맹독 귀족 탐정 피터 윔지 3
도로시 L. 세이어즈 지음, 박현주 옮김 / 시공사 / 2011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한 남자가 죽는다. 그에겐 미모에다 능력까지 겸비한 아내가 있다. 남자의 사인은 비소에 의한 중독사. 한 마디로 독살. 그는 그 날 자신의 사촌과 저녁을 먹었고 밤에는 지금은 별거중인 아내를 찾아가 커피를 마셨다. 그리고 그 다음날 그는 전날 먹은 비소로 인해 죽었다. 수사가 벌여졌지만 그가 그 날 어디서 어떻게 비소를 먹었는지 알아 낼 수가 없었다. 그래서 자살인지 타살인지 조차 분명하지 않게 되었다. 그러다 아내가 비소를 가지고 있었음이 밝혀진다. 그녀가 남편에게 비소를 먹었다는 직접적인 증거는 없지만 그녀가 남편과 불화를 겪고 있기에 그 살해 동기가 충분하다는 점과 용의선상에 오른 인물들 중 유일하게 비소를 지니고 있었다는 것으로 인해 검찰은 그녀를 남편 살인죄로 기소한다. 그렇게 열 두명의 배심원들 앞에서 그녀의 유죄 여부를 결정하는 법정이 열리게 되고 바로 그 법정에서 이 소설은 시작된다.

판사석 위에는 선홍색 장미가 놓여있었다. 마치 그 자리에 핏방울 튄 듯이 보였다.(p.7)

 이 소설의 주제마저 함축하고 있는 게 아닌가 생각될 정도로 의미심장하면서도 매혹적인 이 문장과 더불어... 

 이것이 1930년에 도로시 세이어스가 발표한 이 소설 '맹독(STRONG POISON)'을 이끌어가는 주가 되는 사건의 개요이다. 그러니까 세이어스의 대표적 캐릭터, 명탐정 피터 윔지 경이 풀어야 할 미스터리 인 것이다. 과연 피해자는 어디서 누구에게 어떻게 독을 먹게 되었나 말이다. 안 그래도 미스터리라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는 그. 그토록 수사를 집중했지만 도저히 풀 수 없었던 난제인 만큼 그 사실 만으로도 윔지의 가슴은 벌렁거릴 판이지만 하지만 다른 쪽에서 그의 가슴을 더더욱 뛰게 만들고 있었으니 그게 바로 지금 살인 혐의를 받아 법정에 서 있는 여인, 헤리엇 베인이다. '사랑이란 그 찾아옴이 예측불가능하기에 더 아름다운 것이다' 라고 말한 이도 있다지만 정말 사랑은 그러한 것인지? 피터 윔지는 전혀 예기치 않게도 법정에 선 그녀를 보고 그만 한 눈에 반해 버린 것이다. 사랑이란 묘약은 장님으로 만드는 것에 있다는 말 처럼 그렇게 큐피드의 화살을 맞아버린 윔지는 덮어놓고 그녀의 결백을 믿어버리고 자신의 모든 명탐정적 재능을 발휘하여 오로지 그녀의 무죄를 입증하는 것으로 그녀를 향한 그의 사랑을 입증하려 한다. 호사가적 취미의 미스터리 풀이가 이제 사랑을 쟁취하기 위한 절박한 수단이 된 것이다.  

 소설 '맹독'은 마트에서 흔히 보는 '1+1'에 또 하나를 더 '+1'한 소설이다. 그렇게 이 소설은 하나를 가지고 세가지 측면에서 즐길 수 있다. 한 파인트에 세가지 종류의 각기 다른 맛을 가지는 아이스크림을 섞어 담아 떠먹는 맛이라고나 할까. 아무튼 소설 '맹독'을 즐기는 코스에는 크게 세가지가 있다. 

 

   A 코스... 

  그 첫째는 순수한 미스터리로 즐기는 코스이다. 소설은 초반부터 판사의 말을 통하여 사건의 전모를 세세하게 밝혀가며 정리해 준다. 하지만 그렇게 세세하게 밝혀진 피해자의 그 날 하루 경로를 아무리 따져보아도 도대체 어디서 그가 어떻게 독을 먹게 되었는지 알 수가 없다. 피터 윔지에게 이것은 '나인 테일러스' 못지 않는 난제인 것이다. 게다가 그는 이것을 다음 재판이 열리게 될 때까지 남겨진 시간인 '한 달'안에 풀어야 한다. 그러지 못하면 자존심의 상처가 문제가 아니라 일생동안 유일하게 느꼈던 운명적 사랑을 잃어버리게 된다. 전의도 결의도 그 어느 윔지의 시리즈 보다 불타오르고 굳세어질 수 밖에 없다.  그렇게 윔지를 몰아붙일 정도로 난제이지만 세이어스는 G.K 체스터튼이 주도한 추리 클럽의 창립 맴버 답게 아무리 난제라고 하여도 아무런 반칙 없이 추리 게임을 공정하게 이끌어 나간다. 단서는 빈틈없이 주어지며 그 모든 건 논리적으로 잘 따지기만 하면 하나로 연결되게 되어 있다. 그렇게 절박한 윔지를 도와 난제를 해결하는 순수 미스터리적 즐거움을 여기서 얻을 수 있다. 

 

 B 코스... 

  미스터리를 싫어하시는 분이라면 이 소설을 하나의 로맨스로 읽는 것도 가능하다. 앞서도 말했듯이 이 소설은 운명적 사랑을 느낀 한 남자의 절절한 애정 고백기로도 읽을 수 있으니까 말이다. 언제나 귀족(아시다시피 그는 공작 가문 출신이다.)적 매너를 유지하며 매사에 강한 자존심과 쿨한 면모를 보여주던 윔지가 이 소설에서 만큼은 쉽사리 마음 문을 열지 않는 해리엇 베인 때문에 전전긍긍해 하고 자존심이고 뭐고 다 팽개치고 오로지 애정만을 애걸복걸 하는 모습을 보여주는데 그것이 참으로 귀엽지 않을 수 없다. 귀족과 평민이라는 신분 차이이든 이미 한 번 결혼한 몸에다 살인 누명까지 쓰고 있는 그래서 열악하고 편견 마저 얻기 쉬운 사회적 신분에 처해 있는 그녀의 처지든 전혀 상관하지 않고 오로지 투우장의 숫소 처럼 사랑만을 향하여 달려나가는 그의 모습은 윔지에게 이런 면도 있었나 싶을 정도로 새삼 놀라기도 한다. 그렇게 한 남자의 순정이 담긴 로맨스로 즐길 수도 있다. 

 

 C 코스... 

  사실은 이 코스가 내가 이 소설에 대해 말하려는 핵심이 될 것이다. 도로시 세이어스는 이런 면에서 이 작가를 그저 미스터리 작가로만 묶어두는 것에 강한 반발심을 느끼게 만든다. 때로 어떤 면에서는 순문학 보다 더 높은 경지를 보여주니까 말이다. 바로 이 '맹독'의 C 코스가 그런 경우이다. 이 소설은 20년대 본격적으로 사회문제로 대두되었던 '잉여 여성' 문제를 정면으로 다루고 있다. 여기서 '잉여 여성'이란 영국 사회에서 1차 대전으로 인해 대부분의 남자가 전쟁에 참여하게 됨으로써 절대적으로 부족해진 남성의 수 때문에 결혼을 못하고 홀로 살아가는 여성을 지칭하던 말이었다. 소설에서도 이 '잉여 여성'이란 말이 직접적으로 나온다. 

 강철금고 안에 있는 개인 기록을 보았다면 이 여자들이 모두 세간에서는 냉혹하게도 '잉여'라고 표현하는 계층의 여성들임을 알았으리라 (P.81) 

  당시만 해도 영국사회에서 여성들이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길이란 오로지 결혼 밖에는 없었기 때문에 결혼하지 않고 홀로 지내는 여성들에게 사회는 이렇게 경멸적인 시선을 보내고 있었다. 잉여 여성이란 그 뜻에 내재된 '쓸모없는 여성'이란 의미 그대로 경멸적 시선의 또 다른 표현이었던 것이다.  이런 사회적 분위기 안에서 도로시 세이어스의 '맹독'은 그렇게 경멸당하고 천대받았던 여성들을 위해 '그렇지 않다. 그들은 오히려 남성 보다 더 유용한 존재들이다.'라고 외치면서 떨치고 일어난 것과 마찬가지인 작품이다. 말하자면 '맹독'은 페미니즘이 짙게 배인 작품이다. C 코스는 바로 이러한 페미니즘적 독해이다. 이렇게 읽으면 무엇보다 판사의 기다란 독백으로만 채워지는 첫 부분이 아주 흥미롭게 된다. 

