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도라의 도서관 - 여성과 책의 문화사
크리스티아네 인만 지음, 엄미정 옮김 / 예경 / 2011년 12월
절판


예전에 종영된 드라마 '뿌리 깊은 나무'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장면은 세종과 밀본의 본원 정기준이 만나 백성과 글의 관계에 대해 논쟁을 벌이는 장면이었다.
거기서 세종이 글이 백성에게 사대부가 가진 능력을 나눠주고 스스로 생각할 수 있게 만들어 사대부들을 스스로 견제할 수 있게 될 것이라며 창제가 가진 긍정적인 효과를 얘기하자 정기준은 곧바로 오히려 이렇게 반문한다.
"글로 인해 백성들이 가지게 된 거대한 욕망은 어떻게 할 것이냐"고 말이다.

이 장면이 무엇보다 인상적이었던 것은 내게 글이 단순히 글이 아님을 깊이 깨닫게 했기 때문이다.
세종과 정기준은 모두 글이 어떤 무형의 힘을 지니고 있음을 알고 있었다. 어쩌면 당연했는지도 모르겠다. 무릇 당시 조선의 권력이란 애오라지 글을 아는 것에 있었으니 말이다. 글을 앎이 곧 힘을 얻는 원천이었다. 하지만 글이 주는 힘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단순한 힘 뿐만 아니라 스스로 자신의 생각을 언어로 표현할 수 있게 되므로 더이상 남의 말에 휘둘리지 않는 고유의 자신을 가지게 만드는 힘도 있었다. 그것이 세종이 정말 백성에게 주려했었던 '주체화'의 힘이었다. 글은 그런 힘이 있었다. 자신의 생각과 바람을 자신의 말로 표현하게 됨으로써 더이상 사대부의 농간에 농락당하지 않도록 만드는 힘이 말이다. 하지만 정작 정기준이 우려했던 것은 바로 그 지점이었다. 자신을 알게 되는 것은 곧 자신의 욕망을 알게 되는 것과도 같았기 때문이다. 글을 모를 땐 자신도 모르고 욕망 역시도 그 언어를 얻지 못해 내면 어딘가에서 그저 잠들 수밖에 없었지만 이제 글을 알게되어 자신을 알게 되면 욕망 또한 그 언어를 얻어 잃어버린 얼굴을 되찾아 밖으로 나올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정기준은 그렇게 드러날 욕망으로 벌개진 무수한 얼굴들을 두려워했다. 그것은 자아를 찾게 되면 반드시 그림자처럼 따라올 것이기에 그의 등골은 더 서늘해질 수 밖에 없었다. 지금은 타계한 폴란드의 영화감독 크쥐시토프 키에슬롭스키의 말 그대로였다. 그는 폴란드가 자유화되자 덩달아 범죄마저 급속도로 증가하는 것을 보며 이렇게 술회했다고 한다. "자유와 동시에 죄악까지 들어왔다."고. 정기준은 바로 이와 같은 사태를 두려워하고 있었다. 글을 통해 사슬에서 놓여남의 이면엔 그대로 유혹에 노출됨이 있다는 것이었다.

나는 정기준의 이 말이 사실은 그토록 오랜 세월 여성들에게 책 읽기를 금지시켜온 본래 까닭은 아니었을까를 크리스티아네 인만의 '판도라의 도서관'을 읽으면서 하게 되었다.

'판도라의 도서관'은 고대에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여성의 책 읽기에 대한 역사를 다루고 있는 책이다. 그런데 이 책에서 그려내는 역사는 그리 순탄하지 않다. 근대에 들어와서까지도 여성들은 제 마음껏 책 읽기가 어려웠을 정도로 내내 남성중심의 사회로부터 책 읽기에 대해 철저하게 억압 받아왔기 때문이다. 그동안 여성들이 종속적인 위치에 있다는 걸 알았지만 지극히 개인적인 책읽기마저 그토록 속박 받아왔었음은 이 책을 통해 처음 알게 되었다. 그런데 남성들은 왜 그토록 여성들의 책 읽기에 대해 억압했던 것일까? 그것이 바로 세종과 정기준이 바라봤던 글의 힘 때문이었다. 즉 정기준이 말했던 욕망의 부추김이요 세종이 자립적 주체로 만드는 힘 그 때문이었다. 남성들은 여성들이 책을 읽고 스스로 사고하게 되는 것을 두려워했다. 작가 플로베르가 소설 '보봐리 부인'에서 그렸던 대로, 보봐리 부인이 책을 통해 자신이 원하는 사랑을 실현시키려 하였듯이 그렇게 여성들이 책을 통해 남성이 원하는 것이 아니라 여성 자신이 원하는 것을 찾으려 할까봐 두려웠기 때문이다.

