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1985


경남 언양장터/1965


대구역 앞에서/1965


우리의 가난한 이웃, 그들의 표정엔 가식이 없고
그들의 모습만큼 진실한 것도 없다.
나는 카메라를 통해서 서민들의 순수한 삶의 모습을 담아
그들의 주어진 삶의 의미를 작품화한다.
그곳에는 허튼 수작으로 시간을 낭비할 수 없게 하는
절대적인 빛이 있다.
사진가는 상상력이 발휘되고 대상이 명료해지면서
의미가 담기게될 때까지 자신이 관찰하고 있는 것을 깊이 탐구하여야 한다.
카메라의 눈을 현실 한복판으로 돌려서 직시해야 한다.

최민식, <종이거울 속의 슬픈 얼굴>, 현문서가(2004), 250쪽
위의 사진은 전부 최민식의 홈페이지(http://www.kcaf.or.kr/art500/choiminsick/)에서 가져왔다.


최민식의 사진에는 그것을 바라보는 사람을 끌어들이는 힘이 있다. 그 자신도 모르게 사진을 응시하게 만들고 마음을 쏟아붓게 만든다. 그래서 <한겨레신문>의 구본준 기자는 그의 사진을 일컬어 '저항할 수 없는 힘'이라 표현한다. 아래에 덧붙이는 구본준 기자의 글을 한번 읽어보시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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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민식의 사진-저항할 수 없는 힘
구본씨가 읽은 책

구본준 기자 bonbon@hani.co.kr
출처 : <한인터넷한겨레> 2007 12 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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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쟁사회’ 다산과 신작을 돌아보라

강명관 부산대 교수·한문학
출처 : <인터넷 한겨레> 2007 12 07


» ‘경쟁사회’ 다산과 신작을 돌아보라
 
고금변증설 /

청의 고증학은 18세기 후반 조선학계에 전해진다. 고증학은 ‘이’ ‘기’ ‘심’ ‘성’ 등 극도로 추상적인 관념어를 조작하는 성리학에 대한 일대 반격이었다. 고증학은 구체적인 언어를 다룸으로써, 텍스트와 사실의 진위를 판정하려 하였다. 조선학계는 충격을 받았고, 고증학적 연구방법이 일시에 유행했다. 무오류의 성현의 말씀으로 여겨졌던 사서오경 역시 진위의 심판대에 올랐다.

조선의 고증학은 곧 성과를 낳는다. 하지만 여기서 모두 말할 수는 없고, 단지 두 분의 성과를 소개하고자 한다. 한 사람은 다산 정약용이다. 다산은 알다시피 1801년 해남으로 귀양을 가고, 1808년 강진의 초당(곧 답사객들이 즐겨 찾는 다산초당)으로 옮긴다. 여기서 그의 학문이 찬란하게 개화한다. 다산의 학문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광범위하지만, 중심은 역시 경학이다. 다산의 경학 중 단연 손꼽히는 성과는 <서경>의 진위를 논한 <매씨서평>이다. 1818년 귀양에서 풀려 서울로 돌아오자 그의 저술이 서울 학계에 읽혔던 모양이다.

이 시기 정계와 학계의 정점에 있었던 홍석주가 <매씨서평>을 읽어보니 탁월한 업적이기는 하지만, 중요한 연구성과가 반영되어 있지 않았다. 청의 염약거(1636-1704)가 저술한 <상서고문소증>은 <서경>의 절반이 위작이라는 것을 논증한 고증학적 저술이다. <서경>의 고증학적 연구를 촉발시킨, 빼어난 저작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다산은 이 책을 보지 못했던 것이다. 홍석주는 다산에게 책을 보낸다. 읽어보니, 자신의 주장은 이미 염약거가 다 말한 것이 아닌가. 순간 절망했지만, 다산이 또 누군가. 다시 마음을 챙겨 <상서고문소증>을 꼼꼼히 검토한 뒤 자신의 저작에 수렴하여 1834년 드디어 <매씨서평> 완성본을 내놓는다. <서경>의 25편이 가짜일 것이라는 의심을 품고 1783년 연구를 시작한 이래, 52년만에 종지부를 찍었던 것이다.

또 소개할 분은 신작이다. 다산이 <서경>을 연구 대상으로 삼았다면, 신작은 <시경>을 대상으로 삼았다. <시경> 역시 온갖 주장과 학설이 난무하는 텍스트다. 신작은 그 무수한 주장과 학설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해 제시한 저술 <시차고>를 내놓는다. <매씨서평>에서 다산이 자신의 주장을 뚜렷이 밝히고 있다면, <시차고>에서 신작은 자신의 주장을 개진하지 않고 각종 주장과 학설을 요령 있게 정리하여 보여주고 있을 뿐이다. 이 역시 중요한 저술 형태다. 자, 여기에 서로 대립하거나, 유사한 학설들이 있다. 어느 것이 옳은 것인지는 독자가 읽어보고 판단하시라. 신작 역시 엄밀한 고증학적 태도를 견지한 것이다.

