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혁명 - 리딩멘토 이지성과 인문학자 황광우의 생각경영 프로젝트
이지성.황광우 지음 / 생각정원 / 2012년 2월
평점 :
절판


 

 

 

피켓도 혁명이고 책도 혁명이다

 

 

 

   고전을 읽어야 두뇌가 천재성을 발한다고 주장하는 사람과 고전을 통해 세상을 이해하는 방법을 배웠다는 사람이 머리를 맞대고 함께 책을 쓴다면 아마도 그건 이 책을 뛰어넘진 못할 듯하다. 이 책의 반은 이지성의 <리딩으로 리딩하라>를 떠올리게 하고 나머지 반은 황광우의 <철학하라>와 연결짓게 된다. 두 사람 모두 고전을 읽어야 천재도 되고 리더도 되고 삶의 고민도 해결할 수 있다고 주장해왔다. 영리하고 효율적이며 적절한 조합이다. 기회가 닿지 않아 미처 <리딩으로 리딩하라>를 읽어보지 못했거나 <철학하라>가 부담스럽다면 이 책으로 두 마리 토끼를 잡을 수도 있을 듯하다. 두 책을 절묘하게 믹스했는데 업그레이드된 새로운 모델이 탄생했다. 바로 ‘혁명’의 테마이다. 두 사람 각자의 책이 ‘자아혁명’이었다면 두 사람이 함께하니 ‘관계혁명’이 되고 나아가 사회 및 국가혁명이 될 수 있다고 설득하고 있다.

 

 

   먼저 이 책의 핵심 타겟은 작년 한해 백 만부가 넘게 팔린 초대형 베스트셀러 김난도 교수의 <아프니까 청춘이다>의 해당 주인공으로 보인다. 안 그래도 김난도 교수는 이 책이 ‘이 시대 모든 청춘을 위한 지침서’라고 추천하고 있다. 턱없이 불안한 미래를 개척하는 방법은 스스로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 뿐인데 그러기 위해서는 이 책에서 말하는 혁명의 방법이 필수적이라 말하고 있다. 청춘이 지난 지 한참이라 생각하는 나도 <아프니까 청춘이다>에서 꽤 달달한 위로를 받았던 기억이 있다. 한 가지 아쉬웠던 점은 김난도 교수의 책이 좋고 나쁘고 혹은 옳고 그르고를 떠나 온 국민이 무슨 열풍처럼 불안한 심정을 추상적인 위로와 격려의 메시지에 기대었다는 사실이다. 그 책이 감성코드를 자극했다면 이 책은 그에 대한 보완책으로 이성코드를 두드리고 있다고 할까. 위로의 공감대와 연대 후에 이차적 방안으로서 그렇다면 지금 무엇을 해야 하는 지에 관한 대답이 될 것이다. 이지성과 황광우는 구체적인 방법으로 고전을 읽고 나뿐만 아니라 타자와 연대하여 세상을 바꾸기 위해 변화하라고 설득하고 있다. 스펙 쌓기에 온 정신을 집중하고 아르바이트로 몸이 아무리 피곤해도 끈질기게 고전을 시작하라고 부추기고 있다. 그것이 청춘의 사명이자 임무이고 결국 혁명하는 길이라고 선동한다.

 

 

