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주에는 눈길을 끄는 교양 교양과학서도 여럿 눈에 띈다. 그중에서 한권만 골라야 한다면, 영국의 수학자 이언 스튜어트의 <아름다움은 왜 진리인가>(승산, 2010). 대칭성과 방정식이란 주제를 다루고 있는 수학책인데, 오래전에 나온 <자연의 수학적 본성>(동아출판사, 1996)을 떠올리게 한다(<자연의 수학적 본성>은 <자연의 패턴>(사이언스북스, 2005)로 재출간됐다). 고등학교 때 이런 책을 접했더라면 수학에 좀더 친근함을 느꼈을는지도 모르겠다. 소개기사를 옮겨놓는다.

 

한겨레(10. 03. 20) 나비도 방정식도 ‘대칭’이라 아름답다

팔랑거리는 나비가 아름답다면, 그 두 날개가 대칭을 이루기 때문일 것이다. 복잡한 수식으로 채워진 방정식이 아름답다면 그것은 ‘등호’(‘=’·‘이퀄’)를 가운데에 두고 등가의 두 값이 팽팽히 긴장한 채 대칭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인간의 얼굴도, 인간의 몸도, 그 가운데를 위아래로 죽 내리긋는 선분을 상상할 때 좌우 대칭하고 있지 않은가. 가장 아름다운 얼굴은 완벽한 대칭이라는 견해도 있다. ‘대칭’(對稱·symmetry)은 ‘자기 닮음’이다. 이를 확장하면 ‘반복적 자기 닮음’이다. 인간은 대칭을 이룬 건물을 아름답다 느끼며, 자기 자신을 닮은 인간을 사랑한다. 인간의 유전자 속에는 ‘대칭은 아름답다’는 명제가 각인되어 있는지도 모른다. 

영국의 수학자 이언 스튜어트가 쓴 <아름다움은 왜 진리인가>(2007년)는 수학자들의 방정식 정복 과정을 톺아봄으로써 오늘날 물리학과 우주론을 구성하는 개념들 중 하나로 떠오른 ‘대칭’이라는 복잡한 주제를 독자의 흥미를 돋우는 글솜씨로 펼쳐놓는다. 자연의 패턴을 비롯한 대칭성 연구로 이름난 학자인 지은이는 수학에서 왜 아름다움은 반드시 참인지, 수학적 공식의 아름다움은 왜 자연과 우주의 아름다움에 곧장 맞닿아 있는지를 드러내 보인다.

방정식만 해도 시쳇말로 ‘해골이 복잡’해지는데, 알면 알수록 더 복잡한 ‘대칭’이론까지 알아야 할 까닭은 무엇인가. 지은이의 말을 따르면 대칭이란 자연 혹은 우주, 곧 물리적 세계를 보는 심오한 방식인바, 그 길로 가는 초입에서 맞닥뜨리는 것이 바로 방정식이다.

먼 옛날 3000여년 전에 유프라테스 강가 바빌로니아 문명의 수학자들이 2차방정식을 푼 이래, 인류는 끈질기게 방정식을 발견하고 풀어왔다. 고대 그리스 기하학을 집대성한 유클리드의 가장 큰 업적은 수학적 증명의 개념을 도입했다는 데 있다. 또한 유클리드는 증명이란 반드시, 이미 참으로 간주된 어떤 명제들로부터 시작되는데 그 명제들은 증명될 수 없다는 점을 깨달았다. 증명의 시작점은 증명되지 못한다는 ‘역설’이다. 중세 유럽의 암흑기엔 페르시아의 시인 우마르 하이얌이 유클리드 기하학을 바탕으로 3차방정식의 해법을 발견했으며, 르네상스 수학자들은 3차와 4차방정식을 (증명은 못했지만) 풀어낸다.

인류의 방정식 정복의 여정은 그러나 5차방정식에서 멈추었다. 5차방정식은 250년 가까이 풀리지 않았다. 이 문제는 프랑스 대혁명기 급진 혁명사상가이자 결투를 벌이다 21살에 숨진 천재 수학자 에바리스트 갈루아(1811~32)에 의해 비로소 ‘해결’됐다.

갈루아 이전에도 일부 5차방정식의 근(해)이 존재함은 알아냈는데, 문제는 ‘그 방정식의 근을 수학공식, 곧 대수(代數)공식으로 표현할 수 있는가’였다고 지은이는 말한다. 1828년 열일곱 살이던 갈루아는 어떤 5차방정식은 풀리는 데 반해 다른 5차방정식은 풀리지 않는다면 그 둘을 구분하는 기준은 무엇인지를 생각했다. 그는 이것이 ‘방정식이 지니는 대칭’에서 비롯됨을 발견했다. 요컨대 일반적인 5차방정식은 그것이 부적당한 종류의 대칭을 가졌기 때문에 근호(=루트)로 풀 수 없다는 것이다. 이는 6차, 7차 등등 5차 이상의 방정식에서 다 적용된다. 이 해답이 수학과 물리학의 진로를 바꾸어놓았다고 지은이는 말한다. 5차방정식을 풀 수 없는 이유를 이해하여 갈루아가 발견한 ‘대칭’으로부터 수학의 대확장이 시작된다.

