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살 것인가 - 삶의 철학자 몽테뉴에게 인생을 묻다
사라 베이크웰 지음, 김유신 옮김 / 책읽는수요일 / 2012년 1월
평점 :
품절


 

 

 

‘어떻게 살 것인가’는 ‘어떻게 죽을 것인가’와 같은 말

 

 

 

   처음 이 책을 서점에서 보았을 때 끌렸던 이유는 단연 목차였다. 제목인 ‘어떻게 살 것인가’를 떠올리며 책을 넘겨보는데 스무 개의 목차 소제목은 바로 정답으로 느껴졌기 때문이다. 목차 중에는 ‘인간성을 지켜라’같은 보편적인 메시지도 있었지만 ‘책을 많이 읽되, 읽은 것을 잊고 둔하게 살아라’ 같은 특별한 조언도 있었다. 목차와 서문에서 느껴지는 전체적인 아우라는 중용을 떠올리게 했다. 그 중에서도 특히 제일 먼저 죽음을 언급하는 것이 가장 마음에 들었다.(1장이 ‘죽음을 걱정하지 마라’이다) 일단 죽음부터 이야기 하고 그 다음 살아가는 이야기를 전개하는 구성이 어쩐지 나 가려운 데를 콕 집어 긁어주는 것 같았기 때문에. 죽음부터 이야기하는 것이야말로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에 대한 출발점이라 생각했기 때문에.

 

 

   사실 나는 어제도 그제도 일주일 전 한 달 전에도 일 년 전 삼 년 전에도 변함없이 어떻게 죽을 것인가를 생각하면서 살아왔다. 내가 특별히 죽음에 대해 깊이 고민하게 된 것은 오 년 전 엄마가 사고로 돌아가시고 난 이후부터이다. 물론 엄마가 돌아가시기 4년 전에 아버지가 먼저 돌아가셨지만 아버진 십 오년 투병생활 끝에 가신 것이기에 어느 정도 준비기간이 있었다. 아버진 늘 바로 내일이라도 죽을 것 같았지만 그렇게 십 오년을 버티면서 내게 자신의 의지대로 죽음을 연장하는 모습을 보여주셨다. 그래서 투병환자 치고는 그만하면 꽤 오래 사셨다고 까지 생각했다. 어떤 날은 내 젊은 날의 불행이 모두 누워있는 아버지 탓만 같아 하루라도 빨리 가시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 본 적도 있었다. 그러니 아버지의 죽음은 내게 충격이라기보다는 어떤 습관처럼 지켜보던 드라마의 아쉬운 종영소식만 같았달까.

 

 

   나는 아버지 병수발에 지친 엄마가 건강하게 오래 살기를 바랐고 엄마 역시 자기관리가 철저한 분이라 당연히 이변이 없는 한 그러실 줄 알았을 것이다. 그런데 엄마는 삶의 여유를 찾고 돈 걱정 없이 즐기실만하니까 어이없게도 사고로 돌아가셨다. 이변은 여전했다. 사람에게 일어날 수 없는 일이란 없는 것이었다. 엄마가 죽었음을 깨달았을 때 제일 먼저 든 생각이 바로 나는 앞으로 ‘어떻게 살 것인가’였다. 더 정확히는 엄마 없이 앞으로 이 세상을 어떻게 혼자서 살아가나, 였을 것이다. 엄마가 사라지는 순간 내 평화롭고 안온한 삶도 끝나는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에.

