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지 8 - 2부 4권 박경리 대하소설 토지 (마로니에북스) 8
박경리 지음 / 마로니에북스 / 201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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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토지 7, 8권에 걸쳐 흥미진진, 통쾌한 장면은 역시 서희의 지령을 받은 공노인이 임역관, 김환과 손잡고 조준구를 들었다 놨다 농락하는 부분이다. 공노인 이사람, 처음 월선이가 인삼장수 따라갔다고 했을 때 그 인삼장수로 월선이의 삼촌 되는 사람인데, 이때만해도 월선이 떠나 미친놈 된 용이 얘기로 스쳐 지나가는 줄 알았지, 용정이 배경이 되었을 때 이렇게 큰 비중을 차지하는 인물일 줄이야. 이곳저곳 떠돌며 안 해 본 것이 없다는 공노인은 용정에 자리잡고 객주업을 하면서 거간일(중개업)을 하고 있는데, 능력도 좋지만 신망이 두터운 사람, 한마디로 믿을 수 있는 사람이다. 그런데 조준구를 상대할 때는 어찌나 능구렁이 같이 연기를 잘하는지ㅋㅋㅋ 서희를 위해 시작했지만 나중엔 자기가 성 함락하듯이 재미를 붙인다. 하지만 막상 조준구로부터 빼앗겼던 땅을 되찾고 조선으로 돌아갈 일만 남은 서희, 그리고 그를 떠나보낼 공노인은 왠지 마음이 허탈하다. 왜일까. 


그건 실은 중요한 건 땅보다 복수보다 곁에 있는 사랑하는 사람이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 

공노인이 오랫동안 조선을 들락날락하다가 돌아와보니, 아끼는 조카딸 월선이는 오늘내일 하며 병세가 악화되어 있다. 죽을병이라는 진단을 받은 후에도 월선은 공노인의 집으로 오라는 제안을 거절하고 홍이와 함께 머문다. 사랑하는 양엄마가 죽어가는 모습을 지켜보는 홍이의 괴로움은 아버지 용이가 도통 용정에 오지 않아 배가된다. 참다 못한 홍이가 편지를 보내기도 하고, 겨울철 벌목일을 하기 위해 산판으로 떠난 용이를 거기까지 찾아가며 부자의 연을 끊겠다고 협박까지 하지만, 그래도 용이는 산판 일 끝내고 가겠다고 할 뿐이다. 그제야 월선이 죽을병에 걸렸음을 알게 된 영팔이 용이에게 크게 화를 내고 홍이를 따라간다. 어떤 사람(영팔이나 방씨 부인, 홍이)은 용이를 도저히 이해하지 못하겠다 하고, 어떤 사람(길상)은 알 것 같다 한다. 나도 알 것 같았다. 내가 가기 전에는 월선은 죽지 않을 것이다. 일찍 가면 죽음을 앞당기게 될 것이라는 믿음. 

결국 용이는 산판 일을 마치고 월선에게 간다. 월선과 용이의 마지막 이별은, 내가 예상했던 것보다 더 애절하고 슬퍼서, 눈물을 죽죽 흘리며 들었다. 용이 이 나쁜 놈. 용이를 참 많이 욕했지만, 그래도 월선이에 대한 사랑은 진짜였다. 그는 참 한결같고 미련한 인간이었다. 


