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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한 보상
새러 패러츠키 지음, 황은희 옮김 / 검은숲 / 2013년 4월
평점 :
품절
섣달 그믐날 샴페인에 얼큰하게 취한 새러 패러츠키는 한 가지 결심을 한다. 라 스칼라 극장에서 노래하기 혹은 누레예프와 춤추기처럼 그냥 상상만 하다 끝날 게 아니라면 1979년에는 소설을 써 보자고. 그리고 그녀는 9개월 동안 50페이지 분량의 소설이란 것을 썼다. 하지만 좀처럼 늘지 않는 글 솜씨에 절망한 나머지 글쓰기에 대한 미련은 버리고 늘 하던 생업이나 제대로 하자며 결심할 무렵 뜻밖의 계기가 찾아온다. 그동안의 노력을 알고 있는 친구가 '탐정소설 전문작가 양성과정'이나 들어보라며 강좌목록을 가져다 준 것이다. 거기서 패러츠키는 강의를 맡고 있던 스튜어트 카민스키를 만나게 된다. 그 카민스키에 의해서 50페이지 분량에서 망각의 세월 속으로 던져질 뻔 했던 소설은 다시금 생명을 얻어 이어나가다 마침내 세상의 빛을 보게 된다. 난산 중에 태어난 아이와도 같이.
그게 바로 이제는 여성 사립탐정의 대명사이자 '페미니즘 하드보일드'로 평가받는 V.I 워쇼스키 시리즈의 시작이었다. 시리즈의 첫 작품 '제한 보상(indemnity only)'은 그렇게 세상으로 나왔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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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제목은 '제한 보상'이 되었는데 아무래도 원뜻이 '~할 경우에만 보상'이라서 그렇게 옮긴 것 같다. 살짝 내용을 흘려 본다면 워쇼스키는 살인을 수사하는 도중 거기에 수상한 보험거래가 관련되어 있다는 정황을 포착한다. 당시 막강한 노동조합은 실제로 70년대에 들어와 의료 보험까지 받을 수 있는 권리를 획득하는데 이로 인해 각종 산업 재해에 대하여 보험을 통해서 보상받을 수 있었다. 소설은 이러한 상황의 변화를 미스터리의 무대로 활용하고 있는데 제목은 바로 그걸 반영한다.)
그 때가 1982년이었다. 패러츠키가 소설을 쓰기로 결심하고 첫 문장을 쓴 뒤 4년 후이고 지금으로 부터는 무려 30년 전에 나온 소설인 것이다.(그러니 이야기의 배경이 약간 올드하게 느껴져도 괘념치 말길. 사실 소설은 70년대 말의 미국 상황을 그리고 있다. 소설에 나오는 나중에 워쇼스키의 진짜 의뢰인으로 밝혀지는 맥그로라는 인물은 70년대 당시 한창 힘을 얻어가던 전미노조를 이끌다 마파아와의 결탁으로 체포되어 교도소에서 복역하고 출소한 뒤 다시 전미노조 위원장을 노리다가 1975년 디트로이트의 한 식당에서 미스테리하게 사라져버린 '지미 호파'를 많이 연상시킨다. 지미 호파에 대한 것은 대니 드비토가 감독한 'HOFFA'란 영화가 잘 그리고 있는데 이 영화를 보고 '제한 보상'을 읽으면 책에서 묘사하고 있는 세계를 더욱 생생히 느껴볼 수 있으리라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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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마디로 지금 누리고 있는 V.I 워쇼스키의 명성을 생각한다면 늦어도 너무 늦게 나온 것이다. 미스터리의 강국인 이웃 일본에서는 V.I 워쇼스키가, 그것도 벌써 예전에, 여성 사립탐정의 대명사로 자리 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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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서는 이렇게 시리즈가 다수 출간되고 있는데 우라나라에서도 제발 이렇게 이어졌으면 좋겠다. 우리나라가 여성탐정들에게 좀 가혹했던지라 더욱 간절해진다.
