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시대는 냉소의 시대가 됐다.” 독일 철학자 페터 슬로터다이크가 그의 출세작 <냉소적 이성 비판>(1983)에서 내뱉은 말이다. 시니컬한 수사학으로 도발적 문제를 던지는 이 철학자는 ‘냉소주의야말로 우리 시대를 규정하는 지배적 정신’이라고 단언한다. 여기서 냉소주의란 어떤 것이 옳지 못하고 잘못됐고 틀린 것임을 알면서도 그것을 행하는 자의 태도를 가리킨다. “냉소주의자는 바보가 아니다. 그들은 자기들이 무엇을 하는지 알고 있다. 그러나 상황논리나 자기보존의 욕망이 그렇게 해야 한다고 말하기 때문에 그렇게 행하는 것이다.”
그는 냉소주의를 ‘계몽된 허위의식’이라는 말로 규정한다. 허위의식의 고전적 정의는 카를 마르크스가 <자본론>에서 한 말에서 찾을 수 있다. “그들은 그것을 알지 못한 채 행하고 있다.” 이데올로기에 사로잡힌 순진한 상태가 허위의식인 셈이다. 냉소주의가 ‘계몽된 허위의식’인 것은 알 것 다 아는 채로, 그러니까 더는 순진하지 않은 채로 허위의식을 고수하고 거기에 맞춰 살아가기 때문이다. 따라서 냉소주의는 “자기 자신을 잘 알고 있는 순응”이다. 계몽적 활동이 아무리 많은 것을 발가벗겨도 “폭로 효과도 없고 ‘적나라한 사실’이 거기서 드러나지도 않는다.” 자유·진실·민주 따위의 계몽적 가치는 비웃음을 당한다.
대통령 선거를 앞둔 한국 사회의 풍경에서 이 ‘냉소적 이성’을 발견하기는 어렵지 않다. 시종 둘러대고 잡아떼고 모른 체하는 행태에 사법기관이 나서서 결백의 성의를 입혀주는 것이 냉소주의의 한 모습이라면, 사법기관의 그런 행위에 문제가 있음을 알면서도 그렇게 면죄부를 받은 후보를 눈 딱 감고 지지하는 것이 냉소주의의 다른 모습이다. 슬로터다이크는 이 냉소주의를 “현대의 불행한 의식”이라고 칭하면서 이 불행한 의식이 파시즘의 터전이 됐다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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