서희는 어떤가. 서희와 길상의 결혼생활은 서로를 더욱 외롭게 만든 듯하다. 길상은 서희의 조선에 돌아가기 위한 준비과정을 모른 체 하다가, 독립운동가들과 만남을 갖기 시작하더니 결국 어느날 떠나버린다. 이들은 끝까지 서로에게 속내를 터놓지 못한다. 8권의 마지막에서 서희는 마침내 조선으로 떠난다. 떠나기 직전, 첫째 아들 환국이가 사라져 한바탕 소동이 벌어진다. 겨우 환국이를 찾아낸 서희에게, 여섯살 아이는 아버지 없이는 떠나지 않겠다며 소리지른다. 아버지는 곧 뒤따라 오실 거라고, 형님이 없으면 우리 윤국이는 어떡하지, 하고 아이를 달래며 목놓아 우는 서희를 보며, 길상이가 너무너무 미워졌다. 길상이가 최참판댁 머슴살이를 하게 된 것도, 서희와 결혼하게 된 것도 그에게는 족쇄였다는 걸 안다. 서희를 사랑하지만 그녀 곁에서는 그는 영영 자기 자신일 수 없어 괴로워했다는 걸 안다. 그렇지만, 일단 가정을 이루고 아이까지 낳았으면, 떠나더라도 충분한 설명의 노력이 있어야 했다. 환국이가 자기를 찾으리라는 걸 뻔히 알면서, 상처를 주리라는 걸 알면서, 그냥 휙 떠나는 법이 어디 있나. 울음을 터뜨린 환국이를 안으며 서희는 "절대로 당신 용서하지 않겠다"고 마음속으로 뇌까린다. 


<토지>를 이루는 큰 줄기 중 하나였던 용이와 월선이의 사랑은 이렇게 끝을 맺었다.

서희와 길상이의 사랑은 제대로 꽃피워지지도 못한 채 바스라져 간다. 

사랑은 왜이리 어려운가. 이별은 또 왜이리 서러운가. 누군가를 떠나보낸 빈자리, 용이와 서희는 각자의 가슴속 빈자리를 어떻게 감당해 나갈지. 

이제 이들은 고향으로 돌아간다. 



그 빈자리 

                             유하


미루나무 앙상한 가지 끝

방울새 한 마리 앉았다 날아갑니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바로 그 자리

방울새 한 마리 앉았다 날아갑니다

문득 방울새 앉았던 빈자리가

우주의 전부를 밝힐 듯

눈부시게 환합니다


실은, 지극한 떨림으로 누군가를 기다려온 

미루나무 가지의 마음과

단 한 번 내려앉을 그 지극함의 자리를 찾아

전 생애의 숲을 날아온 방울새의 마음이

한데 포개져

저물지 않는 한낮을 이루었기 때문입니다


내 안에도 미세한 떨림을 가진

미루나무 가지 하나 있어

어느 흐린 날, 그대 홀연히 앉았다 날아갔습니다

그대 앉았던 빈자리

이제 기다림도 슬픔도 없습니다

다만 명상처럼 환하고 환할 뿐입니다

먼 훗날 내 몸 사라진 뒤에도

 그 빈자리, 그대 앉았던 환한 기억으로

저 홀로 세상의 한낮을 이루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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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22-10-26 16:5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젊은 시절 읽었을 때 용이와 월선의 사랑은 안타깝더니 지금은 용이놈 용서가 안되고요. 나쁜 놈 ㅠ.ㅠ
길상과 서희의 사랑은 왜 잘 안되는지 이해가 안되더니 지금은 너무 잘 이해가 잘돼서 안타깝습니다. ㅠ.ㅠ

독서괭 2022-10-27 19:57   좋아요 0 | URL
저도 10여년 전 읽었을 때보다 훨씬 여러가지가 보이고 느껴지는 듯합니다. 월선이 너무 불쌍해요 ㅠㅠ 길상과 서희는 고구마 먹는 듯하지만 저도 이해는 가더라고요.. 어휴.. ㅠㅠ 바람돌이님, 감사합니다!

scott 2022-10-27 23:4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전 용이 길상이 전부 별루 ㅎㅎㅎㅎ

그저 서희의 인생이 불쌍하고
서희 집에서 죽도록 일하다 죽은 이들이 불쌍합니다 ㅠ.ㅠ

독서괭 2022-10-28 17:59   좋아요 2 | URL
스콧님, 저도 길상이도 점점 미워지더라고요 ㅠㅠ 불쌍하기도 하고요.
서희 집에서 죽도록 일하다 죽은 이들, 정말 서글프지요. 에효. 인생.. 인간.. 뭔가, 싶네요 ㅠㅠ
 