이건 좀 잡담인데 일본에서 워쇼스키가 어떤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잘 보여주는 하나의 예가 있다. 그건 바로 우리나라에도 너무 유명한 아오야마 고쇼의 '명탐정 코난'이다. 거기엔 주인공 남도일처럼 독약의 부작용으로 어린아이가 되어버린 한 여성이 나온다. 그녀의 이름은 우리나라에서는 홍장미로 통하지만 원작에서는 '하이바라 아이(灰原 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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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겐 홍장미로 익숙한 하이바라 아이
코난의 원래 이름 에도가와 코난이 에도가와 란포와 코난 도일 이렇게 일본에서 가장 유명한 추리 소설 작가의 이름을 따왔듯이 이 '하이바라 아이'도 똑같이 일본에서 가장 유명한 여성 사립탐정 둘의 이름을 따 온 것이다. 그 둘이 바로 P.D 제임스의 '여탐정은 환영받지 못한다'의 주인공 코델리아 그레이와 이 작품의 주인공 V.I 워쇼스키인 것이다. 그렇게 코델리아 그레이라는 이름에서 그레이를 따와 일본말로 변형시켜 '하이바라'가 되었고 V.I 워쇼스키에서는 'I'를 따와 '아이'가 된 것이다. 에도가와 코난이 가장 대표적인 추리작가의 이름을 조합하여 만들어진 것을 보면 하이바라 아이란 이름을 이루고 있는 두 여성 사립탐정들 또한 일본에서는 그만큼 높은 평가와 인정을 받는 존재임을 알 수가 있을 것이다. V.I 워쇼스키는 그런 존재이다. 더구나 미국에서는 우리나라에서도 발간된 레너드 카수토의 '하드보일드 센티멘털리티'를 비롯하여 페미니즘 하드보일드의 대표적 작품으로 꾸준히 연구가 이뤄져 오기도 했다. 그러니 쌓인 평가나 명성에 비해서는 정말 너무도 뒤늦게 소개 된 셈인데 이러한 비극이 비단 워쇼스키만은 아니다. 그녀와 더불어 또 한 명의 대표적 여성 사립탐정인 코델리아 그레이도 마찬가지다. 우리나라에 소개된 코델리아 그레이의 데뷔작 '여탐정은 환영받지 못한다'의 경우, 별로 팔리지 못한 탓인지 그대로 소리 소문없이 절판되고 후속작은 기약도 할 수 없게 되고 말았으니까. 참으로 우리나라에서 여탐정이란 환영받지 못하는 존재인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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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쇼스키는 1991년에 우리나라에는 '로맨싱 스톤'과 거기서는 사랑에 빠졌던 배역들이 서로 죽일듯이 싸운다는 설정으로 만들어진 영화 '장미의 전쟁'으로 유명해진 캐서린 터너 주연으로 영화로 만들어진 바가 있다. 원작은 '제한 보상' 바로 뒤에 나온 'DEADLOCK'이란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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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서린 터너의 워쇼스키는 대체로 소설 속 워쇼스키의 이미지와 잘 부합하는 듯 하다.
워쇼스키는 영화의 카피 그대로 스마트함과 섹시함을 고루 겸비한 캐릭터라 할 수 있다.
그래서 V.I 워쇼스키도 그러한 운명을 맞이할까 두렵다. 이제야 만났는데 별로 깊이 서로를 알아갈 시간도 없이 작별해야 한다면 코델리아 그레이가 그랬듯이 정말 마음이 아플 것 같다. 그렇지 않아도 내가 아끼는 또 하나의 여성 탐정 앤지도 '문라이트 마일'을 끝으로 영영 떠나가 버렸는데...
때문에 워쇼스키만은 한 작품으로 사라지지 않도록 길가는 사람마다 붙잡고 제발 한 번 읽어보라고 다그치고 싶은 마음이다. 일단 읽기만 하면 그 진가는 저절로 알게 될 터이니 제발 손에 잡기라도 하라고 말이다. 이제야 우리말로 만나본 워쇼스키라는 캐릭터의 매력과 작품의 깊이가 남달랐기에 더욱 그렇다. 덧붙여 혹시 아는가? 이 워쇼스키가 예상 외로 히트를 치면 덩달아 지금 '87분서'가 그러고 있듯이 코델리아 그레이의 뒷이야기도 다시 들을 수 있을지... 그러니 어쩔 수 없다. 목마른 자가 우물을 파는 법이니, 그 뒷이야기를 보고 싶은 자가 닥치는 대로 이 책을 홍보할 수밖에. 그렇게 이 글은 그런 사심이 아주 많이 가득 들어간 글이다. 어떻게든 비틀즈의 노래 제목대로 여성 사립탐정들과 'I WANNA HOLD YOUR HAND'하고 싶은 마음이랄까...
