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픔이여 안녕 범우문고 87
F.사강 지음, 이정림 옮김 / 범우사 / 201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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쎄실과 아버지가 속한 즉흥적이고 자유분방한 세계와 안느가 속한 계획적이고 질서정연한 세계의 충돌. 쎄실은 안느의 세계를 파괴하는 데 성공하지만, 쎄실의 세계에도 균열이 생긴다. 이전에는 알지 못했던 슬픔이라는 감정의 틈입으로 인해..
옛날 번역을 그대로 계속 찍어내는 모양. 아쉽다.

분발해서 아버지와 예전의 우리의 생활을 반드시 되찾아야만 한다. 나로서는 방금 끝난 그 즐겁고도 일관성이 없던 그 2년이 갑자기 얼마나 매력적인 것으로 장식되었었는지 모른다. 언젠가 그렇게도 빨리 외면해버린 그 2년이...... 생각하는 자유, 부당한 것을 생각하는 자유, 도를 지나쳐 생각하는 자유, 나 자신이 내 인생을 선택하는 자유 그리고 나 자신을 스스로 선택하는 자유.
나는 ‘자기 자신으로 존재한다‘ 라는 말은 할 수 없다. 왜냐하면 형상을 만들 수 있는 반죽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주형(鑄型)을 거부하는 반죽이었다. -8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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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탈레온과 특별봉사대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4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 지음, 송병선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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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 공창제 도입 여부가 논의된 적이 있었다(지금도 성매매합법화 논의는 계속되고 있지만, 활발하지는 않은 것 같다).

"성을 사고 파는 일을 허용하는 것이 옳은가?"

이렇게 도덕적, 윤리적으로 접근한다면, "옳다"고 대답할 사람은 얼마 없을 것이다. 그러나

"성을 사고 파는 일을 허용하는 것이 필요한가?"

라는 실용적, 정책적 측면으로 접근한다면, "필요하다"고 대답하는 사람이 꽤 있는 것 같다. 실제로 허용하고 있는 나라들도 있고.


"필요하다"는 것은 성을 파는 쪽이 아니라 성을 사는 쪽의 입장일 것이다. 그 저변에는 "(남성의)성적 욕구는 해소되어야 한다. 그렇지 못할 경우 해소되지 못한 욕구는 폭력적으로 발현되어 사회적 문제를 일으킨다"는 주장이 깔려 있는 것 같다. 그리고 성매매합법화를 주장하는 측에서 중요한 논거로 드는 것은 장애인이나 연애, 결혼 등을 통한 욕구 해소가 여건상 어려운 사람(남성)들의 욕구도 존중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장애인 등을 들먹이는 것은 매우 가식적인 주장이 아닌가? 현재 성을 매수하고 있는 남성들 중 장애인이거나 연애(오로지 성적 목적을 위한 파트너와의 관계를 포함), 결혼 등을 하지 못하여 성매매에 의지할 수 밖에 없는 경우가 얼마나 될까?

"(남성의) 성적 욕구는 해소되어야 한다. 그렇지 못할 경우..."라는 생각은 성적 욕구 해소의 대상이 되는 여성(물론 동성애자의 경우에는 남성을 포함)을 객체화, 사물화 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남성에 대한 비하가 아닌가? 인간을 짐승과 구별해 주는 것이 이성일진대, 욕구를 이성으로써 제약하지 못한다면 짐승과 다를 것이 무언가. 여기에서 (남성의)라는 단서를 단 것은 여성의 성욕이 남성에 비해 약해서가 아니라, 실제로 여러 가지 이유에서 여성이 남성의 성을 매수하는 것은 그 반대에 비해 현저히 적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최근 유부녀들의 호스트바 출입 등이 기사에 실려 화제가 되기도 했는데- 이를 보며 어떤 이는 여자들도 똑같아, 서로서로 성매매 허용하는 게 어때?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그만큼 화제가 된 이유 자체가 애초에 그것이 드문 일이기 때문이다. 여성의 성매수가 적을 수밖에 없는 이유를 세 가지 들어보자면 이렇다.