단순한 열정 (무선) -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99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99
아니 에르노 지음, 최정수 옮김 / 문학동네 / 201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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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내 열정을 일일이 설명하고 싶지는 않다. 그것은 정당화되어야 할 실수나 무질서로 여겨질 수도 있다. 나는 다만 있는 그대로 보여주고 싶을 뿐이다.   - 27쪽 


작가는 어떻게 이렇게 솔직할 수 있었을까. 자기가 겪은 일을 쓰더라도, 소설이라는 형식 뒤에서, 이야기를 변형하고 캐릭터를 꾸며내어 자신을 숨기고 싶은 마음이 없었을까? 나를 온전히 드러내기를 꺼려하는 나로서는, 작가의 용감함이 의아할 만큼 신기하게 느껴진다. 강인하구나. 절절한 사랑이야기로 쓸 수도 있었을 테고, 낭만적이고 비극적인 이별이야기로 쓸 수도 있었을 테고, 도덕적 비난에 대한 변명을 할 수도 있었을 텐데, 작가는 오로지 벌거벗은 몸만을 남겨두었다. 아내가 있는 남자와의 짧고 불규칙한 만남과 격렬한 정사, 그리고 그 시간 사이를 채우는 기다림 속에서 미친 사람처럼 갈구하는 욕망의 비이성... 작가는 '나'의 행동을 합리적이고 타당하게 설명하려고 하지 않는다. 그저 그 시간 동안 그녀가 행한 비이성적 행위들을 있는 그대로 보여준다. 욕망의 민낯이랄까. 허울을 다 벗겨낸 그것을 직시하는 일은 조금은 낯부끄럽게 느껴지지만, 나이든 여성의 성적 욕망을 수치심 없이 꺼내 놓았다는 점에서 통쾌하기도 하다. 내 몸을 들여다보고 진정한 욕망을 꺠닫는 일이 중요하다는 생각 또한 들게 한다. 작품을 읽다 보면, 도덕적 잣대가 내 손에 쥐어져 있음을 느낀다. 작가는 내 손을 슥 밀어내며 이렇게 묻는 듯하다. "당신의 열정은 안녕하십니까?" 나는 아직 내 욕망을 샅샅이 파헤질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았다. 



나는 내 온몸으로 남들과는 다르게 시간을 헤아리며 살았다.

나는 한 사람이 어떤 일에 대해 얼마만큼 솔직하게 말할 수 있는지도 알게 되었다. 숭고하고 치명적이기까지 한 욕망, 위엄 따위는 없는 부재, 다른 사람들이 그랬다면 무분별하다고 생각했을 신념과 행동, 나는 이 모든 것들을 스스럼없이 행했다. 그 사람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나를 세상과 더욱 굳게 맺어주었다.   - 66쪽 


그동안 궁금했고, 한권 사두었지만 읽지 못하고 있던 이 책을 이번 노벨문학상 수상을 계기로 읽게 되어 좋았다. 

하지만 뒤에 실린 해설을 읽으니, <부끄러움>을 비롯하여 '경계인이 느끼는 불편한 자의식'을 그려냈다는 작품들 쪽이 더 궁금해진다. 출신에 대한 수치심이 다시 수치심을 낳는 과정을 그려냈다고 하는데, 얼마나 또 민낯을 드러내 놓았을지. 



'출신 성분과 고향을 버리고 딴 세계에 유배된 망명객'이라는 자의식은 그녀의 작품에서 집요하게 반복된다.(...) 아니 에르노의 작품에는 하층민과 중산층 사이에 낀 경계인이 느끼는 불편한 자의식이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기 때문이다. - 76쪽(해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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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ott 2022-10-21 18:10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에르노 전 작품 추천 하고 싶지만
괭님에게 부끄러움-한 여자-남자의 자리
추천합니다 🤗

독서괭 2022-10-24 13:10   좋아요 2 | URL
스콧님 감사합니다^^ 부끄러움이 많이 궁금하더라고요! 다음번 작품은 이걸로 해야겠어요^^

수이 2022-10-22 00:00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저도 스콧님 말씀에 한표 던져요 독서괭님. 이 작품으로 아니 에르노를 시작했지만 저 역시_ 만일 다른 작품으로 시작했더라면 아니 에르노에 대한 오랜 오해가 쉽사리 사라졌을 거 같아요. 물론 오랜 시간이 흘러서 그런 오해 따위 모두 사라졌지만요. 저도 다시 읽고 있어요.