 

 

   엄마 사후 일 년 간은 거의 정신병원과 수면제, 심리치료를 달고 살았고 때론 무당굿도 하고 점도 보고 술도 먹고 말 그대로 내 몸 내 맘이 가는 대로, 되는 대로 살았다. 수면제를 끊기 까지 한 육 개월이 걸렸고 사회로 복귀하면서 차츰 일상을 찾기까지 또 일 년이 걸렸다. 삼년 째 되니 조금 제정신이었는데 정신 차리고 내 자신을 들여다보니 사람이 많이도 달라져 있었다. 하지만 달라진 걸 알았다고 그 전으로 돌아갈 수는 없었다. 외려 어떻게 달라질지 모르고 방황하는 것인지도 모르고 방황할 때가 더 좋았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언제부턴가 나는 이곳에서 책 읽고 글 쓰면서 틈만 나면 지겹도록 엄마가 죽었고 아빠를 미워했다고 떠들었다. 책을 선택하고 글을 써대는 어떠한 기준도 없고 오로지 책과 관련해 어떻게든 이런 내 자신, 지금 내 상황과 화해를 하려 애를 썼다. 돌아보면 서평내용도 순전 모두 용서하는 밤, 그리하여 내일을 기다리는 우리가 되자는 결론을 내는 식이었다. 책과 상관없이 나는 어쩌면 그 말을 하고 반복해서 되뇌이려고 서평을 썼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그렇게 아무리 읽고 쓰고 또 읽고 써도 잠들 때 드는 마지막 생각은 단 하나, 이대로 죽어서 만약 내일 깨어나지 못한다면 어쩌지, 만에 하나 이것이 마지막이라면 나는 오늘 무엇을 하였단 말인가, 하는 생각뿐이었다. 그날(사고) 이후 열에 일곱은 그런 밤이었다. 그런 생각이 떨쳐지지 않을 때 나는 갑자기 일어나 청소를 하고 빨래를 돌리고 냉장고를 열어보고 서랍을 열어보고 아이 얼굴을 한 번 더 보고 속옷을 갈아입은 다음 지인들에게 뜬금없이 그 새벽에 인사문자를 보내고 전화를 꺼버리고 다시 눕고는 했다. 그래도 다시 일어나지 못할 것 같은 불안감에 부모님과 찍은 사진, 졸업사진, 결혼사진, 아이 백일사진, 돌사진을 확인하고 불을 켜고선 거울을 들여다봤다. 도저히 내일 죽을 사람같이 보이진 않았지만 이대로 죽을 수도 있다는 이 거짓말 같은 일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난감한 심정이었다. 창피한 고백이지만 나는 그런 생각에 사로잡히지 않을 때도 오늘 하루 살아내었다가 아닌 오늘 하루 죽어갔다고 달력에서 날짜 하나를 쓱쓱 지우며 눈을 감았다.(그 생각은 지금도 변함이 없다)

 

 

