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년이 다 되어 가는 옛글을 다시 읽는 기분이 묘하다. 많은 사람들이 노무현에게 속았다느니, 환상이었다느니 한다. 그런 사람들에게 묻고 싶다. 도대체 노무현이 속인 게 무엇인지를...

내가 생각하기에 노무현은 속인 게 없다. 그는 그 자신이 가지고 있던 본질을 맘껏 발휘했을 뿐이다. 많은 사람들이 그 노무현의 본질을 미리 깨닫지 못했던 게 문제라면 문제였을 터. 그런 노무현에게 되지도 않을 자신들의 바람과 희망을 억지로 끼워맞췄던 게 잘못이라면 잘못 아니겠는가.

그래서 난 지금에 와서 찍을 사람이 없다고 말하는, 다수의 노무현 지지자(였던 사람)들에게 말한다. 노무현을 욕하기 전에 노무현을 지지했던 자신들부터 반성하는 것이 순서가 아닐까 하고...

아래는 2004년 4월 총선이 끝난 다음에 쓰여진 진중권의 글과 그 글에 달아둔 나의 코멘트이다(앞으로 그 당시 쓰여졌던 몇 개의 올릴까 한다).

2007 12 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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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포정치, 눈물, 신파... 그리고 남겨진 절반의 희망

진중권 / 문화평론가
출처 : <진보누리>(www.jinbonuri.com) 2004 04 17


공포정치

비교적 조용한 분위기에서 치러진 선거지만, 어떤 의미에서는 사상 유례 없는 혼탁한 선거였다. 가장 큰 문제는 역시 정치가 도박판이 되어 버렸다는 것. 이번 선거의 기조를 결정한 것은 역시 총선을 맞아 여야가 연출한 어처구니없는 ‘탄핵’ 사태였다. 이 사태로 인해 유권자들은 ‘거여견제론’, ‘거야부활론’이라는 두 개의 공포의 시나리오 중에 하나를 선택하도록 강요받았다. 선거전략의 일환으로 인위적으로 조장된 공포 분위기 속에서 한 시민이 극심한 위기의식을 느껴 몸에 불을 지르고 한강에 투신을 하는 일도 있었다. 위기의식 조장하던 분들은 그의 죽음에 죄의식을 느껴야 한다.

선거 결과는 예상대로 열린우리당이 과반의석을 점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누구보다도 이를 잘 알고 있었을 열린우리당의 유시민 의원은 선거 직전 “피를 토하는” 엽기적 엄살을 떨어가며 ‘진보정당의 후보들을 찍지 말라’는 망언을 늘어놓기도 했다. ‘북괴가 내려온다’고 협박하던 공포정치의 새로운 버전이다. ‘열린우리당 표가 민주노동당에게 갔다’던 그가 지금 ‘표에는 임자가 없다, 표는 정당의 것이 아니다’는 등 딴소리를 한다. 지금 나는 그의 번지르한 헛소리를 토해놓는 텔레비전 옆에 앉아 이 글을 쓰고 있다. 그는 피를 토하나, 나는 먹은 것을 토할 것 같다.


이미지, 자학, 신파

정치가 점차 내용 없는 텅 빈 이미지의 포토제닉의 이벤트로 변해 가는 경향은 이번 선거에서 더 강화되었다. 열린우리당이 도입한 이 새로운 정치의 패러다임은 곧 다른 정당들에게 받아들여져, 선거 판 자체가 거대한 드라마가 되어버렸다. 물론 이미지와 미디어 자체가 문제가 아니다. 현대 정치에서 점점 더 영상의 역할은 늘어날 것이다. 문제는 그 영상이 실물로 뒷받침되지 못하는 공허한 허깨비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정책 평가에서 ‘양’과 ‘가’를 받았던 정당들이 오로지 이미지만으로 승부를 보려 하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선진적인 정치 행태가 아니다.