독서괭 2022-10-24 13:11   좋아요 2 | URL
오 vita님도 <단순한 열정>으로 아니 에르노를 만나셨군요! 오랜 오해라, 궁금하네요. 해설 읽어보니 그전 작품들과 결이 달라 말이 많았던 것 같던데, 다른 결의 작품들을 만나봐야겠어요. 감사합니다^^

새파랑 2022-10-22 10:3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전 아니에르노 책은 두편밖에 안읽었는데 이 책도 읽었는데 ㅋ 뭔가 솔직해서 좋았습니다 ^^ 뭐든 단순한게 좋은거 같아요 ㅋ

독서괭 2022-10-24 13:12   좋아요 2 | URL
ㅎㅎ 새파랑님, 저도 솔직하다는 면에서 좋았습니다. 특히 여성의 욕망을 그렸다는 부분에서요. 저도 더 읽어봐야겠어요. 감사합니다^^
 
단순한 열정 (무선) -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99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99
아니 에르노 지음, 최정수 옮김 / 문학동네 / 201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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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덕적 잣대를 들고 다가가는 사람의 손을 슥 옆으로 밀어내며, 이 책은 이렇게 묻는 듯하다. ˝당신의 열정은 안녕하십니까?˝ 불륜에 대한 가치판단도, 정서적 교감에서 오는 낭만성도, 나이도, 사회적 지위도, 모든 걸 가지치기 하듯 쳐내 버리고 오로지 몸과 몸 사이의 끌림을 써내려간 독특한 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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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쟝쟝 2022-10-22 19:4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몸 정… 난 읽으면 안되겟군….

독서괭 2022-10-24 13:12   좋아요 0 | URL
ㅋㅋㅋ 왜요 ㅋㅋ

얄라알라 2022-12-11 17:4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방금.이 책.다.읽고.다른분들은 이 혼란스런 (독자의) 마음을 어떻게 정리하셨을까 궁금해서 들어 왔는데 놀라워요 괭님 100자평으로 제 혼란 정리됨....넘 멋진100자평!!!^^

독서괭 2022-12-13 18:36   좋아요 0 | URL
앗 얄라님 과찬 감사합니다~^^
 

옥타비아 버틀러 지음, 이수현 옮김 / 비채 / 201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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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환이 필요한 순간, 기력은 떨어진 순간. 아주 재미난 소설을 좀 읽고 싶어진 순간.

책장에 가서 이책 저책을 뒤지다가, 작년에 사두고 잊고 있었던 옥타비아 버틀러의 <킨>이 눈에 들어왔다. 타임슬립 소재, 재미있을 것 같은데, 하고 펼쳐서 두어장 읽었다가, 그대로 선 채 절반을 읽고 말았다(총 514쪽짜리 책). 그만 읽어야 하는 시간인데 조금만 조금만 하며 읽다가 겨우 덮고, 내내 궁금해하다가 오늘 끝장을 냈다! 

1976년을 살던 스물여섯 살의 흑인 여성 다나가 1819년으로, 그것도 노예제가 극심하던 남부로 타임슬립 하는 이야기, 정도는 알고 있었는데, 한번 가서 있다가 돌아오고 끝나는 게 아니라 여러 차례 왔다갔다 하는 이야기인 줄은 몰랐다. 게다가 백인인 남편 케빈까지 같이 타임슬립하는 일까지?! 
가난할지언정 꿈이 있고 자기 집이 있고 자유로운 시민으로 지내던 사람이 이제는 '검둥이', '그거', '저년'이라고 불리면서 툭하면 채찍질, 강간, 살해, 노예매매의 위협을 받게 되다니. 상상만 해도 몸서리쳐 지는 일이 아닌가(<시간 여행자의 아내>의 주인공은 타임슬립 할 때 딱 몸뚱이만 가버려서 고생하는데, 그나마 남자라 다행이지만, 이 책은 여성인 주인공에게 그렇게까지 잔혹하지는 않았다..). 흑인으로서, 그리고 작가로서 많은 책을 읽었고 흑인들의 참담한 역사에 대해 잘 알고 있는 다나는, 두번째 타임슬립에서 자신이 이동한 곳의 연도와 지명을 알아내고 어떤 처지에 처하게 될지 직감한다. 그러나 책으로 보아 알던 것과 직접 겪는 것이 어찌 같을까. 그녀는 자기의 원래 자리를, 본래의 자기 모습을 지키고 '그곳'- 1819년의 메릴랜드주 와일린씨(농장주) 저택과 거리감을 유지하려고 애쓰지만, 머무는 기간이 길어질수록 어려워진다. 

