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를 증오한 남자들 1 밀레니엄 (뿔) 1
스티그 라르손 지음, 임호경 옮김 / 뿔(웅진) / 2011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노르딕 느와르의 대표 주자 '밀레니엄'이 다시 돌아왔습니다. '세븐', '조디악' 등 연쇄살인마의 연대기로 미국의 역사를 다시 써내려가는 영화감독 데이빗 핀처가 다시금 스티그 라르손의 '밀레니엄'을 영화로 만들었기 때문이죠.  하지만 그 초점은 오로지 여성 캐릭터중 가장 개성있고 강력하다고 할만한 리스베트 살란데르에게만 맞춰져있는 듯 합니다. 스티그 라르손이 '밀레니엄'을 통해 정말은 무엇을 말하려 했는지 그에 대한 얘기는 정작 빠져있는 느낌입니다. 그래서 한번 해보고 싶었습니다. 이제는 노르딕 느와르 뿐만아니라 스릴러의 '대명사'라는 자리에까지 올라버린 '밀레니엄'이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지 찬찬히 한 번 훑어보는...

 

 

   아무튼, 다음은 그런 것에 관한 글입니다...

 

 

  이 밀레니엄의 작가 스티그 라르손 처럼 미스터리 장르의 소설가로서 스웨덴을 넘어 국제적 명성을 획득한 작가가 또 한 명 있는데 그가 바로 형사 '쿠르트 발란더' 시리즈로 유명한 '헤닝 만켈' 입니다. 전형적인 수사물이지만 단순히 '누가 했느냐?'를 찾아내는 것이 아니라 사건은 다만 발단일 뿐, 오히려 그 사건을 계기로 한 사회의 내부에 깊숙이 침윤된 갈등과 고통의 지층들을 파헤쳐 미스터리로도 얼마든지 순문학적 깊이를 가질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 대중적 인기도 인기이지만 비평적으로도 높은 평가를 받고 있는 작가입니다. 이 헤닝 만켈과 스티그 라르손은 비슷한 점이 많습니다. 물론 그들의 작품 세계에 있어서 말이죠. 일단 주인공의 상황이 비슷합니다. 헤닝 만켈의 쿠르트 발란더 처럼 밀레니엄의 미카엘 불름크비스트도 아내와 이혼한데다 딸 하나를 두고 있지요. 둘 다 딸은 엄마가 양육하고 있구요. 거기다 미카엘은 잡지사에 발란더는 경찰에 소속되어 있지만 조직으로 움직이지 않고 독자적으로 활동하는 것도 똑같습니다. 둘 다 고독한 사립탐정의 전형들이라 할 수 있죠. 이 둘의 유사성은 비단 주인공의 모습에만 그치는 것이 아닙니다. 작품에서 흔히 ‘퍼즐러’라고 명명되듯이 미스터리를 푸는 것에 치중하기 보다는 그 사건을 통해 그 사건이 발생한 사회가 간직한 갈등과 상처를 드러내는 데 더 천착하는 것도 같습니다. 여러모로 이 작품은 헤닝 만켈의 ‘얼굴없는 살인자’를 많이 닮았습니다. 만켈의 작품 무대도 밀레니엄의 ‘헤데뷔’처럼 작은 시골 마을이었습니다. 그 마을 역시도 ‘헤데뷔’처럼 지극히 조용하고 전원적인 마을이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살인이 일어납니다. 쿠르트 발란더가 이것을 수사하기 위해 이 마을로 옵니다. 그리고 수사를 하는 도중 이 마을이 겉모습처럼 그리 조용한 마을만은 아니라는 것을 깨닫습니다. 그것은 다만 가면에 지나지 않았고 그 아래엔 나치즘을 방불케하는 인종적 편견과 혐오 등 온갖 추악한 감정들이 가득했던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밀레니엄에서 미카엘이 처음 ‘헤데뷔’에 왔을 때와는 다른 그 마을이 숨기고 있는 이면의 모습들을 점차 발견해 나갑니다. 사실 헤닝 만켈의 그 작은 시골 마을은 그 소설이 나온 1990년대 스웨덴의 정치사회적 상황을 투영해 놓은 것이었습니다. 그러니까 그 마을이 드러내는 모든 추악한 모습들은 당시 스웨덴에서 발로하고 있었던 이성으로는 납득하기 힘든 파시즘의 반영이기도 했습니다. 2005년에 나온 밀레니엄도 마찬가지입니다. 15년의 차이가 있지만 여전히 소설 속 사회의 숨겨진 이면에선 파시즘의 그림자가 드리우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만켈이 이를 좀 더 은유적으로 드러낸 반면, 스티그 라르손은 보다 직설적으로 드러냅니다. 둘 다 저널리스트 출신 작가들인데도 이렇게 차이가 나는 것은 아마도 스티그 라르손이 스웨덴에 만연되어가는 파시즘을 낱낱이 밝히는데 기자로서의 생명을 걸었던 이유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그는 그것을 위해 그 자신이 직접 작은 잡지사를 차리기까지 했으니까요. 바로 소설 속 ‘밀레니엄’도 이 잡지사를 모티브로 한 것이죠. 아무튼 이렇게 헤닝 만켈과 스티그 라르손은 정말 비슷합니다. 이 둘 사이에 존재하는 시간적 간격 때문에 저는 스티그 라르손을 그야말로 헤닝 만켈의 적자라고도 부르고 싶어지는군요. 그러나 모든 면에서 다 똑같은 것은 아닙니다. 그랬다면 스티그 라르손이 이렇게 대중적으로도 비평적으로도 높은 인정을 받기가 어려웠겠죠. 헤닝 만켈의 아류 정도로 취급받았을테니까요. 그러니까 여기에서 우리가 하나 알 수 있는 건, 스티그 라르손을 그렇게 높은 평가를 받을 수 있도록 만든 것이 바로 이 지점, 그러니까 헤닝 만켈과 차이나는 지점에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그것은 무엇일까요?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제대로 스티그 라르손을 소화하는데 있어서 가장 필요한 소화제가 되어줄 것 같네요.