   엄마도 내일 자신이 죽을지는 몰랐을 것이기 때문이다. 엄마는 여행을 가시는 길에 돌아가셨기 때문에 나는 엄마가 훌훌 깃털처럼 가볍게 떠나시던 뒷모습을 생생히 기억한다. 아침에 마지막 통화를 했을 때 들떠있던 목소리도 기억한다. 엄마의 집은 변함없이 청소가 되어 있어 깨끗했고 이불도 빨래도 냉장고도 쓰레기도 모두 완벽했다. 생각해보니 한 평생 엄마는 항상 청소를 하고 집안을 완벽하게 치운 다음 외출을 나가셨다. 엄마가 죽는 날은 특별히 다른 날이 아니었고 늘 자신이 하던 대로 했을 뿐인 날이었다. 나는 엄마의 죽음을 통해 죽음이 지극히 일상적인 일임을 깨우쳤다. 단지 그 일상은 일생에서 단 한 번 주어지는 예측불허의 순서였을 뿐이었다. 누구도 그 일상이 자신에게도 일어나는 평범한 일상임을 받아들이지 못하다가 가족이나 친구가 그 일상의 주인공이 되었을 경우 비로소 자기일상의 마지막을 남몰래 그려본다. 엄마는 어느 바람 좋은 봄날 꽃구경을 갔다가 오후 세시 이십분에 죽었다. 사망진단서에 쓰는 말로 두개골 골절이고 내가 하는 말로 머리가 깨져서 죽었다. 머리가 깨지기 직전까지 꽃노래를 부르셨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엄마가 불렀던 노래는 어떤 노래였을 지가 궁금해지기 까지 오년이 걸렸다. 정신과 의사는 내게 사람의 시체가 끔찍한지 알지만 자꾸 보다 보면 언젠가 그것이 무뎌지는 순간이 온다고 말했다. 사람마다 차이는 있지만 반드시 온다고 위로했다. 나는 아직까지 엄마의 죽음에서 벗어나지 못했지만 엄마의 죽음은 아무렇지도 않게 이야기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날 이후 죽음과 엄마를 매일 생각했더니 그렇게 되었다. 충격은 점점 무뎌지고 엄마의 마지막 일상은 내 일상 속으로 완전히 용해되어 함께 웃고 떠들 수 있는 나를 발견할 수가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나를 옥죄고 있는 현실은 그 일상이 바로 오늘 혹은 내일일수 있다는 사실이다. 나는 여전히 알 수 없는 그 일상에 대한 불신과 확신으로부터 자유롭지가 못하며 언제나 불안한 것이다. 나는 공교롭게도 바로 어제까지 같이 일을 한 사람이 오늘 아침 죽은 경우가 꽤 된다. 이 지독한 일상의 트라우마가 나에겐 ‘어떻게 살 것인가’가 아니라 ‘어떻게 죽을 것인가’로 변형되는 계기가 된 듯하다. 나에게 산다는 문제는 곧 죽는 날까지 산다는 것이기 때문에 어떻게 살 것인가의 문제는 곧 어떻게 살다가 죽을 것인가와 같은 뜻인 것이다. 어떻게 살 것인가를 고민하는 것은 결국 모두 어떻게든 죽기 때문이 아닐까 해서이다. 죽기 전까지 어떻게 산다는 것은 결국 그 죽음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의 문제이다. 이문제가 왜 중요하냐하면, 사람은 죽기 직전까지 자신이 죽는 것을 믿지 않고 믿는다 해도 알 수 없고 안다고 해도 받아들이기 힘들고 받아들였다고 해서 겪어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어떻게 살 것인가는 죽음을 어떻게 받아들이며 죽는 날까지 죽음에서 얼마나 자유로와 질것인가의 문제인 것이다. 그래서 내게 이 책은 언제인지 모르지만 죽는 날까지 불안하지 않게 살기 위한 일련의 방침처럼 읽혔다. 물론, 해답은 얻었다. 모든 걸 받아들이고 살다보면 어느덧 그날이 다가올 것이고 그날이 온다 해도 그 역시 받아들일 수 있게 된다는 것. 싱겁긴 해도 이것이 오백 페이지되는 이 책을 덮고 난후 내가 얻은 깨달음이다.

 

 

 

죽음을 걱정하지 않는 것이 사는 길

 

 

 

   먼저 이 책은 몽테뉴의 저서가 아니다. 몽테뉴는 우리 나이로 환갑의 나이까지 살았는데 마흔부터 이십년간 우리가 아는 수상록[隨想錄, Essais, 1586]을 집필했다. 전 생애를 통틀어 오로지 수상록 한 작품만 남긴 사람이 몽테뉴이다.(바꿔 말하면 수상록을 완성하는데 이십년이 걸렸다. 수상록이 중단된 것은 몽테뉴가 죽었기 때문이므로 더 살았다면 수상록의 집필기간은 더 늘었을 것이며 당연히 페이지도 추가 되었을 것이다) 천 페이지 넘어가는 수상록을 읽어보지 못하고 목차만 훑어보았다. 슬픔, 나태, 선악 등의 제목 외에 ‘철학에 마음을 쏟는 것은 죽는 법을 배우는 일이다’, ‘우리는 같은 일로 울기도 웃기도 한다’, ‘우리의 욕망은 어려움에 부닥치면 커진다’ 같은 제목이 눈에 띈다. 정석대로 하자면 먼저 수상록을 읽어보고 몽테뉴만 한 이십년 공부한 저자의 이 책을 읽어보아야 하겠지만 이 책을 먼저 접한다고 해서 원서 없이 해설서만 집어든 것 같은 일종의 부끄러움 같은 건 느끼지 않아도 될 듯하다. 여지껏 위대한 사상가의 평전이나 작품 해설을 이처럼 깊이 있고 재미나면서도 쉽게 서술한 책은 본 일이 없기 때문이다.

