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네치카·스페이드의 여왕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234
류드밀라 울리츠카야 지음, 박종소 옮김 / 문학동네 / 2023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234권. 이 얇은 책 한 권에 러시아 작가 류드밀라 울리츠카야의 작품 두 편이 담겨 있다. 나는 단편보다 장편을 훨씬 선호하는데, 이 작품들은 - 중단편인가? 소네치카(87페이지), 스페이드의 여왕(46페이지)인데, 뒤에 소개에는 '스페이드의 여왕'만 '단편소설'이라고 적혀 있다 - 그 분량에도 불구하고 어쩐지 장편처럼 느껴져서인지 아주 재미있게 읽었다. 짧은 분량 안에 장편 수준의 긴 서사를 녹여냈달까. 


<소네치카>를 읽으면서 아이고 이 답답아 하며 안타까워 한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가벼운 정신병리적 기운마저 도는 독서열"에 빠진 소네치카가 "그녀가 그토록 사랑하던 책 속 이야기 대신에 상상할 수도 없는 빈곤의 짐, 가난, 추위, 번갈아가며 병이 나는 작은 타냐와 로베르트 빅토로비치에 대한 매일매일의 끝없는 걱정" 속에서 살게 되기까지, 그리고 남편의 외도를 알고도 분노조차 하지 않는 모습은 책을 사랑하는 소네치카의 모습에 스스로를 대입하며 공감했던 독자를 아연케 한다. 나 또한 하, 이것이 여성 예술가들이 남자 만나고 아이 낳으며 겪게 되는 분열과 소외인가, 싶어 씁쓸했더랬다. 

그러나 작품을 모두 읽고 나니 그녀의 삶을 내가 감히 쯧쯧거리며 평가할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수천 권의 책더미에 고치처럼 둘러싸여 그리스신화의 자욱한 웅얼거림, (...) 하늘의 중심부를 향하는 위대한 러시아인들의 도덕적 절망에 매료된 소네치카의 평온한 영혼"은 완전히 닫혀 있었다. "현실을 피해" "문학의 공간에서 자신의 영혼을 쉬도록" 했던 소네치카는 학교를 졸업하고 도서관의 지하 보관실로 내려가 고치 속 삶을 지속한다. 그러나 로베르트 빅토르비치는 "서양 배 모양으로 부풀어" 있는 코와 "납작한 엉덩이" 등 볼품 없는 외모를 뚫고 "내면에서 진정한 빛"을 발하는 그녀의 가치를 알아본다. 그토록 많은 일을 겪어온 이 남자가 소네치카에게 한눈에 반하는 모습은 다소 비현실적이고 그래서 더 운명적으로 보인다. 


* 이하 스포일러 주의 -------------------------------------------



그녀는 어떻게 열정적으로 사랑했던 문학에 등을 돌리고 일상의 기쁨에 빠져들 수 있었을까? 소네치카는, 소네치카였다. 그녀는 새로운 삶을 문학처럼 탐독했다. 그녀에게 로베르트 빅토로비치라는 범상치 않은 예술가와 그를 닮은 딸 타냐는 무한히 성장하고 변화하는 책과 같았다. 꿈조차 책처럼 읽었던 소네치카는 이제 "일생 동은 매일의 장면들, 그 냄새와 색채, 특히 남편이 과장되고 진중하게 한 매 순간의 말들을 기억했다." "신이 주신 하루하루가 이웃한 날들과 합쳐지지 않고 그 각각이 소네치카의 기억에 새겨졌다."  

그렇기에 딸의 친구인 야샤, 소네치카가 방을 내어주고 돌보아준 소녀와 남편의 관계를 알게 된 후에도 그들을 비난하거나 절망하거나 분노하지 않는다. 대신 그녀는 오랜만에 책을 펼친다. "이 페이지들 속에 있는 단어의 완벽함과 구현되어 있는 고상함으로부터 오는 조용한 행복이 소냐를 비추었다." 그녀의 고향, 영원한 문학은 언제나 훌륭한 도피처이자 안식처였다. 남편 로베르트가 사망한 후 그가 그린 야샤의 초상화들을 아름답게 전시하는 소네치카의 모습은 진정한 예술의 후원자답다. 그녀는 문학을 비롯한 예술의 가치를 알았고 아름다움을 찬미했다. 

그렇게 책의 고치에서 빠져 나왔던 요정 소네치카는 삶의 기쁨과 슬픔과 고통과 환희를 모두 경험한 후 조용히 책 속으로 되돌아간다. 온전히 혼자인 노년의 소네치카는 사실 혼자가 아니다. "그녀의 떨리는 손에는 책이 놓여 있다." 언제든 그녀는 이곳이 아닌 다른 곳으로 갈 수 있다. 


----------스포일러 끝 --------------------



<스페이드의 여왕>은 완전히 다른 분위기의 작품이다. 여기엔 아주 강렬한 인물이 등장하는데, '무르'라는 이름의 노년 여성으로, 그녀는 한 가정의 살아있는 가장 오래된 흔적이자 제어되지 않는 아집의 제왕으로서 집안에 군림한다. 화려하고 떠들썩한 연애, 결혼, 온갖 유명세를 떨치던 젊은 시절의 이야기는 무르의 입에서 화수분처럼 끝없이 흘러나온다. "이 모든 것의 목격자는 청교도적인 우수를 마음속에 간직한 채, 가녀리고 초인적으로 아름답고 연극하는 것처럼 항상 곱게 차려입는 이 여인을 사랑할 수 없음과 사랑하지 않을 수 없음으로 인해 깊은 절망을 느끼는, 찌푸린 얼굴의 딸 안나 표도로브나였다." 안나는 의사이고 오래전 남편과 헤어졌는데 엄마 등쌀 때문으로 보인다. 안나의 딸 카탸 역시 남편과 이혼했고, 딸 레노치카와 아들 그리샤(다른 남자의 아들)를 낳았다. 이 집안 삼대의 여성이 남편 없이 살고 있는 셈이다. 그러던 어느 날, 오랫동안 연락이 없던 안나의 남편이 불쑥 찾아와 집안 사람들을 사로잡고, 아이들은 무르 몰래 그(아이들에게는 할아버지)가 살고 있는 그리스로 놀러 갈 계획을 짜는데.. 과연 이 '스페이드의 여왕'에게 끝까지 들키지 않을 수 있을까? 


<스페이드의 여왕>은 분량이 짧은데 오히려 리뷰 쓰기가 어려운 작품이다. 마음에 든 문장들을 소개하고 마치려고 한다. 