 

  왜 도로시 세이어스는 아무리 사건 정황을 정리해준다고 하지만 오로지 혼자 떠들기만 하는 기나긴 판사의 독백으로 시작한 것일까? 여기서 앞서 인용했던 소설의 첫 문장은 그 이유를 짐작하는데 정말 중요해진다. 판사석 위에 놓여진 선홍색 장미. 판사의 검은색 법복과 선명히 대비되는 붉은 핏방울. 바로 이 이미지 자체가 판사의 검은 법복으로 상징되는 가부장적 남성 사회로 부터 경멸당하고 상처를 입은 붉은 핏방울의 여성을 집약적으로 나타내고 있지 않은가. 그렇게 그 기나긴 판사의 독백은 사실 여성의 틈입을 전혀 허용하지 않는 그 자체로 단일하고도 굳건한 독재적 남성 사회 자체를 드러내는 것이며 따라서 그 남성의 법정 안에서 유일한 여성인 해리엇 베인은 살인죄라는 낙인을 받아 서 있는 것이다. 그렇게 세이어스는 소설의 초반 여성 앞에 압도적으로 군림하는 남성 사회의 모습을 보여준 뒤 그것을 차례로 허물어 감으로써 오히려 남성 보다 여성이 더 유용하며 그렇게 대등한 존재임을 결국 드러내려 한다. 때문에 사건 해결에 있어서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것도 언제나 윔지가 아니라 여성들인 것이다.(스포일러상 이름은 밝히지 않겠다.) 미스터리 작가가 아니라 순문학적 작가로서의 세이어스가 빛을 발하는 곳은 유령과 대화하는 '강신회' 장면이다. 세이어스는 그 강신회 장면을 초반의 혼자 떠드는 판사 장면과 일부러 극명하게 대비되도록 연출한다. 왜냐하면 강신회 장면이 결정적으로 판사가 단죄한 유죄를 정면으로 반박가능한 증거를 가지도록 하는 장면이기 때문이다. 그 강신회 장면은 오로지 여성으로 이루어지며 윔지가 시켜서가 아니라 전적으로 그 여성 스스로 찾아낸 방법이기도 하다. 거기다 말을 하는 사람의 수도 판사의 하나에서 강신회의 다수로 차이나게 하여 홀로 독재적인 남성성과 대화 가능한 다수성의 여성성을 대조시킨다. 세이어스가 이렇게 공을 들여가며 판사의 독백 장면과 강신회 장면을 연출하는 이유는 지극히 간단하다. 앞에서도 말했듯 여성들이 남성들 만큼 유용하며 대등한 존재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단적으로 말해 판사는 진실을 전혀 찾아내지 못했지만 강신회는 그 진실을 찾아내었기 때문이다. 사실 소설 전체적으로 보아도 진실을 찾고 드러내는 쪽은 언제나 여성들이다. 이렇게 '맹독'은 그야말로 페미니즘적 소설이며 이렇게 C 코스의 페미니즘적 입장으로 읽으면 더더욱 세이어스가 소설 자체에 공들인 세부와 그 깊이가 드러나게 된다. 

  한 작품으로 다양한 맛을 볼 수 있다면 독자로서는 금상첨화가 아닐 수 없다. 이렇게 도로시 세이어스가 독자를 위해 마련한 세가지 코스에서 당신은 어떤 코스를 더 사랑하게 될까 지금은 그것이 궁금하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마녀고양이 2011-10-11 12: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헤르메스님, 윔지 시리즈 앞권들도 읽어보셨나요? 좋은가요?
제가 '증인이 너무 많다'를 계속 살까 말까 망설이는 중이거든요.
오호라,,, 윔지 경이 헤리엇에게 애걸복걸한다는 부분만으로도 홀딱 넘어가겠는걸요.
흠, 저는 B 코스 도전하게 되겠군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

잠시 다아시 경과 착각했어요. 시험 일정 끝나면, 읽어봐야겠어요. 아니다,
중간 중간 머리를 쉬어 주어야 공부도 되니까,, 변명을 중얼중얼중얼...... 헤헤.

헤르메스 2011-10-19 01:12   좋아요 0 | URL
앗! 마녀고양이님께서 댓글을! 일부러 이렇게 달아주셨는데 이제야 확인하게 되다니 흑 ㅠ ㅠ 앞으론 서재에 더더욱 자주 들어와야겠어요.
마녀고양이님께서 B코스를 좋아하신다면 '증인이 너무 많다'도 재미있게 즐기실 수 있으실 것 같아요. 윔지의 여동생 메리와 윔지의 절친 파커 경감의 알콩달콩한 애정행각을 보실 수 있거든요. 그리고 그 결말은 '맹독'에서 이루어지죠. 시험 준비중이시군요. 좋은 결과 있으시길 응원하겠습니다.^ ^
 
셜록 홈스의 라이벌들
아서 코난 도일 외 지음, 정태원 옮김 / 비채 / 2011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아기새의 경우 처음 보는 존재가 그의 어미가 된다고 한다. 모친 결정의 매커니즘이 어떻게 작동하는지는 알 길이 없으나 우리네 취향이라는 것도 행여 그렇게 결정되는 것은 아닐런지. 그러니까 어릴 때 어떤 경로로든지 좋아하게 된 것이 하나의 취향이 되어 자라나서까지도 남아있게 된 것인 아닐런지 문득 그런 생각이 드는 것이다. 그냥 객적인 소리인지도 몰라도 불현듯 이런 생각을 하게 된 것은 바로 고전미스터리에 대한 내 취향 때문이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내가 어쩌다가 이토록 고전 미스터리를 좋아하게 되었는지 딱히 그 계기가 떠오르지 않는 것이다. 다만 생각나는 건 그 어느 것 보다 미스터리를 많이 읽었다는 기억 뿐. 왜 그렇게 많이 읽었을까 따져보아도 마치 갓 태어난 아기새가 처음 두 눈에 들어온 대상을 무작정 엄마라 믿듯 그렇게 나 역시 고전 미스터리를 좋아하게된 듯한 막연한 느낌만이 인다. 

 

   한 평생 미스터리만을 위해서 사시다가 얼마전 안타깝게 작고하신 고 정태원님에게 선생님은 어쩌다가 미스터리를 사랑하게 되셨나요 하고 물으면 뭐라고 대답하실까? 정태원님은 나와는 달리 그 연유에 대해 말씀해주실 수 있으실까? 백조는 죽기전에 마지막으로 딱 한 번 운다고 한다. 그런데 그 마지막 울음 소리가 그지없이 아름답다고 한다. 그래서 작가가 죽기 전 마지막으로 세상에 내어놓는 작품을 우리는 더러 '스완송', 백조의 노래라고 부른다. 그렇게 나도 이 작품, 정태원님이 직접 선정하시고 번역하신, 셜록 홈스를 쓴 코넌 도일을 비롯하여 모두 10명의 고전 미스터리 작가들의 서른 편의 단편이 들어있는 이 책, '셜록 홈스의 라이벌들'을 고 정태원님의 스완송이라고 부르고 싶다. 

 

 

 

  정태원님은 자타공인 유명한 셜로키언이다. 스스로 주석까지 단 홈스 전집을 번역 출간했을 만큼. 그 홈스 전집은 무엇보다 정확하고 꼼꼼한 주석으로 이름이 놓은데 그런 정도의 주석을 달 수 있다는 것은 그만큼 정태원님의 고전 미스터리에 대한 지식이 아주 방대하고 해박하다는 것을 증명한다. 그런데 그 정도의 방대하고 해박한 미스터리 지식을 가지려면 왠만한 열정과 애정이 아니고는 불가능할 것이다. 그러니 홈스 전집 자체가 그만큼 고전 미스터리를 향한 정태원님의 열정과 애정을 나타내는 하나의 구체적 증거라 할 수 있을 것인데, 지금 나온 이 '셜록 홈스의 라이벌들' 역시도 그 열정과 애정을 드러냄에 있어서 그 홈스 전집과 맞먹는다 하겠다. 

 

  여기에 실린 작품들은 모두 셜록 홈스가 연재되었던 죠지 뉸즈라는 남자에 의해 창간된 '스트랜드 매거진'에서 연재되었던 미스터리 단편들 가운데서 정태원님에 의해서 직접 선정된 것들이다. 많이 알려진 유명한 작품들 보다는 다소 덜 알려졌지만 19세기 당시 고전 미스터리의 다양하면서도 그 진면목을 느낄 수 있는 작품들로 선정되었다. 이 중 베로니스 에뮤스카 오르치의 '구석의 노인' 단편들이나 타이타닉호 침몰 당시 아내를 구하고 대신 배와 함께 죽은 잭 푸트렐의 작품들은 이미 동서 미스터리로 국내에 선을 보인 적이 있으나 내가 직접 찾아보니 각각 단 한 편 만이 겹칠 뿐이고 모두 처음으로 국내에 소개되는 작품들이었다. 그만큼 정태원님이 가급적 국내에 처음 소개되는 것들로만 세심히 선정했다는 의미가 되리라. 

 

 

 

   그래서 나같이 고전 미스터리를 좋아하는 이에게는 그 세계를 보다 더 풍성하게 만들 수 있는 값진 선물이 될 것 같다. 혹시 어릴 때 해문출판사에서 나온 '세계의 명탐정 45인' 같은 책을 보면서 언젠가는 거기 나온 모든 명탐정들의 작품들을 읽겠다고 꿈꾸었던 이들이라면 더더욱 '종합선물세트'가 되어 줄 것이다. 만듦새도 좋고 번역도 유려하며 거기다 어릴 때 미스터리를 읽으면 꼭 보였던 삽화(여기 실린 삽화들은 '스트랜드 매거진' 연재 당시 같이 실렸던 삽화들이다.)까지 있어서 향수마저 듬뿍 느끼게 해 줘서 금상첨화다. 고전 미스터리의 팬으로써 전혀 예기치 않은 순간에 모든 면에서 흡족할 만한 이런 책을 받고 보니 마치 정태원님이 마지막을 예감하시고 당신 자신이 산타클로스가 되어 자신과 똑같이 미스터리를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마지막으로 멋진 선물을 주시고 가시려고 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느껴지기도 한다. 그래서 고맙고 아이가 하나 남은 사탕을 그렇게 먹듯 아껴가며 조금씩 천천히 먹었다. 진한 추억의 내음마저 물씬 머금은 그 단편들을... 