 

 

   몽테뉴에 대한 (교과서적인)부담감 때문에 이 책은 쉬운 쪽이 아닐 것이라 예상했지만 의외로 술술 넘어가는 터에 그냥 끝까지 내달렸다. 한 이틀 이 책에 올인하면서 간만에 책 읽는 재미를 보았달까. 몇몇 부분 감동적이고 문학적인 결론이 여러 차례 반복되는데 저자는 놀랍게도 프랑스인이 아닌 영국 여성이었다. 흡사 몽테뉴와 동시대를 살았던 사람마냥 -그것도 개인비서나 친구 혹은 제자, 딸이나 되는 것처럼 -저자는 그의 머리와 가슴속에 들어갔다 나온 사람으로 보였다. 얼마나 읽고 생각하고 연구했으면 몽테뉴보다 더 몽테뉴를 잘 말할 수 있단 말인가.(한나 아렌트의 제자인 엘리자베스 영 브루엘이 쓴 <아렌트 읽기>의 느낌도 든다. 그러나 아렌트의 제자는 학문적인 책임을 가지고 아렌트를 연구한 반면 이 저자는 아무런 연고도 없이 그저 몽테뉴를 읽고 독자로서 충격을 받았다는 이유로 이 책을 쓰게 된 것이 아닌가) 내가 환갑 줄에 들어서게 되는 이십년 후면 몽테뉴가 태어난 지 오백년이 된다. 나는 이 책으로 인해 몽테뉴와의 오백년의 시간차를 뛰어넘어 마치 유즘 유행하는 인생의 멘토같은 느낌을 받았다. 몽테뉴가 죽은 해는 1592년 그러니까 우리나라에서 임진왜란이 일어난 해이다. 몽테뉴와 비슷한 시기를 살았던 이순신을 떠올리면 그는 저 까마득한 세계사속의 한 페이지에 등장할까 말까한 교과서적인 인물이 아니던가. 아마도 어떤 작가와 작품을 말하는 내용의 책으로 자기 주장을 세상에 떠들려면 이 정도가 그 정점의 완성치일 것이다. ‘아마존 닷컴 올해의 책’같은 문구를 별로 신뢰하지 않는 편인데 가끔 예외도 있는 것, 그래서 (아무의 권유도 없이 내 돈 내고 책을 산 입장에서) 주저없이 살길을 이 책에서 찾는 방안을 추천하고 싶다.

 

 

   몽테뉴는 약 십년간 둘도 없는 친구가 죽고 아버지와 남동생이 죽고 자식들이 연이어 죽으면서 죽음에 대한 공포에 시달린 사람이다. 거의 이년에 한명 꼴로 집안에 초상을 지른 것이다. 잔인한 고문이 아닐 수 없다. 모르긴 해도 매일 밤 죽음을 생각하고 먼저 간 사람들을 생각하고 더불어 자신의 죽음을 생각했을 터이다. 그는 우연히 말을 타고 가다가 하인과 부딪히면서 낙마사고를 당하게 되는데 이때 극적으로 죽음을 체험하게 된다. 연대기에 의하면 빈사상태의 낙마사고가 있고 3년 후부터 몽테뉴는 에세를 집필하기 시작한다. 저자는 이 시기를 제일 먼저 우리에게 통보하며 몽테뉴가 그랬듯 죽음을 걱정하지 말라고 선수를 친 것이다. 왜냐하면 몽테뉴가 자신의 빈사체험을 통해 ‘자신이 존재하지 않게 되는 것을 두려워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에. 즉, 어떻게 살 것인가를 고민하려면 일단 죽음에 대해 걱정하지 말아야 한다고 타일러 주는 것이다.