아무튼 이제 나온 워쇼스키의 첫 작품 '제한 보상'은 왜 그녀의 시리즈가 페미니즘 하드보일드로 불리는지 분명히 알 수 있게 한다. 흥미로운 것은 이 소설의 워쇼스키도 그녀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여성 사립탐정 코델리아 그레이가 처음 사립탐정을 했을 때 그랬듯이 내내 지인들로 부터 "여자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일이니 그만 둬.'라는 말을 무던히도 듣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코델리아 그레이가 처음 등장하는 작품의 제목 역시도 '여자에게 어울리지 않는 직업'이다. 원제는 'AN UNSUITABLE JOB FOR A WOMAN'인데 여기서 P. D 제임스는 'UNSUITABLE'라는 단어를 썼다. '있어야 할 자리에 있지 않다'는 뜻이다. 워쇼스키가 들어야했던 '어울리지 않는다'라는 말도 사실은 그와 같다. 정말은 모두들 '여기는 네가 있을 곳이 아냐! 어서 네가 있어야 할 자리로 돌아가!'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일례로 워쇼스키 아버지의 오랜 친구이자 워쇼스키가 발견한 시체의 수사를 맡은 고참 형사는 그녀에게 이렇게 말한다.
"토니가 오냐오냐 하면서 키우지 않고 엄하게 키웠으면 지금쯤 어엿한 주부가 되었을텐데. 탐정 노릇 한다고 여러 사람 피곤하게 만들지는 않을 거 아냐." (P. 54)
그런데 그 있어야 할 자리는 누가 정하는 것인가? 그건 바로 남자들이 아닌가! 워쇼스키가 살고 있는 미국이든, 코델리아 그레이가 살고 있는 영국이든 남자 중심의 가부장제 사회라는 건 별반 다르지 않다. 결국 남자들은 자기들이 정해놓은 그 자리에 얌전히 있지 않는다고 해서 나무라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또한 그래서 워쇼스키와 코델리아 그레이의 사립탐정 일은 그들에게 도전이다. 자신들이 정해놓은 경계를 허무는 일이니까. 그 형사에게 워쇼스키는 바로 이렇게 응수한다.
"아저씨, 전 탐정 일이 좋아요. 게다가 저는 게을러서 주부가 될 소질이 전혀 없어요."
패러츠키는 여기에 특별히 '게으르다'는 말을 첨부한다. 그러고보면 워쇼스키는 우리가 여성스러움으로 생각하는 것에 전혀 걸맞지 않다. 집 청소는 거의 하지 않으며 요리 또한 거의 하지 않는다. 그는 남자 사립탐정처럼 늘 바깥에서 식사를 해결한다. 설사 요리를 하게 되더라도 요리 한다고 주변에 이런저런 물건들을 잔뜩 늘어놓아서 만드는 시간 보다 오히려 치우는 시간이 더 걸릴 지경이다. 한 마디로 워쇼스키는 가정주부의 품격과 영 거리가 먼 사람이다. 그런데 따지고 보면 우리가 알고 있는 여성스러움이란 그 가정주부의 품격과 그리 다르지 않다. 어떻게 보면 가부장적인 사회가 가장 원하는 모습이 지금의 여성스러움으로 안착된 것도 같다. 그렇게 우리가 알고 있는 건 모범이 아니라 사실상 족쇄였던 것이다. 여성들을 남성들이 원하는 자리에 있도록 하기 위한 옛날에 유행했던 말로 하면 '이데올로기적 장치' 같은 것. 그래서 워쇼스키는 일부러 저렇게 대답했던 것이다. 사실은 이것을 전하고 싶어서...
난 당신들이 만든 프레임에 걸려든 사람이 아니에요.
그것으로 부터 벌써 자유로워졌다구요. 그러니 그 낡은 프레임으로 날 엮을 생각이랑 아예 하지 말아요.
워쇼스키 자신의 고백에 따르자면 이렇다.