 

  이를 위해서 우리가 먼저 생각해 볼 것은 바로 ‘스웨덴’이란 나라입니다. 스웨덴은 지금도 가장 성공적인 복지국가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전 세계적으로 가장 행복한 국민들을 선정할 때 늘 상위권을 차지하는 나라이기도 합니다. 모두 1932년부터 76년까지 집권한 사민당 때문이죠. 이 기간 동안 그들은 이른바 ‘스웨덴 모델’ 즉 경제성장과 광범위한 사회복지 확충을 동시에 양립시켜 발전하도록 하는 것을 골자로 하는 종합적인 경제-사회 모델 정책을 진행시켜 왔습니다. 그래서 스웨덴은 경제성장은 성장대로 또 복지는 세계최고의 복지국가를 이룩하게 되었죠. 스웨덴의 복지 수준은 열악한 우리 한국인의 눈으로 본다면 놀랄만한 수준입니다. 사실 그런 나라에 살면 별로 불행할 것 같지도 않죠. 통계 결과도 말해주지 않습니까? 세계에서 가장 행복한 국민 순위 중 상위권이라고. 그래서 노르웨이의 작가 조 네스보는 이런 나라들을 ‘평온한 사회’라고 부르기도 했습니다. 갈등도 고통도 없다는 것이죠. 그런데 어쩌다 90년대의 헤닝 만켈이 또 2005년의 스티그 라르손이 ‘그렇지 않다!’라며 이렇게 스웨덴의 추악한 이면을 고발하고 있는 것일까요? 이러고 보니, 정말 궁금해지지 않나요?

 

  우리는 여기에 대한 적절한 대답을 스티그 라르손으로부터 들을 수 있습니다.(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 대답이야말로 사실 헤닝 만켈과 차이나는, 더 극단으로 밀고 갔다는 점에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를 위해 스티그 라르손은 현명하게도 소설의 프롤로그 부분에서 ‘압화’를 도입합니다. ‘압화’란 말 그대로 꽃을 오랫동안 납작 눌러서 말린 것이죠. 그렇게 그것은 오랜 시간이 집적된 사물입니다. 하지만 눈에 보이는 것은 납작하게 눌려진 꽃 뿐, 그 과정에 분명 개입되었을 오랜 시간들은 그 이면에 가려져 보이지 않습니다. 이것은 만켈도 그렇고, 라르손도 궁극적으로 드러내려 하는 ‘복지국가’라는 미명 속에 오래도록 감춰져왔던 어둠과도 유사합니다. 그렇게 우리 눈에 보이는 건 예쁜 꽃처럼 매력적인 사회의 모습이지만 그 이면엔 오랜 역사에 걸쳐 켜켜이 쌓여온 고통과 비극들이 존재하고 있음을 드러내는 것 말입니다. 그러니까 한 마디로 이 ‘압화’는 문자 그대로 현재 스웨덴의 상징인 것입니다.


