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트] 빌레뜨 1~2 세트 - 전2권 창비세계문학
샬롯 브론테 지음, 조애리 옮김 / 창비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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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책표지가 너무 예뻐서 별 세 개는 먹고 들어간다. ★★★

조애리 교수님의 자연스러운 번역에 별 한 개 추가 + ★

남은 별 한 개는 줄까 말까? 깊게 고민하지 않았다. 샬럿 브론테의 이름 앞에 공손히 별 한 개 추가 + ★

= ★★★★★


농담이다. 사실은 샬럿 브론테와 루시 스노우에게 별 네 개. 번역과 예쁨은 별 한 개다. 

아니다. 그냥 내가 이 책을 갖고 있고 싶기 때문에 별 다섯 개다. <제인에어>를 재독해봐야 어느 작품이 더 좋은지 따져볼 수 있을 텐데. 지금으로서는 <제인에어>가 <빌레뜨>보다 조금 음울하게 느껴진다. 제인에어가 어땠는지 잘 기억나지 않지만, 루시 스노우의 조용한 듯 하면서 빈정대고 아무렇지 않게 사실이 아닌 대답을 하기도 하며 타인을 예리하게 관찰하는 모습이 좋았다. 그래서 일단은 빌레뜨 승. 

<폭풍의 언덕> 재독을 시작했기에 <빌레뜨>의 기억이 희미해지기 전에 빨리 리뷰를 남겨야한다. 



* 아래에는 스포일러가 있을 수 있으니 주의하세요! 



리뷰를 쓰기 위해 빌레뜨 1권 앞부분을 훑다가 발견한 내용에 소름이 돋았다. 처음 읽을 때는 별 생각이 없었는데.

폴리나, 우리 사랑스러운 꼬마 폴리나. 그녀는 어머니의 죽음 후 루시의 대모 브레턴 부인의 집에 맡겨진다. 그런데 이 어머니란 사람은 "아주 예쁘지만 경박하고 조신하지 못한 여자여서 아이를 제대로 돌보지 않고 남편의 마음을 상하게 하고", 그래서 별거하게 되었는데 "별거한 지 얼마 안되어 이 부인은 무도회에서 지나치게 춤을 추다가 감기에 걸렸고, 열이 나더니 얼마 안돼 사망했다."(1권 9,10쪽) 무도회에서 지나치게 춤을 추다가 사망하다니? 이거야말로 '빨간 구두'를 위시해 많은 작품이 응징하는 '자기 욕망을 숨기지 않는 여성' 아닌가? 그렇게 어머니를 잃고 오로지 다정한 아버지 홈씨에게 의존하게 된 어린 폴리나. 어린 나이에도 폴리나는 아버지에게 차를 따라드리며 시중을 들고, 바늘에 찔려 피가 나면서도 손수건에 감침질을 하는 등 '여성적'인 행동을 해 아버지를 기쁘게 하려 애쓴다. 그녀는 맡겨진 브레턴가에서도 이 집안의 유일한 남자로서 장래 가문의 주인이 될 대모의 아들, '그레이엄 브레턴'에게 애정을 쏟는다.브레턴가를 떠나 성숙한 열여덟로 성장한 폴리나는, 사회가 요구하는 '완벽한 신붓감'이다. 그녀는 아버지로부터 남편 존에게 이양되면서도 그들 둘을 자신에 대한 사랑으로 묶어둠으로써 평화롭고 보기좋은 가부장적 가족을 완성한다. 


반면, 루시는 어떤가? 그녀의 가족이 몇이나 있는지, 어떻게 되었는지 작가는 어떤 자세한 정보도 주지 않는다. 친척집에 머물던 루시를 대모 브레턴 부인이 데려가 돌보게 되었고, 반년 정도 머물다가 고향에 돌아갔으나 철저히 혼자가 되었으며, 우연히 마치몬트 여사의 집에 말동무로 들어가게 되고, 그녀가 죽자 영국을 떠나 우연히 '빌레뜨'라는 도시에 도착하여 베끄 부인이 운영하는 학교에 영어교사로 취업하게 된다. 어디 보자! 브레턴 부인은 일찍 남편을 잃고 아들 하나를 두었다. 마치몬트 여사는 오래전 연인을 잃은 후 홀로 은둔하며 살았다. 베끄 부인 역시 독신 여성으로 혼자 학교를 이끈다. 폴리나와 반대로, 루시의 운명의 별은 그녀를 남성의 보호(구속) 아래 두지 않는다. 결말에서 루시는 마침내 꿈을 이루어 새로운 학교의 교장이 되는데, 비록 거기에 남성의 도움이 있긴 했지만 그 남성은 부재한 상태다.   


그런데 폴리나를 이토록 순종적인 여성으로 만든 데는 루시 스노우도 한몫 했다. 그녀는 그레이엄이 자신을 좋아하는지 불안해하는 여섯살의 폴리나에게, "조바심치지 말고 그에게 너무 많은 걸 기대하지 마. 그러지 않으면 널 귀찮아할 거고 그때는 모든 게 끝난단다."라고 조언하고, 폴리나는 "그럼 착한 아이가 될게요. 착해지도록 할게요, 루시 스노우." 라며 다짐하는 것이다..(1권 50쪽) 이렇게 '착한 아이'로 자라난 폴리나는, 재회한 그레이엄, 아니 이제는 존 박사가 쓴 러브레터를 받았을 때도 조바심치지 않고 귀찮게 하지 않으면서, 정석대로 조심스럽게 구애를 받아들인다. 