물론 이것은 비단 서양에만 국한되는 일은 아니었다. 우리나라에서도 여성들에게 글이란 철저히 금기시되는 것이었다. 드라마 '해를 품은 달'에서의 여주인공 연우는 당시 조선에서 아주 이례적인 일이었고 그렇게 글을 안다고 해도 오히려 그 때문에 모진 박해를 받아야 했다. 그것의 대표적인 예가 바로 허난설헌이다. 그녀는 지금도 중국과 일본에서 그녀의 시를 흠모하고 연구하는 모임까지 있을 정도로 뛰어난 문재였지만 27년이란 그리 길지 않은 생애를 고통과 고독 속에서 보내다 끝내야 했는데 그렇게 만들었던 주된 이유가 바로 그녀가 글을 읽고 시를 썼기 때문이었던 것이다. 조선 당대의 가장 진보적 지식인이라 할 수 있을 연암 박지원마저도 아녀자에게 시를 허락해서는 안된다고 했을 정도이니 우리나라도 서양만큼이나 여성들에게 책과 글을 허락하지 않은 나라였던 것이다.
크리스티아네 인만은 그런 슬픈 역사를 담는다. 여성들이 그 억압과 속박 속에서 어떻게 지금처럼 자유롭게 되었는지를 책 읽기를 통해 드러내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을 단순한 서술이 아니라 그림을 통해서 보여준다. 그러니까 고대에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책을 읽는 여성을 그린 그림들의 역사를 통해서 말이다. 때문에 우리는 크리스티아네 인만의 책을 읽으며 새삼 글이 단순히 글이 아님을 깨닫기도 하지만 그림 역시도 단순히 그림만은 아님 또한 깨닫게 된다. 사실 그 전에 우리는 의문이 들지 않을 수 없다. '어떻게 역사적 과정을 그림을 통해 보여준다는 것일까? 말해지는 모든 그림이 그런 의도로 그려졌을 리도 없을텐데...'하고 말이다. 그래서 크리스티아네 인만은 말해준다. 그림은 사실 단순한 평면이 아니라 사회의 모든 가치관, 삶의 방식이 하나로 집약된 공간이라고 말이다. 즉 그림은 단순히 하나의 현상 혹은 대상만을 도려낸 존재가 아니라 개인과 사회가 서로 조응하는 가운데 그 시대의 분위기 또는 그 시대의 핵심이 조밀하게 들어간 하나의 응축이라고 말이다. 그래서 오히려 글 보다 그 그림들을 통해 훨씬 더 생생하게 역사적 변화를 느낄 수 있다고 한다. 이 책 '판도라의 도서관'은 그러한 크리스티아네 인만의 생각이 과연 옳다는 것을 똑똑히 보여주는 책이기도 하다.



잠깐 여기서 책이 보여주는 '책 읽는 여성의 그림'에 반영된 여성 자아의 확장의 역사를 간단하게 소개해보자면 먼저 첫걸음이라고 소개된 고대 문명과 중세에 이르기까지는 책 읽는 여성의 그림속에 실제 여성들은 등장하지 않는다. 여기서 주로 나타나는 책을 읽는 여성들은 하나의 모범이 될만한 신화나 성경상의 중요한 인물들 뿐이다. 물론 그 여성들이 보는 책들도 대부분 종교서적이다. 그러니까 이 당시의 책 읽는 여자의 그림들은 실제 생활을 반영하는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여성들에게 어떤 특화된 규범을 전파하기 위해 그려졌다. 여성들에게 신앙과 도덕심을 고취시키는 그런 규범들 말이다. 또한 그 규범들은 그대로 남성에게 여성을 더욱 종속시키는 규범들이기도 했다. 때문에 포즈들 역시 바라보는 시선을 피하듯 살짝 옆으로 돌려져 있다. 그렇게 여기서의 책이란 여성들 스스로 더욱 더 남성 중심의 가치관을 수용하는 하나의 매개였고 순종의 상징이었다. 사실 이것은 그대로 당시의 여성 상황을 정확히 반영하는 것이기도 했다. 중세에 있어 여성들의 책 읽기는 더욱 더 가혹해져 여성들은 수녀원이 아니고서는 책을 읽을 기회조차 없었다고 하니까 말이다.


