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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 존슨의 예수 평전
폴 존슨 지음, 이종인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2년 3월
평점 :
절판
성경은 역사상 가장 많이 팔린 베스트셀러이지만 또한 가장 읽히지 않은 책이라고 한다. 이 같은 상황은 아마 예수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싶다. 예수는 세계 4대 성인중 가장 첫 손가락에 꼽히는 존재이지만 막상 그 존재가 걸어온 삶에 대해 아는 자는 그리 많지 않을 테니까 말이다. 그것은 그의 생애를 담은 기록이 고작 네 개의 짧은 복음서 밖에는 없어서이기도 하고 또한 그 복음서가 많은 부분 비유와 암시로 이루어져 있어서이기도 하다. 게다가 공식적인 전기라 할 수 있는 4복음서마저 서로 일치하지 않는 부분들이 있고 또한 모두 생애를 상세히 기록하기 보다는 중요한 사건들만 나열한 것일 뿐이어서 얼른 읽는 이로선 전체적인 줄기를 잡기가 대단히 어렵다. 그래서 대부분 우리가 아는 것은 유명한 단편적인 사실들 뿐인 경우가 많고 예수의 말 또한 맥락과 상관없는 파편적인 것일 뿐일데가 많다. 게다가 예수가 자신의 사상을 설파하는데 있어서 주요한 방법들이었던 비유와 암시 때문에 그 말의 알쏭달쏭함으로 총천연색으로 인상이 잡히기도 전에 벌써 흐릿해지고 만다.
아마도 그래서 예수에 대한 전기가 역사에 걸쳐서 그토록 많이 나오고 있는지 모른다. 또한 그토록 다양한 시각으로 예수의 인생이 말해지고 있는 지도 모른다. 사실 예수의 일생이란 공식적인 주요한 사건들로만 층층히 쌓아올린 탑과도 같은데 사실 그 탑의 이음새가 그리 탄탄하지는 않다. 그나마 4복음서만이라도 일치를 보이면 괜찮을텐데 복음서의 저자들 자체가 자기 시각으로 편중된 서술들을 하고 있어 차이가 보이는 더 헐거워 보인다. 말하자면 지금 우리에게 있어 예수의 생애란 장님 코끼리 만지기와 같다는 것이다. 장님들도 코끼리를 만지면 대략적인 다리나 몸통 코 상아등은 알 수 있다. 바로 그것이 우리가 4복음서를 통해 알 수 있는 단편적인 사건들이다. 하지만 코끼리 전체를 알기 위해선 그 사건들만으로는 부족한다. 예수는 무엇보다 메시아이고 그가 메시아답기 위해서는 그 모든 사건들이 그의 온전한 뜻 안에 자리잡고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사건 자체가 아니라 왜 그 사건이 하필 거기서 일어나야 했느냐 하는 그 의미가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신앙이란 이적이나 행위를 믿음이 아니라 그 모든 것의 바탕이 된 '뜻' 혹은 '신념'을 믿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할 때 단순히 그 존재만이 아닌 '인격적' 존재를 강조하는 것도, 그 인격에서 발현된 '사랑'을 강조하는 것도 그 까닭이다.
때문에 의미가 중요하다. 하지만 의미란 해석의 문제라서(특히나 주된 방법이 비유와 암시라면 더욱 그렇다.) 결국 저마다 자신이 무슨 색안경을 쓰고 있느냐에 따라 달리 보일 수 밖에 없다. 해서 우리는 아주 많은 다양한 시각의 예수의 생애에 대한 판본을 가지고 있다. 비근한 예로 진보주의적 입장에서 바라본 김규향의 '예수전'이 있는가 하면 성인의 색채를 모조리 탈색해 버리고 온전히 인간적으로만 해석한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그리스도 최후의 유혹'도 있다. 예수가 십자가를 질 때 느꼈던 고통을 가감없이 전해주는데 주력한 멜 깁슨의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가 있는가 하면 중요한 건 예수의 말과 행위를 통해 자신의 신념과 태도로 본받을 것인가 말 것인가라는 결단이 중요하다며 오로지 그 결단을 촉구하는 역사적 사실만으로 써내려간 독일의 신학자 불트만의 '예수'도 있다.
그렇게 우리는 지나온 역사만큼이나 다양한 예수의 모습들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그 각각은 예수가 남긴 파편된 진실들이며 우리가 온전한 예수상을 만드는데 있어 필요한 조각들이다. 그러니 예수에 대한 이야기들은 많으면 많을 수록 더 좋다.(물론 그것들이 타당하고 상식선에서 받아들여질 수 있는 경우에 한해서 말이다.) 더 다양한 시각들로 이루어진 더 많은 블럭들로 더 풍요로운 예수의 상을 만들 수 있을 테니까...