<다락방의 미친 여자> 12장에서, 저자들은 "폴리이자 루시이고 지네브라이자 마담 베크인 루시"(719쪽)라며 폴리(나) 역시 루시의 일부라고 해석한다. 폴리가 루시의 일부라면, 그녀는 가부장제가 요구하는 여성의 종속에 순응하고 싶어하는, 그들이 요구하는 모든 요건에 들어맞는 완벽한 여성이 되어 그 안에 편안하게 안주하며 남들의 부러움을 얻고 싶은 루시의 욕망 한줄기를 형상화한 존재가 아닐까. 폴리나가 떠나기 전, 루시는 아이의 자는 모습을 바라보며 "이 아이가 어떻게 이 세상을 헤치고 싸워나갈까? 책이나 내 이성에 따르면 모든 인간이 겪게 마련인 충격과 거절, 굴욕과 외로움을 이 아이가 어떻게 견딘다지?"라며 걱정한다.(1권 53쪽) 그러나 폴리나는 이 걱정을 보기좋게 배반하고, "축복받은 한쌍"으로서 "야곱이 사랑했던 아들의 삶처럼 '위로 하늘의 복과 아래로 깊은 샘의 복'을 받"은 삶을 산다.(2권 302쪽) 이 축복받은 한쌍의 연애를 가까이에서 지켜보고 도와주면서, 때로는 존에 대한 동경과 갈망으로 괴로워하면서, 자신의 "험난한 세상을 가로질러 난 어두운 길을 가"(2권 304쪽)듯 하는 삶을 꿋꿋이 살아가는 루시는 그들에게 부여된 운명을 인정한다.


루시의 또하나의 자아, 지네브라 팬쇼. 그녀는 마치 폴리나의 죽은 어머니처럼, 경박하고 눈에 띄기 좋아하는 화려한 소녀다. 그녀가 루시의 일부라면, 그녀는 순종과 억압을 뚫고 욕망을 실현하고 싶어하는 루시의 또다른 욕망 한줄기를 형상화한 존재일 테다. 끊임없이 몰래 또는 대놓고 교사와 학생들을 감시하는 베끄 부인 또한 루시의 일부라면, 그녀는 루시의 욕망을 억압하고 제약하는 자기검열의 형상화겠다. "마담 베크는 억압의 상징이고, 루시가 행하는 자기 억제의 투사이자 전형"(<다락방의 미친 여자> 713쪽)인 것이다. 

이처럼 "자아라는 집 내부의 갈등 속에서 루시 안의 서로 대립하는 존재들은 루시의 내면이 파편화되었음을 보여준다. 결국 이 파편화는 루시를 완전한 신경쇠약으로 내몰고 말 것"(다락방, 719쪽)이라면, 루시의 목표이자 작가의 목표는 파편화된 자아를 통합하는 데 있어야 한다. "(...)제인 에어처럼 루시는 사랑의 필요와 혼자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을 감수함으로써 통합되고 성숙하고 독립된 정체성을 획득하기 위해 투쟁해야 하는 모든 여성을 대표한다. 그리하여 제인처럼 루시도 빅토리아 시대 사람들이 '잉여 인구'라고 일컬었던 독신 여성들에게 맡겨진 쇠약해지는 역할을 돌파해야 할 필요성에 직면할 것이다."(다락방, 709~710쪽)


이 목표를 어떻게 달성하는가? 앞서 언급했듯이 루시는 폴리나에게 주어진 운명을 자신에게서 분리하고 담담히 인정함으로써 미련을 버린다. 지네브라 팬쇼는 그녀답게 연인과 사랑의 도피 행각을 벌여 루시로부터 떠나간다. 루시는 따로 학교를 세워 마담 베크로부터 독립한다. 루시를 괴롭혔던 수녀 유령의 정체 역시 밝혀져 더이상 두렵지 않다. 


이쯤에서 뽈 에마뉘엘 선생 얘기도 해야겠다. 나는 다락방님이 중간에 "대체 루시가 누구랑 연결되는거냐?"고 궁금해하실 때 "2권 중반 읽고 있는데도 모르겠어요"라고 답했는데, 그때 이미 존은 아닌 게 밝혀졌지만 모르겠다고 한 것은, 과연 이 뽈이 제대로 사랑할 수 있는 인간인지 사랑받을 만한 인간인지 모르겠어서였다. 처음에는 존인가? 했다. 낯선 도시 빌레뜨에 처음 도착했을 때 도와준 사람, 의사로서 학교에 왕진을 오는 그 사람이 오래전 만났던 브레턴가의 아들 그레이엄이라니, 게다가 기절한 루시를 구해 집으로 데려가다니! 이건 운명이 아닌가... 아니었다. 뽈이 누이동생 운운 했을 때는 "지금부터 오빠동생 할까?"가 생각나서 콧방귀를 뀌었다. 샬럿은 이 소설에서 로맨스는 뺸 것이 아닐까? 의심하기도 했다. 흠흠. 


그래도 잘생기고 바람직한 존 박사보다 뽈 선생 쪽을 선호하게 되는 부분이 있다. 뽈은 처음부터 루시 안에서 그녀의 숨겨진(억압된) 면모를 발견하고 계속 그걸 끌어내는 인물이다. 루시의 그런 면을 비난하고 타박하기도 하지만 굳이 끌어내 보이게 하여 루시 스스로도 모르던 자신의 일면을 발견하게 하는 사람이다.(뽈의 대사: "당신은 억눌러줘야 하는 사람이니까." -1권 243쪽) 루시가 자발적으로는 절대 맡지 않았을 연극에서의 바람둥이 역할도, 뽈이 강제로 맡겨 결국 훌륭하게 해냈다. 뽈은 미술관에서 클레오파트라를 그린 관능적 그림을 유심히 보고 있던 루시를 발견하고 타박하면서 얌전한 그림을 보게 강요하기도 하고, 루시가 수수하지 않은 옷을 입으면 잔소리하는 짜증나는 인간이다. 하지만 루시가 지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그녀의 능력을 시험해보고, 책을 가져다주기도 하고, 늘 그림자속에 숨어있는 듯한 그녀로 하여금 감정을 드러내고 화내고 반박하게 하는 존재이기도 하다. 어쨌든 그는 루시의 자아 통합을 도와주는 역할을 한다. 자기 감정을 인정하는 것부터가 시작이니까. 