이야기 속의 여성들이 아니라 실제 여성들이 책 읽는 그림이 전면적으로 나타나는 시기는 16세기였다. 이 책은 16세기와 18세기까지 별도의 한 장을 할애하여 경건과 사치로 그림들을 살펴준다. 이 장의 제목이 경건과 사치인 것은 단적으로 시대에 따라 그 주가 되는 분위기가 확연히 달랐기 때문이다. 그렇게 16세기에 지배적이었던 경건적 분위기는 18세기에 이르러 사치스럽고 화려한 분위기로 변했다.
대표적으로 여기 프랑수아 부세가 그린 마담 드 퐁파두르의 초상화 처럼 말이다.

그 중간에 르네상스가 있었음을 상기해 본다면 이것은 그대로 종교적 굴레에서 벗어나 인간이 좀 더 자유로워진 것과 관련이 있다. 그만큼 여성의 자아 역시도 보다 자유로워지고 개방되어졌다. 16세기의 그림들을 주로 지배했던 성경과 기도서들을 대신하여 18세기에는 미켈란젤로의 글이나 소설 같은 문학작품이나 뉴턴의 이론 같은 학문적인 글까지 나타나게 된다. 당시는 살롱 문화가 지배적이었고 거기서 여성들은 새로나온 책이나 사상들을 자유럽게 얘기할 수 있었다. 그렇게 할 수 있는 이야기도 책도 다양해졌으나 그래도 아직 여성들에게 책 읽기란 자신의 자아를 정립하거나 개인적 욕망을 드러내는 것과 관계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그저 그녀들의 신분을 드러내는 장치일 뿐이었다. 18세기에 이르러 신흥 부르조아지들이 서서히 주류가 됨으로써 교양을 자신의 신분을 드러내는 주된 증표로 삼았기 때문에 그 신분의 여성들을 그리는 데 있어 책이 들어간 것일 뿐이었다. 16세기의 개인의 도덕성, 신앙을 드러내는 책은 이제 그렇게 단순히 신분을 드러내는 도구로 바뀌었다. 따라서 18세기의 그림들에서 책을 읽는 모습은 그리 보이지 않는다. 그것은 그저 놓여져 있거나 위의 그림 처럼 들려져 있을 뿐이다.



이러한 책 읽기가 근본적으로 변화를 겪은 것은 19세기에 이르러서였다. 책은 '여성 책을 접하다'라는 제목으로 19세기의 책 읽는 여성의 그림들을 통하여 어떻게 변모했는지를 말해준다. 대표적으로 존 래버리의 오러스 양과 빨간 책이라는 그림이다.



위의 부세의 그림과 비교해보면 19세기의 그림들이 어떻게 달라졌는지 확연히 드러난다. 무엇보다 그녀들이 책을 보고 있다는 점이다. 그것도 아주 몰입해서 말이다. 이렇게 19세기의 책 읽는 여성들의 그림은 책에 푹 빠져 있는 여성들의 모습을 보여준다. 그녀들의 몰입은 너무도 상당해서 바깥의 세상이 도저히 비집고 들어갈 수 없을 정도이다.
특히나 윈슬로 호머의 '새 소설'은 그것을 잘 보여준다.


그렇게 그녀들은 남성 중심 세상의 굴레에서 벗어나 책 속에서 자신만의 세계를 발견한다. 여기에 이르러 그녀들의 책 읽기는 혼자만의 세계, 즉 자아의 발견이 되었던 것이다. 이제 그녀들은 다른 누구를 위해서가 아닌 자신을 위해서 책을 읽는다. 게다가 18세기엔 그저 신분을 나타내는 하나의 도구에 불과했던 책은 이제 그것을 너머 계급을 초월하여 자아를 발견하는 매개체마저 된다.
윌리엄 맥그리거 팩스턴의 '하녀'라는 그림은 그것을 너무나도 잘 보여주고 있다.

여성들은 이제 그 어디에 있든 책만 읽을 수 있다면 스스로의 세계로 걸어들어갈 수 있게 되었다. 그렇게 세종이 말했던 그리고 남성중심의 사회가 두려워했었던 그녀 자신만의 주체를 형성할 수 있게 되었다. 이제 더 이상 그녀들은 남성의 시선에 응답하지 않고 조용히 자신이 원하는 곳을 바라볼 뿐이다. 책 읽기는 더이상 자신을 드러내는 특이한 경험이 아니라 어디서나 아무렇게 접할 수 있는 일상이 되었다. 이것은 그대로 여성들이 남성 중심의 가치관에서 해방되어 그만큼 자유로워졌다는 것의 반증이었다.


