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더보이
김연수 지음 / 문학동네 / 201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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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o : 돌고래와 아부지

 

 

 

아부지, 기억나? 우리도 사진기 샀으니까 이참에 서울대공원에 가서 돌고래쇼나 보러가자고 그래서 아버지랑 나랑 둘이서 -그때 엄마는 왜 안 가셨는지 도저히 기억이 안나요. 혹시 두 분이 냉전 중이셨을까요? -버스타고 가서 아주 어색하게 분수대 앞에서 사진 찍고 돌아온 날. 아무리 생각해봐도 나 아부지랑 단둘이서 어디 가본 건 그게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던 거 같아서 앨범을 뒤져봤어. 그런데 그 분수대 사진에 우리 부녀의 역사적인 날이 85년 9월 8일이라고 찍혀 있더라구. 나 그래서 85년도 달력을 찾아봤지. 일요일이더군. 중3인 나는 가슴에 BANG BANG 이라고 쓰여진 빨간 티셔츠에 죠다쉬쯤으로 보이는 청바지를 입고 있었어. 사진기가 좋았는지 내 실력이 좋았는지 돌고래도 흔들리지 않고 잘 찍었더라구. 돌고래 한번 뛰어 오르는 게 뭐라고 비슷한 사진이 몇 장이나 있더라. 다른 동물 사진은 없는 것으로 보아 우린 돌고래 쇼를 보러 간 게 맞긴 했나봐. 그날 아부지랑 점심으로 무얼 먹었는지 아부지랑 무슨 이야길 나누었는지 하나도 기억 안 나는데 돌고래 쇼만은 또렷이 기억나니 말이야. 그래서 말이예요... 바보같이 툭툭, 눈물이 났지 뭐야. 살다, 돌고래보고 우는 여자 첨 봤다구? 몰라, 어떤 소설을 읽었는데 그 소설 주인공이 부모님과 서울대공원에서 돌고래 쇼를 보는 게 소원 이었다잖아... 오늘은 어제 죽은 사람이 간절히 바라는 내일이라고... 나도 다른 누구에겐 간절한 소원이었던 추억이 하나 있다는 게 왜 이리 기쁘면서 슬픈 건지 그만 무지 무지 아부지가 보고 싶었어. 맨날 엄마만 그리워했는데 그것도 미안하고 오랜만에 아부지가 사무치게 그리웠어. 그래서 마흔 넘은 아줌마가 열 살 딸아이처럼 엉엉 울어버렸어. 괘씸하고도 얄미운 작가 같으니. 글쎄 나랑 갑장인 작가가 말이야(딸자식이 이제 6학년인거 까지 같더라구), 마지막에 ‘이제 모두 어른이 됐을, 그날 서울대공원을 찾았던 십 만 명의 사람들에게도 안부를 전한다’ 고 아주 뻥뚫린 가슴에 작정하고 에어컨 바람을 광속으로 틀어주더란 말이지. 어디 꼭 나들으라고 하는 말 같아서 -기껏해야 그 십 만 명 중의 한사람 밖에 못 되었으면서 - 얼마나 찔리던지.

 

 

 

그날 우리랑 같이 돌고래 쇼 봤던 사람들은 어디서 무얼 하고 있을까. 나처럼 어른이 되어버렸을까? 그래 그들도 나처럼 그때 나만했던 딸자식을 두었을지도 모르지. 혹시 아부지처럼 성미가 급해서 일찍 하늘나라로 가버린 사람도 있을 거야.

 

아... 도대체 어쩌다가 내가 이만한 어른이 되었는지 또 어쩌다가 아부지랑 영영 이별을 하게 되었는지 믿기지가 않아서 반나절은 가슴이 먹먹했어. 이 소설 모르긴 해도 나처럼 아부지랑 돌고래쇼 본 적 있는 아줌마 아저씨라면 작가의 안부인사가 어떤 의미인지 눈물 나게 반가웠을거야. 아무리 생각해봐도 그날 돌고래쇼는 보길 참 잘했어!