그밖에 이 소설의 매력을 꼽아보자면, 대화문에서 오는 것 같다. 루시와 지네브라 사이의 대화와 존과 어머니의 대화를 특히 재미나게 읽었다. 번역가 실력인지 굉장히 현대적으로 느껴지기도 했다. 

더 많은 이야기가 있고, 특히 <다락방의 미친 여자> 12장을 읽으니 그냥 넘겼던 소설 속 에피소드 하나하나가 의미심장하게 느껴지지만, 전부 파헤쳐보기에는 능력부족, 택도 없으니 여기서 마쳐야겠다. 

불운을 현실로 받아들이는 것도 힘들었지만, 나는 원래 상황을 이상화하기엔 너무 무미건조한 성격이라 불운을 과장할 수도 없는 사람이었다. -1권 55쪽 - P55

"왜? 그중 한 아가씨가 망원경으로 날 보며 비웃어서 그러냐? 예쁘지만 그렇게 멍청한 애가 지껄인 걸 가지고 늙은 귀부인이 화낼 것 같으니?" "존경스럽고 지혜로운 노부인이시군요! 아직은 아내를 열명 준다 해도 어머니와 바꾸지 않겠어요." "너무 내놓고 그러지마라, 존. 그러다 내가 기절하면 넌 날 업고 가야 하니까. 그렇게 짐을 지고 가다보면 생각이 바뀌어 ‘어머니, 어머니보다는 아내 열명이 훨씬 낫겠어요!‘라고 소리칠걸." -1권 343,344쪽 - P343

가끔씩은 삶이라는 계좌를 마주하고 솔직하게 셈을 해보는 것이 좋다. 항목들을 계산하면서 자신을 속이고 불행 항목에 행복이라고 써넣는다면 그는 불쌍한 사기꾼이다. 고뇌를 고뇌라고 부르고, 절망을 절망이라고 부르라. 단호하게 힘주어 굵은 필치로 둘 다 써넣으라. 그러면 ‘운명‘에게 진 빚을 갚기가 더 수월해질 것이다. -2권 179쪽 - P179

나는 잠자리에 죄값을 가져가 밤새도록 얼마나 되는지 헤아렸다. - 2권 217쪽 - P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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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ni74 2022-12-21 20:30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별 추가 과정이 재미있습니다 ㅎㅎ 저도 얼릉 읽어야 하는데 *^^* 전 스포 신경 안쓰는 편이라 오히려 괭님 글 읽고나니 더 읽고싶어집니다. ㅎㅎ편한 밤 보내세요 ~

독서괭 2022-12-22 11:31   좋아요 1 | URL
미니님 스포 신경 안 쓰는 대인배!!! 저도 고전은 스포 알고 읽어도 재미있긴 하더라고요. 그래도 모르고 읽는 편이 궁금증 유발해서 더 빨리 읽게 되는 듯요 ㅋㅋ 감사합니다^^

미미 2022-12-21 22:04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괭님 <폭풍의 언덕>재독하시는군요?!! 저도 재독하고 싶어져 아주 괴롭습니다. <다락방의 미친 여자>는 기존에 읽은 책도 죄다 재독하고 싶게 만드네요. <빌레뜨>는 예뻐서 쓰다듬었습니다ㅋㅋㅋㅋ

독서괭 2022-12-22 11:32   좋아요 2 | URL
미미님 <폭풍의 언덕>은 다시 펴도 참 시작부터 재미납니다. 역시 확 끌어당기는 매력은 에밀리가 최고가 아닐까 싶어요! 빌레뜨 진짜 너무 예뻐서 어디 장식해두고 싶습니다 ㅋㅋ <제인에어>도 재독해야 하는데 바쁘다 바빠..

햇살과함께 2022-12-21 22:5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도 빌레뜨 읽고 싶지만 12월은 다미여 완독과 제인 에어 다시 읽기로 만족하고 내년에 읽기 도전해야겠어요~

독서괭 2022-12-22 11:33   좋아요 2 | URL
햇살님, 다미여 완독에 제인에어 재독만 해도 꽉 차네요^^ 전 다미여 완독은 어려울 것 같고 천천히 가기로 했습니다;; 내년에 빌레뜨로 꼭 읽어보시길요^^

scott 2022-12-23 11:0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괭님 리뷰 읽은 저 ! 🖐
별 하나 ☝추가 해서
★★★★★★

빌레트는 브론테 작품 중에서 가장 좋아합니다 ^^

독서괭 2022-12-23 10:27   좋아요 1 | URL
오우 제 리뷰로 별 하나 추가라니 영광입니다 ㅋㅋㅋ
스콧님 브론테 중 <빌레뜨>를 제일 좋아하시는군요!! 저도 마음에 듭니다. 계속 간직할 것 같아요^^
 
작별인사 (밤하늘 에디션)
김영하 지음 / 복복서가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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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이 인간을 인간으로 만드는가? 철학적인 질문과 사유를 담고 있는 소설이다. 그런데 왜.. 어째서, 뭣 때문인지, 소설로서의 매력을 못 느끼겠는 건 왜일까? ㅠㅠ 나는 입체적인 인물들의 복잡한 심리를 따라가는 걸 좋아하는데, 철이도 선이도 철이아빠도 생생하게 다가오지를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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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괭 2022-11-23 15:1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다만, 작가의 말을 읽으니 역시 김영하 작가의 에세이를 읽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잠자냥 2022-11-23 16:0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철이아빠가 잘못했네요..........ㅋㅋㅋㅋㅋ

독서괭 2022-11-24 10:19   좋아요 0 | URL
철이아빠 왜 그랬어 ㅋㅋ

공쟝쟝 2022-11-23 21:3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역시 김영하는 소설보다 에세이... ㅋㅋㅋㅋ

독서괭 2022-11-24 10:19   좋아요 0 | URL
역시 그런가요? 역시 에세이를 읽어봐야겠어요^^
 
아그네스 그레이 현대문화센터 세계명작시리즈 12
앤 브론테 지음, 문희경 옮김 / 현대문화센터 / 200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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샬럿 브론테의 <제인에어>를 꽤 재미있게 읽었다.