 1. 임신가능성에 대한 부담- 남성은 여성의 성을 매수하면서 이 부분을 전혀 걱정할 필요가 없다. 성매매 여성이 알아서 처리할 일이니까. 그러나 여성이 남성의 성을 매수할 경우 아무리 조심해도 임신의 가능성은 존재하며, 뒷감당은 여성의 몫이다.

2. 성병의 우려 - 남성에 비해 여성이 성병에 걸릴 경우 타격이 더 크다. 특히 출산을 원할 경우.

3. 공개될 경우의 타격에 대한 우려 - 성매매 사실이 알려졌을 때 여성이 남성보다 큰 타격을 입는다. 가정의 파탄, 주변의 손가락질. 이런 점을 이용해 상대 남성이 협박을 가할 가능성도 있다.   


또한 공창제를 허용한다고 해서 문제(어떤 문제?)가 해결되리라는 생각은 근거가 빈약해 보인다. 성관계를 오랫동안 갖지 못한다고 해서 폭력성이 발현되거나 성범죄를 저지르게 될까? 애초에 내재된 폭력성을 가진 사람은 성관계를 많이 가지든 오랫동안 갖지 못하든 범죄를 저지를 수 있다. 성관계를 많이 가지는 사람도 애인에 대한 폭력, 변태적 성행위 요구, 거절당한 변태적 성행위 욕구의 충족을 위한 성매매나 강간시도 등으로 나아갈 수 있는 것이다.

한편으로 공창제의 장점으로 꼽히는 것이 성을 파는 쪽(주로 여성)의 복지 향상 - 건강을 관리할 수 있고 포주의 횡포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등 - 인데, 분명 그런 장점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현대의 성매매는 예전과는 그 양상이 다른데, 돈 때문에 포주에게 묶여 열악한 상황에서 성매매로 연명할 수 밖에 없는 경우도 물론 있지만, 먹고 살기 위해서가 아니라 사치를 위해서 또는 다른 일을 할 수 있음에도 비교적 쉽게 돈을 벌기 위해서 인터넷 등을 통해 (포주 없이) 자발적으로 성을 파는 사람들도 많으며, 이런 사람들의 경우 굳이 자신을 드러내며 공창에 편입되려고 할지 의문이다. 공창이 생기더라도 음성적인 성매매는 근절되지 않을 거라는 얘기다. 공창에서는 성매수자들의 성병 감염 여부를 확인할테고, 피임을 시킬 테고, 변태적 성행위는 금지할 테고, 성매도자들의 나이를 제한할 테고.. 등등의 많은 제약이 따를 텐데 과연 성매수자들이 그걸 원할까? 달리 방법이 없다면 모를까. 

또 성매도자가 공창에 있을 때는 나름의 복지를 누릴 수 있을지 몰라도, 공창이 정년이나 연금을 보장해주지 않는 이상- 정년은 과연 몇 살..? - 그 후의 그들의 삶은 어찌되는가. 다른 일을 할 수 있을까? 가정을 이룰 수 있을까? 결국 음성적 성매매의 세계로 편입되지 않을까?


얘기가 너무 길어졌다... 어쨌든 그 모든 의문을 제쳐놓더라도, 공창제를 포함한 성매매합법화에 반대하는 가장 근본적인 이유가 있다.

공창제를 도입한다는 것은 "(남성의)성적 욕구는 해소되어야 한다"는 명제 뒤에 "이를 위해 국가는 (여성의)성을 도구로 삼을 수 있다"는 결론을 천명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국가가 현실적으로 완전 근절이 어려운 성매매를 암묵적으로 방치하는 것과 공개적으로 합법을 선언하는 것은 차원이 다른 것이다. 이는 성의 존엄과 가치를 국가가 무시하겠다는 것이고, 일부일처제를 기초로 하여 부부간의 정조의무와 가정의 평화를 꾀하는 국가정책과도 모순된다.