   사실 어찌 보면 피켓 들고 거리에 나가 시위하는 것이 (질 확률이 많은)몸의 혁명이요 책 읽고 앉아서 생각 바꾸는 것이 (이길 확률도 있는)정신혁명이라는 다소 보수적인 뉘앙스로 읽힐 우려도 있다. 그런데 책을 읽어보면 생각은 바뀌고 마음은 움직인다. 또 하나 이 책도 결국 고전읽기를 독려하는 설명서이자 중요 고전의 해설서의 영역에 속한다. 그러므로 이 책을 읽는 것 보다는 당장 도서관으로 달려가 맹자와 플라톤을 집어 드는 것이 더 효율적인 일일지 모른다. 그러나 현실은 각종 자격증을 위한 참고서와 실용서, 그리고 신간 자기 계발서를 외면하고 플라톤의 <향연>이나 한비의 <한비자>를 읽기가 쉬운 일이 아니다. 고전이 필독서라는 것도 알고 읽어서 피가 되고 살이 됨을 잘 알고 있지만 당장 눈앞에 놓인 현실과의 괴리감 때문에 여간해선 큰맘을 먹지 않고서야 인문고전을 펼쳐들기 힘이 드는 것이 우리네 익숙한 모습인 것이다. 그래서 두 사람은 그 두렵고 아득한 마음을 제발 바꾸라고 지금부터라도 늦지 않았으니 시작을 하라고 이런 책을 쓴 것 같다. (제목을 혁명으로 한 것도 환기를 위한 자극이 아닐까) 이런 책이라도 읽지 않으면 고전에 대한 필요성은 늘 잠재적인 채로만 숨어 있어 습관의 관성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책은 공자와 이이, 플라톤, 애덤 스미스와 토마스 모어로 가기 위해 새로 만들어진 징검다리 정도로 생각하면 좋을 듯 하다. 그냥가도 되지만 징검다리는 무엇보다 건너는 재미가 있고 덤으로 추억도 생기기 마련이니까. 그리고 한번쯤 건너가 보고 싶다는 마음이 생기니까.

 

 

 

생존은 성공이 아니라 혁명이다

 

 

 

   요즘 트위터를 하다보면 여기가 무엇을 하기 위해 모여든 곳인지 새삼 의아할 때가 많다. 소셜 네트워크로 인해 사람들이 도대체 누구와 무엇을 소통하는 것인지 너무나 혼란스럽다. 아니 정말로 소통하기 위해서 자신의 감정과 의견을 발설하는 것인지조차도 의심스럽다. 어떠한 사안을 보고 순간적으로 흥분에 휩싸여 감정을 드러낸 글, 즉각적인 피드백이 되어 무차별, 무한정으로 확산되는 글, 부정의 말투가 고스란히 전해지는 다소 경솔해 보이는 글, 이런 글들을 보면서 우리는 지금 어디에다가 누구를 향해 떠들고 있나 생각이 드는 것이다. 어떤 고속도로 휴게소에 위치한 화장실처럼 그때그때 감정의 배설물을 마음대로 적어 놓을 수 있고 마음에 맞으면 다른 사람 것도 마구 가져올 수 있고 시큰둥하면 모른 척해도 되고 잊어버리면 그만이고 그것에 대한 아무런 책임을 지지 않아도 되는 거대한 공동의 장소가 있는 것 같다. 어떤 날은 음향만 없을 뿐이지 어느 시장통에 불난 호떡집처럼 귀가 어지럽고 흡사 학창시절 쉬는 시간 십분 동안 떠들어대는 친구들의 소음처럼 느껴질 때도 있다.

 

 