조선 고증학의 두 대가인 다산은 ‘매씨서평’을 52년만에, 신작은 ‘시차고’를 28년만에 완성했다. 이 저술은 당시 동아시아 학계의 최고로 평가받았다. 얼마 전 유명대학의 총장이 교수들을 상대로 1,2년 안에 세계적인 업적을 내놓으라고 하자 매스컴은 이구동성 찬사를 늘어놓았다. 타율적 강제로 이뤄지는 경쟁은 단기간의 성과는 있겠으나 다산과 신작처럼 자율성에 의해 창조되는 성과는 얻기 힘들 터다.

신작의 고심참담한 저술은 어느 날 발생한 화재로 한 줌 재가 되고 말았다. <시차고>는 그의 삶의 목적이었다. 목적을 상실한 삶은 곧 넋이 나간 삶이다. 사람들은 신작을 보고 넋이 달아난 껍데기 인간이라 불렀다. 어찌 그러지 않을 수 있으랴. 다산을 순간 절망케 한 것이 <상서고문소증>이었다면, 신작을 절망시킨 것은 화마였던 것이다. 하지만 다산이 다시 시작했던 것처럼 신작 역시 다시 시작한다.

요즘이야 컴퓨터와 인터넷으로 온갖 자료를 책상에 앉아 검색할 수 있고 따올 수 있지만, 다산과 신작의 시대는 상상도 못할 일이다. 도서관이라야 궁궐 속의 규장각, 홍문관뿐이다. 민간의 학자는 집안의 서적을 이용하거나, 북경(베이징)에서 구입하거나, 수소문하여 빌려야 한다. 또 일일이 손으로 자료를 베낀다. 원고가 완성되어도 복사기가 없으니, 다시 손으로 베껴 부본을 만드는 수밖에 없다. 특히 고증학은 대량의 자료를 이용하기 때문에 자료를 구득하고 해독하고 정리하고 저작하는 과정은 필설로 형용하지 못할 고된 노동이다. 그 노동을 신작은 두 번 거쳤던 것이다. 신작이 <시차고>의 저술에 착수한 것은 28살(1787) 때였고, 1차 완성본이 소실된 것은 39살(1798) 때였다. 마음을 추슬러 최종 원고를 완성한 것은 55살(1814) 때다. 시작부터 완성까지 28년이 걸린 것이다. 다산과 신작의 저술은 당시 동아시아 학계에서 가장 높은 수준의 것이었다. 이 저작들로 인해 동아시아 학계의 주류에서 조선은 멀어지지 않을 수 있었다.

얼마 전 유명한 대학의 총장님이 자기 대학의 승진 심사의 엄격함을 말하면서 1, 2년 안에 세계적인 업적을 내놓지 않으면 교수들이 대학에서 쫓겨날 것이라 말하자, 신문과 방송은 이구동성 찬사를 늘어놓았다. 그 총장님과 매스컴의 사고를 지배하는 것은 오직 한 마디 ‘경쟁’이다.

인간사회에서 경쟁은 필요불가결한 것이다. 하지만 경쟁이 만사는 아니다. 경쟁이 필요한 부분이 있는가 하면, 협동이 필요한 부분이 있다. 또 단기적 경쟁이 필요한 부분이 있고, 장기적 경쟁이 필요한 부분이 있다. 경쟁이 필요하다면, 그 경쟁의 공정성을 반드시 물어야 할 것이다. 또 경쟁의 결과 승자가 얼마를 차지하는가, 혹은 패자는 모든 것을 잃어야 하는가? 이런 문제들이 반드시 논의되고 구성원들의 공감을 얻어야 할 것이다.

한데 우리 사회에는 그런 논의 과정이 전무하다. 오직 ‘경쟁’이란 말만 있을 뿐이다. 특히 그 문제를 따져야 할 대학에서조차 대학 안팎의 관료들이 강요하는 경쟁의 논리만 횡행할 뿐이다. 타율적 강제로 이루어지는 경쟁은 짧은 기간 동안은 분명 성과를 낼 것이다. 하지만 다산과 신작의 연구처럼 장기간에 걸쳐 학문적 난제에 답을 찾는, 자율성에 의해 창조되는 성과는 얻기 어려울 것이다. 슬픈 일이다. 덧붙여 하나만 물어보자. 유치원에서부터 초등학교, 중고등학교, 대학교, 그리고 직장생활까지 만사가 경쟁으로 이루어지는 삶이 과연 행복한 삶인가. 우리는 왜 경쟁의 일방적 강요에 대해 한 마디도 못하는 착한 ‘백성’으로 살아가는 것인가.

[관련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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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레카] 냉소 이성
유레카

고명섭 책·지성팀장
출처 : <한인터넷한겨레> 2007 12 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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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BBK의 후폭풍 1 - 내 편은 善, 네 편은 惡

'냉소이성'이라? 글쎄, '이성'이라는 게 있기나 한지 모르겠다. 지금 대한민국을 돌아보면 모두가 '내편, 네편'으로 갈라져 싸우고 있는 느낌이다. '내편'이 하는 일은 모두 善, '네편'이 하는 일은 모두 惡. 논리도 이성도 없다.