 

 

 

 

 

 

To : 84년도 단짝 친구

 

 

 

도연아, 기억나니? 84년도에 말야. 너 조용필 신곡이 나왔다고 우리 집에 전화해서 노래 들려준다고 숨죽이면서 오 분 동안 아무 말 안하고 있었던 거. 그때 네가 들려준 노래가 <친구여>란 노래였지. 꿈은 하늘에서 잠자고 추억은 구름 따라 흐르고 친구여 모습은 어딜 갔나 그리운 친구여~~ 아... 정말로 ‘부푼 꿈을 안고 내일을 다짐하던 우리 굳센 약속’은 모두 어디 간 것이냐... 오늘 아부지와 단둘이 찍은 사진을 네가 생일선물로 준 앨범에서 발견했다. 무려 28년 전의 네 필체를 보고선 마치 네 얼굴(네 별명이 도곡동 김성희였다는 걸 밝히면 문제되나?) 이 저절로 그려지는 것 같았어. 그때 딴에는 멋진 싯구절 베껴 써가며 하루에 한통씩 주고 받았던 편지들 피식 생각이 난다. 예쁜 편지지에 목을 매던 시절이, 우리도 있었구나.

 

 

지금은 어느 하늘 아래서 누구와 어떻게 살고 있는 거냐. 너도 가끔은 하늘을 보고 사는 거냐. 내가 보는 꼭 그 하늘에서 달도 보고 별도 세고 어떤 날은 그때 친구도 떠올려 보는 거냐. 웃기지? 사회비판적이고 쉬크하기로 짝이 없던 내가 달과 별을 보았냐고 물어 볼 줄 몰랐다구? 이게 다 소설 때문이다 친구야. 우리와 동갑인 작가가 글쎄 자기랑 동갑인 주인공을 만들어서 우리처럼 열 다섯 살 때 보았던 하늘을 생생히 기억하더란 말이다.

 

 

 

그때 우리의 하늘은 온통 우울한 잿빛이었지. 84년은 바로 우리의 우상이었던 조용필이 결혼을 해버린 해였으니까, 하하하. 조용필이 광고하던 ‘두리스바’라고 기억나니? 그 광고 배경음악이 ‘나는 너 좋아’였잖아. 니가 나 좋다고 그렇게 편지에 고백하더니 지금은 어떤 남자만나서 어떤 사모님이 되어 있을까. 들리는 소문에 네가 아주 돈 많은 사업가를 만나서 학교졸업하자마자 결혼을 했다고 하더군. 그게 사실이라면 네 자식은 지금 걸그룹 누구와 나이가 똑같겠구나. 놀랍지 않니? 우리 애들이 그때 우리와 같은 나이가 되버렸다는 거. 이건 결코 작은 일이 아니야. 그런데 이 책을 덮고 났는데 우리 고등학교 독서실 다닐 때 줄기차게 들었던 휘트니 휴스턴이 사망했다는 기사가 뜨더라... 그때 노래 좀 한다하는 애들이 쉬는 시간에 부르던 ‘Greatest Love Of All’... 그 노래 들으니 갑자기 눈물이 핑 돌더라. 실감도 안 나고 그냥 그랬는데 노래를 들으니까 주체할 수 없이 가슴이 저려오더군. 추억이란 그런 걸까. 우리 좋아하던 가수가 죽었다고 우리의 추억이 사라진 건 아닌데 더욱 우리의 이별이 실감나고 그래서 더욱 돌아갈 수 없는 우리의 시절이 그립더라. 독서실 옥상에서 대학을 꼭 가야하는가, 얼마나 고민하고 떠들었니... 그때 보았던 우리 하늘엔 현정화, 양영자 선수가 탁구 복식에서 금메달을 땄다고 환호성이 일제히 울려 퍼졌었지. 같은 하늘을 바라보며 누군가는 울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그땐 하지 못했다. 세월이 흘러 이렇게 네가 보고 싶을지도 그땐 몰랐다... 1984년 그때 우린 고작 열 다섯 살이었다, 친구여...