다나가 타임슬립 하는 원인은 루퍼스 와일린이다. 농장주의 아들인 루퍼스가 위험에 처하게 되면 다나는 타임슬립으로 그 곁에 끌려 온다. 처음 만난 것은 다섯 살 무렵. 두번째 만났을 때 들은 정보로 다나는 그가 자기의 먼 조상일 수도 있음을 깨닫는다. 백인 조상이 있었음을 몰랐던 다나. 어쨌든 그가 자식을 낳기 전에 죽으면 후손인 자신은 사라지게 되므로, 좋든 싫은 그의 목숨을 계속 구해줄 수밖에 없다.


나는 루퍼스에게 최악의 수호자였다. 흑인을 열등한 인간으로 보는 사회에서 흑인으로서 그를 지켜야 했고, 여자를 영원히 자라지 못하는 어린아이로 여기는 사회에서 여자로서 그를 지켜야 했다. 내 몸 하나 지키기도 벅찬 곳에서 말이다. 그래도 나는 최대한 루퍼스를 도울 것이다. - P124

"이건 도박이야. 젠장, 당신은 역사를 상대로 도박을 하고 있다고."
"달리 어쩌겠어? 난 시도해볼 수밖에 없어, 케빈, 그리고 나중에 살아남기 위해 지금 사소한 위험을 감수하고 별것 아닌 모욕을 감내해야 한다면, 그 정도는 하겠어."
 - P154


루퍼스는 다나가 미래에서 왔다는 사실을, 자신을 구하기 위해 온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이들의 관계는 묘하게 흘러가는데, 농장주의 아들인 루퍼스와 흑인 다나는 그 시대에 평등할 수 없다. 서로에게 나름의 애정과 신뢰를 가지고 있지만, 흑인을 인간으로 취급하지 않는 곳에서, 다나는 자신 역시 마찬가지 취급을 받는 존재임을 강제로 인지시키는 사건들을 겪게 된다. 
그녀는 싸우고, 주변 흑인들을 돕고, 루퍼스가 자기 아버지처럼 되지 않게 하려고 애쓰지만, 일보의 희망과 이보의 절망이 반복된다. 잔혹한 일들. 자기 아이가 노예상에 팔려가는 모습을 보는 것, 주인이나 감독관 침대에 불려 다니다가 버림받는 것, 도망갔다가 잡혀와 귀가 잘리고 죽도록 맞는 것... 이런 일들을 목도하는 것도 고통스럽지만, 그녀 자신에게 벌어지는 육체적 고통은 직접적으로 그녀의 정신에 타격을 입힌다. 채찍질을 당하고 나면 자기도 모르게 움츠러들고, 어느새 순종적인 노예로서 행동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


나는 눈을 감고, 마음의 눈으로 노예상인 놀이를 하고 있는 아이들을 다시 보았다.
"그래서 수월하다는 사실이 무섭게 느껴졌구나. 이제 이유를 알았어."
"무슨 말이야?"
"수월함 말이야. 우리나, 아이들이나……… 노예제도를 받아들이도록 훈련시키기가 얼마나 수월한지 전에는 몰랐어."
 - P191


이 소설은 정말 재미있다. 두꺼운데 비해 글자 수가 많지 않고 문장이 간결하고 속도감이 있어 훅훅 읽을 수 있다. 그렇다고 전하는 메시지가 결코 가볍지 않다. 인간이 인간을 노예로 '만들어내는 것', 노예제가 어떻게 그렇게 오래 지속될 수 있었는지를 뼈아프게 진술한다. 그러면서도 흑인도 백인도, 노예이건 아니건 사람 사이에는 감정이 교류되므로 관계가 늘 일방적일 수 없다는 점을 섬세하게 그려낸다. 결말이 많이 궁금했는데, 꽤 만족스럽다. 