정치인들이 갑자기 종교인이 된 것도 이번 선거의 특징이다. 절을 찾아 108배를 하지 않나, 느닷없이 삼보일배를 하지 않나, 이유 없이 단식공양을 하지 않나, 대한민국이 거대한 절이 됐다. 한나라당의 방송광고. 소년 ‘한나라’가 종아리가 팅팅 붓도록 회초리를 맞는다. 종교적 축일에 제 몸을 때리며 회개하는 열광적인 기독교나 이슬람 신도가 떠오른다. 대한민국, 종교적 금욕을 실천하는 신정국가다. 제 몸을 학대해 가며 유권자의 동정심을 사려는 생각인데, 이 분들이 이렇게 불쌍한 존재인지 미쳐 몰랐다. 민주주의의 위대함은, 적어도 4년에 한번은 저 높은 곳에 거하던 잠시나마 불쌍하게 만들어준다는 데에 있다.

카메라 앞에서 연출하는 그 드라마는 실로 눈물 없이는 못 봐줄 한편의 질퍽한 신파였다. 웬 눈물이 그렇게 많은가. 이래도 짜고, 저래도 짜고, 행주 짜듯이 경쟁적으로 눈물을 짠다. 눈물을 글썽이던 박근혜 의원의 절절한 호소. 민주당을 살려달라고 애원하는 추미애 의원의 울음 섞인 절규. 이래도 울고, 저래도 운다. 슬퍼도 울고, 기뻐도 운다. 출구조사 결과가 발표되는 순간, 정동영 의장이 눈물을 흘리고, 그 옆의 김희선 의원도 울먹인다. 으악, 이제는 눈물만 보면 경기가 일어날 것 같다. 승리의 감격이야 민주노동당 쪽이 더 클 터, 그쪽에서는 활짝 웃는데, 왜 이쪽에서는 우는지 이해가 안 된다. 이 파토스의 과잉도 솔직히 짜증이 난다.


보수언론의 자살

열린우리당 승리의 일등공신은 보수언론이다. 이들은 대통령 집권 초기부터 사사건건 대통령에게 시비를 걸며, 원만한 국정운영을 방해해 왔다. 조선일보는 “대통령 잘못 뽑았다”는 엽기적 망언을 신문에 칼럼이라고 올려놓고, 보수층들 사이에 대통령에 대한 비토의 심리를 확산시키는 데에 앞장 서 왔다. 지금 한나라당 대변인 하는 전여옥의 망언은 곧 정치권에 받아들여져, 최병렬 당시 대표의 입을 거치면서 한나라당의 공식적(?) 입장이 되었다. 탄핵을 위한 심리적 준비는 이렇게 무르익어 가고 있었다.

탄핵이 이루어지기 직전에 나온 중앙일보의 여론조사 결과가 아마 기폭제가 되었을 것이다. 당시 국민들의 견해는 ‘대통령이 사과해야 한다’는 것도 70%, ‘하지만 탄핵에는 반대한다’는 것도 70%였다. 야당의 비판에는 공감을 하나, 그 비판의 방법이 탄핵이라는 극단적 수단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게 국민의 대체적인 견해였던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중앙일보는 (저들이 어떤 알 수 없는 이유에서 ‘오피니언 리더’라 믿는) 소위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탄핵찬반의 견해가 반반으로 팽팽히 맞서고 있다고 보도했다. 이것을 본 보수층들은 탄핵을 해도 되겠다는 자신감을 얻었을 것이다.

한 마디로 조중동 보수언론은 온갖 왜곡보도로 국민들의 다수가 탄핵을 원하는 이상한 나라를 만들어 놓았다. 자기들이 만들어놓은 이 매트릭스 속에 자기들이 갇혀버린 것이다. 신문시장의 70%를 장악하고 있으니, 자신들이 여론도 70%를 장악하고 있다고 믿은 것이다. 한 마디로 자기들이 쓴 기사에 자기들이 속아넘어간 것이다. 어차피 활자매체는 점차 영향력을 잃어가고, 더군다나 보수언론들에 대한 사회적 신뢰는 바닥으로 떨어진 상태이다. 그들은 이를 몰랐다.