   소음이 그냥 일반 소음으로 지나가면 될 터인데 어떤 날은 그 소음으로 어이없는 상해를 당한 사람이 등장한다. 엊그제만 해도 어느 음식점에서 종업원과 다툼이 일어난 임산부가 업체 이름을 밝히며 부당한 폭력을 당했다고 글을 올리자 사람들은 갑자기 벌떼처럼 모여들어 그 업체를 비난하기 시작했다. 하루아침에 업체는 상당한 매출피해를 보았고 이미지에 큰 타격을 입었다. 그러나 경찰조사 결과 종업원은 임산부가 주장한 것처럼 배를 발로 걷어차지는 않은 것으로 드러났고 임산부가 괘씸한 마음에 좀 과장해서 업체와 사람을 비난한 것일 뿐이었다. 조사 발표 후 사람들은 약속이나 한 듯이 일제히 임산부를 비난하기 시작했고 엊그제 실컷 욕했던 종업원을 두둔하는 것이었다. 하루 만에 전세는 역전 된 것이다. 만약 우리가 몰랐던 새로운 진실이 드러난다면 내일이면 또 어떻게 될지 누가 알 것인가. 비단 이번뿐이 아니고 어떠한 사안이 수면위로 떠오르면 우리는 바로 누군가를 비난하고 누군가를 옹호하고 이건 옳고 저건 그르다고 단 몇 줄로 자신을 드러낼 수 있는 세상을 살고 있다. 단지 의혹만 제기되었을 뿐인데 하루가 지나면 기정사실화 되어 있고 소문은 진실이 되어 있다. 누군가를 붙잡고 나면 모두 다 이렇게 일이 커질지 몰랐다고 입을 모은다. 그냥 내 생각을 몇 자 적어 올렸을 뿐인데 동시다발적으로 똑같이 적어 올린 수많은 사람들의 같은 생각은 무시무시한 파급력을 가진 여론이 되고 무기가 되고 돌이킬 수 없는 상처가 되는 꼴을 얼마나 보아 왔던가. 이 모든 건 단지 현상과 사건에 실시간으로 반응할 수 있도록 되어 있는 사회적 네트워크만의 문제일까. 원인을 제공한 사건 당사자들의 문제일까. 우리는 단지 정의를 원했고 부조리를 비판했고 범죄자를 비난하고자 했을 뿐인데 왜 그러는 사이 우리가 의도치 않았던 일들이 발생하게 되는 것일까.

 

 

   이 책을 읽고서 우리는 왜 전체를 보지 못하고 일부분을 보는 것이며 왜 길게 보지 못하고 짧게만 보는 것이며 왜 드러난 외양만 보고 숨은 이면의 진실을 보지 못하는 것일까를 생각했다. 왜 상대에 대한 기준은 엄격하면서 나를 향한 기준은 넓고도 얕은 것이며 왜 기다렸다는 듯 무슨 일만 터지면 눈을 부릅뜨고 그 기준을 가지고 여론재판에 힘을 싣기 위해 스탠 바이를 하고 있는 것일까. 물론 누구도 다른 사람에게 일부러 고통을 주려고 혹은 계획적으로 공격을 하려고 그런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모아 놓고 보니 우리는 기득권층에 대한 피해의식을 잘 숨겨 놓고 언제든 보이지 않는 입과 귀가 되어 때가 되면 여지없이 비겁한 방식으로 누군가를 가해하고 있는 꼴이 되었다. 다수의 네티즌, 불안한 청춘, 추락한 중산층, 이른바 2040 세대의 많은 이는 살아남기 위해 다른 이의 몸부림을 보아줄 여력이 없는 듯하다. 냉소와 무관심의 만연. 그러면서도 놀랄만한 집중력과 발빠른 순발력. 광기가 휘몰아치는 순간의 소리없는 아우성. 침묵의 아비규환. 누군가의 절망 혹은 실패, 아니면 항복. 다시 아무 일 없었다는 듯한 표면적인 평온...... 이것이 과연 첨단의 오늘을 살아가기에 스마트한 생존방식인 것일까. 혹시 우리는 생존의 의미를 혼자 살아남는 서바이벌의 의미로만 받아들이고 있는 건 아닐까. 학교나 회사, 국가의 시스템에서 살아남는 것이 생존하는 것이고 그것이 성공하는 삶이라 굳게 믿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래서 기회만 생기면 이때다 하고 결격사유가 되는 사람을 몰아내고자 하는 것은 아닐까...

 

 

   생존을 경쟁과 성공의 프레임으로만 인식하면 반드시 나 아닌 누군가가 나 때문에 죽거나 패배해야한다. 저자는 말한다. 이 시대의 ‘생존’이란 학교, 회사, 국가에 기대어 그 속에서 남을 밀어내어야 하는 일이 아니라 나다운 나, 삶다운 삶의 지향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학교나 회사에서 원하는 나가 아니라 나다운 나로 살기 위해서는 제일먼저 생각을 바꾸어야 한다고. 그들이 제공하는 생각으로 생존하는 시스템은 백날 해봤자 그들의 노예로만 사는 길일 뿐이라고. 변화된 생각으로 자신을 바꾸는 ‘자아혁명’, 그러한 자아가 모여 사회를 바꾸고 시대를 바꾸는 ‘관계혁명’이 완성될 때 비로소 내가 생존하는 혁명이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그렇게 이루어진 혁명을 통해 최종적으로 진짜 인간의 길을 가는 것이라고. 그것은 곧 나만의 고전을 쓰는 고전혁명이 아니겠냐고.

