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한 보상
새러 패러츠키 지음, 황은희 옮김 / 검은숲 / 201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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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섣달 그믐날 샴페인에 얼큰하게 취한 새러 패러츠키는 한 가지 결심을 한다. 라 스칼라 극장에서 노래하기 혹은 누레예프와 춤추기처럼 그냥 상상만 하다 끝날 게 아니라면 1979년에는 소설을 써 보자고. 그리고 그녀는 9개월 동안 50페이지 분량의 소설이란 것을 썼다. 하지만 좀처럼 늘지 않는 글 솜씨에 절망한 나머지 글쓰기에 대한 미련은 버리고 늘 하던 생업이나 제대로 하자며 결심할 무렵 뜻밖의 계기가 찾아온다. 그동안의 노력을 알고 있는 친구가 '탐정소설 전문작가 양성과정'이나 들어보라며 강좌목록을 가져다 준 것이다. 거기서 패러츠키는 강의를 맡고 있던 스튜어트 카민스키를 만나게 된다. 그 카민스키에 의해서 50페이지 분량에서 망각의 세월 속으로 던져질 뻔 했던 소설은 다시금 생명을 얻어 이어나가다 마침내 세상의 빛을 보게 된다. 난산 중에 태어난 아이와도 같이. 

 

  그게 바로 이제는 여성 사립탐정의 대명사이자 '페미니즘 하드보일드'로 평가받는 V.I 워쇼스키 시리즈의 시작이었다. 시리즈의 첫 작품 '제한 보상(indemnity only)'은 그렇게 세상으로 나왔던 것이다.

 

  (우리나라 제목은 '제한 보상'이 되었는데 아무래도 원뜻이 '~할 경우에만 보상'이라서 그렇게 옮긴 것 같다. 살짝 내용을 흘려 본다면 워쇼스키는 살인을 수사하는 도중 거기에 수상한 보험거래가 관련되어 있다는 정황을 포착한다. 당시 막강한 노동조합은 실제로 70년대에 들어와 의료 보험까지 받을 수 있는 권리를 획득하는데 이로 인해 각종 산업 재해에 대하여 보험을 통해서 보상받을 수 있었다. 소설은 이러한 상황의 변화를 미스터리의 무대로 활용하고 있는데 제목은 바로 그걸 반영한다.)

 

 

   그 때가 1982년이었다. 패러츠키가 소설을 쓰기로 결심하고 첫 문장을 쓴 뒤 4년 후이고 지금으로 부터는 무려 30년 전에 나온 소설인 것이다.(그러니 이야기의 배경이 약간 올드하게 느껴져도 괘념치 말길. 사실 소설은 70년대 말의 미국 상황을 그리고 있다. 소설에 나오는 나중에 워쇼스키의 진짜 의뢰인으로 밝혀지는 맥그로라는 인물은 70년대 당시 한창 힘을 얻어가던 전미노조를 이끌다 마파아와의 결탁으로 체포되어 교도소에서 복역하고 출소한 뒤 다시 전미노조 위원장을 노리다가 1975년 디트로이트의 한 식당에서 미스테리하게 사라져버린 '지미 호파'를 많이 연상시킨다. 지미 호파에 대한 것은 대니 드비토가 감독한 'HOFFA'란 영화가 잘 그리고 있는데 이 영화를 보고 '제한 보상'을 읽으면 책에서 묘사하고 있는 세계를 더욱 생생히 느껴볼 수 있으리라 생각된다)

 

 

 

   한 마디로 지금 누리고 있는 V.I 워쇼스키의 명성을 생각한다면 늦어도 너무 늦게 나온 것이다. 미스터리의 강국인 이웃 일본에서는 V.I 워쇼스키가, 그것도 벌써 예전에, 여성 사립탐정의 대명사로 자리 잡고 있다.

 

    일본에서는 이렇게 시리즈가 다수 출간되고 있는데 우라나라에서도 제발 이렇게 이어졌으면 좋겠다. 우리나라가 여성탐정들에게 좀 가혹했던지라 더욱 간절해진다.

 

 

  이건 좀 잡담인데 일본에서 워쇼스키가 어떤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잘 보여주는 하나의 예가 있다. 그건 바로 우리나라에도 너무 유명한 아오야마 고쇼의 '명탐정 코난'이다. 거기엔 주인공 남도일처럼 독약의 부작용으로 어린아이가 되어버린 한 여성이 나온다. 그녀의 이름은 우리나라에서는 홍장미로 통하지만 원작에서는 '하이바라 아이(灰原 哀)'다.

 

    우리에겐 홍장미로 익숙한 하이바라 아이

 

 

  코난의 원래 이름 에도가와 코난이 에도가와 란포와 코난 도일 이렇게 일본에서 가장 유명한 추리 소설 작가의 이름을 따왔듯이 이 '하이바라 아이'도 똑같이 일본에서 가장 유명한 여성 사립탐정 둘의 이름을 따 온 것이다. 그 둘이 바로 P.D 제임스의 '여탐정은 환영받지 못한다'의 주인공 코델리아 그레이와 이 작품의 주인공 V.I 워쇼스키인 것이다. 그렇게 코델리아 그레이라는 이름에서 그레이를 따와 일본말로 변형시켜 '하이바라'가 되었고 V.I 워쇼스키에서는 'I'를 따와 '아이'가 된 것이다. 에도가와 코난이 가장 대표적인 추리작가의 이름을 조합하여 만들어진 것을 보면 하이바라 아이란 이름을 이루고 있는 두 여성 사립탐정들 또한 일본에서는 그만큼 높은 평가와 인정을 받는 존재임을 알 수가 있을 것이다. V.I 워쇼스키는 그런 존재이다. 더구나 미국에서는 우리나라에서도 발간된 레너드 카수토의 '하드보일드 센티멘털리티'를 비롯하여 페미니즘 하드보일드의 대표적 작품으로 꾸준히 연구가 이뤄져 오기도 했다. 그러니 쌓인 평가나 명성에 비해서는 정말 너무도 뒤늦게 소개 된 셈인데 이러한 비극이 비단 워쇼스키만은 아니다. 그녀와 더불어 또 한 명의 대표적 여성 사립탐정인 코델리아 그레이도 마찬가지다. 우리나라에 소개된 코델리아 그레이의 데뷔작 '여탐정은 환영받지 못한다'의 경우, 별로 팔리지 못한 탓인지 그대로 소리 소문없이 절판되고 후속작은 기약도 할 수 없게 되고 말았으니까. 참으로 우리나라에서 여탐정이란 환영받지 못하는 존재인가 보다.

 

 

     워쇼스키는 1991년에 우리나라에는 '로맨싱 스톤'과 거기서는 사랑에 빠졌던 배역들이 서로 죽일듯이 싸운다는 설정으로 만들어진 영화 '장미의 전쟁'으로 유명해진 캐서린 터너 주연으로 영화로 만들어진 바가 있다. 원작은 '제한 보상' 바로 뒤에 나온 'DEADLOCK'이란 작품이다. 

 

 캐서린 터너의 워쇼스키는 대체로 소설 속 워쇼스키의 이미지와 잘 부합하는 듯 하다.

 워쇼스키는 영화의 카피 그대로 스마트함과 섹시함을 고루 겸비한 캐릭터라 할 수 있다.  

 

  그래서 V.I 워쇼스키도 그러한 운명을 맞이할까 두렵다. 이제야 만났는데 별로 깊이 서로를 알아갈 시간도 없이 작별해야 한다면 코델리아 그레이가 그랬듯이 정말 마음이 아플 것 같다. 그렇지 않아도 내가 아끼는 또 하나의 여성 탐정 앤지도 '문라이트 마일'을 끝으로 영영 떠나가 버렸는데... 

 

  때문에 워쇼스키만은 한 작품으로 사라지지 않도록 길가는 사람마다 붙잡고 제발 한 번 읽어보라고 다그치고 싶은 마음이다. 일단 읽기만 하면 그 진가는 저절로 알게 될 터이니 제발 손에 잡기라도 하라고 말이다. 이제야 우리말로 만나본 워쇼스키라는 캐릭터의 매력과 작품의 깊이가 남달랐기에 더욱 그렇다. 덧붙여 혹시 아는가? 이 워쇼스키가 예상 외로 히트를 치면 덩달아 지금 '87분서'가 그러고 있듯이 코델리아 그레이의 뒷이야기도 다시 들을 수 있을지... 그러니 어쩔 수 없다. 목마른 자가 우물을 파는 법이니, 그 뒷이야기를 보고 싶은 자가 닥치는 대로 이 책을 홍보할 수밖에. 그렇게 이 글은 그런 사심이 아주 많이 가득 들어간 글이다. 어떻게든 비틀즈의 노래 제목대로 여성 사립탐정들과 'I WANNA HOLD YOUR HAND'하고 싶은 마음이랄까...

 

 아무튼 이제 나온 워쇼스키의 첫 작품 '제한 보상'은 왜 그녀의 시리즈가 페미니즘 하드보일드로 불리는지 분명히 알 수 있게 한다. 흥미로운 것은 이 소설의 워쇼스키도 그녀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여성 사립탐정 코델리아 그레이가 처음 사립탐정을 했을 때 그랬듯이 내내 지인들로 부터 "여자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일이니 그만 둬.'라는 말을 무던히도 듣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코델리아 그레이가 처음 등장하는 작품의 제목 역시도 '여자에게 어울리지 않는 직업'이다. 원제는 'AN UNSUITABLE JOB FOR A WOMAN'인데 여기서 P. D 제임스는 'UNSUITABLE'라는 단어를 썼다. '있어야 할 자리에 있지 않다'는 뜻이다. 워쇼스키가 들어야했던 '어울리지 않는다'라는 말도 사실은 그와 같다. 정말은 모두들 '여기는 네가 있을 곳이 아냐! 어서 네가 있어야 할 자리로 돌아가!'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일례로 워쇼스키 아버지의 오랜 친구이자 워쇼스키가 발견한 시체의 수사를 맡은 고참 형사는 그녀에게 이렇게 말한다.

 

 "토니가 오냐오냐 하면서 키우지 않고 엄하게 키웠으면 지금쯤 어엿한 주부가 되었을텐데. 탐정 노릇 한다고 여러 사람 피곤하게 만들지는 않을 거 아냐." (P. 54)

 

 그런데 그 있어야 할 자리는 누가 정하는 것인가? 그건 바로 남자들이 아닌가! 워쇼스키가 살고 있는 미국이든, 코델리아 그레이가 살고 있는 영국이든 남자 중심의 가부장제 사회라는 건 별반 다르지 않다. 결국 남자들은 자기들이 정해놓은 그 자리에 얌전히 있지 않는다고 해서 나무라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또한 그래서 워쇼스키와 코델리아 그레이의 사립탐정 일은 그들에게 도전이다. 자신들이 정해놓은 경계를 허무는 일이니까. 그 형사에게 워쇼스키는 바로 이렇게 응수한다.

 

 "아저씨, 전 탐정 일이 좋아요. 게다가 저는 게을러서 주부가 될 소질이 전혀 없어요."

 

 패러츠키는 여기에 특별히 '게으르다'는 말을 첨부한다. 그러고보면 워쇼스키는 우리가 여성스러움으로 생각하는 것에 전혀 걸맞지 않다. 집 청소는 거의 하지 않으며 요리 또한 거의 하지 않는다. 그는 남자 사립탐정처럼 늘 바깥에서 식사를 해결한다. 설사 요리를 하게 되더라도 요리 한다고 주변에 이런저런 물건들을 잔뜩 늘어놓아서 만드는 시간 보다 오히려 치우는 시간이 더 걸릴 지경이다. 한 마디로 워쇼스키는 가정주부의 품격과 영 거리가 먼 사람이다. 그런데 따지고 보면 우리가 알고 있는 여성스러움이란 그 가정주부의 품격과 그리 다르지 않다. 어떻게 보면 가부장적인 사회가 가장 원하는 모습이 지금의 여성스러움으로 안착된 것도 같다. 그렇게 우리가 알고 있는 건 모범이 아니라 사실상 족쇄였던 것이다. 여성들을 남성들이 원하는 자리에 있도록 하기 위한 옛날에 유행했던 말로 하면 '이데올로기적 장치' 같은 것. 그래서 워쇼스키는 일부러 저렇게 대답했던 것이다. 사실은 이것을 전하고 싶어서...

 

 난 당신들이 만든 프레임에 걸려든 사람이 아니에요.

 그것으로 부터 벌써 자유로워졌다구요. 그러니 그 낡은 프레임으로 날 엮을 생각이랑 아예 하지 말아요.  

 

 

 워쇼스키 자신의 고백에 따르자면 이렇다. 

 

 "친한 여자 친구들은 여러 명 돼요. 그들이 내 영역을 침범한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하지만 남자들을 상대할 때는 본연의 나를 지키기 위해서 싸우고 있다는 느낌이 들 때가 많아요."  (P. 266)

 

 

  여기서 워쇼스키는 '본연의 나'라는 말을 쓴다. 두 말할 것도 없이 이것이 바로 워쇼스키의 모든 행동이 남자가 만든 프레임과 싸우는 것이라는 걸 보여주는 증거이다. 그러니까 사립탐정은 그녀의 투쟁이나 마찬가지인 것이다. 그것도 그 어떤 프레임으로부터 자유로운, 고유하면서도 본연의 자신을 건 투쟁인 것이다. 사정이 이러하니 가부장제 중심의 기성 권위에 있어서는 워쇼스키라는 존재 자체가 이미 하나의 도전이다. 한 때 워쇼스키는 결혼한 적이 있다. 4년만에 그 생활에 종지부를 찍었지만 그 결별의 원인도 워쇼스키의 그러한 모습 때문이었다. 가정주부였지만 자신의 독립성을 내내 표출했던 워쇼스키를 남편은 오로지 자신의 영역을 침범하는 것으로만 여겼기 때문에 결국 결혼이 파탄났던 것이다.

결혼은 워쇼스키에게 있어 사회와의 마지막 타협점이었지만 결국 깨어짐으로써 워쇼스키가 걸어가려는 노선은 사회와 결코 타협할 수 없는 길임이 드러났다. 그녀의 길은 남성 중심의 가부장제 사회가 여전히 위세를 떨치는 한, 이제 그 어디에도 소속될 수 없는 길이다. 그녀의 길엔 머무름이 허락되지 않는다. 끊임없이 흔들리고 더러는 요동치는 경계 위만이워쇼스키 그녀가 거처할 수 있는 유일한 곳이다.