 

 

 

 

To : 놀라지 않는 당신

 

 

 

   이 소설을 읽고 나니 편지를 부치고 싶은 사람이 두 사람 있었어요. 아부지와 중 2때 단짝. 소설 속 주인공 김정훈이 1984년에 아빠를 잃었거든요. 84년보다 약 삼 십년 후에 돌아가신 아부지와 84년에 둘도 없었던 친구가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어요. 불행히도 지금은 두 사람 다 제 곁엔 없군요. 하지만 소설이 가르쳐 주었어요. 우리 모두는 누군가 없기 때문에 지구라는 별에서 외로운 여행자가 되는 거래요. 사람은 없어져도 모든 건 그대로 남는다고 해요. 그 사람과 연결된 에너지와 그 사람이 남겨준 메시지, 우리는 누구나 외롭고 언젠가 죽게 되지만 누구나 가진 그 ‘믿음과 소망과 사랑의 이야기’가 우리를 계속 살아가게 만든다구요. 아부지와 친구는 나를 살아가게 한 에너지였고 내가 깨달아온 메시지였나봐요.

 

 

 

   소설은 참 우리에게 아름다운 방법으로 살아가는 아름다움을 가르쳐 주네요. 제목을 보세요. 마린보이, 태권브이, 6백 만 불의 사나이, 소머즈, 헐크, 그리고 원더우먼 이런 주인공들 생각나지 않아요? 나 어릴 땐 모두 그렇게 초능력자인 사람들만 TV에 나왔어요. 하늘에서 내려왔는지 땅에서 솟아났는지 그들은 모두 우리가 죽었다 깨어나도 따라가지 못하게 근사했죠. 간첩잡은 애국열사 아버지의 아들 김정훈. 교통사고 후 혼수상태에서 모두의 바람으로 기적같이 소생한 자유대한의 원더보이. 그래요, 꼭 죽었다가 깨어나 새로운 삶을 사는 것이 마치 새로운 세상을 인도할 영웅의 조건이나 되는 것처럼 그들은 놀라왔어요.

 

 

 

   그런데 정훈이의 초능력은 멀리 뛰고 날아가고 무언가를 부숴버리는 육체의 능력이 아니었어요. 다른 사람의 생각을 읽을 수 있는 능력이었어요. 기쁨이나 슬픔, 외로움이나 고통같은 다른 사람의 마음을 그대로 느끼는 공감의 능력, 나아가 그 사람의 삶을 이해하고 그것을 전해주는 능력이었어요. 정훈이가 태어날 때부터 그랬던 건 아니고 교통사고를 당하고 삶과 죽음의 경계에 갔다가 돌아 온 후-그러니까 아버지의 상실을 겪은 후- 감각에 변화가 찾아온 거래요. 그러니까 작가는 타자의 상처와 고통에 공감하는 능력을 초능력으로 본 것이죠. 이건 제 생각인데 작가가 그동안 아픈 일이 많았던 가봐요. 사실 우리가 타자의 고통을 내 것처럼 똑같이 느끼고 이해하기란 불가능하잖아요. 내가 겪어보지 못한 고통의 크기와 깊이를 그저 바라보는 입장에서 예상하고 예상한 그 수준만큼만 공감해 줄 수가 있지요. 그 정도면 이정도 힘들겠구나 예견할 수 있을 뿐 고통의 당사자를 아무리 사랑하고 친하다 한들 절대 같을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기에 이 냉정한 현실은 내가 고통 속에 빠져 있을 때 (나처럼)상대가 내 고통을 알 수 없기 때문에 끝없는 외로움에 가닿게 합니다. 살아있는 동안 처절한 고통일수록 더욱 뼈저리게 실감되는 상호 불통의 시간들. 이것은 내가 상대의 고통을 느낄 수 없듯 상대도 마찬가지인 당연한 현실인데 사는 동안 이 자체가 얼마나 고독한 형벌인지 모릅니다. 작가는 필히 이 문제를 해결하고 싶었던 모앙이예요.