 


  ‘압화’는 헨리크 방예르에게 끝내는 알 수 없었던 진실을 내내 환기시킵니다. 그것은 하나의 죽음과 관련된 진실이죠. ‘압화’의 상징과 관련해서 말한다면, 스웨덴이 ‘복지국가’라는 미명 속에 내버려 두었던 죽음이라 할 수 있겠군요. 앞서도 잠깐 언급했듯이 헤닝 만켈에서도 스티그 라르손의 ‘밀레니엄’에서도 죽음은 그저 단순한 죽음만은 아닙니다. 그것은 오랜 시간 사회가 은폐시켜 온 사회적 고통 혹은 비극들이 비로소 표출되는 하나의 '징후'입니다. 그것은 드러남으로서 그 사회가 사실은 아무것도 해결하지 못했으면서 다만 보이지 않게 칸막이 쳐서 감추고 있었을 뿐이라는 것을 웅변합니다. 그래서 그건 고발이기도 합니다. 고발은 당연히 수사를 촉발시킵니다. 해서 만켈의 소설도 라르손의 그것도 수사물이라는 형식이 되는 것입니다. 수사를 통해 이면의 진실은 드러납니다. 그 이면의 진실이란 어떤 것입니까? 그것은 앞서 말했던 것과도 같이 ‘세계최고의 복지국가’라는 수식어에 걸맞게 모든 것이 정당하고 평등한 줄로 알았는데, 사실은 여전한 권력관계의 불평등이 존재한다는 것과 그 일방적 권력관계로 인해 사회적 약자들이 고통을 당하고 있다는 것에 대한 확인입니다. 그 수식어는 그야말로 보기 좋은 포장지에 불과하다는 고통스런 깨달음입니다.

 


  만켈은 이를 음미하도록 합니다. 하지만 라르손은 다릅니다. 그는 선언적입니다. 이 말은 그러니까 그는 용감하게도 이 모든 이면이 숨기고 있는 사슬을 끊어버릴 수 있는 대안까지 말해준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만켈의 뒷맛은 씁쓸함이었지만 라르손의 뒷맛은 선명한 쾌감까지 주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왜 이렇게 생각하느냐구요? 이제 그에 대해서 말하겠습니다. 일단 저는 미카엘에게 주목합니다. 많은 면에서 만켈과 유사하지만 라르손은 미카엘을 경찰로 만들지 않았습니다. 단순히 라르손 자신이 기자 출신이어서 그랬다고 여길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만켈도 기자 출신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발란더를 경찰로 만들었습니다. 저는 이 차이가 중요하다고 봅니다. 이 차이가 라르손이 말하고 싶었던 현재 스웨덴이 그 그늘에 가지고 있는 어둠을 벗겨낼 대안 같은 것과 관계가 있다고 봅니다. 그는 왜 미카엘을 굳이 기자로 만들었을까요? 결론부터 말하면 라르손이 그를 언제나 중심부가 아닌 주변부, 그렇게 늘 경계에 있도록 만들기 위해서였습니다. 시작부터 미카엘은 베네르스트룀에게 형사재판에서 패소하는 것으로 나옵니다. 그는 이제 막대한 벌금과 감옥까지 가야합니다. 결국 그는 편집장으로 일하는 ‘밀레니엄’을 그만둡니다. 이 ‘밀레니엄’은 스웨덴 사회의 경제적 권력 중심에 대해서 서슴없이 비판하는 정치적으로 저항적인 독립 잡지였습니다. 그렇게 주변부적인 언론사였습니다만 거기에서조차 미카엘은 밀려 납니다. 라르손은 미카엘을 그렇게 끊임없이 밀려나게 만들어 결국은 작은 섬마을 ‘헤데뷔’에 고립시킵니다. 그렇게 라르손은 의도적으로 미카엘을 사회로부터 고립된 존재로 만듭니다. 라르손은 이러한 미카엘의 존재성을 밀레니엄의 여사장 에리카와의 관계를 통해 더욱 더 강조해서 보여주기까지합니다. 그들은 불륜을 저지릅니다 하지만 아무 죄책감도 여기지 않습니다. 아예 대놓고 저지르는데도 그렇습니다. 이것은 우리의 상식적인 성도덕을 뛰어넘는 것이고 그만큼 미카엘이 이 사회로부터 미끌어지는 존재임을 깨닫게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라르손은 만켈의 발란더 처럼 정부에 소속된 공무원으로 만들 수 없었던 것입니다. 미카엘은 정부로부터 벗어난 존재가 될 필요가 있었습니다. 그렇게 사회로부터 바깥에 있을 필요가 있었습니다.