노예제를 생각하니 <빌러비드>가 생각났고, <가부장제의 창조>의 이 구절이 다시 떠올랐다..


다른 인간존재를 잔인하게 대하고 그/그녀에게 자신의 의지에 반하여 노동을 하도록 강제하는 것보다 한수 높은 중요한 발명은, 지배당하는 집단을 지배하는 집단과 완전히 다른 집단으로 지정할 수 있는 가능성이다. 물론 그런 차이는 노예가 될 사람들이 타지방 부족구성원, 말 그대로 ‘타인‘일 때 가장 명백하다. 그러나 그 개념을 확장하고 노예화된 사람들(the enslaved)을 어떤 면에서 인간이 아닌 다른 것, 노예로 만들기 위해서, 남성들은 그런 지정이 실제로 효과를 발휘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음에 틀림없다. 정신적 구성물은 대체로 어떤 현실 속의 모형들에서 나오며, 과거경험을 새롭게 정렬하는 것으로 구성된다. 그 경험은 노예제가 발명되기 이전에 남성들에게 주어졌던 것인데, 그것은 바로 자기 집단의 여성들을 종속시켰던 경험이다. - <가부장제의 창조>, P138


오늘 혼밥하는 날이라 사진을 찍어보기로. 얼마전 책나무님 서재에서 본 써브웨이가 떠올라서 주문했는데, 예쁜 접시에 담은 책나무님 샌드위치는 참 맛나 보였는데 내건.. 쩝.. 그래도 맛있었다. 
첫 사진은 <디지털 시대의 페미니즘>인데 사실은 사진만 찍고 <킨>으로 바꿨다..ㅋㅋㅋ 디지털 페미니즘은 내일 읽을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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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lstaff 2022-09-28 18:26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으.... 첫번째 빵 사진, 으....., 으...... 이상하게 생겼어요. ㅠㅠ
혹시 제가 변탠가요? ㅠㅠㅠㅠㅠㅠ

독서괭 2022-09-28 18:29   좋아요 2 | URL
그렇게 말씀하시니 그렇게 보이기도 합니다만..ㅋㅋㅋ 제가 일부러 그런 각도로 찍은 건 아닙니다.. ㅋㅋㅋ

scott 2022-09-29 11:05   좋아요 2 | URL
골드문트님 댓글 먼저 읽고 보니
그리 보입니다 ^^

공쟝쟝 2022-10-01 23:10   좋아요 3 | URL
변태문트ㅋㅋㅋㅋㅋ 젓갈부텈ㅋㅋㅋㅋㅋ 왜이러쌔요!!!!

단발머리 2022-09-28 19:3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책 너무 좋아했고, 근데 무서웠고, 슬펐고 놀라웠고 그랬습니다.
독서괭님 리뷰 읽는데 그 때가 새록새록 떠올라서 좋고 무섭고 막 그랬어요. 저는 <블러드차일드> 읽어봤고요 (매운맛), <씨앗을 뿌리는 사람의 우화>는 아직 읽기 전입니다. 서브웨이랑 책, 너무 잘 어울리네요. 지금 못 내려가는데.... 저는 어쩌죠? ㅋㅋㅋㅋㅋㅋㅋㅋㅋ

독서괭 2022-09-28 21:04   좋아요 1 | URL
단발님도 좋아하시는 책이군요! 작가가 꽤나 밀어붙여서 무섭고 주인공 불쌍하고 ㅠㅠ 글 빨리 마무리 하느라 깜박 안 썼는데 원래 세계인 1976년에서도 여전히 차별은 계속되고 있다는 게 제일 씁쓸한 부분이었어요..ㅠㅠ
<블러드차일드> 많이 매운가요? 궁금하네요!
저녁 맛있게 드셨죠?^^