검찰 발표 이후 이명박 지지선언이 봇물이 터지듯 넘쳐난다. 단연 압권은 한국노총의 지지선언일 게다. 그러나 그보다 대중의 관심을 끈 것은 일부 연예인들의 이명박 지지선언이다. 이명박을 반대하는 사람들은 비난을 쏟아붓는다. '공인(?)이 그러면 되나?', '밥그릇을 위한 줄서기냐?' 등등. 그런데 한번 물어보자? 연예인들이 왜 이명박 지지선언 하면 안 되는가? 정동영 지지선언 하는 것은 괜찮은가? 민주노동당 지지선언은?

지난 2002년 대선과 2004년 4.15 총선 당시 박찬욱, 봉준호, 문소리, 오지혜 등 많은 영화감독들과 배우들을 중심으로 민주노동당 지지선언을 한 적이 있다. 이 지지선언이 어디 잘못되었는가? 이 지지선언을 두고 내가 기억하는 한 조선일보 같은 데서 '안티'를 건 적이 없다. 영화배우들이 무슨 정치에 참여한다는 식의 허접한 비난을 한 적이 없다(물론 있었는데 내가 못 보고 넘어갔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들, 연예인들도 누구를 지지선언할 권리가 있다. 이걸 인정해줘야, 상대편 지지선언을 인정해줘야 우리편 지지선언이 정당성을 획득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편 지지선언은 잘하는 것이고 상대편 지지선언은 골빈 놈들이 하는 짓이다? 2002년 대선때 노사모 회장까지 했던 영화배우 명계남씨는 이회창 지지선언한 연예인들을 일러 '닭(돌이었나?)대가리' 운운하는 발언을 해서 논란을 일으킨 적이 있다. 자신은 노사모 회장도 모자라 전국을 돌며 노무현 선거운동까지 하면서 다른 연예인들이 이회창 지지하는 것은 닭대가리라서 그런 것이라니? 천박하기 이를 데 없는 사고방식 아닌가?

난 이명박 지지선언하는 연예인보다 자신이 지지하는 후보 지지 안 한다고 싸잡아 골빈 놈이라고 비난하는 명계남 류가 더 '한심한 이성'이라고 생각한다. 연예인들이 자신이 지지하는 정당 지지하면 그냥 격려해주고, 좀더 적극적으로는 음반 하나 더 사주고 그들이 나오는 영화 한번 더 봐주면 된다. 다른 정당 지지하면 그냥 무시하고, 좀더 적극적으로는 음반 안 사고 그가 나오는 영화 안 보면 그만이다. 이것이 논리의 일관성, 사고의 일관성, 행동(실천)의 일관성을 가진 이성적(합리적) 태도 아니겠는가?

한국노총, 이명박 지지 선언…노동단체가 가장 친기업 후보를?

2. BBK의 후폭풍 2 - 존재를 배반하는 의식.

한국노총에 관한 위의 기사를 보라. 대한민국에서 '네 계급대로 투표하라!'가 안 되는 이유를 자기 한 몸 불살라 보여주고 있는 조직이다.

'노동귀족'은 돈을 많이 받는다고 노동귀족이라 불리는 것이 아니다(그러나 천박하게도 노무현부터 이 땅의 보수언론들까지 돈만 많이 받으면 노동귀족이라고 부르고 싶어한다) . 연봉 1억을 받는 노동자라 할지라도 사회적 약자, 일테면 자신의 직장에서 같이 근무하는 비정규직 동료들과 연대해 싸운다면 그는 훌륭한 계급의식을 가진 노동자다. 연봉 삼천만원 밖에 못받는 노동자라 할지라도 동료의 어려움에 나몰라라 하고 좀더 많은 연봉을 받기 위해 사측에 붙어 같이 근무하는 비정규직 동료들을 외면한다면 그는 노동귀족이다.

끊임없이 존재를 배반하고픈 (계급)의식의 유혹. 그래서 대한민국의 선거는 맨날 누가 좋다, 누가 싫다가 된다. 어느 정당이 좋다, 어느 정당이 싫다가 아니고.

‘BBK사건’ 검찰의 치욕, 수사의 ABC가 모두 빠졌다”

3. BBK의 후폭풍 3 - 연장전이 남았다.

축구 경기도 몇 백만이 함께 모여 길거리 응원을 즐기는 이 '스펙터클한' 민족이 대선 끝났다고 그냥 주저 앉을소냐. 벌써부터 이명박 특검이니, 검찰 특검이니 하는 소리가 국회 주변에서 들린다. 그들은 대선만이 목적이 아니다. 아니 솔직한 그네들의 속내는 대선이 목적이 아니라 내년 4월의 총선이 진짜 목적인지도 모르겠다. 그러니 BBK는 진실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들의 국회의원 당선을 위해서 필요한 존재로 남아있어야 한다.