 

   아기새에게 한 번 엄마로 인정된 존재는 영원히 엄마로 남는다. 그렇게 아기새 처럼 내게 낙인처럼 찍힌 고전 미스터리의 취향도 영원히 그렇게 나와 함께 할 것 같다. 이유도 없고 까닭도 모르지만 어쩌겠는가 마냥 좋은 걸. 아마 정태원님도 그렇게 대답하시지 않을까? 좋아하는 이유를 따질 만큼 즐길 시간이 그리 많지 않으니 그냥 마음껏 즐기고 볼 일이라고...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인어의 노래]를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인어의 노래 - 판타스틱 픽션 블랙 BLACK 8-1 프로파일러 토니 힐 시리즈 1
발 맥더미드 지음, 유소영 옮김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11년 6월
평점 :
품절


  

그러면 우리 갑시다, 당신과 나,

수술대 위에 에테르로 마취된 환자처럼

저녁이 하늘에 펼쳐져 있을 때,

우리 갑시다, 어떤 반쯤 버려진 거리를 통해,

싸구려 일박 여인숙에서의 불안한 밤과

굴껍질이 있는 톱밥 깔린 레스토랑의

중얼거리는 뒷골목을 지나서.
 

                                        - T.S 엘리어트, 'J 알프레드 프루프록'의 연가 중에서 - 

 

  1987년 데뷔한 발 맥더미드는 이미 그동안 범죄소설 장르에 있어서 그 끼친 공로를 인정받아 작년, 그러니까 2010년 CWA에서 평생공로상마저 수상한 바가 있다. 아마도 그 공로의 대부분은 바로 이 소설 '인어의 노래'로 시작된 '토니 힐' 시리즈에게서 나왔다고 할 수 있을 것인데, '양들의 침묵'의 인기로 인해 프로파일링이 약간씩 알려지고는 있었으나 그 유명세에 비해서는 프로파일링이라는 것이 어떤 것인지 제대로 보여주던 작품이 아직은 존재하지 않던 90년대 중반 그 때, 발 맥더미드는 바로 이 '토니 힐' 시리즈를 통해 여전히 미지의 영역으로 독자들에게 남아있었던 '프로파일링'을 꽤 사실적인 묘사로서 제대로 그것을 느끼게 해 주었기 때문이다. 그 시도와 결과가 얼마나 성공적이었는지는 등장하자마자 그 해 영어권 최고 범죄소설에게 주는 '골든대거'상을 받았다는 사실이 이를 증명한다고 하겠다. 

  우리나라에서야 지금 소개되었지만(아마도 작년에 평생공로상을 수상한 것이 결정적 계기가 되지 않았을까 싶은데) 평소 영국드라마를 챙겨보았던 분들이라면 아마도 이미 오래전에 이 '토니 힐' 시리즈를 만나보았을 것이다. 2002년에 원작의 인기에 힘입어 영국 ITV에서 'WIRE IN THE BLOOD'란 제목으로  드라마로 만든 적이 있기 때문이다. 

 

  

 

    원작의 높은 인기 탓이었는지 이 드라마는 무려 여섯 시즌까지 방영되었는데 특히나 롭슨 그린이 연기한 주인공 토니 힐이 보여준 독특한 매력이 톡톡히 한 몫을 했다. 본인 역시 이 드라마를 먼저 보고 나중에 원작을 접한 케이스인데 드라마에서의 본 토니 힐 캐릭터가 너무 익숙했던 지라 원작을 읽을 때는 거기 묘사되는 토니 힐이 아무래도 드라마의 토니 힐과는 차이가 있어 사실 몰입하기 조금 어려운 것도 있었다. 원작의 토니 힐은 '발기 불능'이란 것만 빼면 조금의 흠도 없는 매력적인 신사이지만 드라마속의 토니 힐은 처음 부터 와이셔츠를 반은 넣고 반은 밖으로 뺀 그렇게 제대로 정돈조차 하지 못하고 나오는 등 어딘가 어설프고 서투르기 짝이 없는 약간 찌질남스럽기도 한 그런 캐릭터였던 것이다. 

  

 

         드라마에서 토니 힐의 첫 등장 장면. 반쯤 삐져나온 와이셔츠가 보인다. '인어의 노래'를 각색한 것으로 시즌 6 까지 이어진 'WIRE IN THE BLOOD'의 첫 시작을 열었다. 

 

  사실 드라마에서 이렇게 토니 힐을 원작과는 다르게 인간 관계에 있어서 좀 모자라는 캐릭터로 설정한 것은 다 이유가 있다. 그리고 그것은 원래 발 맥더미드가 '인어의 노래'를 비롯, 토니 힐 시리즈 전체를 통해서 추구하려던 주제와도 일맥상통하는 것이기도 했다. 토니 힐은 프로파일러다. 프로파일러의 핵심은 대상의 내부로 들어가는 것. 그렇게 타자를 자신 만큼 완벽하게 이해하는 것이다. 토니 힐은 게이만을 잔인한 고문 끝에 살해하는 연쇄살인범을 프로파일링 하면서 끊임없이 그 범인 자체가 되려고 애를 쓴다. 그는 자주 '그라면 어떻게 했을까?' 생각하며 마치 그와 대화를 하는 것 처럼 독백을 한다. 드라마의 토니 힐은 한 술 더 떠서 아예 시체 있는 자리에 그 자세 그대로 누워보기까지 한다.(나중에 이것은 일본드라마 '언페어'에서 다시 모방된다.) 

 

   

      역시나 '인어의 노래'에서의 한 장면. 그가 본격적으로 개입하게 된 사건의 시체 발견 장소에서 시체의 현장 사진 그대로 토니 힐이 누워보고 있다

 

  프로파일링은 토니 힐이 타자와 관계를 맺는 방식이다. 그는 실제의 그가 아닌 그가 남긴 흔적, 잔여를 통해 그와 관계를 맺는다. 흔적과 잔여는 존재에서 떨어져 나온 일부분일 뿐, 그 자체가 존재가 될 수는 없기에 토니 힐에게 그 모든 것은 해석을 위한 단서들에 지나지 않는다. 말하자면 토니 힐이 프로파일링을 통해 타자와 관계를 맺는 방식은 오로지 그 자신만의 해석이 바탕이 되는 그렇게 순전히 자기 만족적 환상 위에서 이루어지는 만남인 것이다. 해석이 그대로 실체적 진실을 담보하지는 못한다는 점에서 그 또한 하나의 '환상'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토니 힐이 프로파일링을 통해 궁극적으로 대상과 일치되고자 하는 욕망은 자기 작위적 환상을 더욱 더 굳건히 하려는 노력과 다름이 없다. 그러니까 한 마디로 토니 힐의 프로파일링은 '자폐적'이고 '도착적'이다. 때문에 토니 힐은 현실 세계에서 진짜 인간과 관계를 맺을 때 드라마에서 처럼 서투르고 원작에서 처럼 '발기 불능'에 빠질 수 밖에 없는 것이다. 토니 힐의 '발기 불능'은 그의 프로파일링이 그야말로 자폐적임을 드러내는 징후이다. 진짜 연인, 그렇게 실체적 존재를 껴안을 수 없는 그의 '한계'는 그야말로 그가 오로지 자신이 만들어내는 작위적 환상 가운데서만 충족을 느낄 수 있는 존재임을 보여준다. 이것은 토니 힐이 오로지 '폰-섹스'를 통해서만 절정에 오를 수 있는 것에서도 드러난다. '폰-섹스' 역시 실체와 행하는 것이 아니다. 있는 것은 다만 스스로 기꺼이 만들어가는 작위적 환상만이 있을 뿐이다. 실제가 아니라 스스로 꾸미는 가상의 섹스. 토니 힐이 그것으로만 절정에 오를 수 있다는 것은 그가 오로지 자기만의 작위적 환상안에서만 타인과 관계를 맺을 수 있는 '자폐적' 인간임을 단적으로 드러낸다. 드라마는 더 나아가 시간날 때 마다 '툼 레이더' 게임을 즐기는 게임광으로 까지 만든다. 아시다시피 이러한 '게임광'의 모습은 사실 '인어의 노래'에서 연쇄살인범이 가지고 있는 취미였다. 