책읽는나무 2022-09-28 20:1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아니...얼마나 재밌으면 서서 절반을 읽으시는??
버틀러...버틀러...✍️✍️
놀라운 책이군요.
서브웨이 샌드위치는 이건 무슨 맛이에요?
오이하고 야채가 엄청 많네요??
이렇게 야채값이 비싼 때에??
야채가 많아서 먹음직스러워 보입니다.
저녁 먹었는데도...^^
여성주의 책 읽을 때는 역시 서브웨이!!!
👍👍

독서괭 2022-09-28 21:07   좋아요 2 | URL
정말 홀린듯이 읽었네요. 같은 버틀러지만 주디스와 달리 옥타비아는 쉽고 재밌습니다 ㅋㅋㅋㅋ
써브웨이는 이탈리안 비엘티입니다! 야채 하나도 안 뺀 거라 그득해요. 짭쪼롬하니 맛있네여 ㅎㅎ
여성주의 책에는 써브웨이ㅋㅋㅋㅋㅋㅋㅋ 좋은 조합입니다. 혼밥하며 책 읽기 넘 좋아요~^^

다락방 2022-09-29 09:35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아 저 진지하게 잘 읽고 있다가 서브웨이 샌드위치 사진 보고 빵터졌네요. 첫번째 사진 정말이지 뭔가 ㅋㅋㅋㅋㅋㅋㅋㅋ 독서괭님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진지한 리뷰에 웃어서 죄송합니다. ㅋㅋㅋ
그나저나 제가 어제 자기전에 독서괭 님의 이 리뷰가 올라온 것만 확인했거든요? 제가 자기 전에는 폰을 안보려고 노력하다보니 제목만 보고 글은 안읽었는데 별 다섯인걸 확인했어요. 그래서!! 책장으로 가서 이 책을 꺼내가지고 왔습니다. 지금 읽고 있는 책 다 읽으면 이 책을 읽도록 하겠습니다!!

독서괭 2022-09-29 09:43   좋아요 1 | URL
역시 준비된 독서인 다락방님 ㅋㅋㅋ 책장에 다 준비되어 있군요 ㅋㅋ 비타님 단발님도 좋아하신다는 말씀 보고 예상은 했습니다 ㅋ 분명 다락방님도 좋아하실 듯요!
써브웨이 사진은.. 괜히 올렸나 싶었는데.. 저의 게으름을 그대로 보여주는 날것 그대로의.. 큼;;

잠자냥 2022-09-29 10:27   좋아요 2 | URL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아니 난 아무리 봐도 이상한 거 모르겠는데요? 서브웨이 먹고 싶다. 서브웨이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다락방 2022-09-29 10:31   좋아요 3 | URL
저 서브웨이 사진 이상해서 빵터진게 아니라 날것 그대로여서 빵터진거였어요. 제가 서브웨이 샌드위치 먹으려고 포장 벗기면 딱!! 바로 저 상태거든요. 왜냐하면 저는 야채도 빠짐없이 죄다 넣기 땜시롱 포장 풀자마자 야채들이 후두둑 떨어지고 난리가 나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독서괭 2022-09-29 10:41   좋아요 1 | URL
네.. 써브웨이 광고용으론 절대 좋지 않을 날것 ㅋㅋㅋㅋ

mini74 2022-09-29 13:0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도 킨 넘 재미있게 봤어요. 흑인여성의 과거로의 시간여행 으악!! 악몽이죠 ~ 빵사진 ㅎㅎ 사진 참 못 찍는 저로서는 반갑고 정겨운데요 ㅎㅎ

독서괭 2022-09-29 16:11   좋아요 1 | URL
미니님도 재미있게 보셨군요^^ 타임슬립 작품 중 조금도, 1도 부럽지 않은 경우 같아요 ㅎㅎ
빵사진으로 여러분께 즐거움(?)과 놀라움(??)을 드린 것 같아 기쁩니다(?)