 

 

 

혁명을 하지 않으면 세상은 바뀌지 않는다

 

 

 

   자칫 혁명이라는 단어가 주는 무게감, 급진성에 짓눌려 깃발을 든 투사가 되어야 한다는 뜻으로 받아들여선 안 될 것이다. 이 책에서 말하는 고전은 단지 책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시대를 성찰하여 고민한 사람들과 그들이 이룩한 결과물의 총체를 의미하는 듯하다. 그것들 중에서도 시간과 공간을 뛰어 넘어 면면히 살아남은 아주 질긴 생명체인 듯하다. 그렇다고 나는 이 책이 대단한 진리를 말하고 있다고 생각지는 않는다. 그저 나와 너가 고전을 읽고 그것을 나눔으로 해서 사회, 국가를 바꿀 수 있다고 줄기차게 주장하고 있을 뿐이다. 대단한 혁명의 논리를 펼친 것이 아니라 고전을 읽는 것이 혁명이라고 제시했을 뿐이다. 적어도 이 더럽고 비열하고 냉소적인 세상을, 가진 자만 배부르고 못가진 자만 쪼들리는 이 사회를 바꾸겠다는 생각이 있다면 그 출발점을 고전으로 보고 연결고리를 논리화 한 것에 불과하다. 왜냐하면 고전은 곧 나와 세계를 이해하고 바꾸는 혁명이기 때문에. 혁명이란 세상을 뒤엎는 일이 아니라 생각을 뒤집는 일이고 불가능을 가능으로 바꾸는 것이기 때문에. 새로운 생각으로 새로운 판을 짜려면 혁명 없이는 불가능하기 때문에.

 

 

   저자는 혁명하는 방법으로 고전을 통해 끊임없이 문제를 ‘생각’하고 다시 ‘질문’하고 그러면서 ‘변화’하라고 충고한다. 나아가 내가 읽은 것을 나누고 함께하라 지시한다. 아프고 좌절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경청하며 사회의 문제가 무엇인지 관찰하고 누구의 잘못인지 꿰뚫어 볼 수 있는 시각과 거짓 하는 정치인에게 속지 않고 사람을 판단할 수 있는 지혜를 배우라 가르친다. 고전을 읽는다고 이러한 깨달음이 당장 눈에 띄는 가시적 효과를 가져 오지는 않지만 분명 그 과정을 통해 앞으로 나아간다 주장한다. 수레바퀴는 매번 반복해서 제자리를 돌고 있는 것 같아도 수레는 앞으로 나아가는 것과 같은 이치로.

 

 

   이 책의 후반부엔 나와 사회, 국가를 바라볼 수 있는 시각을 위해 엄선된 동서양 인문고전 10선이 소개되고 있다. 자아혁명에서 시작해 관계혁명에 이르는 과정을 잘 상징하는 느낌이다. 장자의 <장자>는 세상이 절대가 아니라 상대라는 것을 토머스 쿤의 <과학혁명의 구조>는 과학의 역사가 패러다임의 교체에 관한 문제이지 객관성과 고정불변의 진리에 관한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알려주므로 우리에게 관점과 상대주의를 시사한다. 내 기준이 절대적이지 않고 내 판단이 객관적이지 않다는 것을 항상 명심하라는 뜻이다. 토머스 모어의 <유토피아>와 혜능의 <육조단경>은 행복의 이상향이 이 세상에 존재할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는 것이지만 결국 마음에 달려있다고 우리에게 낙원과 행복에 대한 성찰의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 공자의 <논어>와 플라톤의 <국가>에서는 각각 대동사회와 이상국가를 주장하고 있는데 저자는 동서양의 비슷한 결론으로 보고 지금의 우리 시대를 반추해보는 거울로 삼으라 충고한다. 마키아벨리의 <군주론>과 이이의 <성학집요>를 통해 리더의 조건을 정리해 볼 수 있으며 신분계급의 타파를 주장한 박제가의 <북학의>와 애덤스미스의 <국부론>을 통해 부와 경제, 사회를 움직이는 힘의 원천을 밝혀보자고 제안한다. 이 모든 고전은 시대적 상황을 예리하게 포착하고 진보적인 의견을 제시한 샘플들로서 결국 내가 원하는 행복, 내가 역할기능을 수행할 사회, 내가 살아가야 할 국가, 내가 바라는 지도자를 고민하는 방법을 대변하고 있다. 그리하여 궁극에 비판적인 시각을 가진 똑똑한 대중, 현명한 국민이 되는 길을 인도하고 있다.