   토니 힐의 이러한 형상화는 발 맥더미드가 토니 힐 시리즈를 단순한 스릴러로만 만들지 않았다는 걸 암시한다. 무엇보다 앞서 드라마가 일부러 범죄자의 취미를 토니 힐에게 주었듯이 그렇게 토니 힐과 그가 추적하고 체포해야 할 범죄자가 인간 관계에 있어서는 사실은 똑같은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는 데서 단적으로 드러난다. '인어의 노래'는 두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각 챕터가 시작될 때 마다 연쇄살인마의 자전적 기록이 먼저 나오도록 되어 있다. 그러니까 우리는 먼저 범죄자가 어떻게 범죄를 행했는지를 그 육성으로 듣게되는 셈인데 거기서 우리가 보는 것은 그 범죄자의 행위 역시 작위적이고 일방적인 형태라는 것이다. 그러한 범죄자가 맺는 관계의 성격은 무엇보다 '고문'이라는 것에서 집약적으로 드러난다. 이 '고문'은 바로 토니 힐의 '프로파일링'과 근저에서 많이 닮았다. 토니 힐이 프로파일링을 통해 자신이 작위적으로 만들어낸 환상을 점점 실체로 만들어가듯이 고문 역시도 범죄자가 꿈꾸는 진실을 그 대상으로 하여금 토해내도록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결국 프로파일링도 고문도 자기가 만들어내거나 바라는 진실을 '실체화'로서 보상 받는다는 점에서 똑같은 행위인 것이다. 결국 그런 의미에서 토니 힐과 범죄자는 똑같은 존재들이다. 드라마는 그것을 '게임광'의 면모를 통해서 더욱 더 강조하지만 발 맥더미드 역시 이들의 유사성을 작품 곳곳에 공들여 세공해 놓는다. 스포일러상 자세히 말을 못하지만 토니 힐과 범죄자가 관계를 맺는 방식이나 결말의 대치 장면은 바로 그것을 드러내기 위한 장치가 아닌가 생각된다. 

 

   그러니까 발 맥더미드의 토니 힐 시리즈는 결국 '관계'에 대한 얘기인 것이다. 토니 힐이 그렇게 묘사된 것, 범죄자와의 유사성 이 모두가 그것을 위해 만들어진 설정인 것이다. 아마도 발 맥더미드의 주된 관심은 단순히 프로파일링을 통해 범죄자를 체포하는 것 거기에만은 있지 않을 것이다. 보다 본질적으로는 토니 힐이 가지고 있는 '자폐적' 인간 관계를 어떻게 하면 허물고 보다 진정한 인간 관계를 만들어갈 수 있는 지 그것을 풀어보는 것에 더 있지 않을까 생각된다. 그러니까 토니 힐 시리즈는 사실 토니 힐을 치료하는 시리즈이며 바로 그 때문에 발 맥더미드에겐 토니 힐을 진정한 인간 관계 형성을 통해 치료해 나갈 또 하나의 존재가 필요했다. 그녀가 바로 '캐롤 조던'인 것이다 

 

 

   '인어의 노래'에서의 캐롤 조던. 소설 보다는 좀 연상으로 묘사되었다. 수사국에서 지위도 높아서 돈 메릭을 부하처럼 부리고 있다. 같이 나온 고양이는 그녀가 기르는 '넬슨(영국 제독의 이름인가?)' 

 

  캐롤 조던은 경찰국 내에서 유일한 여성 형사다. 그렇게 그녀는 고립적이다. 그녀는 당당한 형사로서 인정받고 싶지만 경찰에서는 '형사'로 보기 보다는 먼저 '여성'으로만 본다. 토니 힐을 만나고 나서 그녀는 호감을 가지는데 그 주된 이유가 이러했다. 

적어도 토니 힐은 그녀가 만나 본 몇몇 전문가들과는 달리 전문가로서의 오만에 사로잡혀 있는 것 같지 않았다. 그녀는 대부분의 남자들과는 달리 그녀의 어려움에 잘난 체 하지 않고 공감을 표해주면서 문제를 최소화 할 수 있는 쪽으로 기꺼이 함께 움직여 주었다.(p.76)

 

  그러니까 토니 힐은 그녀를 동료로서 있는 그대로 인정해 준 것이다. 그렇게 하나의 동료로서 인정해 주었다는 것에서 호감마저 느낄 정도로 캐롤 조던은 조직 내에서 유일한 여성으로서 일종의 따돌림을 당하고 있었던 것이다. 아니나다를까 우리는 특히 그녀가 토니 힐과 한 팀이 되어 수사해 갈수록 그러한 그녀의 고립적 위치를 더욱 더 잘 확인할 수 있게 된다. 그런데 우리는 이 캐롤 조던 말고 또 하나, 조직내 유일한 여성으로서 고립되어 있는 존재를 소설에서 보게 되는데 그녀가 바로 기자 '페니'이다. 발 맥더미드가 이렇게 각기 다른 조직에서 고립된 여성들을 나란히 보여주는 것은 역시나 그가 추구하고 있는 '관계-맺기' 테마 때문이다. 그러니까 이 둘의 고립된 여성이 각기 맺어나가는 관계의 방식을 통해 그가 토니 힐에게 주려는 그 진정한 관계가 어떠해야 하는지 탐색한다는 것이다. 캐롤 조던과 달리 페니의 관계 맺기는 토니 힐, 범죄자와 똑같이 일방적임을 우리는 보게된다. 그녀는 오로지 자신의 현재 위치를 보장해주거나 승진시켜 줄 수 있는 특종 거리 때문에 형사들과 관계를 맺는다. 거기엔 타자와의 어떤 인간적 교감도 없으며 있는 건 다만 자신의 목적을 위해 수단으로 다루는 것 뿐이다.  그렇게 페니는 원하는 정보들을 얻어내지만 궁극적으로 그녀에겐 그 어떤 것도 주어지지 않는다. 다만 빈 손일 뿐이다. 결국 발 맥더미드는 이러한 타자를 일방적인 자기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만 생각하는 관계는 실패할 수 밖에 없다고 말하는 것인데 문제는 페니가 보여주는 이러한 관계는 작품 속에서 무수히 반복되는 것들 중의 하나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크로스 경감 역시도 마찬가지다. 그가 결국 수사를 실패로 몰아가는 것은 그가 가지고 있는 게이에 대한 편견 때문이다. 

  소설은 그렇게 등장인물들을 달리해가며 반복을 계속한다. 토니 힐이 가지고 있는 자기 작위적 환상과 범죄자가 가지고 있는 일방적 강요, 페니가 보여주는 타인의 수단화 그리고 크로스 경감의 편견.  마치 발 맥더미드는 진정한 인간관계를 파괴할 수 있는 것들을 유형화시키고 있는 것 같은데 사실 이것들은 그 근저에 있어서는 다 동일한 것이다. 타자의 것을 고려하지 않고 오로지 자신의 관념 욕망으로만 타자를 채운다는 점에서 다 마찬가지인 것이다. 그렇게 토니 힐, 범죄자, 페니 그리고 크로스 경감에게 있어 타자란 오로지 '인어의 노래'가 된다. 

 

나는 인어들이 노래하는 것을 들었다, 서로서로에게.

나는 그들이 나에게 노래해 주리라고는 생각치 않는다. 

나는 그들이 파도를 타고 바다쪽으로 나가는 걸 보았다

바람이 바닷물을 흰색 검은색으로 불어댈 때

파도의 흰 머리칼을 뒤로 불어 넘겨 빗질하면서. 

붉은 색 갈색 해초로 화환을 두른 바다 소녀들 옆에서

우리는 바다의 방들에서 머물렀었다

인간의 목소리들이 우리를 깨울 때까지, 그리고 우리는 익사한다. 

                                          - T.S 엘리어트, 'J 알프레드 프루프록'의 연가 중에서 -  

 

  엘리어트의 이 시에서 '인어들의 노래'는 영원히 다다를 수 없는 그 무엇을 상징한다. 그것은 가질 수 없는 것이고 품을 수 없는 것이다. 그렇게 인어들이란 바로 '타자'들인 것이다. 엘리어트의 시에서 우리가 그저 바다로 멀리 떠나가는 인어들을 보기만 할 뿐 바다의 방에서 마냥 익사할 수 밖에 없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타자를 오로지 내 자신의 관념, 욕망으로만 채우려 하기 때문이다. 발 맥더미드의 '인어의 노래'는 그 넘어설 수 없는 '간극'이 바로 오로지 내 자신의 잣대로만 타자를 가늠하는 그 자페적 태도 자체에 있음을 말하는 것이다. 

  캐롤 조던은 그 모든 자폐적 관계로 부터 벗어나 있는 유일한 존재이다. 그녀가 보여주는 타자의 받아들임은 토니 힐과의 관계서도 드러나지만 그녀가 유일하게 가족과 같이 사는 존재이며 또한 유일하게 애완동물(소설에서 애완동물은 단 두 마리 나온다. 하나는 캐롤이 키우는 넬슨이고 다른 하나는 범죄자에게 가장 먼저 죽임을 당한다. 때문에 이 애완동물의 의미는 소설에서 중요하다.)을 키우고 있다는 점에서도 드러난다. 그녀는 그렇게 매일을 존재와 같이 교감을 이루며 살아가는 존재인 것이다. 그런 캐롤 조던과 토니 힐의 만남이다. 그러니까 이 둘의 관계는 단순한 로맨스만은 아닌 것이다. 과연 발 맥더미드의 바람 대로 캐롤 조던은 토니 힐을 치유할 수 있을 것인가? 아, 하지만 이제 겨우 시작이다. 보다 본격적인 그들의 얘기는 아마도 후속편이 나올 때까지 기다려야 할 것 같다. 아직은 해원 저 멀리서 들려오는 인어의 노래소리로 만족해야 할 것 같다.