 

   이 모든 것은 라르손이 자신이 이 작품을 통해 드러낼 대안과 관련하여 의도적으로 미카엘에게 부여한 성격이라 할 수 있습니다. 미카엘이 사회에 편입되지 않은 아슬아슬한 경계 위에 서 있는 존재임을 독자들에게 깊이 각인시키기 위해서 말이죠. 그런데 라르손은 이 경계 위의 존재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았는지 보다 더 자신의 주제를 심화시키기 위하여 다른 하나의 존재를 더 끌고 들어옵니다. 그 존재는 미카엘 보다 더 멀리 나아간 자로, 라르손이 보여줄 대안의 입장에서 보자면 진정한 대안의 형상화라 할 만한 자인 ‘리스베트 살란데르’입니다.

 


   물론 리스베트가 미카엘 보다 더 사회를 벗어난 개인적이며 독립적인 존재라서 그렇지만(여기에 대해서 나중에 따로이 말하겠습니다.) 라르손이 보여주고자 하는 대안의 궁극적 모델로서의 ‘리스베트’의 존재는, 만켈의 소설에서 여성은 조력자이자 객체에 불과했었는데 그것과는 다르게 여성이 소설 속에서(1부에 국한해서 말하는 것입니다만.) 미카엘과 동등한, 당당한 하나의 주체로서 다뤄지고 있다는 것에서 볼 때 더욱 더 드러납니다. 소설 초반 라르손은 리스베트와 미카엘이 자신의 주제를 표현할 동등한 인물들이라는 것을 나타내기 위해 아주 주의 깊게 이 둘의 이야기를 배치시킵니다. 주의해서 읽어본다면, 라르손이 이 둘의 이야기가 전개상 피치 못하게 하나로 모일 수 밖에 없게 될 때까지는 하나의 이야기가 다른 하나의 이야기에 종속되지 않도록 하면서 세심하게 끌어가는 것을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게 그들은 각 자 다른 공간에서 자신만의 이야기를 이어갑니다. 그러면서 그들은 하나가 되어, 파헤치는 범죄가 상징하는 ‘스웨덴’이라는 거대한 사회에 맞서게 될 때까지 유사한 경험을 합니다. 혹시 눈치채셨습니까? 미카엘과 리스베트가 이뤄가는 인간관계가 놀랍도록 유사하단걸? 한 번 따져볼까요? 초반의 미카엘과 에리카의 관계는 리스베트와 아르만스키의 관계와 유사합니다. 둘 다 업무적으로 관계를 맺고 있고 서로에게 애정을 느끼면서도 자유를 구속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똑같습니다. 미카엘과 방예르의 관계는 리스베트와 변호사 팔름그렌과의 관계와 같습니다. 방예르와 팔름그렌, 둘 다 미카엘과 리스베트의 정반대쪽이라고 할만한 사회의 중심부에 있으면서 인간적 매력으로 신뢰를 얻는 인물들이니까요. 거기다 사회의 또 하나의 대표적인 권력이라 할 만한 ‘법’이란 면에서 변호사들은 또 어떻습니까? 미카엘과 프로데 변호사와 리스베트와 비우르만 변호사는 또 그렇게 똑같지 않나요? 프로데가 자본가를 대표하는 방예르의 대리인이듯 비우르만은 정부권력을 대리합니다. 그러면서 프로데는 미카엘의 언론인으로서의 양심을, 그렇게 영혼을 착취하고 비우르만은 리스베트의 육체를 착취하죠. 이렇게 미카엘과 리스베트는 그 중요한 인간관계에 있어서 놀랄만한 유사성을 보여줍니다. 결국 여기엔 라르손의 의도가 개입 되어있다고 볼 수 밖에는 없겠죠. 과연 무엇 때문에 라르손은 이토록 치밀하게 구성을 하고 있는 것일까요? 우리는 이제 그 대답을 추구해야 합니다.

 

 

   무엇보다 우리가 그 대답을 추구하는 데 있어 고려해야 할 것은 리스베트가 여성이라는 점과 그녀가 그 어떤 사회적 관계에도 포섭되지 않은 지극히 개인적이고 독립적인 존재라는 사실입니다. 여성이라는 점은 이 소설이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주제를 보여줄 것이고 개인적이고 독립적인 존재라는 점은 라르손에게 가장 독보적이라고 할 만한 것. 즉 그가 보여주는 대안이 어떤 것인지 보여줄 것입니다.

 

   먼저, 여성입니다.