공창제 얘기를 한참 한 이유는 <판탈레온과 특별봉사대>가 유사한 이야기를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처음 제목을 봤을 때는 무슨 판타지소설인 줄 알았다.. 판탈레온이 만들어 낸 특별봉사대를 판탈레온의 이름을 따서 '판타랜드'라고 부르게 되는 대목을 보면, 풍자적인 느낌을 주기 위해 작가가 의도한 것 같기도 하다.

소설의 배경이 된 1950년대의 페루는 군부에 의한 독재정치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군에서는 아마존에서 복무하는 군인들이 민간에서 성범죄를 저지르는 일이 빈번하자, 이를 해결하기 위해 판탈레온 대위를 보내 비밀리에 군인들을 위한 '특별봉사대'를 조직하도록 지시한다. 지극히 성실하기만 했던 판탈레온은 처음에는 이 임무에 괴로워하지만 특유의 책임감과 뛰어난 행정능력으로 '특별봉사대'를 훌륭하게 조직해낸다. 그러나 특별봉사대의 봉사를 원하는 자들이 계속 늘어나면서 봉사대의 규모는 점점 커져가고, 비밀은 폭로되는데...

소설의 구성과 서술 방식이 특이하다. 서술과 대화로 이루어진 부분도 있지만, 군 내부 보고서, 라디오방송, 신문기사, 편지 등의 다양한 형식이 동원된다. 서술과 대화로 이루어진 부분도 마치 여러 가지 화면을 동시에 보고 있는 것처럼 장면 전환이 예고 없이 빠르게 일어나서 처음엔 조금 헷갈린다.

판탈레온의 성공에서 몰락까지가 들불처럼 퍼져나가는 이단의 지도자 '프란시스코 형제'의 성공에서 죽음까지의 과정과 궤를 같이 하는 것, 군의 사기를 높이고 범죄를 예방하려는 목적에서 시작된 기획이 군 장병들의 욕망 충족을 위한 도구로 변질되어 가는 것, 군 장성들의 가식과 책임 떠넘기기, 특별봉사대가 성매매 여성들에게 미친 영향까지... 생각해 볼 만한 부분이 많지만 공창제 얘기를 너무 길게 해서 그만 써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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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17-05-11 15: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주 오래 전에 처음으로 읽은 요사의 책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바로 팬이 되어 그의 전작에 도전했었지요.
리뷰 잘 읽고 갑니다.

독서괭 2017-05-11 18:03   좋아요 0 | URL
저도 다른 작품에도 도전해 보고 싶네요^^
 
새로운 이름의 이야기 나폴리 4부작 2
엘레나 페란테 지음, 김지우 옮김 / 한길사 / 201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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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동네로 이사할 때마다 주변 도서관을 한번씩 찾아가곤 하지만 책을 빌리는 일은 거의 없었다. 새 책의 깨끗한 종이를 문질문질하는 느낌이 좋고, 반납기한에 쫓기는 느낌은 싫어서.

그런데 얼마 전 이 동네에서 처음 간 도서관에서 절판된 크리스토퍼 이셔우드의 <싱글맨>을 발견했고, 두께가 얇고 상태도 좋아서 오랜만에 빌려 보았다. <싱글맨>을 반납하러 갈 때는 다른 책을 또 빌릴 생각은 전혀 없었는데... 신착도서 코너를 훑어보다가 나폴리 4부작 중 두번째, <새로운 이름의 이야기>를 발견. 신착도서이니만큼 반짝반짝 새 책인데다 자리에 앉아 잠시 읽다보니 빌리지 않을 수 없었다. 시리즈 첫 번째인 <나의 눈부신 친구>가 우리나라 드라마처럼 극적인 장면으로 끝났기에 뒷내용이 무척이나 궁금하던 차였다.


페란테 소설의 매력은 무엇보다도 작품의 '다층성'이다. 대중적인 요소가 풍성한 이야기 속에 여성 문제, 계급 문제, 물질만능주의, 이탈리아 사회의 남부 문제 등 수많은 사회적 이슈를 함축하고 있다. 동시에 페란테는 시대와 국가에 국한되지 않는 인간의 감성을 다루는 데 탁월하다.