어머니와 딸은 한없이 서로를 사랑했지만, 그 사랑은 그들의 친밀함에 장애가 되었다. 무엇보다도 그들은 서로를 슬프게 할까 두려웠다. 그러나 삶은 대부분 다양한 종류의 슬픔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시종일관의 침묵이 모녀의 조용한 불평, 서로에 대한 달콤한 위로, 그리고 함께 이야기하는 고민을 대신했다. (114, 115쪽)

"레노치카는 전속력으로 기말시험의 낭패에 다가가고 있었지만, 이 중대한 나날 동안 수업을 때려치우고는 최근에 나타난 할아버지 뒤를 그림자처럼 따라다녔다. 매혹적인 영국이 조국의 학문에 대한 입맛을 잃게 했기 떄문에 레노치카는 내일 보는 시험에 대해서는 일말의 초조함도 가지지 않았다." (133쪽)  - 이런 재미난 문장들이 종종 나와서 좋다 ㅋㅋ 



댓글(14) 먼댓글(0) 좋아요(3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페넬로페 2023-11-15 19:4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꼭 분량이 많아야 서사가 훌륭한 건 아니더라고요. 소네치카 읽으면 다 우리 같다고 생각되는 건 아닐까요?
저도 약간 현실을 무시한 채 책을 읽고 있거든요 ㅎㅎ

독서괭 2023-11-24 17:01   좋아요 1 | URL
답이 너무 늦어졌군요 ㅠㅠ
분량이 많아야 서사가 훌륭한 건 아니다!! 맞는 말씀입니다. ㅎㅎ 저도 책, 특히 소설 읽을 때는 그 세계에 푹 빠져서 현실을 잊을 수 있다는 점을 좋아합니다. 그런 점에서 미하엘 엔데의 <네버 엔딩 스토리> 같은 책 너무 좋아해요 ㅎㅎ

새파랑 2023-11-16 10:2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등장인물들이 다 독특해서 더 매력적인 작품이었던것 같습니다. 역시 혼돈의 러시아~!!

책을 그렇게 많이 읽어도 현실에서는 안타깝게 살았던 ‘소네치카‘를 보면서 ‘책 많이 읽어봤자 현실에 무슨 소용이 있나‘라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ㅋㅋ

잠자냥 2023-11-16 10:39   좋아요 4 | URL
“남편하고 자식 열심히 키워봤자 소용없다” by 술파랑.

새파랑 2023-11-16 11:31   좋아요 3 | URL
헐... 은바오는 키우면 도움이 되실겁니다~@!

독서괭 2023-11-24 17:02   좋아요 2 | URL
ㅋㅋㅋㅋ 남편하고 자식은 키워봐야 소용없지만 동물은 정신건강에 도움이 된다는 결론?!
전 그래도 노년의 소네치카에게 책이 있어서 다행스럽다 싶더라고요^^

잠자냥 2023-11-24 17:30   좋아요 1 | URL
아니 은바오 키우라는 댓글 이제 보네요. ㅋㅋㅋㅋㅋ

새파랑 2023-11-24 17:37   좋아요 0 | URL
고양이도 키우시는데 판다도 나쁘진 않은거 같습니다...

잠자냥 2023-11-24 17:39   좋아요 1 | URL
대나무값 많이 들 거 같아요…;

새파랑 2023-11-24 17:40   좋아요 1 | URL
책은 나무로 만드니
대나무 값이 비싸다면

밥 대신 책을 먹으라고 하면 됩니다~!!

독서괭 2023-11-24 18:57   좋아요 1 | URL
ㅋㅋㅋㅋ 그럼 쫓겨날 듯요 ㅋㅋㅋ

단발머리 2023-11-24 17:38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저는.... 이 책을 안 읽어봤지만요. 유수한 우리 알라딘 이웃님들의 리뷰를 모두 섭렵한 바.... 폭풍을 모두 다 겪은 후에 소네치카가 조용히 책 속으로 돌아가는 장면이 좀 가슴 아프네요. 우리는 에너지를 아껴야 합니다. 분노와 미움, 증오는 그 어떤 감정보다 사람의 에너지를 빨아들이죠. 하지만.... 저는 안 읽은 사람이니까요.... 조용히 책 속으로 돌아가는 장면이 전 좋으면서도 참 그랬어요.

제가 최근에 읽은 <Lucy by the sea>에서 윌리엄이랑 루시가 전에 윌리엄이 바람핀 이야기를 나누거든요. 아주 오래 전 일이고, 뭐.......지금은 법적으로는 남남이고요. 루시가 난 아무렇지도 않아, 진짜 아무렇지도 않아... 하는데.... 그게 뭔지 알거 같으면서도 싫기도 하구요. 암튼 좀 그랬습니다.

얇으면서도 울림을 주는 책이네요. 스포일러 주의.... 가 특히 인상적입니다.
독자를 배려하는 이 따뜻한 마음씨여!!!

얄라알라 2023-11-19 20:40   좋아요 1 | URL
글쵸?

스포일러의 시작과 끝을 분명히 알려주시는 독서괭님의 마음쓰심!

독서괭 2023-11-24 17:06   좋아요 0 | URL
단발님, 이 얇은 책의 리뷰를 섭렵하셨다는 것은..ㅋㅋㅋㅋ 줄거리 파악 끝나셨군요! 그래도 직접 읽는 건 다르니 읽어보시면 좋겠습니다^^
루시의 ˝아무렇지도 않아˝는 정말 아무렇지도 않은 걸까요? 저라면 아무렇지 않다고는 못할 것 같은데.. ㅠㅠ
스포일러를 체크해서 처음에 딱 나오게 할 수도 있지만 그건 모바일에서는 안 보이더라고요?? 제 글을 읽어주시는 고마운 분들께 스포일러 뿌릴 수 없으니 ㅋㅋㅋㅋ
얄라님/ 감사합니다 헤헷
 
소네치카·스페이드의 여왕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234
류드밀라 울리츠카야 지음, 박종소 옮김 / 문학동네 / 2023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소네치카>, 그녀는 책에서 튀어 나온 요정처럼 겸허히 삶을 경험하고 다시 책 속으로 돌아갔다. <스페이드의 여왕>은 모 든 걸 가져봤으나 이타심만큼은 눈곱만치도 없는 무르와 그 녀의 독재에 눌린 가족을 그려낸다. 이 작품들,뭔가 묘한데?
진지하면서도 개구진 위트가 있는 문장들이 마음에 든다.

댓글(8) 먼댓글(0) 좋아요(2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독서괭 2023-11-10 22: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흔치 않은 땡투 기회였는데 급박구매 하느라 까먹은 듯 ㅠㅠㅠㅠ

잠자냥 2023-11-10 22:07   좋아요 3 | URL
이해한다

은오 2023-11-10 22:08   좋아요 2 | URL
ㅋㅋㅋㅋㅋㅋㅋㅋㅋ

독서괭 2023-11-10 22:10   좋아요 2 | URL
얼마 안 하는 얇은 책이라 다행입니다.. ㅋ

은오 2023-11-10 22:0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귀하디귀한 괭님의 책지름 이책인가요! ㅋㅋㅋㅋ

독서괭 2023-11-10 22:10   좋아요 2 | URL
네 구간 세 권 읽고 산 바로 그 책!! 얇아서 고른 것도 있어요 ㅋㅋ

유부만두 2023-11-10 23:0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리뷰 표현 좋은데요?! 책에서 나온 요정이 삶을 살고 책 속으로 돌아갔다!
전 스페이드의 여왕 비극적 결말 맘에 들었어요.