그래서 'BBQ'의 브랜드 가치는 끊임없이 상승중이라나 어쩐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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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고보니 난 노무현 정부가 출범하자마자 여수로 내려가 만 4년을 지냈다. 내가 근무했던 회사에서 1Km 거리에 여수 출입국관리사무소가 있었다. 아는 사람 가운데 한 분이 대구에서 이주노동자 관련 일을 하고 있기에 간혹 여수로 내려올 때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곤 했었다. 샤말타파 이야기, 출입국 관리사무소의 실상 등등. 그 출입국관리사무소가 순천으로 나오는 길목에 있기에 일주일에 몇번 씩은 어쩔 수 없이 그 앞을 지나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지겹게 보고 다니던 그 출입국관리사무소는 결국 올 2월에 불이나 9명의 이주노동자들의 목숨을 앗아갔다.

많은 사람들이 노무현 정부를 '진보정권'이라는 말도 안 되는 착각을 하지만 실상 노무현 정부가 이주노동자들을 향해 취한 정책은 극우정권 저리가라 할 정도였다. 지난 2002년 프랑스 대통령선거에서 극우파 국민전선(FN; Front National)의 르펜 후보가 결선 투표에까지 진출해 한바탕 소란을 일으켰지만, 르펜의 국민전선이 가장 강력하게 주장했던 것이 바로 '이민자 추방'이었다. 자신들의 일자리를 빼았는 주범이라며.

노무현 정권이 출발하고 강금실이 참여정부 초대 법무부 장관으로 있으면서 이주노동자와 관련하여 취하는 정책이 하도 어이가 없어서 맨 아래 붙인 글처럼 이것에 관련된 글을 몇 번 썼던 적이 있을 정도다. 사람을 그물총으로 쏴서 잡을려는 발상, 이건 극우파 정권 아니면 할 수 없는 발상이다.

아래는 <프레시안>에 실린 노무현 정부의 이주노동자 탄압을 규탄하는 글이고, 그 밑의 글은 이러한 노무현 정부의 이주노동자 관련 정책에 대해 1960~70년대에 독일로 광부, 간호원으로 나갔던 사람들이 '우리도 40년 전에 이주노동자였다'며 이주노동자의 '인권개선'을 호소하는 글이다.

이런 까닭에 난 노무현 정부를 가리켜 '진보'니 '개혁'이니 운운하는 사람만 보면 옆에 있는 소주병이든 방망이든 아무거나 들고 대갈통을 갈겨주고 싶다. 정녕, 오늘 우리 시대의 부끄러운 자화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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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 정권, 이주노동자 탄압도 따를 자가 없다"
'표적 단속'된 이주노조 간부 석방 요구, 농성 시작

여정민 기자
출처 : <프레시안> 2007 12 05


“이주노동자들의 꿈 짓밟지 마세요”
40년 전 독일 간 광부·간호사들의 호소

황예랑 기자
출처 : <한겨레> 2007 11 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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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안의 또 하나의 파시즘


파시즘, 또는 극우적 멘탈리티의 요체는 무엇일까? 사람들에 따라 여러 가지 기준을 들이밀 수 있겠지만, 내가 생각하는 핵심은 나와 다른 것을 부정하는 것, 곧 '차이'를 인정하지 못하는 집단적 이기주의에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그것은 대체로 광기라 불리울 수 있는 그 어떤 '뻘짓'을 동반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 그물총을 쏜 모습
어제 아침, <한겨레신문>를 보고선 경악을 금치 못했다. 법무부에서 불법체류 이주노동자를 잡기 위해 그물총을 쓰기로 하고 수입까지 했단다(옆 사진을 보라). 경찰에서조차 내부적으로 사용여부에 대한 논란 끝에 인권침해가 심각하다는 의견이 다수라 포기했던 방침을, 참여정부의 법무부에서 사용하기로 했단다. '강짱'이라 불리우는, '노짱'보다 더 많은 지지를 받고 있다는 강금실 장관이 수장으로 있는 법무부에서 말이다.

오늘 신문을 보니 결국 그물총 사용은 없었던 일로 하기로 했다고 한다. 사용하고 안 하고, 어떤 결론이 났다는 게 중요한 게 아니다.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이 따위 발상을 할 수 있는 그 자체가 문제라는 것이다. 무슨 짐승 사냥하는 것도 아니고, 이주노동자 한 사람이라도 더 잘 잡기 위해 그물총을 수입해서 쓰겠다는 발상. 이게 바로 파시즘의 '멘탈리티'라는 것이다.

그저껜가, 보도를 보니 산업연수생 7만 명을 새로 받아들이면서 오는 8월 고용허가제 실시 전까지 10만 명을 강제추방하겠다는 것이 자랑스러운 참여정부 법무부의 계획이다. 4달 동안 10만 명을 강제추방하려면 한 달에 2만5천 명이고, 하루에 833 명이다. 하루 833 명의 '토끼사냥'. 우리 이주노동자들은 이렇게, 극우 파시스트 정권에서나 있을 수 있는 '인간사냥'에 노출되어 인간으로서의 최소한의 존엄성마저 짓밟히고 있다.