소설에서 여성은 주된 피해자입니다. 리스베트 역시도 비우르만과의 관계에서 피해잡니다. 그런데 기묘하게도 리스베트가 비우르만에게 당하는 상황은 또 그렇게 ‘밀레니엄’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의 축이 되는 실종된 여자 ‘하리에트’와 겹칩니다. 리스베트가 그와 같은 성폭력을 무자비하게 당하면서도 정작 아무데도 도움을 호소할 수 없었던 상황을 우리는 나중에 하리에트에게서도 똑같이 목격합니다. 그리고 이것은 미카엘과 관계를 가지게 된 세실리아에게서도 확인됩니다. 그녀 역시도 결혼 생활동안 남편에게 매를 맞았지만 아무데도 도움을 구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결국 소설에 나오는 모든 여성들은 이렇게 사회의 어떤 보호로 부터도 벗어난 그렇게 내버려진 존재라는 점에서 하나로 모입니다. 여기서 그 어느 곳에도 도움을 호소할 수 없었다는 것은 또 그렇게 쉽게 은폐되어질 수 있음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드러나지 않는 것이기도 합니다. 말하자면 소설 속 이러한 여성들의 존재는 그야말로 ‘압화’의 그 이면인 것입니다. ‘복지국가’라는 화려한 수식어 속에서 언뜻 제거된 것 같았지만 사실은 여전히 유유히 흐르고 있었던 무수한 상처들로부터 쏟아진 고름의 강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기서 라르손은 여성을 다만 여성으로 그리고 있지는 않습니다. 이것은 하나의 대표로서의 여성입니다. 라르손은 소설에서 모든 사회로부터 고통 받고 있는 약자를 대변하는 상징으로서 그 여성을 피해자로 그리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소설에서 장이 바뀔 때마다 라르손이 사회에서 여성들이 받는 폭력의 수치를 보여주는 것에서 잘 드러납니다. 그가 꾸준하게 스웨덴이라는 사회에서 벌어지는 폭력의 수치를 보여주는 것은 정부가 아무리 복지제도를 잘 꾸려서 갈등을 봉합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그저 은폐하는 것에 불과할 뿐 사실은 여전히 그리고 현저히 사회적 고통은 도처에서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함입니다. 이면에 은폐된 폭력이 오로지 여성에 대한 폭력만은 아닐 것입니다. 그렇게 이 수치는 모든 고통을 낳게 하는 폭력에 대한 상징이라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이러한 항상적인 폭력의 형태는 극중 인물의 하나로도 형상화되고 있습니다. 그 인물이 바로 90세가 넘은 노인 하랄드 방예르입니다. 우리는 그가 ‘헤데뷔’에서 유일하게 살아있는 아버지라는 사실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 아버지란 존재가 예전엔 나치 당원이었고 여전히 인종주의적 편견에 사로잡힌 파시스트란 점도 말이죠. 이렇게 라르손은 ‘하랄드’를 통해 파시즘과 가부장제를 한 인물로 결합시킵니다. 라캉에 따르면 아버지란 사회의 근원적인 질서를 상징하는 존재입니다. 그렇다면 이건 현재 스웨덴의 또 다른 상징으로 보아도 무방할 것입니다. 그러한 아버지가 자기 딸인 세실리아에게 계속 창녀라 욕을 합니다. 이 욕설. 늘 쏟아지는 이 호명이야 말로 스웨덴이 사회적 약자에게 계속적으로 가하고 있는 폭력의 상징이라고 보아도 무방하지 않을까요?


   이 ‘거짓된 위장 뒤에 은폐된 사회적 고통’을 보여주는 것에 우리는 또 하나를 추가할 수 있습니다. 이번엔 인물이 아니라 사건으로 극화된 경우입니다. 그러니까 바로 1966년 하리에트가 사라진 바로 그 사건입니다. 라르손이 정말 얼마나 주도면밀하게 이 모든 것을 설계했는가를 여기서 우리는 또 놀랄 정도로 실감합니다. 그는 왜 하리에트가 사라지는 때를 하필이면 1966년의 어린이 날로 잡았던 것일까요? 그 어린이날, 미카엘은 사진을 통해 많은 사람들이 어린이날 퍼레이드에 행복한 표정으로 참여했음을 봅니다. 거기에 있었던 것은 충만한 웃음과 행복 밖에는 없었죠. 그런데 거기 마치 하나의 얼룩처럼 혼자 다른 것을 보고 있는 하리에트가 있습니다. 모두가 웃고 있는 가운데 두려움에 떨고 있던 하리에트가 있습니다. 모두 같은 것을 바라보며 웃고 있는데 하리에트, 그녀만은 다른 것을 보고 두려워하고 있었습니다. 결국 이 사진이 결정적인 열쇠가 되어 30년 동안 풀리지 않고 남아있던 사건이 해결되게 됩니다. 그런데 그것이 찍힌 때는 1966년 이었습니다. 1966년은 스웨덴에서 세계 최초로 아동학대금지법이 만들어졌던 해입니다. 그 66년의 어린이날. 그 날 열렸던 축하 퍼레이드, 몰려든 행복한 관중들. 이 모든 이미지들이 그야말로 찬란한 복지국가 ‘스웨덴’을 형성해가고 있을 때 거기, 그 내부에, 그 모든 이미지들이 거짓된 것임을 알려주는, 하리에트가 있었던 것입니다. 소설에서 모든 것의 발단이자 모든 해결의 열쇠가 되는 이 사건마저 이렇게 ‘거짓된 위장과 은폐된 고통’을 그야말로 집약적으로 분명하게 드러내고 있다면, 사실 라르손이 소설 ‘밀레니엄’을 통해 추구하고자 하는 주제가 바로 이것이라고 주장해도 과히 틀린 말은 아닌 게 아닐까요?