절반의 승리

열린우리당은 승리를 거두었다. 하지만 이는 절반의 승리에 불과하다. 한나라당의 의석은 줄었지만, 정형근, 김용갑, 김기춘, 홍준표 등 정말 떨어져야 할 분들은 이번에도 그대로 당선이 되었다. 반면 40여석의 조그만 정당에서 거의 100석을 더 갖게 된 열린우리당의 당선자들은 대부분 충분한 검증을 거치지 않은 급조된 후보들이다. 게다가 그들 중에는 정치적 전력이 그리 떳떳하지 않은 사람들도 다수 섞여있다. 문성근, 명계남, 유시민의 말대로 열린우리당은 한 마디로 “잡탕”이다. 열린우리당이 나머지 절반의 승리까지 챙기느냐는, 이 잡탕들을 데리고 앞으로 얼마나 의정활동을 잘 하느냐에 달려 있다.

민주노동당은 10석을 얻어 제3당으로 약진한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 역시 절반의 승리에 불과하다. 앞으로 민주노동당이 명실상부한 제3당이 되려면 결국 지역구 후보들이 선전을 해야 하나, 울산과 창원을 제외한 지역의 득표율은 그리 높지 않다. 민주노동당은 앞으로 의정활동을 통해 기존의 정당과 질적으로 다른 모습을 보여, 후보 지지율을 적어도 정당지지율만큼 끌어올려야 한다. 또 민주노동당의 비례대표의 선출은 말이 상향식 공천이지, 실은 당내 정파들의 나눠먹기에 불과했다. 이 정파 이기주의를 참여민주주의의 틀 내에 녹여없애야 한다. 이게 민주노동당이 나머지 절반의 승리를 차지하는 길이다.


한민자 연합

한나라당은 비교적 선방을 했으나 이번 선거로 경상도 지역당으로 추락했다. 과거 한나라당은 영남과 강남이라는 뼈대에 다른 지역에서 얻은 살을 얼기설기 붙인 형상이었다. 이번 선거에서 그 살들이 다 떨어져나가 달랑 뼈만 남은 꼴이 됐다. 탄핵의 역풍을 맞아서 그랬다고 볼 수도 있지만, 굳이 탄핵정국이 아니라도 한나라당은 이번 선거에 승리할 수 없었을 것이다. 시대의 변화를 읽지 못하고, 스스로 퇴화의 길을 걸어왔기 때문이다. 한나라당은 이미 오래 전에 수권능력을 잃었다. 변화하지 않으면 앞으로 제1당을 넘보기도 힘들 게 될 것이다.

민주당은 앞으로 독자적인 정치세력으로 살아남기 힘들 것이다. 한나라당과 공조한 것이 몰락의 직접적인 원인이었다. 따라서 앞으로 한나라당과 연합을 하는 게 여의치 않을 것이다. 결국 정치적으로 유의미한 세력이 되려면 다시 열린우리당 안으로 들어갈 수밖에 없는데, 그 역시 여의치 않다. 열린우리당 단독으로 거의 과반의석을 차지했기에 민주당의 효용은 별로 없는 셈이다. 게다가 영남과 대결해야 하는 열린우리당으로서는 민주당이 존속하여, 호남당의 이미지를 뒤집어 써 주고 있는 게 여러 모로 유리할 것이다.

자민련은 언급할 가치도 없다. 다만 텔레비전에 나와 시청자를 즐겁게 해주던 유운영 대변인이 의회진출에 실패한 것이 유감이다. 그가 없는 토론회를 앞으로 무슨 재미로 본단 말인가? 눈앞이 캄캄해진다.


세 가지 의미

이번 선거의 의미는 세 가지 정도로 짚을 수 있다. 하나는 탄핵을 주도한 세력에 대한 심판이라는 것이다. 탄핵을 주도한 민주당은 참패를 하여 존재를 위협받고 있고, 거기에 가담한 한나라당 역시 의석이 늘어난 17대 국회에서 의석을 더 얻기는커녕 외려 기존의 의석마저 잃어버렸다. 자민련은 정치적으로 이미 사망선고를 받았다고 할 수 있다. 반면 탄핵에 반대했던 열린우리당과 민주노동당은 커다란 정치적 정리를 거두었다.