독서괭 2023-11-11 14:08   좋아요 1 | URL
헤헤 감사합니다 만두님. 저도 스페이드 결말 마음에 들어요! 소네치카보다 좀더 재밌었어요 ㅎ
 
[세트] 마틴 에덴 1~2 - 전2권 - 추앙으로 시작된 사랑의 붕괴
잭 런던 지음, 오수연 옮김 / 녹색광선 / 2022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마틴 에덴, 스무살. 어릴 적부터 남다른 체력과 불굴의 의지를 가졌던 소년. 선원이 되어 배를 타면서 세계 곳곳을 떠돌아다닌, 그 와중에도 시를 좋아하던 비범한 노동자.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여성들에게 인기가 있었고 그들에게 상냥한 무심한 바람둥이. 

그런 마틴이 새로운 세계에 발을 들이는 순간, 자신감 넘치게 건들거리던 걸음걸이는 볼썽사납게 휘청대고, 아무렇지 않게 내뱉던 문법에 맞지 않는 말들과 상스런 은어들은 수치로 돌변한다. 노동자의 세계와 부르주아의 세계가 만나는 순간. 이 세계를 딱 잘라 둘로 나눌 수는 없겠지만, 단순화하자면 그렇다. 노동자의 세계에서 주름잡을 만큼 주름잡아 보았던 마틴은 부르주아의 세계에서는 맞지 않는 셔츠에 빨갛게 긁힌 뒷목처럼 생소한 존재다. 이들의 첫 만남에서 승기를 잡는 것은 루스의 가족으로 대표되는 부르주아들이다. 마틴은 여신같은 루스와 그녀 가정의 분위기에 압도당한 채 얼떨떨해 한다. 루스라는 존재를 향한 열망으로 그는 불타오른다. 


본래 지적인 욕구와 문학적 감수성을 지녔던 마틴은 루스와 만나고 그녀에게서 공부를 배우면서 무섭게 성장한다. 그는 도서관에서 빌려온 책들을 닥치는 대로 읽고 헤매면서 진리를 향한 여정을 시작한다. 상대에게 빠진 것은 마틴만이 아니다. 첫 만남에 이미 그의 목덜미의 야성성에 빠져버린 루스... 사랑에 빠진 게 처음이라 본인도 알지 못했지만 결국 둘은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게 된다. 

그러나 문제는 돈. 더 근본적으로는 이미 마틴은 '부르주아'를 향한 여정이 아니라 '진리'를 향한 여정에 발을 들였다는 것이었다. 루스는 그녀의 아버지처럼, 혹은 그녀가 존경하는 아버지의 지인들처럼 마틴도 차근차근 성공을 향한 포석을 쌓아가길 바란다. 그러나 마틴은 기다려 달라고. 자신이 진짜 훌륭한 작품을 써서 성공하리라 장담한다. 그렇게 그들의 약혼기간이 시작되는데... 



-----------이하 스포일러 주의 --------------------



붕괴는 이미 예정되어 있었다.

처음부터 사랑이 아니었던 것이다. 마틴은 루스 자체가 아니라 그녀의 계급이 가진 것을 열망했다. 또한 그의 열망은 착각이었으니, 그녀의 계급이 가진 것이 드높은 학식이라 여겼던 것이다. 만일 그가 열망한 것이 돈이나 부르주아 계급 자체였다면 그들의 결합에는 문제가 없었을 텐데. 알면 알수록, 공부하면 할수록 마틴은 부르주아 계급의 허위의식에 환멸을 느낀다. 지식을 쌓아가며 느끼는 환희가 커질수록, 그들에 대한 환멸도 커져만 간다. 그럼에도 마틴은 여전히 루스를 사랑한다 하지만... 


이 점에서 나는 마틴에 대한 점수를 많이 깎아 버렸다. 마틴이 아무리 자신의 견해를 밝혀도, 자신의 글을 읽어줘도, 루스는 전형적인 부르주아로서의 의견을 대변할 뿐, 그의 견해와 글을 제대로 이해하지도 못하고 더더욱 동조는 하지 못한다. 그녀는 그가 환멸하는 부르주아 계급 그 자체다. 그럼에도 그녀를 사랑한다고? 그는 눈을 감고 있다. 아니, 그에게 진리의 주체는 남성이지 여성이 아니었기 때문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렇게 생각하니 주변 여성들에 대한 마틴의 태도를 돌아보지 않을 수 없었는데, 그가 따뜻하게 대하는 여성들은 누이들이거나 그에게 방을 내어주고 그가 아플 때 돌봐주는 마리아, 무조건적으로 그를 추앙하는 리지 (1권에서 잠깐 나왔다가 사라졌는데 2권에서 갑자기 그동안 내내 그를 생각했다며, 둘이 급속도로 가까워지는 거 좀 이해 불가였음) 등이다. 이들이 부르주아가 아니어서 일수도 있지만, 그는 애초에 여성에게는 남성에게 갖는 종류의 기대가 없었던 게 아닐까 싶다. 그가 부르주아 계급을 환멸하면서도 같은 이유로 루스를 환멸하는 데 이르지 않은 것은 사랑에 눈 멀어서라기보다는 루스로부터 받고자 했던 것이 "무릎 위에 누워 머리칼을 쓰다듬는 그녀의 손길을 느끼는 것"에 불과했기 때문이리라. 루스에게서는 부르주아를 대표하는 표식만이 발견될 뿐이고, 누이들과 마리아, 리지로부터도 서로를 구별할 만한 특별한 개성은 찾아볼 수 없다. 이는 마틴이 말을 나누고 혐오하게 된 여러 남성들이나 단 하룻밤 만났을 뿐인 논객들에게서조차 뚜렷한 자아를 느낄 수 있다는 점과 크게 구별된다.