 

 

   고전을 통한 삶의 길 찾기는 먼 미래의 일이 아니라 지금 당장 시작해야할 시급한 임무였다. 이 책을 징검다리 삼아 다시금 고전 읽기의 중요성과 가치를 되새김질 할 수 있었다. 한권의 고전을 읽었다고 서재에 책을 꽂으며 내면의 시간을 가졌다고 우쭐해 할 것이 아니라 여기서부터 세상을 변화 시킬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그들이 했던 대로 생각하고 질문하고 변화하려 애를 써야겠다. 비록 이념의 혁명가는 못되었지만 고전을 통한 혁명가는 얼마든지 가능한 것이 아닐까 해서이다. 어떻게 하면 상사의 눈에 찍히지 않는 지 방법을 알려주는 책도 좋지만 왜 똑똑한 신하는 군주를 죽이는 것인지에 대한 답을 얻을 수 있는 <한비자>를 집어 들자. 지금 우리 처한 시대가 <유토피아>를 쓴 토마스 모어의 시대와 <목민심서>의 정약용의 시대와 다르지 않음을 인식하고 우리 안에 지니고 있는 본능, 혁명으로 생존하려는 본능을 일깨우도록 하자. 새로 태어나려고 한다면 반드시 하나의 세계를 깨뜨리지 않으면 안된다고 했다. 모든 문제는 우리 자신에게 있고 모든 가능성 역시 우리 자신에게 있는 것이다. 고전에서 각자 롤모델을 찾고 나름의 인생의 가치를 찾고 그 가치에 꿈을 더해보자. 그렇게 반복하여 고전을 인내한 시간의 축적을 통해 한층 더 성숙된 시각으로 내 입에서 나온 말과 내 머리에서 만들어진 글에 책임을 지자. 다시 옛날의 책상과 제쳐둔 서재로 돌아가자. 아주 먼 훗날 마음의 여유가 생기면 그때 집어 들려고 했던 고전을 당당히 빼어내자. 함께 간다는 건 같은 생각, 같은 꿈을 꾸는 것이라 했다. 함께 읽는 것은 변화의 에너지에 가장 확실한 근원이 될 것이다. 지금, 고전을 펼치시라. 그것이 함께 살 길이고 우리의 세상을 우리 힘으로 바꿀 기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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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연 2012-02-29 23: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을 못읽어봐서 댓글 남기는게 조심스럽긴 합니다만.. 목차를 살펴보고 이 글을 읽어봤는데 뭐랄까, 자기계발서와 인문서를 섞은 느낌이 드네요. 사실 저는 계발서 계통은 절대..까지는 아니더라도 거의 절대 안보는 편이라ㅠ '철학하라' 라는 책이 더 끌리기도 하고, '철학하라'에서 다룬 고전과 여기서 다루는 고전이 겹치는 게 있는 것 같은데 이 책만의 어떤 다른 점이 있는지도 좀 궁금하기도 하네요. 사실 이런 이야기들보다ㅋㅋㅋ 잘 지내고 계시나요? 매번 들르면 이 이야기를 꺼낼 정도로 시간이 흘러있네요.

2012-03-01 14:4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03-01 16:1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03-01 18:0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03-01 19:01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