 

 

   몽테뉴는 가까운 이의 연이은 죽음과 낙마사고 이후 관직을 은퇴하고 영지에서 내면의 시간을 시작한다. 이때가 바로 죽음에 대한 생각이 바뀌게 되는 전환점인 듯 하다. 즉, 그동안 몽테뉴를 가장 괴롭히던 죽음에 대한 개념정리가 끝났다고 보는 것이다. 물론 생각을 정리하고 글을 썼다고 해서 여전히 죽음이 두렵지 않으며 매일 밤이 걱정되지 않았던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사실상 몽테뉴는 이때부터 죽을 때까지 집필을 하게 되며 - 어떠한 일이 있어도 집필을 중단하지 않게 되며 - 자신의 유일한 작품인 에세와 함께 성장하고 에세를 통해 자신을 완성해 나갔다. 저자는 바로 몽테뉴가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하고 자기 살 길을 찾기 위해 에세를 썼다고 분석한다. 이 책도 몽테뉴가 죽으면서 끝이 난다. 내가 만약 앞으로 이십년을 더 살수 있다면 몽테뉴처럼 끊임없이 무언가를 끄적이고 생각을 정리하는데 그 시기를 온전히 사용한다 해도 그로써 충분히 가치 있는 일이 아닐까 싶어진다. 저자는 죽음 앞에서 그리고 죽음을 통과한 후 몽테뉴가 죽기까지 한 일을 이 책을 통해 밝혀주었다. 아마 어떤 이는 나처럼 이 책의 마지막에서 몽테뉴가 숨을 거둘 때 마치 내 임종의 순간을 구경하는 느낌이 들지도 모르겠다.

 

 

죽는다는 것은 죽음과 맞서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죽음에 이르기 전에 이미 이 세상을 떠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죽음은 잠드는 것처럼 어디론가 떠내려가는 것이다... 죽음은 대비할 수 있는 행동이 아니다.      -p33

 

 

 

기꺼이 받아들이는 것이 잘 사는 길

 

 

 

   몽테뉴는 죽는 법을 배워야 사는 법도 떠올릴 수 있다고 말하는 듯하다. 그러나 실제로 죽는 건 배우자마자 다시 써먹을 기회가 없다. 그저 다른 이의 죽음을 지켜보며 그 단 한 번의 실전을 준비할 뿐인 것이다. 몽테뉴는 실전을 준비하는 장소로 뒷방을 선택했다. 가게 뒷방이라 불린 그곳은 완벽한 도피처이자 상실로 인한 고통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할 장소로 기능했다. 그는 ‘자기탑’에서 누구보다 자기 자신을 관찰하고 흔들리는 세계 속에서 신뢰할 수 없는 자신을 발견했다. 매일 매 순간 변화하는 의식과 경험의 흐름을 묘사하기 위해 주의를 기울였다. 자기 자신을 있는 그대로 보고 말하는 법, 사물을 바라보는 법, 관찰한 것을 즐겁게 글로 옮기는 법을 터득했고 그게 살아가는 법이라 깨달았다. 그렇게 살다가 꽁꽁 얼었던 겨울이 봄에게 자리를 내어주듯 죽음이 다가왔을 때 나 자신을 죽음에게 내어주는 것이 자연스러울 것이라 믿었다. 생활은 작품과 일치했고 작품은 인생과 일치했다.

 

 

우리는 완벽한 자유를 만끽할 수 있도록 자기만의 뒷방을 마련해두고, 그 안에서 진정한 자유, 은둔처, 고독을 확보해야 한다. 이곳은 자신과 일상적인 대화를 나눌 수도 있고, 외부와의 관계나 소통이 단절된 은밀한 장소라야 한다. 이곳에서는 아내가 없는 것처럼, 재산이 없는 것처럼, 시종과 하인이 없는 것처럼 자기 자신과 대회를 나누며 웃을 수 있어야 한다. 그러면 이런 사람들이나 재산을 잃게 되더라도 이들이 없이 생활하는 것이 전혀 낯설지 않을 것이다.     -p243

 

 