 

 그렇게 워쇼스키 그녀는 사회의 바깥에 있다. 패러츠키는 그런 그녀의 존재감을 위해 우리가 아는(이라고 쓰고 '남성 중심의 가부장제가 강요한'이라고 읽는다.) 여성스러움으로 부터 탈여성화시켜 버렸던 것이다. 하지만 워쇼스키가 그 쪽으로 내몰린 건 아니다. 오히려 그건 그녀의 자발적 선택이다. 왜냐하면 그녀가 보기에 지금 이 사회는 확실히 문제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 사회는 자신의 아들과 딸이자 미래의 세대인 피터 세이어와 애니타 맥그로를 잡아먹고 있었다.(소설에서 의뢰인이 찾고자 하는 아들 피터 세이어는 시체로 발견되고 '로미오와 줄리엣'과도 같았던 그의 여자 친구 애니타는 실종된다.) 그 고통과 비극의 '저그노트'를 멈추기 위해서는 뭔가 대안이 필요했다. 그리고 대안이란 언제나 안에 있을 때보다 그 바깥에 있을 때 진정으로 찾을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워쇼스키는 사회의 바깥, 그 경계 위에 서 있으려 한 것이다. 보다 제대로 사회를 바라보고 정확히 진단하여 진정한 대안을 찾아내기 위하여...  

 

 "전 국선 변호인이라는 직업에 환멸을 느꼈어요. 부패가 심한 조직이었어요. 법적 근거를 바탕으로 정의를 주장할 수 없는 시스템 때문에요. 그곳에서 나오고 싶었어요. 승률에 집착하지 않고 내가 생각하는 정의의 개념을 바탕으로 할 수 있는 일을 찾고 싶었어요."

 (P. 267)

 

 

 이러한 워쇼스키의 모습은 사립탐정으로 그녀의 선배인 필립 말로우나 루 아처가 그동안 보여주었던 모습과도 같다. 같은 여성 탐정인 코델리아 그레이도 대안적 질서를 찾기 위해 기꺼이 그 일에 뛰어든 존재다. 그렇게 워쇼스키는 그들의 정통 계승자이다. 하지만 그녀가 싸우는 방식은 우리에게 인습적으로 굳어진 여성 스타일이 아니다. 그녀는 장정 두 남자와 겨루어도 두려움이 없고 오히려 이기기도 한다. 아무리 무섭고 어렵더라도 여성적인 나약함을 드러내기 보다는 당당히 대적하기를 더 선호한다.

 

 워쇼스키 그녀에게 '여성스럽다'라는 형용사는 없다.

 있다면 그건 오로지 '워쇼스키스럽다'라는 형용사 뿐이다.

 

 이러한 독립성 그리고 동등성 때문에 '페미니즘'이라는 말이 특별히 앞에 붙었는지도 모르겠다. 사실 이 작품에는 그 당시 한창 발흥하고 있던 페미니즘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아시다시피 페미니즘은 미국에서 60년대 말에, 프랑스 68혁명의 영향으로 생겨나 70년대에 확고하게 자리잡았다. 당시의 페미니즘은 그 때 노조가 강한 힘을 얻었던 것처럼 사회주의와 긴밀히 접합되었고 그래서 급진적 경향도 다분했었다. 급진이라 함은 전복에 방점을 찍은 것으로 그렇게 상대를 전혀 인정치 않음을 뜻한다. 워쇼스키는 시카고 대학(워쇼스키는 주로 시카고를 무대로 활동한다.)의 여성 해방 동아리에 탐문을 위해 참석했다가 거기서 벌어지는 일련의 논쟁을 듣게 되는데 그 때 그녀는 어떤 피로함을 느낀다. 자신 역시 나의 독립성을 지키기 위하여 남성들과 싸우고 있다고 하지만 너무나 이상론에 치우쳐 있고 앞과 뒤를 따지지도 않는 무조건적인 적대에 그만 기가 질려버린 것이다. 이는 패러츠기가 당대의 페미니즘적 논의에서 느낀 피로감의 반영이기도 하다.

 

 그녀는 생각한다. 남성들의 권력에 권력으로 맞서는 것이 과연 옳은 방법일까? 그건 단순한 남성들의 방식을 복제하는 것에 불과하지 않을까? 남성주의에 오염되지 않고 그 본연의 순수성을 유지하면서 대응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그건 어쩌면 모성이 가지고 있는 타자에 대한 보살핌 혹은 연민 같은 것이 아닐까? 그리하여 패러츠키는 작품에다 이런 생각들을 엮어 넣는다. 우리는 이러한 타자로의 열림과 보살핌 그리고 연민을 소설이 구석구석에서 볼 수 있는데 그 중 가장 대표적인 것은 워쇼스키가 위험을 피해 숨어든 로티 선생님의 집이다. 이러한 패러츠키의 순수한 여성주의적 대응에 대한 사유는 소설을 더욱 페미니즘 하드보일드로 여기게 만들고 있다.

 

 그만큼 이 소설 '제한 보상'은 그동안 이름만 들었던 '페미니즘 하드보일드'의 진면목을 확인시켜 주는 작품이다. 제나로 앤지도 가고 코델리아 그레이와의 재회는 요원하기만 한 지금 그나마 워쇼스키가 있어 울적한 마음을 달랠 수 있는 것 같다. 하지만 진정한 위안을 얻을 때는 워쇼스키의 작품이 계속 나와 줄 때이리라. 단 한 권으로 만나고 또 기약없이 헤어진다면 또 얼마나 상처를 받을 것인가! 그건 코델리아 그레이만으로 족하다. 그러니 제발 뒷 편을 발간해 주길...

 

 

 이건 곁다리인데, 나름 소설에서 중요한 부분인 것 같아 인용해 본다.

 처음에 난 이 부분 때문에 사립탐정으로서의 워쇼스키 핵심이 바로 '애도'에 있지 않나 생각했었다. 그러니까 그 슬픔과 연민이 바로 그녀를 이끌어가는 주된 축이라는 것이다. 이것을 밝히기 위하여 이리저리 살펴 보았는데 징후는 완연하지만 딱 이거다 하고 내세울만한 것을 찾지 못하겠다. 아무래도 이 한 권만으로는 역부족이겠다 싶어 이렇게 부록처럼 달아둔다. 다음 작품에서 이렇게 단초로 남은 것을 확인할 수 있는 기회가 왔으면 좋겠다.

  

 "그래요. 시간이 걸릴 수 밖에 없는 일이에요. 애도라는 건 오래 지속되는 일이에요. 서둘러 그 과정을 끝낼 수 없어요. 나도 아버지가 돌아가신 지 십년이 되었어요. 그런데도 이따금 애도하는 기간이 지속되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슬픔의 한 조각이 여전히 마음 속에 존재하는 거죠. 힘든 시기는 그리 오래 가지 않아요. 하지만 그 슬픔이 지속되는 동안 애써 거부하지는 말아요. 슬픔과 분노를 계속 억누를수록 감정을 정리하는 시간만 더 오래 걸릴 뿐이니까요." (P. 4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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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의 전주곡
나이오 마시 지음, 원은주 옮김 / 검은숲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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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포레스트 검프에서 가장 인상적인 대사를 고르라면 아마도 인생을 초콜릿 상자에 비유한 것일게다.

  '삶은 초콜릿이 들어 있는 상자와 같아서 처음에 맛있는 것만 골라먹으면 맛 없는 것만 남고 말아...' 이것 말이다.

하지만 예외 없는 법칙은 없다더니 그 검프의 현명한 말이 통용되지 않는 곳도 있는 것 같다. 그게 바로 미스터리 분야다. 나는 이른바 1940년대 이전의 클래식 미스터리의 황금기적 대가들은 우리나라에 거의 다 소개된 줄 알았다. 그렇게 그 시기엔 맛없는 초콜릿만 남아있다고 생각했는데 왠걸 아직도 여전히 맛있는 초콜릿이 남아있었을 줄이야!  그것도 상당히 맛있는 초콜릿이!!

 

  그 초콜릿이 바로 나이오 마시다.

  얼른 일본 사람 같은 느낌이 나지만 천만의 말씀이다. 뉴질랜드 태생의 어엿한 영국인 여성 작가다. 놀라운 것은 도로시 세이어즈, 애거서 크리스티, 마저리 앨링엄과 더불어 미스터리 황금기를 대표하는 4대 여왕중 한 명이라고 한다. 그 정도 위치에까지 오른 작가인데 왜 이리 생소하기만 한 것일까? 다시 한 번 국내 미스터리의 폭이 좁음을 느끼게 된다. 같은 여왕중 하나인 마저리 앨링엄도 생소하기는 마찬가지라서 더더욱. 그러니까 아직도 맛있는 초콜릿이 남아있다는 사실은 사실 전혀 신기한 것이 아니었다. 어디까지나 애초에 우리에게 주어진 초콜릿 상자 자체가 작았을 뿐이었으니까 말이다. 이런 현실이 좀 서글프지만 그래도 지금 나이오 마시가 소개된 것 처럼 언젠가는 우리가 가진 초콜릿 상자도 일본 못지않게 더없이 커질 수 있기를 미스터리를 사랑하는 팬으로서 소망해 본다.

 

 아무튼 갑자기 그녀의 이름을 거론하게 된 것은 그녀의 1939년도 작품 '죽음의 전주곡'이 국내에 발간되었기 때문이다.

 

 

 

 사진이 조금 흔들려서 알아보기 힘들 수도 있는데 보라색 띠지에 '애거서 크리스티 보다 더 뛰어나다'는 뉴욕타임즈의 평가가 쓰여 있다. 사실 이 말이야 말로 내게 있어서는 무엇보다 죽음의 전주곡을 들춰보게 된 동기가 되었는데 1939년엔 아시다시피 현재까지도 세계 최고의 미스터리로 손꼽히는 애거서 크리스티의 대표작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가 나왔기 때문이다. 물론 뉴욕타임즈가 단순히 그 둘을 비교해서 쓴 말은 아닐테지만  두 작품이 나란히 출간된 것이 1939년이라는 걸 깨달은 나는 어쩐지 이 문구가 아주 의미심장하게 다가오지 않을 수 없었다. 거기다 알고 보니 나이오 마시와 애거서 크리스티는 같이 콜린스 출판사에서 책을 내어 콜린스 크라임 클럽의 간판스타들이었다고 한다. 어쩌면 둘은 라이벌 관계였을지도 모른다. 아마도 띠지의 타임즈 글도 그 관계를 익히 대중들이 알고 있기에 그렇게 써 놓았을 것이다. 그러고보면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가 가진 특유의 연극적 분위기가 심상치 않은데 그건 나이오 마시에게서 영향을 받은 결과일까? 더구나 같은 해에 나온 '죽음의 전주곡'과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가 공교롭게도 결말 묘사에 있어 유사성을 가지고 있어 묘하게 더욱 의혹을 가지게 한다.

 

 아무튼 곁가지의 이야기들은 이쯤하고 작품으로 들어가려 한다.

 

 공간적 배경은 펜쿠쿠라는 조용한 작은 시골이다. 애거스 크리스티의 미스 마플 시리즈에 흔히 나왔던 배경과 유사하다. 개인적으로 1939년에 이 배경이 사람들에게 어떻게 받아들여졌을까가 궁금해진다. 왜냐하면 1939년 유럽엔 더 이상 이런 조용하고 한적한 시골 마을 같은 것은 존재할 수 없었을테니까 말이다. 1939년은 유럽이 거대한 불길로 곧장 뛰어들고 있는 해였다. 다름 아니라 그 해 9월 독일의 폴란드 침공으로 역사적으로 유래가 없는 커다란 비극을 낳았던 세계 제 2차 대전이 발발했기 때문이었다. 애거서 크리스티의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는 사실 그 역사적 사건을 기억하고 읽어야만 왜 애거서가 그런 플롯으로 만들었는지 더 잘 이해가 되는 작품이다. 누구보다 시대의 공기에 예민했던 그녀였기에 그녀는 그녀 나름대로 전쟁의 기운을 그리고 그것이 가져올 비극을 작품 속에 투영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나이오 마시는 어떨까? 그녀는 작은 시골마을을 배경으로 삼지만 한정된 공간이란 점에서 애거서 크리스티의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가 배경으로 했던 섬과 닮았다고 할 수 있다. 애거서에게 있어서 그 섬은 그대로 유럽의 은유였다. 거기에 알 수 없는 누군가의 초대에 의해 법망을 교묘히 빠져 달아났던 죄인들이 모이게 된다. 그들은 그대로 저마다 속내를 감추고 있던 유럽 국가들의 의인화된 모습이었고 그들 하나 하나는 인디언 인형의 노래에 따라 말그대로 처형되게 된다. 여기서 인디형 인형은 유럽 자체가 오랜 제국주의로 식민지 수탈에 의해 성립된 유죄의 유산이라는 의미를 드러내는 것이었으며 때문에 사실 처형자의 존재란 그가 가진 직업까지 더해 장차 비밀과 유전된 죄를 가지고 있는 유럽 자체에 처벌을 내릴 신적 존재 그것이었다. 말하자면 벤야민이 클레의 '새로운 천사'에서 보고 있었던 것을 애거서는 미스터리로 형상화해 내었던 것이다.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에 대한 내 해석이 지극히 개인적이고 그래서 또 믿지 못하겠다고 해도 상관없다. 그 작품이 등장한 시대적 배경 때문에 설사 애거서에게 그런 의도가 없었다고 하더라도 그렇게 해석될 수 밖에 없는 것도 또한 사실이니까. 그리고 우리가 바르트에 의해 저자의 죽음이 선언된 이후로 뭐 데리다까지는 끌어들일 필요도 없이 저자가 그 책에서 무엇을 말하려 했는가 하는 것을 더 이상 신경쓰지 않게 된 것도 이미 오래이지 않은가? 그러니 작품은 미스터리에 있어서 탐정의 해결과도 똑같아서 그 해석이 나름 합리적이고 설득력이 있다면  그렇게 의미를 가지게 되는 것이다. 거기다 율리시즈를 썼을 때 제임스 조이스가 했던 말 그대로 작품이란 오히려 기존의 의미가 아니라 새로운 의미가 부여될 때 더 생명을 얻는 존재이기도 하니까 말이다. 아무튼 그 해석에 대한 내 개인적 변명은 여기까지 하고 그렇다면 같은 해에 나온 나이오 마시는 어떨까? 그녀가 배경으로 삼은 그 작은 마을도 역시 애거서의 섬과 같은 존재일까? 그리고 거기에 등장하는 여섯 명도?

