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웹진 나비에 실은 서평을 옮겨놓는다(http://nabeeya.yes24.com/Archive/archive_view.aspx?CD_MENU=41&bType=&ID_CONTENT=2574). 대니얼 레비틴의 <호모 무지쿠스>(마티, 2009)에 대한 것이다. 웹진이어서 가능한 일이지만 오전에 보낸 원고가 바로 편집돼 올라왔다.     

나비(10. 02. 11) 음악,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것

“음악은 ‘귀로 듣는 치즈케이크’다?” 
음악은 왜 존재하는가? 인지심리학자이 레코드 프로듀서이기도 한 대니얼 레비틴의 『호모 무지쿠스』(마티, 2009)보다 먼저 읽은 전중환의 『오래된 연장통』(사이언스북스, 2010)에서 진화심리학자인 저자가 던진 물음이다. “음악은 인간 문화의 중추를 이루고 있지만, 정작 음악이 어떤 목적을 수행하기 위해 진화했는가는 거의 완벽한 미스터리”라는 게 그 물음의 출발점이다. 음악이 인간의 삶에서 행해 온 역할과 음악과 인간의 공진화 과정을 살펴보는 『호모 무지쿠스』의 여정에 들어서기 전에 미리 문제의 윤곽을 살펴보는 게 좋겠다.    

           

“인류학자, 고고학자, 생물학자, 심리학자 모두 인간의 기원을 연구하지만, 음악의 기원에 대한 관심은 상대적으로 적다”는 게 레비틴의 문제의식이지만, 예외적인 인물도 있었다. 『언어본능』, 『마음은 어떻게 작동하는가』 등의 저작으로 유명한 진화심리학자 스티븐 핑커다. 그는 음악을 “귀로 듣는 치즈케이크”라고 주장하는 바람에 음악 애호가와 음악학자들에게 큰 파문을 던졌다. 맛있는 치즈케이크라면 좋다는 말일까? 그게 아니다. 전중환의 설명에 따르면, “입으로 맛보는 치즈케이크를 폭식하는 행위가 생존과 번식에 도움이 되지 않듯이, 귀로 듣는 치즈케이크를 애써 만들거나 감상하는 행위도 생존과 번식에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뜻이다. 즉 음악은 진화의 산물이 아니라 우연적인 부산물(스팬드럴)일 따름이라는 것이다. 



상황을 조금 자세히 들여다보자. 『호모 무지쿠스』의 전작이자 레비틴의 데뷔작 『뇌의 왈츠』(마티, 2008)의 마지막 장 ‘음악본능’에 나오는 얘기다. 음악 지각과 인지를 연구하는 학자들의 1997년 학술대회가 MIT에서 열렸고 스티븐 핑커가 개막 연설자로 초대됐다. 그는 언어는 명백히 진화적 적응인 반면에 음악은 부산물이란 주장을 펴면서 “음악은 인간이 수행하는 인지작용 가운데 가장 흥미롭지 않은 연구 주제”라고 못을 박았다. 자신의 『언어본능』을 인용하여 그는 이렇게까지 선언했다.   

“생물학적 인과관계로 볼 때 음악은 무용지물이다. 오래 살거나 자손을 보거나 세상을 정확하게 지각하고 예측하려는 목표를 위해 설계되었다는 징후가 전혀 없다. 언어, 시각, 사회적 추론, 신체 능력과 달리 음악은 우리 종에서 사라진다 해도 우리의 삶의 양식에 사실상 아무런 변화도 가져오지 않을 것이다.” 

이 도발적인 주장에 레비틴과 그의 많은 동료들은 당혹스러워했고, ‘음악의 진화적 기원’에 대해 재고하면서 핑커의 주장이 틀렸다는 것을 입증하고자 했다. 그들의 생각으론 첫째, 음악이 비적응이라면 음악 애호가에겐 진화적인 불이익이 있었을 것이고 둘째, 음악은 오랫동안 있어온 현상이 아니어야 했다. 하지만 음악은 인간의 문명과 역사를 같이해 왔고 보편적일뿐더러 영속적이지 않은가. 그렇다면 음악은 어떤 점에서 ‘진화적 적응’이라 할 수 있는가? 여러 가설들이 제시된 가운데, 전중환은 음악이 사회적 결속을 강화하는 기능을 한다, 음악은 남성이 여성을 유혹하기 위한 구애행동이다, 음악은 엄마가 갓난아이를 달래는 자장가에서 기원했다 등 세 가지 가설을 간단히 소개한다. 