갈루아에게서 시작되어 이후 더 촘촘해진 ‘대칭’이란 무엇인가. 대칭은 그 대상의 구조를 보존하는 변환이자 치환이며, 사물을 재배열하는 방식이다. 5차방정식은 풀 수 없다는 갈루아의 발견은 바로 ‘군’론(group theory)으로 나아간다. ‘군’은 대칭을 나타내는 언어다. 주어진 대상의 대칭들을 모두 뭉뚱그려 ‘군’이라 부른다. 대칭이란 아이디어는 완전히 새로운 물리학의 창을 열었으니, 갈루아의 ‘군’론은 19세기 후반 들어 수학자 마리우스 솝후스 리가 생각해낸 연속적인 무한군, 곧 ‘리군’(Lie group)으로 발전한다. 이 ‘리군’이 현대 물리학의 화두인 시간, 공간, 물질의 심층구조와 관련이 있다고 지은이는 말한다.

따라서 지은이는 ‘대칭’이 자연과 우주, 그 물리적 세계의 비밀을 풀 수 있는 ‘만물 이론’에 이르는 길을 안내해 줄지도 모른다고 말한다. 현대 물리학의 두 기둥, 곧 상대성이론과 양자론은 이론적으로 서로 충돌하는데, 이 두 체계를 넘어 시공간에 대한 새 이론을 세우는 데 ‘군’론이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20세기 초, 두 이론을 통합하려 했던 아인슈타인의 시도는 실패했지만, 역사학도 출신 물리학자 에드워드 위튼(59)은 리군의 대칭 개념을 발전시킨 초대칭 개념(=양자장론)을 통해 양자론과 상대성이론의 조화를 시도하고 있다. 상대성이론과 양자론을 통일하는 과정은 그저 난해한 수학적 과제를 푸는 문제일 수 있다고 지은이는 말한다.(허미경 기자) 

10. 03. 19.  

P.S. <아름다움은 왜 진리인가>와 경합을 벌인 책은 후쿠오카 신이치의 <동적평형>(은행나무, 2010)이다. 저자는 <생물과 무생물 사이>(은행나무, 2008) 이후에 연이어 소개되고 있는 일본의 생물학자이자 과학저술가다. 안드레스 에드워즈의 <지속가능성 혁명>(시스테마, 2010)과 함께 나중에 실물을 확인해봐야겠다. 일단은 소개기사를 챙겨놓는다.    

경향신문(10. 03. 20) 당신이 먹은 음식이 당신 몸의 분자가 된다

쇤하이머란 과학자가 이런 실험을 한 적이 있다. 동물의 소화과정을 보기 위해 단백질에 포함된 중질소에 표시를 한 뒤 쥐에게 먹였다. 중성자가 8개인 중질소는 양성자 7개, 중성자 7개로 된 일반 질소에 비해 미량으로 존재하지만 무거워서 질량분석계로 측정해보면 쉽게 찾을 수 있다. 쇤하이머는 단백질은 아미노산으로 분해돼 우리 몸을 움직이는 연료가 될 것이고, 중질소는 대부분 배설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실험 결과는 의외였다. 배설된 투여량은 27%에 불과했고, 나머지 질소는 모두 몸속에 흡수됐던 것이다. 실험 결과는 우리 몸이 꾸준히 분해, 합성하고 있다고 해석할 수 있다. 새 손톱이 헌 손톱을 밀어내듯이 끊임없는 분자의 교환작용이 일어나고 있고, 우리 몸을 이루는 분자는 어제와 오늘이 다르다는 것을 의미한다. ‘내가 먹는 음식이 바로 내가 된다는 것’이다. 분자생물학자인 작가 후쿠오카는 이런 의미에서 ‘생명이란 동적인 평형 상태에 있는 시스템’이라고 규정한다. 따라서 환경은 항상 우리 몸속을 관통하고 있고, 우리 몸도 환경의 일부라고 설명한다.

 

이 책 전반에 흐르는 주제는 동적 평형이지만 우리 주변에서 흔히 들을 수 있는 소재를 예로 들어 쉽게 풀어준다. 이를테면 똑같은 양의 음식을 섭취하더라도 조금씩 나눠먹을 때보다 한 번에 많이 먹을 때 체중이 늘어나는 원인, 먹는 콜라겐이 피부 탄력에 효과를 줄 수 없는 이유, 나이가 들수록 세월이 빨리 흐르게 느껴지는가에 대한 과학적 견해, MSG가 들어간 음식을 왜 맛있다고 느끼는가에 대한 분석을 중학생 정도의 과학상식만 있으면 알아들을 수 있게 설명한다. 눈여겨볼 것은 첨단 분야의 과학자인 작가가 심장은 펌프이고, 신체는 그 부속이라는 데카르트의 기계론적인 생명관에 반대하는 것이다. 줄기세포를 배양해 우리 몸의 기관을 따로 만들어 불치병을 고치겠다는 생각에 대해서도 작가는 비판적이다. 생명을 기계론적으로 조작하기 불가능한 것으로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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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바다 2010-03-20 10:26   좋아요 0 | URL
5차 방정식의 일반해가 불가함을 최초로 증명한 사람은 노르웨이의 아벨로 알고 있었는데 갈루아만 언급된 것은 좀 이상하군요. 책에도 그렇게 되어 있는지, 아니면 기자가 갈루아만 뽑아 낸건지 궁금하군요. 아벨이나 갈루아 모두 위대한 수학자이지만 5차방정식은 아벨, 군론은 갈루아 이런 연상이 일반적이라고 생각합니다.

로쟈 2010-03-21 10:27   좋아요 0 | URL
둘다 관련된 것 같아요...
 

이번주에 나온 책들 가운데 관심도서는 정치학과 교양과학서쪽이다. 두 개의 페이퍼로 갈무리할 작정인데, 일단 정치분야의 책으로 먼저 꼽을 수 있는 건 가라타니 고진의 대담집 <정치를 말하다>(도서출판b, 2010). 고진 입문서로도 제 격일 듯싶은 책의 리뷰기사를 챙겨놓는다. 