수이 2022-09-29 19:0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독서괭님의 킨 리뷰 읽으니 얼른 다시 읽고 싶다 다시 읽고 싶다, 이러고 있어요. 써브웨이 샌드위치 사진이............. 너무 사실적이라 좀 당황했습니다 ㅋㅋㅋㅋ

독서괭 2022-09-29 20:00   좋아요 0 | URL
다시 읽으셔도 재미있겠죠?^^
정말 가감없이 있는 그대로를 찍는.. 최신트렌드라고 우겨봅니다(뭔소리..) ㅋㅋㅋ

2022-09-29 19:4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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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9-29 19:5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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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9-29 20:0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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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9-29 20:2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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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9-29 21:3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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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9-29 21:5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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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9-29 21:5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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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9-29 22:3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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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9-29 23:0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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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9-29 23:0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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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9-29 23:1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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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쟝쟝 2022-10-01 23:1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사진 ㅋㅋㅋㅋㅋㅋ 진짜 대충 찍었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나도 대충찍는 뎈ㅋㅋㅋㅋㅋㅋ 이정도는 아니얔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그리고 킨 저도 읽다가 말았어요! 재밋었는데 ㅋㅋㅋㅋㅋ 왜 말았지??? 언제 날잡고 머리식힐 겸 킨 읽어야겠어요ㅋㅋㅋ

독서괭 2022-10-04 12:3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쟝쟝님도 대충 찍어요? ㅋㅋㅋ 화면 편집하시는 거 보면 능력자인데 뭘~ 전 능력도 없고 성의도 없;; 성의라도 좀 가져야겠어요. 넘 날것이라 부끄럽네유 ㅠㅠ
킨 왜 읽다 마셨죠?? 엄청 재밌는데?? 한번 다시 잡아보세요^^

은하수 2022-10-19 10:2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책 기대하지 않고 봤다가 정말 깜짝 놀란 책이예요
너무너무 흥미진진 재밌게 읽었답니다. 사실 제목의 뜻도 모르겠고 썩 끌리는 제목은 아니잖아요 근데 주인공이 절대적으로 불리한 타임슬립이라니... 놀라운 사건의 연속이 책에서 손을 놓지 못하게 하죠 샌드위치 먹으며 책 읽기 시전하게 합니다.. 아주 바람직해 보여 부럽네요
우리동네는 저 매장이 없어요 ㅠ

독서괭 2022-10-19 12:22   좋아요 0 | URL
저도 제목 뜻도 모르고 읽고 나중에야 찾아보고 알았어요^^; 북플에서 누가 추천해서 샀을 것 같은데 기억도 안 나고 ㅎㅎ 그런데 막상 시작하니 손을 놓을 수가 없었어요!
감사합니다 mokl님, 이보다 더 맛있는 샌드위치 드시며 책 읽으시길요^^
 

옥타비아 버틀러 지음, 이수현 옮김 / 비채 / 2016년 5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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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예제가 어떻게 사람을 노예로 “만들어내는지” SF의 형식을 빌려 고발하면서, 노예든 아니든 흑인이든 백인이든 인간과 인간 사이에는 어쩔 수 없는 감정의 작동이 있음을 잘 보여주는 소설. 게다가 눈을 뗄 수 없을 만큼 흥미진진하다! 내내 긴장하며 끊지 못하고 단숨에 읽어내린 책은 오랜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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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ott 2022-09-28 14:1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이작품 정말 좋아합니다😍

독서괭 2022-09-28 18:25   좋아요 2 | URL
스콧님~ 진작 읽을 걸 그랬어요!^^

수이 2022-09-28 15:2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허허허허 끝장이죠? 저도 단번에 끝냈어요 이 소설. 지적 허영심도 느껴지지 않아서 정말 읽는 동안에 뇌가 투명해지더라구요. 저도 다시 읽어봐야겠어요.

독서괭 2022-09-28 18:25   좋아요 1 | URL
아, 비타님, 정말 넘 재밌었어요. 작년에 샀을 때 바로 읽었으면 <빌러비드>랑 비슷한 시기에 읽어 더 재미났을 것도 같은데~ 왜 처박아 놨었나 몰라요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