이 '인간사냥'도 한나라당이나 민주당 때문에 할 수 없이 하는 일인가? 거대 야당의 힘에 밀려서 억지로 하는 일인가? 이번 총선에서 열린우리당이 다수당이 되면 해결될 수 있는 문제인가? 문제의 핵심은 간단하다. 노무현 정권이 가진 '진보성'이 여기까지라는 것이다. 강금실이 가진 '진보성'이 딱 요만큼이라는 것이다. 기실 이것은 노무현 정권이 극우 파시즘의 멘탈리티에 가까운 보수정권이라는 것을 그대로 웅변해주는 것에 다름 아니다.

그런데 열린우리당 지지자나 노무현 지지자들 가운데 여론주도층은 다들 고학력 중산층에 속하는 사람들이 주류를 이룬다. 이들 여론주도층은 한나라당 같은 극우 정권보다 나은 노무현 정권을 바라는 것이지 그네들의 삶과 직접적 관련이 없는 이주노동자 문제나 비정규직 노동자 문제 등에 대해서는 대부분 침묵한다. 물론 이들 중에는 이주노동자의 문제나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분신 문제 등에 가슴아파 하는 사람들도 많을 것이다. 그러나 이들은 여기까지다. 그게 노무현 정권이 가진 한계 때문에 필수불가결하게 발생하는 문제라는 걸 절대로 인정하지 못하는 것이다.

왜일까? 그들 스스로 노무현 정권에서는 결코 해결될 수 없는 문제라는 걸 알고 있는 건 아닐까? 하긴 노무현 정권이 이걸 해결할 수 있다고 믿는 것 자체가 넌센스겠지만... 비판 능력을 상실한 맹목적 추종 만큼 위험한 건 없다.

우리가 바라는 세상은, 단지 꼴통 보수집단의 정권에서 보수정권으로 바뀌는 것, 진보정권으로 바뀌는 것에 그쳐서는 안 된다. 그 정권들이 우리에게 어떤 삶의 질을 보장해줄 수 있는가 하는 것을 생각하는 데까지 나아가야 한다. 딱 까놓고 말해서 기층 민중들의 삶은 한나라당이 잡으나 열린우리당이 잡으나 별반 달라질 게 없을 수도 있다. 왜냐면, 그네들의 삶이 달라질려면 그 어떤 구체적인 정책들을 통해 변화되는 것이지 상층부의 권력이 이동한다고 달라지는 것은 아무 것도 없기 때문이다. 안 그런가? 그런데, 그런대로 먹고 살만 하면서 자신들의 합리적 사고를 과신하는, 배울 만큼 배웠다는 사람들이 단순히 정권의 변화에 목을 메는 경향이 농후하다. 왜일까? 민중들의 삶이 아니라 자신의 신념만 만족시키면 된다는 이기적 생각의 발로는 아닐까? 심히 걱정되는 부분이 아닐 수 없다.

이것은, 보다 나은 삶의 질을 추구하는 문제는 극우정권-->보수정권-->진보정권 순으로 단계를 밟아나가야 하는 문제가 아니다. 지금 당장 여기에서 무엇을 선택하느냐에 따라 실행될 수 있는 문제다. 의료, 교육, 환경 등등 각각의 문제들에 관심이 많다고 말만 하지 말고 각 정당들이 가진 정책들을 비교해보라. 그리고 선택하면 되지 않는가. 비교할 능력도 없는 건 아닐테니까. 다만 한 가지, '하지만, 당선가능성 어쩌고 저쩌고~' 하는 말들은 하지 말기 바란다. 나에겐 그것이 자신의 이념적 '정체성'을 드러내는, 변명하는 말들로밖에 들리지 않으니 말이다.

다시 한 번 결론을 내리자면,

네 이념대로 찍어라!

2004/0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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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년이 다 되어 가는 옛글을 다시 읽는 기분이 묘하다. 많은 사람들이 노무현에게 속았다느니, 환상이었다느니 한다. 그런 사람들에게 묻고 싶다. 도대체 노무현이 속인 게 무엇인지를...

내가 생각하기에 노무현은 속인 게 없다. 그는 그 자신이 가지고 있던 본질을 맘껏 발휘했을 뿐이다. 많은 사람들이 그 노무현의 본질을 미리 깨닫지 못했던 게 문제라면 문제였을 터. 그런 노무현에게 되지도 않을 자신들의 바람과 희망을 억지로 끼워맞췄던 게 잘못이라면 잘못 아니겠는가.

그래서 난 지금에 와서 찍을 사람이 없다고 말하는, 다수의 노무현 지지자(였던 사람)들에게 말한다. 노무현을 욕하기 전에 노무현을 지지했던 자신들부터 반성하는 것이 순서가 아닐까 하고...

아래는 2004년 4월 총선이 끝난 다음에 쓰여진 진중권의 글과 그 글에 달아둔 나의 코멘트이다(앞으로 그 당시 쓰여졌던 몇 개의 올릴까 한다).