그렇게 20세기가 오고 이제 여성들은 남성들만큼이나 주체적이고 자유로운 존재가 되었다. 20세기의 책 읽는 여성들의 그림은 그 변화를 너무도 잘 보여주고 있다.
발튀스의 '세 자매'가 대표적이다. 일상의 한 단면을 자연스럽게 담아낸 듯한 이 그림에서 세 여성들은 그 누구의 시선도 의식하지 않으며 자유분방하다. 마치 그녀들을 얽매일 더 이상의 굴레가 전혀 존재하지 않는 듯 하다. 그렇게 20세기의 책 읽는 여성들의 그림은 포즈도 옷 차림도 더 이상 아무런 경계가 없다. 아무데서나 특별한 이유 없이 읽을 수 있게 된 책 만큼이나 그녀들 역시도 자유로워졌기 때문이다.

이렇게 조금은 숨이 가빴을지도 모르겠지만 크리스티아네 인만이 '판도라의 도서관'을 통해 보여주고 싶었던 것을 내 개인의 느낌을 바탕삼아 간략하게 말해 보았다. 너무도 간략해서 얼마나 설득력을 가지게 될지 모르겠지만 그래도 앞에서 말했던 그림을 통해 살펴보는 것이 글을 통해서 보는 것 이상으로 역사적 변화를 잘 목도할 수 있게 해준다는 사실은 어느정도 입증되었으리라 믿는다.(제발 혼자만의 착각은 아니었으면 좋겠다.)


역사학자 E.H 카는 역사란 현재와 과거의 끊임없는 대화라고 말했다. 아마도 과거의 사건이 그 과거에서의 어떤 의미를 가졌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현재에 있어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가 더 중요하다는 말일 것이다. 그렇게 크리스티아네 인만이 현재 우리에게 '판도라의 도서관'을 통하여 새삼 여성들의 책 읽기 역사를 펼쳐 보이는 것도 단순히 그 과거의 행적만을 밝혀두려는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무엇보다 크리스티아네 인만을 따라다니며 이 글 서두에 말했던 대로 책이 주는 힘, 보다 근본적으로는 글이 주는 힘이 무엇인지를 똑똑히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다. 20세기에 여성들이 저 해방된 모습을 되찾아 오는 것이 가능했던 건 무엇보다 내내 여성들이 책을 통해 스스로를 발견하고 자신만의 생각과 욕망으로 스스로 세계를 구현해 나갈 수 있었기 때문이란 걸 통해서 말이다. 그런데 크리스티아네 인만은 왜 그런 걸 느끼게 해 주는 것일까? 아마도 그것은 지금도 여전히 우리들이 책 읽기를 계속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독서란 것이 단순히 책만 읽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우리들 자신에게 어떠한 힘 또한 주는지 똑똑히 깨닫게 하기 위해서 말이다. 마치 그 옛날의 여성들 처럼 스스로 세상으로 부터 어떤 속박과 억압을 느낀다면 스스로 자유롭기 위해서라도 책의 도움을 받아보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말하듯이.
그러고보니 생각나는 그림이 있다.
바로 필리프 반 브르라는 여성 화가의 '여성 화가들의 화실'이란 그림이다. 이 책에서 내게 가장 인상 깊었던 그림 중 하나이기도 하다. 반 브르는 이 그림의 중앙에 서 있는 여자에게 헤라클레스의 형상을 취하게 함으로써 완벽한 남성성에 대비와 그 대안처럼 완벽한 여성성을 가져온다. 이것은 한 마디로 남성 질서의 전복이며 그래서 여성 화가들만이 있는 화실은 그녀들만의 온전한 유토피아가 된다. 그 헤라클레스의 형상을 한 여성 아래 한 가운데서 한 여성이 글을 읽고 있다. 아마도 반 브르는 그 중앙에 또한 글 읽는 여성을 배치함으로써 이러한 유토피아를 완성하는데 무엇보다 글이야 말로 필요하다는 것을 역설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아마도 이것이 바로 책이 가진 힘의 궁극적 효과이지 않을까?

크리스티아네 인만의 책을 읽으며 여성들의 책 읽기에 대한 역사 뿐만 아니라 이렇게 다시금 책 읽기의 힘과 그 중요성을 깨닫게 되었다는 것이 내겐 또 하나의 커다란 수확이었다. 글이 주는 자유의 힘과 해방의 힘을 깊이 들이마시면서 마지막 페이지를 덮을 때 느껴졌던 하나의 문장을 마치 방점을 찍듯 다시 확인해본다. '책이 바로 유토피아'라고... 크리스티아네 인만을 통해 들려온 이 말의 울림은 아마도 책을 읽는 앞으로도 내내 메아리처럼 들려올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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