 

 


댓글(4)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르마루 2011-08-22 08: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리뷰 잘 읽었습니다. 올해 제가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게 된 작품이에요. 생각지도 못했던 부분 생각하게 해주시는 리뷰네요. 2편은 올 12월경 나올 예정입니다.

헤르메스 2011-08-22 18:08   좋아요 0 | URL
제가 토니 힐 시리즈의 매력을 제대로 설명했는지 자신 없었는데 이렇게 말씀해주시다니 감사합니다. 그리고 12월경에 후속편이 나온다니 정말 기쁘네요.^^

이프리트 2011-08-22 16: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시체 따라 누우는 장면은 '언페어'의 유키히라 형사가 한 행동을 떠올리게 하네요.

헤르메스 2011-08-22 18:10   좋아요 0 | URL
이프리트 님도 '언페어' 보셨군요. 아마도 언페어가 토니 힐을 모방한 것 같아서 저도 본문에 그렇게 언급해 놓았답니다.^ ^
 
데몰리션 엔젤 모중석 스릴러 클럽 28
로버트 크레이스 지음, 박진재 옮김 / 비채 / 2011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미국에서 태어난 사립탐정 장르물은 공황 이후 지금까지 명맥을 이어왔다. 그래도 가장 대표적인 것을 고르라고 한다면 역시 세 명의 작가라 하겠는데, 바로 더쉴 해미트, 레이먼드 챈들러, 로스 맥도널드다.

 더쉴 해미트가 차디차고 냉정하며 타산적인 자본주의적 인간의 전형을 주로 드러낸다면 레이먼드 챈들러는 해미트의 냉정한 관찰자적인 입장을 여전히 유지하긴 하지만 소설에서 범죄로 드러나는 미국 자본주의의 부조리와 그로 인한 고통에 대해 감정적으로 개입함으로써 보다 인간적인 색채를 가미하였다고 할 수 있다. 한 편 로스 맥도널드는 레이먼드 챈들러의 영향 안에서 사건의 무대를 대부분 사회화의 가장 1차적 기관이라 할만한 가정에 국한하여 미국 자본주의에게 팽배한 온갖 모순을 가정 내부의 치정 사건으로 여과하여 보다 집약적으로 드러내었다. 현재 미국에서 나오는 사립탐정물은 대체로 (아마도 어쩌면 지나친 일반화일수도 있겠으나) 이 세 개의 지류에서 갈라져 나온 것이라 할 수 있다. 미키 스필레인의 마이크 해머가 더쉴 해미트라면 로렌스 블록의 매튜 스카더나 데니스 루헤인의 켄지와 제나로가 레이몬드 챈들러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로스 맥도널드의 계승자는? 


  그가 바로 지금 소개하려는 책의 저자인 로버트 크레이스다. 그의 유명한 시리즈 엘비스 콜은 1987년 레이거노믹스가 한창 붕괴되기 시작할 때 등장했다. 30년대의 '공황'이 샘스페이드와 필립 말로우를 태어나게 했듯이 그와 마찬가지로 80년대의 위기가 엘비스 콜을 태어나게 했던 것이다. 아무래도 경제적 위기가 닥치면 그 아픔이 가장 절실히 드러나는 곳은 가정이다. IMF 때의 우리나라처럼 2008년 서브프라임의 미국 처럼 그렇게 곳곳에서 경제적 위기에 의해 파탄나는 가정이 속출했다. 때문에 레이먼드 챈들러의 '리틀 시스터'에 감명을 받아 작가가 되기로 결심한 그였지만 결국 로스 맥도널드의 뒤를 잇게 된 것은 바로 이와 같은 시대적 상황 탓이 아닌가 한다. 사립탐정물이 하나의 '관찰물'이라고 한다면 이렇게 로버트 크레이스는 주로 가정의 변화를 관찰한다고 하겠다.

  내가 여기서 사실은 이 책과 별로 상관도 없는 엘비스 콜 얘기를 하는 까닭은 지금부터 얘기하려는 이 책과 관계가 있기 때문이다. 즉, 엘비스 콜에서 보여준 로버트 크레이스의 작품 세계의 중심이 어디까지나 '가정'이라는 것이 이해되어야만 앞으로 내가 하게 될 '데몰리션 엔젤'에 대한 리뷰가 다소 설득력을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일종의 근거 같은 것으로써 먼저 제시하기 위한 것이다. 2000년에 나온 이 작품, '데몰리션 엔젤'은 크레이스에게 있어 여러모로 새로운 시도라고 할 수 있다. 하나는 87년부터 99년까지 여덟 권의 시리즈로 이어져 왔던 엘비스 콜에게서 벗어난 가장 최초의 '스탠드 얼론'이라는 것이고 또 하나는 처음으로 여성이 주인공이라는 것. 그리고 형사를 주인공으로 설정했다는 것이다. 

 
  작가에게 있어 새로운 시도란 종종 관점의 변화 그 자체로 연결되기 마련인데 그가 99년 엘비스 콜 시리즈의 8번째 작품 ‘L.A. Requiem’을 내고 나서 1년도 채 안되어 이 모든 시도를 했던 이유는 뭘까? 그런데 그는 바로 다음 해 2001년에 또 다시 또 하나의 스탠드 얼론 ‘호스티지’를 내어 놓는다.(이 소설은 브루스 윌리스의 주연으로 영화화되어 우리나라에도 개봉된 바 있다.) 이번엔 인질협상가를 주인공으로 조직의 자금을 세탁하고 있던 한 가정의 가장이 관찰의 주 대상이 된다. 그렇게 그는 또 여성에서 남성으로 넘어갔고 ‘아버지’의 문제를 다룬다. 이렇게 하필 L.A. Requiem을 내고나서 두 권의 무대와 무대 속 세계는 공유하지만 전혀 다른 인물들이 나오는 스탠드 얼론을 연속적으로 낸 까닭은 뭘까?  

 

                                            

  L.A. Requiem 얘기를 잠깐 해 보자. 혹시 당신이 조 파이크 팬이라면 이 작품은 무엇보다 필수적으로 읽어야 할 작품이 아닐 수 없을 것이다. 여기엔 조 파이크가 어떻게 자라났는지 그의 어린 시절과 그와 LA경찰이 왜 사이가 안 좋은지 그리고 어쩌다 조 파이크가 그렇게 도통 알 수 없는 남자가 되었는지 그 고통의 근원이 어디에서 연유하는지 그에게도 있었던 여인의 얘기마저 다 들어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엘비스 콜이 잠깐 잠깐 흘렸던 조 파이크에 대한 얘기들이 궁금했던 분들이라면 반드시 읽어야 할 그런 작품이다. L.A. Requiem은 파이크가 중심이다. 그렇게 하나의 원초적인 남성성에 대한 얘기다. 그렇다면 바로 뒤이어 나온 ‘데몰리션 엔젤’은 바로 그 가정의 또 하나의 동반자로서의 ‘여성성’에 대한 얘기가 아닐까? 아마도 그렇게 전혀 반대의 얘기이기 때문에 크레이스는 그 시점에 무리를 해서라도 그렇게 많은 새로운 시도를 했던 것이 아닐까? 소설을 읽어보면 이 의문들의 대답이 긍정적이라는 것을 느끼게 된다. 그렇다. 최초의 스탠드 얼론 ‘데몰리션 엔젤’은 여주인공 스타키의 상실한 여성성-되찾기의 소설인 것이다. 그러니까 L.A. Requiem, 데몰리션 엔젤, 호스티지. 이 세 작품은 가정을 이루는데 있어 필수적인 자리 하나씩을 각 작품별로 살펴보고 있다고 할 수 있겠다. 늘 추구해왔던 ‘가정’에 대한 관심이 보다 넓게 그만큼 깊이 확장된 셈이다. 그렇다면 과연 어째서 ‘데몰리션 엔젤’이 스타키의 여성성-되찾기의 소설인지 살펴본다.

  스타키, 그녀는 3년 전에 2분 45초간 죽었었다. 당시에는 폭발물 처리반이었던 그녀는 연인이자 동료인 ‘슈가’와 함께 형편없는 솜씨의 사제폭탄을 해체하러 나섰다. 시시한 농담거리도 안 되는 가벼운 해체 작업이었지만 갑자기 일어난 지진으로 인해 폭탄이 폭발하는 바람에 그의 연인은 죽고 그녀 역시 그렇게 죽었다 간신히 살아났다. 하지만 그 폭발로 상실된 것 연인만은 아니었다. 그녀 자신의 육체에도 파편들이 날아와 그 날의 고통을 아주 깊이 새겨놓았던 것이다. 그것도 주로 ‘여성’을 나타낼 수 있는 부분에. 그래서 그녀는 다시는 수영복을 입지 못한다. 여기서 가장 심하게 다친 곳이 바로 가슴이라는 사실은 매우 중요하다. 또한 자신이 가장 잘하고 자기에게 적합하다고 여기는 폭발물 처리반에서 내처져 현재의 CCS로 옮기게 된다. 그러니까 그 폭발은 사실 스타키의 거의 모든 것을 다 가져간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 ‘폭발’은 그녀에게 엄청난 고통이자 상실로 여전히 남아있다. 이미 평범한 사람으로서의 삶은 포기했으며 늘 타가메트와 진토닉이 아니면 일상마저 제대로 버텨나가지 못할 수준이다. 그러면서 그녀는 내내 그 폭발의 순간에 붙잡혀있다. 상처의 극복을 위해서 정신과 의사는 그것과 마주할 용기를 내야한다고 말하지만 스타키는 3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용기를 내지 못한다.