2007 12 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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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포정치, 눈물, 신파... 그리고 남겨진 절반의 희망

진중권 / 문화평론가
출처 : <진보누리>(www.jinbonuri.com) 2004 04 17


공포정치

비교적 조용한 분위기에서 치러진 선거지만, 어떤 의미에서는 사상 유례 없는 혼탁한 선거였다. 가장 큰 문제는 역시 정치가 도박판이 되어 버렸다는 것. 이번 선거의 기조를 결정한 것은 역시 총선을 맞아 여야가 연출한 어처구니없는 ‘탄핵’ 사태였다. 이 사태로 인해 유권자들은 ‘거여견제론’, ‘거야부활론’이라는 두 개의 공포의 시나리오 중에 하나를 선택하도록 강요받았다. 선거전략의 일환으로 인위적으로 조장된 공포 분위기 속에서 한 시민이 극심한 위기의식을 느껴 몸에 불을 지르고 한강에 투신을 하는 일도 있었다. 위기의식 조장하던 분들은 그의 죽음에 죄의식을 느껴야 한다.

선거 결과는 예상대로 열린우리당이 과반의석을 점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누구보다도 이를 잘 알고 있었을 열린우리당의 유시민 의원은 선거 직전 “피를 토하는” 엽기적 엄살을 떨어가며 ‘진보정당의 후보들을 찍지 말라’는 망언을 늘어놓기도 했다. ‘북괴가 내려온다’고 협박하던 공포정치의 새로운 버전이다. ‘열린우리당 표가 민주노동당에게 갔다’던 그가 지금 ‘표에는 임자가 없다, 표는 정당의 것이 아니다’는 등 딴소리를 한다. 지금 나는 그의 번지르한 헛소리를 토해놓는 텔레비전 옆에 앉아 이 글을 쓰고 있다. 그는 피를 토하나, 나는 먹은 것을 토할 것 같다.


이미지, 자학, 신파

정치가 점차 내용 없는 텅 빈 이미지의 포토제닉의 이벤트로 변해 가는 경향은 이번 선거에서 더 강화되었다. 열린우리당이 도입한 이 새로운 정치의 패러다임은 곧 다른 정당들에게 받아들여져, 선거 판 자체가 거대한 드라마가 되어버렸다. 물론 이미지와 미디어 자체가 문제가 아니다. 현대 정치에서 점점 더 영상의 역할은 늘어날 것이다. 문제는 그 영상이 실물로 뒷받침되지 못하는 공허한 허깨비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정책 평가에서 ‘양’과 ‘가’를 받았던 정당들이 오로지 이미지만으로 승부를 보려 하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선진적인 정치 행태가 아니다.

정치인들이 갑자기 종교인이 된 것도 이번 선거의 특징이다. 절을 찾아 108배를 하지 않나, 느닷없이 삼보일배를 하지 않나, 이유 없이 단식공양을 하지 않나, 대한민국이 거대한 절이 됐다. 한나라당의 방송광고. 소년 ‘한나라’가 종아리가 팅팅 붓도록 회초리를 맞는다. 종교적 축일에 제 몸을 때리며 회개하는 열광적인 기독교나 이슬람 신도가 떠오른다. 대한민국, 종교적 금욕을 실천하는 신정국가다. 제 몸을 학대해 가며 유권자의 동정심을 사려는 생각인데, 이 분들이 이렇게 불쌍한 존재인지 미쳐 몰랐다. 민주주의의 위대함은, 적어도 4년에 한번은 저 높은 곳에 거하던 잠시나마 불쌍하게 만들어준다는 데에 있다.

카메라 앞에서 연출하는 그 드라마는 실로 눈물 없이는 못 봐줄 한편의 질퍽한 신파였다. 웬 눈물이 그렇게 많은가. 이래도 짜고, 저래도 짜고, 행주 짜듯이 경쟁적으로 눈물을 짠다. 눈물을 글썽이던 박근혜 의원의 절절한 호소. 민주당을 살려달라고 애원하는 추미애 의원의 울음 섞인 절규. 이래도 울고, 저래도 운다. 슬퍼도 울고, 기뻐도 운다. 출구조사 결과가 발표되는 순간, 정동영 의장이 눈물을 흘리고, 그 옆의 김희선 의원도 울먹인다. 으악, 이제는 눈물만 보면 경기가 일어날 것 같다. 승리의 감격이야 민주노동당 쪽이 더 클 터, 그쪽에서는 활짝 웃는데, 왜 이쪽에서는 우는지 이해가 안 된다. 이 파토스의 과잉도 솔직히 짜증이 난다.


보수언론의 자살

열린우리당 승리의 일등공신은 보수언론이다. 이들은 대통령 집권 초기부터 사사건건 대통령에게 시비를 걸며, 원만한 국정운영을 방해해 왔다. 조선일보는 “대통령 잘못 뽑았다”는 엽기적 망언을 신문에 칼럼이라고 올려놓고, 보수층들 사이에 대통령에 대한 비토의 심리를 확산시키는 데에 앞장 서 왔다. 지금 한나라당 대변인 하는 전여옥의 망언은 곧 정치권에 받아들여져, 최병렬 당시 대표의 입을 거치면서 한나라당의 공식적(?) 입장이 되었다. 탄핵을 위한 심리적 준비는 이렇게 무르익어 가고 있었다.