 

경향신문(10. 03. 20) 그대, 왜 침묵하는가? “데모크라시의 길은 직접민주주의 뿐” 

일본을 대표하는 세계적인 비평가이자 사상가 가라타니 고진(69)이 국내에 본격 소개되기 시작한 것은 1990년대부터였다. 근대문학이 정치·사회·윤리적 역할을 떠맡았지만 이제 근대문학의 그런 역할은 끝났다는 주장을 담은 그의 저서 <근대문학의 종언>은 2000년대 한국 문학계에 큰 논쟁거리를 제공했다.

여기저기 그를 인용한 글들이 자주 보이기에 그가 쓴 책을 처음 집어들었던 게 10년 전쯤이었다. <마르크스 그 가능성의 중심>(이산)이었는데 한마디로 잘못된 선택이었다. 일본에서 신좌익운동이 붕괴한 70년대에 쓰여진 이 책은 식상할 대로 식상해진 마르크스 해석을 대체하는 새로운 시각을 제시했다는 극찬을 받았다고 하는데 에세이 형식이라고는 하지만 당시 나의 지적수준으로선 요령부득이었던 것이다. 
 
며칠 동안 이 책을 잡고 끙끙대다가 던져버린 뒤로 나에게 가라타니는 요령부득인 상태로 계속 남아 있었다. 지난해 일본에서 출간된 대담집을 번역한 <정치를 말하다>는 나처럼 ‘가라타니 읽기’에 도전했다가 실패를 경험한 사람이거나 처음 입문하려는 독자에게 꼭 알맞은 책이다. 학생운동에 투신했던 대학 시절부터 최근에 이르기까지 그가 걸어온 사상적 궤적을 대화체로 풀어냈기 때문이다. 그가 60년대 일본을 격렬하게 달궜던 ‘안보투쟁’을 어떻게 바라봤고, 왜 경제학을 공부하다 영문학으로 전공을 바꾸었으며, 어떻게 문학평론가가 됐다가 결국 문학을 포기했는지, 단체를 만들고 사회참여를 하다가 왜 단체를 해산해 버렸는지 등을 열정적으로 설명했다.

자연스럽게 그가 썼던 책들에 대한 요약과 부연이 담겨 있어 해당 책을 본격적으로 읽기 전에 논지를 파악하는 데에도 유용하다. 자본주의에서 중요한 것은 마르크스가 주목했던 생산과정이 아니라 유통과정이라는 분석, 국가를 경제적 하부구조에 의해 규정되는 상부구조로 다루는 기존 마르크스주의와 달리 ‘국가는 다른 국가에 대하여 존재한다’는 등 그의 독특한 시각들 말이다.

제목에도 나와 있듯 가라타니가 이번 책에서 던진 주요 메시지는 정치와 민주주의, 평화다. 가라타니는 90년대에 만개한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가 외적으로는 제국주의, 내적으로는 전제주의로 귀결됐다고 보았다. 그는 특히 일본사회에서 노조가 파괴되고 대학이 민영화되면서 중간세력이 없어졌고 전제사회가 됐다고 말한다. 대의제 민주주의는 개개인이 투표를 통해 주권자로서의 권리를 행사한다고 하지만 이는 곧 개인에게 가능한 것은 대표자를 뽑는 것뿐이다. 
 
가라타니는 전제주의에서 벗어나는 길은 대의제 이외의 정치적 행위를 찾는 것이라면서 ‘데모’, 다른 말로 하자면 직접민주주의의 필요성을 강조한다. “대의제란 대표자를 뽑는 과정입니다. 그것은 민중이 참여하는 데모크라시가 아닙니다. 데모크라시는 의회가 아니라 의회 바깥의 정치활동, 예를 들어 데모 같은 형태로만 실현된다고 생각합니다.”

문학비평지 ‘비평공간’을 창간했다가 닫아버리고 새로운 ‘혁명운동’으로 생각하며 ‘생산·소비협동조합운동(NAM)’을 조직했다가 일거에 해산해 버린 이유에 대한 설명도 흥미롭다. “어차피 끝날 거라면 아직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쪽보다 그만두는 쪽이 좋다고 생각”해 그랬다는 것이다. 가라타니에 천착해 한국 기성문학계를 끊임없이 비판하고 있는 역자 조영일은 이에 대해 “실패가 아니라 엘리트의 자기우상화에 대한 강력한 거부였던 셈”이라며 “가라타니는 민주주의에 대한 입장을 그 자신에게도 철저하게 적용한 것”이라고 해석했다.(김재중기자)  

10. 03. 19. 

P.S. 가라타니 고진의 민주주의론과 견주어 볼 만한 책은 영국의 정치학자 데이비드 헬드의 민주주의론이다. 두툼한 교재용 책 <민주주의의 모델들>(후마니타스, 2010)도 이번주 신간이다(<민주주의 모델>(인간사랑, 1989)이라고 출간됐던 책의 개정판 새번역이다). 간단한 리뷰기사를 옮겨놓는다. 

세계일보(10. 03. 20) 민주주의에 대한 진지한 성찰 '민주주의의 모델들'

현재 지구상에 존재하는 대부분의 국가는 스스로 민주주의 국가임을 자처한다. 하지만 민주주의를 자칭하는 정권의 말과 행동이 늘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민주주의의 역사 역시 마찬가지다. 민주주의 사상이 우리에게 정치적인 것에 대한 열정과 영감을 불러일으킨다면, 민주주의의 실제 역사는 끊임없이 우리를 당혹스럽게 한다.