에밀리 브론테의 <폭풍의 언덕>에 매혹당했다. 

그러나 이들의 동생인 앤 브론테는 생소했는데, 기억나지 않는 계기로 이 책을 사둔지 한참 되었으나,

<다락방의 미친 여자>를 읽기 시작한 후 비로소 펴들게 되었다. 

<다락방의 미친 여자>에도 앤 브론테에 대한 언급이 잠깐 나오기는 하지만 비중은 적은데,

집에 있는 많지 않은 19세기 여성작가 소설 중 유일하게 읽지 않은 책이었기 때문이다. 


언니들의 작품이 극적인 요소를 많이 품고 있는 데 비해 

(제인에어는 차분한 분위기지만 감금된 전부인의 존재가 오싹하고 로체스터와의 사랑이나 마지막 화재 등이 강렬하며, 폭풍의 언덕은 폭풍우 치는 밤에 창을 열고 미친 듯이 캐서린을 부르는 히스클리프의 모습을 그린 시작 부분부터 마지막까지 눈을 떼기 힘든 폭풍같은 매력이 있다!) 

<아그네스 그레이>는 대단히 수수하고 평범하며 현실적이다. 그렇다고 지루하지는 않고 소소하고 솔직한 맛이 있다. 특별날 것이 없다는 점 때문에 오히려 독자가 주인공 아그네스에게 이입하기는 쉬울 듯. 제인에어와 로체스터의 사랑이나 캐서린과 히스클리프의 사랑에 대해 고개를 갸웃하는 사람이 많겠지만 아그네스와 웨스턴의 사랑은 지극히 평범하고 '온당해' 보인다. 


아그네스는 서로를 아주 아끼고 사랑하는 부부에게서 태어난 막내딸이다. 어머니는 부잣집 딸이었는데 가난한 그레이에게 반해 모든 걸 버리고 그와 결혼한다. 아버지는 때때로 어머니를 고생시키는 데 죄책감을 느끼지만 어머니는 전혀 불행해하지 않는다. 이때부터 이미 작가가 '부'라는 세속적 가치에 대해 거리를 두고 있음을 느낄 수 있다. 

아그네스는 자신을 아기 취급하는 가족들에게서 떠나 스스로 돈을 벌어 가족에게 보탬이 되고 싶다. 그녀는 상당한 고등교육을 받았기에 가정교사 자리를 구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그녀는 아이들을 돌보는 걸 좋아하고 나름의 교육 원칙이 있기에 부푼 마음으로 일터에 간다. 

그러나 그녀를 가정교사로 고용한 첫 집은 글러먹었다... 부모의 성품은 말할 것도 없고, 그들 아래서 방종하게 자란 아직 어린 아이들(7살 남자아이, 6살 여자아이 등)은 거짓말을 하고, 가정교사를 골탕먹이기 일쑤, 공부에는 뜻이 없으며, 타인을 향한 따뜻한 애정이라든가 귀여운 구석이라고는 하나도 없다. 아그네스는 조금이라도 아이들에게 바른 생각을 심어주기 위해 동동거리지만 소용이 없고, 아이들의 문제는 전부 가정교사 탓으로 취급된다. 


결국 일을 그만두고 집으로 돌아오게 된 아그네스. 그러나 그녀는 포기하지 않고 다시 가정교사 자리를 구한다. 두번째 집은 언뜻 첫번째보다는 나아 보인다. 일단 아이들 나이가 좀더 많다. 하지만 역시 부모는 허위와 위선으로 가득하고 아이들의 인성교육에는 관심이 없으며, 아이들은 가정교사를 무시한다. 첫째 딸 로잘리는 아름다운 용모를 타고 났는데 그 용모를 가꾸고 거기 유혹당한 뭇남성들의 시선을 즐기는 데만 관심이 있다. 둘째 딸 마틸다는 말을 타고 쏘다니는 걸 좋아하고 거친 언행을 하며 공부에는 도통 관심이 없다. 

어쨌든 이 여자아이들과는 나름의 애정과 신뢰를 형성해가며 버티던 아그네스 앞에, 목사관에 새로 부임한 부목사, 웨스턴이 나타난다. 마을의 어려운 사람들을 돕기 위해 드나들던 아그네스는 웨스턴과 우연히 마주치거나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생기고, 그의 진지하고 올바른 성품에 큰 감명을 받는다. 실은 그는 군계일학인데, 이 책에 등장하는 인물들 중 아그네스와 그녀의 가족들을 제외하고는 진실하게 하느님을 믿고(성경구절이 자주 인용됨) 올바른 일을 행하며, 타인에게 따뜻한 애정을 베풀 줄 아는 사람이 단 한사람도 등장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 와중에 로잘리는 여러 남자들을 농락하며 즐기다가 웨스턴에게도 마수를 뻗친다. 아그네스는 크게 상심하지만 티내지 않으려고 애를 쓰는데, 남주인공답게 웨스턴은 넘어가지 않는다. 결국 로잘리는 돈 많은 남자와 결혼하고, 아그네스는 아버지의 임종을 지키러 집에 돌아갔다가, 어머니와 함께 학교를 세우기로 하고 가정교사 일을 그만둔다. 