 

  개인적으로는 확답을 할 수가 없다.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 만큼 알레고리가 명확하지 않기 때문이다. 더구나 분위기도 다르다. 애거서의 그 작품이 공포가 기반이 된 음침한 연극에 가깝다면 나이오 마시의 '죽음의 전주곡'은 제인 오스틴의 '오만과 편견' 스타일의 개성 강한 캐릭터들이 한바탕 벌이는 통속극에 가깝기 때문이다. 나는 여기서 띠지의 뉴욕타임즈 말대로 나이오 마시가 애거서 보다 더 뛰어난 점이 정말 있음을 말해야겠다. 그것은 바로 캐릭터를 빚어내는 솜씨이다. 이것은 정말, 한 작품만 보고 얘기하기에는 정말 무모하긴 하지만, 애거서 이상이다. 그녀의 붓 끝이 그려내는 캐릭터가 어찌나 생생한지 소설을 읽고 있지만 마치 눈 앞에서 연극을 보고 있는 듯한 기분까지 든다. 하지만 정말로 나이오가 뛰어난 것은 상황마다 미묘하게 전개되는 등장 인물들이 가지는 감정의 흐름을 단번에 잡아내어 시각적으로 묘사하는 부분이다. 이것은 마치 내게 그대로 그 장면 안에 들어간 듯 현장감을 주었는데 그래서 노처녀 둘이 서로 전주곡을 연주하겠다고 은밀하게 불꽃티는 공방전을 벌일 때는 박장대소까지 하게 만들었다. 앞서 한 편의 연극이란 말을 했는데 아니나 다를까 나이오 마시는 추리소설 만큼이나 연극에도 열정을 바친 사람이다. 그 공을 인정받아 애거서 크리스티가 받았던 데임이란 작위까지 영국 여왕으로 부터 수여받았을 만큼 말이다. 그래서인지 장면의 연출 또한 연극을 상연하는 것처럼 시각적으로 세밀하다. 일례로 내가 정말 감탄했던 부분을 한 번 소개해 본다. 이 장면은 이 소설이 해결해야 할 살인이 벌어지기 바로 직전의 장면으로 살인으로 확 폭발되기까지 그 긴장을 응축시켜 나가는 솜씨가 그야말로 절묘하게 수놓아진 장면이다.

 

  캠페뉼러 양(그녀가 희생자다.)이 가슴 부분을 한껏 끌어올리는 바람에 등이 훤이 드러났다. 그녀는 악보에 닿을 정도로 코를 바싹 들이대고 저음부터 왼손을 들렸다. 그리고 건반을 눌렀다.

  빰, 빰, 빰.

 

  길게 인용하고 싶은데 길이상 짧게 인용할 수 밖에 없었다. 아무튼 나이오 마시는 결정적 사건이 일어나는 화음부가 울리기 전에 일단 캠페뉼러 양의 몸을 부풀어 오르게 만든다. 자신을 과시하고 싶은 기대가 이제 촉발되는 순간이니 당연하다. 하지만 나이오 마시는 단순히 캠페뉼러 양의 심리를 전하려는게 아니라 긴장으로 응출될 소실점을 최대한 줄이기 위해서이다. 그래서 동작을 일부러 한껏 늘리는 것이다. 무엇보다 등이 훤히 드러나는 묘사가 인상적이다. 카메라로 찍으면 클로즈 업되어 내면과 바깥의 공기가 여지없이 팽팽해지는 분위기로 연출될 것이다. 마치 풍선이 터지도록 바람이 들어가듯이 말이다. 그리고 마이오는 바로 그녀를 악보쪽으로 기울이게 한다. 코를 바싹 들이대게 함으로써 몸을 한껏 축소시키는 것이다. 일시에 공기가 좁은 틈새로 빠져나가도록 하는 것 처럼 말이다. 그렇게 되면 대기의 속도는 빠르게 되고 고양된 분위기가 삽시간에 작게 응축되면서 주위의 긴장도는 더 높아진다. 그리고 운명의 전주곡이 울린다. 마치 폭발을 위해 시한폭탄의 초침이 돌아가듯... 제대로 전달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나이오는 이렇게 최고조의 긴장을 위해 정확히 시각적인 묘사를 독자에게 줄 수 있는 작가다. 그것도 군더더기 없이 딱 필요한 장면만을 몽타쥬하듯이 말이다. 이런 면에서 그의 문학적 연출력과 연극적 연출력이 비등점에 있음을 느끼게 된다. 무엇보다 그녀 작품의 이러한 뛰어남은 그것들의 상호작용으로 이루어졌을 것이다.

 

 이 모든 생생한 묘사에다 질투와 원망 같은 생생한 인간의 감정이 더해져 '죽음의 전주곡'의 미스터리는 속도를 얻게된다. 전개의 빠름이 아니라 인간들의 맞부딪히는 가운데 일어나는 긴장감들이 속도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애거서가 비밀로서 현 유럽을 드러냈다면 어쩌면 나이오는 질투와 원망으로서 현 유럽을 드러내는 것이 아닐까? 바로 그 감정이 애거서가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를 통하여 내린 유럽의 논평 처럼 나이오 마시가 내린 논평 같은 것은 아니었을까 생각해보게 된다. 왜냐하면 헨리와 그 아버지 사이에서 드러나듯이, 또는 결정적으로 범죄를 결심하게 된 장면에서 드러나듯이 대부분 그 질시와 원망이 소통 불가능에서 비롯되었기 때문이다. 등장인물들 모두는 서로가 보고 싶은 방향으로만 바라보고 남들은 어떻게 볼지를 관심두지 않는다. 더구나 그러한 편견의 시야들이 소문으로까지 확장되어 마을 전체에다 상처의 비수들을 던진다. 각자의 이해관계에 골몰하느라 타인은 어떤 상처를 안고 있는지 어떤 고통을 껴안고 있는지 보려하지 않는 이 펜쿠쿠의 모습이 바로 나이오 마시가 내렸던 당시 유럽에 대한 논평은 아니었을까? 때문에 탐정 역할을 하는, 그리고 나이오 마시가 평생에 걸쳐 써 온 시리즈의 주인공이기도 한 수사관 앨린 경감이 자신의 단 하나 뿐인 연인인 트로이에게와의 연서(앨린이 트로이와 사랑에 빠지는 이야기는 바로 이 전작에 나온다고 한다.)에 담긴 내용이 의미심장해지는 것 같다. 거기서 앨린이 보여주는 태도는 한결같다. 타인의 입장에서 바라보려 하는 것. 아니, 사실 수사 자체가 그런 것이기도 하다. 앨린이 늘 하듯이 타인의 입장이 되어, 사물의 입장이 되어 헤아려 보는 것. 결국 사랑으로 수사로 유일하게 소통의 노력을 보여주는 앨린은 사건을 해결하고 저마다의 이해관계로 혼란스러웠던 펜쿠쿠에 다시금 질서를 가져다 준다. 아마 바로 이것이 나이오 마시가 현재 유럽에게 보내는 메세지이기도 할 것이다.

 

 전혀 미지의 작가였지만 이 작품은 정말 의외의 만족을 가져다 주었다. 말했던 바와도 같이 애거서의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 만큼 선명하지는 않았지만 당시 유럽의 불안한 현재에 대해 나이오 마시만의 전언 또한 느껴졌기 때문에 더욱 마음에 들었다. 나이오 마시의 대표작은 1935년에 나온 두 번째 작품 부터라고 하는데 '죽음의 전주곡' 때문에 한껏 고양된 그녀에 대한 기대로 인해 그 작품들 역시 모조리 읽어보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다. 차후에 꼭 다시 만나게 되길 빈다. 그 때까지 오래도록 뇌리에 단단히 새겨두어야겠다. 나이오 마시라는 이름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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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 2012-03-30 20: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헤르메스님 오랜만이에요! 저도 오랜만에 들어와서 딱히 할믈은 없다 말이지만요. 감기 몸살은 어때요? 좀 괜찮아지셨으려나. 저는 순오기님께서 배즙도 보내주시고 하셨는데 날이 가면 갈수록 심해져서 오늘은 잠깐 학교에서 나와서 링거주사를 한시간동안 맞았어요. 이번달만 두번 맞는건데 제 생애 링거 맞는 날이 올줄은 상상도 못하고 살았답니다. 감기로 나오던 목소리까지도 잘 안나오고 요새 죽을맛이에요. 그래서 글도 뜸해지고... 마지막글이 이주전이었으려나 ㅠ 헤르메스님, 그러고보니 <채홍> 리뷰도 쓰셨다면서 왜 안올리시는 거에요! ㅠㅠㅠ

헤르메스 2012-03-31 00:12   좋아요 0 | URL
와! 소이진님 정말 반가워요!! 저도 아팠지만 소이진님도 정말 많이 아팠군요. 감기 몸살은 이미 예전에 지나갔지만 그런데 이런 소이진님은 이번 달만 링거가 두 번이라니... 안 그래도 요즘 환절기 감기가 참 지독하더라구요. 아무 생각 마시고 편히 쉬면서 빨리 건강을 되찾길 바라요. 제가 소이진님을 위문하는 차원에서 채홍 리뷰도(부끄러운 글이지만) 바로 올려놓겠습니다.^ ^
 
여자를 증오한 남자들 1 밀레니엄 (뿔) 1
스티그 라르손 지음, 임호경 옮김 / 뿔(웅진) / 2011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노르딕 느와르의 대표 주자 '밀레니엄'이 다시 돌아왔습니다. '세븐', '조디악' 등 연쇄살인마의 연대기로 미국의 역사를 다시 써내려가는 영화감독 데이빗 핀처가 다시금 스티그 라르손의 '밀레니엄'을 영화로 만들었기 때문이죠.  하지만 그 초점은 오로지 여성 캐릭터중 가장 개성있고 강력하다고 할만한 리스베트 살란데르에게만 맞춰져있는 듯 합니다. 스티그 라르손이 '밀레니엄'을 통해 정말은 무엇을 말하려 했는지 그에 대한 얘기는 정작 빠져있는 느낌입니다. 그래서 한번 해보고 싶었습니다. 이제는 노르딕 느와르 뿐만아니라 스릴러의 '대명사'라는 자리에까지 올라버린 '밀레니엄'이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지 찬찬히 한 번 훑어보는...

 

 

   아무튼, 다음은 그런 것에 관한 글입니다...

 

 

  이 밀레니엄의 작가 스티그 라르손 처럼 미스터리 장르의 소설가로서 스웨덴을 넘어 국제적 명성을 획득한 작가가 또 한 명 있는데 그가 바로 형사 '쿠르트 발란더' 시리즈로 유명한 '헤닝 만켈' 입니다. 전형적인 수사물이지만 단순히 '누가 했느냐?'를 찾아내는 것이 아니라 사건은 다만 발단일 뿐, 오히려 그 사건을 계기로 한 사회의 내부에 깊숙이 침윤된 갈등과 고통의 지층들을 파헤쳐 미스터리로도 얼마든지 순문학적 깊이를 가질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 대중적 인기도 인기이지만 비평적으로도 높은 평가를 받고 있는 작가입니다. 이 헤닝 만켈과 스티그 라르손은 비슷한 점이 많습니다. 물론 그들의 작품 세계에 있어서 말이죠. 일단 주인공의 상황이 비슷합니다. 헤닝 만켈의 쿠르트 발란더 처럼 밀레니엄의 미카엘 불름크비스트도 아내와 이혼한데다 딸 하나를 두고 있지요. 둘 다 딸은 엄마가 양육하고 있구요. 거기다 미카엘은 잡지사에 발란더는 경찰에 소속되어 있지만 조직으로 움직이지 않고 독자적으로 활동하는 것도 똑같습니다. 둘 다 고독한 사립탐정의 전형들이라 할 수 있죠. 이 둘의 유사성은 비단 주인공의 모습에만 그치는 것이 아닙니다. 작품에서 흔히 ‘퍼즐러’라고 명명되듯이 미스터리를 푸는 것에 치중하기 보다는 그 사건을 통해 그 사건이 발생한 사회가 간직한 갈등과 상처를 드러내는 데 더 천착하는 것도 같습니다. 여러모로 이 작품은 헤닝 만켈의 ‘얼굴없는 살인자’를 많이 닮았습니다. 만켈의 작품 무대도 밀레니엄의 ‘헤데뷔’처럼 작은 시골 마을이었습니다. 그 마을 역시도 ‘헤데뷔’처럼 지극히 조용하고 전원적인 마을이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살인이 일어납니다. 쿠르트 발란더가 이것을 수사하기 위해 이 마을로 옵니다. 그리고 수사를 하는 도중 이 마을이 겉모습처럼 그리 조용한 마을만은 아니라는 것을 깨닫습니다. 그것은 다만 가면에 지나지 않았고 그 아래엔 나치즘을 방불케하는 인종적 편견과 혐오 등 온갖 추악한 감정들이 가득했던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밀레니엄에서 미카엘이 처음 ‘헤데뷔’에 왔을 때와는 다른 그 마을이 숨기고 있는 이면의 모습들을 점차 발견해 나갑니다. 사실 헤닝 만켈의 그 작은 시골 마을은 그 소설이 나온 1990년대 스웨덴의 정치사회적 상황을 투영해 놓은 것이었습니다. 그러니까 그 마을이 드러내는 모든 추악한 모습들은 당시 스웨덴에서 발로하고 있었던 이성으로는 납득하기 힘든 파시즘의 반영이기도 했습니다. 2005년에 나온 밀레니엄도 마찬가지입니다. 15년의 차이가 있지만 여전히 소설 속 사회의 숨겨진 이면에선 파시즘의 그림자가 드리우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만켈이 이를 좀 더 은유적으로 드러낸 반면, 스티그 라르손은 보다 직설적으로 드러냅니다. 둘 다 저널리스트 출신 작가들인데도 이렇게 차이가 나는 것은 아마도 스티그 라르손이 스웨덴에 만연되어가는 파시즘을 낱낱이 밝히는데 기자로서의 생명을 걸었던 이유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그는 그것을 위해 그 자신이 직접 작은 잡지사를 차리기까지 했으니까요. 바로 소설 속 ‘밀레니엄’도 이 잡지사를 모티브로 한 것이죠. 아무튼 이렇게 헤닝 만켈과 스티그 라르손은 정말 비슷합니다. 이 둘 사이에 존재하는 시간적 간격 때문에 저는 스티그 라르손을 그야말로 헤닝 만켈의 적자라고도 부르고 싶어지는군요. 그러나 모든 면에서 다 똑같은 것은 아닙니다. 그랬다면 스티그 라르손이 이렇게 대중적으로도 비평적으로도 높은 인정을 받기가 어려웠겠죠. 헤닝 만켈의 아류 정도로 취급받았을테니까요. 그러니까 여기에서 우리가 하나 알 수 있는 건, 스티그 라르손을 그렇게 높은 평가를 받을 수 있도록 만든 것이 바로 이 지점, 그러니까 헤닝 만켈과 차이나는 지점에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그것은 무엇일까요?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제대로 스티그 라르손을 소화하는데 있어서 가장 필요한 소화제가 되어줄 것 같네요.