런던정치경제대학교 정치학부 교수가 쓴 ‘민주주의의 모델들’은 그간 역사적으로 등장했고 실험되었던 다양한 민주주의의 이념들과 구체적 실천의 내용들을 유형화·모델화함으로써, 각 모델들이 이런 질문에 어떻게 답하고 있으며, 그 한계는 무엇인지를 묻는다. 그리고 이를 통해 역사적으로 제도화되고 관성화된 민주주의의 의미에 파열을 내고, 우리가 잊고 있거나 새롭게 추가되어야 할 것들이 무엇인지 질문한다.

마침, 오늘의 한국 사회는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를 경험하고 있다. 정부에 대한 민주적 선출, 여야 간의 정권 교체, 진보 정당의 의회 진출 등 민주주의의 형식적 조건 내지 절차는 어느 정도 완성 단계에 도달해 있다. 하지만 치열한 다툼과 희생을 통해 이룩하고자 했던 ‘민주주의’와 현실의 ‘민주주의’ 사이의 간극에 대한 우려로 가득 차 있다. 나아가, 이상적 모델로서의 민주주의와 현실의 작동 방식으로서의 민주주의 사이의 간극으로 혼란을 겪고도 있다.

민주주의는 하나의 이상적 모델로 구현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그렇기에 역사상 존재해 왔고, 이론적으로도 일정한 체계를 갖춘 여러 모델을 비판적으로 살펴보는 것이 중요하다. 민주주의의 열 가지 모델을 살펴보고 있는 이 책은 그 필요에 적절히 부응하고 있다.

저자는 우리나라보다 앞서 비슷한 문제에 직면했던 사회들에서 전개되었던 깊은 사색의 결과물들을 통해 과도기적 혼란을 겪고 있는 우리가 민주주의에 대한 좀 더 진지한 성찰의 계기를 마련해 줄 것을 기대하고 있다.(조정진기자)  

P.S.2. 약간 학술적인 책으론 러셀 달튼의 <시민정치론>(아르케, 2010)도 신간이다. "지난 수십 년에 걸쳐 서구 대의민주주의 국가 시민들의 정치참여 행태를 경험적 자료를 사용하여 분석해낸 비교연구서"로 "한국의 민주화 이후의 시대를 사는 '정치적으로 세련된' 시민들이 자신의 정치행태를 비교ㆍ평가하고 성찰하기 위해 읽어야 할 시민정치 교과서이며, 아울러 정치학도와 선거전문가, 정당관계자에게는 필독서"리고 소개된다. 부제는 '선진산업민주주의 국가의 여론과 정당'. 작년에 나온 키이스 포크의 <시티즌십: 시민정치론 강의>(아르케, 2009)와 짝이 될 만하다. '시민정치'가 새로운 화두인가? 두 책의 원서는 아래와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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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서울비의 알림
    from seoulrain's me2DAY 2010-03-20 13:16 
    [책] 가라타니 고진의 민주주의론 — via 로쟈
  2. 가라타니 고진 다시 읽기
    from 로쟈의 저공비행 2010-04-12 19:47 
    격주간 기획회의(269호)에 실은 전문가 리뷰를 옮겨놓는다. 가라타니 고진의 대담집 <정치를 말하다>(도서출판b, 2010)을 다루고 있다.   기획회의(10. 04. 05) 가라타니 고진 다시 읽기 “일본을 대표하는 세계적인 비평가이자 사상가”, 가라타니 고진을 소개하는 문구이다. <정치를 말하다>는 이 걸출한 비평가이자 사상가의 궤적을 한 눈에 일별하도록 해주는 대담집이다. 대담이라는 형식의 성격상 ‘대
포퓰리즘의 근거와 자유주의의 가장자리

지방선거를 앞둔 때문인지 정치 관련서가 많이 나오고 있는데, 정치인들이 홍보용 책자도 있지만 정치이론서나 비평서도 드물지 않다. 인터넷 논객으로도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다는 안병길 박사의 <약자가 강자를 이기는 방법>(동녘, 2010)도 그런 범주에 속한다. '대통령도 모르는 자유민주주의 바로 알기'가 책의 부제인데, 대략 '자유민주주의를 옹호하는 법'으로도 읽힌다. 포퓰리즘에 관한 참고사항이 있어서 메모해두려고 하는데, 일단은 소개기사를 하나 스크랩해놓는다.   

파이낸셜뉴스(10. 03. 11) 자유·권리 지키려면 ‘귀차니즘’을 버려라 

자유는 만물의 창조주인 하나님이 인간에게 내린 가장 소중한 선물이자 어떠한 경우에도 침해될 수 없는 가장 근본적이고 고귀한 가치다. 그러하기에 이러한 자유가 박탈됐을 때 인간은 목숨을 걸고 항거해왔고 오늘날 우리가 누리고 있는 자유민주주의는 이러한 희생의 대가라고 할 수 있다. 이처럼 고귀한 자유민주주의를 오늘날 우리는 제대로 이해하고 이를 온전한 모습으로 지켜나가고 있는 걸까.

미시간 주립대 및 서울대학교 국제지역원 교수를 지낸 안병길 박사는 최근 저술한 ‘약자가 강자를 이기는 법’을 통해 엉터리 자유민주주의와 권위주의가 판을 치고 있는 현실에 대해 경종을 울리며 자유민주주의를 올바로 이해함으로써 우리의 자유와 권리를 온전히 지켜나갈 수 있다고 역설하고 있다. 우파는 좌파를 빨갱이, 좌빨, 친북이라고 매도하고 좌파는 우파를 수구, 꼴통으로 몰아세우며 자신이 속한 정파만이 정의롭다고 주장하고 있는데 이것은 자유민주주의의 탈을 쓴 권위주의에 불과하다.