   그러나 그가 오랜 기간 뒷방을 집필실 삼아 내면의 세계를 성장시키는데 주력했다 하더라도 은둔의 정도를 스스로 조율할 줄 아는 사람이었던 것 같다. 그는 느리고 게으르고 무기력하고 무책임한 일면이 있었고 건망증이 심하고 키가 작았다고 한다. 자유분방하고 낙천적인 성격이 근엄해 보이는 16세기 법관의 모습과는 어울리지 않아 보이지만 스스로의 이중성을 "수줍음을 잘 타면서도 버릇없이 굴기도 하고, 순결하면서도 음탕하기도 하고, 수다스러우면서도 말수가 적고, 억세면서도 예민하고, 영리하면서도 어리석고, 무례하면서도 사근사근하고, 거짓말을 하면서도 진실하고, 박식하면서도 무식하고, 자유분방하고, 인색하면서도 낭비벽이 있다."고 고백하면서 ‘계획적으로 철학을 연구하려고 한 적이 없는 우발적 철학자’라 평했다. 그는 공개토론도 좋아했고 붙임성도 있는 편이어서 공직에선 사교적인 역할도 주도했다. 한창 종교분쟁이 심해 나라 전체가 피비린내 나는 내란에 휩싸여 있을 땐 구교와 신교를 중개하는 역할도 지혜롭게 수행했다. 터놓고 이야기 합시다, 처럼 그는 성을 개방하고 살아서 외려 안전해진 케이스였다.

 

 

   그가 제시한 관점의 상대성은 때론 싸워서 이길 수 없으면 피한다는 식의 주의전환 같은 요령도 알려주고 동물의 지능과 감정이 인간의 그것과 다를 바가 없다고 피력하기도 했다. 법관을 하면서 깨달은 인간의 결점과 오류의 발견은 인간의 이성이 그다지 신뢰할 만한 것이 아니라는 결론의 배경이 된 듯하다. 이성으로 모든 걸 알 수 있다는 허세를 경계하고 오해를 방지하기 위해서 무엇이건 오해의 여지가 있다는 점 역시 늘 경계해야 한다고 했다. 인간은 불완전하기 때문에 ‘다양한 상황에 놓인 인간의 모습을 다각도에서 볼 수 있는 감각’을 길러야 한다는 주장은 결국 ‘모든 일을 현실 그대로 기꺼이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한다’는 궁극의 관점과 연결된다. 현실을 수용하는 태도는 이 책에서 언급된 인간적인 번영을 의미하는 ‘에우다이모니아 (eudaimonia)’나 평정을 뜻하는 ‘아타락시아 (ataraxia)’, 그리고 운명애를 의미하는 ‘아모르파티’ 와 맥을 같이 한다. 모두 운명을 받아들이는 법을 상징하는 개념들이다.

 

 

가장 아름다운 삶은 기적이 일어나거나 기이한 행동을 하지 않고 순리대로 평범한 인간으로 사는 것이다. 
-p295

 

 

   몽테뉴는 질병, 전쟁, 기근, 죽음을 흡사 강 건너 불구경 하듯 모두 관조하며 광기의 소용돌이 속에서 한발 물러나 탑에서 글을 썼다. 자만심과 우월감, 습관, 야망과 탐욕, 가족과 주위환경, 광신, 운명과 죽음에서 벗어나 평상심을 유지하기 위해 매일 집필하는 것을 종교로 삼았다. 자기모순을 똑바로 관찰하고 결점을 발견하고 이중성과 위선을 인식하며 그것들을 지닌 채로도 모두를 받아들일 수 있는 법을 깨우치기 위해 집필을 멈추지 않았다. 그것이 불완전한 삶을 살아가는 방식이고 불완전한 인간(자신)을 수용하며 완성된 인간으로 발전하는 길이었다. 몽테뉴에겐 관찰이 습관이고 자유가 규칙이고 솔직이 태도이고 여담이 방식이었는데 그렇게 ‘앞으로 나아가면서 점점 더 강해’진 것이다.