웨스턴과 어떤 진전을 보지 못한 채 집으로 돌아가 학교 일에 전념하던 그레이스는 어느날 아침 바닷가를 산책하는데, 거기에 짠! 웨스턴이 나타난다. 이후 그는 자주 그녀의 집으로 찾아가고 결국 청혼하기에 이른다. 


대단히 교훈적인 내용이다. 

부를 쫓는다든가, 겉치레에 현혹된다든가, 생명을 함부로 여긴다든가, 자기 신분을 내세워 다른 사람을 무시한다든가 하는 세속적이고 경박한 행태에 대해 소설 전반에 걸쳐 비판하며, 반전 같은 건 없다. 

그러나 <다락방의 미친 여자>를 읽어가고 있는 영향인지 1847년도에 이런 소설을 썼다는 것이 큰 의미로 다가온다.

왜냐하면, 전형적인 사랑 이야기로 보이지만 상당히 독립적이고 강인한 여성상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병들어 쓰러진 아버지로 인해 어려워진 가정형편에서 자신의 능력으로 돈을 벌고자 하는 여성. 부유한 귀족계급의 오만과 위선 앞에서도 굴복하지 않고 내면의 힘으로 버텨가는 여성. 남편이 앓다가 사망한 후에도 자식들에게 기대지 않고 스스로 삶을 꾸려나가는 강인한 여성(아그네스의 어머니). 돈이나 외모, 지위에 현혹되지 않고 내면의 진실함을 알아보아 배우자를 선택하는 여성. 

"여성도 생각할 수 있다. 고귀할 수 있다. 스스로 삶을 꾸려나갈 수 있다!"고 말하는 듯하다.

얌전해보이는 여성의 눈빛에 흔들림 없는 신념이 자리하고 있는 것. 


언니들 소설만큼 매력적이지는 않지만(너무 '온당한' 탓이 아닐지) 당시에 실존했던 인물의 목소리를 듣는 것 같아(자전적인 소설이라고 한다) 느껴지는 묘한 감동이 있었다. 브론테 자매들, 다들 일찍 죽어 안타깝다.. 

사람 마음은 인도산 고무 같아서 조금만 더해도 감정이 북받쳐 오르지만 아무리 더해도 터지지는 않아요. ‘아무것도 아닌 일‘이 생겨도 상심하지만 ‘있는 문제에서 조금만 덜어져도‘ 살 만하지요. 우리 몸 바깥에는 그 자체로 필요한 힘이 생겨서 외부의 폭력에 저항할 수 있게 해준답니다. 우리를 흔드는 모든 힘은 우리를 더 강인하게 만들어줘서 나중에 입을 타격에 맞서게 해주지요. - P167

사람이라면 즐거움을 주는 대상을 사랑하기 마련인데 예쁜 얼굴이 해를 주지 않는다면 그보다 더 큰 즐거움을 주는 대상이 어디 있겠는가? (...) 아름답고 상냥한 여자는 두 가지 자질 모두에 대해 찬사를 듣지만 특히 아름다운 외모는 뭇 남성들의 찬사를 받는다. 하지만 외모와 성격이 모두 별로인 여자는 대단한 죄라도 지은 양 욕을 들어먹는데, 그 까닭은 평범한 외모가 보는 이에게 불쾌하게 비치기 때문이다. - P212

우리는 가난한 사람들을 불쌍히 여긴다. 그들에겐 가족의 죽음을 애도할 여유가 없고 가슴이 찢어질 듯한 고통을 안고도 묵묵히 일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열심히 일하는 것이 우리를 압도하는 슬픔을 이겨내고 절망에서 벗어나기 위한 확실한 처방이 아닐까? 제대로 된 위안거리가 아닐지는 모른다. (...)하지만 누리지 못할 휴식을 탐하기보다 열심히 일하는 게 낫지 않을까? - P2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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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22-11-18 14:0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집으로 돌아가 학교 일에 전념 하다가 어느날 눈앞에 나타난 웨스턴... 의 부분을 읽어보고 싶네요. 크-

쨘- 하고 등장하는 웨스턴
아닛! 하고 놀라는 아그네스
그리고 타오르는 그들의 사랑.. ♡

공쟝쟝 2022-11-18 18:56   좋아요 1 | URL
타오르진 않고 대단히 온건했을 것 같지만…ㅋㅋㅋ

독서괭 2022-11-22 15:59   좋아요 0 | URL
으하하 역시 로맨스 마니아 다락방님은, 그 부분에 꽂히시는군요.
쟝쟝님의 날카로운 지적대로 대단히 온건합니다 ㅋㅋ
조심조심 오랫동안 얌전히 타오르는 불꽃이랄까요.. 나름대로 좋네요^^

새파랑 2022-11-18 15:5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앤 브론테 책은 안읽어봤는데 리뷰만 봐도 왠지 착하고 교훈적일거 같아요 ㅋ

독서괭 2022-11-22 15:59   좋아요 1 | URL
네 되게 착하고 교훈적입니다 ㅎㅎ 슴슴한 맛이네요^^

레삭매냐 2022-11-18 16:1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제인 에어 읽다가 말았는디 -

마저 다시 읽어야 하나요.

독서괭 2022-11-22 16:00   좋아요 1 | URL
매냐님 제인에어 재미없으셨나요? 저는 지금 빌레뜨 읽는데 제인에어보다 재밌는 것 같아요. 제인에어를 다시 읽으면 어떨지 모르겠지만요^^

바람돌이 2022-11-18 20:0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또 에밀리 브론테 말고 에밀리 디킨슨에서 헤매고 있어요. ㅠ.ㅠ
이 소설이 다른 자매들의 작품에 비해서 왜 덜 유명한지는 알겠네요. 굉장히 계몽적인 소설이라는 느낌? ^^
재능있는 이집 자매들은 왜 다 폐가 약해서 일찍 죽었는지.... 문학사의 안타까움입니다.