탄핵이 이루어지기 직전에 나온 중앙일보의 여론조사 결과가 아마 기폭제가 되었을 것이다. 당시 국민들의 견해는 ‘대통령이 사과해야 한다’는 것도 70%, ‘하지만 탄핵에는 반대한다’는 것도 70%였다. 야당의 비판에는 공감을 하나, 그 비판의 방법이 탄핵이라는 극단적 수단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게 국민의 대체적인 견해였던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중앙일보는 (저들이 어떤 알 수 없는 이유에서 ‘오피니언 리더’라 믿는) 소위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탄핵찬반의 견해가 반반으로 팽팽히 맞서고 있다고 보도했다. 이것을 본 보수층들은 탄핵을 해도 되겠다는 자신감을 얻었을 것이다.

한 마디로 조중동 보수언론은 온갖 왜곡보도로 국민들의 다수가 탄핵을 원하는 이상한 나라를 만들어 놓았다. 자기들이 만들어놓은 이 매트릭스 속에 자기들이 갇혀버린 것이다. 신문시장의 70%를 장악하고 있으니, 자신들이 여론도 70%를 장악하고 있다고 믿은 것이다. 한 마디로 자기들이 쓴 기사에 자기들이 속아넘어간 것이다. 어차피 활자매체는 점차 영향력을 잃어가고, 더군다나 보수언론들에 대한 사회적 신뢰는 바닥으로 떨어진 상태이다. 그들은 이를 몰랐다.


절반의 승리

열린우리당은 승리를 거두었다. 하지만 이는 절반의 승리에 불과하다. 한나라당의 의석은 줄었지만, 정형근, 김용갑, 김기춘, 홍준표 등 정말 떨어져야 할 분들은 이번에도 그대로 당선이 되었다. 반면 40여석의 조그만 정당에서 거의 100석을 더 갖게 된 열린우리당의 당선자들은 대부분 충분한 검증을 거치지 않은 급조된 후보들이다. 게다가 그들 중에는 정치적 전력이 그리 떳떳하지 않은 사람들도 다수 섞여있다. 문성근, 명계남, 유시민의 말대로 열린우리당은 한 마디로 “잡탕”이다. 열린우리당이 나머지 절반의 승리까지 챙기느냐는, 이 잡탕들을 데리고 앞으로 얼마나 의정활동을 잘 하느냐에 달려 있다.

민주노동당은 10석을 얻어 제3당으로 약진한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 역시 절반의 승리에 불과하다. 앞으로 민주노동당이 명실상부한 제3당이 되려면 결국 지역구 후보들이 선전을 해야 하나, 울산과 창원을 제외한 지역의 득표율은 그리 높지 않다. 민주노동당은 앞으로 의정활동을 통해 기존의 정당과 질적으로 다른 모습을 보여, 후보 지지율을 적어도 정당지지율만큼 끌어올려야 한다. 또 민주노동당의 비례대표의 선출은 말이 상향식 공천이지, 실은 당내 정파들의 나눠먹기에 불과했다. 이 정파 이기주의를 참여민주주의의 틀 내에 녹여없애야 한다. 이게 민주노동당이 나머지 절반의 승리를 차지하는 길이다.


한민자 연합

한나라당은 비교적 선방을 했으나 이번 선거로 경상도 지역당으로 추락했다. 과거 한나라당은 영남과 강남이라는 뼈대에 다른 지역에서 얻은 살을 얼기설기 붙인 형상이었다. 이번 선거에서 그 살들이 다 떨어져나가 달랑 뼈만 남은 꼴이 됐다. 탄핵의 역풍을 맞아서 그랬다고 볼 수도 있지만, 굳이 탄핵정국이 아니라도 한나라당은 이번 선거에 승리할 수 없었을 것이다. 시대의 변화를 읽지 못하고, 스스로 퇴화의 길을 걸어왔기 때문이다. 한나라당은 이미 오래 전에 수권능력을 잃었다. 변화하지 않으면 앞으로 제1당을 넘보기도 힘들 게 될 것이다.

민주당은 앞으로 독자적인 정치세력으로 살아남기 힘들 것이다. 한나라당과 공조한 것이 몰락의 직접적인 원인이었다. 따라서 앞으로 한나라당과 연합을 하는 게 여의치 않을 것이다. 결국 정치적으로 유의미한 세력이 되려면 다시 열린우리당 안으로 들어갈 수밖에 없는데, 그 역시 여의치 않다. 열린우리당 단독으로 거의 과반의석을 차지했기에 민주당의 효용은 별로 없는 셈이다. 게다가 영남과 대결해야 하는 열린우리당으로서는 민주당이 존속하여, 호남당의 이미지를 뒤집어 써 주고 있는 게 여러 모로 유리할 것이다.