 

 

 

완전히 빠지는 것은 더 잘 사는 길  

 

 

 

   이 책에는 몽테뉴에 대한 후세의 평가 및 후속작업이 체계적으로 잘 정리되어 있다. 저자는 같은 책을 가지고도 그가 17세기에는 협잡꾼이나 파괴분자로 비난받았던 사실과 오랫동안 편집의 전쟁이 이어져 왔음을 소상히 밝히고 있다. 이 책을 통해 전해 받은 몽테뉴는 상당히 정치적이었던 인물로 느껴지는데 저자는 그가 정치에 소질이 있었다고 분석했다. 신흥귀족 출신에 어려서부터 다양한 교양과 언어를 교육받아온 몽테뉴는 종교인이기 이전에 그 시대의 지식인이었다. 그런데 몽테뉴에게선 어떤 열등감이나 패배감, 시대적 사명감이나 영웅심 같은 것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작가들이 보편적으로 고민하는 양심과 죄의식에 관한 화두나 지도자로서의(몽테뉴는 보르도 시장을 5년 역임했다) 의무와 책임의식, 혹은 권력에의 야망같은 것도 감지되지 않았다. 그는 포도주 제조나 영지관리에도 무관심했고 가정적인 남편, 다정한 아버지상도 아니었다. 어찌보면 철저히 평생 자기 자신을 대상화한 집중적 관찰 및 연구에 몰두한 지독한 에고이스트에 가까웠다. 그야말로 어떻게 살 것인가를 매일 매순간 생각해온 사람임에 틀림 없을 것이다.

 

 

   나는 여기서 몽테뉴와 이 책을 쓴 저자에게서 한 가지 공통점을 발견한다. 그것은 몽테뉴 말년에 인연을 맺은 사후 편집자 구르네에 관해 저자가 평한 부분에서도 비롯된다. 논란이 많았던 구르네라는 다소 불확실한 여성에 대해 저자는 매우 세심한듯 하면서도 어쩐지 애틋한 어조를 잃지 않았다. 같은 여성인 저자는 ‘그녀가 완전히 황홀경에 빠졌던 것처럼 누구나 완전히 매료되어야 한다’고 그녀를 두둔하는 것처럼 보였다. 완전히 매료된 것은 저자 역시 마찬가지가 아니었을까. 저자는 이십년전 부다페스트 헌 책방에서 몽테뉴를 만난 것이 운명이라고 했다. 그것은 저자가 구르네에게 느낀 동질감이었고 그것은 저자가 몽테뉴에게 감지한 공감과 꼭 일치했다. 또 그것은 몽테뉴가 문학적 동반자 라 보에시에게 느낀 교류의 감성과 일치했다고 생각한다. 몽테뉴도 라 보에시도 구르네도 저자도 분명 같은 문제를 같은 방식으로 고민했고 그들은 모두 거울을 보듯 상대에게 완전히 빠져들었다. 이것은 이 책을 읽게 되는 나같은 독자에게도 마찬가지 일 것이다. 저자는 이 세대를 초월해 이어지는 상호작용 때문에 고전이 각자의 마음에서 다른 모습으로 다시 태어나는 동시에 수많은 독자를 한마음으로 모은다고 부연했다.

 

 

   이 책에는 몽테뉴의 전후 세대를 포함해 그가 살았던 당시 16세기 프랑스의 역사적 상황과 주변국과의 관계, 그리고 당시 철학적 가치관이 몽테뉴의 인생과 잘 믹스되어 있다. 저자는 현대 비평가들이 자신과 닮은 꼴인 몽테뉴를 리메이크 할 때 반드시 역사적 맥락을 고려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앞뒤 맥락을 고려하지 않고 단지 텍스트로만 저자의 의도를 분석하고 동기를 자의적으로 해석하는 재구성 작업도 결국 몽테뉴를 알아가는 다양한 방식의 하나로 받아들이고 있다. 저자는 몽테뉴에게서 배운 대로 판단을 보류하고, 잘못된 판단이 가져오는 오류의 상황도 지혜롭게 받아 들이고 있었다. 자신 말고 몽테뉴를 말해온 다른 사람도 정답일수 있다고 하는 태도가 인상 깊었다. 중요한 건 아직도 끝나지 않은 몽테뉴의 에세를 영감을 얻은 누군가가 이어받아 자신처럼 완전히 빠져든 채로 대화를 시도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건 마치 우리 생이 아직 끝나지 않았기 때문에 가능한 살아가는 다양한 시도(불어로 에세예essayer는 '시도하다'라는 뜻)로 인식되기도 한다. 얼마나 대견하고 근사한 광경인가.