 
“음악은 ‘부산물’이 아니다. ‘진화적 적응’의 산물이다.”
레비틴은 『뇌의 왈츠』의 마지막 장에서 조금 더 자세하게, 그리고 강하게 음악이 진화의 산물임을 주장하는데, 요점은 이렇다. 모든 인간에게서 발견되며(하나의 종에 널리 퍼져야 한다는 생물학자의 기준을 충족시킨다), 오랫동안 존재해왔고(청각적 치즈케이크에 불과하다는 주장을 반박한다), 특별한 뇌 구조와 관련된 전담 기억체계가 있으며(모든 인간에게서 관련 뇌 체계가 발달할 때 우리는 진화적 기초를 갖는 것으로 본다), 다른 종의 음악활동과 유사한 면이 있다, 그러므로 음악은 진화적 적응의 산물이다. 그의 두 번째 저작인 『호모 무지쿠스』는 이러한 주장의 확장판이다. 



‘여섯 가지 노래의 세상(The World in Six Songs)’라는 원제대로, 저자는 인류 역사가 시작된 이래로 전 세계 모든 사람들의 일상에서 중요한 역할을 해온 음악의 갈래를 여섯 가지 유형으로 나눈다. 우애의 노래, 기쁨의 노래, 위로의 노래, 지식의 노래, 종교의 노래, 사랑의 노래가 그 목록이다. 보기에 따라서는 ‘급진적인’ 이 유형분류의 근거를 그는 노래가 갖는 진화적 기능과 역할에서 찾는다. 왜 우애의 노래가 필요했던가? 근육과 동작을 서로 일치시키는 노래와 춤을 통해 초창기 인류 사이에는 강한 유대감이 형성되었을 터이므로 노래는 우애와 사회적 유대의 수단이었다. 왜 기쁨의 노래가 필요했던가? 즐거운 음악을 들으면 신경전달물질인 세로토닌의 수치가 증가하여 기분을 좋게 하고 활기를 불어넣으며 스트레스를 줄이고 면역계를 튼튼하게 만들어주었다. 왜 위로의 노래가 필요했던가? 슬픈 노래는 신경안정 호르몬인 프롤락틴이 배출되게 하여 우리의 기분을 전환시켜주었다. 왜 지식의 노래가 필요했던가? 노래와 집단 가창은 지식과 정보를 전수해주어 생존과 번식에 이득을 부여했다. 왜 종교의 노래가 필요했던가? 의식과 종교의 음악은 궁극적으로 개인에게 안전하다는 인식을 주고 자신이 행동의 주인이라는 느낌을 갖게 했다. 왜 사랑의 노래가 필요했던가? 사랑의 노래는 인간의 가장 큰 열망과 고매한 품성을 이야기함으로써 자신보다 다른 사람을 우선적으로 돌보도록 했다. 물론 이러한 능력이 없었다면 오늘 같은 사회는 만들어질 수 없었으리라는 것이 저자의 생각이다.

이러한 요지를 전달하기 위해서 저자가 동원하는 것은 뇌신경과학, 진화심리학 지식과 함께 음악 애호가이자 프로듀서로서의 풍부한 경험이다. 사실 그의 주장의 많은 부분은 믿음과 추정에 의존하고 있으며, 음악의 진화적 기원은 아직 과학적으로 확실하게 입증된 것이 아니다. 하지만 그가 책에서 예시하는 수많은 노래들은 우리가 ‘음악적 인간(호모 무지쿠스)’이며, 친구인 올리버 색스가 명명한 대로 ‘뮤지코필리아’ 곧 ‘음악사랑’이 인간의 본성을 이룬다는 점을 잘 입증해준다(인용된 노래들은 이 책의 인터넷사이트 www.sixsongs.net 에서 들을 수 있다). 대개의 사랑이 그렇지만 음악에 대한 사랑도 못 말리는 사랑이다.  



P.S. 개인적인 발견은 저자가 맨 마지막에 ‘역사상 가장 완벽한 사랑 노래’로 꼽은 마이크 스코트(아일랜드 밴드 워터보이스의 보컬리스트)의 <모두 가져와>(Bring 'Em All In)이다(http://www.youtube.com/watch?v=EuEhb35y2SM). 현란한 기타 스트러밍과 함께 흥얼거리는 노래의 가사는 이렇다.

모두 가져와, 모두 가져와, 모두 가져와
모두 가져와, 모두 가져와, 내 마음속에 받아들이게
잔챙이도 좋고 상어도 좋아
밝은 곳에 있는 녀석도, 어두운 곳에 있는 녀석도 다 가져와 
(…)
용서할 수 없는 것, 되찾을 수 없는 것을 가져와
잃어버린 것, 이름 없는 것을 가져와, 모두가 볼 수 있도록
추방당한 것, 잠들어 있는 것을 가져와
입구에 가져와, 발 옆에 놓아두게

음악을 끔찍이 아끼고  좋아하는 이라면  자신이 사랑하는 음반들 옆에  나란히 꽂아두어야 할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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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SHIN 2010-02-11 17: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헤에- "음악은 귀로 듣는 치즈케이크"라니.
전 그 표현도, 풀이도 마음에 드는데요.(웃음)

로쟈 2010-02-11 22:01   좋아요 0 | URL
보기에 따라선 비하하는 의미가 아닐 수도 있겠어요...

L.SHIN 2010-02-12 17:16   좋아요 0 | URL
네,그러니까요.