"친한 여자 친구들은 여러 명 돼요. 그들이 내 영역을 침범한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하지만 남자들을 상대할 때는 본연의 나를 지키기 위해서 싸우고 있다는 느낌이 들 때가 많아요." (P. 266)
여기서 워쇼스키는 '본연의 나'라는 말을 쓴다. 두 말할 것도 없이 이것이 바로 워쇼스키의 모든 행동이 남자가 만든 프레임과 싸우는 것이라는 걸 보여주는 증거이다. 그러니까 사립탐정은 그녀의 투쟁이나 마찬가지인 것이다. 그것도 그 어떤 프레임으로부터 자유로운, 고유하면서도 본연의 자신을 건 투쟁인 것이다. 사정이 이러하니 가부장제 중심의 기성 권위에 있어서는 워쇼스키라는 존재 자체가 이미 하나의 도전이다. 한 때 워쇼스키는 결혼한 적이 있다. 4년만에 그 생활에 종지부를 찍었지만 그 결별의 원인도 워쇼스키의 그러한 모습 때문이었다. 가정주부였지만 자신의 독립성을 내내 표출했던 워쇼스키를 남편은 오로지 자신의 영역을 침범하는 것으로만 여겼기 때문에 결국 결혼이 파탄났던 것이다.
결혼은 워쇼스키에게 있어 사회와의 마지막 타협점이었지만 결국 깨어짐으로써 워쇼스키가 걸어가려는 노선은 사회와 결코 타협할 수 없는 길임이 드러났다. 그녀의 길은 남성 중심의 가부장제 사회가 여전히 위세를 떨치는 한, 이제 그 어디에도 소속될 수 없는 길이다. 그녀의 길엔 머무름이 허락되지 않는다. 끊임없이 흔들리고 더러는 요동치는 경계 위만이워쇼스키 그녀가 거처할 수 있는 유일한 곳이다.
그렇게 워쇼스키 그녀는 사회의 바깥에 있다. 패러츠키는 그런 그녀의 존재감을 위해 우리가 아는(이라고 쓰고 '남성 중심의 가부장제가 강요한'이라고 읽는다.) 여성스러움으로 부터 탈여성화시켜 버렸던 것이다. 하지만 워쇼스키가 그 쪽으로 내몰린 건 아니다. 오히려 그건 그녀의 자발적 선택이다. 왜냐하면 그녀가 보기에 지금 이 사회는 확실히 문제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 사회는 자신의 아들과 딸이자 미래의 세대인 피터 세이어와 애니타 맥그로를 잡아먹고 있었다.(소설에서 의뢰인이 찾고자 하는 아들 피터 세이어는 시체로 발견되고 '로미오와 줄리엣'과도 같았던 그의 여자 친구 애니타는 실종된다.) 그 고통과 비극의 '저그노트'를 멈추기 위해서는 뭔가 대안이 필요했다. 그리고 대안이란 언제나 안에 있을 때보다 그 바깥에 있을 때 진정으로 찾을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워쇼스키는 사회의 바깥, 그 경계 위에 서 있으려 한 것이다. 보다 제대로 사회를 바라보고 정확히 진단하여 진정한 대안을 찾아내기 위하여...
"전 국선 변호인이라는 직업에 환멸을 느꼈어요. 부패가 심한 조직이었어요. 법적 근거를 바탕으로 정의를 주장할 수 없는 시스템 때문에요. 그곳에서 나오고 싶었어요. 승률에 집착하지 않고 내가 생각하는 정의의 개념을 바탕으로 할 수 있는 일을 찾고 싶었어요."
(P. 267)
이러한 워쇼스키의 모습은 사립탐정으로 그녀의 선배인 필립 말로우나 루 아처가 그동안 보여주었던 모습과도 같다. 같은 여성 탐정인 코델리아 그레이도 대안적 질서를 찾기 위해 기꺼이 그 일에 뛰어든 존재다. 그렇게 워쇼스키는 그들의 정통 계승자이다. 하지만 그녀가 싸우는 방식은 우리에게 인습적으로 굳어진 여성 스타일이 아니다. 그녀는 장정 두 남자와 겨루어도 두려움이 없고 오히려 이기기도 한다. 아무리 무섭고 어렵더라도 여성적인 나약함을 드러내기 보다는 당당히 대적하기를 더 선호한다.
워쇼스키 그녀에게 '여성스럽다'라는 형용사는 없다.
있다면 그건 오로지 '워쇼스키스럽다'라는 형용사 뿐이다.
