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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지 8 - 2부 4권 ㅣ 박경리 대하소설 토지 (마로니에북스) 8
박경리 지음 / 마로니에북스 / 2012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토지 7, 8권에 걸쳐 흥미진진, 통쾌한 장면은 역시 서희의 지령을 받은 공노인이 임역관, 김환과 손잡고 조준구를 들었다 놨다 농락하는 부분이다. 공노인 이사람, 처음 월선이가 인삼장수 따라갔다고 했을 때 그 인삼장수로 월선이의 삼촌 되는 사람인데, 이때만해도 월선이 떠나 미친놈 된 용이 얘기로 스쳐 지나가는 줄 알았지, 용정이 배경이 되었을 때 이렇게 큰 비중을 차지하는 인물일 줄이야. 이곳저곳 떠돌며 안 해 본 것이 없다는 공노인은 용정에 자리잡고 객주업을 하면서 거간일(중개업)을 하고 있는데, 능력도 좋지만 신망이 두터운 사람, 한마디로 믿을 수 있는 사람이다. 그런데 조준구를 상대할 때는 어찌나 능구렁이 같이 연기를 잘하는지ㅋㅋㅋ 서희를 위해 시작했지만 나중엔 자기가 성 함락하듯이 재미를 붙인다. 하지만 막상 조준구로부터 빼앗겼던 땅을 되찾고 조선으로 돌아갈 일만 남은 서희, 그리고 그를 떠나보낼 공노인은 왠지 마음이 허탈하다. 왜일까.
그건 실은 중요한 건 땅보다 복수보다 곁에 있는 사랑하는 사람이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
공노인이 오랫동안 조선을 들락날락하다가 돌아와보니, 아끼는 조카딸 월선이는 오늘내일 하며 병세가 악화되어 있다. 죽을병이라는 진단을 받은 후에도 월선은 공노인의 집으로 오라는 제안을 거절하고 홍이와 함께 머문다. 사랑하는 양엄마가 죽어가는 모습을 지켜보는 홍이의 괴로움은 아버지 용이가 도통 용정에 오지 않아 배가된다. 참다 못한 홍이가 편지를 보내기도 하고, 겨울철 벌목일을 하기 위해 산판으로 떠난 용이를 거기까지 찾아가며 부자의 연을 끊겠다고 협박까지 하지만, 그래도 용이는 산판 일 끝내고 가겠다고 할 뿐이다. 그제야 월선이 죽을병에 걸렸음을 알게 된 영팔이 용이에게 크게 화를 내고 홍이를 따라간다. 어떤 사람(영팔이나 방씨 부인, 홍이)은 용이를 도저히 이해하지 못하겠다 하고, 어떤 사람(길상)은 알 것 같다 한다. 나도 알 것 같았다. 내가 가기 전에는 월선은 죽지 않을 것이다. 일찍 가면 죽음을 앞당기게 될 것이라는 믿음.
결국 용이는 산판 일을 마치고 월선에게 간다. 월선과 용이의 마지막 이별은, 내가 예상했던 것보다 더 애절하고 슬퍼서, 눈물을 죽죽 흘리며 들었다. 용이 이 나쁜 놈. 용이를 참 많이 욕했지만, 그래도 월선이에 대한 사랑은 진짜였다. 그는 참 한결같고 미련한 인간이었다.
서희는 어떤가. 서희와 길상의 결혼생활은 서로를 더욱 외롭게 만든 듯하다. 길상은 서희의 조선에 돌아가기 위한 준비과정을 모른 체 하다가, 독립운동가들과 만남을 갖기 시작하더니 결국 어느날 떠나버린다. 이들은 끝까지 서로에게 속내를 터놓지 못한다. 8권의 마지막에서 서희는 마침내 조선으로 떠난다. 떠나기 직전, 첫째 아들 환국이가 사라져 한바탕 소동이 벌어진다. 겨우 환국이를 찾아낸 서희에게, 여섯살 아이는 아버지 없이는 떠나지 않겠다며 소리지른다. 아버지는 곧 뒤따라 오실 거라고, 형님이 없으면 우리 윤국이는 어떡하지, 하고 아이를 달래며 목놓아 우는 서희를 보며, 길상이가 너무너무 미워졌다. 길상이가 최참판댁 머슴살이를 하게 된 것도, 서희와 결혼하게 된 것도 그에게는 족쇄였다는 걸 안다. 서희를 사랑하지만 그녀 곁에서는 그는 영영 자기 자신일 수 없어 괴로워했다는 걸 안다. 그렇지만, 일단 가정을 이루고 아이까지 낳았으면, 떠나더라도 충분한 설명의 노력이 있어야 했다. 환국이가 자기를 찾으리라는 걸 뻔히 알면서, 상처를 주리라는 걸 알면서, 그냥 휙 떠나는 법이 어디 있나. 울음을 터뜨린 환국이를 안으며 서희는 "절대로 당신 용서하지 않겠다"고 마음속으로 뇌까린다.
<토지>를 이루는 큰 줄기 중 하나였던 용이와 월선이의 사랑은 이렇게 끝을 맺었다.
서희와 길상이의 사랑은 제대로 꽃피워지지도 못한 채 바스라져 간다.
사랑은 왜이리 어려운가. 이별은 또 왜이리 서러운가. 누군가를 떠나보낸 빈자리, 용이와 서희는 각자의 가슴속 빈자리를 어떻게 감당해 나갈지.
이제 이들은 고향으로 돌아간다.
그 빈자리
유하
미루나무 앙상한 가지 끝
방울새 한 마리 앉았다 날아갑니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바로 그 자리
방울새 한 마리 앉았다 날아갑니다
문득 방울새 앉았던 빈자리가
우주의 전부를 밝힐 듯
눈부시게 환합니다
실은, 지극한 떨림으로 누군가를 기다려온
미루나무 가지의 마음과
단 한 번 내려앉을 그 지극함의 자리를 찾아
전 생애의 숲을 날아온 방울새의 마음이
한데 포개져
저물지 않는 한낮을 이루었기 때문입니다
내 안에도 미세한 떨림을 가진
미루나무 가지 하나 있어
어느 흐린 날, 그대 홀연히 앉았다 날아갔습니다
그대 앉았던 빈자리
이제 기다림도 슬픔도 없습니다
다만 명상처럼 환하고 환할 뿐입니다
먼 훗날 내 몸 사라진 뒤에도
그 빈자리, 그대 앉았던 환한 기억으로
저 홀로 세상의 한낮을 이루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