둘째는 지역주의가 완화되는 계기를 마련했다는 의미가 있다. 민주당이라는 이름의 지역주의 세력은 몰락했다. 호남의 지역주의가 약화되면, 영남의 지역주의 역시 표적을 잃고 약화될 수밖에 없다. 이번 선거에서 영남의 지역주의가 아직도 강고하다는 것이 드러났지만, 적어도 과거와 같은 강렬함은 별로 느껴지지 않는다. ‘부산/경남에서는 열린우리당이 몇 석을 건지고, 민주노동당도 두 석을 얻었다. 이렇게 호남에서는 급격히, 영남에서는 서서히 지역주의는 사라지고 있다.

셋째는 진보세력이 역사상 최초로 정치적 진출을 했다는 데에 있다. 아마도 이것이 과거와는 다른 이번 선거의 가장 큰 특징일 것이다. 민주노동당은 의석을 확보함으로써 약진의 발판을 마련했다. 민주노동당의 등장으로 앞으로 이 나라의 정치구도는 오랜 시간에 걸쳐 서서히 보수와 진보의 대립으로 변모해 갈 것으로 보인다. 서민을 대변하는 민주노동당이 등장함으로써 그 동안 서민층의 대변자로 행세해 왔던 민주당/열린우리당의 보수성이 시각적으로 두드러져 보일 것이다.


남은 과제 - '개혁여당'과 '진보야당'의 쌍끌이 실천

원내 제1당으로서 단독으로 과반에 해당하는 의석을 차지했으므로, 열린우리당은 자신들이 약속한 ‘개혁’의 과제를 성실히 수행해 나가야 한다. 17대 국회에서 열린우리당이 과반을 가지고 제일 먼저 해야 할 일은 반인권적 악법인 국가보안법을 철폐하는 것이다. 적어도 이거 하나라도 처리해낸다면, 그것만으로도 열린우리당의 업적으로 인정받을 것이다. 아울러 이라크 상황이 급변하고 있으므로, 민주노동당, 민주당과 연대하여 이라크 파병을 철회하는 것도 해 볼만한 일이다. 파병동의안이 의회에서 거부될 경우 미국 역시 그것을 강요할 명분을 잃게 된다.

일단 이 두 가지를 놓고, 원하던 의석을 얻은 ‘정신적’ 여당이 얼마나 개혁의 정신을 실천할지 두고 볼 생각이다. 민주노동당은 "제대로 된 야당"으로서, 열린우리당이 이런 개혁의 과제들을 실천하려 할 때 옆에서 적극적으로 도와야 한다. 하지만 그들이 이 과제를 회피하고 다시 기회주의적 모습을 보일 때에는, 단호하게 비판하며 이들을 개혁과 진보의 길로 견인하는 역할을 해야 한다. 그때 국민들은 정말로 야당이 교체됐다는 것을 실감하게 될 것이다.


내오랜꿈 --------------------------------------------------------------------

선거 끝나고 '이겼다', '승리했다'고 환호했던 분들....
그분들은 분명히 생각하고 있어야 한다.
열린우리당이 어떤 방향으로 가는지,
어떤 짓거리를 하는지,
당신들이 생각했던 것과 무엇이 같고 무엇이 다른지를...

같고 다름도, 어느 방향으로 가고 있는지도 비교할 능력도, 관심도 없으면서 승리 운운하는 저능아들은 당연히 없다고 생각하기에 하는 말이다. 4년 뒤에도 똑같은 소리, 유시민 같은 헛소리 지껄이는 일은 없어지길 바라는 마음에서 하는 말이다. 언젠가 프랑스 극우정당의 보스 '르펜'을 언급한 글(한국, 르펜이 울고갈 극우파 해방구)에서 이야기 했지만, 유시민이 그간 보여왔던 정치적 행보들은, 거의 구역질 나는 수준이다. 난 물론 지지하지 않았던 정당이지만 그가 개혁당에 한 짓거리는 언젠가는 심판받아야 할 행동일 것이다.

.....

각자가 생각하는 방식대로 자축할 게 있으면 자축하고, 반성할 게 있으면 반성하고, 다시 먼 길을 향한 여정을 준비해가야 할 시점인 거 같다.

2004 04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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