<새로운 이름의 이야기>는 제1권에 이어 날이 갈수록 복잡해지고 엉클어지는 릴라와 레누의 우정을 중심으로 전개된다. 하지만 이에 못지않게 극의 중심이 되는 감성은 '두려움'이다. 성장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 원하는 사람이 되지 못할 수도 있다는 두려움, 사랑에 대한 두려움, 자기 자신의 신체에 대한 두려움, 통제할 수 없는 감정에 대한 두려움, 선택과 결정에 대한 두려움, 실패에 대한 두려움 그리고 무엇보다 삶에 대한 두려움.  -662쪽, 옮긴이의 말 중에서


 유년기가 중심이었던 <나의 눈부신 친구>와 달리 릴라의 결혼을 신호탄처럼 하여 시작된 <새로운 이름의 이야기>는 릴라와 레누의 10대 후반에서 20대 초반까지를 보여주면서 더욱 복잡하고 혼란스러워진 내면과 심각한 삶의 문제들을 다룬다. 1권에 비하면 2권에서의 릴라와 레누의 관계는 매우 소원하다. 릴라의 결혼과 레누의 대학 진학으로 인하여 둘 사이의 접점이 많은 부분 사라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둘 사이의 연대감과 묘한 경쟁심, 서로에게 미치는 강한 영향력은 여전하다.


그렇다. 내 글쓰기를 힘들게 만드는 것은 바로 릴라다. 나는 평생 내게 일어난 일이 릴라에게 일어났다면 어떻게 됐을지 끊임없이 상상해왔다. 릴라에게 내게 일어난 것과 같은 행운이 따랐다면 릴라는 어떻게 행동했을까. 릴라의 삶은 계속해서 내 삶에 투영된다. 내 말에서는 릴라가 한 말의 메아리가 느껴지고 내 결연한 행동은 릴라의 행동을 재각색한 것이다. 내 부족함은 릴라의 과함 때문이었고 내 과함은 릴라의 부족함을 보완하기 위함이었다.   -470~471쪽


 릴라의 결혼은 첫날부터 파탄에 이른다. 폭행과 강간으로 시작된 결혼생활은 남편 스테파노의 비겁한 거래를 용납하지 못한 릴라가 완전히 마음을 닫아버림으로써 돌이킬 수 없이 망가진다. 그 후 이어지는 릴라의 굴곡진 결혼생활은 그야말로 파란만장하다. 그에 비하면 좋은 성적으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피사에 있는 대학에 학비 걱정 없이 진학하게 된 레누는 지성인들 사이에서 지식과 교양을 쌓아가며 고향의 온갖 지저분한 관계들에서 멀어진다.


 2권에서 특히 눈에 띄는 것은 어머니 세대보다 크게 나아지지 않은 폭력적인 가부장제다. 릴라의 남편 스테파노는 결혼 첫날 릴라의 뺨을 때린 데서 시작하여 결혼생활 동안 많은 폭력을 가한다. 어디 스테파노 뿐인가? 릴라의 영민함, 강함, 격정적인 변덕스러움과 그 모든 것을 매력적으로 만드는 아름다운 외모에 반한 남자들은 결국 같은 이유로 릴라를 욕하고 그녀를 굴복시키려 한다. 릴라와 레누가 깊이 사랑했던 니노도 마찬가지다. 자신보다 강하고 똑똑한 릴라를 감당하지 못해 도망친다. 리노는 아내인 피누차를, 미켈레는 여자친구인 질리올라를, 스테파노는 아내인 릴라와 정부인 아다를 때린다. 레누는 직접적인 폭력을 행사당하지는 않지만, 안토니오와 헤어질 때 폭력의 위험을 각오하는 모습을 보인다(오늘날 흔히 보이는 이별폭력을 생각하면 60년대의 이탈리아와 별 다를 게 없는 것 같아 씁쓸하다).