 

 

   이제 어느 정도 라르손이 말하고자 했던 바가 밝혀졌으니 앞서 얘기했던 과연 그가 어떤 대안을 보여주려 하는지 천착할 차례로군요. 긴 글 읽으시느라 많이 힘드셨을텐데, 그래도 이왕 여기까지 오신 거 조금만 더 긴 호흡으로 결말까지 함께 해 주셨으면 좋겠네요. 이제 얼마 안 남았습니다. 우선, 여기서 우리가 주목할 것은 미카엘과 리스베트가 모두 사회로부터 벗어난 존재들이라는 점입니다. 하지만 여기서도 차이는 있습니다. 그러니까 미카엘은 독립 언론인이지만 그가 정보를 얻는 것은 그래도 합법적 틀 내에서 움직입니다. 하지만 리스베트는 그렇지 않습니다. 그녀는 해커입니다. 그녀가 얻는 대부분의 정보는 불법적인 것입니다. 이렇게 라르손은 둘을 명확히 대비시켜 보여줍니다. 그러니까 둘 다 벗어난 존재이지만 미카엘은 여전히 합법적 영역 내에 머무르고 리스베트는 불법적 영역까지 넘나드는 존재로 말이죠. 이것은 라르손이 리스베트로 하여금 미카엘 보다 더 멀리 사회로부터 벗어난 존재로 만드려고 하는 것임을 보여줍니다. 그런데 이 나아감이 무슨 의미가 있길래 라르손은 이렇게 특별히 차이를 두는 것일까요? 그것은 라르손에게 있어 더 멀리 나아감은 더 강하게 되는 것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리스베트가 더 멀리 나아간다는 것은 미카엘 보다 그녀가 더 강하다는 의미이죠. 때문에 비우르만 변호사와의 에피소드에서 보여지는 것처럼 궁극적 해결은 늘 그녀가 도맡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강해지는 것이 필요할까요? 그것은 결론부터 말하자면 궁극적으로 ‘스웨덴’이란 사회 자체와 싸우기 위해서입니다. 이제 여기서 우리는 저 앞에서 얘기했던 것 ‘세계 최고의 복지국가’라는 스웨덴에서 왜 라르손이 이러한 어두운 모습을 부각하는지에 대해 얘기할 차례가 된 것 같습니다. 결국 소설 ‘밀레니엄’을 통하여 라르손이 겨누고 있는 표적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복지국가’란 말 속에 함의되어 있는 것. ‘스웨덴 모델’이란 말 속에 숨겨져 있는 것. 즉, 뭐든지 관리하고 통제하는 ‘정부’ 자체인 것입니다. 물론 여기서의 정부도 여성이 그저 여성만을 의미하지 않듯이 정부 자체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제가 특별히 정부를 언급한 것은 라르손이 소설에서 특별히 설명하고 있는 ‘후견제도’와 관련해서입니다. 왜냐하면 이 ‘후견제도’야 말로 라르손이 우려를 표명하고 있는 개인을 관리하고 통제하는 ‘정부’의 모습을 가장 잘 나타내주고 있다고 생각하니까요. 라르손은 이 ‘후견제도’를 통하여 이미 성인이 된 리스베트 조차 정부에 의해 경제적 능력을 박탈당하고 일일이 관리와 허가를 받아야 할 뿐만이 아니라 아울러 후견인인 변호사 비우르만으로부터 성폭행까지 당하는 등, 이렇게 개인에게 가해지는 정부의 부조리한 폭력성을 더욱 더 강조합니다. 결국 라르손이 미카엘과 리스베트를 사회로부터 격리시키는 것은 바로 이러한 폭력성과 맞서게 하기 위해서라고 할 수 있습니다. 더 멀리 벗어나게 하는 것은 더 강하게 그것과 싸우게 하기 위함입니다. 여기에서 보면 지금까지 우리에게 기이하게 여겨졌던 구성, 그러니까 왜 2권으로 가서야 주인공들인 미카엘과 리스베트가 비로소 만나게 되고 2권에서야 사건 해결을 위한 본격적인 추적이 행해지는 것인가가 더욱 더 명확하게 이해됩니다. 결정적으로 2권과 1권을 가르는 지점은 바로 ‘사진의 발견’입니다. 이 사진은 사건의 근원이자 해결의 근원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여기까지 이르는 과정이 미카엘이나 리스베트 모두에게 예사롭지 않음이 눈에 띕니다. 우리는 이 둘의 여정이 톱니바퀴처럼 맞물려 있음을 보게 됩니다. 그러니까 에리카가 미카엘, 헨리크 방예르와 처음 저녁식사를 하는 장면부터 시작해보죠. 미카엘은 그 방문의 진정한 목적을 모르고 있다가 나중에 가서야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게 됩니다. 그것은 미카엘이 더욱 더 방예르 가문에 종속됨을 의미했습니다. 이와 똑같이 리스베트도 새로운 후견인 비우르만에게 예속됩니다. 미카엘이 자본 때문에 그랬듯 리스베트도 새로운 컴퓨터 때문이었습니다. 둘 다 각 자에게 절실했다는 점에서도 똑같습니다. 그렇게 그것은 일종의 욕망이기도 했습니다. 마치 그 둘이 동일한 과정임을 더욱 더 강조하듯이 이것들은 병행됩니다. 미카엘은 이것을 시작으로 더욱 더 예속되어 갑니다. 그는 세실리아와 관계를 가집니다. 이전이 자본에의 욕망이라면 이번엔 몸에의 욕망입니다. 