교육에 있어서도 자유민주주의에 대한 원리나 개념보다는 공동체주의에 기본을 둬 애국심과 준법정신을 강조하고 개인의 자유와 권리가 마치 사회불안 요인인 것처럼 가르치고 있는데 이것은 권위주의와 연결될 수 있다고 저자는 우려한다. ‘착하게 살아라’는 식으로 절대적 도덕 가치를 기준으로 교육하는데 그것보다는 자유민주주의의 원리를 제대로 가르쳐서 왜 그렇게 살아야 자신에게 더 이로운지 깨우치게 해줘야 한다는 것이다.

저자는 자유주의의 인간 바탕은 그냥 백지로 봐야 한다고 말한다. 백지 안에 무엇을 채워 넣든 그것은 각 개인의 자유로 일단 존중해야 한다. 따라서 인터넷 상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인신공격, 심한 욕설 등의 행위가 나쁘다는 것은 사회적 공감대가 있는 것이지 사람이 궁극적으로 나쁜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자신의 의견과 다른 상대방에 대해 선악의 잣대를 갖다 대 상대방을 악으로 보는 것은 권위주의적인 발상이다. 실제로 많은 사람이 타인에 대해 아무 근거도 없이 틀렸다 나쁘다는 식으로 평가한다. 그러나 이것은 방종이지 결코 자유가 아니다.

그렇다면 자유와 방종의 차이는 무엇일까. 로빈슨 크루소처럼 외딴 섬에서 혼자 살고 있다면 ‘자유=방종’이라는 결론을 내려도 무방하다. 그러나 두 사람 이상이 모여 사는 사회에서는 방종은 상대방의 저항에 직면할 수 있다. 내가 한 행동이나 말이 상대방에게 피해를 주었다면 상대방 역시 나에게 똑같이 대응할 수 있다. 따라서 사회구성원 각자는 게임이론에서 볼 수 있듯이 주어진 상황에서 자신의 행복을 극대화하기 위해 합리적인 선택을 하게 되고 이것이 스스로의 행동을 절제하는 자율로 이어지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한편으로 상대방의 방종에 대해 저항하지 않으면 상대방은 이것을 자신의 자유로 생각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자유민주주의의 가면을 쓴 권위주의자들에 의해 자신의 권리가 침해를 받고 있을 때 저항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대체로 권위주의자는 자신들이 어떤 권위가 있다고 착각하기 때문에 자유주의자들보다 강하다.

자유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서는 우리 모두가 적극적으로 참여해 힘을 모아야 한다. 적극적인 참여를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우리 사회 전반에 만연해 있는 ‘귀차니즘’을 버리고 자신의 자유와 권리를 침해하는 방종에 대해 용기를 내 맞서야 한다. 그냥 귀찮아서 봐준다는 식으로 방종을 내버려 두면 ‘엉터리 자유’가 우리와 우리의 후손들을 억압하게 된다고 저자는 강조한다.(최종옥 북코스모스대표) 

10. 03. 19.  

P.S. 책은 자유주의에 대한 원론적인, 상식적인 옹호론으로 보인다. 물론 한국사회가 그런 상식이 통용되지 않는 사회이기에 저자가 '귀차니즘'을 물리치고 저술에까지 나선 것이겠다. 덧붙여, 포퓰리즘에 관한 참고사항이라고 한 건 저자가 추천한 윌리엄 라이커의 <자유주의 대 집체주의>(1982), <정치적 조작술>(1986) 두 권이다. 라이커는 저자의 박사학위논문 지도교수(가 아니라 은사라 한다). 'populism'을 '집체주의'라고 옮긴 건 특이한 선택으로 보이는데, 선례가 있는지 모르겠다. 내 생각에 '집체주의'는 '집단주의'와 동의어로 보통 'collectivism'의 번역어로 쓰기 때문이다. 그 <자유주의 대 집체주의>에  대한 간단한 소개는 이렇다. 

책 제목에서 암시하는 바는, 집체주의를 경계하면서 자유주의를 잘 운영해야 한다는 뜻이다. 라이커 교수가 설명한 자유민주주의의 요체는 무엇일까? '돌고 도는 세상'이라는 표현에서 유추할 수 있다. 필자는 '자유민주주의에는 절대적인 정답이 없다'로 표현하고 싶다. 상대적으로 더 옳은지 아닌지를 따지는 것이지, 만병통치약 같은 정치제도는 이 세상에 없고, 그런 것이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은 엉터리일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그런 엉터리가 좋아하는 이념이 집체주의라는 것이다.(193-4쪽) 

 

그런 맥락에서 저자는 포퓰리즘뿐만 아니라, 루소의 사상에 기원을 두고 있는 모든 유형의 공동체주의에 대해서도 의혹의 시선을 던진다. 그래서 박세일 교수 등의 <공동체 자유주의>(나남, 2008) 주장에 대해서도 "좋은 것이 좋은 것"이라는 주장에 불과하다고 평한다. "공동체라는 상위 개념을 두는 것 자체가 진정한 자유주의에 어긋난다"는 것이 저자의 기본 입장이자 신념이다. 일종의 자유지상주의인데, 영국의 또 다른 정치철학자 퀜틴 스키너의 자유론과는 대비되는 것이어서 비교해 봄직하다(물론 더 큰 차이는 '진리의 정치'를 주장하는 '레닌주의'와의 차이다).   