우리는 어린 시절부터 아버지가 어머니를 때리는 모습을 보아왔다. 낯선 남자는 우리 몸에 손가락 하나 댈 수 없지만 부모님과 남자친구나 남편은 원한다면 언제든지 우리의 뺨을 때릴 수 있다고 배우면서 자라왔다. 그들은 우리를 사랑하니까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다. 우리를 제대로 교육시키고 알아들을 때까지 다시 가르치기 위해서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다.  -68쪽


 레누의 경우 피사에서 겪는 어려움은 시골에서 올라왔다는 지역적 불리함, 지성도 부도 없는 가정이라는 계층적 불리함, 여성이라는 성적 불리함이 복합적으로 얽혀 있어 릴라와는 다른 양상을 띈다.

 그러나 두 사람 모두 기존의 것에서 벗어나려고 분투한다는 점은 비슷하다. 릴라는 폭력을 당하면서도 결코 굴종하지 않는다. 그녀는 부자가 되어야겠다는 결심으로 스테파노와 결혼한 후 그 선택이 얼마나 잘못된 것인지 깨닫지만 후회와 체념에 빠지기보다는 그때그때 원하는 바에 충실하게 행동하면서 버텨나간다. 레누는 타고난 성실함으로 치열하게 공부하여 아예 그 지긋지긋한 나폴리의 삶에서 벗어나는 길을 택한다. 두 사람 모두 자신의 삶을 개척해 나가고자 한 비범한 여성들이다.  

 릴라의 적당히 타협하려 하지 않는 성정과 제멋대로의 행동 때문에 레누가 휘둘리는 모양을 보면 릴라가 미워지기도 하지만, 그녀의 그런 모습은 그만큼 매력적이기도 하다. 또한 릴라가 가난과 가족들의 강압(릴라를 이용하여 가난에서 벗어나려는) 때문에 포기해야 했던 수많은 것들 - 학업적 성취, 예술적 감각, 뛰어난 미모까지 - 을 생각하면 그녀의 삶이 안타깝기 그지없다. 한편으로 고난과 시련 속에서도 반복적으로 되살아나는 그녀의 비범함은 감동적이기까지 하다.


 일견 바닥까지 떨어진 듯 보이는 릴라와 빛나는 미래를 약속받은 듯 보이는 레누가 3권에서는 어떤 이야기를 들려줄지 궁금하다. 봄에 출간된다는 글을 봤는데.. 지금 봄인데? 5월에는 출간되려나. 영문판으로는 4권까지 모두 번역되어 있으나 이 두꺼운 책을 영어로 읽어낼 자신은 없다(슬픔). 어쨌든 마지막까지 함께하련다.


☞1권 <나의 눈부신 친구> 리뷰


어느 날 오후 릴라가 니노에게 부자와 빈민 간의 갈등을 없앨 수 있는 방법은 없다고 조용히 말했다.

 "왜?"

 "하류층은 상류층으로 올라가고 싶어 하지만 상류층 사람들은 자리를 지키고 싶어 하니까. 결국에는 어떤 식으로든 서로의 얼굴에 침을 뱉고 발길질을 하지 않을 수 없게 되거든."

 "바로 그렇기 때문에 폭력사태가 벌어지기 전에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중요한 거야."

 "어떻게? 모두를 상류층으로 만들거나 아니면 아예 하류층으로 전락시켜서?"

 "그것도 방법이라고 볼 수 있지."

 "상류층 사람들이 기꺼이 하류층이 되려고 하겠어? 하류층 사람들이 신분 상승할 기회를 포기하겠느냐고."

 "모든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하면 그럴 수도 있지. 너는 불가능할 거라고 생각해?"

 "응. 계급 간 투쟁이란 다른 계층의 사람들끼리 카드놀이나 하면서 노는 게 아니야. 다른 계급에 속하는 사람들 간에 싸움이 벌어지는 거고 이들의 싸움은 어느 한쪽이 죽어야만 끝나는 거야."  -289~29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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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가 미안하다고 전해달랬어요
프레드릭 배크만 지음, 이은선 옮김 / 다산책방 / 201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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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사는 일곱살이다. 똑똑하고 특이하며, 그 대가로 학교에서 괴롭힘을 당하는 왕따다. 하지만 엘사는 결코 괴롭힘을 피하기 위해 자신을 숨기고 평범한 척 하려고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엘사에게는 슈퍼히어로 할머니가 있으니까!!