루스가 뒤늦게 후회하며 그를 찾아왔을 때에야 마틴은 사랑이 아니었음을 깨닫는다. 그러나 그가 믿어왔던 "사랑"이라는 최고의 이상의 붕괴는 그에게 마지막 타격을 입힌다. 그는 이미 "아름다움"이 대중의 입맛에 따라 재단되고 할퀴어지는 걸 목격하고 마음이 부서진 상태였다. 유명인사가 되어 여기저기 불려 다니면서도 그의 마음은 절규한다. 당신들이 외면하던 배고픈 마틴은 이미 지금 당신들이 환호하는 작품들을 완성시켰어. 그때의 나와 지금의 나, 그때의 작품과 지금의 작품은 하나 다르지 않은데, 당신들은 왜 달라졌지? 이 괴로운 질문을 붙들고 그는 무너진다. 저 높은 곳을 향해 마음 속 가득 이상을 품고 날아오르던 청년, 그 과정이 극히 압축되어 빠른 속도로 이루어졌던 만큼, 추락 또한 급격히 이루어진다. 마틴은 부르주아를 혐오했지만 사회주의를 지지하지도 않았고, 니체에 동조하는 개인주의자였다. 이와 같은 결말을 통해 잭 런던이 전하고자 한 건 무엇일까? 한 천재를 좌절시키는 우둔한 사회의 부조리인가? 개인주의가 끝내 승리할 수는 없다는 메시지일까? 작가 자신의 모습이 많이 반영된 '마틴 에덴'을 자신과 달리 사회주의자가 아니라(잭 런던은 <나는 어떻게 사회주의자가 되었나>라는 책을 쓰기도 한 사회주의자였다고 한다) 개인주의자로 묘사한 이유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된다.  


앞서 말한 이유로 2권부터는 마틴을 차게 식은 눈으로 바라보게 되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소설은 충분히 매력적이다. 그가 지식을 쌓고 변화하는 모습을 신나게 따라가는 한편, 굶주리고 하루 너덧시간 밖에 자지 못하면서 작품을 써내는 걸 안타깝게 바라보다가, 그의 성공에 함께 기뻐하고, 추락에 마음 아파하게 된다. 그 화려한 상승과 추락 사이의 격차는 아름답고도 어지럽다. 


책 제본이 아름답고 편집도 마음에 들어서 별을 한 개 추가할까 하다가 일단 4별로 마무리. 녹색광선 책들은 앞으로 모아봐야겠다. 


댓글(23) 먼댓글(0) 좋아요(3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잠자냥 2023-10-16 15:2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무심한 바람둥이….

독서괭 2023-10-16 15:30   좋아요 1 | URL
바로 당신….

잠자냥 2023-10-16 15:38   좋아요 0 | URL
엥? 아닐걸?
난 주은오 생각했는데...?!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독서괭 2023-10-16 15:40   좋아요 1 | URL
은오님이 어디가 무심해요 ㅋㅋ

잠자냥 2023-10-16 15:41   좋아요 1 | URL
으음...;;

은오 2023-10-16 20:33   좋아요 1 | URL
저만큼 질척이는 사람이 어딨다고...?!! 바로 당신.... 맞습니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유부만두 2023-10-20 09:58   좋아요 1 | URL
은오님이 주씨에요?

잠자냥 2023-10-20 10:05   좋아요 1 | URL
ㅋㅋㅋㅋ 그건 아니고... 은오가 제 등신대 세워놓고 밥 먹는다 뭐 이런 농담했는데 ㅋㅋㅋ
그게 넷플릭스 드라마 <마스크걸>의 오타쿠 ‘주오남‘이 하는 짓하고 비슷해서 제가 주은오라고 ㅋㅋㅋ

은오 2023-10-20 11:14   좋아요 0 | URL
ㅋㅋㅋㅋㅋㅋㅋㅋ 만두님이 아시기로는 주씨가 아닌데...

새파랑 2023-10-16 15:4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마틴 에덴의 잘생김

나는 변한게 없는데 주위의 반응이 부정에서 긍정으로 바뀌면 통쾌함도 있지만 배신감도 느껴지더라구요.

마틴에덴이 루스랑 맞지 않아도 계속 사랑한 이유는 부르주아 여서라기 보다는,

그녀라는 존재 자체가 루스가 글을 쓰게 된 이유였기 때문이지 않을까란 생각이듭니다 ㅎㅎ

독서괭 2023-10-16 15:47   좋아요 0 | URL
마틴 에덴의 잘생김 ? ㅋㅋㅋㅋㅋㅋ 잭 런던도 잘생겼더라고요?

전 처음부터 마틴이 루스를 사랑한 이유가 부르주아이기 때문에 가질 수 있는 요소들(하얗고 깨끗한 피부, 온화하고 조용한 성격, 지적인 화법 등) 때문이었고, 그걸 사랑이라 착각했다고 느껴지더라고요.
그녀가 글 쓰는 이유가 되었기 때문에 끝까지 포기를 못했을 거라는 데는 동감입니다 ㅠㅠ

유부만두 2023-10-20 10:00   좋아요 1 | URL
잭 런던이 호남이었대요? 전 왠지 거칠고 드러운 몬난이라고 생각했어요. 소설에서 받은 이미지 때문인가봐요. 야생, 짐승 .... 연상으로요. 마틴 에덴 리뷰 볼 때 마다 (실은 표지의 잘난 얼굴 볼 때마다) 이거 언젠가 읽겠다고 결심해요. 백번쯤 해요.

다락방 2023-10-16 15:4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이 책 너무 좋고 결말도 그럴 수밖에 없었다는 거 알지만, 그래도 그런 결말인게 좀 아쉬워요 ㅠㅠ 육체미 뿜뿜한 남자인데 ㅠㅠ

독서괭 2023-10-16 15:48   좋아요 1 | URL
육체미 ㅋㅋㅋ 아쉽 ㅋㅋㅋ 아니 그렇게 몇시간 못자고 미친듯이 글만 쓰는데 계속 육체미 유지되는 거 좀 반칙 아닌가요? ㅋㅋㅋ
저도 결말은 그렇게 갈 수밖에 없었을 것 같아요.

다락방 2023-10-16 16:10   좋아요 1 | URL
육체미 얘기하다보니 아낌 받고 싶네요.. 하아-

잠자냥 2023-10-16 16:22   좋아요 1 | URL
푸하핳하ㅏㅏㅏㅏㅏㅏㅏㅏ 락방이 댓글 어쩔ㅋㅋㅋㅋㅋㅋㅋ

독서괭 2023-10-16 18:01   좋아요 1 | URL
살포시 어깨를 감싸주는 아낌.. 그의 전완근과 등근육이 움찔댄다...
두달 남았어요 다락방님. 아님 소설로 승화시켜야 합니다.

은오 2023-10-16 20:3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괭님 이 리뷰 짱이네요 역시 괭님이십니다.. 오늘도 괭님에 대한 마음이 불타오르는군요..
자신감 넘게 건들거리던 걸음걸이가 휘청거리고ㅠ 수치로 돌변하고ㅠ 빨갛게 긁힌 뒷목.. 크
마틴에게 진리의 주체가 남성이었고 그런 기대가 없었기 때문에 루스에 대한 감정이 계속 이어질 수 있었다는 해석도 좋네요.. 전 생각 못했던 부분입니다. 좋아요 만번 누르고 가요!!!!!