  

이번주 신간 가운데는 지식인들의 비판에 맞서 자본주의를 옹호하는 <지식인과 자본주의>(부글북스, 2010), 국가와 시민이 빈곤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수 있는가를 다룬 <빈곤에서 권력으로>(이매진, 2010) 등이 관심을 끄는 책들이다. 주말 북리뷰들이 뜨면 책의 정체가 조금 분명해지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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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조부 2010-03-20 01:43   좋아요 0 | URL
이 책 읽고 싶은 마음이 드는데요?

근데 안병길씨가 인터넷 논객으로도 활동하는줄은 몰랐네요~

로쟈 2010-03-20 09:18   좋아요 0 | URL
주로 이준구 교수의 홈피에서 활동하는 분이라네요.

안병길 2010-04-10 15:36   좋아요 0 | URL
안병길입니다. 제 책에 관심을 보여주셔서 매우 감사합니다. ^^

라이커 교수님은 제 은사님이지만, 지도교수는 아닙니다.
국제정치학자 Bruce Bueno de Mesquita 교수님이 박사논문 지도를 하셨습니다.

Populism을 집체주의로 번역한 것은 라이커 교수님의 저서에서 설명한
Populism의 적당한 표현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로쟈 2010-04-11 23:26   좋아요 0 | URL
아, 제가 넘겨짚었나 보네요.^^; 수정했습니다. '집체주의'는 혼동의 여지가 있는 듯해서요. 아시다시피 요즘은 그냥 포퓰리즘이라고 많이 쓰네요...
 

저녁강의가 끝나고 집으로 오는 좌석버스에서 내일자 한겨레를 읽다가 점찍어둔 기사를 옮겨놓는다. 포퓰리즘에 관한 두 권의 책이 근간 예정이라는 걸 알려준다.   



한겨레(10. 03. 18) 포퓰리즘 민주주의 ‘병리현상’ 아닌 ‘필수요소’ 

4대강 포퓰리즘, 세종시 포퓰리즘, 교육 포퓰리즘, 등록금 포퓰리즘, 무상급식 포퓰리즘…. 무슨 말이든 ‘붙이는 족족’ 언표화돼 인구에 회자되니, 말 그대로 ‘언어의 인플레’가 따로 없다. 정견이 다른 상대방을 향해 언제든 ‘포퓰리스트’란 화살을 날려보낼 준비가 돼 있다는 점에서도 집권당과 야당, 좌파와 우파가 다르지 않은데, 이것이 한국사회에서 갖는 의미는 비교적 명확해 보인다. 포퓰리즘이란 상징이 좌파를 공격하기 위한 우파의 전유물이던 시대는 지났다는 얘기다. 그럼에도 한국에서 포퓰리즘은 여전히 ‘선동’과 ‘중우정치’, ‘대중영합주의’라는 부정적 정치현상을 일컫는 비난의 수사, 경멸의 언어로 통용된다



눈여겨볼 대목은 포퓰리즘 이론의 진원지인 서구 학계가 최근 포퓰리즘을 현대 정치의 병리적 이상 징후로만 바라보던 관점에서 벗어나, ‘현대정치의 일반화된 특성’이자 ‘민주주의의 필수불가결한 구성요소’란 차원에서 새롭게 조명하려는 움직임이 활발하다는 점이다. 이런 흐름을 주도하고 있는 학자가 <헤게모니와 사회주의 이론>으로 유명한 아르헨티나 출신의 포스트 마르크스주의자 에르네스토 라클라우(오른쪽 사진)와 멕시코 출신의 소장 정치학자 벤자민 아르디티(왼쪽)인데, 포퓰리즘을 재해석한 이들의 문제작인 <포퓰리즘의 근거에 관하여>와 <자유주의 가장자리의 정치>가 각각 후마니타스와 그린비 출판사에서 출간을 기다리고 있다. 

이들의 이론이 주목받는 것은 ‘인민에 대한 호소’나 ‘선동적 지도자에 의한 감성 자극 정치’를 포퓰리즘의 특성으로 규정해온 종래의 시도들이 20세기 말 본격화 된 정치지형의 변화 때문에 설득력을 잃게 된 상황과 무관치 않다. 냉전이 해체되고 좌·우파의 구분이 모호해지면서 대부분의 서구 정당은 전통적인 계급노선을 포기하고 국민 전체를 상대로 지지표를 구하는 대중주의 전략을 취하게 됐는데, 이에 따라 정책이나 논리보다는 수사와 이미지로 유권자의 감성을 움직이는 정치가 세력과 진영을 막론하고 각광을 받는 상황이 도래한 것이다. 실제 2008년 미국 대통령 선거 국면에서 오바마 진영이 취한 선거 전략이나 이후 금융위기 수습 국면에서 오바마 행정부가 펼친 정책들 역시 전형적인 포퓰리즘 양상을 띠고 있다는 데 이견을 다는 사람은 많지 않다. 



그렇다면 라클라우는 대체 포퓰리즘을 어떻게 정의하는가. 그의 포퓰리즘론은 “모든 정치는 기본적으로 포퓰리즘”이란 진술 안에 집약돼 있다. 그가 포퓰리즘을 정치와 동일시하는 것은, 포퓰리즘이 주어진 질서에서 소외되거나 배제된 이들의 목소리를 대변하고 그들을 새로운 정치적 주체로 구성하는 것을 목표로 삼기 때문이다. 요컨대 좌파든 우파든 그들이 추구하는 정치는 기존의 합의구조에서 밀려난 다양한 인민의 요구를 관통하는 통일된 슬로건을 제시하고, 이를 통해 그들을 기존 질서에 대항하는 정치 주체로 맞세우는 전략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근본적으로 다를 게 없다는 얘기다. 이런 포퓰리즘의 세 가지 유형으로 라클라우는 아르헨티나의 페론주의와 미국 인민당, 터키의 케말 파샤를 꼽는데, 이들은 각각 좌와 우, 중도파의 포퓰리즘을 대변한다.