거의 중반까지도 이게 뭔 얘기인가 싶다. 좀 정신 없어도 읽는 재미는 있어서 계속 보게 되지만. 할머니가 들려준 동화 속 여섯 왕국은 뭐며, 그 안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뭔지. 아마 점점 현실과 연결되어 가면서 후반부에서 감동을 주는 거겠지, 하고 예상은 됐다.

이 작가 이런 비유들이 참 좋다. 귀여워ㅋ

그 한여름 밤에 아빠는 엄마와 춤을 추었다. 둘이 같이 춤추는 모습을 본 건 엘사에겐 그때가 마지막이었다. 혼자 보기 아까울 정도로 몸치인 아빠는 방금 전에 자리에서 일어났는데 발이 저려서 감각이 마비됐다는 걸 알아차린 덩치 큰 곰처럼 보였다.  -204쪽/531쪽(크레마전자책 기준. 이하 동일)


점점 동화와 현실이 연결되어 가는 건 맞는데 마지막에 빵 터뜨리는 감동은 없다. 그냥 잔잔한 파도처럼 몇 차례 밀려오는 소소한 감동이 있을 뿐. 억지로 너 감동해! 하는 게 없어서 더 좋았다.

제일 마음에 들었던 인물은 택시기사 알프. 요즘 속어로 츤데레 아저씨. 오베랑 좀 닮아서 더 정이 가나?

할머니와 엘사는 종종 저녁 뉴스를 같이 봤다. 그럴 때 엘사는 가끔 왜 어른들은 저렇게 바보 같은 짓을 서로에게 저지르느냐고 물었다. 그러면 할머니는 어른들도 대부분 인간인데 인간들은 대부분 개떡 같기 때문이라고 대답했다. 엘사는 어른들이 바보 같은 짓을 저지르는 와중에 우주를 탐사하고 유엔, 백신, 치즈 가는 강판 같은 좋은 것들도 많이 만들어내지 않았느냐고 반박했다. 그러면 할머니는 어느 누구도 백 퍼센트 개떡은 아니고 어느 누구도 백 퍼센트 안 개떡은 아닌 게 인생의 묘미라고 했다. ‘안 개떡‘인 쪽으로 최대한 치우칠 수 있도록 노력하는 게 인생의 과업이다. -469쪽/531쪽

"너희 할머니는 내 일생일대의 사랑이었지. 나뿐 아니라 많은 남자들에게. 솔직히 여자들한테도 마찬가지였고."
"아저씨도 우리 할머니한테 그랬어요?"
마르셀은 멈칫한다. 화난 얼굴은 아니다. 씁쓸해하지도 않는다. 그냥 살짝 질투할 따름이다.
"아니. 너희 할머니에게 일생일대의 사랑은 너였어. 처음부터 끝까지 너였단다, 엘사." -499쪽/53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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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베라는 남자
프레드릭 배크만 지음, 최민우 옮김 / 다산책방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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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를 이미 봤고, 충분히 감동을 받았기 때문에 책에 대해서는 별 기대가 없었다. 전자책 도서관에 없었다면 굳이 읽지 않았을 텐데.

책과 영화를 둘다 봤는데 둘다 만족하는 경우는 흔치 않다. 책을 먼저 읽고 영화를 보면 각색이나 연출이 불만인 경우가 많고, 영화를 먼저 보고 책을 읽으면 이미 화면으로 본 장면들 때문에 상상력이 제한되거나 이야기를 따라가는 재미가 떨어진다. 하지만 오베라는 남자는, 둘다 좋다. 책을 먼저 읽었으면 어땠을까. 그래도 영화도 좋았을 것 같다.

이 책의 커다란 장점은 유머다. 그래서 내용을 알고 읽어도 전혀 지루하지 않았다. 특히 재미난 비유가 많다. 예를 들면 이런 것. 