 

 

 

   그래서인지 이해란 그저 상대의 마음을 읽는 것뿐만이 아니라 그 마음을 내 것처럼 느끼고 ‘누군가를 대신해서 그들에 대해서 이야기 하는 것, 그 이야기를 통해서 다시 그들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중요한 건 단지 전해주고 마는 것이 아니라 전해주고 소통했기 때문에 같이 사랑하는 것입니다. 아니 사랑할 수 있다는 것, 사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작가가 말하는 초능력이란 사람의 마음을 읽어 그 사람을 이해하고 그 사람의 이야기를 누군가에게 전해줌으로써 함께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는 것입니다. 이렇게만 산다면 우리 모두는 어떤 상처가 있어도 다같이 행복해질 수 있다고 말입니다.

 

 

 

   마치 오래된 우주의 순리처럼 당연해 보이는 이 과정이 결코 쉽지 않은 이유는 우리가 공감과 소통의 시대에 살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이 능력은 초능력인 것입니다. 작가는 우리가 70년대 말에서 80년대 중반까지 서슬퍼런 군사정권의 시대에 유행하던 <묘기대행진>을 빌어 암기, 암산, 속독, 차력, 혹은 염력 같은 초능력의 우화들을 소개합니다. 유리겔라 덕분에 집안에 숟가락이 남아나지 않던 시절이 있었죠. 생각해보니 그땐 레슬링에서도 김일 선수가 박치기라는 초능력으로 일본선수를 보기 좋게 쓰러뜨리던 시절이었어요. 자원과 자본, 기술이 턱없이 부족했던 그 시절 우리에겐 ‘안 되면 되게 하라’ 식의 무대포 정신과 하룻밤에 만리장성을 쌓는 정주영식 추진력(?)과 강압적인 군사문화가 어우러져 초능력이야 말로 저 앞서가는 선진국들을 따라 잡을 수 있는 기특한 비법으로 보였을지 모릅니다. 그런데 작가는 정작 중요한 초능력이 빠졌다고 말합니다. 우리가 초능력으로 쳐주지 않았던 것이 분명 있었다고 주장합니다.

 

 

 

   <묘기 대행진>의 변대웅 아나운서는 참가자 정훈이 말을 하면 도대체 ‘얘가 말만 하면 왜 이렇게 내일처럼 느껴’지는 것인지 의아해 했죠. 시청자들은 정훈이 말 한마디에 눈물을 흘립니다. 정훈이 말하는 슬픔이 곧 내 슬픔과 겹쳐지고 내 슬픔이 누군가에게 전해져 나와 같은 마음이라면 그건 더 이상 슬픔이 아니라 연대적 위로이고 대국민적 기쁨이라는 것을 알려줍니다. 우리가 사람들의 놀라운 초능력으로 이만큼 국력이 신장되고 경제가 발전하고 민주화가 되었지만 그동안 우리는 우리가 잘 할 수 있었던 공감과 위로의 능력을 잃어버렸습니다. 국가 정보부의 고위직으로 출세한 권대령같은 사람들이 다른 사람을 이해하다간 힘을 잃고 권력을 잃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 사람을 먼저 사랑하는 것은 국가적 손실이라고 착각했기 때문입니다. 정훈과 같이 죽을 고비를 넘기고 돌아왔지만 여성으로서의 정체성을 잃어버린 강토는 말합니다. 이 나라에선 ‘타인의 고통에 공감하는 것 자체가 탄압의 대상이고 이적행위’라고 말입니다. 지금과 다른 국가를 원한다면 제발 타인의 고통을 자기 것처럼 여겨야 한다구요. 공감하는 능력은 이 세상에 꼭 필요한 능력, 세상을 바꿀 수 있는 능력이라구요.