 

  이를 위해서 우리가 먼저 생각해 볼 것은 바로 ‘스웨덴’이란 나라입니다. 스웨덴은 지금도 가장 성공적인 복지국가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전 세계적으로 가장 행복한 국민들을 선정할 때 늘 상위권을 차지하는 나라이기도 합니다. 모두 1932년부터 76년까지 집권한 사민당 때문이죠. 이 기간 동안 그들은 이른바 ‘스웨덴 모델’ 즉 경제성장과 광범위한 사회복지 확충을 동시에 양립시켜 발전하도록 하는 것을 골자로 하는 종합적인 경제-사회 모델 정책을 진행시켜 왔습니다. 그래서 스웨덴은 경제성장은 성장대로 또 복지는 세계최고의 복지국가를 이룩하게 되었죠. 스웨덴의 복지 수준은 열악한 우리 한국인의 눈으로 본다면 놀랄만한 수준입니다. 사실 그런 나라에 살면 별로 불행할 것 같지도 않죠. 통계 결과도 말해주지 않습니까? 세계에서 가장 행복한 국민 순위 중 상위권이라고. 그래서 노르웨이의 작가 조 네스보는 이런 나라들을 ‘평온한 사회’라고 부르기도 했습니다. 갈등도 고통도 없다는 것이죠. 그런데 어쩌다 90년대의 헤닝 만켈이 또 2005년의 스티그 라르손이 ‘그렇지 않다!’라며 이렇게 스웨덴의 추악한 이면을 고발하고 있는 것일까요? 이러고 보니, 정말 궁금해지지 않나요?

 

  우리는 여기에 대한 적절한 대답을 스티그 라르손으로부터 들을 수 있습니다.(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 대답이야말로 사실 헤닝 만켈과 차이나는, 더 극단으로 밀고 갔다는 점에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를 위해 스티그 라르손은 현명하게도 소설의 프롤로그 부분에서 ‘압화’를 도입합니다. ‘압화’란 말 그대로 꽃을 오랫동안 납작 눌러서 말린 것이죠. 그렇게 그것은 오랜 시간이 집적된 사물입니다. 하지만 눈에 보이는 것은 납작하게 눌려진 꽃 뿐, 그 과정에 분명 개입되었을 오랜 시간들은 그 이면에 가려져 보이지 않습니다. 이것은 만켈도 그렇고, 라르손도 궁극적으로 드러내려 하는 ‘복지국가’라는 미명 속에 오래도록 감춰져왔던 어둠과도 유사합니다. 그렇게 우리 눈에 보이는 건 예쁜 꽃처럼 매력적인 사회의 모습이지만 그 이면엔 오랜 역사에 걸쳐 켜켜이 쌓여온 고통과 비극들이 존재하고 있음을 드러내는 것 말입니다. 그러니까 한 마디로 이 ‘압화’는 문자 그대로 현재 스웨덴의 상징인 것입니다.


 


  ‘압화’는 헨리크 방예르에게 끝내는 알 수 없었던 진실을 내내 환기시킵니다. 그것은 하나의 죽음과 관련된 진실이죠. ‘압화’의 상징과 관련해서 말한다면, 스웨덴이 ‘복지국가’라는 미명 속에 내버려 두었던 죽음이라 할 수 있겠군요. 앞서도 잠깐 언급했듯이 헤닝 만켈에서도 스티그 라르손의 ‘밀레니엄’에서도 죽음은 그저 단순한 죽음만은 아닙니다. 그것은 오랜 시간 사회가 은폐시켜 온 사회적 고통 혹은 비극들이 비로소 표출되는 하나의 '징후'입니다. 그것은 드러남으로서 그 사회가 사실은 아무것도 해결하지 못했으면서 다만 보이지 않게 칸막이 쳐서 감추고 있었을 뿐이라는 것을 웅변합니다. 그래서 그건 고발이기도 합니다. 고발은 당연히 수사를 촉발시킵니다. 해서 만켈의 소설도 라르손의 그것도 수사물이라는 형식이 되는 것입니다. 수사를 통해 이면의 진실은 드러납니다. 그 이면의 진실이란 어떤 것입니까? 그것은 앞서 말했던 것과도 같이 ‘세계최고의 복지국가’라는 수식어에 걸맞게 모든 것이 정당하고 평등한 줄로 알았는데, 사실은 여전한 권력관계의 불평등이 존재한다는 것과 그 일방적 권력관계로 인해 사회적 약자들이 고통을 당하고 있다는 것에 대한 확인입니다. 그 수식어는 그야말로 보기 좋은 포장지에 불과하다는 고통스런 깨달음입니다.

 


  만켈은 이를 음미하도록 합니다. 하지만 라르손은 다릅니다. 그는 선언적입니다. 이 말은 그러니까 그는 용감하게도 이 모든 이면이 숨기고 있는 사슬을 끊어버릴 수 있는 대안까지 말해준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만켈의 뒷맛은 씁쓸함이었지만 라르손의 뒷맛은 선명한 쾌감까지 주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왜 이렇게 생각하느냐구요? 이제 그에 대해서 말하겠습니다. 일단 저는 미카엘에게 주목합니다. 많은 면에서 만켈과 유사하지만 라르손은 미카엘을 경찰로 만들지 않았습니다. 단순히 라르손 자신이 기자 출신이어서 그랬다고 여길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만켈도 기자 출신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발란더를 경찰로 만들었습니다. 저는 이 차이가 중요하다고 봅니다. 이 차이가 라르손이 말하고 싶었던 현재 스웨덴이 그 그늘에 가지고 있는 어둠을 벗겨낼 대안 같은 것과 관계가 있다고 봅니다. 그는 왜 미카엘을 굳이 기자로 만들었을까요? 결론부터 말하면 라르손이 그를 언제나 중심부가 아닌 주변부, 그렇게 늘 경계에 있도록 만들기 위해서였습니다. 시작부터 미카엘은 베네르스트룀에게 형사재판에서 패소하는 것으로 나옵니다. 그는 이제 막대한 벌금과 감옥까지 가야합니다. 결국 그는 편집장으로 일하는 ‘밀레니엄’을 그만둡니다. 이 ‘밀레니엄’은 스웨덴 사회의 경제적 권력 중심에 대해서 서슴없이 비판하는 정치적으로 저항적인 독립 잡지였습니다. 그렇게 주변부적인 언론사였습니다만 거기에서조차 미카엘은 밀려 납니다. 라르손은 미카엘을 그렇게 끊임없이 밀려나게 만들어 결국은 작은 섬마을 ‘헤데뷔’에 고립시킵니다. 그렇게 라르손은 의도적으로 미카엘을 사회로부터 고립된 존재로 만듭니다. 라르손은 이러한 미카엘의 존재성을 밀레니엄의 여사장 에리카와의 관계를 통해 더욱 더 강조해서 보여주기까지합니다. 그들은 불륜을 저지릅니다 하지만 아무 죄책감도 여기지 않습니다. 아예 대놓고 저지르는데도 그렇습니다. 이것은 우리의 상식적인 성도덕을 뛰어넘는 것이고 그만큼 미카엘이 이 사회로부터 미끌어지는 존재임을 깨닫게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라르손은 만켈의 발란더 처럼 정부에 소속된 공무원으로 만들 수 없었던 것입니다. 미카엘은 정부로부터 벗어난 존재가 될 필요가 있었습니다. 그렇게 사회로부터 바깥에 있을 필요가 있었습니다.

 

   이 모든 것은 라르손이 자신이 이 작품을 통해 드러낼 대안과 관련하여 의도적으로 미카엘에게 부여한 성격이라 할 수 있습니다. 미카엘이 사회에 편입되지 않은 아슬아슬한 경계 위에 서 있는 존재임을 독자들에게 깊이 각인시키기 위해서 말이죠. 그런데 라르손은 이 경계 위의 존재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았는지 보다 더 자신의 주제를 심화시키기 위하여 다른 하나의 존재를 더 끌고 들어옵니다. 그 존재는 미카엘 보다 더 멀리 나아간 자로, 라르손이 보여줄 대안의 입장에서 보자면 진정한 대안의 형상화라 할 만한 자인 ‘리스베트 살란데르’입니다.

 


   물론 리스베트가 미카엘 보다 더 사회를 벗어난 개인적이며 독립적인 존재라서 그렇지만(여기에 대해서 나중에 따로이 말하겠습니다.) 라르손이 보여주고자 하는 대안의 궁극적 모델로서의 ‘리스베트’의 존재는, 만켈의 소설에서 여성은 조력자이자 객체에 불과했었는데 그것과는 다르게 여성이 소설 속에서(1부에 국한해서 말하는 것입니다만.) 미카엘과 동등한, 당당한 하나의 주체로서 다뤄지고 있다는 것에서 볼 때 더욱 더 드러납니다. 소설 초반 라르손은 리스베트와 미카엘이 자신의 주제를 표현할 동등한 인물들이라는 것을 나타내기 위해 아주 주의 깊게 이 둘의 이야기를 배치시킵니다. 주의해서 읽어본다면, 라르손이 이 둘의 이야기가 전개상 피치 못하게 하나로 모일 수 밖에 없게 될 때까지는 하나의 이야기가 다른 하나의 이야기에 종속되지 않도록 하면서 세심하게 끌어가는 것을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게 그들은 각 자 다른 공간에서 자신만의 이야기를 이어갑니다. 그러면서 그들은 하나가 되어, 파헤치는 범죄가 상징하는 ‘스웨덴’이라는 거대한 사회에 맞서게 될 때까지 유사한 경험을 합니다. 혹시 눈치채셨습니까? 미카엘과 리스베트가 이뤄가는 인간관계가 놀랍도록 유사하단걸? 한 번 따져볼까요? 초반의 미카엘과 에리카의 관계는 리스베트와 아르만스키의 관계와 유사합니다. 둘 다 업무적으로 관계를 맺고 있고 서로에게 애정을 느끼면서도 자유를 구속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똑같습니다. 미카엘과 방예르의 관계는 리스베트와 변호사 팔름그렌과의 관계와 같습니다. 방예르와 팔름그렌, 둘 다 미카엘과 리스베트의 정반대쪽이라고 할만한 사회의 중심부에 있으면서 인간적 매력으로 신뢰를 얻는 인물들이니까요. 거기다 사회의 또 하나의 대표적인 권력이라 할 만한 ‘법’이란 면에서 변호사들은 또 어떻습니까? 미카엘과 프로데 변호사와 리스베트와 비우르만 변호사는 또 그렇게 똑같지 않나요? 프로데가 자본가를 대표하는 방예르의 대리인이듯 비우르만은 정부권력을 대리합니다. 그러면서 프로데는 미카엘의 언론인으로서의 양심을, 그렇게 영혼을 착취하고 비우르만은 리스베트의 육체를 착취하죠. 이렇게 미카엘과 리스베트는 그 중요한 인간관계에 있어서 놀랄만한 유사성을 보여줍니다. 결국 여기엔 라르손의 의도가 개입 되어있다고 볼 수 밖에는 없겠죠. 과연 무엇 때문에 라르손은 이토록 치밀하게 구성을 하고 있는 것일까요? 우리는 이제 그 대답을 추구해야 합니다.

 

 

   무엇보다 우리가 그 대답을 추구하는 데 있어 고려해야 할 것은 리스베트가 여성이라는 점과 그녀가 그 어떤 사회적 관계에도 포섭되지 않은 지극히 개인적이고 독립적인 존재라는 사실입니다. 여성이라는 점은 이 소설이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주제를 보여줄 것이고 개인적이고 독립적인 존재라는 점은 라르손에게 가장 독보적이라고 할 만한 것. 즉 그가 보여주는 대안이 어떤 것인지 보여줄 것입니다.

 

   먼저, 여성입니다.