오베는 마치 해적 차림을 한 미르사드가 보행자 전용 아케이드에서 그를 멈춰 세운 다음 여기 찻잔 세 개 중에서 은화를 감춘 게 뭔지 맞춰보라고 말하기라도 한 듯 그를 잠시 바라보았다.  -383쪽(크레마에서 본 전자책 기준, 이하 동일)

 

확실히 자신이 처한 상황에 따라 감동을 받는 포인트가 달라진다. 실연당해 본 지가 하도 오래 되다 보니 얼마전 읽은 <실연당한 사람들을 위한 일곱 시 조찬 모임>은 작가에게 미안할 만큼 감정이입이 안 됐다. 한창 실연의 아픔을 겪는 사람이 읽을 때와는 천지차이겠지. 반면 결혼 후에는 '사별'을 이야기하는 작품만 보면 금세 눈물이 글썽글썽해진다. 전자책을 무료로 대여해 주기에 이게 소설인지 에세이인지 무슨 내용인지 전혀 모르고 읽었던 줄리언 반스의 <사랑은 그렇게 끝나지 않는다>에 얼마나 가슴이 아팠는지. 아내인 소냐를 앞서 보내고 뒤따라갈 계획을 세우며 살아가는 오베 역시 내 마음을 무척 아프게 했다.

우리는 죽음 자체를 두려워하지만, 대부분은 죽음이 우리 자신보다 다른 사람을 데려갈지 모른다는 사실을 더 두려워한다. 죽음에 대해 갖는 가장 큰 두려움은, 죽음이 언제나 자신을 비껴가리라는 사실이다. 그리하여 우리를 홀로 남겨놓으리라는 사실이다.  -438쪽

 

 '까칠하다'고 표현되는 오베의 성격은 무엇 하나 좋게좋게 넘기지 못하는 데서 오는데, 그건 바로 그가 엄격한 원칙주의자라는 뜻이다. '좋은 게 좋은거지'라며 원칙과 규율을 어기는 것을 아무렇지 않게 여기는 사회에서 오베는 주변 사람들을 피곤하게 하는 진상 노인이다(사실 59세 밖에 안 됐지만). 오베는 부조리한 '하얀 셔츠(를 입은 공무원)'들과 싸우고, 거주지를 어지럽히는 규칙 위반자들과 싸우고, 자신에게 원칙을 굽히라는 요구를 하는 모든 것들과 싸운다. 그리고 그런 그의 곁에는 외국인이민자(파르바네), 고도비만자(지미), 뇌졸중환자(루네), 동성애자(미르사드), 상처 입은 길고양이 등 주류에 속하지 않은 존재들이 모여 든다. 그러니 이 이야기는 주류 사회에 대한 비주류(소수자)의 대항과 연대, 그리고 승리의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오베는 백 마디 말보다 한 가지 실천으로 답하는 남자, 자신 안의 이타성과 선량함을 순순히 인정하기에는 너무 수줍은 남자, 그래서 선한 일을 할 때 "이 일을 하지 않으면 아내가 실망할 것이다"라는 핑계를 대는 남자다.

 

아버지가 죽고 난 뒤로, 그는 해야 할 일을 하는 사람들과 그렇지 않은 사람들 사이에 점점 더 차별을 두었다. 실천하는 사람과 말만 하는 사람들을 구별했다. 오베는 점점 더 말을 줄이고 점점 더 실천을 했다.  -107쪽

파르바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더니 갑자기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오늘 밤 여자들을 얼어 죽게 할 수는 없겠죠, 오베, 그렇죠? 애들이 당신이 광대를 공격하는 광경을 봐야 했던 걸로 충분하잖아요. 안 그래요?"