독서괭 2023-10-17 13:22   좋아요 1 | URL
ㅎㅎ 은오님 좋아요 만개 감사합니다.
아무리 봐도 마틴의 지식이 확장되어 가면서 부르주아들 가차 없이 까는데 루스는 뒤로 제껴 놓는 게 거슬리더라고요. 그 모순을 깨닫지 못하나? 막판에 사랑이 아니었다고 깨닫긴 하지만..
마지막 부분 쓰면서 찾아보니 잭 런던의 여성관에 대한 비판도 많았다고 하니, 제 느낌만은 아닌가 보다 했습니다.

책읽는나무 2023-10-17 12:4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루스의 입장이 조금 아쉬웠던 소설이었어요.
그리고 리지 캐릭터도 충분히 매력적이면서 마틴에게 영향력을 줬을 법한 역할인데 가볍게 처리했던 것도 아쉬웠었구요. 작가가 남자라서 그런가보다 넘겼습니다.
오로지 마틴이 하고자 하는 행동...일 안하고 소설을 쓰는 행위가 진린데 루스는 그걸 이해못하고 옆에서 바가지만 긁는 것 같은 묘사가 좀 싫었지만 또 마틴을 한 인간으로 봤을 때 천재적 재능을 타고 났음에도 계급의 장벽에 부딪쳐 쓰라린 좌절을 겪을 수밖에 없었던 점은 마음이 아팠어요. 그런 사람들 많지 않았을까? 싶더군요.
하루키 작가도 요 마틴 에덴 소설 많이 좋아했다더군요.^^
괭 님의 리뷰는 속 시원한 사이다 맛이 있어요.ㅋㅋㅋ

독서괭 2023-10-17 13:27   좋아요 1 | URL
옆에서 바가지만 긁는 ㅋㅋㅋㅋㅋ 그러게요. 전에 다락방님도 리뷰에 내가 루스였더라도 기다려 주기 힘들었을 것 같다고 쓰셨는데, 저도 공감합니다. 책나무님 지적대로 여성 캐릭터 가볍게 처리해 버리는 거 보면서 어쩔 수 없는 옛날 남자구나 싶었어요. 마틴에 완전히 이입하면 끝까지 좋았을 테지만,, ㅠㅠ
하루키.. 그렇군요. 하루키는 제가 딱히 좋아하질 않아서 ㅋㅋ
사이다맛 칭찬 감사합니다 ㅋㅋ 앞으로도 시원한 리뷰를 약속드리며... (??)

단발머리 2023-10-31 22:2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그때의 나와 지금의 나, 그때의 작품과 지금의 작품은 하나 다르지 않은데, 당신들은 왜 달라졌지?

저는 이 질문이 가장 무거웠고 좋았으면서도 싫기도 했구요. 마틴이 루스에 대해 가졌던 기대에 대한 부분, 독서괭님의 해석에 수긍이 되어 혼자 끄덕끄덕 하고 있습니다. 같은 책을 읽고 감상을 나눈다는 일이 이렇게나 즐겁네요.
다른 책도 많이 좀 읽으시고 많이 좀 써주세요!!

독서괭 2023-11-01 13:10   좋아요 0 | URL
네, 단발님. 저 질문을 되뇌이는 마틴의 마음을 알 것 같아 짠하면서도, 어쩔 수 없는 거 아닌가 싶기도 했고요.. 정작 자기도 루스의 배경이랄까 자라난 환경 때문에 사랑하게 된 거면서 말이예요.
끄덕끄덕 해주시니 신납니다 ㅎㅎ
저도 많이 좀 읽고 싶어용.. 많이 쓰지 못하는 건 게을러서 ㅋ
 
술라
토니 모리슨 지음, 송은주 옮김 / 문학동네 / 2015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술라.... 이 인물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이 소설의 배경은 대체로 1920~1930년대 조그만 흑인 마을이지만, 2020년대 대한민국의 독자에게도 강렬하게 다가오는 이유는 인물 때문이리라. '술라'보다는 '넬'처럼 살아가는 대부분의 사람들, 특히 여성들에게 '넬'의 존재는 '술라'를 이해하기 위한 좋은 대척점이자 통로라고 할 수 있겠다. 소녀 시절 둘도 없는 단짝이지만 자라온 환경도 성격도 전혀 다른 두 사람은 결국 다른 길을 가게 되는데.. 이런 설정은 엘레나 페란테의 나폴리 시리즈를 떠올리게 한다. 


'넬'의 어머니 헐리 라이트는 창녀인 어머니로부터 멀리 도망쳐 넬을 키우고, 넬에게서 반짝이는 어떤 것이라도 발견될라치면 그걸 깊숙이 묻어버리는 사람이었다. 증조할머니의 장례에 참석하기 위해 떠난 여행에서, 늘 당당하고 우아했던 어머니가 백인 앞에서 "조금 전에 걷어차여 내쫓겼던 거리의 개가 걷어차인 바로 그 푸줏간 문설주에서 금세 꼬리를 흔드는 것처럼"(38쪽) 미소짓는 모습을 보고, 유색인 화장실이 설치되어 있지 않아 도로변에 쭈그려앉아 소변을 보는 일을 겪으면서, 넬은 그 누구도 아닌 "나 자신"으로 살겠다고 결심하고, 여행을 떠나는 상상을 하기 시작하지만 결국 보텀에서 한 발자국도 나가지 못한다.

반면, '술라'는 늘 사람이 오가고 구조가 바뀌는, 혼란으로 가득 찬 집에서 자라났다. 할머니 에바는 세 아이의 목숨을 자기 한쪽 다리와 맞바꾸었고, 그렇게 살아남은 첫딸 해나는 일찍 남편을 잃은 후 술라와 함께 에바의 집에서 함께 산다. 술라의 어머니 해나는 늘 남의 남자와 정사를 나누는 사람, 술라를 "사랑하지만 좋아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사람이었다. 술라는 자기 아이를 불태우는 사랑을 보았고, 놀아주던 아이를 물에 빠뜨려 죽게 해도 숨길 수 있음을 알았으며, 어머니가 불타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렇게 술라는 아무런 책임도 지지 않고, 어떤 자아도 확립하지 못한 상태로 보텀을 떠난다. 그리고 10년 만에 돌아온다. 