소설에서 여성은 주된 피해자입니다. 리스베트 역시도 비우르만과의 관계에서 피해잡니다. 그런데 기묘하게도 리스베트가 비우르만에게 당하는 상황은 또 그렇게 ‘밀레니엄’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의 축이 되는 실종된 여자 ‘하리에트’와 겹칩니다. 리스베트가 그와 같은 성폭력을 무자비하게 당하면서도 정작 아무데도 도움을 호소할 수 없었던 상황을 우리는 나중에 하리에트에게서도 똑같이 목격합니다. 그리고 이것은 미카엘과 관계를 가지게 된 세실리아에게서도 확인됩니다. 그녀 역시도 결혼 생활동안 남편에게 매를 맞았지만 아무데도 도움을 구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결국 소설에 나오는 모든 여성들은 이렇게 사회의 어떤 보호로 부터도 벗어난 그렇게 내버려진 존재라는 점에서 하나로 모입니다. 여기서 그 어느 곳에도 도움을 호소할 수 없었다는 것은 또 그렇게 쉽게 은폐되어질 수 있음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드러나지 않는 것이기도 합니다. 말하자면 소설 속 이러한 여성들의 존재는 그야말로 ‘압화’의 그 이면인 것입니다. ‘복지국가’라는 화려한 수식어 속에서 언뜻 제거된 것 같았지만 사실은 여전히 유유히 흐르고 있었던 무수한 상처들로부터 쏟아진 고름의 강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기서 라르손은 여성을 다만 여성으로 그리고 있지는 않습니다. 이것은 하나의 대표로서의 여성입니다. 라르손은 소설에서 모든 사회로부터 고통 받고 있는 약자를 대변하는 상징으로서 그 여성을 피해자로 그리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소설에서 장이 바뀔 때마다 라르손이 사회에서 여성들이 받는 폭력의 수치를 보여주는 것에서 잘 드러납니다. 그가 꾸준하게 스웨덴이라는 사회에서 벌어지는 폭력의 수치를 보여주는 것은 정부가 아무리 복지제도를 잘 꾸려서 갈등을 봉합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그저 은폐하는 것에 불과할 뿐 사실은 여전히 그리고 현저히 사회적 고통은 도처에서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함입니다. 이면에 은폐된 폭력이 오로지 여성에 대한 폭력만은 아닐 것입니다. 그렇게 이 수치는 모든 고통을 낳게 하는 폭력에 대한 상징이라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이러한 항상적인 폭력의 형태는 극중 인물의 하나로도 형상화되고 있습니다. 그 인물이 바로 90세가 넘은 노인 하랄드 방예르입니다. 우리는 그가 ‘헤데뷔’에서 유일하게 살아있는 아버지라는 사실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 아버지란 존재가 예전엔 나치 당원이었고 여전히 인종주의적 편견에 사로잡힌 파시스트란 점도 말이죠. 이렇게 라르손은 ‘하랄드’를 통해 파시즘과 가부장제를 한 인물로 결합시킵니다. 라캉에 따르면 아버지란 사회의 근원적인 질서를 상징하는 존재입니다. 그렇다면 이건 현재 스웨덴의 또 다른 상징으로 보아도 무방할 것입니다. 그러한 아버지가 자기 딸인 세실리아에게 계속 창녀라 욕을 합니다. 이 욕설. 늘 쏟아지는 이 호명이야 말로 스웨덴이 사회적 약자에게 계속적으로 가하고 있는 폭력의 상징이라고 보아도 무방하지 않을까요?


   이 ‘거짓된 위장 뒤에 은폐된 사회적 고통’을 보여주는 것에 우리는 또 하나를 추가할 수 있습니다. 이번엔 인물이 아니라 사건으로 극화된 경우입니다. 그러니까 바로 1966년 하리에트가 사라진 바로 그 사건입니다. 라르손이 정말 얼마나 주도면밀하게 이 모든 것을 설계했는가를 여기서 우리는 또 놀랄 정도로 실감합니다. 그는 왜 하리에트가 사라지는 때를 하필이면 1966년의 어린이 날로 잡았던 것일까요? 그 어린이날, 미카엘은 사진을 통해 많은 사람들이 어린이날 퍼레이드에 행복한 표정으로 참여했음을 봅니다. 거기에 있었던 것은 충만한 웃음과 행복 밖에는 없었죠. 그런데 거기 마치 하나의 얼룩처럼 혼자 다른 것을 보고 있는 하리에트가 있습니다. 모두가 웃고 있는 가운데 두려움에 떨고 있던 하리에트가 있습니다. 모두 같은 것을 바라보며 웃고 있는데 하리에트, 그녀만은 다른 것을 보고 두려워하고 있었습니다. 결국 이 사진이 결정적인 열쇠가 되어 30년 동안 풀리지 않고 남아있던 사건이 해결되게 됩니다. 그런데 그것이 찍힌 때는 1966년 이었습니다. 1966년은 스웨덴에서 세계 최초로 아동학대금지법이 만들어졌던 해입니다. 그 66년의 어린이날. 그 날 열렸던 축하 퍼레이드, 몰려든 행복한 관중들. 이 모든 이미지들이 그야말로 찬란한 복지국가 ‘스웨덴’을 형성해가고 있을 때 거기, 그 내부에, 그 모든 이미지들이 거짓된 것임을 알려주는, 하리에트가 있었던 것입니다. 소설에서 모든 것의 발단이자 모든 해결의 열쇠가 되는 이 사건마저 이렇게 ‘거짓된 위장과 은폐된 고통’을 그야말로 집약적으로 분명하게 드러내고 있다면, 사실 라르손이 소설 ‘밀레니엄’을 통해 추구하고자 하는 주제가 바로 이것이라고 주장해도 과히 틀린 말은 아닌 게 아닐까요?

 

 

   이제 어느 정도 라르손이 말하고자 했던 바가 밝혀졌으니 앞서 얘기했던 과연 그가 어떤 대안을 보여주려 하는지 천착할 차례로군요. 긴 글 읽으시느라 많이 힘드셨을텐데, 그래도 이왕 여기까지 오신 거 조금만 더 긴 호흡으로 결말까지 함께 해 주셨으면 좋겠네요. 이제 얼마 안 남았습니다. 우선, 여기서 우리가 주목할 것은 미카엘과 리스베트가 모두 사회로부터 벗어난 존재들이라는 점입니다. 하지만 여기서도 차이는 있습니다. 그러니까 미카엘은 독립 언론인이지만 그가 정보를 얻는 것은 그래도 합법적 틀 내에서 움직입니다. 하지만 리스베트는 그렇지 않습니다. 그녀는 해커입니다. 그녀가 얻는 대부분의 정보는 불법적인 것입니다. 이렇게 라르손은 둘을 명확히 대비시켜 보여줍니다. 그러니까 둘 다 벗어난 존재이지만 미카엘은 여전히 합법적 영역 내에 머무르고 리스베트는 불법적 영역까지 넘나드는 존재로 말이죠. 이것은 라르손이 리스베트로 하여금 미카엘 보다 더 멀리 사회로부터 벗어난 존재로 만드려고 하는 것임을 보여줍니다. 그런데 이 나아감이 무슨 의미가 있길래 라르손은 이렇게 특별히 차이를 두는 것일까요? 그것은 라르손에게 있어 더 멀리 나아감은 더 강하게 되는 것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리스베트가 더 멀리 나아간다는 것은 미카엘 보다 그녀가 더 강하다는 의미이죠. 때문에 비우르만 변호사와의 에피소드에서 보여지는 것처럼 궁극적 해결은 늘 그녀가 도맡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강해지는 것이 필요할까요? 그것은 결론부터 말하자면 궁극적으로 ‘스웨덴’이란 사회 자체와 싸우기 위해서입니다. 이제 여기서 우리는 저 앞에서 얘기했던 것 ‘세계 최고의 복지국가’라는 스웨덴에서 왜 라르손이 이러한 어두운 모습을 부각하는지에 대해 얘기할 차례가 된 것 같습니다. 결국 소설 ‘밀레니엄’을 통하여 라르손이 겨누고 있는 표적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복지국가’란 말 속에 함의되어 있는 것. ‘스웨덴 모델’이란 말 속에 숨겨져 있는 것. 즉, 뭐든지 관리하고 통제하는 ‘정부’ 자체인 것입니다. 물론 여기서의 정부도 여성이 그저 여성만을 의미하지 않듯이 정부 자체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제가 특별히 정부를 언급한 것은 라르손이 소설에서 특별히 설명하고 있는 ‘후견제도’와 관련해서입니다. 왜냐하면 이 ‘후견제도’야 말로 라르손이 우려를 표명하고 있는 개인을 관리하고 통제하는 ‘정부’의 모습을 가장 잘 나타내주고 있다고 생각하니까요. 라르손은 이 ‘후견제도’를 통하여 이미 성인이 된 리스베트 조차 정부에 의해 경제적 능력을 박탈당하고 일일이 관리와 허가를 받아야 할 뿐만이 아니라 아울러 후견인인 변호사 비우르만으로부터 성폭행까지 당하는 등, 이렇게 개인에게 가해지는 정부의 부조리한 폭력성을 더욱 더 강조합니다. 결국 라르손이 미카엘과 리스베트를 사회로부터 격리시키는 것은 바로 이러한 폭력성과 맞서게 하기 위해서라고 할 수 있습니다. 더 멀리 벗어나게 하는 것은 더 강하게 그것과 싸우게 하기 위함입니다. 여기에서 보면 지금까지 우리에게 기이하게 여겨졌던 구성, 그러니까 왜 2권으로 가서야 주인공들인 미카엘과 리스베트가 비로소 만나게 되고 2권에서야 사건 해결을 위한 본격적인 추적이 행해지는 것인가가 더욱 더 명확하게 이해됩니다. 결정적으로 2권과 1권을 가르는 지점은 바로 ‘사진의 발견’입니다. 이 사진은 사건의 근원이자 해결의 근원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여기까지 이르는 과정이 미카엘이나 리스베트 모두에게 예사롭지 않음이 눈에 띕니다. 우리는 이 둘의 여정이 톱니바퀴처럼 맞물려 있음을 보게 됩니다. 그러니까 에리카가 미카엘, 헨리크 방예르와 처음 저녁식사를 하는 장면부터 시작해보죠. 미카엘은 그 방문의 진정한 목적을 모르고 있다가 나중에 가서야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게 됩니다. 그것은 미카엘이 더욱 더 방예르 가문에 종속됨을 의미했습니다. 이와 똑같이 리스베트도 새로운 후견인 비우르만에게 예속됩니다. 미카엘이 자본 때문에 그랬듯 리스베트도 새로운 컴퓨터 때문이었습니다. 둘 다 각 자에게 절실했다는 점에서도 똑같습니다. 그렇게 그것은 일종의 욕망이기도 했습니다. 마치 그 둘이 동일한 과정임을 더욱 더 강조하듯이 이것들은 병행됩니다. 미카엘은 이것을 시작으로 더욱 더 예속되어 갑니다. 그는 세실리아와 관계를 가집니다. 이전이 자본에의 욕망이라면 이번엔 몸에의 욕망입니다. 묘하게도 리스베트 역시 그렇게 육체적인 관계를 맺습니다. 물론 일방적인 관계이지만. 이렇게 미카엘, 리스베트는 동일하게 자본의 욕망에서 육체적 욕망으로 스스로를 더욱 더 얽어매게 됩니다. 미카엘이 세실리아와 함께 있을 때 리스베트는 비우르만에게 당하고 있습니다. 역시나 병행되어 전개됩니다. 이러한 일치와 병행은 물론 라르손이 의도적으로 한 것임을 분명하게 드러내주고 있습니다. 문제는 이렇게 예속되어 갈 때 그들이 확인하게 되는 건 오로지 단 하나, 그들의 무기력함 밖에는 없다는 것입니다. 미카엘은 실마리를 전혀 잡지 못한 채 여전히 오리무중이고 리스베트는 아무리 성폭행을 당해도 어디에도 호소할 수 없는 자신의 모습을 확인하게 됩니다. 이와 같이 라르손은 그들이 사회 내로 점점 편입되면 될수록 더 나약해지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따라서 그들로 하여금 감춰진 진실을 밝혀내어 싸우도록 만들기 위해서는 더 강하게 만들 수 밖에 없고 그러기 위해서는 점점 더 사회로부터 벗어나게 만들 수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미카엘에겐 감옥에로의 수감과 세실리아와의 결별을, 리스베트에겐 폭력적인 방법으로 그 후견제도에서 벗어나게 만들어주는 것입니다. 그렇게 그들을 사회의 가장 바깥쪽 벼랑으로 내모는 것입니다. 바로 거기에 이르러서야, 그렇게 최대한 사회로부터 벗어나서야 비로소 미카엘은 실마리를 잡을 수 있었고 리스베트와 미카엘은 만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으로 우리는 이제 ‘밀레니엄’에서 라르손이 말하고자 했던 것의 최종적인 정리를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는 복지국가화에 따른 정부의 개인에 대한 통제가 점점 더 심해지는 것을 우려합니다. 그래서 그것에 대항하기 위해 개인들이 기꺼이 사회가 내뻗는 촉수로부터 리스베트처럼 달아날 것을 제안합니다. 그런데 그가 그렇게 하는 것은 왜입니까? 그건 복지 자체를 비판하고자 함이 아니라 그렇게 점증되는 정부의 개인에 대한 통제에서 파시즘의 잔영을 보게 되기 때문입니다. 앞서도 말했듯이 현실에서 기자였던 라르손은 언론인으로서의 자신의 사명을 스웨덴에 만연한 일상적 파시즘과 투쟁하는 것으로 삼았습니다. 제가 보기엔 이 소설 ‘밀레니엄’은 바로 그러한 저널리스트로서 라르손이 가지는 투철한 사명감이 그대로 반영된 게 아닌가 싶습니다. 그렇게 소설에서 리스베트가 보여주는 철저한 처벌과 복수의 의사 표현은 그대로 라르손이 가진 파시즘에 대한 결연한 의지의 또 다른 표현이 아닌가 싶네요. 라르손의 ‘밀레니엄’은 아직까지도 여전히 높은 인기와 평가를 누리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늘 거침없는 ‘페이지터너’로서의 압도적인 재미를 꼽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 재미에 가려 우리가 절대 간과하지 말아야할 작품을 통해 관철하고 싶은 주제의식이 아울러 존재하고 있음을 말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위해 라르손이 얼마나 아주 세부에 이르기까지 치밀하게 계산해서 작품을 구성했는지 강조하고 싶습니다. 이 모든 것은 소설가로서의 능력뿐만 아니라 현실에서도 투쟁을 하듯 기사를 썼던 치열한 저널리스트로서의 의식 역시 있었기에 가능했을 것이 틀림없습니다. 새삼 문득 깨닫는 건 라르손의 그 편안하고 사람 좋아 보이는 얼굴 뒤에 깃들어있는 거센 불길과도 같은, 작가와 저널리스트 모두로서의 정열이로군요. 그만한 정열이 내어뿜는 글이었기에 그만 우리는 압도적으로 타버린 나머지 마파람에 게 눈 감추듯 순식간에 작품을 먹어치운 것은 아니었을지 하는 생각을 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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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 2012-02-10 23: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새 헤르메스님의 글을 읽으면 항상 변화를 주셔서 눈과 마음이 즐겁습니다.
와, 이번 리뷰는 정말 알차고 빈곳이 한군데도 없는걸요.
물론 그만크...큼 제겐 어렵지만 말이어요.
이 책은 한동안 알라딘 메인에 떠서 관심이 갔는데 영화가 19금이 붙은것을 보고서는 아예 흥미가 떨어져버렸어요. 어차피 영화화된것은 보지않는데 잘되었지요.