자민련은 언급할 가치도 없다. 다만 텔레비전에 나와 시청자를 즐겁게 해주던 유운영 대변인이 의회진출에 실패한 것이 유감이다. 그가 없는 토론회를 앞으로 무슨 재미로 본단 말인가? 눈앞이 캄캄해진다.


세 가지 의미

이번 선거의 의미는 세 가지 정도로 짚을 수 있다. 하나는 탄핵을 주도한 세력에 대한 심판이라는 것이다. 탄핵을 주도한 민주당은 참패를 하여 존재를 위협받고 있고, 거기에 가담한 한나라당 역시 의석이 늘어난 17대 국회에서 의석을 더 얻기는커녕 외려 기존의 의석마저 잃어버렸다. 자민련은 정치적으로 이미 사망선고를 받았다고 할 수 있다. 반면 탄핵에 반대했던 열린우리당과 민주노동당은 커다란 정치적 정리를 거두었다.

둘째는 지역주의가 완화되는 계기를 마련했다는 의미가 있다. 민주당이라는 이름의 지역주의 세력은 몰락했다. 호남의 지역주의가 약화되면, 영남의 지역주의 역시 표적을 잃고 약화될 수밖에 없다. 이번 선거에서 영남의 지역주의가 아직도 강고하다는 것이 드러났지만, 적어도 과거와 같은 강렬함은 별로 느껴지지 않는다. ‘부산/경남에서는 열린우리당이 몇 석을 건지고, 민주노동당도 두 석을 얻었다. 이렇게 호남에서는 급격히, 영남에서는 서서히 지역주의는 사라지고 있다.

셋째는 진보세력이 역사상 최초로 정치적 진출을 했다는 데에 있다. 아마도 이것이 과거와는 다른 이번 선거의 가장 큰 특징일 것이다. 민주노동당은 의석을 확보함으로써 약진의 발판을 마련했다. 민주노동당의 등장으로 앞으로 이 나라의 정치구도는 오랜 시간에 걸쳐 서서히 보수와 진보의 대립으로 변모해 갈 것으로 보인다. 서민을 대변하는 민주노동당이 등장함으로써 그 동안 서민층의 대변자로 행세해 왔던 민주당/열린우리당의 보수성이 시각적으로 두드러져 보일 것이다.


남은 과제 - '개혁여당'과 '진보야당'의 쌍끌이 실천

원내 제1당으로서 단독으로 과반에 해당하는 의석을 차지했으므로, 열린우리당은 자신들이 약속한 ‘개혁’의 과제를 성실히 수행해 나가야 한다. 17대 국회에서 열린우리당이 과반을 가지고 제일 먼저 해야 할 일은 반인권적 악법인 국가보안법을 철폐하는 것이다. 적어도 이거 하나라도 처리해낸다면, 그것만으로도 열린우리당의 업적으로 인정받을 것이다. 아울러 이라크 상황이 급변하고 있으므로, 민주노동당, 민주당과 연대하여 이라크 파병을 철회하는 것도 해 볼만한 일이다. 파병동의안이 의회에서 거부될 경우 미국 역시 그것을 강요할 명분을 잃게 된다.

일단 이 두 가지를 놓고, 원하던 의석을 얻은 ‘정신적’ 여당이 얼마나 개혁의 정신을 실천할지 두고 볼 생각이다. 민주노동당은 "제대로 된 야당"으로서, 열린우리당이 이런 개혁의 과제들을 실천하려 할 때 옆에서 적극적으로 도와야 한다. 하지만 그들이 이 과제를 회피하고 다시 기회주의적 모습을 보일 때에는, 단호하게 비판하며 이들을 개혁과 진보의 길로 견인하는 역할을 해야 한다. 그때 국민들은 정말로 야당이 교체됐다는 것을 실감하게 될 것이다.


내오랜꿈 --------------------------------------------------------------------

선거 끝나고 '이겼다', '승리했다'고 환호했던 분들....
그분들은 분명히 생각하고 있어야 한다.
열린우리당이 어떤 방향으로 가는지,
어떤 짓거리를 하는지,
당신들이 생각했던 것과 무엇이 같고 무엇이 다른지를...

같고 다름도, 어느 방향으로 가고 있는지도 비교할 능력도, 관심도 없으면서 승리 운운하는 저능아들은 당연히 없다고 생각하기에 하는 말이다. 4년 뒤에도 똑같은 소리, 유시민 같은 헛소리 지껄이는 일은 없어지길 바라는 마음에서 하는 말이다. 언젠가 프랑스 극우정당의 보스 '르펜'을 언급한 글(한국, 르펜이 울고갈 극우파 해방구)에서 이야기 했지만, 유시민이 그간 보여왔던 정치적 행보들은, 거의 구역질 나는 수준이다. 난 물론 지지하지 않았던 정당이지만 그가 개혁당에 한 짓거리는 언젠가는 심판받아야 할 행동일 것이다.

.....

각자가 생각하는 방식대로 자축할 게 있으면 자축하고, 반성할 게 있으면 반성하고, 다시 먼 길을 향한 여정을 준비해가야 할 시점인 거 같다.

2004 04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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