독서괭 2022-11-22 16:02   좋아요 1 | URL
오 디킨슨 읽으시나요! 저는 시랑은 친하지를 못해서 디킨슨은 손댈 생각도 못했어요^^;
언니들에 비해 앤 브론테의 이 작품은 임팩트가 부족하지 않나 싶습니다. 다락방에 갇힌 미친 여자가 전부인이었다니! 뚜둥- 뭐 이런 요소가 없어요 ㅎㅎ
정말 다 일찍 죽어서 안타깝습니다 ㅠㅠ

moonnight 2022-11-19 11:2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 저도 재미있게 읽은 책이라 반갑습니다^^ 줄거리는 독서괭님 리뷰로 그런 내용이었군@_@; 이러고 있습니다만ㅎㅎ; 모슬린 드레스가 함께 떠오르는 책이에요 ^^

독서괭 2022-11-22 16:03   좋아요 0 | URL
반갑습니다 문나이트님^^ 저도 항상 다른 분 리뷰 보면서 앗 이런 내용이었나..@_@ 이럽니다 ㅋㅋ 참 착한 소설이었어요^^

단발머리 2022-11-19 21:3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독서괭님 글 읽으면서 제가 느낀 점은.... 아, 우리 브론테 세 자매 중에 앤이 제일 순한 맛이구나....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매운 맛 에밀리, 중간 매운 맛 샬럿, 그리고 앤이 순한 맛. 아니면, 착한 맛 ㅋㅋㅋㅋㅋㅋ 독서괭님이 잘 정리해 주셔서 <아그네스 그레이>의 진수를 조금이나마 알게 됐습니다. 고마워요, 독서괭님!

독서괭 2022-11-22 16:04   좋아요 0 | URL
넵 단발님 너무나 정확한 지적이시네요 ㅋㅋ 매운 맛 중간 맛 순한 맛 ㅋㅋㅋㅋ 어릴 땐 매운 맛이 젤 좋았는데 지금은 순한 맛도 나름? 중간맛 <빌레뜨>도 넘 재밌게 읽고 있습니다^^ 저야말로 감사해요, 단발님!
 
가벼운 마음
크리스티앙 보뱅 지음, 김도연 옮김 / 1984Books / 2022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맑고 청아한 웃음소리와 함께, 은쟁반에 옥구슬 굴러가듯 또르르 아름다운 문장들이 가슴속에 들어온다. 철창에 갇힌 늑대에서 하늘을 날아가는 종달새가 된 뤼시처럼, 이 책을 읽고 난 독자도 한결 가벼워지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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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벼운 마음
크리스티앙 보뱅 지음, 김도연 옮김 / 1984Books / 2022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내게는 비밀이 하나 있다. 삶이 나를 정말로 사랑한다는 것이다. 삶은 언제나 내가 그것을 잊으려는 찰나에 나를 만나러 온다. 그러니 무엇 하러 인생을 걱정하겠는가?    - 162쪽 



새벽에 깬 나는 고양이처럼 살금살금 집안을 걸어다닌다, 라고 쓰고 싶지만 사실이 아니다. 발바닥이 방바닥에 붙었다가 떨어지는 소리와 옷자락이 바스락거리는 소리, 무게와 기척 어느 하나 고양이와 비슷하지 않다. 인간은 왜이리 소란스러운가. 인간과 함께 사는 고양이라면 그 점을 신기하고도 가련하게 생각할 법하다. 게다가 육신의 무게를 더 육중하게 만드는 마음이 있다. 지리산 종주를 떠나는 등반객이라도 되는 것마냥 어깨에 등에 꽉꽉 채운 걱정과 불안, 다짐과 후회, 책임감과 죄책감들. 그 배낭을 메고 사뿐사뿐 걸으려 해봐야 헛수고다. 인간은 왜, 담벼락과 담벼락 사이를 뛰어넘는 고양이의 도약처럼 분침과 분침 사이를 퐁퐁퐁 뛰어 다니지 못하는가, 가벼운 마음으로. 


뤼시는 현대의 인간이 가지지 못한 모든 것이다. 그녀는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지 않는다. 가정이 있고, 친구가 있고, 학교에 가고, 결혼을 하고, 일을 한다. 그러나 어떤 일도 가벼운 도약 한번에 뛰어넘을 수 있는 마음은 한없이 자유롭다. 


나는 뤼시가 극강의 ENFP가 아닐까 한다 ㅋㅋ 이 성향은 어머니에게서 온 것인데, 완전히 반대인 ISTJ로 보이는 아버지는 어머니와 딸로 인해 미칠 지경이다. 나는 아버지 쪽에 더 가까운 인간으로서 이런 사람들을 가족으로 둔다는 것이 얼마나 괴로운 일일지 상상이 된다. 그러나 또한 극과 극은 끌리기도 하는 법. 자유로운 영혼을 동경하는 마음이 내 안에도 있다. 자유로운 영혼, 자연과의 교감, 하면 떠오르는 사람(작품)- <그리스인 조르바>를 참 좋아했지만, 여성혐오의 시선이 짙어서 거리낌없이 좋아하기가 꺼림칙했다. 이제 뤼시로 조르바를 대체한다. 뤼시를 동경하는 데는 거리낄 것이 없다. 늑대를 사랑하고, 단풍나무를 사랑하는 뤼시. 


심각한 상황에서도 곧잘 웃음을 터뜨리는 어머니. 뤼시 또한 "때로는 가장 깊은 감정이라 할지라도, 우리의 모든 감정에는 지울 수 없는 희극적 요소가 존재하는 것처럼 보인다."(115쪽)면서, 가벼운 마음의 계보를 이어간다. 결혼하겠다는 뜻을 알려온 뤼시에게 어머니가 보낸 편지는 놀랍다. "감방은 매력적이고 편안하다고 해도 여전히 감방일 뿐"이라며, "교도관도 없고 문도 없고 창살도 없고 자물쇠도 없지만, 감방은 그래도 감방이지."(97쪽)라고 하는 어머니. 더욱 놀라운 것은 이 부분이다.