헤르메스 2012-02-19 20:24   좋아요 0 | URL
제가 좀 정형화된 걸 싫어하고 이것저것 마구 저질러보는 스타일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잘 보아주셔서 감사드려요 소이진님^ ^ 이런 밀레니엄이 19금이었나요? 안타깝네요. 그래도 데이빗 핀쳐 감독의 영화는 한번쯤 보아둘 가치는 있으니 나중에라도 꼭 한 번 보시면 좋겠어요^ ^

맥거핀 2012-02-12 01: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이 소설에 대한 이런 이야기가 보고 싶었었는데, 헤르메스님이 잘 정리하여 쉽게 전달해주셔서 빠르게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늘 좋은 글을 읽게 되어 감사하다는 인사를 전하고 싶군요. 저는 영화만 본 상태이지만(그것도 리메이크인 미국판만), 확실히 소설도 읽어볼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영화보다 더 풍성한 함의를 읽어낼 수 있겠군요.^^

헤르메스 2012-02-19 20:28   좋아요 0 | URL
맥거핀님 정말 감사합니다.^ ^
밀레니엄에 대한 글에 개인적으로 아쉬운 게 있어서 적어본 글이었는데 이렇게 말씀해주시니 더 기쁘네요. 개인적으로 데이빗 핀쳐와 라르손이 지향하는 바는 같은 지점일 것 같지는 않지만 그래도 역시 원작과 영화를 다 보는 것이 더욱 풍성한 이해를 가져다 줄 것 같아요. 어차피 작품이 가진 의미란게 전적으로 작가들만의 몫도 아니니 말이죠^ ^

마녀고양이 2012-02-13 13: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리뷰를, 제가 소설을 독파한 직후에 읽었으면 좋았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읽은지 1년이 넘어가니, 정말 가물가물하네요...

제가 남아있는 것은, 3부에 리스베트가 점점 자신을 찾아가는데 대해 안도감을 느꼈다는 것과, 남자보다 더 멋진 여자 주인공을 창조했구나 라고 이끌린거, 그리고 작가의 죽음으로 인해 5부작 기획이었던 책이, 3부작으로 끝나서 안타깝다는 점이었답니다.

정말 재미있는 책이었습니다. 그리고 아무리 재미와 스릴을 추구하더라도
그 이면, 작가가 나타내고자하는 주제를 보아야한다는 점에 열렬한 공감을 보냅니다.

헤르메스 2012-02-19 20:31   좋아요 0 | URL
하하, 저도 시간이 지나면 내용들이 가물거리고 때로는 막 썪이고 그러더라구요. 라르손의 뜻하지 않은 죽음으로 미완으로 그치고 만건 저역시 너무나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어요. 소설로 간접 경험하게 되는 그의 열정을 생각하면 더 그렇더군요. 좋은 작가를 하나 잃은 것 같아 아쉽고 하야오의 '붉은 돼지'에 나오는 대사 처럼 "좋은 사람들은 빨리 죽"는가 봅니다. 아무튼 열렬한 공감에 정말 감사드려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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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자 잔혹극
루스 렌들 지음, 이동윤 옮김 / 북스피어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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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무정한 당신이 끝내 남기고 싶은 것은? ...

 

 

  다작으로 참 유명한 작가이지만 상대적으로 우리나라에는 소개된 작품이 별로 없는 영국의 여류 작가 루스 렌들은 무엇보다 심리적 묘사로 이름이 높다. 아마도 그녀의 대표작이자 추리 문학에 있어서는 최고의 영예라고 할만한 골든 대거상도 수상했던 '내 눈에도 악마가'란 작품을 읽어보셨다면 이런 내 말이 쉽게 수긍되지 않을까 한다. 이 작품이 그토록 높은 평가를 받게 된 것 역시 그 작품에서 보여준 타인들의 눈을 끔찍할 정도로 신경쓰는 한 소심한 범죄자의 내면에 대한 그 세부에 이르기까지 집요할 정도로 언어로 모조리 담아내는 탁월한 묘사에 있었으니까 말이다.

 

 

  공교롭게도 '내 눈에는 악마가'가 나온 76년 이듬해, 그러니까 77년에 나온 지금 얘기하려는 이 작품 '활자잔혹극'의 범죄자 '유니스' 역시 바로 전작의 범죄자 아서와 많이 닮아있다. 아서와 마찬가지로 끊임없이 주위에서 자신을 어떻게 볼까 신경쓰는 것이다. 나란히 나온 작품들이라 어쩐지 '소심증' 시리즈 연작으로도 보일 지경이다. 소설은 그 이유를 첫 머리에서 단적으로 밝힌다. 유니스, 그녀가 글을 모르기 때문이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자신이 글을 모른다는 사실을 남에게 들키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유니스는 아서와는 달리 주위의 시선을 신경쓰는 부분이 한정되어 있다. 그러니까 글자를 모른다는 부분에 있어서만 남들의 눈을 신경쓸 뿐 그 외 다른 모든 것에 있어서는 전혀 신경쓰지 않는다. 너무나 신경쓰지 않아서 어떤 이들은 섬뜩하다고까지 말한다. 이 책의 제목이 원래 제목과는 다르게 '활자잔혹극'인 이유도 유니스가 가지는 두려움이 오직 글자에만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정작 소설은 유니스가 왜 글을 모른다는 사실을 남들이 알게되는 걸 그토록 두려워하는지 속시원히 밝히지 않는다. 그 때문에 일가족 네 명을 살해하게 되는데도 렌들은 그 이유에 대해 짐짓 모른체 한다. 하긴 '내 눈에도 악마가'에서도 그랬다. 아서가 그토록 소심증을 가지게 된 이유를 밝혀주지 않았다. 그래서 렌들은 내게는 '활자잔혹극'에서 그 어떤 미사여구나 감정이입 없이 마치 할 말만 하는 불친절한 가게의 아줌마처럼 아주 건조하고 무심하게 툭툭 내던지듯 써내려가는 그녀의 문장 만큼이나 무정한 작가로 보인다.

 

 

  내가 그녀에게 "왜 유니스가 이토록 자신이 문맹자라는 사실을 두려워하죠?"하고 묻는다면

렌들은 100% 이렇게 대답할 게 틀림없다. "꼭 이유를 알아야 하나? 그렇게 생겨먹은 걸 어떡하라고... 세상엔 설명되지 않는 것들이 너무나 많아. 유니스도 그런 존재라고 그냥 생각하면 안될까? 그냥 현실로 받아들이라구."

 

 

  건조하고 투박하고 자신의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들에 대해 아무런 애정마저 없어서 무정한 그녀의 문장 때문에 자꾸만 '킬러들'의 헤밍웨이가 떠오르기도 하는 '활자잔혹극'은 하지만 그 건조하디 건조한 외형에 비해 그 깃든 내용에 있어서는 참으로 이래저래 할 말이 많은, 그 다양한 해석의이채로움으로 풍성한 작품이다. 

 

 

 

 

  이미 이 책 말미에 달린 해설에서 장정일은 유니스의 '문맹'을 가지고 '문맹이 결과하는 사회기술적 곤란만 아니라, 문맹이 인격적 형성에 미치는피해' 를 얘기하고 1995년 이 소설을 가지고 '의식'이란 제목으로 영화를 만들었던 끌로드 샤브롤 역시 커버데일과 유니스의 관계를 부르조아 계급 대 노동계급의 갈등이란 관점에서 아주 흥미롭게 보여준 바 있다.(사실 처음엔 '활자잔혹극'을 이렇게 유니스의 점증하는 계급의식에 맞추어 쓰려 했으나 끌로드 샤브롤의 영화를 보고 포기했다. 장정일은 해설에서 이 영화가 소설이 가지는 세부적 장점들을 많이 놓치고 있다고 평했으나 그건 소설이 영화로 옮겨올 때 흔히 가지는 일반적 한계에서 오는 보편적 문제일 뿐이고 '계급'적 관점에만 천착해 본다면 영화적 묘사가 소설 보다 훨씬 뛰어나다.) 때문에 이 책에 대해 이미 한 얘기를 하기 보다는 나 자신이 찾아낸 것으로 쓰는 게 혹시나 이 글을 읽으실 분들의 시간 낭비를 막는 길이기도 하지 않을까 싶기도 하고(물론 이 글이 이 책에 대한 해설 같은 것은 아니지만) 해서 그렇게 나가보려 한다.

 

 

 

   2.  데리다의 그라마톨로지를 자기만의 방식으로 다시 써 보고자 함이었나? ...

 

      '말-중심주의' 에서 '활자-중심주의' 로

 

 

  이 책이 가지는 내용에 있어서의 다양함은 어쩌면 그 출발에 있어서는 단순하지 않을까 싶다. 즉 '유니스의 '문맹'을 어떻게 볼 것인가?' 그것이다. 그렇게 장정일 처럼 '문맹'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여 해석할 수도 있고 끌로드 샤브롤 처럼 하나의 은유로 받아들여 부르조아 계급의 이데올로기에 지배받지 않은 노동계급만의 독자적 이데올로기로 바라볼 수도 있다. 그렇담, 나는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이는가?

 나 역시 끌로드 샤브롤 처럼 하나의 은유로 받아들인다. 하지만 그 내포된 의미는 다르다. 그러니까 나는 그것을 데리다가 전통적 서양 형이상학의 토대라고 말했던 '말-중심주의'의 은유로 받아들인다.

 

 

  흥미롭게도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유니스의 '문맹'과 커버데일 일가의 '활자'의 대립이 데리다의 '그라마톨로지'에 나왔던 '말 중심주의'와 '활자 중심주의'의 대립으로도 얼마든지 읽힐 수 있음을 발견했다. 무리일지도 모르지만 나 자신 발견했던 데리다의 '그라마톨로지'적 독법이 설득력을 가진다면 앞서 말했던 '활자잔혹극'에 깃들인 내적인 해석의 풍부함에 대한 충분한 방증이 되지않을까 하여 그것을 위해서라도 한 번 나만의 독법을 시전(始展)해 볼까 한다.

 

 

   짧은 리뷰로 데리다의 논의를 다 담기엔 무리가 있으므로 스케치하듯 간략하게 넘어가는 것에 조금 양해를 먼저 구해두고 싶다. 아무튼 데리다가 전통적 서양 형이상학의 토대에 왜 말 중심주의가 있다고 한 것일까? 그것은 무엇보다도 서양 형이상학이 내내 진리를 추구해왔기 때문이다. 진리란 무엇인가? 단순히 말하자면 '참-실재'이다. 진짜로 존재하는 것. 그렇게 '아르케'의 추구로 부터 기원되는 서양 형이상학은 내내 진리란 이름으로 진짜 존재를 찾아왔었다. 그런데 진짜 존재란 무엇인가? 가상이 아닌 것. 플라톤에 의하자면 우리의 감각이 만들어낸 허상이 아닌 것이다. 그렇다면 허상이 아닌 것이 있을 수 있을까? 그리고 그것을 찾을 수 있을까? 고대인들은 생각했고 그래서 찾았다. 바로 소크라테스가 '다이모니온'이라 불렀던 것. 그렇게 '양심의 소리'였다. 즉 고대인들은 생각했다. 내 양심 혹은 내 내면에 직접 들려오는 소리야 말로 '참-실재'가 아니겠느냐고. 왜냐하면 그 순수 내면에서 이루어지는 '말하고-듣는' 과정에서는 그 어떤 감각적 왜곡이 끼어들 틈이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고대인들은 그것을 정초로 '진리'를 그리고 그것을 인식할 수 있는 '이성'을 점차로 구축해 나간다. 그리고 그 결과 이성을 뜻하는 '로고스 중심주의'가 지배하는 전통적 서양 형이상학이 만들어지게 되었다고 데리다는 말하는 것이다. 그렇게 '말-중심주의'는 토대가 된 것이다. 하지만 그라마톨로지에서 데리다는 이 '말-중심주의'를 비판한다. 왜냐하면 자기가 말하고 자기가 듣는 그것으로만 구성된, 그렇게 철저하게 동일성의 바탕 위에만 구성된 형이상학이었기 때문에 그 어디에도 타자가 개입할 틈이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전통적 서양 형이상학이 가지는 문제점들이 전방위적으로 검토된 이유는 무엇보다 2차대전이었고 그것을 일으킨 파시즘의 출현이었다. 많은 철학자들은 파시즘이란 전체주의의 출현이 어떤 특정한 역사적 현상이 아니라 애초부터 하나의 존재라는 동일성을 바탕으로 다른 것을 배제함으로써 스스로를 정립시켜왔던 서양 형이상학 자체에 그 씨앗이 배태되어 있음을 깨달았다. 더구나 그것은 중세를 지배했던 기독교의 유일신 신앙으로 더 오래 더 확고하게 자리잡은 것이기도 했다. 그렇게 이성과 신은 2인 3각 게임을 하듯 서로 보조를 맞추어 철저히 타자를 용납하지 않는 오로지 혼자가 전부인 형이상학을 구축한 것이다. 바로 그것을 하이데거는 '동일자의 철학'이라 비판했고 레비나스 역시도 비슷했다. 데리다 역시 거기에 가담한다. 하지만 그는 더 안으로 깊숙이 들어간다. 그러니까 그 '동일자의 철학'을 낳게한 원인을 찾는 것이다. 그리고 결국 훗설이 예비한 길을 따라가다 그 근저에 말-중심주의(혹은 소리-중심주의)가 있음을 찾아낸 것이다.

 

 

  유니스의 '문맹'은 바로 이 '말-중심주의'를 상징한다.

 

  데리다는 '말-중심주의'의 특징을 다음과 같이 말한 바 있다. '나르시스적 자기애' '현재에의 집착' 그리고 '소유욕' 흥미롭게도 루스 렌델은 직접적으로 유니스가 이 모든 특징을 다 가지고 있음을 밝히고 있다. '나르시스적 자기애'는 오로지 그 자신만 절대이고 완전함을 추구하는 '동일자의 철학'에 있어 당연한 특성이 아닐 수 없다. 유니스 역시 그렇다. 그녀는 자신이 글을 모른다는 사실이 들킬까 염려하는 것 빼고는 전혀 타인에 대해 신경쓰지 않는다. 그녀는 오로지 자신의 문제 감정만이 전부이며 일가족 네명을 다 살해한 뒤에도 유니스는 자신이 받게 될 급료에 대해서만 신경쓴다. 이건 그녀가 아버지를 살해한 까닭에서도 나타난다. 유니스가 자신의 아버지를 살해했던 것은 무엇보다 그가 자꾸 그녀를 다른 이름으로 불렀기 때문이다. 더구나 유니스가 처음과 달리 점점 커버데일가를 경원시하게 되었던 것도 그들이 자꾸만 자신에게 간섭하고 자신의 세계를 바꾸려 들었기 때문이다. 즉 유니스는 그야말로 '천상천하 유아독존'인 것이다. 단 하나 글자에 대한 두려움만 빼고.