책을 번역한 임승준 인권의학연구소 연구원(정치학 박사)은 “라클라우의 저작은 대표작인 <사회주의와 헤게모니 전략> 이후 자신의 오랜 이론활동을 마무리하는 작업으로, 소외된 대중을 정치적 주체로 구성하는 포퓰리즘이 일탈이나 비정상이 아니라 모든 정치 행위를 관통하는 근원적 특성임을 보여주는 중요한 저작”이라고 평가한다. 



반면 아르디티는 포퓰리즘을 ‘민주주의의 증상’으로 이해한다. 여기서 ‘증상’이란 개념은 프로이트에게서 빌려온 것인데, 자아의 형성을 위한 본능의 억압과정에서 만들어지는 ‘대리표상’이자 ‘내부의 주변부’ 같은 것이다. 요컨대 포퓰리즘이란 민주주의에 이질적인 어떤 것이나 적대적 타자가 아니라, 민주주의에 속하면서 동시에 민주주의에 불안과 소요를 일으키는 ‘민주주의의 내적 주변부’에 다름 아니라는 것이다.

이런 아르디티의 판단 근거는 민주주의에 내장된 이중성이다. 민주주의는 일상적으로는 정치인·관료 등 전문가 집단에 의해 관리되고 운영되지만 동시에 선거라는 대중의 직접 참여를 통해 자신의 정당성과 작동 근거를 확보해야 한다. 이 때문에 민주주의는 정치의 영역 안으로 주기적으로 대중의 개입을 초래하게 되는데, 이런 이중성이야말로 포퓰리즘의 존재론적 뿌리가 된다는 게 아르디티의 견해다. 따라서 민주주의가 이 두 측면 가운데 어느 하나라도 포기하지 않는 한, ‘인민 의지의 직접적 표현에 대한 열망’으로서 포퓰리즘은 민주주의에서 결코 사라질 수 없다고 아르디티는 단언한다.

그러나 이들의 포퓰리즘 재해석 역시 약점은 있다. 진태원 고려대 연구교수는 “라클라우의 재해석은 포퓰리즘을 정치 일반과 무리하게 동일시하는 경향이 있다”며 “이 경우 포퓰리즘이 아닌 것은 정치가 아니라거나, 좌파의 포퓰리즘이 극우파의 포퓰리즘(심지어 파시즘)과 아무런 차이도 갖지 않는다는 결론으로 이어질 위험이 있다”고 꼬집는다. 하지만 이런 약점에도 불구하고 ‘포퓰리즘 다시보기’가 오늘의 변화된 지형에서 갖는 정치적 의미는 반감될 수 없다고 진 교수는 말한다. 가난한 이들을 정치의 영역에서마저 추방하고 배제하는 신자유주의의 ‘반(反)정치’가 지속되는 한 포퓰리즘에 드리운 어둠과 비합리의 그늘을 걷어내려는 사상적·이론적 신원작업 역시 꾸준히 이어질 수밖에 없다는 얘기다.(이세영기자) 

10. 03. 17.  

P.S. 라클라우의 <포퓰리즘의 근거에 관하여>는 <레닌 재장전>(마티, 2010)에 실린 지젝의 글 '오늘날 레닌주의적 제스처란 무엇인가: 포퓰리즘의 유혹에 맞서'에서 자세하게 검토/비판하고 있어서 개인적으로 관심을 갖고 있는 책이다(국내서로는 서병훈 교수의 <포퓰리즘>(책세상, 2008)이 있다). 다지원에서의 강의도 있고 해서 이달 안으로 출간되면 좋겠다. 참고로, 기사에서 오른쪽 인물사진은 '에르네스토 라클라우'가 아니라 '리처드 로티'다. 비슷하게 보여서 담당자가 혼동한 모양이다. 아래가 라클라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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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자유민주주의를 옹호하는 법
    from 로쟈의 저공비행 2010-03-19 11:53 
    지방선거를 앞둔 때문인지 정치 관련서가 많이 나오고 있는데, 정치인들이 홍보용 책자도 있지만 정치이론서나 비평서도 드물지 않다. 인터넷 논객으로도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다는 안병길 박사의 <약자가 강자를 이기는 방법>(동녘, 2010)도 그런 범주에 속한다. '대통령도 모르는 자유민주주의 바로 알기'가 책의 부제인데, 대략 '자유민주주의를 옹호하는 법'으로도 읽힌다. 포퓰리즘에 관한 참고사항이 있어서 메모해두
 
 
비로그인 2010-03-18 07: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빌딩 숲 콘크리트 바닥에 꽃들이 참 많이도 뒤엉켜 피었네^^ 참! 멋진 사진..

로쟈 2010-03-18 09:21   좋아요 0 | URL
그런 시절이 있었죠...

푸른바다 2010-03-18 20: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헤게모니와 사회주의 전략> 새번역본은 작년 출간 예정이었는데 왜 안나오는 지 모르겠군요.^^ 그 이후 많은 논의의 바탕이 된 '현대의 고전'인 것 같은데... 번역본 기다리다 지쳐서 원서라도 사서 볼까 고민 중입니다^^

로쟈 2010-03-19 10:42   좋아요 0 | URL
네, 나온다던 책 나오지 않고, 네요...