  표면상으로 보면 스타키의 고통은 ‘연인의 죽음’ ‘육체에 새겨진 상흔’이랄 수 있겠지만 심층적으로 보자면 그녀를 3년간 그 지독한 고통의 늪으로 빠뜨렸던 것은 바로 그 폭발로 인해 그녀가 ‘여성성’ 자체를 상실했기 때문임을 우리는 알 수 있다. 크레이스는 여기에 대한 단서를 많이 제공하고 있는데 우선 ‘연인의 죽음’을 보자면 그 연인의 이름이 내내 풀 네임이 아니라 ‘슈거(SUGAR)’로 불린다는 점이 그렇다. 왜 크레이스는 하필 연인의 이름으로 남자의 이름으로는 잘 쓰이지 않는 ‘SUGAR’를 붙였을까? ‘SUGAR’는 보통 여성의 이름으로 많이 등장하는데 이렇게 보자면 스타키가 ‘SUGAR’와의 추억을 떠올리는데 있어 이성적 접촉의 그 어느 한 순간도 등장하지 않는 것도 이상하다. 거기다 ‘SUGAR’는 프랑스 혈통이다. 미국에서 프랑스는 종종 ‘여성적’인 것으로 여겨지곤 하지 않는가. 무리한 해석일수도 있지만 이 모든 것을 볼 때 우리에게 가능한 해답 하나는 그 때 그 폭발로 잃어버린 연인 ‘SUGAR’는 일종의 상징이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스타키는 자신의 연인을 잃어버린 것이 아니라 그 연인으로 상징되는 여성성을 잃어버린 것이다. 이것은 ‘육체에 깊이 남겨진 상흔’을 생각하면 더욱 더 그렇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크레이스는 특히 가슴에 난 상처가 가장 깊었다고 일부러 표현까지 하고 있으니까. 거기다 스타키가 3년 만에 처음으로 폭탄을 마주하고 감상을 고백하는 장면은 이러한 생각을 더욱 확고하게 한다. 

이것이 그녀가 사랑하는 일의 일부였고 늘 사랑해온 것이었다. 이것이 그녀의 비밀이었다. 폭탄을 만질 때, 손에 폭탄 조각을 들고 있을 때, 손바닥에 조각을 놓고 주먹을 쥘 때 그녀는 폭탄의 일부였다. 폭탄은 퍼즐이었다. 그녀는 다른 사람은 보지 못하는 방식으로 자신이 볼 수 있는 좀 더 큰 전체의 한 부분이 되었다. 어쩌면 다나의 말이 맞았다. 3년 만에 처음으로 그녀는 폭탄과 단둘이 있게 되었고, 비로소 마음이 편안해졌다.(P.197) 

  여기서 중요한 것은 ‘헤아림’이다. 즉 스타키에게 있어 폭탄의 해체는 그 만든 사람을 이해하는 과정인 것이다. 과연 그녀는 폭탄을 해체하면서 미스터 레드가 어떠한 인물인가를 점점 알아간다. 여성성에 대해 섹슈얼리티 이론을 따르든 젠더 이론을 따르든 ‘헤아림’ 혹은 ‘이해’는 그야말로 여성성에 있어 가장 중요한 특징 중의 하나이다. 즉, 그녀가 폭발물 처리반으로 되돌아가고 싶어 하는 것은 다시금 그녀가 잃어버린 여성성을 회복하고 싶은 염원의 또 다른 표현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잭 펠과의 로멘스도 단순히 재미만을 위해서 작품에 부가된 것은 아닌 것이다. 펠과의 만남은 스타키가 여성성을 되찾기 위해 꼭 필요한 과정이었던 것이다. 이것은 무엇보다 스타키가 결국 3년전의 그 비극적 사건을 마주하기로 결심하게 되기 까지의 과정을 살펴보면 더욱 흥미로워진다. 스타키는 어떻게 그토록 피하려만 들던 3년전의 사건을 마주할 결심을 하게 되었나? 크레이스는 그 과정을 이렇게 풀어간다. 3년 동안 전혀 어떤 남자와도 사귀지 않았던 그녀가 처음으로 자기 집으로 펠을 초대한다. 둘 사이에 저녁 먹고 사건 얘기하는 것 말고는 별 다른 게 오고가진 않는다. 다음 날 스타키는 마직과 함께 찾아낸 테넌트의 비밀 작업장을 찾아 떠난다. 거기서 스타키는 마직의 이런 고백을 듣게 된다. 

  이제 내가 원하는 걸 얘기할게요. 나는 결혼하고 싶어요. 나보다 키 큰 사람,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사람을 원해요. 그 사람이 하루 종일 소파에서 뒹굴고, 내가 맥주를 갖다바쳐야 하고, 새벽 3시에 방귀 소리를 들어야 하더라도 집에 누군가 있었으면 해요. 난 크래커 먹는 두 아이 외에 같이 지낼 사람이 없다는 게 신물이 나요. 젠장 난 그렇게나 결혼하고 싶은데, 애들은 천오백 미터 밖에서 내가 오는 모습을 보고 뛰어와요.(P.248)

 
  그리고 테넌트의 비밀작업장을 찾아가지만 별다른 수확을 얻지는 못한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와 그녀는 그녀가 주문한 3년 전 자신에게 일어났던 그 폭발 장면이 녹화된 비디오 테이프를 돌려볼 결심을 한다. 이 과정을 언뜻 보면 왜 그녀가 그 테이프를 돌려볼 결심을 했는지 언뜻 이해가 가지 않는다. 여기엔 아무런 결정적 계기도 없던 것으로 보인다. 그녀가 아직 펠을 깊숙이 받아들인 것도 아니다. 테넌트의 작업장에서 별달리 얻은 것도 없다. 그런데 왜 대관절 그녀는 그러한 결심을 하게 된 것일까? 난 ‘데몰리션 엔젤’에서 그가 보여주는 능수능란한 이야기의 전개 때문에 정말 천재적이라고 생각했지만 무엇보다 여기서 그의 천재적인 문학적 역량을 느낀다. 마직은 왜 하필 거기서 그 고백을 했던 것일까? 그녀는 계속해서 두 아이에 대한 저주에 찬 말을 쏟아내는데 왜 그렇게 했던 것일까? 단순한 이야기의 흐름일 뿐이라면 크레이스를 너무도 모르는 말씀이다. 그는 그렇게 허투르게 어떤 에피소드든지 삽입하는 사람이 아니다. 그게 거기 있는 것은 반드기 거기에 있어야했기 때문이다. 그는 정말 라이프니츠식 우주를 사랑하는 사람이다. 중요한 건 마직의 ‘두 아이’이다. 보다 깊은 의미에서 이것이 아직은 독립적이지 못한 그래서 미성숙한 남자들을 가리키는 것임을 우리는 알 수 있다. 그렇다면 그녀의 고백 앞과 뒤에 나란히 존재하는 두 남자 펠과 테넌트를 보자. 펠은 이미 한 번 스타키 앞에서 혼절하는 바람에 그녀의 도움을 받아야 했던 사람이다. 그렇게 독자의 눈에 펠은 완벽한 남자라기 보다는 어딘가 보호가 필요한 아이같은 존재로 인지된다. 크레이스는 종종 이것을 강조한다.(스포일러가 될 수 있어 이 정도만 말해둔다.) 그럼, 테넌트는 어떠한가. 크레이스는 재치있게도 이름 자체에서 이미 이 남자가 미성숙한 인물임을 드러낸다. 크레이스가 ‘세입자’라는 이름을 그에게 붙여준 이유는 그가 내내 엄마가 물려준 유산의 보호를 받으며 살고 있는 것임을 은연중에 드러내기 위해서다. 그렇게 두 남자 모두 ‘엄마’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존재라는 점에서 마직의 두 아이와 정확히 일치하고 있음을 우리는 알 수 있다. 문제는 마직의 고백 전엔 스타키는 펠을 집 안으로 받아들였고(집이란 종종 그 주인의 자아를 상징하는 것으로 해석되지 않는가) 그 후엔 테넌트의 비밀작업장 방문을 통하여 테넌트의 ‘엄마’를 발견하게 된다는 것이다. 여기까지 말하면 이제 왜 스타키가 그 테이프를 볼 결심을 하게 되는지 이해가 가리라 생각된다. 여기에 크레이스가 은밀히 깔아놓은 연속적인 과정을 눈치챈다면. 그렇다. 이 과정은 연속적이다. 펠을 집 안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스타키가 엄마가 되는 것을 말함이다. 하지만 그 때 별다른 오고감 없이 스타키는 펠을 몰아낸다. 그것은 그녀가 엄마가 되었지만 아직 그 의미가 무엇인지는 알지 못했음을 의미한다. 그 뒤 마직이 고백을 한다. 그 고백을 통해 스타키는 자신이 펠을 받아들였던 그 진정한 의미에 대해 무의식적으로 깨닫는 것이다. 그리고 방문한 테넌트의 비밀 작업장에서 숨겨졌던 엄마의 존재를 찾아내는 것은 그 깨달음으로 인해 스타키 역시 ‘엄마’로서의 여성성을 자각하게 된 것과 일치하는 것이다. 그렇게 이 모든 것이 은밀하지만 연속적으로 스타키에게 여성성의 가장 중요한 특징 중에 하나인 ‘모성’을 깨닫게 하는 과정이었으며 때문에 여성성을 회복시키는 과정이었던 것이다. 그 자각이 있고나서야 그녀가 그 비디오테이프를 볼 결심을 했다는 것 자체가 이를 반증한다. 그렇게 그녀는 여성성을 회복한다. 더하여 무엇보다 크레이스가 준비한 소설의 결말 자체가 그 모든 여정이 스타키의 여성성 되찾기의 과정이었음을 웅변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스포일러가 될 수 있으니 자세한 묘사는 생략하고 단적으로 이 상황에 대해 말해주는 슬라보예 지젝의 말을 빌러 표현해 본다. 아마도 읽지 못하신 분들은 아리송하실지라도 이미 읽으신 분들은 그것만으로도 이해가 가실 것이다. 지젝의 이 말은 그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 '부정적인 것과 함께 머물기'에 나온다. 아닌게 아니라 읽으면서 지젝이 읽으면 좋아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제목도 일부러 그렇게 뽑았다. 