 

 

 

   현재에 대한 집착 역시 유니스는 가지고 있다. '말-중심주의'가 현재에 집착하는 까닭은 진리의 집착 때문이다. 단순하게 말해서 진리의 가장 순수한 형태가 바로 현재에 나타난 진리이기 때문이다. 이건 우리의 상식이기도 하다. 지금 눈에 보이는 것이야 말로 절대 진실이라고 종종 우리는 여기지 않는가? 그렇게 전통적 서양 형이상학의 토대를 이루는 '말-중심주의'는 현재성에 집착한다. 그런데 유니스 역시 그렇다. 루스 렌들은 단적으로 이렇게 드러낸다.  

 

  현재에만 발을 딛고 살아가는 사람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 유니스는 대부분의 사람들과는 상당히 다른 존재였다. 그녀에게는 당장 저녁 식사 오 분 늦는 사태가 십 년 전에 겪은 크나큰 슬픔보다 중요했다. 미래에 대해서는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P.71)

 

 

  소유욕 역시 마찬가지다. 애초에 말은 내 의식에서 일어난 일이었다. 그렇게 이 '나' 즉 그 무엇으로도 대체될 수 없는 고유한 '개성'은 다른 말로 하면 나만이 가진 것, 즉 소유권인 것이다. 즉 사유재산의 바탕이 되는 개인의 소유권은 바로 그 의식을 '나만의 것'이라고 할 수 있는 소유권에서 비롯된 것이었으며 데리다 역시도 철학사에 있어서 언어에 보다 우위성을 두게 된 것은 '있음'에 대한 집착 때문이라고 말한 바 있다. 그러니까 지금 우리의 자본주의 또한 '말-중심주의'에 그 연원이 있으며 그 정도로 '말-중심주의'는 '소유욕'과 떨어질래야 떨어질 수 없는 관계인 것이다. 유니스도 이것을 대놓고 보여준다. 앞서 말한 급료의 집착이 그렇지만 아래 부분에서 보다 직접적으로 드러난다.

 

   유니스 파치먼이란 인간의 흥미로운 특성은 비록 살인이나 협박은 주저하지 않았어도, 물건을 훔치거나 주인의 허락 없이 무언가를 빌린 적이 평생 동안 한 번도 없었다는 사실이다. 사물이란 신생처럼 특정 사람에게 귀속되도록 정해져 있는 것이다. 조지도 사물의 질서가 흐트러지는 모습을 싫어했지만 유니스는 그 이상으로 그런 모습을 싫어했다.(P.79)

 

 

 

   이렇게 그녀는 데리다가 말했던 '말-중심주의'의 특징을 정확히 가지고 있다. 더구나 그녀의 유일한 친구이자 같이 일가족을 살해하는 동반자 조앤 스미스가 광신도라는 사실을 고려하면 더욱 그렇다. 앞서 ''말-중심주의'가 '유일신 신앙'과 보조를 맞춰왔다고 말했는데 유니스와 조앤의 관계는 바로 이것을 그대로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거기다 조앤이 다니는, 그리고 유니스도 나중에 합류하게 되는 '하느님의 강림을 믿는 사람들'이란 교회를 고려하면 이것은 더욱 확고해진다. 이 교회는 특이하게도 오로지 설교와 고백이라는 '말'로서만 이루어지며 아예 교리로 '기도서' 같은 책들을 읽지 못하도록 못박고 있다. 철저히 활자를 배제하는 교회인 것이다. 이렇게 렌들은 조앤과 교회의 존재로써 유니스의 문맹이 바로 '말-중심주의'의 상징임을 보다 분명하게 드러내는 것이다. 이쯤 이르면 왜 유니스가 그토록 뚜렷한 이유도 없이 그리도 활자에 대한 끝없는 두려움을 가지고 있는지도 이해가 되기 시작한다. 바로 데리다가 '그라마톨로지'에서 그러한 현실 역사에 폐해를 가져다 준 '말-중심주의'를 소거하기 위해서 '활자-중심주의'를 요청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유니스가 가지는 두려움은 바로 자신을 소거할 일종의 '적'에 대한 두려움이나 마찬가지였던 셈이다.

 

 

   의도했는지 모르겠지만 루스 렌들은 유니스를 곤경에 빠뜨리고 파국을 가져오는 모든 계기들을 '활자'로 구성한다. 그러니까 결정적으로 조지가 유니스를 비난하게 된 것이 바로 '서류'였다는 것, 유니스가 문맹이라는 것을 처음으로 알게되는 멜린다가 그것을 알게 된 것이 잡지의 '심리테스트'라는 것. 또한 유니스가 결정적으로 경찰에 체포되게 만들었던 살해 현장이 생생하게 녹음된 '테이프레코더'(행여 여기에서 녹음된 것은 '소리'이지 않느냐고 반문할 것 같아 미리 알려두지만 활자가 소리와 결정적으로 다른 점은 똑같이 재현가능함이다. 그런 의미에서 녹음 역시 일종의 '활자'인 것이다.)라는 것 그리고 그 녹음테잎의 존재를 알리게 된 것 역시 재클린의 메모라는 것 등등에서 말이다. 렌들이 커버데일 일가를 유난한 책벌레들로 설정한 것도 어쩌면 이러한 '활자-중심주의'의 역습을 찍고 싶어서 그랬는지도 모를 일이다. 이렇게 되면 가장 활자에 집착하는 자일스의 존재가 정말 의미심장해 지는데 장정일은 자일스를 '문해'의 극단으로 보았지만 내 경우에는 '활자-중심주의'의 극단을 상징한다. 렌들은 의미심장하게도 유니스가 자일스를 처음 만날 때 유니스가 '그의 얼굴을 거의 보지 못했다.'라고 쓴다. 유니스에게 있어 그는 거의 부재하거나 침묵의 존재이다. 또한 살해할 때도 자일스의 목소리만 녹음에서 들리지 않는다. 이건 왜 이럴까? 대답은 역시 하나뿐이다. 자일스가 '활자-중심주의'의 가장 극단적 상징이기 때문이다. 즉 유니스에게서 가장 멀어진 존재이기에 그녀는 볼 수 없는 것이며 유니스를 끝내 파멸시킬 녹음 자체가 하나의 전체적인 '활자'이기에 자일스는 별도의 목소리를 낼 필요가 없는 것이다. 거기 녹음된 모든 정황이 바로 자일스의 글쓰기와 마찬가지이기 때문에. 이는 유니스에게 활자의 두려움을 가장 처음 심어주었던 계기를 생각하면 더욱 확고해진다. 그건 바로 자일스가 달마다 종이에 써서 붙여두던 '이달의 격언'이었다. 또한 이 '이 달의 격언'은 유니스를 둘러싼 커버데일의 일가가 '활자-중심주의'의 세계임을 분명히 드러내는 상징이기도 하다. 그렇게 렌들은 유니스와 자일스의 정교한 대립을 통해 유니스로 상징되는 '말-중심주의'와 자일스로 상징되는 '활자-중심주의'의 대립을 가져온다. 데리다가 '그라마톨로지'에서 했던 그대로...

 

 

  그런데 데리다는 왜 그것의 교정으로써 '활자-중심주의'를 가져오는 것일까? 단순하게 말해 '활자-중심주의'는 자아의 동일성을 허물고 타자성에게로 개방시키기 때문이다. 활자 자체는 외부에 씌여진 기록이며 어떤 것의 흔적이다. 그것은 나 아닌 다른 존재를 늘 추정케 하며 또한 현재의 것이 아니라 과거의 것이다. 때문에 그것은 당당히 진리를 주장할 수 없고 언제나 비판가능한 하나의 담론으로만 존재한다. 그렇게 '씌여진 활자'는 나 아닌 타자를 대면하게 한다. 활자 세계의 커버데일 일가가 유니스와는 다르게 내내 유니스에게 말을 거는 것도 그 때문이다. 단적으로 렌들은 다음과 같은 말들로 이것을 강조한다.

 

  문맹은 일종의 시각장애이다.(P.38)

 

 

 그렇게 유니스 그녀는 타인을 전혀 보지 못한다.

 

  글에 의해 통제되거나 억압되지 않는 본능으로 (P.40)

 

 

  그녀는 전혀 타인에 대한 윤리적 태도를 고려하지 않는다.

 

  물론 렌들은 이러한 커버데일의 유니스에 대한 관심을 부르조아 계급의 위선적 태도에 불과하다고 비아냥거리고 있지만 내 관점은 어디까지나 '말 중심주의' 대 '활자 중심주의'의 대립에 기초함으로 한계가 분명하긴 하지만 이런 식으로 얘기함을 어느정도 양해해주길 부탁드리고 싶다. 이는 또한 유니스에게 가장 인간적으로 대하는 멜린다가 영문학 전공(문학은 타인의 삶을 가장 많이 다루는 활자의 장르가 아닌가)이라는 점에서도 드러난다. 이렇게 렌들은 데리다가 언어가 아니라 활자에 더 우위를 둠으로써 타자에 대해 우리의 눈을 돌리려 했던 것을 그대로 형상화한다. 어쩌면 렌들은 그래서 커버데일 일가는 하필 '돈 지오바니'의 음악을 텔레비젼으로 보고 있을 때 살해당하는 것으로 그리고 있는지도 모른다. 여기서 그 시점이 중요한데 멜린다를 포함하여 커버데일 일가 모두가 유니스와 완전 결별했을 때, 다시말하면 그 때까지 유니스가 안경을 통해 활자 세계에 속한 사람임을 스스로 위장했듯이 커버데일 일가 또한 위선적인 이타적 태도로 그들의 자기애를 위장했던 것이 최종적으로 끝장났을 때 그들 모두가 처형되는 것은 정말 의미심장하다. 렌들은 그 시점의 폭발을 은밀하게 차근차근 준비하는데 그 처음은 자일스의 변화이다. 즉 절대적인 부재와 침묵 속을 떠돌던 그가 점차 사람들과 어울리게 되고 이윽고 종교에 귀의까지 하도록 변하는 것이다. 이것은 커버데일 일가가 유니스로 인해 서서히 활자의 세계에서 빠져나와 언어의 세계로 들어서고 있다는 것의 단적인 상징이 된다. 그렇게 커버데일 일가의 언어 세계로의 점차적 나아감이 끝내 저택 공간 전체를 지배하는 '돈 지오바니'의 오페라로 완성되는 것이다.(또한 그들은 유니스의 상징이기도 한 텔레비젼을 통해 그것을 보고 있음도 상기하라.) 그리고 그렇게 유니스의 세계가 완성되었을 때 그 모든 소리를 제압하는 그래서 죽음의 소리이며 유니스가 이해하고 좋아하는 유일한 소리이기도 한 총소리로 대체되고 활자 세계의 인물들은 모조리 죽음을 당하는 것은 렌들에게선 당연한 수순인 것이다. 렌들은 커버데일 일가의 언어 세계로의 들어섬을 이기심의 확장과 경로를 같이하게 만들어 오히려 활자 세계로의 머무름이 타자에 대한 관심의 유지임을 강조해 보여주려는 것이니까 말이다.

 

 

 

   3.  보다 깊은 그녀의 속내는? ...

 

 

  이러한 렌들의 주제는 그러나 전작 '내 눈에는 악마가'와 비교하면 동전의 양면이라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전작에서는 오히려 타인에 대한 지나친 관심이 비극을 가져왔기 때문이다. 이러한 차이는 어찌된 연유일까? 뭐, 양 극단은 지양하고 자기애와 타인의 대한 관심을 적절히 조절하자 정도로 편하게 말할수도 있겠지만 렌들이 그런 뻔한 얘기를 하는 것 같지는 않다. 그래서 어쩌면 전작과는 완전히 반대되는 작품을 써서 렌들 스스로 데리다적 결론에 이르려 했던 것은 아닐까 생각해 보게도 된다. 데리다가 활자에 우위를 두고 '차연(혹은 '차이'라고 부르자는 학자들도 있다.)'를 가져오는 것은 근원적으로는 오로지 하나의 해답만, 근거만, 결론만 가능하다는 전통적 서구 형이상학 대대로 내려온 '아르케'의 집착을 버리게 만들기 위해서이다. 그렇게 데리다는 그 어떤 것도 진리를 주장할 수 없는 하나의 잠정적 담론이 되길 원하며 결론을 내릴 수 없는 과정 자체가 되길 원한다. 그래야 수많은 독자적인 해석들이 왁자지껄 제 목소리로 떠들면서도 한편으론 남들의 얘기에 귀도 기울여가면서 서로 대화할 수 있으니까. 바로 이 '활자잔혹극'에서 장정일과 끌로드 샤브롤 그리고 내가 그랬듯이 말이다. 바로 그래서 렌들 역시 이렇게 전작과 완전히 상반된 주제에다 또한 내용상 다양한 해석의 가능함을 통하여 독자들에게 하나의 해답만을 가지려는 생각을 포기하게 만드려는 것은 아닐까 싶어진다. 그러니까 어딘가 있을 또다른 무언가를 향해 늘 열려진 태도를 유지하는 것. 어쩌면 이것이야 말로 렌들이 궁극적으로 우리들에게 주려고 했던 것이 아닐까? 그러고 보면 루스 렌들의 '내 눈에는 악마가'도 '활자잔혹극'도 그  모두 느닷없는 폭발의 순간을 간직하고 있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아서의 죽음도 유니스의 살해도 아무런 전조도 없이 갑작스레 찾아왔다. 마치 삶이 모조리 예측불가능성으로 가득차 있다고 암시하듯이... 렌들이 권유하는 부단한 재조정 재설정을 위한 열려진 태도는 정말 그 때문인지도 모른다. 데리다는 텍스트를 정의하기를 '차연이 직조해가는 시공간적 차이의 연쇄적 그물망'이라 했다. 이 말은 그대로 삶에게도 통용되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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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 2012-01-25 16: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 제목에다 표지에, 리뷰까지 다 멋있군요.
하...하지만 여전히 저의 달리는 지식으로는 전부 이해하기가 어렵군요 ㅋㅋ
이거 안되겠습니다. 다음 기에는 직접 소설을 신청해서 읽어보는 수밖에요..후후

헤르메스 2012-01-25 20:30   좋아요 0 | URL
루스 렌들의 활자잔혹극은 정말 추천할만한 걸작인데 어쩐지 저의 리뷰가 거리를 좁히긴 커녕 오히려 넓힌 것만 같아서 심히 걱정스럽네요 ㅠ ㅠ 안 그래도 소통을 위한 글쓰기가 어째 점점 자기 만족을 추구하고 있지는 않은가 염려되고 있는 시점이었는데... 올해엔 보다 쉽고 보다 짧게를 모토로 해야겠어요. 성향상 얼마나 지켜질 지는 미지수지만 하하... 다음 소설 신간평가단에 소이진님도 꼭 함께 했으면 좋겠네요. 그런데 제가 또 연임할 수 있을지 그게 걱정이에요. 하하...