묘하게도 리스베트 역시 그렇게 육체적인 관계를 맺습니다. 물론 일방적인 관계이지만. 이렇게 미카엘, 리스베트는 동일하게 자본의 욕망에서 육체적 욕망으로 스스로를 더욱 더 얽어매게 됩니다. 미카엘이 세실리아와 함께 있을 때 리스베트는 비우르만에게 당하고 있습니다. 역시나 병행되어 전개됩니다. 이러한 일치와 병행은 물론 라르손이 의도적으로 한 것임을 분명하게 드러내주고 있습니다. 문제는 이렇게 예속되어 갈 때 그들이 확인하게 되는 건 오로지 단 하나, 그들의 무기력함 밖에는 없다는 것입니다. 미카엘은 실마리를 전혀 잡지 못한 채 여전히 오리무중이고 리스베트는 아무리 성폭행을 당해도 어디에도 호소할 수 없는 자신의 모습을 확인하게 됩니다. 이와 같이 라르손은 그들이 사회 내로 점점 편입되면 될수록 더 나약해지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따라서 그들로 하여금 감춰진 진실을 밝혀내어 싸우도록 만들기 위해서는 더 강하게 만들 수 밖에 없고 그러기 위해서는 점점 더 사회로부터 벗어나게 만들 수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미카엘에겐 감옥에로의 수감과 세실리아와의 결별을, 리스베트에겐 폭력적인 방법으로 그 후견제도에서 벗어나게 만들어주는 것입니다. 그렇게 그들을 사회의 가장 바깥쪽 벼랑으로 내모는 것입니다. 바로 거기에 이르러서야, 그렇게 최대한 사회로부터 벗어나서야 비로소 미카엘은 실마리를 잡을 수 있었고 리스베트와 미카엘은 만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으로 우리는 이제 ‘밀레니엄’에서 라르손이 말하고자 했던 것의 최종적인 정리를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는 복지국가화에 따른 정부의 개인에 대한 통제가 점점 더 심해지는 것을 우려합니다. 그래서 그것에 대항하기 위해 개인들이 기꺼이 사회가 내뻗는 촉수로부터 리스베트처럼 달아날 것을 제안합니다. 그런데 그가 그렇게 하는 것은 왜입니까? 그건 복지 자체를 비판하고자 함이 아니라 그렇게 점증되는 정부의 개인에 대한 통제에서 파시즘의 잔영을 보게 되기 때문입니다. 앞서도 말했듯이 현실에서 기자였던 라르손은 언론인으로서의 자신의 사명을 스웨덴에 만연한 일상적 파시즘과 투쟁하는 것으로 삼았습니다. 제가 보기엔 이 소설 ‘밀레니엄’은 바로 그러한 저널리스트로서 라르손이 가지는 투철한 사명감이 그대로 반영된 게 아닌가 싶습니다. 그렇게 소설에서 리스베트가 보여주는 철저한 처벌과 복수의 의사 표현은 그대로 라르손이 가진 파시즘에 대한 결연한 의지의 또 다른 표현이 아닌가 싶네요. 라르손의 ‘밀레니엄’은 아직까지도 여전히 높은 인기와 평가를 누리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늘 거침없는 ‘페이지터너’로서의 압도적인 재미를 꼽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 재미에 가려 우리가 절대 간과하지 말아야할 작품을 통해 관철하고 싶은 주제의식이 아울러 존재하고 있음을 말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위해 라르손이 얼마나 아주 세부에 이르기까지 치밀하게 계산해서 작품을 구성했는지 강조하고 싶습니다. 이 모든 것은 소설가로서의 능력뿐만 아니라 현실에서도 투쟁을 하듯 기사를 썼던 치열한 저널리스트로서의 의식 역시 있었기에 가능했을 것이 틀림없습니다. 새삼 문득 깨닫는 건 라르손의 그 편안하고 사람 좋아 보이는 얼굴 뒤에 깃들어있는 거센 불길과도 같은, 작가와 저널리스트 모두로서의 정열이로군요. 그만한 정열이 내어뿜는 글이었기에 그만 우리는 압도적으로 타버린 나머지 마파람에 게 눈 감추듯 순식간에 작품을 먹어치운 것은 아니었을지 하는 생각을 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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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 2012-02-10 23: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새 헤르메스님의 글을 읽으면 항상 변화를 주셔서 눈과 마음이 즐겁습니다.
와, 이번 리뷰는 정말 알차고 빈곳이 한군데도 없는걸요.
물론 그만크...큼 제겐 어렵지만 말이어요.
이 책은 한동안 알라딘 메인에 떠서 관심이 갔는데 영화가 19금이 붙은것을 보고서는 아예 흥미가 떨어져버렸어요. 어차피 영화화된것은 보지않는데 잘되었지요.