비로그인 2010-03-19 10: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쟈님~혹시,라클라우의 사진으로 업로드하신 것이,실은 리차드 로티의 그것이 아닌지요?^^;아무리 봐도 로티의 사진으로 보여서 구글에서 라클라우의 이미지를 검색해보니 아뿔싸! 둘이 너무도 닮은 얼굴이네요ㅠ 지나가는 길에,외람되이 로쟈님의 페이퍼에서 '옥의 티'하나 발견하여 폭로(?)하고 갑니다^^;

로쟈 2010-03-19 10:42   좋아요 0 | URL
한겨레 기사에도 제가 올려놓은 사진으로 수정돼 있던데요. 외모는 비슷하지만 인상이 좀 다릅니다...

비로그인 2010-03-19 11: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런가요? 다시 보니까 그런 것도 같네요. 라클라우가 좀 더 꼬장꼬장하게 생긴 것같은^^;모쪼록 로쟈님 환절기에 감기 조심하시고...참 그런데 로쟈님의 빼어날 지젝 번역은 단행본으로 언제쯤 볼 수 있을까요? 무척이나 고대하고 있습니다만^^

로쟈 2010-03-20 09:16   좋아요 0 | URL
번역은 저도 고대하고 있지만 일들의 쓰나미 때문에 좀 미뤄지고 있습니다.--;

하영-이룰수없는아련한첫사랑- 2010-03-19 17: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즘 같은 세태에서는 포풀리즘이 오히려 필요하다고 느껴지는 건 왜일까요? 누가 우리 편 좀 들어줬으면 좋겠다(?)는 느낌 말입니다.^^
내용과 관계없지만 늘 궁금했던 거 여쭙니다. 저희 같은 지식 없는 사람들이야 여기나 파란 여우님 같은 분들의 권유(?)로 책을 선택하면 되는데...(값없이 얼마나 큰 일을 해주시는지~믿을만한 분들의 소개가 있어야 안심하고 책을 집어들 수가 있게 되어 버렸으니 감사할 따름입니다.) 그런데 그 와중에도 읽을 책을 고르는 것이 쉽지가 않습니다.(워낙 부지런하신 분들이라...다 따라가려면 직업도 버리고 책속에서 헤엄치는 즐거운 삶이라야 가능할 듯합니다.) 이전부터 있던 책들, 수없이 쏟아져 나오는 번역서, 다양한 장르의 책들이 있는데 로쟈님은 어떤 기준으로 책을 선택하고 추천(-제가 여기서 대부분의 책을 추천받고 있기에...)하시는지요^^ (-믿을 만한 작가, 번역가, 출판사의 삼박자이면 금상첨화이겠요-)

로쟈 2010-03-20 09:17   좋아요 0 | URL
관심도서는 언론의 리뷰와 제 관심사에 따라 고르고 있습니다. 일률적인 기준이 있는 건 아니고요. 그냥 오래하다 보면 생기는 '감'입니다.^^;

하영-이룰수없는아련한첫사랑- 2010-03-20 09: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하..그 단순하지 않을 감...부러울 따름입니다.^^
 
로쟈와 함께하는 인문학 여행

한겨레교육문화센터의 제안에 따라 5월에도 '로쟈와 함께하는 인문학 여행' 강좌를 꾸리게 됐다(http://www.hanter21.co.kr/jsp/huser2/educulture/educulture_view.jsp?category=academyGate7&tolclass=&searchword=&subj=F90754&gryear=2010&subjseq=0001). 어제 낮에 협의를 했는데, 바로 공지가 올라왔다. 이번엔 '현대철학' 두번째 편으로 데리다부터 가라타니 고진까지 다섯 명의 철학자에 대한 '입문' 강의다(철학자는 한겨레측에서 선정했고, 교재는 내가 골랐다). 첫번째 강의의 경험을 살려서 조금 더 편하게 접근할 수 있는 책들들 골랐다. 현대철학자들이 혼자 읽기 버겁다고 생각하시는 분들은 참고하시길 바란다. 이번 강의는 5월 6일부터 5주간 매주 목요일 저녁 7:30-9:30에 진행된다.   

1. 5월 6일_ 데리다와 해체철학 : 니콜라스 로일, <자크 데리다의 유령들>(앨피, 2007) 



2. 5월 13일_ 라캉의 정신분석학 : 지젝, <HOW TO READ 라캉>(웅진지식하우스, 2007) 



3. 5월 20일_ 푸코와 지식의 고고학 : 사라 밀즈, <현재의 역사가 미셸 푸코>(앨피, 2008) 



4. 5월 27일_ 아감벤과 호모 사케르 : 아감벤, <목적 없는 수단>(난장, 2009) 



5. 6월 3일_ 가라타니 고진의 트랜스크리틱 : 가라타니 고진, <정치를 말하다>(도서출판 b, 2010) 

 

10. 03.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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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10-03-18 07: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야호! 좋아요.. 4월엔 세계문학작품을 더 읽고 이강좌 부터 본격적으로 이 책들을 파야겠어요. 지속적으로 공부에 불을 지필수 있게 해주어 고맙습니다.

로쟈 2010-03-18 09:21   좋아요 0 | URL
아, 그런 의미의 '뻬치카'이셨군요.^^

사과나무 2010-03-22 17: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쟈와 함께 하는 인문학 여행>이라....재미있기도 하고, 어렵기도 하겠습니다. 몸이 한국 땅에 있지않은 것이 아쉽군요. 올려주신 책들을 구해서 읽어야겠군요. 좋은 책소개와 서평 글들, 저를 포함한 여러 사람에게 도움이 될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