여자의 '자리'는 틈새의, 심연의 자리이며, 그 자리는 '남자'가 그것을 채울 때 비가시적이 되는 것이다. (P.115)

 

  리뷰라는 것의 길이의 경제상 이 정도에서 '여성성-되찾기'로서의 '데몰리션 엔젤'을 바라보는 것에 대한 이야기는 이쯤에서 그칠까 한다. 보다 많은 이야기가 있어야 하겠지만 그동안 리뷰를 써 온 경험으로 볼 때 너무 길면 아예 시선에서 조차 벗어날 수 있는 위험이 있음을 알게되었다. 그러니 조금이라도 시선 속으로 들어가려면 이 정도에서 조금 무모하고 급작스럽더라도 마무리하는게 나을 듯 하다. '데몰리션 엔젤'은 그의 이야기 다루는 솜씨가 어느정도 경지에 이르렀는지 정말 잘 보여주는 수작이다. 캐릭터를 빗는 솜씨나 독자의 관심을 전환시키는 솜씨 그러면서도 긴장감을 극도록 유지한 채 끌고가는 솜씨가 정말 빛을 발하고 있다. 크레이스의 팬으로서 이번 여름 정말 벗해야할 소설로 권하고 싶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여탐정은 환영받지 못한다 밀리언셀러 클럽 73
P.D. 제임스 지음, 이옥진 옮김 / 황금가지 / 2007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P.D 제임스는 작가적 지명도에 비해 우리나라에선 너무 무시되는 감이 있다. 알라딘을 검색해 봐도 그녀의 작품은 그나마 구할 수 있는 게 이 소설과 동서미스터리로 나온 '검은 탑'뿐이다. 2006년 그녀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알폰소 쿠아론 감독의 영화 '칠드런 오브 맨'이 우리나라에 소개되기도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원작은 커녕 그녀의 다른 작품마저 나오지 않고 있다. 

  

 위 그림에서 보듯 PD JAMES의 해외에서의 평가는 이러한데, 왜 이렇게 그녀는 국내에서 무시되고 있는 것일까? 팬으로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래서 그런지 지금 쓰고 있는 이 책에 애착이 많다. 그나마 제대로 된 번역으로 만나볼 수 있는 그녀의 유일한 작품이기도 하고 말이다. 그런데 이 책 역시도 그저 흔한 미스터리로 치부되고 그나마 평가도 그리 호의적이지 않은 것 같다. 모처럼 만나볼 수 있는 P.D 제임스의 작품이 이런 평가를 받고있다 보니 이 작품을 위해 정말 두 팔 걷고 나서지 않을 수가 없게된다. 

 버니 프라이드가 죽은 아침 코딜리아는 베이커루 지하철 노선이 고장을 일으킨 탓에 람베스 노스 역에 발이 묶여 사무실에 삼십 분 늦게 도착했다.(p.11) 

 소설은 이렇게 시작한다. 레이먼드 카버는 '소설의 승패는 모두 첫 문장에 달려 있다.'라고 흔히 말하곤 했는데, 내겐 이 소설의 첫 문장이 성공적으로 보인다. 독자의 눈길을 확 잡아당길 뿐만 아니라 삼십 분 일찍 도착했다면 버니를 살릴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라는 암시가 은밀히 깔려있기 때문이다. 사실, 이 삼십분 때문에 코딜리아의 인생은 확 달라져 버린 것이다. 그렇게 어떤 운명을 결정하는 것이 세상의 작은 우연이라는, 삶이 가진 어떤 아이러니한 속성마저 드러내고 있는 것 같다.   

  이렇게 코딜리아는 아침에 출근하자마자 사립탐정 사무실을 공동경영하고 있는 버니 프라이드가 죽어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그가 언제 죽었는지는 나오지 않는다. 하지만 소설의 첫 문장은 그가 그 30분내에 결정했음을 암시하는듯 하다.) 그는 유서를 남겼는데, 그것은 그가 암에 걸렸기 때문에 병으로 죽기 전에 자기가 스스로 목숨을 끊어버렸다는 것이었다. 그는 코딜리아에게 등록되지 않는 권총 한 자루도 남긴다. 버니의 죽음에 미스터리한 점은 없다. 하지만 버니의 죽음으로 코딜리아는 그동안 자기가 속해있던 버니를 중심으로 움직이던 세계속에서 완전히 추방되어 버린다. 살고 있는 집도, 단골 가게도 그리고 늘 해오던 사립탐정 일 조차도 이제는 예전과 완전히 달라져 버린다. 집에선 쫓겨나고 단골 가게는 환영하지 않으며 사립탐정 일에 대해선 만나는 사람마다 "여자에게 어울리지 않는 일"이라며 그만두기를 권하는 것이다.

 버니가 죽자 모든 게 달라졌다. 

 그렇게 그녀는 이제 자신이 여자라는 걸 곳곳에서 만나는 사람마다 확실히 자각하게 된다. "여자에게 어울리지 않는 일"이란 말은 이 소설의 원제이기도 하지만 코딜리아가 만나는 사람마다 그녀에게 하는 말이기도 하다. 사람들은 끊임없이 그녀에게 그녀가 여자라는 사실을 상기시킨다. 물론 이것은 작가의 의도이다. 문제는 버니가 죽고 나서 그녀가 겪는 일이라는 것이다. 버니의 죽음으로 그녀는 완전히 버니를 중심으로 돌아가던 세상에서 이탈해 혼자가 되었다. 혼자가 되어 이제 세상을 마주해야 하는 그녀에게 세상은 그녀가 여자라는 사실을 자꾸만 자각시킨다.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중반 부분, 그녀가 의뢰로 인해 케임브릿지에 갔을 때 그녀는 새삼 아버지를 떠올리게 된다. 강압적이고 무책임했던 아버지는 그녀를 내내 자기 곁에다 가두어 두었다. 코델리아는 아버지가 아니었으면 자기도 이 자유로운 도시의 일원이 되었을 거라 생각한다. 하지만 아버지는 그 곳으로 가는 것을 차단시켰고 그녀는 그렇게 아버지를 중심으로 도는 삶을 살았다. 그리고 바로 버니를 중심으로 도는 세상으로 들어간 것이다. 그러니까 코델리아는 태어나서 남성을 중심으로 한 세상에서 벗어나본 적이 없는 인생이다. 그녀의 어머니는 그녀를 낳고 한 시간 안에 죽었다. 그녀는 모성이란 걸 경험해 보지 못했다. 이건 그녀가 남자가 중심인 세상에서 남자가 부여한 인격체로 살았다는 의미도 된다. 그것을 대표적으로 드러내는 것이 바로 버니에게 배운 탐정의 기술이다. 

 그녀는 그렇게 아버지와 버니라는 남자 중심의 사회에서 남성이 부여하는 정체성을 가지고 살아왔다. 그런데 이제 아버지에 이어 버니까지 죽어버린 것이다. 그렇게 그녀는 남성을 중심으로 한 세상에서 떨어져 나왔고 이제 스스로 자신만의 정체성을 만들어가야할 과제를 떠안은 것이다. 의미심장한 것은 버니가 그녀에게 남근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권총을 남겼다는 것이다. 코델리아는 그것이 자신을 남성의 세계에 묶어두려는 구속임을 자각하고 있다. 그래서 본능적으로 그것을 지니는 것을 두려워하게 된다. 