 오베가 그녀에게 언짢은 시선을 보냈다. 그는 말없이, 스스로에게 타협하듯, 그애들의 변변찮은 애비가 사다리에서 떨어지지 않고서는 창문 하나 열지 못한다는 이유로 자식들이 죽게 놔둘 수는 없다는 점을 인정했다. 만약 그가 어린이 살해범 자격을 새로 취득한 채 저세상에 도착할 경우 오베의 아내는 엄청난 양의 잔소리를 끓여 부을 것이다.  -179쪽

40년 가까이 함께 살면서, 소냐는 읽기와 쓰기를 배우는 데 어려움을 겪는 수백 명의 학생들을 가르쳤고, 그들에게 셰익스피어 전집을 읽혔다. 같은 기간 동안 그녀는 오베가 셰익스피어 희곡을 한 편이라도 읽도록 하는 데 결코 성공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들이 주택단지로 이사하자마자 그는 몇 주 동안 내내 저녁마다 헛간에서 시간을 보냈다. 마침내 그가 작업을 마쳤을 때, 그녀가 본 것 중 가장 아름다운 책장들이 거실에 놓였다.

"책들을 어디에 보관은 해야 하잖아." 그는 그렇게 중얼거리고는 드라이버 끝으로 엄지손가락에 난 작은 상처를 콕콕 찔렀다.

 그녀는 그의 품에 파고들며 사랑한다고 말했다.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210쪽

 

 

 그리고 소냐는 그런 오베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그대로 사랑했다. 오베와 소냐의 사랑 이야기는 너무나도 다른 두 사람이 얼마나 지극히 사랑할 수 있는지 보여준다. 둘은 거의 '화성에서 온 남자, 금성에서 온 여자'처럼 극과 극이다. 남중 남고를 나와 기계공학을 전공한 엔지니어와 문학소녀로 자라나 국문학을 전공한 시인의 만남이랄까. 오베의 지극한 사랑은 소설 전반에 걸쳐 담담하게 드러난다. 큰 사고를 당해 다리를 쓸 수 없게 된 상황에서 이렇게 말하는 여자를 어찌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

"우린 사느라 바쁠 수도 있고 죽느라 바쁠 수도 있어요, 오베. 우리는 앞으로 나아가야 해요."  -276쪽

 

그래서 오베는 쫓겨나는 대신 야간 청소원이 되었다. 만약 이 일이 벌어지지 않았다면 그는 그날 아침 자기 조를 떠날 일이 결코 없었을테고, 그녀를 보는 일도 일어나지 않았으리라. 그 빨간 구두와 금 브로치와 윤기 나는 갈색 머리도. 또한 남은 평생 동안 누군가 맨발로 그의 가슴속을 뛰어다니는 것 같은 느낌을 주게 될 그녀의 웃는 모습도 볼 일이 없었으리라.

 그녀는 종종 "모든 길은 원래 당신이 하기로 예정된 일로 통하게 돼 있어요"라고 말했다. 그녀에게 그 '원래 당신이 하기로 예정된 것'은 아마도 '무엇'이었으리라.

 하지만 오베에게 그건 '누군가'였다.  -115쪽

"날 속이면 안 돼요, 여보." 그녀가 쾌활한 미소를 지으며 그의 커다란 품으로 파고들었다. "아무도 안 볼 때 당신의 내면은 춤을 추고 있어요, 오베. 그리고 저는 그 점 때문에 언제까지고 당신을 사랑할 거예요. 당신이 그걸 좋아하건 좋아하지 않건 간에."  -155쪽

 그는 그녀를 오랫동안 바라보았다. 마침내 그는 커다랗고 둥근 바위에 조심스레 손을 얹고, 마치 그녀의 볼을 만지듯 좌우로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보고 싶어." 그가 속삭였다.

아내가 죽은 지 6개월이 지났다. 하지만 오베는 하루에 두 번, 라디에이터에 손을 얹어 온도를 확인하며 집 전체를 점검했다. 그녀가 온도를 몰래 올렸을까봐.  -61쪽

사람들은 오베가 세상을 흑백으로 본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녀는 색깔이었다. 그녀는 오베가 볼 수 있는 색깔의 전부였다.  -75쪽

 

 이 대책없이 까칠하고 못말리게 사랑스러운, 고집불통 이 남자를 어찌 사랑하지 않을 수 있으랴. 이제는 저 세상에서 소냐를 만나 마지막을 함께 한 사람들에 관해 이야기하면서, 부끄러운 듯 딴청을 부리고 있겠지. 그가 행복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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