그래도 네가 내 말을 듣지 않아서 기쁘다. 나는 그게 좋아. 아주 좋은 신호야. 우리가 너를 잘 키웠고, 오로지 자기 마음에만 귀 기울이는 법을 가르쳤다는 얘기니까. 내가 틀리면 좋겠지만, 나는 내가 틀리지 않았다는 걸 알아. 하여간 자식에게 좋은 길은 결코 부모를 위한 길이 아니지. 절대로 아니야.     - 98쪽 


아니 이런 대인배가... 내가 과연 내 자식들에게 훗날 이렇게 말할 수 있을까? 못할 것 같다. 내가 느낀 이 '대인배다'라는 감상을, 뤼시는 이렇게 적는다. 


내 어머니는 자식들이 무엇을 하든 언제나 기뻐했을 것이다. (...) 우리가 천사가 아니라는 사실을 그녀는 아주 잘 알고 있다. 하지만 그건 그녀 혼자만의 비밀로 남아 있을 뿐이다. 누가 됐건, 제아무리 남편이라고 할지라도, 우리의 행동을 조금이라도 비난하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우리를 비판할 권리를 가진 사람은 오직 그녀뿐이다. 그것이 엄마로서 그녀의 특권이며, 그 특권을 결코 사용하지 않는 것이 그녀의 배포다.   - 151쪽 



뤼시는 원하는 모든 것을 경험하며 자란다. 서커스단에서 크면서 남들이 겪을 수 없는 경험들을 하게 되지만, 스스로도 틈만 나면 가출을 행해서 낯선 사람들과 사귄다. 

아이들의 호기심은 대단하다. 아기 때부터 모든 걸 손으로 만지고 입으로 가져가 맛보려 하고, 커가면서 궁금한 게 수없이 많이 생긴다. 사실 호기심을 채우기 위해 어른에게는 허용되지 않는 수준의 일까지도 해볼 수 있는 것이 아이들만의 특권이 아닌가. 하지만 요즘 아이들에게는 그런 특권이 없다. 위험하다거나 다른 사람이 싫어한다거나 하는 이유, 보다 솔직히는 '내가 귀찮아서' 못하게 한 수많은 일들. 어떤 아이들은 방치된 상태로 자유를 누리지만 아이들에게 너그럽지 못한 사회로부터 크게 혼이 난다. '노 키즈 존'까지 만드는 사회에서 뭘 바랄까. 


뤼시는 후의 일은 그때 가서 생각한다는, 어찌 보면 게으른 마인드에 입각해 결혼까지 한다. 뤼시는 로망을 사랑하지 않고, 로망은 뤼시를 사랑한다고 생각하지만 실은 자기 자신에게 빠져 있다.그걸 알기 때문에 후에 이별을 고할 때도 뤼시는 가볍게 그 과정을 통통 지나간다. 사랑에 빠진 같은 아파트에 사는 남자와 헤어질 때도.



그렇다. 때로는 가장 깊은 감정이라 할지라도, 우리의 모든 감정에는 지울 수 없는 희극적 요소가 존재하는 것처럼 보인다. 감정의 깊이는 사랑과 아무런 관련이 없을 때가 많고, 모두 이기심과 연관되어 있는 게 틀림없다. 우리가 우는 것은 자기 자신 떄문이고, 우리가 사랑하는 것은 오로지 자신뿐이다. 이 생각 자체는 그리 어리석지 않지만, 그런 생각 뒤에 슬픔이 따라온다면 어리석은 일이 될 것이다.    - 115, 116쪽 



이 소설은 뤼시가 어떻게 자기 자신을 형성해가는지에 관한 이야기다. 

유년에 만난 늑대의 눈에서부터 형체를 갖추기 시작한 뤼시의 기질은 스스로 '수호천사'라고 부르는 존재로 의인화되는데, 그가 주로 하는 일은 하품이며, 뤼시에게 "강력한 수면 욕구를 주어서 세상으로부터 (그리고 나로부터) 나를 떼어 놓는 것"(175쪽)이다. 잠시 기질과 어긋나는 길- 성공을 향해 사다리를 올라타는 일에 매진해보기도 하지만, 결국 수호천사의 부름에 따라 그녀는 사다리를 걷어차고 혼자 호텔에서 글을 쓴다. 그렇게 그녀는 성장하는데, 바로 어머니가 편지에서 말한 것처럼, 뤼시는 그녀를 사랑하는 사람들로부터 떨어져 나와 혼자가 되고 나서야 성장할 수 있었음을 깨닫는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과 함께 성장할 수 없다. 우리는 그들이 우리에게 품은 사랑, 우리를 충분히 안다고 믿는 사랑에서 벗어나야만 성장할 수 있다. 우리는 그들에게 말하지 않을 것들을 할 때야 비로소 성장할 수 있다. 설사 그들에게 말한다 해도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그런 것들은 보이지 않고, 붙잡을 수 없고, 그들이 던져준 사랑의 망토로 덮을 수 없으며, 우리 속에 머물러 우리의 일부를 이루기 때문이다.   - 177쪽 


뤼시의 가벼움은 경박함이 아니다. "카르페 디엠, 순간을 즐겨라"와 비슷하려나. "모든 건 처음부터 사라지며 소멸해 간다는 것이다. 이런 생각으로 절망할 필요는 전혀 없다. (...) 그 때문에 오히려 주저하지 않고 사랑할 수 있으며, 그 생각으로 나는 이 순간에도 노래 부를 수 있다."(154쪽)는 태도. 아무 생각 없이 즐기는 것이 아니라, 삶을 비극으로 만드는 인간의 모든 한계들을 인식하고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니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더욱, 그 삶을 가벼운 발걸음으로 노닐듯 지나갈 수 있다는 것. 