 하지만 그녀는 사립탐정이란 직업은 계속 유지하려 든다. 그건 버니가 물려준 것이지만 권총처럼 두려워하지 않는다. 물론 자기 자신이 제일 잘 하는 일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그건 사립탐정이 가진 본질이 '관찰자'이기 때문이다. 사립탐정의 본질은 바로 '변화의 목도'에 있다. 무라카미 하루키가 잘 정의했듯 사립탐정이 하는 일이란 끝내 자기가 알았던 것들이 모두 변질되어 버렸음을 확인하는 것에 다름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남성의 세상에서 떨어져나와 이제 스스로의 정체성을 확립해야 하는 코델리아에게 있어 사립탐정은 그 무엇보다 자신에게 적합한 일이 된다. 작가 제임스는 흥미롭게도 겨우 그녀와 한 시간 밖에는 세상에서 함께 하지못한 어머니가 그것이 그녀에게 정말 어울리는 일이라는 것을 계속 말하고 있다고 상상하는 그녀의 모습을 보여준다. 부재한 모성이지만, 부성과는 다른 모성으로 부터 받는 상상으로서의 위안은 그녀에게 남성적 세계에서 부여되는 의미가 아니라 여성적 세계에서 부여되는 의미로 사립탐정 직업이 가지는 의미가 새롭게 바뀌었다는 걸 드러내 준다. 

 이제 새로이 의미를 찾은 사립탐정은 코델리아에게 남의 비밀을 파헤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정체성을 되찾는 탐색의 과정이 된다. 그레이엄 터너에 따르면 인간의 인식은 언제나 이분법적이라서 하나를 제대로 파악하기 위해서는 그 대상 자체로서는 불가능하고 언제나 그 반대되는 것을 통해서 밖에는 못한다고 한다. 그러니까 인간은 어둠을 통해 그 반대되는 빛을 정의하고 천국을 통해 그 반대되는 지옥을 정의한다는 것이다. 이건 코델리아에게도 그래도 적용된다. 그녀가 새롭게 자각하는, 아니면 세상이 끊임없이 그녀에게 자각시키는 '여성'으로서의 새로운 자신만의 정체성을 확립하기 위하여 그녀가 우선적으로 관찰해야 하는 일은 바로 남성 세계의 진실이다. 때문에 작가는 사려깊게도 그녀의 첫 임무가 바로 아버지가 아들의 자살 원인을 파악하는 의뢰로 시작하게 만든다. 

 굳이, 프로이드의 오디이푸스를 언급하지 않아도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는 남성적 세계의 가장 근본적인 모습이라 할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여기서 '자살'이 반복되고 있음을 본다. 버니의 자살이 의뢰인의 아들 마크의 자살로 반복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소설을 읽으면 버니와 마크의 상징에 있어서의 공통점이 드러난다. 그 공통점은 바로 진짜 아버지와의 관계에서 버니의 의미와 의뢰인 아버지 로널드 칼렌더와의 관계에서 마크의 의미이다. 버니는 아버지의 연쇄이지만 사실 그 연속이라 볼 때 아들의 위치를 차지한다고 볼 수도 있다. 그렇게 버니와 마크를 다 아들의 위치에 놓아두면 이들의 공통점은 보다 분명해진다. 케임브릿지 일화에서 보듯이 코델리아의 아버지는 완전히 그녀의 인생을 쥐고 흔들었던 독재자였지만 버니는 코델리아를 하나의 인격체로서 존중해준다. 따라서 그만큼 아버지에 비해 덜 남성적이다. 마크도 그렇다. 아주 냉혹하고 자신의 업적을 위해서는 인간성 따위도 내던져 버릴 수 있는 아버지에 비해 마크는 아주 도덕적인 아들이다. 즉, 그만큼 덜 남성적이다. 말하자면 버니와 마크는 완화된 혹은 약화된 남성성이다. 그런데 그들은 모두 죽었다. 하나는 자살이고 하나는 타살, 즉 살해된 것이다. 작가는 일부러 이들의 죽음 원인을 다르게 했다. 그 이유는 버니와 마크가 공히 약화된 남성성을 가지고 있어도 그 차이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버니에 비해 마크는 훨씬 더 여성적인 것(마크가 여장을 한 채 발견된 것이 이것을 명확하게 드러내고 있다.)에 가깝다는 것이 소설 속에서 드러난다. 결국 이것이 마크가 살해를 당한 주된 이유인 것이다.

 아들의 죽음의 반복을 원형적으로 바라보면 여기에 종교적 은유가 깔려있음을 보게 된다. 즉, 작가는 '아들의 죽음'을 통해 기독교에 있어서의 하나님과 예수의 관계를 가져오고 있다는 것이다. 그건 서양문화에서 가장 바탕이 되는 것이 바로 기독교라는 것을 생각해 보면 당연하다고 할 수 있다. 코델리아가 관찰하는 그 남성성의 근본에는 바로 기독교의 남성적 하나님이 놓여있다. 그 하나님과 예수의 은유적 관계가 바로 소설속에서는 칼렌더와 마크의 관계로 나타난다. 냉혹한 야훼와 자애로운 예수의 이미지로 말이다. 그런데 자연을 사랑하며 아주 도덕적인 예수 마크는 결국 죽임을 당한다. 그가 보다 더 여성적이라는 이유로... 결국 칼렌더에게 야훼의 이미지가 겹쳐진다는 것은 코델리아에게 있어 남성적인 것은 결코 받아들여져야 하지 않을 것, 그렇게 근본 부터 뒤엎고 다시 새로이 시작해야 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그녀는 다른 대안을 찾는다. 

 그것은 바로 '여성으로서의 신'이다. 우리는 이 소설에서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만 반복되는 것이 아니라 어머니 또한 반복되고 있음을 본다. 코델리아가 상상적으로 의지하는 어머니와 마크의 진짜 어머니가 바로 그것이다. 그런데 코델리아가 애초부터 여성임을 자각하지 못했을 때 그렇게 남성적인 세계에 완전히 함몰되어 있었을 때, 그 어머니는 부재했었다. 하지만 흥미롭게도 그녀가 남성의 세계에서 멀어지고 점점 더 여성으로서의 자아를 되찾아가자 부재했던 어머니의 존재가 점점 현실적인 존재가 되고 결국에는 그녀 앞에 최종적으로 모습을 드러낸다. 

 이렇게 어머니. '아버지로서의 신'에 완전히 대칭되는 '어머니로서의 신'이 코델리아의 자각과 더불어 현실적인 존재가 되어가는 것은 참으로 흥미롭다. 코델리아가 점점 더 여성으로서의 자신에 대한 자각이 커짐에 따라 남성성으로서의 신이 얼마나 무자비하고 비윤리적인 존재인가가 드러나는 것도 흥미롭다. 결국 이 모든 것에 작가 제임스가 이 소설을 통해 제시하는 대안이 있지 않을까 한다. 즉, 남성성으로서의 신의 자리에 새로이 여성성으로서의 신을 정립 대체하자는 것이다. 

 그리고 그 '여성성으로서의 신'은 소설 속에서 코델리아의 아버지와 그녀의 관계, 컬렌더와 마크의 관계로 나타났듯이 더이상 서열로 이루어지는 권력관계가 아니다. 그것은 소설의 후반부에 코델리아와 마크의 진짜 엄마의 관계로 극적으로 드러나듯이 '연대감이 기반이 된 동등한 관계'이다. 

 그렇게 작가 제임스는 새로이 정립해야 할 '여성성으로서의 신'은 무엇보다 어떤 권력도 서열도 없는 오로지 동등한 인격끼리의 관계여야 하며 연대감만이 이 관계를 이어주는 유일한 기반임을 적극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그리고 이건 이 소설을 통해 제임스가 말하려는 진짜 주제이기도 하다. 

 이렇게 이 소설 '여탐정은 환영받지 못한다(사실 이 제목은 제임스가 근본적으로 말하고 싶은 주제와 너무 어울리지 않는다. 원제인 '여성에게 어울리지 않는 일'이 보다 더 적합하리라 생각된다.)' 그냥 평범한 미스터리로 치부해 버릴 수 없다. 그냥 미스터리로 치부해 버리는 것은 제임스가 소설 속에 면밀하게 깔아놓은 장치들을 완전히 깡그리 무시하는 처사가 될 것이다. 이것은 그야말로 페미니즘 소설이다. 이 남성적 세계를 대체할 '여성적 신'이라는 대안 그리고 그 관계의 모습과 기반까지 아울러 다 들어있기 때문이다. 아가사 크리스티의 '애크로이드 살인 사건' 이후로 우리는 미스터리가 그저 훌훌 읽기만 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배웠다. 피에르 바야르에 따르면 미스터리 소설이야 말로 독자가 신경을 집중하고 내러티브에 적극적으로 참여해서 독자적으로 의미까지 세울 수 있는 멋진 장르라고 한다. 이 소설 역시 피에르 바야르가 말했던 것을 받을 자격이 있다. 이 풍부한 페미니즘의 의미가 이대로 묻히는 건 너무나 아깝다. 제대로 음미할 것을 권하고 싶다. 아울러 제임스의 다른 소설도 많이 국내에 소개되었으면 한다. 이 소설에서 보듯이 이대로 무시되기엔 너무나 아까운 작가다.

 PS. 일단 가급적 스포일러를 줄이려 많이 노력했습니다. 그것 때문에 충분히 논의하지 못하고 건너 뛴 곳도 있을 정도로 말이죠. 하지만 저도 모르게 노출된 부분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혹시 스포일러를 보았다면 양해 부탁드립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