ICE-9 2012-02-19 20:24   좋아요 0 | URL
제가 좀 정형화된 걸 싫어하고 이것저것 마구 저질러보는 스타일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잘 보아주셔서 감사드려요 소이진님^ ^ 이런 밀레니엄이 19금이었나요? 안타깝네요. 그래도 데이빗 핀쳐 감독의 영화는 한번쯤 보아둘 가치는 있으니 나중에라도 꼭 한 번 보시면 좋겠어요^ ^

맥거핀 2012-02-12 01: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이 소설에 대한 이런 이야기가 보고 싶었었는데, 헤르메스님이 잘 정리하여 쉽게 전달해주셔서 빠르게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늘 좋은 글을 읽게 되어 감사하다는 인사를 전하고 싶군요. 저는 영화만 본 상태이지만(그것도 리메이크인 미국판만), 확실히 소설도 읽어볼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영화보다 더 풍성한 함의를 읽어낼 수 있겠군요.^^

ICE-9 2012-02-19 20:28   좋아요 0 | URL
맥거핀님 정말 감사합니다.^ ^
밀레니엄에 대한 글에 개인적으로 아쉬운 게 있어서 적어본 글이었는데 이렇게 말씀해주시니 더 기쁘네요. 개인적으로 데이빗 핀쳐와 라르손이 지향하는 바는 같은 지점일 것 같지는 않지만 그래도 역시 원작과 영화를 다 보는 것이 더욱 풍성한 이해를 가져다 줄 것 같아요. 어차피 작품이 가진 의미란게 전적으로 작가들만의 몫도 아니니 말이죠^ ^

마녀고양이 2012-02-13 13: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리뷰를, 제가 소설을 독파한 직후에 읽었으면 좋았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읽은지 1년이 넘어가니, 정말 가물가물하네요...

제가 남아있는 것은, 3부에 리스베트가 점점 자신을 찾아가는데 대해 안도감을 느꼈다는 것과, 남자보다 더 멋진 여자 주인공을 창조했구나 라고 이끌린거, 그리고 작가의 죽음으로 인해 5부작 기획이었던 책이, 3부작으로 끝나서 안타깝다는 점이었답니다.

정말 재미있는 책이었습니다. 그리고 아무리 재미와 스릴을 추구하더라도
그 이면, 작가가 나타내고자하는 주제를 보아야한다는 점에 열렬한 공감을 보냅니다.

ICE-9 2012-02-19 20:31   좋아요 0 | URL
하하, 저도 시간이 지나면 내용들이 가물거리고 때로는 막 썪이고 그러더라구요. 라르손의 뜻하지 않은 죽음으로 미완으로 그치고 만건 저역시 너무나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어요. 소설로 간접 경험하게 되는 그의 열정을 생각하면 더 그렇더군요. 좋은 작가를 하나 잃은 것 같아 아쉽고 하야오의 '붉은 돼지'에 나오는 대사 처럼 "좋은 사람들은 빨리 죽"는가 봅니다. 아무튼 열렬한 공감에 정말 감사드려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