 

 

 

   권대령이 80년대 군사정권의 탄압을 상징하는 인물이라면 - 권대령은 정훈을 계속하여 ‘군’이라고 부릅니다 - 정훈이 열일곱의 봄에 만난 강토와 무공, 재진아저씨는 각기 그 시절의 피해(성정체성 상실), 타협(순리대로 살아감), 개척(사회서적 발간)의 표상으로 느껴집니다. 그때의 내 청소년 시절을 관통하던 키워드 중엔 올림픽을 빼놓을 수가 없어요. 84년 LA 올림픽, 86 서울 아시안 게임, 88 서울올림픽... 헝그리 정신과 애국심으로 대변되던 스포츠문화는 더욱 내셔널리즘을 강조하는 획일적 분위기를 형성했어요. 초딩 시절엔 지겹도록 무찌르자 공산당을 불렀고 중고등학교에선 죽어라 아, 대한민국을 외쳤어요. 고백을 하자면 그땐 점심시간 지나고 나면 어김없이 강 건너에서 교정으로 날아오던 매운 공기가 최루탄 잔향인지도 몰랐어요. 우리에겐 사람들의 고통을 이야기 해주는 원더보이는 잡혀가는 사람이었어요. 강토의 약혼자 이수형은 <장학퀴즈> 연말장원을 차지한 기억력의 천재였지만 존 레논이 암살당한 1980년 12월 서해 바닷가에서 변사체로 발견됩니다. 약혼자의 아버지는 언론자유를 요구하다 신문사에서 강제해직당한 후 나중에 자살을 합니다. 우리의 과거는 이처럼 잊지 않고 기억하는 사람, 망각하지 않고 기록하는 사람을 아무렇지도 않게 죽여 왔습니다. 작가는 묻습니다. 우린 어쩌면 절대로 잊지 말아야 할 일들을 너무 쉽게 망각하면서 엉뚱한 능력들을 초능력으로 믿으면서 살아온 건 아닐까요.

 

 

 

   정훈의 아버지는 ‘세월이 아무리 흐른다고 해도 잊어서는 안 되는 일들을 적어두는 비망록’이 있었죠. 아버지는 마치 은하수를 가로질러 여행하는 우주비행사처럼 트럭을 운전했어요. 비망록은 삶의 기록이며 우주비행사는 삶의 여정일 거예요. 그런 아버지의 에너지는 아들에게 복제되었을까요? 정훈은 물었죠. 사람들이 비망록에 ‘이뤄질 가능성이 없는 몽상들, 두 눈을 뜨고 바라보는 꿈들, 문장으로 만들 수 있을 뿐 아무런 현실성도 없는 소망들, 지금까지 한 번도 일어나지 않았고, 앞으로도 일어나지 않을 게 분명한’ 그런 몽상과 꿈과 소망을 적는 이유가 무엇이냐구요. 강토의 약혼자도 두 사람만의 장소를 영구 기억하기 위해 시간을 아끼지 않았어요. 강토는 약혼자와의 기억을 기억하기 위해 그의 죽음을 기억하죠. 이 소설은 정훈의 아버지와 강토의 약혼자의 죽음을 통해 죽음이라는 고통에의 공감 가능성을 말하고 있으며 죽은 자와 나누었던 이야기를 통해 이루어질 수 없는 일들을 포기하지 않는 방식을 말하고 있습니다. 정훈은 고문당하는 사람이 죽음의 고통 속에서 허우적거릴 때 저마다 절대로 지울 수 없는 삶의 순간들, 가장 행복했던 기억들을 떠올리는 것을 보게 됩니다. 사람들은 극심한 고통의 순간에 죽음이 아닌 아름다운 추억을 떠올린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죠. 사람들이 죽어가면서 떠올리는 것이 곧 우리가 죽음을 받아들이는 방식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정훈의 아버지도 강토의 약혼자도 그랬을 것이라고 믿고 싶습니다. 그래야 나도 죽는 순간 덜 외로울 수 있을테니까요.

 

 

 