책을 읽는 내내 아름다운 문장들이 내 속에서 뛰노는 듯했다. 어쩔 수 없는 엄마인 나는, 아이들을 키울 때 지켜야 할 '거리두기'를 생각한다. 너무 가깝지 않게, 너무 멀지도 않게. 아이들은 혼자 있을 때 성장한다는 것을 유념하도록.  



누구도 아닌 나의 신이여, 나에게 매일 일상의 노래를 주소서. 어릿광대이신 나의 신이여, 경의를 표합니다. 나는 당신을 전혀 생각하지 않지만, 그 밖의 모든 것을 생각합니다. 그걸로 이미 충분합니다. 아멘.   - 146쪽 



* 역시 믿고 읽는 자냥오별이었다 ㅋㅋㅋ 

나는 어머니의 말 이후, 그것에 대해 깊이 생각했다. 만일 내가 더는 사라지지 않는다면, 그건 나에게 사라질 필요가 더는 없다는 뜻이다. 결혼은 여전히 여성이 보이지 않게 되는 가장 좋은 방법이다. - P120

생각해 보면 아마도 우리는 서로가 서로에게 던져버린 이 생애 안에 있는 것 같다. 나는 가장 위대한 기술은 거리두기의 기술이라고 생각한다. 너무 가까우면 불타오르고, 너무 멀면 얼어붙는다. 정확한 지점을 찾아서 유지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그건 현실 속의 모든 배움처럼 비용을 치러야만 배울 수 있다. - P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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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읽는나무 2022-10-27 21:00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mbti가 ENFP와 ISTJ가 서로 극과 극이어서 힘들다구요?? 맞는 말 같기도 합니다.
저희 부부는 INFP와 ESTJ거든요.
앞이 서로 바뀌어도 엄청 힘들거든요ㅜㅜ

독서괭 2022-10-28 17:55   좋아요 2 | URL
극과 극은 힘들기도 하지만 끌리기도 하는 것 같습니다^^
요즘 MBTI 놀이(?)에 재미를 붙이다보니, 소설 읽으면서도 MBTI가 뭘까 생각하게 되네요 ㅋㅋ
책나무님도 배우자와 완전 반대시군요! 서로 다른 거 맞춰가느라 고생하셨겠어요^^;;

미미 2022-10-27 21:38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괭님!! 저 엔프피인데ㅋㅋㅋㅋㅋ사랑스럽고 자유로운 뤼시 너무 좋았어요.
뤼시의 엄마가 진짜 대인배는 대인배죠. 아빠가 그렇게 독불장군처럼 굴어도 늘
웃어주고...그런데 삶의 철학은 또 이리 남다르니. (놀라운 결혼관)그런걸보면
뤼시엄마가 혈액형은 AB형이 아니었을까요? AB형이 타고난 철학자라고 하더라구요.^^*


독서괭 2022-10-28 17:56   좋아요 2 | URL
미미님 엔프피 ㅋㅋㅋ 사랑스럽고 자유로운 미미님이닷!
뤼시엄마 진짜 신기했어요. 본인이 자유로운 건 그럴 수 있는데, 아이를 방치하는 것도 아니고, 사랑하면서 그렇게 자유롭게 풀어주는 거요. 현실에 있기는 하지만 많지 않은 캐릭터 같아요.
저 고등학교 때 제일 친했던 친구도 엔프피더라고요^^

새파랑 2022-10-27 22:27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마지막 문장이 핵심이네요 ^^ 아름다운 문장들이 많다고 하시니 읽어보고 싶네요~!!

잠자냥 2022-10-27 23:46   좋아요 4 | URL
마지막 문장이라면 자냥오별?! ㅋㅋㅋㅋㅋㅋ

새파랑 2022-10-28 06:05   좋아요 4 | URL
맞습니다 ㅋ 믿고 보는 잠자냥님 별 다섯이죠 ㅋ

독서괭 2022-10-28 17:57   좋아요 4 | URL
역시 새파랑님 핵심을 알아보시는 능력이 훌륭하십니다 ㅎㅎㅎ
시적이고 잔잔해요. 새파랑님도 읽어보심 좋을 듯 합니다^^

잠자냥 2022-10-27 23:45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뤼시 ENFP설에서 빵터졌습니다. ㅋㅋㅋㅋㅋㅋ 진짜 그럴 거 같기도. I로 시작하는 저는 뤼시 같은 딸래미나 배우자 있으면…….. ㅋㅋㅋㅋㅋㅋㅋㅋ

독서괭 2022-10-28 17:58   좋아요 3 | URL
‘극강의‘ ENFP 라고 부연합니다 ㅋㅋ 저도 I로 시작해서요, 또 끝이 J인 사람들은 P의 즉흥성에 많이 당황할 듯.. 뤼시도 뤼시엄마도 좋지만 막상 내 가족이면 너무 스트레스 받을 것 같습니다 ㅎㅎㅎ

다락방 2022-11-04 08:41   좋아요 1 | URL
안녕하세요, ESFP 입니다!!

독서괭 2022-11-04 16:22   좋아요 0 | URL
ㅋㅋ 한끗차이 다락방님!!

mini74 2022-10-30 11:4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런 비빌이라면 진짜 좋겠어요 한 백개쯤 갖고 싶은 비밀 ~ 믿고보는 자냥오별 ㅎㅎ 북플의 새로운 사자성어 인가요 자냥오별 !!!

독서괭 2022-11-03 14:42   좋아요 1 | URL
그러게요 저도 그런 비밀 갖고 싶습니다 ㅎㅎㅎ 자냥오별은 사랑입니다. 후회가 없어요! 미니님 추천 영상도 믿고 보는 쏘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