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쟁사회’ 다산과 신작을 돌아보라

강명관 부산대 교수·한문학
출처 : <인터넷 한겨레> 2007 12 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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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금변증설 /

청의 고증학은 18세기 후반 조선학계에 전해진다. 고증학은 ‘이’ ‘기’ ‘심’ ‘성’ 등 극도로 추상적인 관념어를 조작하는 성리학에 대한 일대 반격이었다. 고증학은 구체적인 언어를 다룸으로써, 텍스트와 사실의 진위를 판정하려 하였다. 조선학계는 충격을 받았고, 고증학적 연구방법이 일시에 유행했다. 무오류의 성현의 말씀으로 여겨졌던 사서오경 역시 진위의 심판대에 올랐다.

조선의 고증학은 곧 성과를 낳는다. 하지만 여기서 모두 말할 수는 없고, 단지 두 분의 성과를 소개하고자 한다. 한 사람은 다산 정약용이다. 다산은 알다시피 1801년 해남으로 귀양을 가고, 1808년 강진의 초당(곧 답사객들이 즐겨 찾는 다산초당)으로 옮긴다. 여기서 그의 학문이 찬란하게 개화한다. 다산의 학문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광범위하지만, 중심은 역시 경학이다. 다산의 경학 중 단연 손꼽히는 성과는 <서경>의 진위를 논한 <매씨서평>이다. 1818년 귀양에서 풀려 서울로 돌아오자 그의 저술이 서울 학계에 읽혔던 모양이다.

이 시기 정계와 학계의 정점에 있었던 홍석주가 <매씨서평>을 읽어보니 탁월한 업적이기는 하지만, 중요한 연구성과가 반영되어 있지 않았다. 청의 염약거(1636-1704)가 저술한 <상서고문소증>은 <서경>의 절반이 위작이라는 것을 논증한 고증학적 저술이다. <서경>의 고증학적 연구를 촉발시킨, 빼어난 저작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다산은 이 책을 보지 못했던 것이다. 홍석주는 다산에게 책을 보낸다. 읽어보니, 자신의 주장은 이미 염약거가 다 말한 것이 아닌가. 순간 절망했지만, 다산이 또 누군가. 다시 마음을 챙겨 <상서고문소증>을 꼼꼼히 검토한 뒤 자신의 저작에 수렴하여 1834년 드디어 <매씨서평> 완성본을 내놓는다. <서경>의 25편이 가짜일 것이라는 의심을 품고 1783년 연구를 시작한 이래, 52년만에 종지부를 찍었던 것이다.

또 소개할 분은 신작이다. 다산이 <서경>을 연구 대상으로 삼았다면, 신작은 <시경>을 대상으로 삼았다. <시경> 역시 온갖 주장과 학설이 난무하는 텍스트다. 신작은 그 무수한 주장과 학설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해 제시한 저술 <시차고>를 내놓는다. <매씨서평>에서 다산이 자신의 주장을 뚜렷이 밝히고 있다면, <시차고>에서 신작은 자신의 주장을 개진하지 않고 각종 주장과 학설을 요령 있게 정리하여 보여주고 있을 뿐이다. 이 역시 중요한 저술 형태다. 자, 여기에 서로 대립하거나, 유사한 학설들이 있다. 어느 것이 옳은 것인지는 독자가 읽어보고 판단하시라. 신작 역시 엄밀한 고증학적 태도를 견지한 것이다.

조선 고증학의 두 대가인 다산은 ‘매씨서평’을 52년만에, 신작은 ‘시차고’를 28년만에 완성했다. 이 저술은 당시 동아시아 학계의 최고로 평가받았다. 얼마 전 유명대학의 총장이 교수들을 상대로 1,2년 안에 세계적인 업적을 내놓으라고 하자 매스컴은 이구동성 찬사를 늘어놓았다. 타율적 강제로 이뤄지는 경쟁은 단기간의 성과는 있겠으나 다산과 신작처럼 자율성에 의해 창조되는 성과는 얻기 힘들 터다.