이러한 독립성 그리고 동등성 때문에 '페미니즘'이라는 말이 특별히 앞에 붙었는지도 모르겠다. 사실 이 작품에는 그 당시 한창 발흥하고 있던 페미니즘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아시다시피 페미니즘은 미국에서 60년대 말에, 프랑스 68혁명의 영향으로 생겨나 70년대에 확고하게 자리잡았다. 당시의 페미니즘은 그 때 노조가 강한 힘을 얻었던 것처럼 사회주의와 긴밀히 접합되었고 그래서 급진적 경향도 다분했었다. 급진이라 함은 전복에 방점을 찍은 것으로 그렇게 상대를 전혀 인정치 않음을 뜻한다. 워쇼스키는 시카고 대학(워쇼스키는 주로 시카고를 무대로 활동한다.)의 여성 해방 동아리에 탐문을 위해 참석했다가 거기서 벌어지는 일련의 논쟁을 듣게 되는데 그 때 그녀는 어떤 피로함을 느낀다. 자신 역시 나의 독립성을 지키기 위하여 남성들과 싸우고 있다고 하지만 너무나 이상론에 치우쳐 있고 앞과 뒤를 따지지도 않는 무조건적인 적대에 그만 기가 질려버린 것이다. 이는 패러츠기가 당대의 페미니즘적 논의에서 느낀 피로감의 반영이기도 하다.
그녀는 생각한다. 남성들의 권력에 권력으로 맞서는 것이 과연 옳은 방법일까? 그건 단순한 남성들의 방식을 복제하는 것에 불과하지 않을까? 남성주의에 오염되지 않고 그 본연의 순수성을 유지하면서 대응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그건 어쩌면 모성이 가지고 있는 타자에 대한 보살핌 혹은 연민 같은 것이 아닐까? 그리하여 패러츠키는 작품에다 이런 생각들을 엮어 넣는다. 우리는 이러한 타자로의 열림과 보살핌 그리고 연민을 소설이 구석구석에서 볼 수 있는데 그 중 가장 대표적인 것은 워쇼스키가 위험을 피해 숨어든 로티 선생님의 집이다. 이러한 패러츠키의 순수한 여성주의적 대응에 대한 사유는 소설을 더욱 페미니즘 하드보일드로 여기게 만들고 있다.
그만큼 이 소설 '제한 보상'은 그동안 이름만 들었던 '페미니즘 하드보일드'의 진면목을 확인시켜 주는 작품이다. 제나로 앤지도 가고 코델리아 그레이와의 재회는 요원하기만 한 지금 그나마 워쇼스키가 있어 울적한 마음을 달랠 수 있는 것 같다. 하지만 진정한 위안을 얻을 때는 워쇼스키의 작품이 계속 나와 줄 때이리라. 단 한 권으로 만나고 또 기약없이 헤어진다면 또 얼마나 상처를 받을 것인가! 그건 코델리아 그레이만으로 족하다. 그러니 제발 뒷 편을 발간해 주길...
이건 곁다리인데, 나름 소설에서 중요한 부분인 것 같아 인용해 본다.
처음에 난 이 부분 때문에 사립탐정으로서의 워쇼스키 핵심이 바로 '애도'에 있지 않나 생각했었다. 그러니까 그 슬픔과 연민이 바로 그녀를 이끌어가는 주된 축이라는 것이다. 이것을 밝히기 위하여 이리저리 살펴 보았는데 징후는 완연하지만 딱 이거다 하고 내세울만한 것을 찾지 못하겠다. 아무래도 이 한 권만으로는 역부족이겠다 싶어 이렇게 부록처럼 달아둔다. 다음 작품에서 이렇게 단초로 남은 것을 확인할 수 있는 기회가 왔으면 좋겠다.
"그래요. 시간이 걸릴 수 밖에 없는 일이에요. 애도라는 건 오래 지속되는 일이에요. 서둘러 그 과정을 끝낼 수 없어요. 나도 아버지가 돌아가신 지 십년이 되었어요. 그런데도 이따금 애도하는 기간이 지속되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슬픔의 한 조각이 여전히 마음 속에 존재하는 거죠. 힘든 시기는 그리 오래 가지 않아요. 하지만 그 슬픔이 지속되는 동안 애써 거부하지는 말아요. 슬픔과 분노를 계속 억누를수록 감정을 정리하는 시간만 더 오래 걸릴 뿐이니까요." (P. 4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