이진 2012-01-25 23:24   좋아요 0 | URL
아니어요. 안되요 ㅠㅠ 제겐 어려운 매력으로 읽는것이 헤르메스님의 리뷰인데 쉽게 쓰신다니 아니되어요. 겨우 이 미천한 저를위해 헤르메스님의 모토를 버리신다니 안됩니다. 헤르메스님의 이런 글을 좋아하시는 분이 얼마나 많으실텐데요! 아마 헤르메스님이라면 되실겁니다... 저라면 어떨지 모르지만 하하...
 
[변호측 증인]을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변호 측 증인
고이즈미 기미코 지음, 권영주 옮김 / 검은숲 / 201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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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셨습니까? 

 길은 찾기 쉬우셨나요? 풀벌레 소리 하나 들리지 않는 이 적막한 밤엔 그저 나를 완전히 잊을 정도로 몰입할 수 있는 미스터리 소설 만큼 또 어울리는 것도 없을 것 같아서 하나 소개나 해 드리려고 오십사 청을 드렸습니다. 네, 테이블에 얌전히 놓여있는 바로 그 책입니다. 들어서 한 번 봐 보시죠... 

 

 

 맞습니다. 고이즈미 기미코... 

 이름에서 바로 알 수 있겠죠? 여성 작가라는 걸. 제목 '변호 측 증인' 말인데요, 어쩐지 아가사 크리스티의 '검찰 측 증인'을 살짝 비튼 것도 같지 않나요? 이건 제 생각이지만 어쩌면 고이즈미 기미코는 그것을 통해 같은 여성 작가인 아가사 크리스티가 바로 자신의 롤-모델임을 나타내려 한 것인지도 모릅니다. 아니나 다를까, 이 소설의 주된 트릭 역시도 작가 자신 소설에서 그 작품을 직접 언급하고 있기까지 합니다만, 아가사 크리스티의 '애크로이드 살인 사건'에서 영감을 얻은 것이니까요. 뭐, 제가 말 할 수 있는 것은 이 정도까지겠네요. 트릭의 종류를 말하는 것 까지도 스포일러가 될 수 있다고 얘기하시는 분들이 계셔서 말이죠. 조심하지 않을 수 없네요. 그런데 그 말을 그대로 따르다보니 제가 이 책에 대해서 할 수 있는 말이  '그냥 읽으세요! 읽으시면 압니다!' 꼭 이것밖에는 없겠더라구요. 제가 뭐 나이키 신발 광고하는 것도 아니고 '그냥 읽으세요!'라고만 말하자니 너무 무책임하게 느껴지네요. 

 네, 그렇죠. 언제나 고민하는 지점이긴 하죠. 리뷰로서 소개와 독자의 읽는 즐거움이 서로를 다치지 않는 가운데 성립할 수 있는 가장 이상적인 균형은... 여전히 쉬이 해결되지 않고 있기도 하구요. 특히나 이 소설의 경우는 더 그렇군요. 이 소설의 정말 뛰어난 점은 사용한 그 트릭 자체에 있거든요. 그런데 여기에 대해 함구를 해버리니 어쩔 수 없이 궁여지책으로 미치오 슈스케를 끌어올 수 밖에 없는 것 같습니다. 네, 얼마 전 우리나라에도 '달과 게'로 소개되었던 작가이기도 하죠. 그가 이 소설에 대해서 이렇게 말하더군요. "그 누구와도 공유하고 싶지 않은 전설의 걸작'이라고 말이죠.  맞습니다. 대단한 격찬이죠. 사실 이 작가가 이 소설에 대한 애정이 정말 큰 가 봐요. 해설 부분도 스스로 썼다고 하더군요. 그러니 저 격찬의 말도 그냥 하는 말이 아니라 진심에서 우러나온 말이 아닌가 싶어요... 그런데 읽고 그 트릭을 알게되면 슈스케의 말에 나도 모르게 수긍을 하게 되더라구요. 

  요즘 작품이냐구요? 아뇨, 처음 나온 건 63년이에요. 그런데 곧 절판되고 그렇게 기억에서 잊혀졌다가 뒤늦게 이 작품의 진가를 발견한 소수의 사람들 사이에서 '전설의 걸작'으로 회자되기 시작했고 결국 2009년, 그 입소문을 타고 다시 복간되기에 이르렀죠. 아시겠지만 작품이 수십년의 세월을 뛰어넘어 되살아 나는 경우는 두가지 뿐이죠. 많은 사람들의 간절한 염원이 있어서이든가 아니면 작품 자체가 고전으로 평가받을 만큼 그 가치가 높다던가... 네, 개인적으로 이 소설은 그런 가치가 있다고 봅니다. 물론 미스터리로서가 아니라 작가가 장치해 놓은 트릭 때문이죠. 

  도대체 그 트릭이 어때서 그러냐구요? 거기에 대해서 자세히 말 못한다는 거 아시잖아요? 

  그래도 말하라면 이렇게 말해야겠네요. 아마 분명히 당신도 그 책을 두 번 읽게 되리라고... 그건 내일의 태양이 뜨는 것 만큼이나 틀림없다고. 그리고 두번째 읽게 될 땐 정말 놀라게 되리라고... 왜냐하면 작가가 정말 아무런 속임수도 쓰지 않았다는 걸 알게 될테니까... 속은 건 바로 읽고 있는 당신 자신 때문이라는 걸 깨닫게 될테니까... 이렇게 말이죠. 

  다소 두리뭉실하게 이렇게 말할게요. 놀랍게도 이 책은 말이죠, 우리 자신을 돌아보게 만들어요. 특히나 독서의 습관과 관련해서 말이죠. 그러니까 도대체 우리는 무엇을 읽고 있는가 이런거에요. 그래요, 당신은 무엇을 읽고 있나요? 그건 확실히, 오로지, 절대적으로 객관적인 외부의 텍스트일까요? 우리는 그렇게 다만 그 텍스트에 담긴 작가의 2차원적으로 새겨진 육성을 듣고 있는 것일 뿐일까요? 혹시 당신은 만화를 읽는가요? 만화에는 말풍선이 있습니다. 그 말풍선엔 그림 속 인물의 대사가 담겨지지요. 그런데 우리는 만화를 읽으면서 그려진 인물의 목소리를 듣는다고 생각합니다. 실제 들려오는 것도 같지요. 남자의 경우엔 남자 목소리가 여자의 경우엔 여자 목소리가 웃을 땐 웃음소리가 울땐 울음소리가 말이지요. 그런데 거기에 있는 것은 다만 쓰여진 글자들 뿐입니다. 거기엔 감각적 자극을 일으킬만한게 하나도 없어요. 그런데도 우리는 듣는 것 같습니다. 이것은 비단 그림이 있는 만화만이 아니지요. 우리는 소설을 읽을 때도 그와 비슷한 경험을 합니다. 이건 어째서일까요? 그런데 이 경험은 그리 오래된 역사를 가지고 있지 않지요. 왜냐하면 이러한 경험은 우리가 이른바 눈으로 읽는 '묵독'이라는 걸 하게되면서 부터 생겨난 경험이고 그 묵독이라는 것은 바로 근대 이후에 생겨난 경험이니까요. 그러니까 그것은 근대 이후에 태어난 소설과 비슷한 역사를 가진다고 해야겠군요.묵독이라 함은 자기 의식 내부에 연극 상연을 위한 하나의 무대를 만들어두는 것과 같지요. 그렇게 그것은 전적으로 내 의식 안에서 이루어지는 공연입니다. 물론 그 공연을 진행시키는 것은 외부의 책입니다만 그것은 연출가와 배우에게 주어진 대본 이상의 의미는 없는 것이죠. 그것을 관객으로 하여금 희노애락을 느낄 수 있도록 만들려면 전적으로 연출가의 연출과 배우의 연기가 필요합니다. 즉 의식 속에서 그것을 우리가 생생히 느끼도록 만드는 것은 전적으로 바로 우리 자신이라는 것이죠. 네, 고이즈미 기미코의 '변호측 증인'은 바로 그 사실을 우리에게 일깨워 주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독서라는 것이 그저 저자에서 독자로 가는 일방적 과정이 아니라 독자와 저자 쌍방이 하나의 합을 이루어 같이 만들어 가는 과정임을 다시금 깨닫게 해 주는 것이지요. 소설이 이루어지는 바탕으로써의 세계 자체는 바로 우리 자신이 만드는 것이며 소설이 제대로 된 이야기로서 존재할 수 있도록 만드는 규칙 조차 바로 우리 자신이 정하는 것이라는 걸 말입니다. 단 한 마디로 말해, 이 '변호 측 증인'은 독서라는 것이 무엇보다 '참여'라는 걸 일러줍니다. 모든 인간을 이성을 가진 독립적 주체로 보았던 근대에 이르러 태어난 소설이 새로이 가져다 준 독서 경험인 '묵독' 자체에 본래적으로 존재하였던 시선, 즉 읽는 자 역시 저자만큼이나 하나의 독립된 주체로 여기는, 그렇게 대화의 참여자로 바라보았던 바로 그것을 다시금 느끼게 합니다. 

  네, 그러고 보니 그러네요... 이 소설이 그렇게 소설의 태초부터 있었던 독자에 대한 본래적인 시선을 다시금 일깨우는 존재라면 그야말로 고생대의 삼엽충이나 암모나이트 화석 같은 것으로 볼 수도 있겠네요. 당신이 제대로 된 고생물학자라면 그러한 아주 귀한 화석을 발견했을 경우 꼼꼼하게 훑으시겠죠. 어쩌면 우리는 모든 텍스트를 바로 그렇게 바라보아야 할지도 모릅니다. 돋보기로 들이대듯 세밀하게 말이죠. 아시다시피 좋은 공연은 늘 대본을 제대로 소화시킬 수 있었을 때 가능하지 않던가요? 푸코가 괜히 '지식의 고고학'이란 말을 한 게 아니죠. 그래, 어떤가요? 고이즈미 기미코의 '변호 측 증인'을 통해 당신의 고고학적 태도의 출발을 연마해보는 것도 좋을 것 같은데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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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고양이 2011-10-28 13: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헤르메스님, 저 사진 어떻게 찍으신거예요?
아니 어디에서 저렇게 절묘한 손가락 사진을 찾으셨대요? ^^

진짜요,, 두번 읽게되리라는 말씀이시죠. 접수합니다~

헤르메스 2011-10-28 22:20   좋아요 0 | URL
아, 저 사진의 손가락은 'BAD FINGER'라고 비틀즈가 자신의 레이블 '애플'을 설립하고 처음 발탁해서 키운 그룹의 데뷔앨범 커버에요. 그 위에 책을 놓고 찍은 것이죠^ ^ 우리에겐 잘 알려진 'WITHOUT YOU'의 오리지널 원곡이 이들의 작품이죠.

그리고 반드시 두 번 읽게 되실 겁니다. 제가 보증할게요^ ^

노다웃 2011-11-16 01: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왠지 필이 오네요. 이건 부디 제 맘에 쏙 들었음 좋겠어요. 생각보다 마음에 쏙 드는 미스테리 소설 찾기가 쉽지 않더라고요.

헤르메스 2011-11-16 10:12   좋아요 0 | URL
제가 노다웃 님의 취향을 모르기에 확신하기는 어렵지만 확실히 수작인 것은 틀림없는 것 같습니다. 이 소설의 진정한 뒤통수는 그 맞는 순간에 오는 게 아니라 어떻게 맞게 되었는가 깨닫는 순간에 오는데요... 진정한 장인의 기교는 드러나지 않는데 있다더니 과연 그렇구나 하는 걸 느끼게 되었습니다. 부디 노다웃님의 마음에도 들었으면 좋겠네요^ ^

2011-11-20 04: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펭클에서 요 리뷰 보자마자 알라딘 들어와서 변호측증인 주문했다죠.
전 이렇게까진 해석 못하겠지만, 역시 엄청난 책이었습니다. :)
오랜만에 뒷통수 치는 맛도 좋았고.
그치만 두 번은 읽지 않았네요. 그저 앞으로 돌아가서 이상하게 생각했던 부분들 되짚어보면서 아하, 했던 정도. 내용 잊어버릴 쯤에야 다시 읽어볼 것 같은데, 그게 언제가 되려나요. 너무 강렬해서 잊혀지지가 않네요. 보통 읽고나서 범인이며, 트릭이며, 추리며 다 잊어버리는 편인데.'-'
오랜만에 신간 미스터리 읽어서 좋았어요. 추천 고맙습니다. 또 괜찮은 거 보이면 한번씩 찔러주세요. ㅎ

헤르메스 2011-11-22 23:08   좋아요 0 | URL
앗 교님! 들려주셨군요^ ^
마음에 드셨다니 정말 다행입니다.
저는 중반에서 내가 지금까지 뭐 읽은거야? 하는 생각에 정말 거기서 바로 앞으로 달려가 눈에 불을 키고 내가 어디서 속았는지 읽었어야 했어요. 흑흑 제 기억력이 짧아서 그런걸지도 모르겠어요. 아무튼 교님 정말 반갑습니다. 또 좋은 작품 찾게되면 바로 알려드릴게요^ ^

2011-11-23 18:07   좋아요 0 | URL
저야말로 반갑고 고맙습니다 :)
그나저나 헤르메스님이 기억력이 짧다면, 전 없는거나 마찬가지일듯 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