   우리 같이 나누었던 소원이요? 그 또한 터무니 없어 보이는 소원일지라도 실은 단 일 퍼센트의 가능성이라도 있다면 언젠가는 이루어진다고 말해요. 양자론의 세계에서는 내가 상자를 열어서 고양이가 죽었는지 살았는지 확인하기 전까지 고양이는 절반은 죽고 절반은 산 상태로 존재한다고 말이예요. “고양이의 생사를 결정하는 것은 당신의 관찰이다.”, 그러니까 어떤 불행이라도 일어나기 전까진 아직 불행하지 않은 거예요. 우주가 무한에 가깝다고 치면 그건 모든 경우의 수가 다 일어난다는 뜻이죠. 그런데 언젠가는 모든 경우의 수가 다 일어난다면 일어날 가능성이 있는 일은 반드시 일어나는 것이겠죠? 지금 여기에서 일어나지 않더라도 다른 우주에서는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이겠죠? 어떻게 해서도 할 수 없었던 일이나 불가능한 일이 이 우주에서 일어나지 않는다면 다른 우주에서라도 언젠가는 일어난다. 작가는 그것이 기적이라 말합니다. 기적은 불가능한 일이 일어나는 것이 아니고 언젠가는 일어 날 일이 지금 일어나는 것 뿐이라고요. 기적을 기다리는 것은 바보 같은 일이 아니라 가장 똑똑한 일인 것이라구요.

 

 

 

   예를 들어 ‘불가능한 일요일에 우린 다시 만날’거라는 정훈의 바람은 언젠가 어떤 형태로든 이루어지는 일이라구요. 모르겠어요. 인생이란 강물이 흘러가듯 언젠가는 생의 마지막 순간에 이르러 반짝이는 빛들의 물결로 접어들게 될지요. 우주의 모든 별들이 움직임을 멈추고 우리를 향해 일제히 빛을 내뿜는 순간은 단 한번 뿐이라는데 내게 그 순간은 기쁠지 슬플지 모르겠어요. 권대령이 여러 번 충고했죠. 군이 ‘웃으면 이제 세상이 군과 함께 웃겠지만, 울면 군 혼자 울 것이’라구요. 재차 혼자 우는 것의 두려움을 강조하고 있어요. 우리 모두 혼자 우는 것이 생각보다 두렵지 않아야 할 텐데 말입니다. 그렇다면 이 소설은 혼자 우는 방법에 관한 이야기일수도 있겠어요. 우리 모두는 결국 정훈이 처럼 우리 부모님으로부터 눈물의 상속자가 될 것이니까요.

 

 

 

   누구나 마음속에는 말하지 못하는 일이 하나쯤 있고 그 말하지 못하는 마음은 좀처럼 이해받기 힘들다고 해요. 인간은 이해받기 위해 태어났지만 이해하기 위해 살아가지 않으니까요. 문득 누가 나와 같이 함께 울어 줄 사람 있나요, 란 노랫말이 생각나요. 냉소를 미덕으로 아는 어른들이 된 우리에게 ‘원더보이’는 그런 당신을 이해한다는 것이 놀라운 일이라는 것을 잊지 말라고 당부하는 듯해요. 이제는 더 이상 놀랄 일도 없다는 사람들에게 부디 오늘처럼 놀라운 순간을 잊지 말고 기억하라 부탁하는 듯해요. 이 책이 당신에게도 켜켜이 두터워진 냉소를 안고 사는 가슴 한 켠에 천천히 심장을 데울 수 있는 나지막한 질문이자 아름다운 대답이 되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사람을 이해한다는 건 그 사람의 삶과 죽음과 그 너머의 고통까지 느낄 수 있다는 뜻일 테니까요. 그건 정말이지 놀랍기 짝이 없는 행운일테니까요.

 

 

 

 

 

 

 

 

태어나서 단 한번.
우리가 죽을 때.
그렇게.
우리는 아이로 태어나 빛으로 죽는 것이죠.
영원히 빛으로 죽는 것이죠.
그렇다면 그건 정말 멋진 일일 거예요.

 

 

 

그렇지 않나요, 아빠?

 

- p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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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2-14 14:0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02-17 13:44   URL
비밀 댓글입니다.

이진 2012-02-14 14: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읽으면 읽을수록 감탄밖에 나오지 않는 멋진리뷰인걸요.
엊그제 책을 한무더기로 주문할 때 (그것도 한국소설로만) 이 책은 저리가라, 하고
제껴놓았는데 이런, 조금만 더 늦게 책을 주문할걸 그랬습니다.
이 리뷰를 보니 무척이나 책을 읽고싶은걸요.
인용문구를 보니 막, 더 읽고싶고... 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