성적 코기토라는 것이 사실 남성의 가부장적 형성물임을 강조하는) 여성주의자.

자신들의 적들로부터 데카르트적 유산과의 인연을 아직 적절히 끊지 못했다고 비방을 받지 않았을 학술적 정향이 어디 있는가? ‘반동적’ 적들에 대해서뿐만 아니라 보다 ‘급진적’ 비판가들에 대해서도 데카르트적 주체성이란 낙인을 찍으며 비난을 되돌리지 않았을 학술적 정향이 어디 있는가?

이로부터 두 가지 결론이 나온다.

 

1. 데카르트적 주체성은, 모든 학술 권력들에 의해, 강력하고도 여전히 활동적인 지적 전통으로서 계속 인정받고 있다.

2. 지금이야말로 데카르트적 주체성의 파당들이 전 세계 앞에 자신의 견해와 자신의 목적과 자신의 지향을 표명하여, 데카르트적 주체성의 유령이라는 소문에다 데카르트적 주체성 자체의 철학적 선언을 대치시킬 절호의 시기다.

 

그리하여 이 책은 데카르트적 주체를 재단언하기 위해 노력하는 바, 데카르트적 주체의 거부는 오늘날 학계의 모든 투쟁적 당파들의 암묵적 협정을 형성하고 있다. 비록 이 모든 정향들이 공식적으로는 사활이 달린 전투에 연루되어 있다고는 하지만, 데카르트저 주체를 거부함에 있어서는 모두가 단일을 이룬다. 물론 요점은, 코기토라는 개념이 근대 사유를 지배해왔던 그 가장 속에서의 코기토 (자기-투명한 사고하는 주체)로 되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그것의 잊혀진 이면을, 코기토의 과잉적이고 불승인된 핵심을 백일하에 드러내는 것인데, 이는 투명한 자아라는 안심되는 이미지와는 거리가 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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