 

 

   문득 몽테뉴가 그의 절친 라 보에시를 사랑한 이유는 “네가 있기 때문이고, 내가 있기 때문‘이라고 한 말이 종이에 잉크가 번지듯 뇌리에 떠오른다. 그는 말한다. 죽음을 극복하기 위해 살아가야 하지만 죽음이 인생의 목적은 아니라고. 인생은 그 자체가 목표이자 목적이라고. 우리는 살아가는 동안 불행히도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질문으로부터 한시도 자유로울 수가 없다. 그것은 누구도 어떻게 살 것인지 정답을 말해줄 수가 없고 누군가 내게 그럴싸한 답을 주었다 하더라도 그렇게 살아가야하는 주체는 결국 내 자신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늘은 ’그가 썼기 때문이고, 내가 읽었기 때문‘에 어제와는 다를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어쩌면 일찌감치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각자 아름다운 해답일랑은 알고들 있었는지도 모른다. 이 책 말고도 얼마든지 내게 적합한 답은 한두가지 쯤 얻어 놓았을지 모를 일이다. 그래도 생각해보는 것이다. 계속하여 질문해 보는 것이다. 당신은 어떤지 나와는 같은지 확인해 보는 것이다. 가끔은 얼토당토않은 답을 교환하고 다른 답도 상상해보는 것이다. 그것을 살아가는 방식으로 삼아 버리는 것이다. 정의가 무엇인지는 하나로 답할 수 없고 정의를 이룩하기 위해 끝까지 노력하는 과정만이 정의를 말해줄 수 있을 뿐인 것처럼 우리는 어떻게 살 것인가를 묻고 답하며 그렇게 죽는 날까지 그 ’어떻게‘를 어떻게든 실천하려 노력하는 수 밖에 없을 듯하다. 어떻게 살 것인가를 머리 터지토록 고민해도 어떻게는 살고 하나도 고민하지 않아도 어떻게든 산다. 그냥 살고 잘 살고 조금 더 잘 살고의 차이가 있을 뿐 우리 모두는 어떻게든 살아간다. 하지만 고민하면 조금 더 지금보다는 더 나을 거라는 희망을 버리지 않기로 한다. 희망은 그것을 버리지 않는 사람을 버리지 않는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 방법은 다행히도 고민의 주체인 우리 자신에게만은 영원히 유효할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살 것인가를 이토록 고민해야 할 이유란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덧붙임)

 

오늘이 엄마의 다섯번째 기일이다.

나는 잘 있다고

아직은 괜찮다고

오늘도 잘 떠들었다고 말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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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12-02-26 13: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강영우 박사가 지난 23일 돌아가셨답니다.
그런데 그분은 자신이 죽을 것을 미리 알고 준비를 잘 하셨나 봅니다.
무엇보다 남아있는 가족에게 편지를 썼다고 하더군요.
죽음을 생각하며 잘 살면 좋겠는데
대부분은 죽음도 생각하지 못하며 잘 살지도 못하죠.
저는 죽을 때 고통이 없었으면 좋겠고, 가족들에게 최대한 피해주지 않고
깨끗하게 죽었으면 좋겠어요.
그런데 사는 동안 잘 살아야 하는데 그게 좀 자신이 없다라구요.
이책 저도 읽어봐야겠네요.

오랜만이어요. 오랜만이지만 괜찮으신 것 같습니다.ㅋ

stella.K 2012-02-27 11:51   좋아요 0 | URL
그렇군요.
3월은 저도 좀 기운이 나요. 더 이상 춥지 않아도 된다는 이유만으로도.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