의미란 언제나 고정되어질 때 문제가 발생했다. 왜냐하면 특히나 종교에 있어 그 고정이란 게 원래 성경의 뜻이 아니라 그 고정을 통해 떡고물을 챙기고 싶은 자들에 의해 행해질 때가 많았기 때문이다. 그것이 재물이든 권력이든 말이다. 그래서 말씀의 해석에 대한 주권 또한 중세의 교부들에서 부터 지금의 목사들에게 이르기까지 소수의 전유물이 되었다. 그들이 진리를 알 수 있어서가 아니라 재물이든 권력이 거기에서 나왔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진실을 말하자면 우리는 진짜 예수를 보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해석한 그래서 그들이 원하는 예수를 보고 있는 것 뿐이다. 마치 우리는 그들이 의도대로 편집한 예수 전기 영화를 보고 있는 것이나 같다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늘 성경 자체에로 돌아가자고 말한다. 그들이 권위로서 내세우는 말을 곧이곧대로 믿을 것이 아니라 스스로 말씀을 묵상하고 먼저 자신이 그 의미들을 깨우치기 위해서. 일종의 의미의 민주화를 가져오는 것이다. 어차피 예수의 생애와 말씀은 모두 비유와 암시이다. 이 말은 그 어떤 해석도 권위를 가지기가 어렵다는 말도 된다. 모든 건 설득의 대상이 될 수 있을 뿐이다. 그러니까 예수가 한 행동이나 말씀에 대해 저마다 각자가 찾은 의미가 있다는 전제를 깔고서 말이다. 우리는 그러한 가운데 타인의 예수상을 포용하고 더 타당해 보이는 것을 찾아 증축해나가는 것이다. 그렇게 신앙의 대상에 대한 해석은 사실 증축이며 대화인 것이다.
오랜만에 예수의 삶에 대한 책을 읽었다. 개인적으로 차상엽 신부의 '잊혀진 질문'을 읽고서 새삼 다시 내 신앙의 대상이었던 예수를 더 잘 알고자 하는 바람이 생겼기 때문이었다. 마침 폴 존슨의 '예수 평전'이 발간되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폴 존슨의 예수 평전은 부제가 신자가 쓴 전기다. 폴 존슨은 로마 카톨릭 신자이고 마거릿 대처의 고문으로도 일한 적이 있는 그러니까 보수다. 나는 이 책을 좌파 철학자로도 유명한 알랭 바디우의 책 '사도 바울'의 반대편 입장의 책이라 생각하고 읽었다. 아시다시피 바디우는 바울만이 실존 인물이고 예수는 그가 창조해낸 인물이라 본다. 그러니까 예수의 일대기는 바울이 지향하는 이상적 사회를 현실적으로 구현하기 위한 하나의 이데올로기였다는 것이다. 물론 나는 그것을 읽으며 그것 또한 타당하다고 생각했다. 바디우의 논리에 설득당하지 않기란 심히 불가능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래서 그 반대의 입장은 어떨까 싶어 온전히 실존으로서 믿는 폴 존슨의 책을 선택했다. 말하자면 나는 그렇게 대척점에 놓인 그 둘의 대화를 통해 나만의 예수의 상을 만들어보려 한 것이다. 다행히 바디우의 책이나 존슨의 책이나 분량이 많지 않았다. 사실 예수의 생애에 대한 책은 그리 분량이 많지 않아서 다행스런 사실이기도 하다. 그래서 다양한 시각으로 보다 더 풍성해지는 예수의 상을 홀로 손쉽게 만들어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아무튼 나 개인적으로는 이런 것이 필요하다고 본다..(개인적이라는 말에 방점을 찍어두고 싶다.) 존슨도 말하고 있지만 예수는 군중을 상대해도 말씀은 꼭 개개인에게 했다고 한다. 그만큼 사실 신앙이란 지극히 개인적인 행위이다. 하나님과 나와의 다이렉트한 일대일 관계가 전부인 것이다. 불트만은 그래서 더욱 결단을 강조한다. 나는 그 누구도 아닌 하나님 앞에 있고 그러니 그 누구의 눈치도 아닌 오로지 하나님 앞에 내보일 순전한 결단만이 요구될 뿐이라고 말이다. 날 전도한 이가 내 신앙을 대신해 주는 것도 아니고 목사가 내 신앙을 대신해주는 것도 아니다. 신앙은 오로지 나만의 몫이며 그래서 내가 찾아내는 예수의 모습, 의미가 중요한 것이다. 그 외의 것들이란 다 참조가능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래도 참조가능한 것이 많으면 많을수록 우리는 좀 더 타당하고 합리적인 예수의 의미에 다가갈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거기로 다가가는데 있어 폴 존슨의 '예수 평전'도 좋은 징검다리가 되어 주었음을 밝혀두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