신작의 고심참담한 저술은 어느 날 발생한 화재로 한 줌 재가 되고 말았다. <시차고>는 그의 삶의 목적이었다. 목적을 상실한 삶은 곧 넋이 나간 삶이다. 사람들은 신작을 보고 넋이 달아난 껍데기 인간이라 불렀다. 어찌 그러지 않을 수 있으랴. 다산을 순간 절망케 한 것이 <상서고문소증>이었다면, 신작을 절망시킨 것은 화마였던 것이다. 하지만 다산이 다시 시작했던 것처럼 신작 역시 다시 시작한다.

요즘이야 컴퓨터와 인터넷으로 온갖 자료를 책상에 앉아 검색할 수 있고 따올 수 있지만, 다산과 신작의 시대는 상상도 못할 일이다. 도서관이라야 궁궐 속의 규장각, 홍문관뿐이다. 민간의 학자는 집안의 서적을 이용하거나, 북경(베이징)에서 구입하거나, 수소문하여 빌려야 한다. 또 일일이 손으로 자료를 베낀다. 원고가 완성되어도 복사기가 없으니, 다시 손으로 베껴 부본을 만드는 수밖에 없다. 특히 고증학은 대량의 자료를 이용하기 때문에 자료를 구득하고 해독하고 정리하고 저작하는 과정은 필설로 형용하지 못할 고된 노동이다. 그 노동을 신작은 두 번 거쳤던 것이다. 신작이 <시차고>의 저술에 착수한 것은 28살(1787) 때였고, 1차 완성본이 소실된 것은 39살(1798) 때였다. 마음을 추슬러 최종 원고를 완성한 것은 55살(1814) 때다. 시작부터 완성까지 28년이 걸린 것이다. 다산과 신작의 저술은 당시 동아시아 학계에서 가장 높은 수준의 것이었다. 이 저작들로 인해 동아시아 학계의 주류에서 조선은 멀어지지 않을 수 있었다.

얼마 전 유명한 대학의 총장님이 자기 대학의 승진 심사의 엄격함을 말하면서 1, 2년 안에 세계적인 업적을 내놓지 않으면 교수들이 대학에서 쫓겨날 것이라 말하자, 신문과 방송은 이구동성 찬사를 늘어놓았다. 그 총장님과 매스컴의 사고를 지배하는 것은 오직 한 마디 ‘경쟁’이다.

인간사회에서 경쟁은 필요불가결한 것이다. 하지만 경쟁이 만사는 아니다. 경쟁이 필요한 부분이 있는가 하면, 협동이 필요한 부분이 있다. 또 단기적 경쟁이 필요한 부분이 있고, 장기적 경쟁이 필요한 부분이 있다. 경쟁이 필요하다면, 그 경쟁의 공정성을 반드시 물어야 할 것이다. 또 경쟁의 결과 승자가 얼마를 차지하는가, 혹은 패자는 모든 것을 잃어야 하는가? 이런 문제들이 반드시 논의되고 구성원들의 공감을 얻어야 할 것이다.

한데 우리 사회에는 그런 논의 과정이 전무하다. 오직 ‘경쟁’이란 말만 있을 뿐이다. 특히 그 문제를 따져야 할 대학에서조차 대학 안팎의 관료들이 강요하는 경쟁의 논리만 횡행할 뿐이다. 타율적 강제로 이루어지는 경쟁은 짧은 기간 동안은 분명 성과를 낼 것이다. 하지만 다산과 신작의 연구처럼 장기간에 걸쳐 학문적 난제에 답을 찾는, 자율성에 의해 창조되는 성과는 얻기 어려울 것이다. 슬픈 일이다. 덧붙여 하나만 물어보자. 유치원에서부터 초등학교, 중고등학교, 대학교, 그리고 직장생활까지 만사가 경쟁으로 이루어지는 삶이 과연 행복한 삶인가. 우리는 왜 경쟁의 일방적 강요에 대해 한 마디도 못하는 착한 ‘백성’으로 살아가는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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