'술라'가 돌아와 마을에서 보인 행보는 전복적이다. 그녀는 결혼하지 않고, 한 남자와 한 번씩만 자며, 할머니를 부양하지 않는다. 그 대가로서 술라는 마녀화 되는데, 술라를 신비한 악마적 존재로 대하는 사람들의 수군거림과 달리 오히려 그녀는 아이 같고, 물 같다. "그녀는 자신만의 생각과 감정을 탐색하고 오로지 거기에만 매달리면서, 남의 쾌락이 자신을 즐겁게 해주지 않는 한 그 누구도 기쁘게 해줄 의무감을 느끼지 않으면서 살아왔다. 고통을 주는 것만큼이나 기꺼이 고통을 느끼고, 쾌락을 주는 것과 동등하게 쾌락을 느끼려 한 그녀의 삶은 실험적이었다.(...) 한마디로 자아라는 게 없었다. 그런 이유로 그녀는 자신을 입증해야 할, 자기 자신으로 죽 남아 있어야 할 어떤 의무감도 느끼지 않았다."(171,172쪽) 

술라가 결국 누군가를 소유하고 싶은 욕망이라는 걸 처음 느끼게 되었을 때, 그 대상은 떠나버렸다. 그때야 비로소 술라는 "난 모든 노래를 다 불러봤어. 다 불러봤다고. 존재하는 모든 노래를 다 불러봤어."(197쪽)라며, 자기 자신을 찾은 만족감을 느낀 것이 아닐까? 남들처럼 살면서 술라를 이해하길 거부한 넬에게, 술라는 이렇게 말한다. 내 외로움도 내 것이라고.


"정말? 그 증거로 보여줄 수 있는 게 뭔데?"

"보여줘? 누구한테? 얘, 내 마음은 내가 갖고 있어. 그리고 그 안에서 벌어지는 것도. 무슨 말이냐면, 나는 내 거야."

"외롭잖아, 그렇지 않니?"

"그렇지. 하지만 내 외로움도 내 것이야. 지금 네 외로움은 누군가 딴사람 거고. 딴사람이 만들어서 너에게 건네준 거지. 그게 뭐 대단하니? 중고 외로움이지."  (205쪽) 



-------------------이하 스포일러 주의-------------------


<술라>는 그 전체가 모순으로 가득 차 있다.

'보텀bottom'이라는 이름의 흑인 마을이 실은 언덕배기에 자리하였다는 모순 - 백인들이 거주하는 골짜기 메달리온을 바람으로부터 막아주는 역할을 하는 바로 그 언덕배기에 위치한 흑인들의 참담한 삶이 있고, 거기서 모든 이야기는 진행된다. 또한 죽음에 대한 공포를 잊기 위해 '전국자살일'을 만든다는 모순, 자기 아이를 태워 죽인 어머니가 또 다른 자기 아이를 불에서 구하기 위해 2층에서 뛰어내렸다는 모순, 한 여자를 마녀로 만듦으로써 다른 모든 마을 사람들이 애정으로 뭉쳤다는 모순. 


한편 이 소설 속 여성들의 특징은 대단히 강인하다는 것인데, 대체로 남성들이 처자식을 두고 떠나버리거나 고통을 이기지 못하고 술과 약에 취하는 것과 대비된다. 특히 강렬했던 인물은 술라의 할머니 에바. 그녀는 남편 보이보이가 떠나버린 후 "1달러 65센트와 달걀 다섯 개, 사탕무 세 개"를 가지고 어린 세 아이를 건사하며 살아내야 했다. 한겨울 밤중에 배가 아파 우는 막내 플럼을 안고 변소로 가서 마지막 남은 라드(고기기름)를 이용해 손가락으로 변을 빼내 준 날, 그녀는 굳은 결심을 하고 아이들을 이웃에 맡긴 채 떠난다. 그녀는 세 아이의 목숨을 자기 한쪽 다리와 바꾸었고, 그렇게 살린 플럼을 제 손으로 떠나보냈다. 하, 이 장면에서 나는 심장이 조여들고 목메여서 잠시 읽기를 중단해야 했다..ㅠㅠ 



메달리언 주민 누구라도 가장 더운 날로 기억할 오늘, 너무 더워서 파리도 잠을 자고 고양이도 털을 깃처럼 펼치고 있는 날, 너무 더워서 임신한 부인네들이 나무에 기대 울고 있는 날, 여자들은 석 달 묵은 상처를 떠올리며 애인의 음식에 유리 가루를 넣고 남자들은 음식을 보고 그속에 유리가 들었을지 모른다고 의심하면서도 너무 더워서 먹지 않고는 배길 수가 없어 그것을 먹었을 만큼 더운 날, 이렇게 더운 때 중에서도 가장 더운 날에도 에바는 살을 에는 듯한 추위와 변소의 악취에 덜덜 떨었다.  (106쪽)


어쩌면 토니 모리슨은 이렇게 처참한 이야기를 아름다운 문장들에 담을 수 있을까? 짧은 분량이 참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드는 소설. 마법적이고 우화적인 요소가 있으면서도 리얼리티를 잃지 않는 소설. 몰아서는 결코 읽을 수 없겠으나, 계속하여 읽으리라 다짐하게 만드는 토니 모리슨의 작품.


* ㅈㅈㄴ님 리뷰를 찾아보니 내가 거기에다 "어서 책 읽고 리뷰 마저 읽으러 올게요"라고 썼던 게 2년 전이다 ㅋㅋ  


11월에 그가 떠났을 때 에바에게 남은 것은 1달러 65센트와 달걀 다섯개, 사탕무 세걔였다. 무슨 감정을 어떻게 느껴야 할지도 알 수 없었다. 아이들에게는 그녀가 필요했고 그녀에게는 돈이 필요했고 자신의 삶을 꾸려나갈 필요가 있었다. 그러나 당장 세 아이들을 먹여 살릴 일이 너무나 절박해서, 분노할 시간과 에너지가 둘다 생길 때까지 이 년 동안은 자신의 분노를 미뤄야 했다. - P53

그를 오랫동안 깊이 증오하게 되리라는 사실을 알고부터 그녀의 마음은 즐거운 기대감으로 가득찼다. 누군가와 곧 사랑에 빠지게 되리라는 것을 알고 행복한 조짐이 나타나기만을 기다릴 때처럼. 보이보이를 증오하면서 에바는 그 증오로 살아나갈 수 있었다. 증오로 자신을 정의하고 강하게 만들로 일상에서 상처입지 않도록 보호하고 싶은 한, 혹은 그럴 필요가 있는 한, 그 증오는 안전했고 흥분을 주었고 지속적이었다. - P59

악의 목적은 그것을 견디는 것이며, 사람들은 (그렇게 하기로 결심했는지조차 알지 못한 채) 홍수, 백인들, 홍역, 기근과 무지를 견디기로 결심했다. 그들은 분노는 잘 알았지만 절망은 몰랐다. 자살하지 않는 것과 같은 이유로 죄인들에게 돌을 던지지 않았다. 그들이 할 법한 일이 아니었다. - P131


댓글(15) 먼댓글(0) 좋아요(2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거리의화가 2023-09-18 20:4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2년 전 약속을 지키신 건가요?ㅎㅎ 술라 저도 읽어야 하는데...ㅠㅠ 스포될까봐 저도 리뷰는 나중에 읽어야할 것 같습니다.

독서괭 2023-09-19 07:17   좋아요 0 | URL
2년이 그냥 후딱 지나가버렸네요^^;; 화가님 술라 갖고 계신가요? 금방 읽으니 주말에 한번 펼쳐보셔요^^

책읽는나무 2023-09-18 21:1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호...지킨다면 지킨다!!ㅋㅋ
전 이 책을 읽었다고 여겼는데 음...안 읽었나 봅니다. 전혀 색다른 내용!!

독서괭 2023-09-19 07:17   좋아요 1 | URL
몇년이 지나든 지킨다면 지킨다 ㅋㅋㅋ 저도 리뷰 안 써두면 좀 지나면 새롭더라고요?ㅋㅋ 리뷰를 써야 합니다!

은하수 2023-09-18 21:5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2년만에 드뎌 해내셨네요~~~
저도 이 책 읽은 듯한데 안 읽었고 이렇게 다른 이웃님들 리뷰를 읽은 거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어요^^

독서괭 2023-09-19 07:21   좋아요 1 | URL
ㅎㅎㅎ 여러 리뷰를 읽다보면 읽은 듯한 느낌이 들죠. 하지만 토니 모리슨은 직접 읽어보시는 걸 추천드립니다~!

잠자냥 2023-09-18 22:3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잘했어요. 괭 2년! ㅋㅋㅋ

독서괭 2023-09-19 07:22   좋아요 1 | URL
큭큭큭 장기 프로젝트…. 😂😂😂

다락방 2023-09-18 22:4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우리는 모두 ㅈㅈㄴ 님 리뷰에서 만나는건가요..

아 그런데 이 책 읽기 너무 힘들겠네요. 너무 힘들겠어요. ㅠㅠ

잠자냥 2023-09-18 23:08   좋아요 2 | URL
토니 모리슨은 재미(?)있습니다.

독서괭 2023-09-19 07:23   좋아요 2 | URL
<빌러비드>만큼 힘들진 않아요 다락방님. 저는 좋기도 빌러비드가 더 좋았지만. 재밌는데, 무심하게 툭툭 던져놓는 처참함이… 쩝… ㅜㅜ

페넬로페 2023-09-19 08:3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댓글로 ˝읽겠습니다, 읽어야 겠어요˝, 라고 말한 거 세어보면 엄청날 것 같아요.
ㅎㅎ
술라는 읽었는데 기억이 잘 안나 다시 읽어야겠어요~^

독서괭 2023-09-19 13:06   좋아요 1 | URL
페넬로페님, 저도 읽고싶다, 읽겠다고 해놓고 못 지킨 일이 너무 많아서.. 요즘은 그 말은 잘 안 합니다 ㅋㅋ
술라 기억 안나시면, 짧으니 재독 고고!!

새파랑 2023-09-19 12:4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토니 모르슨 작품이 좀 비참한 이야기가 많군요. 강인해보이기도 하지만 ㅜㅜ 술라가 사람 이름이었군요~!! ㅋ

독서괭님 리얼 토니 모리슨 찐팬이십니다~!!

독서괭 2023-09-19 13:07   좋아요 1 | URL
네 새파랑님. 술라 등장까지 시간이 좀 걸려서 뭘까, 했네요^^
토니 모리슨 찐팬 되려면 멀었습니다. 가지고 있는 <재즈>랑 <보이지 않는 잉크>도 언젠가 읽겠죠~!
 
호르두발 지만지(지식을만드는지식) 소설선집
카렐 차페크 지음, 권재일 옮김 / 지만지(지식을만드는지식) / 2013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죽은 후에 사람들은 나에 대해 뭐라고 말할까?

지인이 사망했을 때, 혹은 죽은 사람에 대해 신문에서 떠드는 모양을 볼 때, 많은 이들이 이런 생각을 해볼 것이다. 

오래전 부검에 대해 알게 되었을 무렵, 나는 꼭 부검이 필요 없는 명확한 사인(死因)에 의해 죽게 되기를 바랐다. 그때는 신체가 낱낱이 해부되는 게 불편하고 유족에게 끔찍한 일이라 그랬지만, 이제는 정신적인 측면에서 더욱 그걸 바라게 되었다. 말이 많이 나게 되는 죽음, 그 원인을 파헤치다 보면 망인의 진실에 다가갈 수 있을까? 


<호르두발>은 부정적인 답을 내놓는 것으로 보인다. 이보다 앞서 읽은 <평범한 인생>에 비하여 어둡고 공허한 느낌을 주는데, 해설을 보면 조금 이해가 된다. <호르두발>에서 '어느 누구도 주인공의 진실에 접근할 수 없다'는 명제(테제)가, <별똥별>에서 '누구라도 주인공의 진실에 접근할 수 있다'는 반명제(안티테제)가 제시되며, 마지막으로 <평범한 인생>은 '주인공 자신의 내면에 들어 있는 여러 모습을 통해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진실을 확보'하게 되는 합명제(진테제)를 담아냄으로써 카렐 차페크의 '철학 3부작'은 완성된다. (284쪽) 


내용을 간단히 보자. 

유라이 호르두발은 고향에 아내와 어린 딸을 두고 돈을 벌러 아메리카에 갔다가 8년 만에 귀향한다. 추레한 모습으로 도착한 남편을 본 폴라나는 몹시 당황할 뿐 조금도 반겨하는 기색이 없는데.. 딸 하피에는 아빠가 낯설기만 하다. 집 안의 머슴으로 들어와 있다는 스테판 마냐는 호르두발과는 여러모로 반대편에 있는 젊은 사내다. 이들의 기묘한 동거생활, 호르두발의 누구에게도 뱉어내지 못하는 괴롭고 외로운 독백이 1부의 전반부를 구성한다. 폴라나와 스테판이 그렇고그런 사이라는 소문을 듣게 된 호르두발은 스테판을 내쫓지만, 폴라나의 무언의 시위에 견디지 못하고 하피에와 약혼시키겠다며 스테판을 다시 데려오고, 스테판의 성질을 계속 긁은 후 다시 내쫓는 희극을 벌인다. 어느 날 빗속을 헤매고 온 호르두발은 병을 앓아 눕게 되는데... 

전체 분량의 2/3를 차지하는 1부(이 소설은 3부로 이루어졌다)는 호르두발의 떠들썩한 침묵(호르두발은 말수가 매우 적지만 그의 내면에서는 여러 사람과의 대화가 오간다)으로 이루어져 다소 지루한 순간도 있다. 하지만 끝까지 읽고나면 이 부분이 꼭 필요했음을 알게 되니 꾹 참고 읽어 보시길. 


--------이하 스포일러 주의-----------


2부와 3부는 완전히 분위기가 다르다. 화자가 바뀌었기 때문. 이미 사인(死因)이라는 말을 던져두었기 때문에 새삼 스포일러가 되지 않을 수도 있다. 바로 호르두발의 죽음 이후에 일어난 일들을 다루고 있는 것. 호르두발의 죽음은 사인도 경위도 동기도 불명확하여 경찰관들이 수사에 나선다. 2부에서 수사를 마치고 3부에서는 법정 풍경이 펼쳐진다. 피고인으로 기소된 것은 폴라나와 스테판. 많은 사람들이 증인으로 나와 호르두발의 삶에 대해, 폴라나와 스테판의 행적에 대해 증언한다. 우리는 1부에서 호르두발의 내면을 보아 그의 진실을 '어느 정도는' 알고 있으므로, 2,3부에서 그의 진실이 어떻게 왜곡되는지 보면서 허탈함을 느낄 수밖에 없다. 


호르두발이 고향에 돌아오면서 소중히 품에 안고 온 상당한 액수의 달러는 매우 상징적인 역할을 한다. 그는 그 돈으로 무엇을 할까 상상한다. 소를 사고, 폴라나가 팔아버린 목초지를 다시 사고, 마을 사람들에게 한턱 내며 우쭐대고.. 하지만 그 모든 것은 그의 머릿속에서만 진행될 뿐이다. 그는 자신의 생각을 입밖에 내지도 실행하지도 못한다. 결국 그의 죽음 후 그가 목에 걸고 다니던 돈주머니는 사라지고 만다. 

과연 표현되지 않은 선의는, 전달되지 않은 생각은 진실이라 할 수 있을까? 또는 고인의 생전에 그의 의사로 분명히 표현된 것이라 하여 진실이라 믿을 수 있을까? 호르두발은 생전에 그의 모든 재산을 "부인으로서의 그녀의 정절과 사랑에 보답하기 위해" 폴라나에게 상속한다는 내용의 유언장을 작성해 두었다. 또한 그는 생전에 스테판과 하피에를 약혼시키고 그에게 상당한 재산을 주려고 했다. 그러나 이러한 행위에 의해 우리는 그가 품었던 생각- 의심과 선의-도 알 수 없고 그 자체(폴라나의 정절과 사랑)를 사실로 믿을 수도 없다. 호르두발 살인사건에 대한 아무런 직접적인 증거도 없고, 스테판의 자백은 증거와 들어맞지 않는다. 진실은 대체 무엇인가? 진실이란.. 과연 존재는 하는 걸까? 


유라이 호르두발의 심장은 어딘가에서 분실되었고 영원히 매장되지 않았다. (281쪽)


이 작은 마을에서 남편을 배신하고 머슴과 간통하며 심지어 남편을 죽이기까지 한(아마도) 폴라나는 순식간에 악마화/마녀화 된다. "자신의 부인을 믿지 못하는 삶은 과연 어떠할까!"(248쪽), "그런데 폴라나의 목을 매달지 않는다고 한다면 여자들이 조만간 줄줄이 자기 남편들을 살해하지 않을까?"(249쪽)

이런 상황에서 변호인의 아래와 같은 변론은 중요한 부분을 지적한다. 


신사 여러분, 잠시 생각을 해보시기 바랍니다. 우리들 중 그 누가 자신의 가까운 사람이나 이웃 사람 앞에서 완전히 안전하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들은 주위사람들이 여러분들에 관해서 어떻게 말하고 있는지 혹시 아십니까? 아마도 이 여자에 관한 것보다도 더 나쁜 것일 수 있습니다. 어떠한 완전무결도 비열한 험담과 중상으로부터 여러분들을 보호할 수 없을 것입니다. (266쪽)    



이 책도 곱씹을수록 좋았는데, 별을 네 개 준 이유는 1부가 다소 지루해서 다시 읽을 것 같지는 않았기 때문. 그래도 카렐 차페크의 철학 3부작은 소장하게 되지 않을까 싶다. 이미 <별똥별>을 사두었다. 


댓글(6) 먼댓글(0) 좋아요(2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다락방 2023-09-15 11:5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266쪽 인용문이 진짜 허를 찌르네요. 그러게요. 저도 비열한 험담의 대상으로 수시로 소환될텐데요. 다른 사람의 험담을 일삼고 다른 사람의 프라이빗한 상황을 가벼이 전달하는 그 모든 사람들은 자신이 험담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을 수시로 해야 할텐데 말입니다.
책 너무 재미있을 것 같아요. 저는 언제 죽을지 모르는 인생이니 평소에 정리정돈을 잘해둬야 할텐데 생각해요. 제가 없는 곳에서 제 자리 정리하려던 사람은 경악할 테니까요.. ㅠㅠ
생각만 하고 있네요. ㅠㅠ

독서괭 2023-09-15 12:55   좋아요 2 | URL
또다시 생각나는 다락방님의 책상샷...ㅋㅋㅋㅋㅋ
전 가끔 갑자기 죽게 되면 알라딘 서재를 어떻게 해야하나, 서친님들께 어떻게 알려야 하나 고민해봅니다. 가족,친구 누구도 모르고 있기 땜시.. 한명한테만은 얘길 해놔야 하나 싶기도 하네요. 가끔 갑자기 사라지는 서친님들 계신데 궁금하고 걱정도 되고 해서요 ㅠㅠ
이 책 좋아요 다락방님. 그러고보니 <평범한 인생>에서 병든 노년의 화자가 열심히 하는 일이 책상정돈이었던 것 같은데 ㅎㅎ 이 책도 읽어보시면 좋겠네용!
참, 인용문 보면서 저도 그런 생각 했습니다. 그리고 나 자신도 남의 얘기는 더 조심해야겠다 다짐하게 되네요.

페넬로페 2023-09-15 20:4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호르두발, 별똥별, 평범한 인생
순서로 읽어아 하는 건가요?
우리가 사실 타인에 대해 얼마나 알 수 있을까요!
내 속에 있는 나도 모르는데요.

독서괭 2023-09-15 21:15   좋아요 1 | URL
페넬로페님, 순서대로 읽을 필요는 없을 것 같아요^^ 땡기는 것부터 읽으심 될 듯요. 저도 알 수 없다고 생각하는데 반테제라는 별똥별은 어떤 내용일지 궁금합니다!

새파랑 2023-09-15 21:4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와우 ㅋ 독서괭님 차페크의 팬이 되신거 같습니다 ㅎㅎ 스포일러 위까지만 읽었는데 완전 재미있을거 같습니다~!!

독서괭 2023-09-16 13:13   좋아요 1 | URL
차페크 계속 읽을 것 같아요^^ 새파랑님 이 책도 좋아하실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